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쉬운 문제야. <13일의 금요일>에 나온 살인자 이름은?
시드니: 제이슨! 제이슨!
살인자: 안됐지만 틀렸어.
시드니: 무슨 소리야! 제이슨이 맞아. 난 그 빌어먹을 영화를 스무 번도 넘게 봤다고!
살인자: 조용히 해 이 멍청아! <13일의 금요일>의 살인자는 제이슨 어머니인 부어히스 부인이야. 제이슨은 2편부터 나온 거라고!  

 

10여 년 전,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스크림>에서 이 장면을 봤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하다. <13일의 금요일>이란 제이슨이란 이름 그리고 하키마스크는 공포영화에 관심 없는 사람들조차도 알 정도로 이제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리메이크와 외전을 포함한) 12편의 작품을 각기 기억하기 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한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올해 12편의 <13일의 금요일> 시리즈를 보고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하거나 언급할만한 가치가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기한 게, 분명 볼 이유가 없는 한심하고 지루한 작품인데도, 매 편이 끝나면 바로 다음 편을 데크에 걸고 있는 나를 보면서, 이 영화에 무언가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이 다 죽어가는 시리즈가 30여년을 세월을 견뎌온 이유는 강력한 팬덤과 돈 냄새를 맡은 영화 제작자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정리해봤다. 이 글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가 돈을 벌기 위해 어떻게 진화하는지(혹은 망가지는지)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무지막지한 복수극 <왼 편 마지막 집>을 제작하기도 한 숀 S. 커닝햄은 당시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 당시 극장가는 존 카펜터 감독의 <할로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서, 그는 <할로윈>과 마리오 바바 감독의 <피의 만>을 참조해 그와 비슷한 스릴러 영화를 한 편 기획했다. 도시에서 외떨어진 캠프장에서 젊은 남녀들을 피해자로 만들면 볼거리도 되고, 무엇보다도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목은 <캠프 블러드에서의 긴 밤>으로 결정했다.  

버라이어티에 영화를 광고하기 직전, 숀 커닝햄 감독은 제목을 <13일의 금요일>로 바꾸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무의식적인 공포를 끄집어내는데 있어서 이만한 제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숀은 이 제목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렇게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제목이 탄생할 수 있게 되었다.    

 

 

숀은 이 영화를 시리즈로 기획했었다. 그가 생각한 시리즈는 동일한 이야기의 연속이 아니라, <13일의 금요일>이란 제목으로 매 해 다른 공포영화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의 판권을 가진 파라마운트는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자기 완결성을 지닌 <13일의 금요일>이야기의 속편을 무리하게 늘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13일의 금요일>에서 제이슨은 분명 죽은 존재였다. 하지만, 파라마운트는 죽은 제이슨을 살아있는 존재라 생각하고 시리즈를 만들어갔다. 시리즈 2~4편의 제이슨은 달리기도 하고, 때론 비명(물론 컥컥거리는 소리에 불과했지만)도 지르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야기는 <13일의 금요일>의 지루한 반복에 불과했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하키마스크를 쓰는 모습과 갈수록 잔인해지는 살인 방법에 따라 인기를 얻게 됐다. 하지만 생각보다 돈을 벌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파라마운트는 4편에서 제이슨을 죽이고 시리즈를 끝내려 했다. 하지만, 4편이 엄청난 흥행을 하게 되면서 파라마운트는 다시 속편을 제작하게 된다. 돈은 귀신하고도 통하게 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13일의 금요일> 시리즈를 제이슨의 관점에서 보자면, 2~4편을 1기, 6~8편을 2기, 9~11편을 외전(감히 3기라고 표현하기에는 신성모독 수준이다!)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는 제이슨 말고도 고정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4~6편에 출연한 토미가 바로 그렇다. 4편에서 토미는 제이슨을 죽이고, 5편에서는 그 살인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제이슨의 영혼이 빙의됐으며 6편에서는 다시 살아난 제이슨을 봉인하는 시리즈 사상 가장 위대한(!) 역할을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팬들에게서 가장 괴작으로 평가받는(시리즈 중 괴작 아닌 게 어디 있겠냐만) 5편이 마음에 들지만, 이 영화는 <13일의 금요일> 시리즈이면서도 제이슨이 나오지 않는 기이한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6~8편은 대부분의 팬들이 기억하는 제이슨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는 다시 부활하면서 인간이 아닌 초자연적인 존재로 모습을 드러낸다. 웬만한 충격에는 꿈쩍하지 않으며 살아난 시체답게 언제나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은 쇼크가 아닌 느긋한 공포를 만들어낸다. 이때의 시리즈는, 캐릭터는 점점 완성형에 가까워졌지만, 이야기는 점점 산으로 향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제이슨은 초능력자 여자에게 농락당하기도하고(7편), 크루즈에서 드라큘라 행세를 하기도하고, 뉴욕에서는 킹콩 행세를 하기도 한다(8편). 상황이 여의치 않자 파라마운트는 뉴라인 시네마에 판권을 팔고 시리즈를 끝낸다.   

 

  

뉴라인 시네마에서 만든 두 편의 제이슨 이야기는 점점 더 점입가경이다. 제이슨은 외계 생명체가 되어 다른 사람의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존재이기도 하고(<라스트 프라이데이>), 아주 먼 미래에 과학의 힘을 빌려 우주에서 다시 탄생하기도 한다(<제이슨 X>). 시리즈 초반의 어리바리 제이슨을 압도하는 시리즈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프레디 vs 제이슨>은 시리즈의 외전이지만, 이 영화는 원래 시리즈보다 제이슨의 모든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영화다. 제이슨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 마련인데, 1기 때에는 물에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오히려 외전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시켜서 허술한 시리즈의 캐릭터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준 청출어람격의 영화라 할 수 있다.   

 

 

2009년에 리메이크된 <13일의 금요일은> 1편의 결말부터 시작해서 1기 때의 제이슨을 다룬 영화다. 영화가 개봉했을 때 뛰어다니는 제이슨이 어색하다는 평이 꽤 있었는데, 그것은 2기 때의 제이슨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를, 바꿔 말해 1기 때의 제이슨이 얼마나 허술했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리메이크의 2편이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오게 된다면 2기 때의 제이슨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난 또다시 피리 부는 사내를 쫓는 쥐처럼 극장으로 향할지도 모르겠다. 툴툴거리는 것도 애정이 있어야 하는 법. 어찌됐든 제이슨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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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13일의금융일 2012-06-15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메이크편그것은시리즈축
애두못든다..

Tomek 2012-06-15 09:37   좋아요 0 | URL
나도그렇게생각했었지만
그래도제이슨때문에긍정하련다...

죄이슨니 2015-05-15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궨시리리할로윈이리메이크되니까만들어가지고재이슨이미지만흐렸따

죄이슨니 2015-05-15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할로윈은몰라도13일의금요일만큼은그냥놔두고마음속으로간직할때가훨좋았다,,.결과는2나와도망

Tomek 2015-05-26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 어쩌라고.
 

나는 원래 겁이 많다. 그래서 공포영화를 잘 못 보는 편이다. 그런데도 공포라는 감정이 원초적인 무의식을 자극하는지, 그렇게 무서워하고 잠을 설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공포영화를 찾아서 보는 것을 보면... 죽을 줄 알면서도 불 속으로 날아드는 부나방 같다고나 할까. 내가 생각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  

내 숙면을 방해한 공포영화는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무서웠던 영화는 시미즈 다카시(清水崇) 감독의 <주온(呪怨)> 시리즈였다. <링(リング)> 시리즈는 TV만 치우면 됐었지만, 이 <주온>시리즈는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잠을 자다 눈을 떴을 때 불현 듯 눈에 들어오는 살짝 열린 방문, 가구와 가구 사이의 틈은 정말이지 공포 그 자체였다. 당장이라도 가야코가 꺽~꺽~ 소리를 내면서 기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뜨지 못하고 억지로 잠을 청한 적도 부지기수다. 하다못해 이불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이불 속에서 가야코가 미리 기다리고 있을까봐.   

 

그 밖에도 <주온>은 여러 이유로 불현 듯 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한 밤중에 벽 속에서 쿵 하고 울리는 소리며(당시 내가 살던 단독주택이어서 벽이 울릴 일이 없었다) 잘 듣던 라디오가 갑자기 수신 불량으로 잡음이 들릴 때, 샤워할 때 누가 내 머리를 감겨주는 게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 때, 시끌벅적하던 공공장소에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있는 것을 발견할 때 그야말로 난 공포에 속수무책 떨었다. 그건 바로 시미즈 다카시 감독이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추고 우리의 상상력으로 공포를 느끼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공포는 <주온> 시리즈가 최고인 것 같다.   

 

<주온>은 후지 TV에서 방송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일반 드라마처럼 방송용 ENG카메라로 촬영됐다. 그런데 내부 시사 후, "너무 무섭다(!)"는 이유로 방송이 취소되었다. 시미즈 감독은 출시사의 요청으로 이 영화를 비디오 영화로 재편집해 두 편의 비디오로 내놓았다(때문에 이 영화는 1편의 결말과 2편이 시작부가 30분가량 서로 겹친다). 이 비디오 영화의 엄청난 성공으로 시미즈 감독은 극장판 <주온>을 두 편 만들고, 할리우드의 요청으로 <그루지(The Grudge)>란 제목으로 두 편을 더 만든다. 이 6편의 영화들은 (어떤 평가를 받았건 간에) 흥행에 성공했다.  

주온(呪怨)이란 뜻은 "억울한 원혼이 업이 되어 저주를 내리는 것"이라고 영화에서 설명된다. 억울하게 살해된 가야코, 토시오 모자(母子)는 자신들이 살해된 집에 들어오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다. 동아시아의 귀신들이 원한과 복수의 관계가 명확했던 것에 비해 <주온>의 가야코, 토시오 모자의 행위는 불특정 다수를 노린 테러로 보일 정도다. <링> 시리즈의 사다코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의 저주는 비디오테이프라는 매체를 통해 전염된다. 그녀는 귀신이라기보다는 전염병에 가깝다. 이런 전통은 동아시아 적이라기보다는 서양의 귀신들에게 더 많이 보이는 것이다. 땅속 깊이 잠들어 있는 악마를 깨워 그 대가를 받는 인간들의 이야기. <이블 데드(The Evil Dead)>에서 이런 악마이야기를 다룬 샘 레이미가 이런 기막힌 소재를 그냥 둘리가 없다.  

같은 감독이 같은 장소에서, 단지 주연 배우들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주온>과 <그루지>는 너무나 다르다. 원본과 리메이크라는 익숙함과 익숙하지 않음의 차이가 아니라, 그 공포를 다루는 방법에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이는) 서양은 모든 것을 증명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기이한 일들을 서양은 원인 혹은 실체를 찾아낸다. 찾아내지 못하면 뒤집어씌우기라도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하다못해 마녀사냥 같은 것을 보더라도, 서양은 눈에 보이는 실체를 만들어낸다. 자연을 보더라도, 서양은 자연을 극복, 아니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동양은? '스스로 그러하다(自然)'라는 표현처럼, 우리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대로 둘 뿐이다. 꽉꽉 채운 프레스코 벽화와, 여백을 아름다움이라 칭하는 수묵화. 같은 세상에 살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일까? 너무나 무서웠던 <주온>의 세계가 서양인들의 시선이 개입되자, 그저 그런 시시한 세계로 전락한 것은.  

<주온>이 무서웠던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가야코가 그렇게 나타나서 사람들을 해코지하는지 모른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명되지 못한 잉여 부분은 그 자체로 공포가 된다. 하지만 <그루지>는 다르다. <그루지>는 이 규정할 수 없는 공포를 '귀신들린 집'이야기로 다룬다. 그 자신도 훌륭한 공포영화를 만들어 온 샘 레이미 감독은 <주온>의 공포가 단순히 기괴한 이미지에서 온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논리 정연한 이유를 대는 것이 바로 그들의 기질일까?   

 

<그루지>에서 느꼈던 공포는 소통의 부재였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지구 반대편에서 이유도 없이 쫓아다니는 귀신과,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그루지>의 인물들은 철저히 혼자다. 그들은 혼자서 이 엄청난 공포에 맞서야한다. 공포영화의 잔인한 점 중 하나는 이런 잔인한 운명에 빠진 인물들을 즐기면서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점이다. 장르의 쾌감이라 변명하긴 하지만, 죄의식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내가 그토록 공포영화에 빠져드는 것은. 나만의 (소박한)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덧붙임:  

1. 어쩌면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그루지>를 보고 영감을 받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  

2. <그루지>는 <주온>의 지루한 반복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 이 장면 이후로 버스 창가에 함부로 기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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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7-3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어지간한 공포영화는 껌처럼 씹어버리지만...'주온' 만큼은 예외입니다.

Tomek 2010-08-02 07:56   좋아요 0 | URL
저는 다른 시시한 공포영화에도 겁을 먹습니다. <주온>은 그 중 가장 최고의 자리에 있어요. ㅠㅠ

다락방 2010-08-01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마지막에 올리신 사진은 보지 말걸 그랬어요. ㅠㅠ 무서워요. ㅠㅠ

저는 귀신영화를 잘 못보는데요(정말 무섭잖아요!) 저를 그렇게 만든건 [엑소시스트 무삭제판]이었어요. 위에 말씀하신 것 처럼 일상생활로 돌아와서 후유증을 계속 안겨준 영화가 저는 [엑소시스트] 였죠. 그걸 극장에서 봤었는데 극장을 나오면서도 심장이 막 벌렁벌렁 거렸어요. 아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사탄의 얼굴을 보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더라구요. 그 뒤로 며칠간 세수를 하려고 할 때마다 물 위로 사탄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고, 가슴도 두근두근.

저는 [주온]을 보지 않았는데 그건 [링]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었어요. 공포영화를 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제게는 [링]도 어찌나 무섭던지. [링]을 보면서 '사람이 공포만으로도 죽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귀신이 우물에서 나올때는 정말. 어휴 ㅜㅜ

Tomek 2010-08-02 08:02   좋아요 0 | URL
<엑소시스트>는 정말 무서운 것 같아요. 그 영화를 보면, 무신론자라하더라도 세상에 하나님과 악마가 분명히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예전에 리뷰를 읽었을 때, 미국 신학대학에서 매년 신입생들을 위해 상영하는 영화가 <엑소시스트>라는 이야기도 있는 걸 보면, 역설의 역설이랄까.

<링>은 공포영화의 <시민 케인>이라 평가받을 게 분명합니다. 이 영화 이후로 아시아 공포영화가 다 바뀌었으니까요. 소설과 영화 속 현실이 진짜 현실이 된 무서운 경우인 것 같아요.

pjy 2010-08-02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온을 본건 아닙니다..다만 워낙 소개가 많이 되서요~
엘리베이터 바깥에서 아이가 계속 보이는 그 유명한 장면 있잖아요~~~

정말 아무생각없이!
영화를 찍을때 예산을 줄이려면~ 저 아이는 뛰는건가? 하는 소박한 의문을 입밖으로 내고 보니 문득 코메디로 다가오더군요ㅋ

Tomek 2010-08-03 09:12   좋아요 1 | URL
저는 처음에 "닮은 애들 한 4명 데려온건가?" 했어요.
제가 더 코미디인 듯. :D

Mephistopheles 2010-08-04 09:26   좋아요 1 | URL
가장 압권인 장면은 이불속에 숨어있는 여자귀신....이었다는...

pjy 2010-08-04 11:44   좋아요 1 | URL
아, 그 장면, 전 영화를 안봐서 앞뒤가 얼마나 공포스럽고 놀라운지 모르잖아요^^ 기냥, 참 더운데 힘들겠다~ 공포영화 여배우는 땀나는 체질은 안되겠구나~했어요ㅋ

iamtext 2011-09-01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공포영화 무서워서 못봤었는데,,, 새끼들을 키우다보면, 공포영화 쯤은 아무것도 아닌게 되더랍니다. 둘째 막달에 호러영화 페이퍼를 쓰기도 했었죠. 은행이 무섭고, 검사결과가가 나오는 병원이 무섭고, 뭐 그렇게 되더랍니다. 링 귀신보고, '대구리 좀 묶고 다녀! 답답해'소리치게 되어요.

Tomek 2011-09-01 15:54   좋아요 1 | URL
:D
아직까진 현실의 공포보다 상상속의 공포가 더 무서운 나이인가 봅니다.
애가 생기면 정말 달라질까요?

iamtext 2011-09-02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재 정문 사진 보니까, 미모에 아직 많이 젊으신데요, 뭘, 벌서 아기엄마 되실 생각을...

2011-09-02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에드 기인(Edward Theodore "Ed" Gein)  

미국 위스콘신 주, 플레인필드. 위스콘신 주에 사는 사람들조차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플레인필드는 멀리 떨어진 고립된 곳이었으며, 인구도 600명에서 700명을 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메카시즘의 광풍과 청교도적인 엄격함이 미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1950년대, 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미국을 발칵 뒤집을 무시무시한 사건이 발생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1957년 겨울, 마을 주민 프랭크 워든은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그는 어머니 베니스 워든이 운영하는 철물점에 들렀는데, 가게는 텅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도둑맞은 것은 없었으며, 금고의 돈도 그대로 있었다. 프랭크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용의자로 에드 기인을 지목했다. 가게 장부위에, 에드 기인의 영수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 기인의 집은 플레인필드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는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가끔 외출할 때는 마을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평범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무슨 일이 있겠느냐며 심드렁한 마음으로 기인을 찾아갔다. 그들이 찾아갔을 때 기인은 집에 없었고, 경찰들은 기인을 찾으러 집주변을 돌아다녔다. 바로 그 때, 한 경찰이 비명을 질러댔다. 집과 인접한 야외 부엌에서 베니스 워든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거꾸로 매달린 것을 발견한 것이다. 시체는 마치 사냥한 사슴을 정리하듯, 머리가 없고 배안의 내장도 모조리 정리된 상태였다.  

지원을 받고 도착한 병력이 기인의 집에서 발견한 것은, 사람 가죽으로 만든 의자, 피부로 만든 전등 갓, 여성의 입술로 장식한 차양, 여성의 상반신 가죽으로 만든 조끼 등이었으며, 벽에는 여성의 얼굴 가죽 9개가 걸려있었다. 경찰은 그가 인육을 먹은 흔적도 발견했다.  

조사 결과, 기인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무덤을 파서 시체를 도굴했다고 한다. 그는 도굴한 시체로 실용적인 도구를 만들었으며, 밤마다 시체에서 잘라낸 가죽조끼를 입고 여성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어머니처럼 행동했다고 진술했는데, 그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사랑 때문이었다. 기인의 어머니 어거스타 제인은 지독한 광신자였는데, 그녀는 기인이 어렸을 때부터 성에 대한 혐오를 심어주었다. 이 세상은 모두 사악하며 여자들은 음탕하고 모든 성관계는 악마의 꾐이니, 바깥세상 특히 여자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을 부정했다. 성에 대한 왜곡된 상상과 욕망은 그를 한없이 괴롭게 만들었다. 어거스타는 기인을 학대하기도 했지만, 한없이 사랑하기도 했으며, 심약했던 기인은 그런 어머니에 대해 매우 모순된 감정을 지니고 자랐다. 기인에게 어머니는 신 같은 숭배의 대상이자 끔찍한 증오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기인은 철저하게 외톨이가 되었으며, 종국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무덤을 파서 죽은 어머니를 유린함과 동시에, 죽은 어머니의 시체에 기대어 살아온 것이다.  

 

 

2. 할리우드 (Hollywood) 

에드 기인의 사건은 미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는데, 특히 소설과 영화 쪽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할리우드는 에드 기인을 모티프로 한 영화를 꾸준히 제작했으며, 그 중 몇 편은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2-1. <싸이코(Psycho)>   

    

로버트 블로크의 소설 『싸이코』는 명백히 에드 기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어머니의 명에만 따르는 노먼 베이츠는 40세에 안경을 낀 소심한 남자로 묘사됐다. 그는 베이츠 모텔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의 사무실에는 박제된 동물들이 있다. 그는 모텔에서 조금 떨어진 저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직장에서 돈을 훔친 마리온이 베이츠 모텔에 투숙하면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는 소설과는 조금 다른 방법을 택했다. 우선 노먼 베이츠 역을 연약해 보이는 소년의 이미지를 지닌 안소니 퍼킨스에게 맡겼다. 어머니에게 집착하며 어머니에게 지배당하는 노먼 베이츠의 모습은 에드 기인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싸이코>는 슬래셔 무비의 시초로 여겨지고 있으며(전율적인 샤워 살인 장면!), 히치콕 감독의 능수능란한 연출과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2-2. <텍사스 살인마(The Texas Chain Saw Massacre )>   

에드 기인의 사건은 1974년 토브 후퍼 감독의 <텍사스 살인마>에서 다시 한 번 다뤄진다. 어느 한적한 여름, 한 무리의 친구들이 여행을 하는 중 한 히치하이커를 태워준다. 그는 이상한 행동을 해서, 여행을 하는 친구들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뜨리게 한다. 히치하이커를 쫓아내고, 연료를 넣으러 주유소에 도착하지만, 주인에게 연료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연료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만, 일행은 한 명씩 사라진다. 알고 보니 히치하이커와 주유소 주인은 서로 가족 관계였으며, 사라진 친구들은 이들 가족들의 일용할 식사가 되고, 이 지옥 같은 광경을 주인공은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한다.   

 

토브 후퍼 감독이 그린 이상한 가족 이야기는 에드 기인의 사건에서 차용했다. 이들이 사는 텍사스의 고립된 저택, 인육 식사, 거의 박제된 거나 다름없는 할아버지, 희생자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도살자 등의 모티프는 모두 에드 기인의 이야기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에드 기인의 이야기를 정신분석학적 접근과 속임수 없는 영화적 문법을 위해 끌어왔다면, 토브 후퍼 감독은 에드 기인의 이야기를 통해 절망과 무력감을 그려낸다. 이 무시무시한 살육의 공간은, 한 번 들어오면 절대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안에서의 공포는 순전히 이 시간을 견뎌내야하는 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베트남전으로 얼룩진 1970년대는 세상의 종말이었으며, 희망과 구원은 없었다. 토브 후퍼 감독은 에드 기인의 이야기에서 지옥을 봤고, 1970년대를 읽어냈다. 영화의 마지막, 허공을 가르는 전기톱 소리와 미쳐버린 여자의 히스테리컬한 웃음은 공포를 넘어 절망을 느끼게 한다. 이게 바로 세상의 끝이라는 것처럼.   

 

이 영화는 그 후 쓰레기 같은 속편을 계속 선보이다가 마이클 베이의 제작으로 2003년 리메이크 됐다. 재미있는 것은 리메이크 작에서 처음으로 레더 페이스의 맨 얼굴이 공개되는데, 그의 얼굴은 가스통 루르가 『오페라의 유령』에서 묘사한 유령(에릭)과 흡사하다. 이 장면으로 리메이크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은 원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는 2006년에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0(The Texas Chainsaw Massacre: The Beginning)>이라는 프리퀼 속편을 내놓았는데, 이 영화는 원작의 영향을 받은 롭 좀비 감독의 <살인마 가족(House of 1000 Corpses)>을 답습한 기이한 영화다.  



 

 

2-3. 캐리(Carrie)  

    

스티븐 킹을 유명 작가로 만든, 그리고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영화로 제작해 커다란 인상을 남긴 <캐리>는 에드 기인이라기보다는 그의 어머니 어거스타 제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캐리(씨시 스페이식)는 어머니 마가레트 화이트(파이퍼 로리)와 단 둘이 산다. 마가레트는 기독교 이단의 광신자로 마을 주민들이 의도적으로 기피한다. 캐리는 학교에 다니긴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간섭으로 거의 고립된 생활을 한다. 그러다 캐리가 처음으로 초경을 하자, 어머니는 모든 성적인 행위는 죄악이라며 딸을 더욱 다잡는다. 캐리를 괴롭히는 아이들과, 캐리를 사람들과 어울리게 하려는 수(에이미 어빙)의 노력이 기이하게 조합되어 캐리는 그날 밤 잊지 못할 수모를 당하고, 이성을 잃은 캐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파티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학살한다.  

전적으로 에드 기인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스티븐 킹은 캐리와 마가레트의 관계를 에드 기인과 어거스타의 관계에서 차용했다. 캐리에게 있어 어머니는 자신을 학대하는 악마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한없이 사랑해주는 엄마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에 대한 욕구와 죄악은 그녀를 잔혹한 살인자(라기 보다는 심판자)로 만들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캐리를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캐리의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 마지막에 터뜨려버렸다. 때문에 우리는 아무 잘못도 없는 파티장의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죽는 것에 대해 그다지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살인의 잘잘못을 따지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따라가는 영화다. 어쩌면 캐리에게 수와 같은 친구가 더 있었더라면, 그날의 참사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에드 기인에게도 이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4.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   

    

많은 사람들이 스타알링과 한니발 렉터의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는 조나단 드미 감독의 <양들의 침묵>은 연쇄살인범 버팔로 빌에 관한 이야기이다(하지만, 한니발 렉터를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는 고작 영화에 17분을 출연하고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는 여자들을 납치해 죽인 후, 피부를 벗기는 연쇄살인범이다.  

버팔로 빌은 성전환수술을 받고 싶지만, 병원에서 거부당한다.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여자가 되려고 한다. 그는 여자들의 피부를 벗겨 옷을 만들어 입는다. 에드 기인도 시체들의 가죽으로 옷과 가면을 만들어 밤마다 입었다. 여성과의 성교를 금지 당했으나, 그 욕망만은 어찌할 수 없어서 이상한 형태로 구현되었다. 에드 기인의 그런 끔찍한 방법은 자신만의 욕구 해소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버팔로 빌 역시 그런 인물로 영화에 묘사된다.   

 

조나단 드미 감독은 버팔로 빌을 그저 괴물로 그렸다. 그는 여자가 되고 싶은 위험한 변태로 그려졌으며, 약간은 전형적인 동성애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동성애자들에게 수많은 지탄을 받았다. 매끈한 상업 영화를 기획했던 조나단 드미 감독으로서는 당황스러운 반응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편협한 시각을 반성하고, 그 다음해 <필라델피아>를 만들어 속죄했다. 1990년대에 에드 기인의 이야기는 성정체성과 한 대상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토론을 이끌어냈다.  

  

 

3. 왜 에드 기인인가?   

미국에는 수많은 연쇄살인범들이 있다. 에드 기인의 살인은 애교쯤으로 느껴질 정도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목록들. 그런데 왜 유독 에드 기인에 대한 이야기는 공포와 구역질을 넘어 계속 재생산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에드 기인의 불쌍한 성장과정과 심약한 성격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연쇄살인범들은 인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괴물들이다. 테드 번디와 존 웨인 게이시, 찰스 맨슨, 제프리 다머, 유영철을 우리는 결코 동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 기인의 삶은 그렇지 않다. 그의 심약한 성격과 시체에 대한 과격한 행동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어떤 무의식의 심연을 건드리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무엇을 보려 했던 것일까? 이들 세 편의 영화가 그 해답을 찾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4. 그리고 후일담  

1957년 11월 체포된 후 에드 기인은 일련의 정신 감정을 받았다. 의사들은 그가 정신적으로 재판에 서기엔 부적합해 위스콘신의 주립 중앙 병원에 넣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10년 후 병원 당국은 기인이 끔찍한 범죄에 대한 재판에 설 수 있다고 발표했고 그의 사건이 재개 되었다. 그는 정신 이상으로 인한 버니스 워든의 살인에 유죄를 받았으며 영원히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다. 에드 기인은 병원 생활에 잘 적응했다. 간호사들은 그가 신사적이고 예의바르며 내성적인 모범 환자라 했다. 그는 병원에서 목수, 석수, 병원의 보조원 등의 일을 했으며, 세계 여행을 위해 저금을 했다고 한다.  

1974년, 에드 기인은 정상임을 주장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주립 정신 병원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1984년 7월 28일 그곳에서 호흡기 장애로 죽었다. 그의 시신은 플레인필드 공동묘지, 그의 어머니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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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공포 만화로 분류되지만, 모로호시 다이지로와 이토 준지는 장르로 규정짓기가 딱히 애매한 작가들이다. 굳이 장르를 규정짓자면 ‘환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는 순정 만화의 틀을 빌려, 규정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은 시침 뚝 떼고 진행한다. 귀신과 요괴는 물론이고 (H. P. 러브크래프트에게서 빌려온 게 분명한) 이계의 존재들을 끌고 와 소소한 일상(?)을 풀어내는 솜씨는 작가의 투박한 그림체를 잊을 만큼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은 항상 시미코네 집에서 하고 있는 헌책방이라는 점이다. 헌책방이라기보다는 고서점이 더 어울리는 우론당에는 신기한 책들이 넘쳐난다. 귀신과 악마를 불러들이는 주술을 다루는 책은 평범한 편이며, 직립어류에 관한 책, 잘린 목을 키우는 방법에 관한 책 등은 물론이고, 생물처럼 살아있는 책들도 있다. 이들 살아있는 책은 글자를 먹기도 하고 심지어는 독서하는 사람을 삼켜버리기도 한다. 책이 사람을 잡아먹다니! 

   

 

하지만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 중 책에 대한 가장 압권은 『밤의 물고기』에 실린 「헌책 지옥 저택」이다. 이 헌책 저택엔 거의 쓰레기로 분류되는 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중 독서가들이 정말로 읽고 싶었던(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갖고 싶었던) 절판된 책들이 숨어 있다. 운이 좋아 원하는 책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함부로 책을 빼서는 안 된다. 책을 함부로 빼면 헌책(으로 이루어진) 저택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원하는 책을 얻기 위해선 이 안의 룰을 따라야 하는데 그 방법이 참으로 기막히다.   



 

하지만 책 욕심이 앞선 시미코는 룰을 지키지 않고 무리하게 책을 빼내고 결국 저택은 무너지고 만다. 알고 보니 이곳은 헌책을 모으다 죽은 원귀들이 있는 헌책 지옥이었다. 이들의 사연은 참으로 박장대소하게 만들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모습도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아 섬뜩하기도 하다. 나는 책을 읽는가, 아니면 책을 모으는가. 읽는 것과 모으는 것, 사는 것과 빌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에피소드를 읽을 때면, 항상 내 독서습관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아직까지 쉽게 나지 않고 있다.

 

시오리는 시미코가 가지고 싶었던 책을 뺏아 지옥에 던짐으로서 현실 세계로 나올 수 있었다. 저승에서 원하는 책을 갖는 게 나을까, 아니면 현실에서 책 없이 지내는 게 나을까?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제괴지이: 호중천』에서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했었다. 이상적이지만 너무도 쓸쓸한, 그래서 염세적으로 느껴지는 대답.   

 

이토 준지도 책에 대한 공포를 다룬 적이 있다. 『신 어둠의 목소리: 궤담』의 「장서환영」이 바로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토 준지는 콜렉터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화자인 부인은 장서가인 남편과 결혼했는데, 남편은 이 장서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15만 권이 넘는 책을 세 번 씩이나 완독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있다. 그는 그 많은 책의 위치를 다 꿰차고 있으며, 한 권이라도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디질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아버지가 아꼈던 『유극지옥』이라는 책이 사라지는 일이 생긴다. 남편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출하자 아버지는 어린 남편에게 밤마다 공포소설을 읽어주었는데 이 책이 바로 그 책이었던 것이다. 책이 사라진 날, 남편은 꿈에서, 사라진 책이 아버지로 나타나 책을 읽어주는 고문을 당한다. 지옥과도 같은 고문을 견디어내자, 『유극지옥』은 사라진다. 그런데 이번엔 어머니가 아꼈던 『겨울바람의 르네』가 사라진다. 『겨울바람의 르네』는 남편의 어머니가 가출하기 전, 밤마다 어머니가 읽어주었던 책이다. 남편은 『겨울바람의 르네』를 꿈꾼다. 그리고 그 책이 낭독을 끝마치자, 『유극지옥』처럼 사라지고 만다. 남편은 더 이상 어머니를 추억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기억을 모조리 간직하려는 듯, 집에 있는 모든 책을 암기하기 시작한다.   







 

책은 정보의 기능도 있지만, 지워버리고도 싶은 악몽 같은 기억이자,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기도 하다. 악몽과 추억이 서로 공존하는 서가라는 공간. 그리고 그 기억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매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의 시간을 버리는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이라는 물리적 매체를 소유하는 것일까, 아니면 책에 담긴 정수를 느끼는 것일까. 독서를 하면서 우리는 이런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Reader와 Collector의 차이. 그 차이마저 수집하고 싶어 하는 이토 준지의 무시무시한 공포.  

 

 

*덧붙임:  

예전에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고 합니다. (⇒ 클릭)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정말이지 끔찍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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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7-1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 준지 책은 정말 대단해용^^ 재밌긴한데 무서워서 소유하고 싶은 생각은 없더군요^^

Tomek 2010-07-16 08:23   좋아요 0 | URL
저는 두 번 정도 빌려보다가 기어이 샀습니다. 이상하게 빨려들더라고요..
:)

라로 2010-07-1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패스해야겠어요,,,워낙 겁이 많은지라,,^^;;;

Tomek 2010-07-16 08:24   좋아요 0 | URL
그래도 한 번 읽어보시면...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