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를 곁에 두는 독서

"디오라마(diorama)"란 말이 있다. 국내에선 주로 밀리터리 플라모델을 취미로 하는 이들에게 익숙한 용어인데, 본래 디오라마란 근대 귀족들이 테이블 위에 미니어처 모델을 배치하여 과거의 역사적인 전투 장면 등을 재현해 즐기는 취미를 의미했다. 등신대 인형을 이용해 과거의 풍물 등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나 과학관 같은 전시 공간의 장치들도 디오라마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군인들을 주요 등장 인물로 하는 영화에서 과거의 전략, 전술을 논하는 장면에 등장하곤 한다. 예를 들어 조만간 개봉될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기병들은 어떻게 대군인 페르시아 경보병과 궁수대를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실제 전장이 되었던 당시의 지형대로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마케도니아 중장갑 보병과 기병대, 페르시아 병사들의 진형을 꾸며서 관찰해본다는 점에선 요사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펼쳐지는 워게임과 비슷하다.

지금 내 책상 위엔 세 권의 연표 책, "곁에 두는 세계사(석필)",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사(일빛)", "한국사연표(동방미디어)"가 있다. 늘 곁에 두고 다른 책을 읽을 때마다 틈틈이 꺼내서 연대를 대조해보거나 그 무렵 다른 문화권에선, 혹은 다른 분야에선 어떤 일들이 있었나를 함께 살피며 읽는다.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도전, 골든벨"이란 프로그램이 있는데, 어제 나온 문제 중 하나는 동서양의 여러 위인들 가운데 주로 활동했던 시기가 가장 늦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문제가 나오는 까닭은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그저 인물의 활동연대를 아는 것이지만, 중요한 본질은 동서양을 교차하는 시기별 사건들을 함께 이해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장군이 되어 토번(티벳)과 사라센 제국과의 연합을 저지하는 정벌에 나선다. 1차 정벌(당의 입장에선 정벌이고, 티벳 입장에선 침공인)엔 성공했지만 지나치게 가혹한 전후 처리로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다시 정벌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탈라스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곧 죽임을 당하고 만다. 탈라스 전투에서 패해 사라센 제국으로 끌려간 당나라 군대의 포로들에 의해 제지기술이 사라센에 알려지게 되고, 이것이 다시 유럽으로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비록 대단히 느린 속도로 전개되긴 했으나 소위 신대륙(아메리카) 일부를 제외하고  당시 세계도 서로간의 문명 교류를 지속해 왔다. 학교 교육 과정에서 연표란 재미있어 마땅할 역사 교육을 단순 암기 과목으로 전락시키는 지탄의 대상이다. 하지만 AD 751년을 기점으로 해서 유럽에 제지 기술이 전파되기까지의 과정들, 고구려의 멸망과 고선지, 티벳, 사라센 제국, 제지술 등등 그것을 역사로 보든, 지식으로 보든  폭넓은 안목을 길러내기 위한 독서에서 연표가 빠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태정태세문단세"하는 식으로 왕조의 순서를 외우는 방식 말고 정말 전체적인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연표 공부가 필요한데, 이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종종 서구 선진국 학생들이 이라크는 어디에 있는지,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는지 세계전도를 놓고 찾지 못하는 광경을 보면서 그네들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네들의 교과서를 보면 그게 과연 교육만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와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그들은 특별히 이라크가 어디에 있는지 알든 모르든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삶의 조건 속에 있는 반면, 예를 들어 미국 미네소타의 한적한 시골 구석에 살고 있는 한 어린이는 평생동안 미네소타 주경계지를 벗어나지 않고 살아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인 반면,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한 아이는 살아있는 동안 한 번도 미국에 가 볼 일은 없지만 미국의 오대호 연안 공업지대와 워싱턴 D.C와 뉴욕 선물 거래 시장의 동향에 민감해 하지 않고선 살아가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다.

음,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고, 나는 좀더 양질의 독서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구비 서적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1. 국어사전, 2.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3. 세계사 연표, 4. 지도책이다. 일단 이런류의 책들이 완비된 서재를 갖고 있다면? 하는 소망을 품어 본다. 물론 내가 다니는 회사엔 이런 것들이 완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백과 사전 한 질을 집에 두고 싶다는 내 욕심엔 변함이 없다. 세계사 연표의 경우엔 "석필"에서 나온 "곁에 두는 세계사"가 비교적 괜찮다. 다만 한 가지 늘 아쉬운 점은 '아틀라스(atlas)'판 지도책에 연표가 곁들여진 책이 국내에도 있었으면 하는데 그런 류의 책은 여간해서 구하기도 어렵고, 설령 구했다고 하더라도 주로 외국책이라 외국어를 못하는 이들에겐 무용지물에 가깝다는 거다.

만약 나에게 그럴만한 재산이 있다면... 평생을 바쳐서라도... "내셔널 지오그라픽"에서 가끔 부록으로 끼워주는 그런 지도, 손으로 정성스럽게 그린 일러스트와 지도를 곁들인 연표로 구성된 세계사 책을 시리즈로 만들어 보고 싶다. 어찌보면 산업 기밀이랄까,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겁없이 누출시키는 건, 이런 아이디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내에선 이런 엄청난 출판기획 시리즈에 감히 도전장을 낼만한 자본도, 기획력도, 그렇게 손으로 일일이 그려서 보여줄만한 식견과 표현력을 지닌 일러스트 작가(지도는 더더군다나 어렵다)들을 발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을 기술한 세계사 연표와 지도책이라고 해보자. 우선 알렉산더 대왕의 출발지라 할 수 있는 마케도니아의 자연과 문화, 유적을 소개하는 지도와 일러스트로 그린 마케도니아의 여러 풍물들을 보여주고, 거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어린 시절 무렵의 연표를 삽입한다. 다음 장엔 그가 떠나는 원정 길의 도시들, 페르시아와 기타 지역의 모습들을, 전쟁 삽화와 군진 배치, 무기와 전술에 대한 캡션, 부대 이동 경로 등의 도판과 도해를 삽입하고, 이후 건설되는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들과 도시들, 제국의 붕괴 이후 각 왕국들의 모습, 특징 등을 함께 보여준다. 이후 부록이나 기타 다른 경로로 현재의 도시들과 지명을 이와 비교해주는 것도 재미있을 거다.

그렇게 되면 머리속으로 펼쳐지는 디오라마를 가질 수 있게 되고, 다른 사건들과 비교해가며 입체적인 그림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 독서가 된다. 아쉽지만 현재로선 이런 그림들을 나홀로 머리속에 만들어두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이런 책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공부할 수 있다면 어린이들의 세계 인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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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2-27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은 반칙이 너무 많아요. 리뷰도 아니면서 제 보관함을 또 살찌우면 어쩌라구요!!!

바람구두 2004-12-27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석필 것이 아직 나온다면 그 책을 구입하심이...

속닥님! 뭐 추천 두 번 누르기가 가능하다면 저야 좋지요. 흐흐. 화장실 가서 그냥 나오지만 않으신다면야...

조선인 2004-12-27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석필 거로 마이리스트에 추가해놨습니다. 이건 또 언제 사서 언제 읽나 ㅠ.ㅠ

바람구두 2004-12-27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런 책은 사서 한 번에 주욱 읽는 책이 아니라... 늘 곁에 두고 참고할 때 보는 책이라니깐요.
 

메리 크리스마스! 여러분!

언제부터 서재를 시작했고, 여러분들 눈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절 즐겨찾는 분들이 꾸준히 늘어나 어느새 430분이나 되네요.
싸이나 블로그도 하나 있지만 거의 폐허를 만들어놓고 있기에
서재에서의 제 꾸준한 행보는 사실 이곳이 블로그의 성격이지만
싸이나 블로그처럼 아무나 들락거리는 곳이라기 보다는
비슷한 취미를 가진 이들을 중심으로 한 탓이겠죠.

누군가는 개인 홈피를 "자아과잉의 마스터베이션"이라고 하던데
일 대 일로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메신저나
일 대 다수로 운영되기 마련인 개인 홈피 게시판
일 대 다수지만 유저들끼리의 비교적 수평관계인 블로그가 있는데
알라딘 서재는 그런 점에서도 참 독특한 커뮤니티 공간입니다.
아마 그런 탓에 저도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지 싶습니다.

지난 한해 ...
이곳에서 까불기도 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무엇보다 "바람 쓸쓸한 서재, 풍소헌"이라 이름지어놓고도
은둔 보다는 수다스런 서재로 만들지나 않았나 싶어
반성도 됩니다.
마음 많이 쓸쓸했는데, 이곳에 스며들고 난 뒤
일일이 이름을 호명할 수조차 없이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으며
기분 많이 좋았었지요.

한 해를 마감할 때는 마치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선량해지는 모양입니다.
지난 한 채 찾아주시고, 좋은 글 남겨주신 이웃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새해엔 좀더 진중하면서도 밝은 서재 만들기에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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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12-2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urblue 2004-12-24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일찍 퇴근하라네요. 지금 나갑니다~)

stella.K 2004-12-24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엔 어떻게 하면 즐찾을 꾸준히 늘릴 수 있는가 특강 한번 하시죠. 흥흥~ 메리 크리스마스.^^

바람구두 2004-12-24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꾸준한 홍보, 피아르만이 즐찾을 늘일 수 있다는 걸 모르시나이까? 흐흐.

즐찾 430은 그래서 나오는 거랍니다. 예끼 사람들하곤... 메리 크리스마스라니깐.

▶◀소굼 2004-12-2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30의 즐거운 스토커: ) 얼블루님은 좋겠습니다~;

진/우맘 2004-12-24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

(라이벌이라더니, 헹....430명에 갖다 댈 방법이 없잖아요~ ㅠㅠ)

로드무비 2004-12-24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이렇게 성실한 카드를 올리시면 제가 부끄럽잖아요. 흥=3

저더러 계속 당돌했으면 좋았겠다고 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니 힘에 부쳐서요.

이젠 성실함과 다정함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답니다.히히.

바람구두님 만나서 무지 즐거웠습니다.

앞으로 이런저런 이야기 많이 나눴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성탄절 멋지게 보내시기를......^^


▶◀소굼 2004-12-24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몇분 모아서 크로스합시다;;앗; 중복은 무효?;;

물만두 2004-12-24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한수 위구려. 캬캬캬... 또 메리 크리스마스... 님 없는 알라딘을 어찌 생각할 수 있으리요^^

플레져 2004-12-24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셔요~

님의 서재는 점점 백과사전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주 서재의 달인 31등....
아깝게 5,000원의 행복을 놓치셨군요. 흐흐.
저는 지난 주 탱자탱자 놀았는데...
간신히.....
5,000원 타먹게 되었군요.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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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12-20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로 마냐님 염장 지르지 마시고 밀린 페이퍼나 올리시죠.>.<;;

진/우맘 2004-12-2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런 글을 보면, 바람구두님도 귀여운(?!) 분이구나...싶어지면서, 이상하게 안심이 돼요.

페이퍼나 리뷰를 볼 때는 인간이 아니라 슈퍼 컴퓨터인 줄 알았더니, 똑같이 5000원에 기뻐하고 순위에 연연하는 사람이로구나....하는 묘한 안도감.^^;;

진/우맘 2004-12-20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아냐 아냐. 놀아도 5000원이라니!!!! 슈퍼 컴퓨터 맞는 거 아닐까. ㅡ,ㅡ;;

바람구두 2004-12-20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마왕에서 슈퍼컴까지....

헤롱헤롱....

바람구두 2004-12-2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해철이 아저씨가 화낼 텐데...

아영엄마 2004-12-20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마왕님은 설렁설렁~ 놀아도 서재 방문자가 100명이 넘는군요. 부럽다...@@~~

10124092


바람구두 2004-12-20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글쿤요. 흐흐....

물만두 2004-12-20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염자페이퍼에 이리 댓글을 많이 다시면 바람구두님 바람드세욧^^

바람구두 2004-12-20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따우....

마냐 2004-12-23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컥, 이 염장질에 댓글다는데 며칠이 걸린겁니까. 저, 왜 이러구 사는 겁니까..엉엉.
 

연말이 되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잖아요.
그래서 마이페이퍼 검색 기능에 바람구두란 닉을 넣고 검색해보니...
꽤 재미난 글들이 많네요.
그 중 하나 제가 알라딘에서 처음 주목받기 시작할 무렵인가 본데
마태우스님이 올린 글이 있어서...

-이 사람을 주목하라
리뷰의 아티스트 바람구두가 알라딘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알라딘 마을에 가서 "마이리뷰추천작"을 추천순으로 클릭하여 1위에서 10위 사이를 보니 한 권 빼고 모두 제가 쓴 글들이었습니다. 이걸 기분 좋다고 해야 할지 두렵다고 해야할지....어쨌든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는 기분이 참 좋군요 서재주소:
http://windshoes.new21.org

한편 바람구두는 앞으로 20일간 잠정적으로 리뷰 쓰는 걸 중단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에 대해 문학소년 조선남자(24세)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그랬을 것"이라며 "이 기회에 나도 이주의 리뷰에 당선되야겠다"며 기염을 토했습니다. 바람구두가 돌아오기 전에 1등 한번 해봅시다!

알라딘 뉴스레터 > 알라딘 뉴스레터 3호 (댓글:25, 추천:4)

- 마태우스(mail), 2004-05-10 22:44

제 닉 "바람구두"가 언급된 거의 최초의 글이 2004년 5월 12일의 마태우스님 글이었어요.
그후에도 마태우스님이 절 여러번 언급해주셨네요.
이 자리를 빌어 마태우스님의 관심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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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12-19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구나....나도....

=3=3=3

▶◀소굼 2004-12-24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었죠;
 

시대의 아픔과 역사적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 체험! 삶의 현장!  2004/12/14 06:42 
 
http://blog.naver.com/wonheeryong/100008517133 
 
원희룡(국회의원) 

먼저, 이미 재판이 끝나고, 이제는 사면복권까지 이루어진 이철우 의원을 놓고
근거도 없이 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한나라당의 행동은 도가 지나친 행동입니다.

이철우 의원과 관련한 이번 일들은 과거 재판을 받아, 그에 따른 대가를 치룬 사안입니다.
동시에, 이철우 의원 스스로 현재는 이념이나 생각을 바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불행한 시대상황 속에서 이뤄진 행위에 대해
이념과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지금의 진실공방은
종교재판에 다름 아니며,
이는 마치 공안검사가 피의자를 취조하는 격입니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과거 공안검사의 취조실로 변조시키는
지금의 이런 공방에 국민은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
.
이철우 의원 사건은 우리가 껴안고 나아가야 할 시대적 아픔의 한 부분입니다.
굴곡이 심했던 한국 현대사는
건국 당시의 좌우 대립과 산업화 시기의 소외를 거쳐
민주화 시기의 격렬한 반독재 투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대적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런 우리의 질곡의 역사 속에는 소외되고 고통받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건국시기에 좌우 이념 대립 과정, 산업화 과정, 민주화 과정에서 생긴
시대의 아픔들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번 이철우 의원을 둘러싼 공방은
우리 한나라당에게 이같은 시대와 역사의 아픔,
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치유해야만 하는 소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한나라당은 단순한 진실공방에서 벗어나
시대적 아픔을 치유하겠다는 역사적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한나라당은 이런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온 몸으로 껴안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한나라당은 대승적 견지에서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을
국민 통합의 과정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나라당은 이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우리 역사의 미래의 동력으로 삼는 새로운 리더쉽을 국민 앞에 보여줘야 합니다.
.
.
저는 국내에 주체사상을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강철 서신” 김영환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었습니다.
학생운동 시절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시 그가 주장했던 "수령론" 등의 주체사상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김영환에게
주체사상에 근거한 운동은 옳지 않다고 만류했었습니다.
그때 그랬듯이, 저는 지금도 주체사상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 역시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주체사상에 경도된 사람들이 일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역사와 삶의 경험 속에서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는 그들의 말을 믿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한때 주체사상에 경도되었지만,
이제는 우리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새로운 선택과 노력을 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포용하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
.
한나라당은 자유민주주의를 제 1의 가치로 삼고 있는 정당입니다.
한나라당은 다양성과 다원성을 인정하고,
서로 다르지만 서로 공존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바로 자유 민주주의적 리더십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한나라당이 말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리더쉽임을
우리는 인식해야만 합니다.
 

PS : 이 글은 이철우 의원과 관련한 지금의 공방이 시작된 지난 8일 이후,
9일 있었던 한나라당 최고의원 비공개 회의를 시작으로 수요모임,
어제 있었던 한나라당 비공개 의총에 이르기까지
한나라당내 모든 공식적인 회의 자리에서
제가 그동안 계속적으로 일관되게 발언했던 내용입니다.

그동안 블로그에 아무런 덧글도, 포스트도 올라가지 않았던 점에 대해
많은 이웃분들이 왜 침묵하고 있느냐?
장고의 시간에 빠진 것이냐? 등의 질문들을 해 오셨습니다.

아울러, 이같은 저의 일관된 문제제기 역시
그동안의 당내 회의가 모두 비공개로 열린 관계로
언론에게 제가 이번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져
그동안 언론으로부터 침묵하고 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 저의 블로그는
원희룡의 진실한 속마음을 가감없이 적어 놓을 수 있는
저만의 조용한 공간을 가지고 싶었던
저의 애초의 소망과는 달리,
포스트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덧글 하나 하나까지 언론에 기사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 사안의 중대성을 비추어 볼 때,
언론에 먼저 이야기하기 보다
당내에서 뭇매를 맞는 한이 있어도,
당내 모든 공식 회의 기구에서 먼저 이야기하고,
우리 스스로의 반성과 변화를 호소하고, 또 촉구하고 싶었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인해 그동안 포스트를 작성하지 못했고,
여러분들의 글에 답변 글을 달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이웃들의 양해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이번 이철우 의원과 관련한 저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어제 의총으로 인해 당내 공식적인 회의 기구에서
저의 입장 표명과 문제제기를 충분히 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내 공식적인 회의 기구에서
이번 사안에 대한 저의 입장을 충분히 밝혀왔고,
또 충분한 설명과 문제제기를 진행한 이상,
이제는 더이상 언론의 질문을 회피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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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은 원희룡 최고위원을 출당조치한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아무리 소장파의 대표격이라 해도 자당에 이런 막말을 한 것은 지나친 해당행위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지도부의 숙의 끝에 원의원을 출당조치키로 결정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불쌍하다! 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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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2-14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이름은 바꾼다던데 막가당이 어울릴 것 같군요. 아님 절대안변해당이나. 에잇...

urblue 2004-12-14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한나라당 어쩔려고 저런대요.

깍두기 2004-12-1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건전한 사람이 한나라당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원희룡 의원이 한나라당에 계속 있고 싶으면 같이 더러워지는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더러워진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김모씨, 이모씨 등....

원희룡의원에게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해 보아야겠습니다.

바람구두 2004-12-14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한나라당이 자기네가 언제 그랬냐고 했다는 군요. 출당조치한 적 없다고 다시 기사가 올라오네요. 에고... 불쌍한 원희룡 의원이네요. 흐흐. 차라리 출당당하는 게 나을 뻔 한 거 아닌지....

마냐 2004-12-14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나라당이 완전 골로 가는구나...하다가, 출당조치 결정한바 없다길래...그럴 줄 알았다...며 쓴웃음만 지었습니다. 아까 마감시간 앞두고, 정말 확인하느라 고생했슴다.....깍두기님은 '저렇게 건전한 사람'이라 하시는군요...흐흐...저도 최근 한번 인터뷰해봤는데, 사람 괜찮군...했었죠..그런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천상 정치인'이라 하더군요...별로 안 좋은 뜻에서요..ㅋㅋㅋ

외로운 발바닥 2004-12-14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것이 제1야당의 모습이라니...평소에도 알고 있지만 왠지 더 씁쓸해지네요.

퍼갑니다.

깍두기 2004-12-1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정치인들 대부분의 마인드가 일반인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겠어요^^ 원희룡이라고 거기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고...그래도 어제 다큐멘터리에서 '4대악법(허허허) 개악 저지 집회' 어쩌구 하는데 나와서 팔을 휘두르며 '자유대한 나의 조국 길이 빛내리라'를 부르고 있는 김문수를 보니 참 기가 막혀서....

바람구두 2004-12-1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문수... 그 사람은 너무 열심히 살아서 문제인 사람이죠.

조금만 게을러도 낙선했을 텐데...

저도 주변에서 정치인들을 제법 만나게 되는데 "그들만의 리그"엔 묘한 분위기가 있어요.

일종의 특수직업군이 지니는 그들만의 정서랄까?

유시민 의원 같은 경우에도 이미 그런 냄새를 풍기지 않던가요.

제가 개인적으로 접해 본 이들 가운데는 김원웅 의원이 그나마 낫더군요.

그런데 정치적인 입장과 사람은 또 다른 가봐요.

한화갑 의원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지만 또 접해 보면 괜찮은 사람이더라구요.

정치적 입장은 마음에 드는데 싫은 사람도 많고...

아, 헷갈린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