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안경을 홱 낚아챈 영달이. 베란다 창틀에 주욱 긁어주시니 바꾼지 얼마되지도 않은 안경알에 자잘하게 생겨난 빗금들. 오른쪽 시야에 거미줄이 어른대는 것 같아 곧장 안경알을 교체했다. 안경점에서는 사은품이라며 누가 신을까 싶은 못생긴 양말을 한켤레 주었고 팝콘 기계를 가리키며 팝콘을 좀 싸드릴까요, 묻는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덕담을 한 뒤 양말도 팝콘도 필요없는데 아무래도 바가지를 쓴 것 같은 가격에 떨떠름하게 돌아왔다. 슬슬 버릇이 나빠질 무렵이니 안돼, 라고 단호하게 말할 것은 말해야 한다는데 나는 당최 엄한 얼굴을 할 수 없어서 오늘도 안경을 빼앗기고 말았다. 렌즈나 라식 등을 떠올려 봤지만 익숙함을 벗기란 어려운 일.    

  그리고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택한 영화. '라스트 갓 파더'. 안경알을 바꿨고 어떤 상황 때문에 온종일 우울했기에 더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다 웃고 잊는 거야. 희희낙락 입장을 하는데 양복 차림의 중장년층 어르신들이 앞서 들어가고 계신다. 2차를 영화관으로? 좀 의아해하며 좌석을 찾아 들어가보니 내 좌석에 떡하니 앉아 계시는 한 어르신. 어르신은 어르신인데 그냥 어르신이 아니다. 급 당황하여 인사를 드리고 잠시 호흡을 추스르며 둘러보니 송년의 밤을 영구와 함께 보내려는 그 어르신들이 나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그렇다고 서로 안다고 할 수도 없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이다.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어르신 한 분이 표를 확인하며 우왕좌왕하시는데 그냥 됐다고, 저희는 알아서 관람할테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상당히 관대한 척 사실은 비굴모드로 마무리. 결국 남편과 나는 영화관의 메뚜기가 되어 몇 차례 좌석을 옮겨야 했다.   

  남편은 어둠 속에서 그분을 어떻게 알아봤냐고 신기해했고 나는 그러게 내가 알아본 게 잘못이라고 자책했다. 그분이 누구든 평소처럼 여긴 제 자린데요, 라고 말했어야 하고 또 그게 맞는 건데 설사 그렇게 했다 해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는 않았을까 아녔을까 하며 횡설수설. 남편은 별 우연도 다 있다며 재미있게 영화나 보자고 말했다. 그래서 정말 재미있게 영화를 보려고 했고 나는 '디 워'도 혼자 표 끊어서 재미있게 본 사람인데 '라스트 갓 파더'는 좀 너무했다. '88분'에서 휴대폰을 들고 엉성하게 뛰어다니는 늙은 알 파치노를 보며 대실망을 한 적이 있는데 살 붙고 나이 먹어 특유의 표정을 살리지 못한 채 웃으면 주름만 한 가득인 영구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플 지경. 역시 미스터 빈 아저씨가 짱인가. 웃어도 웃는 게 다가 아닌, 상념에 젖어 위태위태한 헛웃음을 흘리게 되는 참으로 심란스런 관람이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오늘까지 올해 연말은 대체 왜 이러냐는 말에 남편은 미안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에 영구의 어색한 웃음이 오버랩되어 정말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종은 울렸고 새해가 밝았다. 이 정도면 집 앞의 눈을 다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펑펑 울었고 우는 와중에도 오늘 저녁 동기들과의 약속을 되새기며 눈이 부으면 어떡하나 한편으론 걱정. 새벽녘에 잠들어 아침 일찍 눈을 뜨니 눈꺼풀이 뻣뻣하고 속도 쓰렸지만 육수에 만두와 떡을 넣고 계란 지단까지 올려 든든하게 떡국을 끓여 먹고 나니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방을 닦고 현관을 쓸면서 내가 있는 자리에 대해 생각했다. 밤이 전부라며 슬퍼하다가도 어김없이 날이 밝아오면 다시 일상에 열중하는 나 스스로를 응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을 향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도. 더불어 심형래 감독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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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1-0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장년이면 아직 영화관에서 자리를 혼동할 연배는 아닌 것 같은데...그 분들은 노년이 되기도 전에 왜 그러셨을까요...

깐따삐야 2011-01-05 09:22   좋아요 0 | URL
혼동한 것은 아닐 거에요. 아랫 사람이 좌석 번호에 상관없이 가장 좋은 자리를 안내했을 것이고 그분은 워낙 대우 받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겠죠. 어둠 속에서 꿈쩍도 안 하던 눈빛이 여태껏 생생합니다.

BRINY 2011-01-05 13:58   좋아요 0 | URL
ㅠ.ㅠ 그런 분위기 참 싫네요..

깐따삐야 2011-01-05 16:36   좋아요 0 | URL
BRINY님, 거기다 영화까지 별로였으니 그날 제 기분을 아시겠죠.ㅠ

순오기 2011-01-02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깐따님과 가족들의 건투를 빌어요~~~~~

깐따삐야 2011-01-05 09: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순오기님도 건강하고 보람 있는 한해 되시길요.^^

레와 2011-01-0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 감독님을 계속 응원해야 할까요. 아흥..ㅠ_ㅠ


깐따삐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_

깐따삐야 2011-01-05 09:27   좋아요 0 | URL
저는 공짜 티켓으로 봤는데 돈 내고 봤어도 심형래니까, 하면서 괜찮아 했을 거에요. 영화는 실망스러웠지만 아직 끝을 모르니까 계속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슬랩스틱은 로완 앳킨슨이 역시 최고인 것 같아요.

레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 가득가득 하시길요.^^

다락방 2011-01-05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엄청 보고싶었는데(예고보니 웃길것 같더라구요) 레와님도 깐따삐야님도 실망하셨으니 저도 패스...할래요. 일전에 [디 워]도 내가 꼭 봐줘야지, 이러면서 식구들 다 끌고 가서 봤었는데 용전투씬 말고는 볼게 없어서 참 난감했던 기억이 나요. 휴.

깐따삐야님, 새해 복 많이 받읍시다. 우리 해피 뉴 이어 합시다.

깐따삐야 2011-01-05 16:44   좋아요 0 | URL
그날 조지 클루니, 러셀 크로우, 심형래 중에서 단연 심형래를 선택했고 그 선택이 후회스러웠다기 보다는 많이 아쉬웠어요. 분명 웃기려고 연출한 건데 웃음이 빵빵 터지질 않으니 답답하더라구요. 더욱이 뒷줄에 앉은 터프한 소년 하나가 영화 상영 내내 투덜거리며 욕을 해대는 바람에 참 꿀꿀했어요. 니가 심형래를 알아? 니가 변방의 북소리를 들어봤어? 막 이러고 싶고. 우리의 심형래 감독이 제대로 한번 세상을 놀래켜주길 응원합니다!

다락방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우리 즐거운 한해 만들어요.^^
 

  그와 재야의 종소리를 함께 듣기로 했다는 E는 설렘으로 충만했다. 치마를 입어야겠지. 카드를 살까. 직접 만들까. 문구는 어떤 게 좋겠어. 영어로 쓰면 좀 그럴까. 아주 모처럼의, 어쩌면 이 친구를 알고 처음 보는 달뜬 모습이었다. 사람을 만나 호감을 느끼고 그것이 연애감정으로 발전하는 일이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비일비재한 일은 아님을 잘 알기에 나는 E를 독려했다. E가 상대를 향해 품고 있는 미혹과 의혹은 슈가파우더를 흩뿌린 듯한 창밖 풍경처럼 달콤하게 눈부셨다.   

  그날 헤어질 무렵 즈음 E가 내게 한 말. 그때 너는 칼날 같았는데 지금은 상당히 유해졌어. 그리고 내 손을 잡아주며 덧붙였다. 모든 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제발 너무 깊게 생각하지도 말고. 너는 내가 얼마나 단순하고 다루기 쉬운 사람인줄 모른다며 웃었지만 마음 속으로 E의 말을 곰곰히 새겼다. 고마워. 그래야겠지. 

  그리고 오늘 복직 신청을 하러 간다.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과일을 사고 오랜만에 순차적인 화장을 했다. 영달이를 꼬옥 끌어안고 있는데도 영달이가 보고 싶었다. 엄마는 오버하지 말란 식으로 말씀하셨고 나는 아주 잠깐 영달이를 업고 수업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쿡, 웃음이 나왔고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하는 엄마들의 유일한 자기위안은 아이와 함께 하는 데에 있어 양보단 질을 우선시하는 것이라던가. 나는 그저 영달이의 성장에 누가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너무 많이 또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눈과 귀를 열어놓자.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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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2-2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많이 또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이미 다짐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너무 많이 또는 너무 깊게 생각하는 일이 너무 어려운 일은 아닐까요?
복직하시는군요!

깐따삐야 2010-12-29 13:5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저의 정리벽은 아무래도 보이는 것에만 한정된 것인가 봐요. 머릿속은 분리수거 하지 않은 쓰레기통 같아요. 간명한 해답 언저리를 돌며 답이 없다, 답이 없다, 중얼거리곤 해요. 스스로 삽질이나 뻘짓이라고 의식하면서도 그만두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힘들구요.

2월부터 복직이랍니다. 영달이가 이만큼 많이 자란 모습을 보고 나가서 그래도 다행이에요. 다락방님 조카 아가도 무럭무럭 크고 있죠? ^^

blanca 2010-12-29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복직하지 못하고 그렇게 다니기 싫다고 외쳤던 회사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에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깐따삐야님이 부러워지는걸요. 돌아갈 곳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아이 업고 수업하는 광경이 갑자기 그려져요 저 대학교 때 교수님이 일곱 살 딸아이 데려와 첫째줄에 앉히고 수업했던 기억도 나고 ㅋㅋㅋ

깐따삐야 2010-12-30 09:12   좋아요 0 | URL
그만둬야 하고 그만 만나고 싶은 사람과 이별하면서 저도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blanca님 말씀처럼 돌아갈 수 있어 다행인데 제가 마음이 당차지 못해서 괜히 짠하고 미안하고 그러네요. 아무 소용도 없는 감정인 것을 말이죠.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부장 선생님이 아이를 데리고 오셔서 선생님이 일 보시는 동안 아이와 인터넷으로 옷 입히기 게임을 하며 놀아줬던 생각나요. 그 아이가 훌쩍 자라 초등학생이 되어 인사를 하는데 살짝 감격스럽기까지.^^
 

  지독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들이닥친 추위와 어떤 상황 때문에. 아슬아슬 재빠르게 내달리는 택시 안에서 혹 사고라도 날까봐 조마조마하는 나 자신이 참 우스웠다. 이미 벌어진 사고는 보이지 않는가. 몇 알의 신경안정제와 그 틈에도 챙겨들고 나온 곰돌이 새해 달력. 그리고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 몇 개.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손에 쥐어진 것들이었다.    

  그래도 세상에 나와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를 지나쳐 버릴 수는 없었다. 뽀로로 케익을 준비하고 촛불을 밝히고 북적이는 홀 한가운데 으리으리하게 서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구경하고 남편과 나는 그야말로 하루 종일 있는 힘껏 놀아주었다. 너는 아직 모르지만 우리가 모르지 않기에 무슨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처럼 온몸이 욱씬거려 팔다리가 들어올려지지 않을 때까지 열렬히 놀고 또 놀았다.  

  어느해 이브엔 나를 위해 노트북을 샀고 어느해 이브엔 남편이 사들고 온 트리와 눈사람을 세워놓았다. 잊지 못할 만큼 특별할 것도 없지만 잊혀지지 않을 만큼 비참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올해의 이브는 어떤 면에서 참 특별했고 어떤 면에서 썩 비참했다. 겪은 만큼 깨닫고 얻었지만 두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지나갔다. 다른 모든 날처럼. 세밑의 공기는 평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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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12-2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일이 있었기에....???

깐따삐야 2010-12-29 10:19   좋아요 0 | URL
뭔일이 있었는데 다행히 잘 지나갔어요.^^

kimji 2010-12-29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 잘 지나갔다니 다행이에요.
영달양의 첫번째 크리스마스.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이 겨울도 건강히 잘!


깐따삐야 2010-12-30 09:01   좋아요 0 | URL
네. 눈이 왔고 모든 것을 덮어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눈이 녹으면 어찌 될까요.
고마워요. kimji님. 건필과 건강을 기원할게요!
 

  주말에 근처 도시의 별천지스러운 백화점에 다녀왔고 상품권으로 사온 초밥이 맛없다고 툴툴거리며 약간의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만 했다. 자꾸 가면 홀라당 홀리지 싶어 발길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점원이 말했던 거액의 장난감이 인터넷몰에서 거의 반값이라는 것을 발견하곤 바가지 안 쓴 것에 대해 깊은 안도. 좀더 머물렀으면 백화점의 휘황찬란한 위력에 나도 모르게 소비괴물로 둔갑했을 것 같다.   

  나의 첫 발령지이자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에서는 싸이코 패스 운운했고 인정 어린 추억이 많았던 나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에 말을 잃었다. 간만에 메신저에 접속해 그때 그 아이들이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나 둘러보았다. 사랑에 눈멀어 여자친구 사진으로 온통 도배를 해놓은 아이들의 미니홈피를 보며 그 또래 너희에게 그녀와의 이별이 아닌 다음에야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싶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슴 한켠이 서늘해왔다. 

  그리고 알라딘에서 물만두님의 소식을 들었다. 언젠가 물만두님의 백문백답을 읽고 마음 짠했던 기억이 있고 활발히 올라오는 추리소설 리뷰에 감탄한 적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소통하거나 교류할 기회는 없었다. 그저 만두님이 꼬박꼬박 건네시는 새해인사만 반갑게 받아챙겼던 것 같다. 건강이 안 좋으시지만 언젠간 괜찮아지실 것이고 더 나중엔 한번쯤 직접 뵐 날도 오지 않을까. 알라딘이 알라디너들에게 그런 좋은 날 한번 안 만들어주겠어. 그처럼 막연하기 짝이 없고 할랑하기 그지없는 공상 속에 물만두님이 있었다. 그 점이 지금에 와서야 아쉽고 죄송하다. 오늘 접속해 보니 알라딘에서 반가운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아 캄캄했던 마음에 반짝, 등이 켜진 느낌이다.   

  뽀로로 블록으로 알록달록 담을 쌓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과 첫 발령지와 물만두님이 계신 이곳.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은 나. 그 사이에도 알록달록 담이 있었나 보다. 나는 상이한 모든 곳에 머물렀지만 전혀 머무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보이지 않는 담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오늘은 그 점이 무척이나 유감스럽다. 중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잃어선 안 되고 잃고 싶지도 않았던 것을 나는 이제 바늘 같은 계기를 통해 되새겨야만 그나마 잠시잠깐 사람의 얼굴을 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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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12-15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이가 속되다고...투덜투덜..

깐따삐야 2010-12-16 09:45   좋아요 0 | URL
제가 저 자신과 지인들에게 건넸던 '안녕'이라는 인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나를 생각하고 부끄러웠어요.
메피님, 건강하셔요. 여기서 오래오래 뵈어요.

비로그인 2010-12-15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가 더할 나위 없이 형이하학적이며 소비지향적이고 황금만능주의에 물질만능주의로 무장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두달 전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자신의 그림자가 너무 아슬해 보이더이다.
전 안녕히, 라는 인사도 못하겠어요. 그저 아무 말 없이 생각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무런 조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깐따삐야 2010-12-16 10:00   좋아요 0 | URL
여력이 안 되어서 항상 그렇지 못할 뿐 돈 쓰는 재미가 참 쏠쏠하죠. 그런데 백화점에 가면 백화점을 아주 그냥 통째로 갖고 싶다가도 주차장의 지하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탈출'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계속 머물다간 지갑은 물론 혼까지 털릴 것 같아 서둘러 빠져나오곤 한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Jude님의 마음도 알 것 같아요. 건강하세요. Jude님. 우리는 아마도 동갑인데 여기서 오래오래 만나요.
 

  이맘 때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히 지난 일년을 돌아보게 되는데 세상에... 일년 내내 영화관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싶어 어딘가 영화 보고 온 흔적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페이퍼를 뒤져보려다가 이 정도면 안 간 거나 다름없단 생각에 힘이 빠져버렸다. 가려면 갈 수도 있었을 테고 보고 싶은 영화도 있었는데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영달이를 낳기 전에는 우리 부부가 별 충돌 없이 안이하게 공유할 수 있는 공동 취미가 영화 뿐이라서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자주 영화를 보러 다녔다. 다른 경우에는 갈등이나 마찰이 분분한 반면 영화에 대한 식견은 그럭저럭 조화로워 우리는 마치 단합대회라도 하듯 영화를 고르고, 예매하거나 표를 끊고, 카페라떼를 마시면서 공동의 유희를 즐겼다. 팝콘도 별로라 하고 영화관에 퍼져 있는 팝콘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것조차 아주 짝짜꿍이 잘 맞았더랬다. 하지만 이제 그런 호시절은 디 엔드.

  그다지 바지런하고 적극적인 육아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영달이에게 매달려 있는 내가 딱했던지 얼마 전 남편은 이벤트에서 받은 PMP에 최신 영화와 고전 영화 몇 편을 담아 주었다. 영달이 재우고 나서 심심하면 이어폰 끼고 보라고. 그러나 현실은 어찌나 야멸찬지 영달이가 잠들고 나서 두 시간을 넘기기 어려운 탓에 아직 한편도 제대로 못 보고야 말았다. 피곤이 엄습하여 두 눈이 막 감길라치면 내가 이 자유로운 황금 시간대에 쪼매난 화면이나 들여다보고 있느니 책을 몇 장 더 읽지 싶어 그냥 꺼버리고 자거나 책을 집어든다. 그리고는 비몽사몽한 의식으로 깨달음에 다다른다. 그래, 나는 영화를 안 보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고 생각보다 영화라는 취미에 별 애정도 없을 뿐더러 역시 책을 더 좋아하는 거였어. 영화는 끊어도 책은 못 끊잖아?   

  그러나 <시네포트>나 <영화가 좋다> 같은 프로그램에 시선이 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 흥미진진해 보이는 신작영화나 좋아하는 배우들의 근황에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그것도 거짓말. 결국 프로그램 속 영상을 짤끔짤끔 간보며 몇 차례 멍때리거나 감탄하곤 하지만 분주한 일상 저편으로 휘리릭 증발하는 일이 다반사. 한때는 '영화읽기' 카테고리에 영화 리뷰를 올리는 것이 큰 낙의 하나이기도 했다. 활자로 이루어진 책보다 생생한 비주얼로 감상한 후 채 감흥이 식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더욱 즐겁게, 잘 써지기도 했다. 영화 평을 쓰며 한번 더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어느 때는 쓰면서 깨닫기도 한다. 이 영화에 이런 면이 있었네, 하고.     

  남편은 조만간 고3 아이들과 '투어리스트'를 보러 간다는데 내게는 영화는 커녕 현실적인 고민을 잔뜩 싸안은 친구와의 약속만 예정되어 있다. 영상의 강력함 이면의 허무한 휘발성에 대해 종종 냉소를 보내면서도 기회가 왔을 때 넘기지 않았고 무료함과 무의미를 위안하기 위해 부러 기회를 만들며 영화 보기를 즐겨왔던 나는 영화를 안 보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약간은 시큼털털한 기분으로 받아들인다.  

  어제 오후 잠든 영달이를 안고 드라이브를 하며 남편과 나는 동의했다. 영달이라는 고깟 영화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한 공동의 낙이자 희망을 얻은 대신, 우리의 호기로웠던 시네필 다이어리는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노라고. 그 순간 수많은 영화 포스터와 카페라떼와 CGV 가는 길이 엔딩 크레딧으로 펼쳐지는 아쉬운 회상이 모락모락. 하지만 언젠가 아장아장 영달이와 손잡고 라따뚜이스러운 귀여운 애니를 보러 가는 상상이 플러스 되어 나는 다시 미소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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