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 서광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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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는 그의 저서 <영구 평화론>에서 제목 그대로 '영원한 평화'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영구 평화론은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영구 평화론이란 분쟁과 다툼 그리고 전쟁이 없는, 유토피아와 같은 그러한 이상향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칸트의 그것은 '전쟁의 가능성'을 둔 세계를 그린 것이다. 모순적인 이야기라 생각되어지지만, 칸트가 이야기하는 '전쟁의 가능성이 있는 영구 평화론'은 모순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이상을 접고 현실에 맞는 '주장'이다.  

   일반적인 평화론이라면 전쟁의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것이 평화를 위한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할테지만, 칸트는 오히려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영구 평화론이란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전쟁이란 상황은 인간의 이성으로 제어되고 측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는 오직 죽고 죽이는 살육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칸트는 영구 평화론을 주장하면서 이런 전쟁의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칸트가 전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직전의 긴장상태가 자유를 발생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추측해본 인류 역사의 기원]이라는 논문에서 "그래서 양 진영 사이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발생하거나 혹은 그러할 위험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양 진영의 국민들은 내적으로는 최소한 매우 귀중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칸트는 전쟁이란 "문명화된 민족을 위협하는 최고의 악은 전쟁"이라고 이야기 함으로써 전쟁의 부당함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칸트가 이야기 하고자하는 것은 전쟁이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최고의 악이지만,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긴장상태에서 인간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고자 하려면 강대국이 되어야 하는데 강대국은 부를 필요로 한다. 부를 필요로 하려면 부를 생산할 수 있는 활동이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자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쟁의 긴장관계속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허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는 전쟁 직전까지의 국가간의 긴장관계가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전쟁의 발생은 원치 않고 전쟁의 긴장관계만을 위해서라면, 또 그것이 영원한 평화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누군가의 조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느 한 국가가 모든 전쟁을 승리하게되면, 그 나라에 의해 평화는 올지언정 인간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러한 상황을 [추측해본 인류 역사의 기원]에서 창세기를 빌어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정은 각 국가들의 연합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칸트는 단순히 '영원한 평화'만을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자유'또한 중시하였다. 만약 칸트가 말 그대로 '영원한 평화'만을 위해 글을 썼다면 먼 옛날의 로마시대처럼 초강대국에 의한 평화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평화를 바라면서 그와 함께 인간의 자유또한 추구하였다. 이것이 그가 영원한 평화를 바라면서 전쟁의 가능성을 필요로한 까닭일까?   

 

* 각주 

내가 이제 땅 위에 홍수를 일으켜서,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쉬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쓸어 없앨 터이니,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창세기 6장 17절) 

   칸트는 이 구절을 두 민족(가인과 아벨의 자손)이 서로 융합함으로써 그럼으로써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게 되어 모든 자유가 사리지고 강력한 전제군주가 시작되었고 그로인해 인류는 자연을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위엄을 잃게되었다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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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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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 Meninas(궁녀들), 부분> 디에고 벨라스케스 作 (1656년)

   에스파냐의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그중 유명한 것은 왕녀 마르가리타를 그린 작품들이다. 위 그림은 마르그리타 공주와 그 주위에 궁녀들이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공주 주변에는 '세상의 모든 빛이 집중된 것 같이' 빛나고 있다. 반면에 오른쪽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일그러진 표정을 한 여자 난쟁이 궁녀가 있다. 여자 난쟁이의 뚱뚱한 몸과 일그러진 표정은 어린 마르가르타 공주와 비교되어 더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림의 주인공은 마르그리타 공주이지만 벨라스케스는 이 작품의 제목을 <Les Meninas(궁녀/시녀들)>라 지었다. 첫번째 아이러니. 혹은 비교대상을 더욱 부각시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을 더 빛나게 한 예술가의 잔인함.

   마르그리타 공주는 15세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1세와 결혼했으나 22세가 되던 해 넷째 아이의 출산 도중 사망했다. 후에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마르그리타 공주의 비극적 삶에 영감을 얻어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했으며 후에 관현학곡으로 편곡했다. 그게 바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파반느는 궁중무곡을 가리키는 단어다. 죽은 왕녀인 마르가르타를 기리는 곡이었으면 조곡이 되어야 할텐데 무곡이라 명했다. 그리고 곡은 무곡임에도 불구하고 서정적이고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무곡이라 하기엔 제목의 '죽은 왕녀'라는 제목의 중압감이 느껴지고, 조곡이라기엔 꽤나 서정적이고 애잔한 곡. 두번째 아이러니.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역시 이런 아이러니에서 시작한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 이야기.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이거 자기 기만 아닌가? 대한민국 일반 평균치의 남자들이 어떤 존재인데... 얼마전 방영한 [재밌는 TV 롤러코스터] [남녀탐구생활]에서 밝힌 남자의 연령별 이상형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남자의 나이대별 이상형
1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2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3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4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5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60대 남자의 이상형 : 예쁜 여자예요. 

   이런 게 남자다... 하지만 박민규는 시침 뚝 떼고 이 말도 안돼는 러브스토리를 진행한다. 그것도 정극으로. 첫 장(章)을 읽었을 때 난 박민규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글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12월 겨울의 눈내린 교외.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는 두 남녀. 만남. 헤어짐. 그리고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난 박민규가 '작심하고' 러브스토리를 쓰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두 번째 장부터 박민규의 우스꽝스럽지만 슬픈 우리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두 주인공은 사랑을 한다.  

   이 소설에서 박민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추의 굳어진 관습을 무력화시킨다. 아름다움이 시선을 끌듯 추함도 시선을 끈다. 그 둘은 양극단에 위치해있지만, 본질적으로 통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이가 들면서 묻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우리는 유한적인 아름다움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박민규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빛을 조금씩 더 얻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처럼. 세상의 빛을 받고 있는 저 마르그리트 공주처럼. 그 옆에 있는 추한 궁녀처럼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의 빛을 받으면 무엇이 남는데? 

   우리의 삶은 '와와'와 '쯧쯧'에 지탱되어 왔다. 조금만 잘하면 '와와', 조금만 잘못하면 '쯧쯧.' 성장기때에만 이러는 줄 알았는데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명문대를 나오면 '와와' 그렇지 않으면 '쯧쯧.' 대기업에 다니면 '와와', 그렇지 않으면 '쯧쯧'. 연봉이 시원하면 '와와' 그렇지 않으면 '쯧쯧.' 이토록 남들이 정해놓고 남들의 '와와'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모습이 '이상적이고 바른' 롤모델로 정해져있는 2009년에 박민규는 "그렇게 아둥바둥 살 필요 있어? '와와'소리 안 들으면 어때? '쯧쯧' 소리 좀 들으면 어때? 네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자, 내 얘기 한 번 들어봐봐."라고 슬며시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난 실제로 그 선동에 넘어갔었다. 작년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다. 연봉이나 복지는 저번 회사보다 확실히 떨어지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나와 가족을 위한 시간을 보장받는다. 똑똑하게 살지는 않지만 행복하게는 살고 있다. 그리고 박민규는 내 이런 선택을 존중하기라도 하듯 이번 소설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2009년은 (<삼미...>를 발표한) 1998년보다 점점 더 황폐해지고 있다. 국가는 부유해지고 있으나 개인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사랑'뿐이다. 비록 그 사랑이 '슬픈 해피엔딩'일 지라도. 

   사랑이 있으면, 사랑을 하면, 비록 상처받을지라도 이 힘든 세상을 '같이'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1. 박민규 작가의 인용은 점점 더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구영웅전설>에서는 마블코믹스의 히어로들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는초창기 프로야구를, <핑퐁>에서는 인터넷 덧글과 엘엘쿨제이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벨라스케스, 라벨, 비틀즈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가 대중문화에서 순수예술쪽으로 넓어지는 것 같으나, 그의 글을 읽으면, 이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순수'문학과 문학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 처럼요.

2. 뒤의 Writer's Cut을 처음 읽었을 때는 '사족'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왠지 슬퍼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해피엔딩'은 소설에서나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3. 지금껏 박민규 작가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만 글을 써 왔습니다. 팬의 입장에서는 그가 쓴 3인칭 관찰자 시점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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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화 되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난 반댈세.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1-27 09:32 
    0.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영화화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영화화 된다고 한다. 감독은 수백편의 CF를 제작한 오민호 감독이고 영화 제작사 아이디어 팩토리에서 제작을 한다고 밝혔다. (기사보기 클릭)      좀 더 기사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 &
 
 
 
삼국지 세트 - 전10권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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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삼국지는 책이나 글이 아닌 어떤 매체로서의 인상이 강하다. 그만큼 여러 경로로 삼국지를 접했기 때문이다. 

   처음 삼국지를 접한 것은 박홍근 작가가 글을 쓰고 신동우 화백이 그림을 그린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삼국지』였다. 당시 초등학생이 읽기에 엄청난 분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다 본 것은 신동우 화백의 그림때문이었다.(그렇다. 난 이당시 읽지는 않고 그림과 글자를 봤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림이 많을지라도 16권의 소설은 초등학생에게는 벅차다) 페이지마다 있는 그 그림이 없었더라면, 난 아마 그 책을 포기했을 것이다.  

   두번째로 접한 것은 1990년 MBC에서 신년특집으로 한 삼국지 애니메이션이었다. 블루 아이 섀도우를 바른 제갈공명, 꽃미남 유비, 금발머리의 조조(여기까진 그렇다 치자..), 조조를 연모하는 '여장수' 우금(응?), 닌자 부대를 이끄는 허저(뭐라?), 미니스커트(!)를 입은채 글라이더를 타고 날아다니는 여화(헉!!), 그리고 장엄한 결말은 유비와 조조의 일기토 대결(WTF!!). 말이 삼국지이지 삼국지의 인물들을 제멋대로 각색한 작품이었으나,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나와 같은 어린이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후에 3편으로 나눈 비디오 테이프를 교보문고 음반코너에서 기어이 사고 말았다.) 

   세번째로 접한 것은 같은해 여름에 개봉한 중국 영화 『삼국지』였다. 중학생 시절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국도극장에서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그당시 14살 중학생의 눈으로 볼때에도 영화는 참으로 허접했다. 한정된 러닝타임 안에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다루려니 캐릭터는 캐리커쳐가 됐으며, 스토리는 요약 이상은 아니었다. 2시간 30분 가량의 영화였으나, 이야기는 적벽대전까지밖에 다루질 못한 것도 미완성인 느낌이 들어 실망이 컸었다. 

   그리고 그 해 『이문열 삼국지』를 읽었다. 

   이전까지 읽(고 보았)었던 삼국지가 어린 마음에도 유치하다고 느꼈었더라면, 『이문열 삼국지』는 달랐다. 『이문열 삼국지』를 읽는 순간, 문장에 품격과 힘이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이전까지 임정진 류의 하이틴 소설들만 읽었으니 그 충격은 더했다.(그렇다고 그당시 하이틴 소설이 수준이 낮다는 말은 아니다. 난 단지 '필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 뿐이다.) 지금까지 '이미지'로만 익혔던 삼국지를 활자를 통해 머리속에서 재구성할때의 희열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어쩌면 난 처음으로 『이문열 삼국지』를 통해서 글을 읽는 방법과 즐거움을 익혔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기억으로 존재해있던 이미지와 단순한 개념(유비-착한놈/조조-나쁜놈)으로 이루어진 캐릭터가 처음으로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작가 이문열의 힘이고 공이다. 평면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원작 소설속의 등장인물들이 고뇌하는 모습과 컴플렉스를 드러내는 모습을 작가 이문열은 본인의 역량을 바탕으로 풀어놓았다. 그것만으로 500여년전의 옛소설이 21세기에 걸맞는 현대소설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이런 삼국지를 본적도 없었고, 독자들은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해 『이문열 삼국지』이지 『삼국지』는 아니다. 정본이 아닌 원형이판평역본이다. 안타깝지만, 『이문열 삼국지』는 『황석영 삼국지』『본삼국지』의 대열이 아닌, 『고우영 삼국지』『창천항로』의 위치에 서 있을 각색 삼국지이다.(『황석영 삼국지』 또한 갖은 오역으로 유명하지만, 여기선 작가의 의견을 빼고 정본에 가깝게 번역했다는 데 의의를 두어 이렇게 분류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문열 삼국지』를 정본으로 여기고 있다. 이미 엄청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책이지만, 아닌 것은 아니기에 언급해 봤다. 예를 들어, 도스또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기에 어렵다고 누군가가 읽기 쉽고 재밌게 각 인물들에게 살을 붙이고 그 해석을 단 작품을 낸다면, 그 책을 읽은 사람은 과연 도스또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숱한 오류(이것은 이미 『본삼국지』의 저자 리동혁이 쓴 『삼국지가 울고있네』에서 충분히 밝혔다)와 아전인수격 평역(6권 적벽대전에서 제갈량과 관우에 대한 고우영의 해석 -책에서는 '누군가'의 해석이라고 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고우영의 해석이다. 『고우영 삼국지』를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을 정사를 끌고와서 비웃고는 본인은 8권 관우의 죽음에서 그 해석을 차용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소설이여, 역사가 되어라!'식의 평역은 이 외에도 굉장히 많다)은 이 장쾌한 문체로 이루어진 소설의 수준을 끌어내리고 있어서 심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정본 삼국지가 몸에는 좋으나 맛은 없는 '웰빙음식'이라면, 『이문열 삼국지』는 조미료가 듬뿍 들어간, 자극적이고 맛은 있으나 건강에는 좋지 않은 '불량식품'이다. 물론 몸에 좋은 음식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으나, 때로는 불량식품에 끌리는 게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치켜세우기도 하고 깍아내리기도 했으나, 『이문열 삼국지』는 내게 있어 처음 활자로 접한 『삼국지』였다. 문체의 마력에 흠뻑 빠져, 나중에 『황석영 삼국지』『본삼국지』를 읽을 때 굉장히 힘들게 읽었었다. 정본을 읽어보면, 작가 이문열의 필력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작가 이문열의 필력을 느끼고 싶으면 『이문열 삼국지』를, 그렇지 않고 1800여년간의 시간을 견디어 낸 역사, 전설, 신앙, 민중들의 바람을 책으로 엮은 고전 『삼국지』를 읽고 싶으면 다른 판본을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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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천항로』작가적 상상력, 그 뛰어난 구라의 향연장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2-22 10:46 
       『삼국지』만큼 수많은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수많은 작가들이 각색한 작품은 없다고 본다. 독자들이 『삼국지』를 읽는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작가들이 『삼국지』를 각색하는 이유는 아마도 단 한가지인 듯 싶다.     흔히 말하기를 『삼국지』는 세푼의 허구와 일곱푼의 진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저 '세푼의 허구'가 작가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 것 아니었을까. 20세기 말에 삼국
 
 
 
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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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제목만으로 80점 먹고 들어간다. '황홀'한 글'감옥'이라니..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이면서도 지난 40여년의 작가 생활을 여실히 드러내는 제목이란 말인가. 작가 조정래는 정말 타고난 글꾼이 아닐까 싶다. 

   거칠게 말해 이 책에는 그의 생애가 들어있다. 이 책이 '유서'니 '자서전'이니 하는 말들은 괜시리하는 말들이 아니다. 그 역시 수많은 소설에서 풀어왔지만, 중심적이지는 않고 이야기를 전개시키기에 기능적으로 사용했던 그의 생애들이 이 에세이에서는 자세히 풀어져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이야기들은, 박현채 선생에 관한 일화, 국가보안법 기소, 그리고 영화 <태백산맥>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세가지 일들은 그가 20여년간 '자의로' 갇혀있던 '글감옥'에서 투옥(?) 중이었던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 더 각별히 느껴졌던 것 같다. 

   박현채 선생에 대한 글을 읽을 때는 마치 내가 다시 [태백산맥]을 읽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 시대를 겪은 인물이 품고있는 그 한의 내밀함이 소설 전체를 압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박현채 선생과 조정래 선생. 1988년 겨울 지리산 임걸령에서. (출처: 시사IN)

   국가보안법 기소는 거의 10여년을 끌었다는 사실에 내 자신이 부끄러워짐을 느꼈다. 내가 그 사실을 안 것은 내가 [태백산맥]을 힘겹게 다 읽고 난 고 2때였다. 당시 국어선생님께서 "전두환, 노태우때도 아무 얘기 없던 소설이 왜 문민정부에서 문제가 되는 거야!'하고 한탄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난 그 사실을 곧 잊어버렸다.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전까지만해도 대한민국의 매커니즘이 이렇게 복잡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그렇게 간단히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이 11년이 지난 2005년에서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에 난 그간 얼마나 안일하게 세상을 살아온 것인지 반성했다. 결국 세상은 변한 것이 없고 그대로이다. 다만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백성들의 힘'이 강해지고 실천력이 늘어났다는 데 희망을 둔다.  

 극우 단체의 전화 테러가 극성을 부린 1994년과 1996년에 작가가 남긴 유서 두 편 (출처: 시사IN)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에 대한 평가는 솔직한 마음으로는 조금 안타깝다. 물론 나도 고2때 그 영화를 극장에서 (몰래) 보고 실망을 했다. 소설에서 느꼈던 그 뜨거운 감정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년 전 DVD를 구입해 다시 봤을 때는 어떤 다른 감흥을 받았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조정래의 것이고, 임권택의 <태백산맥>은 임권택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같은 '지옥'을 경험했음에도, 그 경험은 그들 각자의 삶에 다르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옳고, 임권택의 <태백산맥>은 틀렸다'는 평가는 잘못됐다고 본다. 분노와 열정의 시선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 그들 두 작품을 껴안는 것이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우리들'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런지.  

 

영화 [태백산맥] 김범우와 염상구

   책에는 이 외에도 작가가 밝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얽혀있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3부작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book commentary'로 읽힐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해방 이후'부터(조정래 작가는 일제시대에 태어났지만-1943년 생-, 만 4살 이전의 체험은 무효라 생각한다) '현재'까지 살아온 우리 아버지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덧붙임 

더 관심이 있으신 분은 시사IN과의 인터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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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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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의 노래>를 읽고나서 처음 든 느낌은 황량함과 묵묵함이다. 그가 묘사하는 16세기의 조선은 죽음 그 자체다. 바다위에 떠오르는 목 없는 시체들, 죽은듯 살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조선 수군의 모습은비참하다 못해 그저 덧없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일상을 살아가듯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간다.  

   <칼의 노래>에는 전장의 긴박함이 없다. 인물들은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간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터에서 배에 들러붙어 있는 적군 병사들을 대낫으로 '걷어내는' 모습이나 살아남은 자에게 때마다 찾아오는 끼니를 견뎌내야 하는 모습은 본질적으로 삶을 견뎌내는 모습이다.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가는 모습은 지금 현재의 우리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모습은 이순신이 처해있는 상황때문일지 모른다. 전쟁 중 혁혁한 성과를 거둔 이순신은 임금에게 죽음을 당할뻔 하다가 일본해군의 승리로 가까스로 '죽음이 잠시 미루어진다.' 그를 죽이려는 적들덕분에 그는 살 수 있었고, 그가 목숨을 바쳐 구하려는 대상은 그를 죽이려는 자이다. 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인가. 살기 위해선 죽을 수 밖에 없고 죽으려해도 살 수 밖에 없는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 종묘와 사직이라는 관념을 지켜내기 위해 이 땅의 수많은 백성과 병사라는 실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는 고통과 분노와 울분을 목구멍 아래로 꾹꾹 누르며 하루 하루를 견디어내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순신을 다룬 매체는 굉장히 많았지만, 인간 이순신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이 <칼의 노래>가 처음이었나 싶다. 감정의 울림이나 사건의 긴박함 없이도 이 긴 소설을 한달음에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아마도 김훈의 필력이 아닐까 싶다. 역사에 박제되어 있던 이순신이라는 성역을 인간으로 묘사한 김훈의 공로는 나코스 카잔차키스의 공로와 맞먹는 것이라 생각한다.  

   <칼의 노래는> <최후의 유혹>에 걸맞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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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철 2010-01-08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만 읽어보았는데요. 기회되면 꼭 읽어보아야겠습니다~ ^^*

Tomek 2010-01-08 10:16   좋아요 0 | URL
저는 청소년판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원작하고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웬만하면) 청소년판보다는 원작을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