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출신으로 르뽀작가 생활을 거쳐 소설가가 되는 방식은 우리 국내의 현실에서는 거의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르뽀는 저급한 글쓰기로 폄하되기 일쑤이고, 실제로 그간 르뽀 분야를 살펴보면 과거의 암울한 역사의 이면을 흥미 위주로 따라가는 글들이 꽤 많았다. 그런 것들을 부추긴 것은 우리나라의 소위 잘 나가는 중앙지들이 달달이 발간하는 시사교양지들 덕이다. 정확한 표기로는 르포르타주(reportage)인 이런 양식은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보고문학 내지는 기록문학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르뽀 문학의 대표적인 저작들은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위대한 길:한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와 같이 기자 출신의 작가들에 의한 것, 조지 오웰이나 잭 런던 같이 작가 출신의, 혹은 작가쪽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 이들의 작품들이 있다. 르뽀 문학은 다큐멘터리 문학이라고 해야 할 기록문학에 속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픽션을 어느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하는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으나 픽션과 사실의 경계가 명확한 것이 아니므로 큰 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소위 "잡문"이란 표현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인은 시 이외의 모든 글을 잡문으로 치부하고, 소설가는 소설 이외의 글들을 잡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또 학자들은 각주가 달리는 논문 이외의 글을 또한 잡문으로 취급한다. 이때 잡문이란 배제와 하대의 의미를 담는다. 즉, 스스로를 시인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이 쓰는 시 이외 일체의 산문들, 예를 들어 에세이, 기행문, 리뷰 따위 등을 본업에서 어긋난 것으로 평가절하하고, 소설가들, 학자들 역시 그렇다. 얼핏 보면 겸손한 것으로 보이나 그렇다고 이들이 다른 글들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글을 쓰는 이유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나 청탁이 들어왔으니 쓴다는 식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과연 그런 자세와 폄하는 정당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위, 문학업에 종사하는 글쟁이들의 이런 잔챙이 같은 생각이나 학자입네 하고, 상상력이 결여된 글쓰기에 치중하는 이들의 치기에 애꿎은 독자들만 손해를 보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학의 서구이식론이나 단절론이니 이런 이야기들은 논외로 하고, 서구의 문학사에서 우리가 오늘날 흔히 시라고 이야기하는 서정시, 소설에 대한 경험은 근대의 것들이다. 서구문학사를 보자면 오랫동안 운문으로 쓰여진 비극과 서사시가 문학의 상위장르로 평가받아 왔고, 우리가 소위 서정시라고 평가하는 현대의 짤막한 형태의 시는 낭만주의 시대의 일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는 소설이 아니라 서사시이다. 내가 훌륭한 시인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시만 잘 쓰는 시인이 아니라 산문에 있어서도 역시 탁월해야 한다는 것을 삼은 것 역시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김기림이나 김수영의 사례만 보더라도 훌륭한 시인은 또한 훌륭한 문장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요근래 발표되는 소설들을 살피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학이 상상력과 현실의 긴장에 의해 발생한다고 했을 때, 지금의 소설 문학은 현실에 압도당하고 있으며, 현실의 발빠른 행보를 작가들은 가을 추수가 끝난 들판을 어슬렁거리듯 이삭줍기에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글쟁이는 칼잡이이다. 언제라도 날카롭게 날을 세워두지 않는다면 시대와 현실에 의해 도태당하고 말 것이다. 뛰어난 칼잡이가 칼을 탓하지 않는 것처럼, 뛰어난 글쟁이는 글의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칼을 휘두를 뿐이다. 결국 글이란 장르를 불문하고 그 문장이 성취한 결과물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지, 소속 장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잡문이라 우습게 여기지 마시라. 그것이 상상력에 더 많은 것을 의존해야 하는 것이든, 현실에 보다 밀착해야 하는 것이든 글의 장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품질이 더 중요하다. 낙서 같은 글을 써놓고는 '이건 잡문이니까'라며 자위하는 글쟁이는 자격없다는 얘기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04-11-03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멋있고, 날선 글이네요. 님의 글을 읽으니 당장 언제부턴가 잘 쓰지 않았던 일기라도 쓰고, 신변잡기라도 관찰한 바들을 꼼꼼히 써나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추천해요.^^

바람구두 2004-11-03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캄사...

슈퍼소년 2004-11-0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문득, 글의 품질은 무엇으로 판가름 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네요^^

바람구두 2004-11-0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품질은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는가?" 박쥐님의 그런 의문에 답할 능력이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처음에 얼핏 읽기로는 좋은 글이 도대체 뭐냐? 이렇게 보여서 그렇담, 좋은 사람의 구분 기준을 말해달라고 반문하려다 다시 보니 품질을 무엇으로 판가름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의문이더군요. 글의 품질을 가늠하는 기준이나 좋은 사람으로 판단하는 기준이나 모호하기는 매일반일 겁니다.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처해있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입장이 다르다 하더라도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모호한 것은 싫을 수도 있죠. 한 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결국 본인 자신이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무언가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결국 그에 속하지 않는 것은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그러므로 박쥐님이 질문하신 것은 당연히 그 대상을 저 한사람만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지 의문이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단 제 기준은 '진정성'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성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라는 의문이 성립할 텐데, 아마도 그건 제 모든 감각의 촉수들, 제 모든 삶의 경험들을 통해 얻어낸 것들을 통해서라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즉, 누군가의 글을 읽는 사람은 건성으로 읽든, 대충 읽든, 아니면 열심히 읽든 그 사람을 매료시키든 아니든 간에 그간 살아온 과정을 다시 반복하면서 타인의 글을 읽을 겁니다. 아, 이건 농담이구나, 아, 이건 진담이구나. 아, 이건 피땀어린 글이구나. 작가와 글을 분리시키려는 시도가 오래된 만큼이나 글과 사람을 같은 것으로 보려는 시도 역시 아주 오래되었지요. 결국 글의 품질은 그 글의 작가가 그 글이 추구하고 있는 바, 본인이 말하고 있는 바를 온몸으로, 자신의 삶으로 밀고 가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의문을 풀기엔 역시 역부족인 답이겠지요.

2004-11-05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동안 나는 "배혜경"님이 철의 장벽처럼 여겨졌다.
리뷰의 달인 순위 올리기에서 배혜경님을 넘어서는데(?) 거의 4주 가량이 걸린 듯 싶다.
4주 동안 얼마의 리뷰를 올렸는지 모르겠으나 페이퍼는 거의 작파하고,
리뷰만 올렸는데도, 배혜경님을 넘어설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아, 과연 알라딘 서재층은 두툼하기도 하지... 라며 스스로 벽을 보고 한탄한지 어언 30여일
드디어 어제부로 배혜경님 서재를 앞질러 버렸다.
흐뭇, 흡족, 자뻑....

그리고 문득 앞을 보니 진우맘님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리뷰의 달인 10위 마크 달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게다가 한동안 서재의 달인 링크도 뚝뚝 떨어져서 어느새 10위 권 밖으로 밀려났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가만 보니 즐찾 377분, 그간 풍소헌을 찾아준 분들 수도 어느새 18064명에 이르렀다.
헉,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새삼 놀랐다.
나는 왜이리 인기가 높은 걸까? 하고... 말이다.
미안타... 그래서 제목을 웃자고 하는 얘기라고 달지 않았던가...

솔직히 오늘 기분 무척 꿀꿀하다....
일 같지 않은 일에 발목 잡혀 질질 끌려다닐 때...
나머지 사람들은 해외로, 국내 여행으로 죄다 바쁘단다.
영 기분 시껍하네.... 흐흐....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10-29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산 2004-10-2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바람구두님의 리뷰와 페이퍼들을 보면 그야말로 거대한 walking library와 walking socrates가 연상되던데... 저만의 생각일까요? ^-^

파란여우 2004-10-29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라성 같은 알라딘 리뷰어들중 도저히 넘을 수 없다고 여기는 몇 분이 계시는데요..그 중 한 분이 바로 구두님이란걸 아시나요? 이건 리뷰가 아니고 무슨 학위 논문 발표 수준이니 저 처럼 잔머리 굴리는 사람은 못 따라 갑니다. 그래서 오늘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음...리뷰좀 쪼금만 못 쓰시면 안되나요? 그래야 제가 자신감이 생긴다는 그런..어쩌고..저쩌고...부럽습니다.

깍두기 2004-10-29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자고 하는 얘기, 하나도 안 웃겨요. 흥!=3=3=3
(그래도 기분 꿀꿀하다니 봐 드릴게요. 같이 기분 꿀꿀한 사람끼리.....^^)

싸이런스 2004-10-2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o ahead be crabby!
꿀꿀한 기분일 때 Memory가 증가된다는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Be permanetly crabby! 이런 말도....

싸이런스 2004-10-29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ebcenter.health.webmd.netscape.com/content/article/93/102388.htm
요기 가시면 읽으실 수 있습니다.

선인장 2004-10-29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비로그인 2004-10-29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77중의 한사람입니다. 반갑습니다. ^^ 진짜 웃겼습니다.

아영엄마 2004-10-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나도 안 웃겨요. 님도 저에게 딜레마를 안겨준 사람 중의 한 분이라구요..ㅜㅜ

조선인 2004-10-2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찾 많다고 자랑하신 거죠? 흥흥흥

마태우스 2004-10-30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예전에 '가끔 웃기기도 하고 그러세요'라고 해서 이 글 쓰신 거죠^^

바람구두 2004-10-3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마태우스님.... 맞아요. 마태님의 충고를 깊이 새기고 있었답니다. 조선인님! 즐찾 많다고 질투하시는 거죠? 흐흐. 아영엄마! 딜레마가 뭔가요? 따우! 웃기는? 정들게시리... 엇, 폭스바겐님이시다. 감사합니다. Uniuniyun님! 처음 뵙겠습니다. 선인장아! 언제 한 번 놀러와라. 깍두기님...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너무 꿀꿀하지 말자구욧. 흐흐. 파란여우님! 고수께서 엄살 부리시니 귀여워요. 가을산님! 저는 그보다는 워킹 뱅크나 뭐 그런게 좋은데요. 흐흐.

sooninara 2004-10-3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월에 번개 나오실거죠? 그리고 즐찾 377이라니..정말 웃기지가 않는군요..이거 염장성 페이퍼죠???

바람구두 2004-11-01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월에 번개가 있었나요? 몰랐습니다.

진/우맘 2004-12-2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바람구두님 따라서 마이페이퍼 검색창에 제 이름 써넣고 돌아다니다가, 오늘에야 이 글을 봤습니다. 말도 안 돼요. 여우님 말마따나, 바람구두님이야말로 거대장벽이라구요!!!
 

어느 시대나 고전이란 존재한다. 그런데 고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오래도록 읽힌 책을 고전이라 해야할까? 아니면 아주 오래전에 쓰인 책을 고전이라 해야할까?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 말하는 고전의 의미를 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고전이 오늘날에도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내 이야기 두 가지를 해보자.

어떤 이는 교양이란 것을 잘난 척하기에 적당한 것이라고 우스갯소리 삼아 말하기도 했는데, 난 이런 류의 글쓰기를 일종의 뻐기기라고 생각한다. 교양이나 고전을 잘난 척하기 위한 책 읽기로 단정해버리는 심리의 기저엔 자신의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혹은 진지함에 대한 알러지 같은 것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책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장 자끄 루소의 "에밀"을 꼽는다. 그런데 그보다 더 충격적인 고백 한 가지를 하자면 내가 "에밀"을 처음 읽은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란 것이다. 어떤 이는 이 말에 경악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전혀 경악할 만한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읽은 "에밀"이 어린 소년에게 과연 얼마나 먹혀들었을 것이며, 얼마나 이해되었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읽은 "에밀"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세상에 제 아무리 좋은 책이 널렸다 하더라도 그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인쇄된 종이에 불과하다. 영화 "투모로우"에서 도서관으로 대피한 청년들이 얼어죽지 않기 위해 벽난로 불쏘시개로 쓰는 것도 책이다. 그 도서관의 사서 역시 살아남기 위해 책을 불태운다. 이 때의 책이란 아무리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사서는 한 권의 책만큼 자신의 품에 꼭 품은 채 내놓지 않는다. 쿠텐베르크가 인쇄한 고인쇄물인 "성서"였다. 이 책이 "성서"라 불태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류의 문명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할지라도 세상에 인류의 흔적으로 남기고 싶은 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초등학교 4학년의 손에 잡힌 "에밀"을 나는 몇날 며칠에 걸쳐 다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 책이 잘 이해되어서 읽은 것은 아니다. 다만, "에밀"의 첫 구절이 내 가슴에 찌르르 와 닿았던 탓에 그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중에 가서 어떻게 결말을 맺을까?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에밀의 의미심장한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조물주의 손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이 선하지만, 인간의 손으로 넘어오면 모든 것이 악해진다."

어린 나이에 읽은 "에밀"을 과연 잘 이해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후로도 틈틈이 "에밀"을 읽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의 내가 "에밀"을 잘 이해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 다만 "에밀"이란 책의 말미에 소개된 "장 자끄 루소"의 생애가 날 또다시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런 근대의 탁월한 교육철학책을 쓴 장 자끄 루소가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태어나는 족족 고아원으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은가. 책과 책의 저자가 위인전과 위인 만큼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된 계기였다.

나중에 대학에 간 어느날 우리를 가르치던 교수는 자신의 강의 시간에 강독한 소설 작품들 가운데 "앞으로 100년 뒤에도 여전히 읽히게 될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작품 하나를 선정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정리해서 리포트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앞으로 100년 뒤에도 여전히 읽게 될 작품을 선정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선정하라니... 끔찍한 과제였다. 우리 근대문학의 역사를 이인직의 "혈의누"로 잡아도 2006년이 되어야 비로소 100년인데, 그로부터 100년 뒤에도 여전히 읽게 될 소설을 자신이 진행한 강의 시간에 강독한 10편 가량 되는 소설들 가운데 골라 보라니 끔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덕분에 나는 고전이란 무엇인지, 명작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고전이란 시간이란 숫돌에 연마하여도 그 빛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 빛나는 것들을 의미한다.

김명수 시인의 시 "하급반 교과서"에 등장하는 한 대목처럼 "아니다 아니다!"하고 읽으니 /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도 하나도 흐트리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를 하며, "참새 짹짹, 병아리 삐약삐약"을 외우듯 한국 최초의 개인 시집은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라고 외우지만 정작 "해파리의 노래"란 시집이 오늘날 고전이라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시집을 처음 손에 넣은 것이 불과 일주일 정도 전이란 사실을 구태여 상기해보지 않더라도 이 시집이 오늘날 김소월이나 윤동주가 누리는 것과 같은 영예를 누린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시집은 어떤 의미에선 고전이라기 보다는 문학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연구자료에 가깝다. 고전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 단지 오래된 책이란 의미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고전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이라는 거창하기 짝이 없는 제목이 붙게 만드는 것일까?  '고전(古典, classics)'과 함께 책을 의미하는 몇 가지 명칭들을 이야기해보자. 우선, 정전(正典(canon)이란 말이 있고, 실라버스(syllabus)가 있고 텍스트(text)란 말이 있다. 앞의 것일수록 범위가 좁아진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텍스트란 것이 말 그대로 '해석(규정)되기 이전의 원본'을 의미한다면, 실라버스는 이런 텍스트들 가운데 특별한 목적과 제도로서 선별된 텍스트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쉽게 이해를 돕는다면 대학에서 어떤 강의 교재로 채택한 도서 목록이 있다면 그것은 그 강의의 실라버스라 할 수 있다. 정전(cannon)이라 하는 것은 갈대나 장대를 의미하는 고대 희랍어 kannon에서 유래된 말로 후에 '규칙' 혹은 '법'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말은 보다 발전하게 되어 다른 텍스트들보다 보존할 가치가 있는 어떤 텍스트들을 규정하는 말이 된다. 가령,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성서와 이를 해석한 신학 서적들이,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꾸란이, 우리와 같은 유교문화권에서는 "사서 오경" 과 같은 책들이 정전이 될 수 있다. 정전이란 한 문화권이 위대하다고 동의하고 있는 혹은 간주하고 있는 작품들의 총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고전(classics)와 흡사한 의미를 담고 있지만, 고전이란 말은 보다 확실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사용되는 말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정전이란 말은 보다 객관적인 용어로 쓰인다는 것이다.

만약 한 개인에게 내 인생의 의미있는 책 100권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개인에게 있어서만큼은 확실히 정전이 될 수 있다. 그런 개개인이 100명이 모이고, 1,000명이 모이고, 다시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면서 서로의 정전이 겹치고 스며들면서 구성되는 것이 바로 그 사회의 정전이 되고, 세월과 함께 숙성되어 인정받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그러나 어떤 고전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들로 손꼽히는 이들치고, 그 백성들에게 가혹한 희생을 강요하지 않은 왕이 없는 법처럼 종종 이집트의 피라밋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곤 한다. 즉, 존경받아 마땅한 고전들은 종종 교양(敎養)이란 이름으로 - 그것이 culture이든, bildung이든 상관없이 -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인간도 그 시대와 괴리된 채 살아갈 수 없기에 우리는 교양이란 이름으로 그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교육받곤 한다. 교양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시대의 상식을 얼마나 잘 꿰차고 있는가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상식(common sense)이란 정상과 비정상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또다른 정전이기도 하다.

이 말은 상식이 바뀌면 고전이나 정전의 지위도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10-15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4-10-1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에게... 제가 알기로 그는 사서라서 끝까지 남은 것이고, 여자 사서 분과 함께... 그가 무신론자인 것하고, 직업이 사서인 것은 별 연관이 없지요. 저도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영화의 맥락상 사서가 맞는 것 같습니다만... 글 잘 읽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2004-10-15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4-10-15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께... 죄송합니다만... 사서는 아닐지라도 저는 도서관 직원으로 보았습니다. IMDB검색해보니 booker로 등장하는 여 배우에 대한 이야기는 있는데, 남자 배우는 역할 자체가 미미한 탓인지 저도 검색해낼 수가 없군요. 다만 다른 이들의 리뷰 글에서도 이 남자 배우를 도서관 직원으로 기술하고 있는 리뷰는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저 피신한 사람이든, 도서관 직원이든 현재 가진 데이타로는 이걸 증명해낼 수가 없군요. 제 생각엔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가가 제 글의 중요한 요소나 팩트를 흐리는 부분은 아닌 듯 싶어 그냥 두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지요?

stella.K 2004-10-15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을 초딩 때 읽으셨군요. 저는 중학 시절 샀다가 앞부분만 보고 결국 덮어버렸는데.
상식이 바뀌면 고전이나 정전의 지위도 바뀔 수 있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당장 민음사가 내고있는 세계 문학전집 시리즈만 봐도 고전이 바뀌고 있다는 걸 볼 수가 있잖아요. 물론 그쪽에서 내는 세계 문학이라는 것 중에 정말 고전의 가치가 있다는 것에 몇 퍼센트의 동의를 얻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의심의 여지나 딴지를 거는 일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아예 민음사에서 세계 문학 전집을 기획할 때도 밝힌 바가 있었고.
모든 건 바뀌죠. 단지 '고전'이란 반열에 서기 위한 건 모든 것이 바뀌는 속도에 비하면 참 느린 것 같긴 하지만. 그러니 한 권의 책이 100년 뒤에도 읽힐지 말지 누가 알겠습니까? 과연 한 작가가 100년 뒤에도 읽힐 그런 위대한 작품을 쓸 계획을 정말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래도 그런 숙제를 내주신 그 교수님은 왠지 마음에 듭니다.^^
 

MBC뉴스는 공포영화의 도식을 따르지 말지?

영화 "스크림"는 공포영화에 대한 메타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림은 "호러영화의 몇 가지 규칙"을 소개하면서 호러영화들의 규칙을 깨버리는 것으로 재미를 배가시켰다.
그 중 하나가 "처녀가 섹스하면 죽는다" 였던가?

그래서인지 어떤 공포영화는 이것을 다시 뒤틀어 이번엔 처녀면 죽는 공포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여태 처녀야? 냉큼 죽지 않고 뭐해?"

왜이리도 처녀의 유무 혹은 결혼의 유무에 집착하는가?
그건 우리 사회의 선정성을 다시금 부각시키는 일일 것이다.

최근 MBC에서는 9시 뉴스의 주말 여성앵커 최윤영을 교체했다.
사실 우리나라 방송사에서 여성 앵커들을 결혼과 함께 교체한 전례는 여러 차례 있어왔다.
시쳇말로 미스코리아는 몸짱이지만, 아나운서는 몸짱에 머리도 짱 혹은 거기에 덧붙여서
집안도 짱인 우리나라에서 제일 각광받는 결혼 상대로 취급받은 지 오래 되었다.

머리 좋은 여자들의 대표선수격이면서도 여성 방송인은 준연예인 취급을 받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이런 식의 구분법도 절라게 재수 없고,
피해자이자 어떤 의미에선 수혜자들인 이들 여성 방송인들이 번번이 맥없이 물러나
반려자와 함께 유학을 떠나거나, 내조자로 머무는 모습들도 결코 보기 좋은 건 아니다.

그 많던 싱아는 어디에 갔나가 아니라 그 많던 여학생은 죄다 어디로 갔나?
물론 그게 여성들의 직업관이 뚜렷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관행이 작동하는 것이란 사실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누가 좀 피튀기게 싸워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참 그놈의 관행(남성중심의 질서)은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청률을 자산삼는 것이 방송 프로그램이라지만
방송사의 가장 대표적인 공영 프로그램인 뉴스에서조차 시청률에 급급하여 
여성 방송인을 단순히 프로그램의 꽃 취급하는 건 이제 그만 지양되어야 할 관행이 아닐까?

결혼과 함께 뉴스 프로그램에서 사라지는 여성 방송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B급 공포영화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다.
여성 앵커의 결혼과 처녀성 그리고 시청률이란 이 공포의 도식을 깨뜨릴 때도 되지 않았나?
남성 앵커가 결혼했으니 시청률 떨어지니까 방송에서 물러나야 한다면 그건 누가봐도 코미디로 여길 텐데
어째서 여성 방송인은 뉴스 방송에서 물러나야 하는가?
이게 공포영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평일 방송에서 김주하 앵커는 그대로 자리를 지킨다고 하지만
올해 인터넷을 둘러싸고 김주하 앵커에 대해 제법 반향이 컸던 탓에 잠시 보류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MBC는 제발 공포영화의 도식에서 좀 벗어나길 바란다!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을 자임하면서 아직도 처녀성에 연연하는 걸 보는 건 전혀 즐겁지 않으니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엔리꼬 2004-10-07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아나운서 시험은 대단하다지요? 필기시험은 뭐 대충 맞힐 수 있는 내용들이고, 대부분은 외모로 평가한다고 하네요. 그것도 공정한 평가도 아니라고 하고. 특히나 중요 뉴스에 여성 아나운서가 발탁되는 것은 그야말로 한두명의 낙점에 의한 것이라고...
그러니 점점 한미모 한다는 여학생들은 미모 가꾸며 아나운서 시험준비하기 바쁘고.
결국 외모 덕분에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에 발탁되었던 여자 아나운서는 몇년 후 (결혼이라도 하면 더더욱) 자신을 만들었던 그 나이에 발목이 잡혀서 단명하며 물러난다고 하네요. 여자 아나운서 중 정년퇴임한 사람이 없었다나? (님 반갑습니다.)

비누발바닥 2004-10-09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님의 비유가 대단하십니다~
틀린말은 아니네요.....맞습니다....다른나라의 비해 그런것이 좀 짜증이
나는 둣하네요....ㅠㅠ
 

종종 인터넷 혹은 블로그 형식의 홈피들을 배회하다보면...
수다의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기실 아무 것도 소통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소통하는 척 하는 이 양식...
블로그의 형식이 대화를 규정한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냐 2004-10-04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프라인의 소통보다 때로는 속이 더 후련해지던데요....블로깅을 통해 누구도 만날 수 없다는 건...다소 극단적인듯 합니다.

물만두 2004-10-04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생각에 공감합니다. 전 이렇게 많이 만나고 다니는데... 그리고 속도 후련하구요...

바람구두 2004-10-04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단이란 말... 다소 남용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극단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 있는 거겠지요. 가령, 이 그림의 작자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도 만날 수 없다거나 하는 개인차를 모르는 바 아니겠지요. 레토릭이 극단이라 해서 그 안에 담긴 뜻마저 극단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든 만날 수 있지만 누구도 만날 수 없다는 블로깅에 대한 일면의 진실을 작자는 분명 의도된 의미 과잉으로 표현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극단이라면 극단 아닌 것이 얼마나 될까요? 캐리커처가 인물의 특징 중 일부를 과장하는 것처럼 말이죠.

바람구두 2004-10-04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약에 마냐님이나 물만두님이 그건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이란 것도 매일반이지 않느냐고 하셨다면 저는 두 분의 의견에 동감을 표했을 겁니다만.... 블로깅이나 인터넷 글쓰기의 속 후련함이란 대관절 뭘 의미하는지 둔감한 저로서는 잘 모르겠더이다.

balmas 2004-10-04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재미있는 그림이네요.
퍼갑니다.^^

비누발바닥 2004-10-04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이 되는군요.....
그리고 왠지 슬픈 것 같기도 하구요~~

stella.K 2004-10-0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 밑의 글이 딱 맞는 표현 같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으나 갈 수 없고, 누구도 만날 수 없다는 말. 블로그 전 이 알라딘이 첨인데, 여기서도 오프와 비슷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해요. 묘한 심리적 역학관계라고나 할까? 그런 게 보인다는 거죠. 나만 이러나? 어쨌든 나중에 기회되면 글을 써 보긴 하겠지만... 블로그도 인간 표현의 한 양식이고 인간은 표현에 반응하는 존재니까. 암튼...암튼.

hanicare 2004-10-05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프라인의 부대낌이 굴비 달아놓고 눈으로 먹는 거라면, 온라인은 굴비 그림 달아놓고 밥 먹는 시늉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나르시소스가 되지 않으려면 반사되는 자기 모습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아야 되겠지요.진짜 굴비는 언제 먹어 볼 수 있을는지.

바람구두 2004-10-05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anicare님의 말씀이 적당하게 들리는 군요. 진짜 굴비를 먹는 건....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흐흐.

마냐 2004-10-06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다결핍증에 시달렸던 시절이 있었슴다. 언젠가 하루종일 내가 만나는 '여자'가 기자실 아가씨 뿐이란 알았을 10년전에도 그랬고, 언젠가 문득 고개를 들어 사무실을 둘러보니 200명이 우글거리는 조직인데...누구에게도 말을 건낼 수 없었을 때도 그랬고. 술 마시고 훌훌 털어버려도, 친구들과 지인들과 동료들과 교감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성에 차지 않는 때도 있었죠.
온라인의 소통은 적당히 혹은 충분히 수다를 떨고 소근거리고 궁시렁거리고 희희낙낙하고...늘 그렇다는 건 아닌데...그래도 가끔씩이라도 속이 편하더이다. 진짜 굴비든 아니든, 이 매트릭스가 편안할 때도 있는걸요.

바람구두 2004-10-06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어느 순간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인간 관계 속에 제 자신을 놓아두면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너무 많이 치고 들어오는 사람들, 가족, 친구, 연인 그런 사이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죠. 이를테면 전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참견에 시달려온 탓에 참견이라 느끼는 순간 발끈해버리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애정결핍증이라 타인의 관심에 목말라 하며 누군가와는 소통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니까 저 자신도 마치 시계 진자처럼 오락가락한다는 거겠죠. 그러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찾아가는 걸 겝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물러나고, 물러나면 다가가고... 제가 마냐님을 좋아하는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당신의 오지랖이 무척 넓어 보여서입니다. 종종 나는 그걸 실감하곤 합니다. 아마 어느 순간엔가의 저는 그걸 또 못 견뎌하면서 당신을 괴롭히려 들지도(그러니까 누군가의 좀더 깊고, 친숙한 내면에 자리잡고 싶다는 욕심에)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떤지 몰라도 내 마음은 이미 당신과 많이 친하다고 신호를 보내는군요. 친한 만큼 제가 예의를 잘 갖출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마냐 2004-10-0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오지랖에 걸리셨군요...ㅋㅋㅋ (한편으론 쫌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제 '참견'에 조금 거리를 두고 싶다고 해서 상처받았던 일이 있거든요....스스로 오지랖을 컨트롤 할 수 없는 단계일까요? 음.)
암튼, 예의를 운운하시니 그게 '적당한 거리'일까 혹은 그보다 조금 먼걸까 생각해봅니다. 최근 가까운 지인의 무례함에 화가 났던 기억도 나는군요.

바람구두 2004-10-08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경우엔 친하다고 혼자만 생각하고 있거나 상대방이 양해해주지 않는 부분까지 무단침입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들을 겪고나니 나름대로 조심스러워지더군요. 공자가 괜히 예를 강조한 건 아니겠지요. 예라는 건 친할수록 삼가하라는 뜻일 테니까요. 제가 주제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타인에 대해 종종 한다는 것이 친소를 나누는 구분 근거가 되진 않아야겠지요.

딸기 2004-10-0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과 마냐님의 대화를 엿듣고 있자니,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군요.
블로그와 '참견'의 관계...
두 분 모두, 참 애정이 많은 분들입니다.
'헤이세이 폼포코'에 나오는 너구리들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