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밥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중국 속담이라던가.   

  영달이가 아파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나는 밥을 먹어야 했다. 밥이 넘어가냐. 밥이 넘어가. 가슴은 미어지고 입은 깔깔해도 밥은 넘어가더라. 어쨌거나 밥을 꾸역꾸역 넘겨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힘을 내야만 했다. 나는 엄마니까.   

  병원을 세 군데나 돌았다. 가장 일찍 문을 여는 내과, 단골 소아과, 그리고 입원실이 갖춰진 소아병원. 소아병원에 가서야 정확한 병명을 알았고 소화가 잘 된다는 특수분유와 약을 지어왔다. 다행히 영달이는 물이든 분유든 조금씩이라도 먹으면서 앓았다. 양볼이 석류마냥 시뻘개질 정도로 열이 오르는데 입을 앙 다물고 고통을 참다, 울다를 반복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특별한 치료약이 없다는 말에 눈앞이 아찔했는데 시간이 약인지 이제는 속이 많이 가라앉은 것 같다. 아침엔 식탁 근처에 다가와 입맛을 다시기도 하고 짝짜궁 시늉도 해가며 평소처럼 놀기 시작했다. 네 웃는 모습에 나는 눈물이 나더라. 그간 못 먹은 것을 생각하면 이것저것 먹이고 싶은 것이 많지만 당분간은 자제하기로 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는 모든 원인을 추측하고 되짚어가며 자책도 하고 공연히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애 키워준 공은 없다더니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아이가 아프니 모두가 죄인 같았다. 

  의사들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고 예민해진 나는 네 자식이 아니니까 그러냐, 싶다가 인터넷도 찾아보고 다른 엄마들의 얘기를 듣고는 이맘때쯤 아기의 면역력이 떨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한 차례씩 앓고 지나가는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내 아이만은 아니길, 했던 것이 진심이고 앞으로도 아프지 않고 컸으면, 하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지만 아이 키우다 보면 계속 겪어야 할 일이라고 덤덤히 얘기하는 주변 부모들의 말에 쪼그라드는 심장을 움켜쥐며 끄덕끄덕.  

  엘리베이터 안에서 머리를 쓸어올리다가 거울에 비친 흰머리 몇 가닥을 발견하곤 아, 내가 속을 썩긴 되게 썩었나 보다, 자각했다. 한 이틀 사이에 이렇게나 허옇게 새다니. 영달이가 흠씬 가벼워졌다며 안타까워하는 내게 남편은 체중계에 혼자 오르고, 다음번에 영달이를 안고 오르면서 우리 영달이가 여전히 짱짱한 소녀라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체중은 많이 안 빠졌어도 살이 이렇게나 물렁거려졌다며 어떻게 도로 찌우지, 동동거렸다. 항상 내 몸무게는 안 빠진다고 툴툴거리지만 자식은 뚱뚱하고 날씬하고 못생기고 예쁘고를 떠나서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이것이 부모 마음인가 보다.  

  오늘 아침엔 미역국에 밥을 말아 익어가는 김장김치와 천천히, 모처럼 맛이 있는 식사를 했다. 못 먹는 아이 앞에서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고역이었는데 영달이의 웃는 얼굴을 보니 밥이 부드럽고 따듯하게 넘어갔다. 영달이는 기운이 좀 생기니 평소처럼 고집도 부리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조차도 반갑고 고마워 우리 딸, 다시 살아났네, 하며 좋아라 했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침착하고 의연한 엄마가 되기는 글렀다.  

  오전 TV 프로그램에서 쪽방촌 할아버지를 보았다. 불편한 몸으로 리어카를 끄는데 저 할아버지도 나고 자랄 땐 엄마의 귀한 자식이었을텐데 하는 생각. 아이가 한번 아프고 나니 남이 남이 아니고 남이 남처럼 안 보인다. 그리고 초조해하던 내게 소아병원을 알려준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키 큰 아기 엄마, 예방접종 하러 가서 다시 보게 되면 꼭 고맙단 말을 하고 싶다. 시의적절한 조언으로 은혜를 입어 우리 영달이가 조금 덜 아파도 되었다. 통성명도 안 했고 사는 곳도 모르지만 같은 아기 엄마라는 끈만으로도 위안이 되었고 도움을 입었다. 얼굴과 눈빛을 기억하니 꼭 한번 더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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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12-01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효~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바이러스 감염이었나요? 아이가 그렇게 아파서 힘들어하고 병원에서도 따로 치료약이 없다고 한걸 보면요. 이제 좀 나았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저 사람도 누군가에게 귀한 자식이었을텐데...' 이 생각하면 마음이 금방 뭉클해지는 경험 저도 아이 낳고서 많이 하는데 일부러 그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이 미워지려고 할때, 저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세상에 누구보다도 소중한 아들이고 딸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잠시 풀어지더라고요.

깐따삐야 2010-12-02 12:41   좋아요 0 | URL
네. 감기인줄 알았는데 혹시나 해서 검사해 보니 장염이었어요.
hnine님처럼 저이도 태어날 땐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을텐데, 하는 연민만 가지고 산다면 세상의 험악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사라질까요. 그런데 사람이란 그때 뿐으로 그칠 때가 많아서 이렇게 절절하다가도 또 잊고 오만해지니 참 갈 길이 멀죠. 에효-

다락방 2010-12-0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가 잠깐 아팠을때 여동생이 병원에 갔는데 닥터가 완전 대수롭지 않다는듯 대꾸해서 그날 여동생이 상처를 많이 받았더라구요. 넌 자식도 안낳아봤냐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고 하더라구요.

영달이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깐따삐야님과 고기를 먹죠. 고기 드세요, 깐따삐야님. 어휴, 깐따삐야님 얼마나 애가탔어요, 어휴.

깐따삐야 2010-12-02 12:5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이모가 되셨으니 가까이에서 이런 일들 많이 보시겠어요. 아픈 아이 안고 있는 엄마 마음이 다들 그런가 봐요. 저도 그 담담한 대꾸들이 정말 야속하고 답답했는데 한편으론 애끓는 엄마들 다 받아주려면 끝도 없지 싶어요. 제가 학부모들과 상담하다 오후 6시에 목이 다 쉬어가지고 퇴근한 적이 있거든요.ㅠ 그래도 의사샘들, 기왕 말하는 거 엄마들 심정 좀 헤아려가며 말해주면 좋을텐데 말이죠.

영달이는 거의 나아가는 중이에요. 고깃국물로 이유식 만든 것을 좋아해서 빨리 해먹이고 싶어요.^^

Mephistopheles 2010-12-01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엄마같은 깐따삐야님...참 세월 순식간이네요. 여고생같았던 깐따삐야님이 이젠 애엄마라니...^^

깐따삐야 2010-12-02 12:53   좋아요 0 | URL
여고생이요?! 메피님한테 간장게장 얻어먹겠다고 재롱 부리던 세월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의 저는 이렇답니다.^^

레와 2010-12-0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저런..
빨리 나을거에요. 응! 빨리 나을거에요.

깐따삐야 2010-12-02 13:10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레와님. 영달이는 많이 좋아졌어요. 그런데 안심이 안 된다는...ㅠ

순오기 2010-12-01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달이가 좋아졌다니 다행이에요. 한시름 놓아도 되겠네요~~~~
그럼요, 아이가 아파도 엄마는 꾸역꾸역 밥을 먹고 힘을 내야지요.^^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해당되지요?
아이가 아파봐야 진짜 엄마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던가요?
관념이 아닌 경험으로 모성을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그런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정말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았다면 죽었나 깨나도 모를 감정의 파도가 아주아주 많더라고요.^^

깐따삐야 2010-12-02 13:05   좋아요 0 | URL
밥이 잘 안 넘어가는데 엄마가 이럴수록 더 먹어야 한다고.-_-;

관념이 아닌 경험이라는 말씀, 정말 그래요. 떡 다 뺏기고 마지막 몸둥이까지 다 뺏기고도 집에 오려고 했던 해님달님 엄마의 마음까지 이해된달까요.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다 깨나도 몰랐을 감정이죠. 엄마가 너랑 똑닮은 딸 낳아서 키워보라더니 아주 눈물겹게 실감하는 중이에요. 셋이나 낳아 잘 키워내신 순오기님은 정말 정말 대단하세요!

비로그인 2010-12-0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 님. 난 모성애라는 게 없나 봐요....
+정작 해야 할 말을 잊을 뻔.
영달이가 좋아졌다니 진정 다행입니다.

깐따삐야 2010-12-02 13:09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요. 저는 Jude님이 바다에 관해 쓰셨던 글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걸요. 제가 영달이를 키우며 쓰는 글들이 많이 비슷하지 않던가요? 엄마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Jude님의 글을 기억해요. 정말 그렇겠죠? 그러니 우리 행복해지도록 해요.^^

헤라 2010-12-0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늘 보기만하고 지나가는 객인데 오늘은 울 큰딸 출산할때가 생각나 댓글다네요...^^ 수술을 해서 낳았는데 모체에서 벌써 장염에 감염되어 태어났다고 해서 하루 있다가 입원했네요..ㅠㅠ 몸조리고 뭐고 병원복도에서 날밤새고 울고 불고...의사도 간호사도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안하고 며칠 지나면 괜찮다는 말만 하고...그 작은 손등위에 커다란 주사바늘이 꽂혀있는데 눈물이 그냥 줄~줄~줄~~ 나더군요...ㅎㅎ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어요^^ 이런저런 노하우? 덕분에 둘째는 쫌 수월하게 키우네요...ㅋㅋ 깐따삐야 님도 옛일 생각하며 웃을 날이 곧.....너무 빠른가요....?ㅎㅎ

깐따삐야 2010-12-03 13: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헤라님.

나뭇잎 만한 손등에 주사바늘이라니. 얼마나 마음 졸이셨을지 눈에 선하네요. 그렇듯 잠깐 아파도 지옥인데 평생 아이의 병을 일상처럼 안고 가야 하는 부모들을 생각하면 손발에 힘이 빠져 아무 말도 못하겠어요.
옛일 생각하며 웃을 날을 바라기엔 저는 영달이 하나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난 항상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으면서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좀 약해지고 싶었단다. (p.63)

  어젯밤 책을 읽다가 위의 구절에서 멈칫,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엄마도 그렇지 않을까. 책 속에 묘사된 페터 한트케의 어머니와 대한민국의 우리 엄마는 기질 상 매우 다른 사람이지만 '어머니'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겹치는 면도 많았다. 촘촘하고 건조한 레포트 같은 이 소설은 작가가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더 슬픈 인상을 주었다.

  며칠 전 나의 열 마디로는 꿈쩍도 하지 않던 남편이 엄마의 나직한 한 마디로 신선한 변화를 보였다. 그의 눈빛과 몸짓이 동시에 전율했던 것을 잊지 못하겠다. 엄마는 신기해하는 내 반응에 잔소리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며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백년 묵은 신령님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렇지! 하면서도 몰라서 못하나, 못해서 못하지, 했더랬다.  

  엄마를 보면 어른 노릇이라는 게 참 쉽지가 않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어린 것들이 어른 대우 안 해준다고 징징대는 나이 허투루 잡순 어른들도 종종 보았다. 그렇듯 서운한 것을 서운하다고 거침없이 내색할 수 있는 어른들은 어찌보면 그릇이 딱 고것 뿐이라는 건데 그 어린 것들에게 부담갈까봐 먼저 배려하고 보살피고 하는 일이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다.  

  게으른 자는 먹지도 말라는 구절이 성경에 나오던가. 내가 생각한 결론은 부단히 바지런해야만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죽으면 썪어 없어질 몸, 놀면 뭐하냐는 엄마의 지론은 의당 그럴듯하지만 어디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인가. 젊으나 늙으나 비빌만한 데 있음 비비고 싶고 누울 데 보면 다리 뻗고 싶지. 편한 것 찾는 그 본능을 거스르면서 긴장과 노고를 감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러니 사람 노릇, 어른 노릇 제대로 하느니 그냥 좀 뻔뻔해지고 마는 쪽을 택하는 부류도 비일비재. 그뿐인가. 어른 노릇 잘하는 어른 치고 대우 받으려고 하는 어른 못 봤고 대우 받을 것부터 생각하는 어른치고 어른 노릇 제대로 하는 어른 또한 못 봤다.  

  난 항상 손발을 놀리지 않으면 안 되었으면서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좀 드러눕고 싶었단다.   

  오늘은 한트케 어머니의 말이 우리 엄마 목소리로 자동번안 되어 들리더라는. 입으로는 쉬라고 말하면서도 오징어 튀김이 먹고 싶다고 조잘거리는 딸내미에게 엄마는 결국 새우깡맛 나는 고소한 오징어 튀김을 만들어 주셨다. 바삭하고 쫄깃한 오징어 튀김을 씹으며 페터 한트케는 어머니를 위해 소설이라도 남겼는데 나는 나를 닮은 극성맞고 고집센 손녀딸만 안겨주었구나 싶어 마음이 씁쓸했다. 그래도 오징어 튀김은 눈물나도록 맛있고 엄마가 계속 어른 노릇을 잘 좀 해줘서 내가 편했으면 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일 터. 결국 여차저차 잘난척을 해봤자 나는 엄마 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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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1-2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맞아요, 깐따삐야님. 여자처자 잘난척을 해봤자 저도 결국 엄마 딸이에요.
그래요.

깐따삐야 2010-11-29 09:11   좋아요 0 | URL
그렇죠? ^^

BRINY 2010-11-29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에 심히 공감합니다.

깐따삐야 2010-12-01 12:07   좋아요 0 | URL
딸들은 왜 그런 걸까요. 에휴.ㅠ

BRINY 2010-12-04 09:47   좋아요 0 | URL
아들이라고 다를 거 없어요...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나봐요.

깐따삐야 2010-12-04 12:32   좋아요 0 | URL
사람 나름이겠지만 아들은 더한 것 같아요.ㅠ 품안의 자식이 맞는가 봐요.
 

 

 

 

 

 

 

 

나라 잘못 만난 죄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요즘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책 속에서 <레 미제라블>과 한편의 시를 만났다. 독서 중에 간혹 이런 순간을 만나면 이 책이 왜 내게로 왔나, 를 생각하며 그 절묘한 타이밍에 놀라곤 한다. 뒤늦게 찾은 권정생 선생님의 산문들을 읽으며 달달한 것으로 찐득거리는 입안을 구수한 숭늉 한 대접으로 개운하게 헹궈낸 느낌이다. 그리고 선생님이 이미 십년 전에 발표했다는 아래의 시를 읽으며 오늘의 일들이 참 안타까웠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 <우리들의 하느님>, p.248-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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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1-25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방의 의무 때문에 속이 상해요, 깐따삐야님.
울컥, 하는 마음으로 추천을 누를 수 밖에 없네요.

깐따삐야 2010-11-25 11:57   좋아요 0 | URL
그저 운 나쁘면 죽고 운 좋으면 살아남는 나라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지요. 고작 한살인 영달이를 보며 딸이라서 걱정, 아들이었다고 해도 걱정, 우산과 짚신 장수 자식을 둔 어미마냥 착잡합니다.

BRINY 2010-11-2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평도 해평대하니까, 졸업생들 몇몇의 얼굴이 바로 떠올라서 걱정많이 되었어요...

깐따삐야 2010-11-26 13:12   좋아요 0 | URL
제가 담임을 맡았던 첫 학생들이 올해 스무살이 되었고 군대 간다는 소식을 미니홈피 방명록에 이따금씩 남겨요. 그새 많이 자랐구나 감격스럽기도 하지만 BRINY님처럼 걱정이 많이 되고 그래요.

oren 2010-11-2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정생님은 詩人답게 참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과 애국자를 바라보셨군요.
그렇지만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그저 착하게만 살고 지내는 사람들'한테 오히려 더 강한 '지배욕'을 발동시키는 게 늘 문제더라구요.

먼 훗날,
우리의 아들의 아들代에서는 '비극적인 분단 국가'가 아닌 '어엿이 통일된 대한민국' 땅에서 시인의 바람대로 '아름답고 따사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봅니다.

깐따삐야 2010-11-29 09:19   좋아요 0 | URL
맞아요. oren님 말씀처럼 그저 착하게만 살고 지내는 사람들이 늘 희생양이 되곤 하죠. 정치가에게 타인이란 도구 또는 적일 뿐이라고 니체가 그랬던가요.

오랜 시일과 갖가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통일은 되어야 마땅해요. 배는 부를지언정 젊은 아들들을 앞세워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사는 꼴이라니. 저도 시인과 oren님의 바람처럼 희망을 품어봅니다.
 

  휴학을 했다 돌아와보니 낯선 얼굴들이 있었다. H 언니도 그들 중 하나였다. 처음 마주친 수업, 연베이지색 사파리에 단정한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투박한 영국식 악센트가 인상적이었다. 질문이 많았고 거침이 없었지만 새로운 얼굴 특유의 긴장이 엿보였다. 느슨한 매너리즘으로 생기라고는 없던 강의실의 맨 앞자리, 새뜩한 표정의 언니는 돋보였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집에 가려고 터미널에 갔는데 언니가 거기 있었다. 아는 척을 할까 하다가 무표정한 자태에 자못 소심해져 언니의 시야에서 벗어난 구석에서 조용히 버스를 기다렸다. 어깨에 맨 검정 가죽 가방이 무거워 보였다. 나는 아마도 그 안에 들어있을 사전, 파일 홀더, 휴대폰 등을 떠올리다가 공연히 내 가방 안을 뒤적이며 뭐 놓고 온 거 없나, 하며 싱거워했던 것 같다.    

  몇 컷의 띄엄띄엄한 기억 뿐. 우리가 언제 어떻게 말문을 트고 가까워졌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좀 더 나중에 사범대 근처 벤치에 앉아 언니가 나에게 입고 있는 점퍼가 예쁘다며 참 열심히 사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내가 도리질을 하며 얼굴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미 조금 친해진 다음이었다. 언니의 고향은 내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고 살아 생전에 가볼 기회가 있을까 싶었지만 언니 한 사람으로 인해 그곳이 가깝게 느껴졌다.  

  이후에 함께 하숙을 하며 한달 간의 연수를 받고는 서로 다른 도시로 발령이 났다. 출장 가서도 우연히 만나고 간간히 얼굴도 보며 지냈지만 언니가 고등학교로 옮기고 내가 결혼을 하면서 연락이 뜸해졌다. 그런데 연초에 파견자 명단에서 언니 이름을 보았고 언니도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언니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내게서 책을 몇 권 빌려갔었다. 앓는 소리 하더니 기어이 기회를 잡았네. 반가운 마음에 연락해봐야지, 했는데 한창 배가 불러오던 때라 닥쳐오는 출산의 공포와 설렘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H 언니를 엊그제 만났다. 차에서 내리는데 전보다 핼쑥해진 모습이었지만 다정한 눈웃음은 그대로였다. 곱슬거리던 머리칼을 어느새 차분하게 기르고 검정 코트에 여전히 큰 가방을 매고 있는 언니는 '학생' 같았다. 물론 요즘 학생들은 그렇지 않지만 내 눈에 비친 언니는 재회한 캠퍼스와 순조롭게 동화한 즐거운 학생이었다.  

  언니는 대학원 생활과 스케이트 수업, 미혼의 여선생으로서 겪는 안팎의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언제나처럼 수위 높지 않게 솔직하고 담담했다. 그에 비해 나는 언제나처럼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언니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고 내 이야기에 흥분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털어놓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이십대 초반이었고 이제는 둘 다 서른을 넘겼는데 서로의 다른 기질을 동경하고 재밌어하는 것은 여전했다.             

  헤어질 무렵, 언니는 얼마 전 고향에 갔을 때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대화하기가 무척 힘들었다며 너와는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참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반갑고 고마운 한편 나 역시 텀을 두고 누군가와 재회했을 때 어색하면 어쩌나, 염려했던 적이 있기에 마음 한켠이 짠했다. 지금 대학원에서도 그냥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선생님이 있다며 사람들이 친해지는 이유가 뭘까, 뭐가 서로를 은연중에 끌어당기는 걸까, 언니가 물었을 때 갑자기 머릿속이 복작거리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언니는 예전도 지금도 항상 열심히 살고 있고, 나는 그 모습이 좋고, 그게 자극이 되고, 그러니까 언니가 해외로 연수나 여행 갈 때 나도 좀 델고 가고, 혼자 가긴 영 두렵고, 그나저나 우리 영달이가 보고 싶지는 않을지, 횡설수설하고 말았다.     

  언니가 웃으며 너 씩씩하지 않았어? 라고 하는데 H 언니도 나를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한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살짝 휘청하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 내가 아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 사이의 갭을 담백하게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렇듯 매순간 휘청대곤 한다. 오로지 나 자신에만 올인해 있을 때는 지나치는 그 한 마디를 갖고도 몇날을 곱씹고 고민한 적도 있는데 지금은 약간의 부담을 동반한 자극 정도로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일 터. H 언니에게 나는 야무지고 씩씩한 동생이었고 내가 아무리 죽는 시늉을 해도 그 이미지는 견고할 것이다. 또한 언니를 향한 나의 시선도 다르지 않다. 이제는 그것이 미흡한 통찰이 아닌 무언의 응원이 될 수도 있음을 알 것 같다.          

  그 날 저녁, 언니가 사온 달콤한 귤을 까먹으며 잠깐 회상에 젖었다. 시큼한 것을 싫어하는 영달이도 오물오물 잘 먹었고 나는 엄마가 된 내 모습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상상을 했다. 슬며시 웃음이 났다. 만남 뒤의 이 여운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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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11-2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에 한결같은(좋은 쪽으로)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10-11-26 13:14   좋아요 0 | URL
그쵸? 그럴 때마다 따듯한 믿음 같은 것이 생겨요.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영달이도 잠들고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졌는데 잠을 깨우는 벨소리. 070을 확인하고 성질을 확 부린 다음 다시 자려 하는데 얼마 후 또 울린다. 너 누군지 두거써... 열이 뻗쳐서 받았더니 익숙한 목소리. Y였다. 얼마 전 상을 당한 Y가 아니고 내게는 Y라는 또 다른 십년지기 친구가 있다. 070이 인터넷 전화라며 웃는다. 나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게슴츠레 반가워하며 안부를 물었다.  

  Y는 2월의 신부가 된다 했다. 그 선배와 만난 지 일년이 넘었고 지난번 다른 동기로부터 들은 얘기도 있어서 짐작은 하고 있었다.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자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단다. 웨딩촬영부터 예단, 신혼여행 등 이런저런 결혼 준비에 관한 것들이었다. 나는 얘가 이걸 왜 나한테 묻고 있나 잠시 의아했지만 참으로 간소했던, 그래도 귀찮았던, 나의 지난 결혼 준비기를 찬찬히 읊어주었다. Y는 한숨을 푹 쉬더니 이 시기에 불거져나오기 마련인 갈등과 마찰을 털어놓았다.   

  Y한테는 얘기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좋을 것도 없지만 어느만치 예상을 하고 있었다. 먼저 결혼한 입장이기 때문에 으레 예측할 수 있는 것 외에도 Y가 더 많이 사랑하는 자이기에 짐작되는 것들. 그 선배와 사귀게 되었을 때 기쁨을 넘어 감사의 빛까지 띠는 Y를 나는 걱정스럽게 바라봤었다. 선배는 Y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의 상대였다. 세월을 돌고 돌아 십년 후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을 때 질긴 인연이라는 감탄 이면에는 위태위태한 우려가 좀 더 컸다. 선배는 Y의 연애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때로는 비난도 서슴지 않던 사람이었다. 철없는 계집애들마냥 끼리끼리 모여 후배들 뒷담화를 늘어놓는 후진 장면. 그리고 주접의 중앙에 선 한 남자. 나는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선배는 Y가 무려 십년 넘게 마음에 품어온 남자였고 미리 색안경을 써버린 나보다는 Y가 그의 장점을 많이 알겠지 싶었다. 실은 그렇게라도 해서 두 사람을 축복하고 싶었다. 일찍이 양수경 언니도 노래했듯 사랑은 차가운 유혹이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으니 일단 빠지면 상황 종료. 지켜보는 사람들은 장애가 많을수록 불타는 사랑, 공연히 기름 붓지 말고 잘되라고 노래만 불러주면 되는 것이다.   

  그랬는데 막상 결혼 소식을 듣고 그 과정에서 Y가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고, 지려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화를 내자 Y는 꼭 우리 아버지처럼 반응한다며 웃었다. 말 나온 김에 이번에는 너희 아버지하고 내 말만 들으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알았다며 선배와 잘 상의해 보겠단다. Y는 아버지가 어느 밤 술이 잔뜩 취해 전화했던 일을 들려줬다. 너는 니가 잘해서 잘 큰 거지, 나하고 니 엄마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 미안하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내내 우셨단다. 밤 10시가 넘어가는데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이 대목에서 찌걱찌걱 울어야만 했다. 그러니 더 이상 부모님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선배랑 잘 의논해 보라고, 남자도 결혼 준비하면서 좀 더 크는 거라고, 내 안에 그런 말이 있었나 싶은, 너는 잘도 그렇게 했냐 싶은, 조언으로 통화를 맺었다.  

  그리고는 잠이 달아나버려 뒤척이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다행히 선배와 이야기가 잘된 모양이었다. 내 마음까지 개운했지만 개운함도 잠깐. 급작스럽게 지난 기억들이 찢어진 신문처럼 조각조각 상기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얼마간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비유의 다양함일 뿐. 사람 사는 모양새는 다 비슷하고 커튼 열고 베일 걷어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 법. 나 역시 Y의 지금 심경을 거쳤고 이렇게까지 해서 결혼이란 걸 꼭 해야 되냐고 묻는 그녀에게 안 해도 돼, 지금도 안 늦었어,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그래, 두번은 못하겠더라고 순화(?)해서 말했다.  

  시절은 가도 친구는 남는다는데 남들은 가장 오래 간다는 고교 시절의 친구가 내게는 없다. 물론 당시에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대충 멀쩡해 보이긴 해도 자폐와 우울과 강박이 뒤섞인, 심리적으로 매우 문제있는 아이였던 것 같다. 공부도 좀 하고 성질도 좀 있어서 왕따를 안 당했지 슬쩍 비리비리하기라도 했다면 딱 왕따감이었는데. Y는 대학에 와서 그런 이상한 나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주었던 중요한 친구들 중 하나다. 사소한 오해와 자잘한 애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차저차 세월을 지나오니 지구본 위의 개미 한 마리로 보이더라는. 

  스무살의 우리는 막막하기 그지없었으나 추레하거나 너절하지는 않았다. 오백원짜리 팔뚝핫도그와 광활한 잔디밭만 있으면 입이 찢어지도록 수다를 떨며 의기양양 행복해했다. 그런데 어째 그때보다 주렁주렁 가진 것이 많아졌는데도 딱히 더 행복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당시엔 젊음의 무게에 숨이 막힐 것 같았는데 어깨 빠지고 다리 후들거리고 골머리 썩을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닌 지금에 비하면 그처럼 나풀나풀 할랑한 시절도 없다. Y가 어느 가을 밤, 합동강의실의 공연무대에서 흰 장갑을 끼고 수화로 춤을 추던 모습을 기억한다. 날아갈 듯 나비 같은 Y를 보며 쟤는 연예인이 됐어야 하는데, 아쉬워하며 감동의 눈물을 질질 짰다. 그런데 그 어여쁜 아해가 지금 수화로 얘기하냐? 싶은 갑갑한 상황에 놓여있고 앞으로 그런 일들은 도대체 이 터널의 끝은 어디인고, 싶을 정도로 많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Y와 선배의 앞날을 축복한다. 아주 징하게 축복해서 열화와 같은 축복의 무게 때문에라도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랑을 꾸려가기를 바란다. 뜨겁던 사랑이 차디찬 적의로 변질되는 기이한 감정도 체험하고 온 세상이 나에게 화살을 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아이를 얻는 순간 화살촉에 장미가 달려 있는 듯한 환각에 빠지는, 기묘한 반전의 순간도 맛보기를. 그뿐인가. 십원짜리 농담 같은 하루부터 억만금을 갖다줘도 못 바꿀 하루까지 하늘로 솟았다 바닥에 꽂혔다 하는 무궁무진한 나날 속에서 누군가 변하거나, 변한 척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달콤떨떠름한 동거의 묘미를 꼭 느껴보기를 바란다. 돌아가신 법정 스님은 내 식대로 살기 위해 출가했다 하셨는데 우리 같은 중생은 내 식대로 살지 않을 각오로 결혼한다. 어느 삶이 더 낫다고 부등호로 표시할 수 없는 각자의 운명과 궤도가 있으니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아, 나는 또 보나마나 친구 결혼식에 가서 신부 어머니 다음으로 많이 우는 주책을 떨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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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0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0 1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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