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러브』영화와 소설, 그 이야기의 원형
페어러브 - 사랑스런 로맨스
신연식 지음 / 서해문집 / 2010년 1월
품절


"너, 아저씨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난 니 아버지 친구야!"
"할 말 없으면 아빠 친구라 그러고! 아빠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속마음을 들킨 건가... 당황스러웠다.
"나... 니 아버지 좋아했어!"
"거짓말!"
"얘가 진짜......"
"아저씬 아저씨 다칠까 봐 맨날 거짓말하잖아요? 내 마음도 알고 아저씨 마음도 알면서! 아저씬 아저씨 말이 다 맞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사람이 무슨 카메라 부품 같은 줄 아세요? 관계만 알면 고칠 수 있게!"
"너, 이녀석! 아저씨 화낸다!"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나머지 한껏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질러 보니 노인네들이 왜 가끔 그런 식으로 성질을 부리는지 알 것 같았다.-134쪽

남은이가 손을 뻗어 아직도 젖어 있는 내 옆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나는 얌전히 받아들였다. 남은이의 손끝이 눈가의 주름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주름을 펴보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위아래로 어루만졌다.
"난 그냥 좋아요. 아저씨가."
남은이는 내 눈가의 주름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그보다 더 천천히 말했다.
달빛이 들어와 남은이의 뺨에 맺혔다.
두부처럼 연하고 투명한 뺨이 잘못 다루면 으깨져 버릴 것 같이 움직였다. 그래서, 나도 남은이처럼 손을 내밀어 남은이의 뺨을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그런 거 잘 몰라."
"세상일을 다 알고 해야 되는 거면 태어나지도 말았어야죠."
나는 겁이 났다, 솔직히.
"겪어 보면 다를 거야. 사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냐."-149쪽

"내가 오십 년 넘게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살았거든. 근데 세상엔 진짜 나쁜 놈들 많아. 사기 치고. 돈 떼먹고. 꼭 니 아빠를 얘기하는 건 아니고."
"무슨 말씀이세요?"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싫고, 남이 나한테 그러는 것도 싫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나는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랑 나랑 같이 있는 게 뭐가 문제냐는 거지.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피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내얘기 무슨 얘긴지 알겠니?"
"그게 지금 프러포즈 하는 거예요?"
남은이의 목소리도 눈동자도 떨렸다.
"왜? 그래도 이 얘기 하려고 이십 년 만에 백 미터 이상 달린 건데?"
남은이는 환하게 웃었다. 목도리가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는데도 환하게 웃는 게 보였다. 그래서 나도 환하게 웃었다.
남은이는 환하게 웃다가 손을 뻗어 땀에 젖은 내 뺨을 어루만졌다. 수십 년을 해매 온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남은이의 손길이 닿으니 나는 그대로 이제는 조금 제자리에서 기대어 쉬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심이 됐다. 안심이 되니 다리에 힘이 빠지고 식은땀이 쏟아졌다.-155쪽

예전에 인간문화재인 목공 장인에 관한 글을 본 적이 있었다. 평생 나무만 보고 나무만 만지고 살아서 지혜로워지기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려워진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기는 평생 나무만 보다 보니 시야는 더 좁아지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더 넓은 걸 요구한다는 거다. 그래서 자신은 나무를 보며 자기가 보지 못하는 다른 세상과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다. 나는 그 얘기에 너무 공감이 갔다. 나야말로 평생 카메라만 만지고 살았으니. 카메라 부품만 보고 살아온 나는 이제 스물다섯 먹은 여자아이 생각까지 이해해야 한다.-198쪽

며칠 잠을 못 잤어요-
어디선가 남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눈을 뜰 수도, 감을 수도 없었다.
"시험공부를 하느라 정신없이 밤을 새고 과제물 제출하고,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커튼 위로 춤을 추는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오빠 버릇 있잖아요? 얼굴 비비는 거. 너무너무 피곤할 때 하는 건지 그때 알았어요. 너무 몰랐어요, 오빠를."
나는 남은이를 보고 있지 않아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표정과 몸짓으로 말하는지 환히 보이는 것 같았다.
"오빠가 평생 안 변할 수도 있고, 내가 변할 수도 있고, 내가 무뎌질 수도 있고, 오빠가 변할 수도 있고. 어차피 어떻게 살아도 백 프로는 아니니까."
커튼 위로 노을이 붉게 타올랐다.
"매 순간 매순간 어떤 면으로는 오십 대 오십이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남은이 눈동자와 같은 노란 노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23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의 삶과 문학
박해현.성석제.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 한 편의 시집을 내고 만 28세에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요절'한 한 사내의 삶은 결국 신화가 되었다. 기형도의 극적인 삶(처절한 가난, 풍에 쓰러져 식물같은 아버지, 신춘문예 등단, 일간지 기자, 20대에 죽음 등)은 그의 염세적인 시와 맞물려 이제는 그 누구도 폄하하지 못할 거대한 하나의 세계로 자리잡았다. 

   이 책은 기형도 사후 20년을 맞이해, 점점 더 단단해지는 '기형도'라는 신화를 깨뜨리고 있다. 그는 신화속의 인물이 아니고, 그저 섬세한 인간이었다. 책은 기형도의 시를 하나의 텍스트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가족, 학생, 기자, 시인 등 그의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추억을 털어놓아 그를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그가 발표한 시가 한국 문단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평가하기도 한다.  

   그가 요절한지 20년이 지났지만, 그의 신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두터워져 갔다. 이 책은 만신전에 오른 그를 다시 인간의 자리, 시인의 자리에 내려놓는 작업이다. 어쩌면 이런 작업을 기형도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도 인간이었기에. 불안한 20대 청춘이었기에. 너무나도 나약하고 섬세한 사람이었기에.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노래 부르는 것을,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고, "경악! 경악!", "아, 절망! 절망!"이라는 짧은 단발마적인 단어들을 입에 달고 생활했던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그는 어떤 작품을 발표했을까? 이런 부질없는 상상 또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그의 시(詩)대로, 그의 삶은 책이 되었다. 이 책은 기형도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대부분 검은 페이지로 만들었겠지만서도. 하지만, 그를 읽은 사람이라면, 결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 「오래된 書籍」 전문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 - 공정무역 따라 돌아본 13개 나라 공정한 사람들과의 4년간의 기록
박창순 외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는 제목처럼 어렵거나 딱딱한 책이 아니다. 책을 펼치기 전에는 이해 못할 어려운 단어가 행간에 포진해 있을 것 같고, (적어도 내게는 쥐약인) 경영/무역 용어가 난립하는 게 아닐까 상당히 고민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진 생각이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책은 인문서적이라기 보다는 거의 에세이에 가깝다. 이 책은 공정무역에 관심을 가진 박창순, 육정희 부부가 공정무역국을 취재한 내용을 기술한 책이다. 책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공정무역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기 보다는, 저자들도 잘 모르는 '공정무역'을 직접 취재하고 몸으로 부딪혀서 알게 된 내용을 재미있게 서술했다. 제목만 보고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조금 모자란 700여페이지에 기술된 공정무역에 대한 내용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공정무역이란 단지 착한 소비가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이다.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거래다." 책은 이 정의가, 공정무역 생산국에서는 어떻게 행해지는지, 공정무역 소비국에서는 어떻게 행해지는지를 꼼꼼히 기록한다. 

   공정무역은 단순한 기부행위가 아니다. 품질이 떨어지는 상품을 원조의 목적으로 구매하는 것이 아니다. 인도, 네팔, 필리핀, 가나, 스리랑카, 파키스탄의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이 당당한 상품으로 구매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거지가 아니다. 소비자들이 정당한 가격으로 그들의 물건을 산다면, 현재의 불평등한 구조가 많이 개선될 것이다. 

   물론 이 공정무역 자체가 지구상의 모든 불평등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정무역이 이 모든 불평등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 번째 단추가 될 것은 확실하다. 공정무역은 단순한 소비활동이 아닌, 환경과 인권이 포함된 '사회 활동'이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에 대한 지식만을 원한다면, 굳이 이 책을 구입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리뷰에 언급한 내용이 각 국가별로 반복해서 나온다. 더구나 이 책은 다른 책에 비해 판형도 크고 종이도 두껍다. 침대에 누워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책상에 앉아 하나하나 차근차근 각 나라의 사례를 읽으며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볼 기회를 주는 책이다. 

   그것마저도 귀찮다면, 적어도 이들 상호명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두레생협연합회, 아름다운가게, YMCA 전국연합, (주)페어트레이드 코리아, ICOOP 한국생협연합회, 공정무역 가게 울림. 이들 회사/단체는 한국에서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다. 지금 한국에 들어오는 공정무역 물품은 극히 제한적이지만, 이들 제품을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공정무역을 실천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인 지지는 자신의 지갑을 여는 것이다. 우리의 소비행위가 아프리카나 인도의 누군가에게 긍정적 영향도, 부정적 영향도 끼칠 수 있다. 지구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존재들이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 막스 하벨라르 재단의 프란스 신부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리뷰를 마친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비자들이 제품을 사는 것은 투표와도 같습니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소비 태도에 따라서 가까운 세상 혹은 먼 미래가 결정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덧붙임 

1. p30에서 아일랜드 그룹 '시구르 로스'는 '시규어 로스'가 맞습니다.  

2. 제목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 (당연하게도)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따왔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삶이 내게 왔다' 이벤트
그 삶이 내게 왔다
정성일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그 삶이 내게 왔다』는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만의 길을 찾은 17인의 청춘 <에세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출판사의 소개대로,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떤 의미에서든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전적 에세이다. 하나의 테마로 각자 스스로 글을 진행하다보니 글의 편차도 제각각이다.  

   책에 수록된 내용을 (나름) 유형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이는 인생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이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길 또한 불안해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어떤이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보고'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자신의 삶을 뽐내기도 한다. 첫 번째 유의 글은 심금을 울리고 두 번째 유의 글은 내 삶을 반추하게 하기도 하지만, 세 번째 유의 글은 지루하고 네 번째 유의 글은 정말 손발이 오그라든다.(정성일 씨 표현대로, 나 역시 '지식인들이 자기 지식을 뽐내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지식인들이 자기 삶을 뽐낼 때는 견디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자기 삶을 뽐내는 것 또한 우리 인간의 한 모습아닌가? '착한' 글만 모아서 책을 묶으면 그 또한 우리 사회를 한 단면만 보게 될 것이다. 오히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의 글에서 그들이 이 사회와 부딪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 이 책의 의미라면 의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지금껏 많이 접하지 못했던 '정보'와 '편견의 해소' 였다. 인권운동, 페미니스트, 행복한 학교, 기생충학, 미술치료, 이슬람 문화, 대중문화(문학) 등의 내용은 그동안 몰랐던 내용이나, 내가 갖고 있던 편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각 꼭지의 분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깊이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대충 윤곽은 훓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들의 삶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많이 왈가왈부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의 인상깊었던 구절을 조금씩만 옮겨 놓는다. 순서는 거꾸로 가나다순이고, 인용한 문구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문구를 골랐다. 

 

   
 

나는 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인생이 다 공부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 사람을 약간 고개를 튼 다음 비스듬히 바라본다. 그러면 물어보고 싶어진다. 올해 무얼 배우셨습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고 계십니까? 그것들은 그저 말의 수사학이다. 인생을 사는 것은 대부분 자기가 공부한 것을 배신하는 행위다.    

정성일 - 영화,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그대의 잠든 하늘을
          잠행하다가
          독일제 대공포 소리를 들었다
          어느 이름 모를 별자리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는 아마
          저공비행을 하였던 것 같다    

이현우 - 게으른 저공비행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옳은 것으로 간주하며, 특히 한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취향에 따른 호불호의 문제를 미감의 우열 문제로 환원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이영미 - 대중의 문화, 나와 당신의 취향

 
   
 

물론 회사에서는 내가 쓴 글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조용했다. 그저 분위기만 싸늘했을 뿐 말 한마디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글이라는 것이 말과는 다른, 어떤 힘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꼈다. 내가 말로 항의했더라면 회사에서 나한테 대놓고 이야기도 못하고 저렇게 끙끙 앓고 난리가 났을까. 회사는 그 조합노보가 못 나오도록 엄청 압력을 넣었다. 나는 결국 세 번째 노보를 내지 못했다. 그뒤로 서울 시내버스 회사 어떤 곳에서도 조합신문이 나오지 않았다.    

안건모 - 내가 버스기사 직업을 버린 까닭

 
   
   
 

요즘 기생충이 어디 있냐고. 대체 기생충학교실이 왜 필요하냐고.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난 "공룡도 멸종되었지만 공룡 연구하는 사람은 있지 않느냐"며 궁색하게 답하지만 그래봤자 쉬이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공룡은 귀여운데 기생충은 징그럽다나. 공룡과 일대일로 마주쳐본 적이 있다면 그런 소리는 못할 텐데 말이다.   

서민 - 기생충들아 고마워

 
   
   
 

이제 고백한다. 내가 20년을 인권운동의 길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운동의 주체로 대우받았기 때문이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일에서 난 소외되는 위치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 책임지고 일을 해야하는 자리에 있었다.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일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큼 힘이 되는 일은 없다.   

박래군 - 인권운동, 나의 영원한 숙제

 
   
   
 

무릇 책이라면 둘 중 하나는 되어야 한다. 좋은 책이라는 평을 듣거나 아니면 잘 팔리거나. 거꾸로 말하면 양서도, 베스트셀러도 되지 못하는 책은 출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한 해에 열 권씩이나 번역하는 외국 서적들은 아타깝게도 무려 70퍼센트가 둘 중 어느 축에도 들지 못하는 책이었다. 함량이야 번역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고, 상업성은 사후에 알 수 있지만 대체로 회의적인 예측이 들어맞았다. 차라리 내가 쓰는 게 낫겠다는 오만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그때 부터였다.   

남경태 - 편집-번역-집필의 트리클다운

 
   
   
 

요즘도 노래방에 가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레퍼토리가 이들 노래이니 그 시절의 경험이 내 음악적 감수성의 토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로부터 30년쯤 지나 최희준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어린 시절부터 <종점>과 <길 잃은 철새>를 즐겨 불렀다고 하자 선생이 "어이구, 무척 조숙하셨군요"하셨다. 초등학생 주제에 '너무나 짧았던 인생의 종점에서...... 내 청춘 꺼져가네'(<종점>)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 그걸 조숙했다고 해야 할지 불행했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김창남 - 어느 얼치기 쾌락주의자의 대중문화 편력기

 
   
   
 

이왕 이 길로 나섰으니, 진짜 직업꾼답게 시골 오일장 거리에 깔릴 수도 있는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 시대 작가들은 참 고급이다. 평균 학력은 모르긴 몰라도 대졸이요, 재미있다기보다는 똑똑한 사람도 많다. 나 또한, '선생님' 소리를 예사로 듣는다. 양심이 찔리고 불편하다. 그런데 이즈음에는 나보다 어린 사람이 나에게 '공선옥 씨' 하면 더 불편해한다. 글쓰기는 적으나마 내게 밥을 먹여주면서도 나를 타락시켜왔음이 분명하다. 

공선옥 - 생의 한데에서 불안에 떨며

 
   
   
 

내 인생 혹은 삶의 방향을 결정지은 정말 그럴듯한 계기나 견딜 수 없는 무엇이 있었던가? 도망갈 수 없는 소명과도 같은 게 있어 그것이 내게 왔던 것일까?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단 한가지만 제외하고. 그것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강홍구 - 캔버스 / 카메라 / 도망자

 
   

 

* 덧붙임 

1. 책을 보내주신 로쟈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2. 오타라 해야할지... 서민 교수님 글에서 '『인어공주』의 장서희 씨'라는 말이 나오는데 『인어아가씨』겠죠. 그리고 남경태 작가님의 글 중 제일 마지막 문단에 '그러나 하지만..'이라고 시작되는 문장은 둘 중 하나를 생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인용에서 빠진 분들의 글이 지루하다거나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막막하다.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내가 지금껏 접해온 소설이 아니었다. 소설의 시점은 엉켜있고, 앞부분에서 살짝 언급했던 이야기들이 아예 한 장(章)을 통해 이야기하는가 하면, 아직 언급하지 않은 사실을 마치 다 알고 있는 사실인양 능청맞게 기술해서 읽는이를 계속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마치 소설 전체를 대구법을 사용한 것처럼.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선 독서 중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확인하는 '번거로움'이 필요하고, 언급한 사실이 기술되기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수동적 읽기가 아닌 적극적인 독서를 요한다. 김연수는 왜 이런 방법을 선택했을까?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이런 서술이 소설을 있어 보이게 하는 겉멋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겉멋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세대와 세계가 겹쳐지는, 우리가 느끼지만 알지 못하는 거대한 '우연'을 이야기 하는데 이 정도의 품은 팔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1991년을 살아가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다. 소설은 '나'와 애인 '정민'의 이야기로 진행되지 않는다. '나'의 이야기에서 '정민'의 이야기로, 정민의 이야기에서 정민의 삼촌의 이야기로, 삼촌의 이야기에서 이길용/강시우의 이야기와 그의 일본인 애인 레이,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독일인 헬무트 베르크의 이야기로 그야말로 종횡무진을 한다. 마치 세헤라자데라가 이야기하는 '아라비안 나이트(千一夜話)'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모두들 우연한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다. 정민의 삼촌의 내셔널 지오그라피를 헌책방에서 구하지 않았더라면, 이길용이 광주에서 야바위를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길용의 비디오를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소설은 이야기를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특별한 삶을 살게된 이들의 이야기를.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두 번 태어난 사람들이다. 정민의 삼촌은 갑작스런 죽음과 갑작스런 폭행으로 세로운 세상을 만난 경우다. 정민은 그런 삼촌의 자살로 꿈 속에서 깨어났다. 이길용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다. 그는 '두 번 태어났다.' 한기복의 분신을 통해 - 더 정확히는 이상희를 만나고 나서 - 한 번, 다른 한번은 안기부를 통해서. 이들은 모두 우연한 사건을 통해 새로 태어나게 되었고, 새로 태어난 이들은 또 다른 의미로 세상에 영향을 주고 이 모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어느 하나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 이 세상은, 아니 우주는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셈이다.  

   일제시대와 남북분단 그리고 독재와 광주와 민주화 운동. 이 모든 것은 한국에서만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이 아닌 전 세계사적으로 촘촘히 얽힌 거대한 우연과도 같은 것이다. 운명같은 이 거대한 우연을 초라한 개인은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김연수는 그걸 표현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소설에서 언급한 칼 세이건 이야기처럼, 칼 세이건이 보낸 지구의 메시지는 우주 저 편의 또다른 칼 세이건(지구의 칼 세이건 처럼 외계 지적 생명체를 믿는 외계인)만이 듣게 될 것이다. '나'는 비로소 할아버지의 메시지인 '입체 누드 사진'과 태워버린 '비망록'을 수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 '나'는 새로 메시지를 보낸다. '나'의 그 메시지는 지금 소설을 막 읽은 '내'가 될 것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모두인 동시에 하나'다. 누군가 라디오의 전파를 잡아주기를 바라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주파수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