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양은 각별한 동생이다. 외삼촌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사연과 추억이 많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 페이퍼에 간간히 등장했고 그때마다 영악하고 깜찍한 미달이스러움을 보여주었다. 동글납작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매사 어리버리한 언니를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언니, 왜 이렇게 생각이 없어, 는 나를 향한 그녀의 단골 멘트였다.
그런 그녀가 몰라보게 자라서 나타났다.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던 때가 엊그제 같고 중학생이 되고난 후에도 몇 번 놀러와서 같이 손잡고 다녔는데 얼마 못보던 사이, 다 큰 숙녀가 되어 찾아왔다. S가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훤칠해진 실루엣에 영달이를 재우다 말고 깜짝 놀랐다.
"언니, 나 많이 컸지?" "응, 길에서 보면 정말 몰라보겠어. 이뻐지고 키도 크고!" "웅, 내가 좀 예뻐졌어. 근데 언니는 왜 이렇게 살이 많이 쪘어. 허벅지 좀 봐. 하체비만은 정말 최악인데." 으음... 말하는 거 보니 S양이 맞긴 맞구나.
S양은 삐까뻔적한 캐논 DSLR 카메라를 들고 와서는 자고 있는 영달이, 하품하는 영달이, 쫑긋거리는 영달이 등을 부지런히 찍었다. 백화점 행사에 남녀생활백서의 정가은이 왔었는데 마른 거인, 멍청한 여신 같았다, 하지만 실물은 정말 쩐다면서 직접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선생 언니답게 공부하기는 힘들지 않니,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니 하고 싶은 건 잘 모르겠지만 대학은 무조건 서울로 갈 거란다. 너는 그림도 잘 그리고 손재주가 있으니 디자인 같은 걸 배워도 좋겠다고 말하니 아, 그런 건 싫어, 라고 잘라 말한다. 기저귀를 갈 때 영달이가 짜증을 내려고 하자, 아기들도 기저귀 갈 때 수치심을 느낀대, 라고 말한다. 난생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우나, 근데 넌 그런 거 어디서 들었어? 내가 아기를 이뻐하다 보니 육아에 대해서도 좀 알지. 오옹...
그녀는 내게 휴직을 했냐고 물으며 자기가 중학생이라 잘 안다면서 요즘 아이들 다루기 힘들지 않냐고 도리어 나를 염려했다. 역시 우리의 구도는 바뀌지 않았다. 엄마가 늘상 네가 S만 같으면 뭐가 걱정이냐고 말씀하시듯, 그녀는 모자란 언니가 멋도 모르고 결혼을 해서는 아기까지 낳고 머잖아 직장에도 다시 나가야 하니 딱하기 이루말할 데가 없었는가 보다. 설마 남자친구는 있느냐고 했더니 없다길래 너는 그래도 눈이 높아서 다행이라고 했더니 아냐아냐, 나도 언니만큼이나 눈이 낮은 것 같아, 라고 말한다. 웁쓰...
이런 걸 보면 영락없는 S양이 맞는데 훌쩍 성숙해진 겉모습 이면에 사춘기의 웅크린 그늘이랄까, 아마도 내 시야를 넘어서는 마음 자리 어딘가에 담고 있을 고민이랄까, 과거에 느끼지 못했던, 느꼈더라도 그때라면 바로 질러가서 말했을 법한,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러면 안될 것 같은, 무거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내 손 안에 쏙 들어오던 손은 큼직한 카메라를 능숙하게 다룰 만큼 커졌고 쑥쑥 자란 키만큼 발도 길어졌는데, 나를 향해 오감을 다 열고 안겨오던 S양은 저만치 작아진 모습으로 멀어진 것 같았다. 방학 때면 조금이라도 더 놀다 가기 위해 갖가지 핑계를 생각해내곤 하더니 이제는 가자, 라는 말에 아무 망설임이 없다.
그녀가 돌아간 후, 내가 남편과 아이가 생겨서 거리감을 느끼나, 라고 생각하다가 그런 면도 없지 않겠지만 아, 그럴만한 나이가 되었구나, 한다. 언니는 나랑 안 놀아주잖아, 라면서 서운함을 토로하던 S양이 이제 혼자 있는 게 참 좋다고 말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아마 혼자 있는 게 좋고 나이 먹은 언니보다는 또래 친구들이 더 좋겠지. 그 자체로 참 다행이고 성장은 감격스러웠지만 마음 한켠 괜히 짠했다.
그녀의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영달이를 키우면서 네 생각을 많이 한다고, 너처럼 똑똑하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너는 영달이보다 더 예쁘고 착했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S의 언니라기보다는 영달이 엄마인 것이 자꾸만 더 분명해지는 느낌이 들어 공연히 미안했다. 아마도 S양은 안 그래도 되는데 역시 언니는 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S양은 올해 개명을 해서 M양이 되었지만 내게 그녀는 포에버 S양이다. 그녀 왈, 예쁜데 촌스러운 이름이지만 S는 우리의 지난 시간, 예쁘고 촌스러운 추억의 주인공이다. 나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언제든 필요할 때 달려갈 수 있는 언니이고 싶다. 일시적 감상이 아니고 그렇게 할 것이다. S는 아마 됐거든, 제발 언니나 좀 잘 살아, 라고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