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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는 1931년 작 <프랑켄슈타인>의 공인된 속편이자 걸작이다. 신기하게도 <프랑켄슈타인>에 이어 이 영화를 보면 무언가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전편에서 느꼈던 기대감을 속속들이 배반당하는 느낌. 그것은 이 영화가 ‘아이러니’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작자인 메리 셜리, 남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 그리고 바이런 경(Lord Byron)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는 소설의 1831년판 서문을 각색한 것이다.) 바이런 경은 전편의 내용을 복기하면서 메리 셜리에게 더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챈다. 메리 셜리는 “관객들은 이런 내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운을 떼며 남은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관객이란 영화를 보는 우리일 수도, 영화상에서 이야기를 듣는 바이런과 퍼시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시작되는 아이러니의 연속.

   사람들은 괴물을 생포해 마치 예수처럼 나무에 묶어세운다. 그런데 예수는 신의 아들로 십자가에 묶인 후에 죽고 부활하지만, 인간의 아들인 괴물은 죽음에서 부활한 후 십자가에 묶인다. 잠깐이지만 숲속의 맹인 노인과 ‘우정’을 경험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친구’를 만들어 달라 요구한다. 그런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친구를 동성이 아닌 ‘여성’으로 만든다. 프랑켄슈타인의 파트너인 프리토리우스 박(Doctor Pretorius)는 그들이 함께 만든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라 칭한다. 그런데 실제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는 ‘엘리자베스’다. 엘리자베스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가 완성된 순간 정확하게 그 공간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프랑켄슈타인 혼자 낳은 자식인 ‘괴물’과 프랑켄슈타인과 프리토리우스가 함께 낳은 ‘프랑켄슈타인의 신부’가 있으며 이들은 이상한 가족관계를 형성한다. (동성부부-아들-딸이자 아버지의 부인-남매이자 친구-그리고 아버지의 '공인된' 이성 부인)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는 종교적인 동시에 신성모독적이고 죽음과 부활, 절망과 구원을 함께 다루고 있다. 장르는 수시로 탈바꿈하고 지나치게 탐미적이다. 메리 셜리의 원작에 기대어 있으면서도 원작을 부수는 동시에 다시 원작으로 돌아온다.

   공포영화라 하기엔 밋밋하고, 코미디라 하기엔 진지하며, 패러디라 하기엔 진중하고, 취향을 탄다고 말하기에는 보편적이다. 모든 것이 스며들어 울퉁불퉁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한 괴물 같은 작품.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는 제임스 웨일이 창조한 ‘괴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괴물이라 칭하기엔 너무나도 경외스런, 하나의 종(種)이라 할만하다. 

   2014년 1월 24일 블루레이로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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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를 쉽게 교체할 수 있기 위해 통조림처럼 평평하게 만든 머리, 번개를 끌어들이기 위해 목에 박아 넣은 큰 못, 위압감과 순수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복잡 미묘한 표정. 우리가 생각하는 괴물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시작됐고 완성되었다. 이후에 제작되는 모든 프랑켄슈타인 관련 영화들은 이 영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잘못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런 오해를 증폭시킨 것은 바로 영화 포스터 때문이 아니었을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타이틀 밑에 그려진 괴물의 이미지는 ‘괴물=프랑켄슈타인’이라는 공식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이후에 나오는 속편들의 제목 또한 그런 오해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아들, 집, 기타 등등.>) 그만큼 이 영화에 등장한 괴물의 이미지는 강력했다. 이 모든 것은 이 영화를 연출한 제임스 웨일(James Whale)의 비전과 잭 피어스(Jack Pierce)의 분장, 괴물을 연기한 보리스 칼로프(Boris Karloff)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었다.

   페기 웨블링(Peggy Webling)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는 메리 셸리의 원작과는 꽤 많은 차이가 있다. 원작에서 주인공인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친구인 앙리 클레르발이 영화에서는 헨리 프랑켄슈타인(Henry Frankenstein), 빅터 모리츠(Victor Moritz)로 서로 뒤섞여 있다. (조금 더 들어가자면, 영화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정확한 이름은 ‘하인리히 헨리 프랑켄슈타인, Heinrich “Henry” Frankenstein’이다. 이 중 ‘하인리히’는 원작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의 신비에 빠져들도록 한 16세기 독일의 마술사이자 오컬트 작가이자 신학자이자 점성가이자 연금술사인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폰 네테쉼, Heinrich Cornelius Agrippa von Nettesheim’에서 따온 것이다.) 게다가 빅터 모리츠는 절친인 헨리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애인 엘리자베스 라벤차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원작에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던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행위는 영화의 1/3을 할애하면서 감독의 역량을 맘껏 쏟아 붓는다.

   영화는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지만, 찜찜한 구석을 지울 수는 없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악이라기보다는 백치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그가 (방금) 배운 논리에 따른 행동이었다. 공동체에 속하고 싶지만 남들과 같지 않아 공동체에서 배척당하는 괴물. 후에 팀 버튼(Tim Burton)이 창조해낸 수많은 사랑스런 괴물들의 모체가 바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다.

   2014년 1월 21일 블루레이로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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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설 다우리(J. Searle Dawley) 감독의 1910년 작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각색한 최초의 영화이다. 무성영화에 10분 남짓한 상영시간으로 원작의 내용은 대폭 수정되었는데(그 때문인지 영화 처음에 “셸리 여사의 소설을 자유롭게 각색”했다고 명시했다), 원작에서 차용한 부분 중 절반 이상이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창조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총 9개의 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신을 설명하는 자막은 다음과 같다.

 

#1 프랑켄슈타인이 대학으로 떠난다.

#2 2년 후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의 신비를 알아냈다.

#3 실험 직전.

#4 완전한 인간 대신에, 프랑켄슈타인의 마음 속 악마가 괴물을 만든다.

#5 프랑켄슈타인은 그가 만든 무시무시한 피조물의 광경에 끔찍한 충격을 받는다.

#6 귀향.

#7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피조물이 나타나고 처음으로 그 자신을 본 괴물은 창조주의 애인을 질투한다.

#8 결혼식 밤, 프랑켄슈타인의 착한 심성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9 사악한 마음의 피조물은 사랑에 압도당하여 사라진다.

 

   이 중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과정이 흥미로운데,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마치 마녀처럼) 마법으로 ‘괴물’을 창조해낸다는 점이다. 이것은 프랑켄슈타인이 창조가 과학이 아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사악한 의도’로 ‘생명’을 창조해낸다는 것은 악한 행위를 설명하는 영화적 표현이기도 하다.

   워낙 짧은 시간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탓에 프랑켄슈타인과 괴물과의 갈등이 단순해진 점은 있지만, 재치 있는 반전으로 영화를 마무리한 점, 그리고 ‘처음으로’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피조물’의 모습을 스크린에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2014년 3월 13일 유튜브에서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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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CinDi영화제 프로그램 및 상영작 (8.17~23)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9. 23일과 24일은 영화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작 이틀동안 장편 4편 단편 8편의 영화만을 보았는데도, 이유 모를 피로감이 갑자기 닥쳐왔기 때문이다. 축제에 탐닉하려는 지독한 욕심(혹은 욕망)때문일까? 아니면, 2년 연속으로 내리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만 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뜨거운 영화광들의 열기에 지쳤기 때문일까? 영화에 탐닉할수록 점점 영화가 시시해지는 이유는 무얼까? 

 

10. 김수현 감독의 <창피해>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지 난감하다.

 

10-1. 시시한 미대교수(김상현)는 싸가지 없는 신입생 희진(서현진)과의 유치찬란한(하지만 무시무시한) 육탄전을 벌이더니, 희진의 친구 지우(김효진)를 모델로 발탁하고 사진을 촬영하러 바다로 간다. 그곳에서 지우는 교수에게 자신의 옛사랑(김꽃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후부터 이야기는 마치 라운지 소설처럼, 화자를 바꿔가며 계속 건너뛰기 시작한다. 

전작 <귀여워>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참으로 지독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불편한 금기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도 갑작스레 튀어나오지만, 김수현 감독은 예의 따스한 터치로 그 끔찍함을 감싸안는다. 우린 그런 그의 능력을 <귀여워>에서 확인한바 있다. 

 

10-2. <귀여워>는 제목과는 달리 정말 끔찍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씨를 뿌려대는" 박수무당 아버지와 그의 배다른 형제들이 꾸린 가족 안에 한 여자 순이가 들어오는데, 그녀는 집 안의 모든 남자들과 관계를 하고, 심지어는 방석집에 팔리기도 한다.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는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청계천 황학동 시민아파트다. 그곳에 사는 여자 "아이"는 둘째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남자 "아이"들은 깡패들에게 돈을 받고 방화 용역을 벌인다. 그 와중에 건달인 셋째는 직업적/개인적인 이유로 살인도 행하고 다닌다. 참으로 지옥이 따로없다.

<귀여워>의 놀라운 점은 이런 끔찍하고 위악적인 이야기가 참으로 "귀엽게" 보인다는 것이다. 김수현 감독은 이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하는, 이 보잘것 없고 초라한 인간 군상들을 시종일관 "귀엽게" 위로한다. 영화의 온갖 효과-음악, 미술, 심지어 CG조차-가 유치해보이지만, 그래도 시종일관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감독의 뚝심 때문에 영화는 어떤 독특한 느낌을 얻는다. 환상과 실제가 서로 섞이는 기이한 현상들의 연속.

 

10-3. <창피해> 역시 환상과 실제가 서로 섞이는 근사한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김수현 감독은 이제는 그런 것에 흥미를 잃은 듯 하다. 대신 그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빠진 듯 하다. <창피해>의 이야기는 단선적인 이야기를 이상하게 풀어놓아(베베 꼬았다는 게 아니다!)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교수와 희진의 이야기는 희진과 지우의 이야기로, 지우와 옛사랑, 옛사랑의 가족, 형사(최민용!)와 후배(우승민!), 옛사랑과 옛사랑의 애인, 옛사랑과 옛사랑의 아버지, 지우와 교수, 서현과 선배 등으로 "종횡무진" 넘나든다. 

이런 형식은 소설에서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아마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이런 형식은 피로감을 불러 일으킨다. 책은 독자 스스로 끊을 수 있지만, 영화는 한번에 봐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감독이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찍었을까?  

 

10-4. <귀여워>를 보면, 어쩐지 이야기가 부족해보이는 느낌이 든다. 영화에는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인물들의 이야기가 "잘린" 것을 느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둘째 "개코"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세 아들 중 가장 적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영화의 흐름을 위해 감독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잘렸을" 확률이 높다. 어쨌든 그 영화에는 다른이의 "자본"이 들어간 상업 영화이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가장 최소한의 자본으로 자신이 시나리오로 만들었던 모든 장면들을 다 붙인 게 아니었을까? 

그 시도는 높이 사지만, 영화를 보는 나는 보는 내내 어리둥절하고 힘들었다. 영화의 지난란 리듬 때문에 결국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창피함"의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무언가를 보긴 했는데, 마음을 울리지 못한 "아쉬움". 위악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만큼 에너지도 잃어버린 듯한 "안타까움". 지난 7년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1. 선타르 지올 감독의 <태양의 길목>은 보는이의 절창을 뜯는 영화다. 영화는 기나긴 길을 걷는 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고행을 하는 듯한 모습. 그의 뒤를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집에 가는 한 노인이 쫓는다. 알고보니 청년은 사고로 어머니가 죽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라사로 속죄의 순례를 떠난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바로 목격한 자식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섭다. 청년은 그 엄청난 감정을 속에 묻고 걷고 또 걷는다.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속죄의 마음을 지닌채로 걸었는지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알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끝날 즈음에야 알 수 있지만.)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태양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비로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작별을 하기 위해, 그만큼의 시간은 필요했던 것이었겠지.  

 

12. 그런데 영화에 대한 이런 끼적임은 어떤 행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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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라더 2011-08-2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창피해>를 예의주시해야겠네요. +_+

Tomek 2011-08-24 08:14   좋아요 0 | URL
음... 제겐 좀 혼란스러웠던 영화였어요.

이하 감독의 두 번째 작품처럼, 김수현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역시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novio 2011-08-24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객원기자로 뽑혔었는데 그만 일이 생겨서 (생존은 해야 하니까ㅠㅠ) 그만 기자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제, 매우 인상적인 영화들로 가득했나 보네요. 매우 아쉽고 유감입니다. 그냥 이 글로 대충 느끼는 수밖에 없겠네요 ㅠㅠ

Tomek 2011-08-25 09:11   좋아요 0 | URL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특성상(?) 인상적인 영화들은 많지만, 여러편 계속해서 보면 좀 피로감을 느낄만한 영화제인 것 같아요. 그냥 편하게 몇 편 골라 관람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아요.
 
제5회 CinDi영화제 프로그램 및 상영작 (8.17~23)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5-1. 박종철 감독의 <수선火>는 보는 내내 불편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종근은 좁은 동네 안에서 사사건건 가게 주인들과 일을 벌인다. 종근의 말이나 행동은 언뜻 보면 다 옳은 소리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소비자- 중심의 우격다짐이다. 종근은 "앞에선 찍소리 못하고 뒤에서 호박씨 까는 한국 놈들"을 경멸하는, 그래서 초지일관 앞에서 호박씨를 까는 "인간 말종"이다.  

종근의 이런 행동은 영화를 보는, 일상에서 찍소리 못하고 대부분 "참고 사는" 우리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켜야 하지만, 그저 이해하지 못할 답답함과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함만을 느낀다. "4년제 대학을 나온 고급 인력"의 분노 표출? 하지만 그의 분노는 조그마한 동네의 영세 상인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끼리의 싸움. 그렇게 종근의 인생은 한심하게 흘러간다. 

 

 

5-2. 이창희 감독의 <소굴>은 정말 잘 짜여진 스릴러다. 한 여기자가 기사 송고를 위해 시골의 PC방에 간다. 밤이 깊자 그 곳엔 단 몇 명의 남자들만 남고, 기자는 자신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들의 "소굴"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시도를 벌인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영화란, 지금 보여지는 상황이 "말이 돼냐 안 돼냐" 보다는, "그럴 듯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 같다. <소굴>의 이야기 전개는 가끔 불필요한 장면들이 나와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그 모든 장면들의 분위기와 이야기 전개가 정말로 그럴듯해 보여, 그런 사소한 장면들은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특히나 단 한마디의 대사 -"시끄럽다잖니."-로 평범한 공간을 단숨에 공포로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 감독의 발군의 센스는 정말로 뛰어나다. 

<소굴>에서 여기자와 같이 있는 남자들은 모두 범죄자임이 분명한 인물들이지만, 이들이 정말로 여기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은 여기자이고, 이들 남자들의 행동들은 정당방위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의 여기자의 목에 잔뜩 묻은 피조차 남자의 피가 아닌가. 

별 곳 아닌 장소에서 별 것 아닌 행동들만으로 보는이의 긴장을 한껏 끌어올린 이창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5-3.  최진성 감독의 <이상,한 가역반응>은 1936년, 동경으로 어떻게든 건너가려는 천재 이상의 시도를 그리고 있다. 인물들의 대사나 사운드는 차단되어 있고, 마치 무성영화처럼 음악과 이상의 시가 내레이션+자막으로 나오고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내레이션은 이상의 작품에서 따와 가뜩이나 몽롱한 영화에 기이한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계속 특정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시도들은 마치 이상의 시(詩)들을 영상으로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처럼 보이는데, 마치 예전에 일본에서 출시한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 DVD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로운 시도이긴 하지만, 마치 예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랄까? 물론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다른 쪽으로 이해의 촉수가 뻗어나간 경우이겠지만 말이다.  

 

5-4. <수선火>, <소굴>, <이상,한 가역반응>은 8월 21일 13시 30분, 8월 23일 17시, 두 번 더 묶음 상영한다. 

 

 

6. 비묵티 자야훈다라 감독의 <버섯>을 상영 리스트에 넣은 이유는 단 하나, "인도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디를 경험한 이후로는 영화를 국가별로 나눈다는 것이 별 의미 없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편의상 그렇게 나누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춤추고 노래하고 가끔 대책 없이 느껴지기도 하는 지독한 낙천성이 빠진 인도 영화가 존재하기는 할까?"하는 이 단순한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버섯>은 지금껏 봐왔던 인도 영화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영화다.  

영화의 진행은 친절하지 않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숲에 오고, 한 남자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도망친다. 그리고 그 숲에서 (아마도 유럽 출신의) 탈영한 군인이 마치 유령처럼 등장한다. 그는 국경을 넘는 100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숲에 고백한다. 그는 숲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하지만, 숲은 그 비밀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갑자기 영화는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고층빌딩 숲(!)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건축사 라훌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는 미친 동생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가 동생이 숲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동생을 찾으러 숲으로 간다. 

자연의 숲과 (거대 건물로 이루어진) 인공의 숲, 미친 동생과 정상인 형. 영화는 대비를 하지만,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생의 관점으로는 도시에 살고 있는 형은 공포의 대상이다. 형은 미친 동생을 자신의 품에 가두고 싶어한다. 숲의 관점에서는 거대 빌딩으로 이루어진 도시는 필요악이다. 하지만, 우리는 도시 없이는 살 수 없다. 비묵티 자야훈다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공존"을 이야기하고자 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그는 다양한 언어, 종교, 인종이 서로 어우리져 하나의 거대한 국가를 이루는 인도에서 영화를 찍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스리랑카 태생이다.) 

버섯은 잔균류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며 자란다.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고층 빌딩들은 우리 시대의 "버섯"들이다. 버섯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자연이 존재해야 버섯이 존재할 수 있다. 무분별한 개발의 시대에 우리는 너무 당연한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게 아닐까. <버섯>은 이런 당연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8월 21일 17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7-1. 토니 힐 감독의 <교차로의 오아시스(North Cross)>는 영국 플리머스의 북부 교차로에서 찍은 영상이다. 이 교차로의 윗부분은 차가 다니고 아랫부분은 보행자 통로로 사용된다. 감독은 아주 카메라 조작을 통해 윗부분과 아랫부분, 차량의 흐름과 사람의 흐름을 다른 속도로 담아낸다.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서로 다른 감흥-리듬을 느낀다. 마치 속도에서 튕겨져 나갈 듯한 차량들과, 한없이 느려져 누군가가 끌어 당기는 듯한 사람들의 걸음 걸이. 단순한 조작만으로도 세상의 시간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할 수 있는 영화만의 연금술. 

 

7-2. 토니 힐 감독의 <라반 댄스(Laban Manoeuvres)>는 프레임의 장난이다. 감독은 프레임 구조물에 카메라를 달고 영상을 찍는데, 그는 카메라의 프레임 조차 나누어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상들은 미셜 공드리가 작업한 뮤직비디오나 CF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미셸 공드리가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나온 탄성을 자아낸다면, 토니 힐의 작업은 우연성에 기댄 듯한 느낌이 든다. 카메라와 거울을 통한 데칼코마니? CG가 아닌, 단순한 카메라의 고전적 조작으로 이런 감흥을 불러 일으키기란 쉽지 않다. 

 

  

7-3. 밥 세비스턴 감독의 <디지털 로토스코프 놀이공원(The Even More Fun Trip)>은 새로운 체험이다. 이 영화는 친구들과 함께 놀이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는 짧은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밥 세비스턴은 이 평범한 다큐멘터리에 로토스코프 기법-영상 위에 그림을 그린 기법-을 사용해 전혀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로토스코프를 통해 이 개인적인 영상 기록은 감독의 주관적인 느낌이 깊이 베어들게 되고, 그 당시 상황의 느낌을 그림을 통해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같은 기법을 사용한, 그리고 감독이 참여하기도 한 <웨이킹 라이프>, <스캐너 다클리>가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들의 연기를 낯설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면, <디지털 로토스코프 놀이공원>은 평범한 것을 새롭게 보이게 한다. 애니메이션처럼 완벽한 창조와 통제가 아닌, 배우들이 이루어 놓은 상황을 감독의 의도에 맞게 수정/강조하는 로토스코프 작업은 아마도 아직도 진행 중인 새로운 효과임은 분명하다. 

 

  

7-4. 우로 피코프 감독의 <몸의 기억(Kehamälu)>은 무시무시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다. 기차 화물칸 안, 그 안에 털실 모양의 인간들이 있다. 열차 바깥의 거대한 힘이 이들의 털실을 하나씩 잡아당기기 시작하고, 한 명씩 털실이 당겨짐에 따라 형체를 잃어가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기 시작한다. <몸의 기억>은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즉각적으로는 몸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 천천히 그러나 고통스럽게 진행되는 죽음, 그 고통을 안고 사는 우리들, 그리고 그저 지켜만보는 우리들 그리고 결국에는 모두 사라지고 말 우리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향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고통은 순전히 우리의 몸이 느끼고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7-5. 고시마 카즈히로 감독의 <3D 입체 도쿄 풍속도(東京浮絵百景)>는 도쿄의 일상을 3D로 보여준다. 3D의 효과는 굉장한 것이 아니고, 어렸을 때 장난감 카메라에서 봤음직한 간단하지만 독특한 기술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아바타>로 시작된 3D 효과에 대한 광풍이, 실은 이렇게 간단한 것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3D라는 효과는 신기루도 엄청난 기술도 아닌, 우리가 예전부터 봐왔었던, 이런 단순한 효과가 아니었을까? 이 영화는 우리에게 3D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야기의 개입으로서의 3D가 아닌, 그저 바라보는 풍경으로서의 3D.  

 

7-6. <교차로의 오아시스>, <라반 댄스>, <디지털 로토스코프 놀이공원>, <몸의 기억>, <3D 입체 도쿄 풍속도>는 <익스트림 3>이라는 이름으로 8월 22일 20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8.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라이프 인 어 데이(Life in a Day)>는  2010년 7월 24일 하루 동안 자신들의 일상을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린 전 세계 192개국 8만편 이상의 비디오들을 다시 편집해 한 편의 영화로 완성한 영화다. 7월 24일, 전 세계의 평범한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영화는 우리들이 찍은, 우리들의 희노애락, 생노병사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지만, 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 그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그냥 보는 순간만으로도 가슴 찡하다. 이 영화의 위대함은 우리가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삶은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이기에. 

<라이프 인 어 데이>는 아쉽게도 신디에서의 상영이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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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19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영화 창피해를 봤던 사람으로
간만에 검색하다 (우연히)블로그 방문하게됐어요.
포스팅하신거에 창피해를 보고싶단 언급이 몇구절있더군요..

(갑작스런말일수도있지만)
실제 동성애에 대해 혹 편견없이
열린맘으로 이해하시나요?
저는 이반(동성애자)을 개인의 개성이고, 취향이라 생각하며 이해해요. 편견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는거야말로
이상하다생각해요. 왜냐면 육체적인성이 아닌 마음이나 영혼에 끌리는게 진정한 사랑이라생각하니까요.
여튼 제가 쪽지드린이유는, 편견과닫힌맘이 많은 사람들중에서 혹시 열린맘을 가지신분이면 소통하는 친구되고싶어서요.

Tomek 2012-04-19 14:54   좋아요 0 | URL
이 세상에서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갑습니다.

:)

2012-04-19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1 0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라딘happy 2012-04-2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모쪼록 제얘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에또 들(려도되죠?)^^ 늘행복하시길바래요.

Tomek 2012-04-23 09:47   좋아요 0 | URL
네. 볼 건 없지만 종종 놀러오세요~
:)

저 역시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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