당신이 서른한 살이고 직업이 있고 결혼을 했고 남편이 있다면, 가끔씩 덫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가끔이 아니고 자주일 수 있다. 안정적으로 아이를 돌볼 사람도 없고 직장에서는 위에서 아래에서 당신을 압박하는 일이 많다. 승진은커녕 유부녀인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편은 당신이 버는 돈은 좋아하면서, 이익의 대가로서 가사노동이나 시집 동원 행사의 분담이라는 반대급부를 자발적으로 할 마음이 없다. 돈은 벌어도 쌓이는 것은 없고, 남편이 없었더라면 자녀가 없었더라면 내가 직장에서 더욱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갈등과 회의가 당신을 짜증나게 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불만을 말하지 마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부러워하는 당신 또래의 여성들이 눈을 흘길 것이다. 당신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다. 가진 것이 많으면 할 일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해라. ......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한 당신, 이제 서른한 살이다. 서른까지 남의 손에 의해 차려진 잔칫상만 받았다. 서른한 살, 이제 당신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잔칫상을 차리기 시작해야 한다. (pp.140~141)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를 읽던 중, 내 나이 서른 하나. 위 대목이 눈에 띄었다. 같은 서른한 살이라도 얼마간의 개인차야 존재하겠지만 대개는 맞는 말이고 공감했다. 특히 '덫에 걸렸다'는 생각, '갈등과 회의가 당신을 짜증나게 할 것'이라는 부분은 한 마디도 토 달지 않고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가려운 데 살살 긁어주는 것 같더니 불만을 말하지 말란다. 또래 여성들이 눈을 흘길 뿐더러 가진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할 일도 많은 법이라고 입에 재갈을 물려버린다. 더구나 인간으로서 독립을 이룩했으니 네 손으로 네 잔칫상을 차려야 하지 않겠냐며 무거운 과제를 던져준다. 일순간 비장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잠시 뿐. 과연 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했는가? 자문한 결과 글쎄, 라는 허랑한 대답만 돌아왔다.   
  
  글쓴이 말 맞다나 직업도 있고, 결혼도 했고, 아기도 낳고, 누가 보면 가진 것 많아 보이는데 나와 관련된 소유물이나 인연들이 점점 늘어갈수록 역시 나란 인간은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구나, 하는 씁쓸한 자각만 되돌아온다면? 자신의 그릇 크기를 모른 채 냅다 남들 하는 건 다 쫓아하려다 보니 뱁새가 가랑이 찢어진 격인가. 욕심은 많으면서 힘든 것은 감당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인가.     

  어느 날 문득,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넘어서 머리 끝까지 짜증이 엄습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 재능은 내 꿈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지금도 늦지 않았어, 라고 결의하다가도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싶어 마음을 한겹 두겹 접는다. 더욱이 매우 총명한 여인이었음에도 의무와 책임으로 일평생을 산 엄마를 보고 있으면 그저 입 다물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나 잘하라는, 자조 섞인 자책만 남는다.  
 
  어쩌면 좀더 젊은 날의 나는 매일매일 뭔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조금의 가시적인 발전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촘촘한 강박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키는 버얼써 멈췄지만 인생의 키가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진실, 혹은 착각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즐거운 고통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조금씩 낡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기 낳고 생긴 흰머리라든가, 메모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일쑤인 몹쓸 기억력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몽땅 털린 듯한 기분이다. 위의 글쓴이는 서른한 살의 내가 가진 것이 많다는데 이 싹쓸이 당한 듯한, 도둑맞은 듯한, 허하기 짝이 없는 느낌은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영달이가 선물해 주는 나날의 기쁨과는 별개로, -나란 여자는 엄마씩이나 되어가지고 어떻게 그것을 또 별개로 분류할 수 있는지 그조차 참 별스럽지만- 그저 요즘 내 마음의 결이 요모양 요꼴이다. 엄마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갑자기 나를 어른 취급하려고 난리법석들이지만 서른한 살의 나는 내 손으로 나만의 잔칫상을 차리라는 주문이 막막하고 버겁게만 들린다. 마치 네가 좋아하는 음식은 다 빼고 한번 자알 차려봐, 라는 말처럼 답답하고 밍밍하고 지루하게 들린다.   
 
  오즈의 마법사, 용기가 필요한 사자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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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에 카페 형식의 제과점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몸무게가 눈꼽만큼씩 빠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머나먼 지라 웬만하면 피해가려고 했는데 후텁지근한 오후, 팥빙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영달이를 어르고 계실 엄마 생각도 났다. 입구에 들어서니 먹음직스러운  갈색의 향연이었지만 엄마한테 혼날까봐 찹쌀도너츠와 팥빙수만 달랑 주문했다.  

  의자에 앉아서 포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 편에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새카만 썬글라스를 낀 아줌마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원래 주문 기다리면서 멍때리는 걸 즐기는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른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게 홀 저편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그 아줌마가 거친 음성으로 빵이 부스러졌네 어쩌네 하며 따지고 있었다. 일행인지 단발머리를 한 다른 아줌마도 뭐라뭐라 거드는 중이었다.  

  나는 왜 당연히 제과점 주인 아저씨는 살짝 뚱뚱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두 아줌마 곁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아저씨는 그냥 마른 정도가 아니라 거의 환자 수준이었다. 어깨는 뾰죽하게 올라갔고 푹 패인 볼은 주변의 오동통한 빵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아줌마들은 뭔가 시원시원하거나 너스레 섞인 응대를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창백하고 가냘픈 아저씨는 이미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지 빵 박스에 테입만 부치고 있었다.   

  썬글라스 아줌마는 소보루빵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빵이 이렇게 큰데 네살짜리들이 먹을 수 있을까, 단발머리 아줌마는 네살이 안되는 애들이 몇이나 되는지 전화해서 물어볼까, 등등 못마땅한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디 어린이집에라도 보낼 모양인 것 같았다. 아줌마들은 우유도 한 박스 샀는지 아저씨는 우유 박스에도 테입을 붙이고 있었다. 이거 상온에다 보관하면 안되죠? 내일까지 괜찮아야 하는데. 썬글라스 아줌마의 질문.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때 커피와 빵과 책이 있는 가게를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곳에 부스러기 안 나오는 소보루빵, 한여름 상온에서 자신있게 버틸 수 있는 우유를 찾는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더욱이 네살짜리들이 먹을 수 있는 크기의 소보루빵이라니. 나라면 다른 데 가세요, 는 너무 얌전하고 니가 만드세요, 그러지 않았을까.  

  이번에 이사 준비를 하면서 예전에 혼수를 했던 가구점을 다시 찾았는데 그 자리에 다른 상가가 들어와 있었다. 연락처를 찾아 연락해보니 가게가 잘 안 되어서 그만두었단다. 엄마는 그 내외 인상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면서 우리야 적정 가격에 혼수 잘해서 좋았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능수능란하지 못해서는 장사로 돈 벌기 어렵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기억하고 연락해줘서 고맙다면서 다른 가게를 소개했는데 영악한 엄마는 그 아저씨마냥 참해 보이는 아저씨가 운영하는 다른 가게를 뚫어놓으셨다. 나중에 영달이 가구도 거기서 하라면서.  

  내가 원래 좀 가냘픈 사람들만 보면 무턱대고 마음이 약해지긴 한다만, 오늘 제과점 아저씨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서 채소 늘어놓고 파는 쌍둥이 아버지는 하도 말을 잘해서 꼭 오이 사러 갔다가 가지까지 사게 만드는데 이 아저씨는 멀뚱멀뚱 할 말만 하고 있으니, 더욱이 우리 동네는 학교가 많아서 아줌마들 천지다. 밥 안 하고 빵 사먹으러 나오는 것도 아줌마들이고 아이들 간식빵 사러 나오는 것도 아줌마들이다. 종방된 시트콤 '태희, 혜교, 지현이'의 태희, 혜교, 지현이고픈 아줌마들이 넘쳐나는 곳이란 이야기다. 이런 동네에서 빵장사를 하려면, 적성에 안 맞아도 여차저차해서 개업을 했다면, 좀 변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살을 좀 찌워 인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으려나.  

  비단 오늘 일 뿐만이 아니고 간혹 이런 비슷한 상황을 우연찮게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장사나 해볼까, 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한다. 가히 소비자 전성시대라지만, 그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같은 소비자 입장인데도 니가 만드세요, 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인간들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날은 덥고 불쾌지수 팍팍 솟는 나날들, 나도 이사 준비하느라 거래 중인데 돈이나 지불하면 됐지 스트레스까지 얹어주는 소비자는 되지 말아야겠다.     

  어쨌거나, 팥빙수와 찹쌀도너츠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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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0-07-0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희, 혜교, 지현이에 나오는 아줌마들이라니...ㅎㅎ. 적어도 그런 아줌마는 되지 말아야징. 장사는 정말 아무나 하는게 아니죠. 전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아용.

깐따삐야 2010-07-05 13:40   좋아요 0 | URL
장사는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제과점 아저씨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몰라요.ㅠ

Mephistopheles 2010-07-0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난 이런 장사 못할꺼에요. 아마 소보루빵 어쩌고 4살짜리 애들이 먹을 수 있냐 어쩌고 하면...애들 입을 찢으세요 그럼 한 입에 꿀꺽입니다. 이런 말 하고도 남을 성질머리에요.

깐따삐야 2010-07-05 13:41   좋아요 0 | URL
헉!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메피님 무섭...;;

skul23 2010-07-02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세상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는듯..아저씨가 너무 안됬어요 ㅠㅠ...근데 팥빙수가 먹고 싶네요 이 시간에 +ㅁ+...크큭..

깐따삐야 2010-07-05 13:42   좋아요 0 | URL
덩치라도 좀 있으셨다면 덜 안되게 보였을텐데. 너무 홀쭉하셔서 안쓰러웠어요. 빵 많이 드시고 살 좀 찌셨으면 좋겠어요.

도넛공주 2010-07-02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빵집.........남의 일이 아니네요 이거.

깐따삐야 2010-07-05 13:45   좋아요 0 | URL
아, 도넛공주님도 빵 굽는 일을 하시죠? ^^ 근데 대부분의 손님들은 저렇게 유별나지 않을 것 같아요. 대개는 조용히 빵을 고르고 계산을 하고 많이 파세요, 하고 나가주지 않을까요?

조선인 2010-07-02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벌써 팥빙수를 드셔도 되나요? 조심하세요. 전 큰 애 낳고 부주의해서 이가 여러 군데 깨져나갔어요. 잉잉

깐따삐야 2010-07-05 13:48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출산하고 얼마 안되서 반팔 입고 한의원 갔다가 의사샘한테 혼났죠.ㅠ 낼모레면 백일인데 저는 백일 전에 먹어서는 안될 찬음식들을 이미 잔뜩 먹어버렸답니다. 나중에 고생하면 어쩌죠.

마늘빵 2010-07-0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사는 정말 함부로 할 게 못된다눈... 온갖 일들을 다 치를 각오를 해야 할 거 같아요. 여기 둥글 저기 둥글하는 성격도 필요하고. 내 성격엔 이런 장사는 못하겠다. -_- 그래도 혹시 누가 빵집 차려주면 변할지도 몰라요.

깐따삐야 2010-07-05 13:50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에요. 방송에 나오는 대박집들 보면 정말 온갖 일들을 다 치르고도 끊임없는 인내와 노력을 거듭하여 결국 성공했더라구요. 장사나 해볼까,로 시작했다가는 쪽박 차기 십상이라는. 저도 혹시 누가 빵집 차려주면 일단 거절하진 않겠지만.ㅋㅋ

보석 2010-07-02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소비자 권리도 중요하지만 이건 좀;;;

깐따삐야 2010-07-05 13:52   좋아요 0 | URL
우리 동네에 저런 아줌마들이 우글우글한다는 게, 누군가의 눈에는 나도 볼썽사납게 보일지 모른다는 게, 여러가지로 짜증납니다.

레와 2010-07-0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절묘한 제목! ^^:

깐따삐야 2010-07-05 13:55   좋아요 0 | URL
본인들 귀찮으니까 사먹이는 거면서 엄청 따지더라구요. 하긴, 저런 아줌마들이 더 따져요.

비로그인 2010-07-02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난 장사 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

그런데 원래 살이 안찌는 사람들이 있어요. 거의 계속 그 체중을, 무슨 짓을 해도 도돌이표처럼 찍는 사람. 그 아저씨도 그런 분일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들 등쌀에 어찌 하루를 보내셨을꼬...

깐따삐야 2010-07-05 14:0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장사하면 망하겠구나, 하는 자각.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나름대로 불만일텐데 불어난 체중 때문에 우울한 저는 딴나라 얘기 듣는 듯 부럽네요. Jude님은 원래 체중으로 다 돌아오셨죠? 아, 저는 처음에 확 빠진 후 계속 제자리 걸음이에요. 그나저나 저런 손님 왔다가면 하루 종일 재수 없을 것 같아요.
 

  어제 7시 반쯤 마트에 갔는데 줄선 사람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다들 축구 보면서 먹을 야식거리들을 사가는 것 같았다. 집으로 오는 길, 빨간 티셔츠 입은 학생들이 두런두런 줄지어 지나가고 거리는 또 다시 한적해졌다.  

  8시가 넘자 축구가 시작되고 초저녁부터 잠이 든 영달이가 이렇게 고마울 데가! 요즘 영달이는 친정엄마가 데리고 주무신다. 엄마는 아르헨티나면 우승 후보 아니냐며 4대 0으로 안 지면 다행이라고 썩소를 날리신 후 영달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워낙 흥이 좋으니 이변이 일어나기를 바랬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자 천장이 들썩들썩. 박주영이 자책골을 넣으면서 윗층에서 난리가 났다. 원래 지난 그리스전 때부터 온 아파트 단지가 요동을 쳤지만 어제는 더욱 심하더라는. 특히 윗층 아저씨의 함성 소리가 엄청났다. 요즘 날이 더워서 다들 창문을 열어놓고 살다보니 더 생생하게 들렸다. 

  윗층 응원단들은 끊임없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굴러대고 이청용이 한 골을 만회하자 저쪽 동네에서는 팡팡, 축포가 터진다. 전후반 사이의 짬에는 하늘에서 오색찬란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멀리서 빠방빵 빵빵, 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린다. 한 마디로 아주 난리가 났다.  

  결국 쌕쌕 잠이 들었던 영달이,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소리 날까봐 문도 못 열고 베란다 쪽으로 나가서 안방을 들여다보니 엄마가 영달이를 안고 어르고 계셨다. 윗층 아저씨, 왜이렇게 열정적이냐. 그러게나 말여요.  

  후반전이 시작되고 염기훈의 왼발 슛이 골대를 비껴나가는 순간, 여기저기서 아효~ 아이쿠~ 하는 소리들이 들려오고 윗층 응원단은 거의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질러가며 난리법석이었다. 나도 이 시점은 무진장 아쉬웠다. 그래도 영달이가 다시 깰까봐 크게 소리도 못 내고 마냥 투덜투덜.  

  연이어 골을 내주면서 동네는 조용해지고 윗층 아저씨 및 응원단도 잠잠해졌다. 나도 괜히 다른 채널 돌려보면서 체념 모드. 메시가 대단한 선수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고 해외 무대에서 뛰어본 경험이 없는 국내파 선수들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 더욱이 상대는 아르헨티나였으니.   

  그나저나 월드컵은 흥미진진한데 영달이가 잠을 못 자서 걱정이다. 낮부터 동네가 들썩거리기 시작하면 낌새를 아는지 심란해한다. 특히 윗층 아저씨, 조금만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다. 여기도 합동 응원하는 곳 많은데 왜 늘 안방에서 응원하시는지도 알 수 없고. 그 열정과 목청이면 카메라에도 잡히실 것 같던데. 우리 영달이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기 키우는 집들은 우리나라 경기 있을 때마다 좀 곤란할 것 같다.  

  그래도 16강을 갔으면 좋겠다. 나이지리아도 아마 죽기 살기로 나올텐데 화이팅이다. 다음주 수요일엔 윗층 응원단이 야외로 나가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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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6-1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이 들썩거리니 산에 있는 짐승들은 무슨 일인가 할 꺼에요. ㅎㅎ
이것들이 다 미쳤나 하겠죠?
아기들은 엄마아빠의 때아닌 소리에 놀라 울고.....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는 경끼해도 좋으니 대한민국을 모두 미치게 만들어 줬음 좋겠어요.
대한민국 홧팅입니다. ^*^

깐따삐야 2010-06-18 11:01   좋아요 0 | URL
산짐승들까지 붉은 악마 티셔츠 입고 응원하는 상상을 해보니 웃음이 나네요.ㅋㅋ
노노, 그래도 경끼는 안됩니다.-_- 근데 이길 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10-06-18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2년엔 주니어가 마님 뱃속에 있을 때였는데..한국팀이 이탈리가 꺽을 때 그 부른배를 잡고 마님이 날라올랐죠.

비연 2010-06-18 23:47   좋아요 0 | URL
우하하하! 주니어는 뱃속부터 축구태교를..!!

깐따삐야 2010-06-21 10:02   좋아요 0 | URL
이탈리아전 하니까 공격수 비에리가 떠오르네요. 우람한 덩치로 우리 선수들을 툭툭 치고 나가던, 그러면 호리호리한 우리의 수비수들, 거의 악으로 깡으로 막아내고. 갑자기 눈물이 앞을...;; 날아오를만한 경기였어요.^^

무스탕 2010-06-1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우리나라 경기 끝나고 나이지리아랑 그리스 경기도 끝까지 봤다죠 ^^;
2승이었으면 크게 신경을 안썼을텐데 어제 그렇게 됐으니 다른 나라들이 어찌하는지 무지 신경 쓰인다는..

깐따삐야 2010-06-21 10:04   좋아요 0 | URL
그러게 복잡하고 머리 아프게 따지지 않아도 될 정도의 실력은 언제쯤일까요.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정말 명성값 하더군요. 아르헨티나나 스페인, 두 나라 중 하나가 우승할 것 같아요.

레와 2010-06-18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2층에 사는데요, 불현듯 1층 분들이 걱정되고...으흐흐흐 ;;



깐따삐야 2010-06-21 10:05   좋아요 0 | URL
레와님도 그 시끄럽다는 윗층 응원단이시군요.ㅋㅋ^^
 

  요즘 엄마가 반찬 만드시는 것을 곁에서 눈여겨 보고 있다. 날름날름 얻어다 먹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오늘은 갈비찜을 배웠다. 고기를 한번 삶아내서 기름을 떼어내고 간장, 매실즙 등을 넣고 조물조물. 나중에 성질 급한 우리 영달이가 "엄마, 그냥 음식하지 말고 할머니한테 해달라고 하면 안돼?" 이러기 전에 하나씩 배워두어야지. 

  어제는 엄마가 올갱이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푸른 빛을 보자 떠오르는 일화. 

  "엄마, 그 xx가 말야. 어느 날, 올갱이 해장국을 보더니 왜 올갱이가 파랗지? 이러는 거야."  

  "아니 그럼 올갱이가 파랗지." 

  "왜 갈색이 아니고 파랗냐고 그러는 거야. 욱끼지욱끼지?" 

  "껍질이 갈색이지 속까지 갈색이냐. 하여간 모자란..." 

  "그래서 내가 서빙하는 아줌마한테 물어봤잖아. 아줌마, 왜 올갱이가 파래요? 그러니까 아줌마도 엄마처럼 아니 그럼 올갱이가 파랗지, 이러는 거야."

  "하여간 하나가 모자라면 나머지 하나까지 같이 모자라진다니깐. 너 연애한 걸 각본으로 쓰면 칸영화제에 내보내도 될거다." 

  "칸영화제? 하하, 정말정말." 

  영달이가 두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데 엄마와 나는 영달이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 이야기를 했다. 우리 모녀는 이따금 나의 어리석은 연애사를 화제 삼아 나의 자학과 엄마의 구박이 오가는 이상한 SM을 즐긴다.  

  "엄마엄마, 그때 내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너랑 나랑 이 세상에 없다."    

  "하긴, 난 버얼써 엄마 손에 죽었겠지!"

  엄마는 참을성 있게, 그야말로 질긴 인내심을 갖고 무지몽매한 나를 지켜보았고, 지켜주었다. 요즘 무럭무럭 커가는 영달이를 보고 있으면 막막해질 때가 있다. 주변의 사례들을 보아하니 자식은 곱게 키워도 문제, 터프하게 막 키워도 문제, 그저 이래저래 속끓이게 되어 있던데 내가 과연 엄마처럼 도를 닦듯 묵묵히 기다리고 인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집집마다 어느 정도 차이야 있겠지만 대개 자식 교육은 엄마 몫이다. 특히 딸은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다. 그리고 두 여자는 필연적으로 부딪친다. 세상에 둘도 없는 한편이 되었다가도 어느 때는 서로의 가슴에 대못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영달이는 제 아빠를 쏙 빼닮았다. 영달이 아빠는 본래 유한 사람이고 나날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나와 충돌하지 않는 법까지 몸소 터득했다. 하지만 영달이는 그저 딸이라는 입장만으로도 나와 부딪칠 것을 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요즘 엄마는 내게 참을성을 강조하신다. 어쩌면 내게 있어 가장 취약한 부분, 즉, 구멍이라고도 볼 수 있는 심성 중 하나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어쩌고 하면서 투덜거리면 심성도 연습하면 되는 거라고, 더구나 자식 일에 있어서는 참을성 제로인 사람도 잘 참게 되어 있다는, 지금으로선 그저 아리송한 이야기를 하신다.  

  지난 학기 클럽활동 부서 중에 심성수련반이 있었다. 학교로 돌아가면 나도 그런 반을 운영해볼까 싶다. 사람들이 막 비웃겠지만 그 또한 참아야 하리. 계획 짜고 지도안 만들고 자료 준비하고 하다보면 참을성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무엇이든 기다리는 것이 싫어서 배송조회 클릭이 취미가 되어버린 내게 참을성이라니, 난제이자 화두다.    

                             그러고보니 요즘 영달이한테도 빨리 크라고 성화다.  

                        앞으로는 자장가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로 바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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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0-06-10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안녕안녕~ *^^*



깐따삐야 2010-06-11 08:14   좋아요 0 | URL
저러다가도 갑자기 으앙~ 합니다.^^

다락방 2010-07-02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똥말똥. 아이가 엄마를 보는걸까요? 사진 찍어주니까?
:)
 

  그러니까, 우리는 올해 영달이라는 딸내미를 얻었고 조만간 이사를 간다. 결혼하고 나서 맞는 큰 변화들이다.    

  결혼한 지 채 2년이 안 된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살았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남편은 엊그제 저녁, 해물탕의 해물을 건져먹으며 내게 휴대폰을 건넸다. 당신이 이런 문자를 보냈었다, 고. 막 연애를 시작할 즈음 주고받은 메시지였다. 한 건을 읽고 나서 민망한 듯 손을 내두르자 또 다른 한 건을 보여준다. 얼굴이 훅훅 달아올랐다. 아니 왜 이런 걸 여태 보관하고 있어요? 내가 의아한 듯 불만스런 목소리로 묻자 그가 말했다. 가끔 꺼내보면 힘이 나니까. 요즘 나는 안 그래도 눈물이 많아졌다. 순간 눈물이 핑그르르 고였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해물탕에 더 바짝 다가앉아서 내 얼굴을 감췄다.  

  나는 매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서도 세상은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을 읽다가 저 문장이 턱, 마음에 걸렸다. 나 역시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은 나를 제외시키고도 그 자체로 완벽해 보였고 그 안의 나는 고독하고 무력한 정물 같았다. 그렇듯 어리석고 외로웠던 시절, 남편과 나는 같은 건물에서 공부를 했고 그가 자취를 했던 동네에 내가 자취를 하러 들어왔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창 나이 먹어 연애하는 중에 알았다. 한번쯤 마주치지 않았을까. 어쩌면 여러 번 마주쳤을 테지만 그때는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시절, 많은 술을 마셨다 했고 나는 많은 책을 읽었다. 그는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했었고 나도 한 일년쯤 방황했다. 그는 우리 학번은 마냥 애기로 여겨졌다 했고 나는 당신 학번은 느끼한 아저씨 부대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는 독서클럽 회장을 역임했다고 하여 내게 큰 웃음을 주었고 내가 동아리 선배를 뻥, 찼다고 하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 세계를 지나와 두 사람이 드디어 서로를 알아보았을 때, 우리는 각자의 어리숙함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 그와 나, 둘 중 한 사람이라도 현명했다면 우리는 아마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 이후, 온 우주를 채우고도 남을 듯 했던 내 감정샘은 조금씩 말라가는 것 같다. 대화는 용건 중심, 일상은 계획 중심, 요즘은 영달이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감기에 걸린 그가 코를 훌쩍이며 케케묵은 영구메시지를 찾아보고 있을 때 나는 육아대백과를 찾아 읽거나 기저귀 쇼핑몰을 기웃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풍경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대학 초년생 시절, 친구 E와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아기를 업고 시장가방을 든 채 길을 건너는, 지금 우리 또래의 여인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저렇게 될까봐 겁나. E는 아무 스스럼 없이 그렇게 말했다. 조금 실망했지만 솔직한 반응이기도 했다. 갓 스무살이었으니 말이다. 

  그처럼 고개 빳빳이 세우며 도도하게 뇌까리던 시절은 멀찌감치 흘러가 버리고 더 이상 삼인칭관찰자 시점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매일매일의 일상을 탈없이 꾸려가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좀더 어린 날의 나는 컨디션에 따라 주어진 하루를 그냥 방치한 적도 많았다. 후회도, 피해도, 내 몫이었고 그것은 차라리 향락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내 삶은 가만히 있지 않을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루하루가 날마다 똑같이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듯 똑고르게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참 많은 것들과 싸워야 한다. 얽혀 있는 일, 사람 관계에서 오는 피로와 불쾌를 견뎌야 하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우울도 극복해야 한다. 그 와중에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한 대비도 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사람을 구하려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 뿐만 아니라 그저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남편에게는 아쉽거나 갸우뚱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항상 결혼 전의 그 마인드라면, 아마 살기 힘든 건 남편 쪽일 것이다. 나도 손가락이나 놀려가며 문자나 예쁘게 보내면 되는 시절이 가끔 그립다.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면 속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다. 그런 행운은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일텐데 우리가 그처럼 복받을만한 일을 한적이 있는가.  

  요즘 나는 영달이가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기쁘다. 당연한 세계에 길들어가는 일이 처음으로 싫지 않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늘상 나를 괴롭혀대던 원인불명의 노이로제에서도 점점 해방되는 것 같다. 무능한 엄마에게 용기를 주는 아이, 아빠를 닮아 아빠를 잊지 않게 해주는 아이, 우리는 너에게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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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6-0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는.나.는.오.죽.하.겠.수.^^

깐따삐야 2010-06-07 23:10   좋아요 0 | URL
이제는 모든 관심을 월드컵으로! ㅋㅋ

레와 2010-06-01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깐따삐야 2010-06-07 23:10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