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나의 독서 편력
정식으로 일기를 쓰지 않게 된지 어느새 4년여가 흘렀다. 그러다보니 내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게 되었다. 여기저기 글을 토해내면서도 정작 스스로를 돌보지 않게 된 거다. 2004년이 시작될 무렵 나는 무엇을 계획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확실히 한 가지 계획은 이뤘다. 그건 외국 시인들의 시집을 중심으로 하는 독서계획 만큼은 일정하게 성취를 거뒀다는 거다. 주로 과거 작은 판형으로 가지고 있던 민음사 세계시인선과 솔출판사에서 나온 외국시인선을 다시 읽거나 새로 읽었다. 전체적으로 올해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헤아리지는 않았다. 또 한 가지 올해는 서양 중세사를 중심으로 하는 책 읽기를 계획했었는데 그것도 완만하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성과는 있었다.
올 2004년 내가 처음 올린 리뷰는 "바람의 검심(2004년 3월 11일)", "비빔툰", 이라는 만화책과 이성형 선생의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이었다. 아마 알라딘 서점에 회원으로 가입한 2000년 6월 이래 가장 많은 서평을 올린 한 해인 듯 싶다. 정확하게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올해에만 대략 170편 가량의 리뷰를 올렸다. 그 가운데 소설에 대한 리뷰는 단 하나 "항우와 유방"을 제외한 나머지는 시집과 DVD, 음반 몇 종과 인문사회과학 서적 중심이었다. 솔직히 소설을 읽지 않게 된지 어느새 5-6년여는 된듯 싶다. 그렇게 올린 170편의 리뷰 가운데는 물론 처음 읽은 것들도 있었지만 과거 읽었던 것을 정리 삼아 올린 것들도 상당수가 된다. 물론 읽고서도 리뷰를 올리지 않은 책도 상당수 있는데, 읽고서도 리뷰를 올리기 어려운 경우는 대개 두 가지 경우이다.
하나는 너무 좋았지만, 읽고 난 뒤 리뷰할 만한 재주가 없어서 보류해둔 것들, 리뷰하려다가 까먹고 지나간 것들 같이 나름대로 긍정적인 이유가 있는 것들과 뭐라 리뷰를 해야 할지 모를만큼 우스운 책들도 몇 권 있었다. 대개 책을 구입한 뒤 후회는 하지 않는 편이지만, 어느 경우에도 리뷰나 페이퍼를 써야 한다는 강박 증세가 생겨날 수 있는 상황을 경계한다. 예컨대, 리뷰나 페이퍼는 점수나 순위보다는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써야 한다는 게 내가 서재를 하는 원칙이다. 다만 한 가지 되도록이면 서재순위 30위 안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꼬박꼬박 5,000원씩 지급되는 일주일치 머니에 길들여진 탓이라고 해두자.
한 달이 4주니까 4주 연속 서재 30위 안에 들면 2만원씩 축적된다. 1년이 52주니까 1년을 꼬박 잘하면 26만원어치 책을 공짜로 살 수 있다. 게다가 알라딘 서재질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지난 3월 마지막 주엔 이주의 리뷰에 뽑혀서 5만원, 4월 이 달의 리뷰에 뽑혀서 10만원, 그리고 언젠가 이주의 리스트와 리뷰(10월 마지막주)에 뽑혀서 대략 25만원 정도의 혜택을 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알라딘 서점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고객은 아니길 바란다. 지난 1년간 알라딘 서점에 나는 모두 18번(같은 날 주문한 것은 1회로 계산하여)을 주문했고, 알라딘에서만 한달 평균 180,000원 정도 어치의 책을 구입했다. 그 결과가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이니 쇼핑몰과 거의 친하지 않은 나로서는 알라딘에 대해서만큼은 과잉충성하고 있는 셈이다. 한 달 내 용돈 가운데 3분지 2가량이 책값으로 나가다 보니 다른 문화생활은 거의 포기하고 살 수밖에 없다.
내년엔 초긴축 재정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으니, 책값을 좀더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내 오프라인상의 서재를 모두 뒤져 그간 리뷰를 올리지 않은 책들이나 리뷰하며 버텨야 할지도 모르겠다. 돈은 없는데 보고 싶은, 보아야 하는 책은 늘어나는 형편이니 죽을 맛이다. 흐흐. 어째 2004년 지난 한 해의 독서편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앓는 소리만 해대는 것 같다.
이왕 앓는 소리를 시작했으니 올해 꼭 읽고 싶어서 구입했거나 나의 독서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읽어내지 못한 몇몇 책들을 소개하는 걸로 마무리 짓는 게 좋겠다. 올해 나는 그간 취약했던 과학 분야 독서를 시작하려 했는데 거의 읽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고전에 속하는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다이제스트판 말고 제대로 읽어 볼 욕심에 까치글방에서 나온 것으로 구입했지만 여전히 책꽂이에 꽂힌 채 기다리고 있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도 열린책들판으로 읽으려다 못 읽고 말았다. 조셉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축약본 1,2권, 이매누얼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1.2.3." 도 역시 그에 해당하는 책이다. 서양중세사 읽기의 일환으로 구입했던 리처드 루드글리의 "바바리안"과 노만 F. 캔터의 "중세 이야기"는 읽다가 재미없어 중도에 포기한 책이었다. 테리 이글턴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은 최근에 구입해서 아직 못 읽었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1권부터 차근차근 읽어오고 있었는데 가장 최근작인 "위기로 치닫는 제국"까지 읽었는데, 나머지 시리즈가 언제 완간되는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아마 서평을 하게 된다면 오부지게 욕을 해줄 작정이긴 하다. 황석영의 삼국지 역시 다 읽었지만 "삼국지"에 대한 나의 애착이 섣부르게 서평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책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정수일의 책들은 모두 구입만 해놓고 묵혀두고 있는 책들이다. 에릭 홉스 봄의 "만들어진 전통" 역시 읽어야지 하고 벼르기만 하고 있다. 그외 "반투 스티브 비코"를 비롯해 "장일순" 선생, "제정구" 의원 등에 대한 평전 역시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풍우란의 "중국철학사" 상하권도 매일반이다. 조셉 니덤과 함께 중국에 대한 책읽기 편에서 함께 완독할 책이다. 올해 특별히 테마읽기 한 것은 모두 세 가지 시리즈였는데 서양중세사 읽기와 외국 시인선 읽기,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시공디스커버리총서 편에서 인물편 시리즈 읽기 세 가지였는데,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는 어쩐지 리뷰한다는 게 우스워서 하지 않았다. 아마 이 시리즈를 내년에 리뷰 올리기로 마음 먹고 한다면 대략 30-40권 정도 될 텐데... 글쎄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외 올해는 원고청탁을 받은 몇몇 책들 때문에 지출이 다소 늘어난 편이었다. 대개 1권짜리 서평 청탁을 받는 경우엔 청탁자가 책을 보내주는데, 테마 읽기의 경우엔 집필자 자신이 책을 구입해야 하는 경우라서 책값이 원고료보다 많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다가 올해 그렇게 청탁 받은 원고 중 하나는 그쪽 편집자와 코드가 잘 맞지 않아서 공연히 책값만 날린 경우도 있었다. 이럴 경우 아주 곤란해지는데 그렇게 해서 구입한 책이 5-6권 정도 된다. 올해 특별히 공들여 알고자 노력한 인물들은 조지 오웰, 루쉰, 김남주, 로자 룩셈부르크 였다. 이들에 관한 책을 각각 5-6권씩은 구입해서 읽었다. 이외에 미술관련 서적 몇 권을 읽었는데 "여성주의"가 우리 사회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현실을 반영하듯 미술 서적들도 "페로티즘"이나 "팜므파탈" 같은 책들을 읽었다. 이 가운데 "페로티즘"은 리뷰를 올리지 않았다. 나중에 올리지 뭐...
올연말을 보내면서 지난 한 해 읽기로 하고, 읽지 못했던 책들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신간 서적들은 되도록 읽지 않는다는 내 나름의 독서 원칙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신간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충동적으로 구해서 읽은 책들이 꽤 많은데 대체로 좋은 독서체험이었지만, 몇몇 종은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광고에 속은 기분이 들 때마다 예전의 경험들 - 오프 라인 서점에 가서 실제 책을 들쳐보고 마음에 들면 구매하는 - 이 인터넷상에서 얼마나 필요한가를 되새기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올해 서재 생활을 하면서 리뷰 점수 주기에 너무 후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든다. 혹시라도 내가 올린 글 때문에 혹해서 샀다가 그로 인해 후회하게 된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린다.
올해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들은 별도의 마이리스트를 뽑아 올렸으니 그걸 참고해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