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 동네에 찐빵 가게가 생겼다. IMF 때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큼지막하게 만들어 팔던 빵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이 빵도 그런 사연이 있는지 삼립호빵 세 개 쯤 합쳐놓은 크기의 찐빵을 천원씩 판다. 같은 크기의 고기만두도 천원. 처음엔 소위 오픈빨이라 줄이 긴가 보다 했는데 그새 입소문이 났는지 긴 줄은 짧아질 줄을 몰랐다.
어느 날 저녁에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같은 학교 선생님을 본 적도 있다. 이 동네 분이 아닌데 어스름한 저녁 무렵 빨간 점퍼를 입고 인파 속에 끼어 있더라는. 찐빵 사러 이 동네까지 넘어오시다니. 이쯤 되면 호기심에서라도 한 번 안 사 먹곤 못 배기게 된다. 결국 꼬박 삼십 분을 기다려 찐빵과 고기만두를 먹어봤다. 팥의 양이 남달랐고 일반 호빵이나 찐빵에 비해 덜 달았다. 한 개를 다 먹어치우고 나면 뱃속까지 든든했다. 고기만두는 대개의 고기만두가 그렇듯 따끈따끈할 땐 먹을만 한데 급속도로 식어가니 다시 데워도 그 맛이 아니더라는. 역시 만두는 집에서 신김치랑 두부랑 당면 넣고 소를 꽉 채워야 제맛.
그렇게 호기심을 든든히 채우고 뭐 대단한 거라고 또 사먹나 싶어 잊고 지냈다. 자주 지나는 길이다 보니 몇번 흘깃거리기는 했다. 오늘도 줄이 길구나. 오늘은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안 나왔네. 아이구, 저 아줌마는 대체 몇 개를 산 거야. 이고 가야겠다. 이고 가.
그날은 영달이도 보채고 바람도 잠잠해진 것 같아 밖으로 나섰다. 잠깐 나갔다 들어올 생각이었는데 볕이 따뜻해서 산책을 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도 멀리 가긴 뭐해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횡단보도의 하얀 줄무늬를 좋아하는 영달이를 위해 횡단보도도 하나 건너주시고 도너츠 가게 앞까지 왔다. 그리고 그 옆으로 편의점과 김밥집을 지나면 바로 그 찐빵 가게가 있다.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찐빵 가게를 스윽 보니 오늘도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백개 이상 주문시에는 전날 미리 전화 예약 바란다는 문구도 커다랗게 써붙여 놓고 아주 장사가 잘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게 다가오는 한 남자.
까무잡잡하니 투실투실하게 생긴 아저씨가 분홍색 바구니를 들고 서 있다가는 나와 영달이 쪽으로 다가온다. 해코지하게 생기지는 않았는데 찐빵집 알바생으로 보이지도 않고. 당신 누구냐.
이 빵 드실래요? 아기 안고 가시면서 드시려면 좀 불편하실까요?
하마터면 내미는 빵을 받을 뻔 했는데 당황스럽기도 하고 너 애기 안고 어떻게 먹을래, 정신을 확 차리곤 괜찮아요, 라고 사양했다. 남자는 아주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아, 네에, 한다. 자세히 보니 앞치마도 두르고 있고 가게 앞을 서성이는 자연스런 폼이 찐빵 가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 같았다. 맞은 편 길로 건너기 위해 파란 불을 기다리며 흘끔흘끔 살펴봤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빵을 권하지 않더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고 줄도 늘어서 있는데 말이지.
순간 깨달았다. 내가 불쌍해 보였거나 힘들어 보였거나 배고파 보였거나.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이 사태를 고하니 너 또 배고픈 눈으로 빤히 쳐다보며 지나갔지? 그러신다. 나는 밥도 먹고 나갔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 그냥 줄이 길어서 쳐다본 것 뿐이라고 찌질하게 대꾸했다. 엄마는 아마 남은 빵인 모양인데 네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으면 빵을 다 주려고 했겠느냐며 영달이를 향해 소리쳤다. 야! 너 뭔데 우리 딸을 이렇게 만들었어!
그제서야 내 행색을 찬찬히 돌아봤다. 성질 급한 딸내미를 키우다 보니 머리는 대충 묶다 말았고, 무릎 나올락말락하는 꽃무늬 바지에 모자 달린 헐렁한 조끼, 화장기 없이 까칠한 몰골... 나 같아도 그 지나가는 인파 속에서 나를 알아보고 빵을 줬겠다 싶다. 그것도 밤에 자기 전까지 두고두고 먹으라고 축구공만하게 만들어서. 그래도 우리 영달이는 포근한 망토도 입히고 이쁘게 차려입혀 나갔는데 어쩌면 그게 더 딱해 보였나.
너... 그냥 언뜻 보면... 아주 철 모르는 애가 일 저질러서 어쩌다 애엄마 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 눈빛도 그렇고 하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어디 한 군데 당차 보이는 데가 있어야지 원... 엄마는 이렇게 나를 두번 죽이셨다. 조리원에 있을 때도 들은 말이다. 나를 처음 봤을 때 쟤, 사고쳐서 엄마 된 애 아닌가 했단다. 어려 보여서도 그렇고 어색하게 수줍어하는 것도 그렇고.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는 나이고 성격이고 몽땅 뽀록났지만. 첫인상이란 그렇듯 좀 허무한 거다.
그나저나 만약 내게 그런 속사정이 있고 정말로 돈이 없어서, 아니면 돈 아끼려고, 찐빵 가게에서 눈을 못 떼고 있던 거라면 참 서러웠겠다. 아저씨가 내미는 빵 한 덩어리에 팥알갱이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을 지도. 장발장이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감옥까지 가진 않았으련만. 내 초라한 행색과는 상관없이 아저씨의 호의는 참 고마운 것이다.
사춘기 시절에 <레 미제라블>을 한 권 짜리 소설로 읽었는데 펭귄클래식 시리즈 총 5권으로 출간되었다. 할랑한 청소년 소설이 아니라 웅장한 대하소설로 만나고픈 장발장과 꼬제뜨와 쟈베르. 찐빵 가게 아저씨 덕분에 빵욕보단 독서욕이 왕성해졌다. 책만 사지 말고 옷도 좀 사야할 텐데. 이제부터 나갈 땐 거울도 한번 보고 눈빛도 좀 추스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