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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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의 글에는 감정이 없다. 시종일관 메마른 서술로 진행되는 글을 읽다보면 건조하다 못해 차갑다는 느낌까지 든다. 3인칭의 시점의 글일 때는 그나마 견딜만한데, 1인칭 주인공의 시점으로 가족이나 자신의 생로병사를 남 일 이야기하듯이 서술할때는 소름이 돋아 책을 던져버리고 싶게 만든다. 감정을 배재한 차가운 서술로 읽는이의 감정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 김훈 소설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다. 

   박민규와 같이 김훈은 소설가로써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단편을 쓰지 않고 장편으로 데뷔를 했다는 점이다. 박민규는 『지구영웅전설』로 데뷔를 하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쓴 후에 단편집『카스테라』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을 쓰기 시작했다. 김훈 역시 데뷔작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으로 데뷔하고 『칼의 노래』를 쓴 후에 단편집 『강산무진』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조금 더 알아보면 이 목록은 더 넓고 깊게 채워질 것이지만, 아무튼 독특한 이력임엔 틀림없다. 

   단편과 장편의 가장 큰 차이는, 물론 원고 매수의 차이가 가장 크겠지만, 테마에 대한 집중력의 차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장편은 벽화에 비유할 수 있을만큼, 크고 넓은 세계를 그린다. 작품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그린다. 반면 단편은 장편에서 오브제로 사용되는 하나의 요소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작은 캔버스로 그리는 세계다. 거대한 벽화에서 작은 캔버스로 옮겨졌음에도 김훈은 여전히 똑같은 것을 그린다.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죽어가는 아내를 '내'가 바라보는 것이나(「화장」), 죽어가는 나를 '내'가 바라보는 것이나(「강산무진」), 결국 '내'가 죽기 전까지는 어찌됐든,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갑작스레 옛 애인이 찾아왔건(「배웅」), 진절머리나는 고향을 떨쳐내고 싶건 간에(「고향의 그림자」), 그들은 시납금을 채우고, 밥을 벌기 위해서 오늘도 종로에서 승객을 태울 것이다. 간혹 자신의 항로를 찾기도 하지만, 못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항로표지」), 세속적 삶과 학문 사이에서 길을 잃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뼈」), 어쨌든 그들도 오늘을 살고 있을 것이다.  

   김훈의 세계는 결국 '내'가 주체인 1인칭의 세계다. 세상에 어떤 큰일이 벌어지건 간에,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내 목숨이 다 할때까지 꾸역 꾸역 살아갈 것이다. 생로병사의 온갖 고통을 짊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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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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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쩍 훓어보면, 이 책, 힘들게 힘들게 글을 모아 겨우 책을 낸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조악한 느낌이 든다. 특히 마지막 수상소감과 서문 모음을 보면, 이렇게까지 해서 분량을 채워 책을 냈어야 할 작가가 남세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약 190여페이지를 겨우 겨우 채운 책은 힘겹게 흘러 겨우 겨우 하류에 도착한 조강의 느낌이 든다. 그래서일까? 이 책 제목 『바다의 기별』은 그가 힘들게 흘러 도착한 강 하류에서의 어떤 '다짐'처럼 보인다. 

   책은 조악해보이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임팩트하게 몰아 넣은 듯 힘이 있다. 지금껏 내면의 현미경으로 세상을 관찰해온 김훈은 이번엔 그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돌렸다. 그가 생각하는 것들, 그가 바라보는 풍경, 그가 읽고 있는 책, 그리고 그가 처음 밝히는 '설화적'인 가난, 아버지의 존재와 죽음, 가부장이 된다는 것. 그런 소회들이 이 책 전반에 펼쳐져 있다. 

   모든 글들이 다 의미있고 새롭지만, 이 책 『바다의 기별』에서 유난히 내 관심을 붙잡았던 부분은 그의 부모님에 대한 소회와 언어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돌아가신 아버지를 땅에 묻을 때 서럽게 울고있는 그의 여동생들을 향해 일갈한 김훈의 말.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이 말은 지금의 김훈을 김훈으로 있게 하고, 독자들이 바라는 김훈의 상을 완성한 말일 것이다. 마치 아득한 역사의 한 저편에서 흘러 나온 듯한 박제된 인물의 일갈처럼. 그는 문체뿐만 아니라, 인간 삶 자체가 고전적이다. 이 말을 하면서 그가 가부장에 대해 다시 생각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자신이 대체한 아마도 그의 삶을 규정한 어떤 큰 사건이었다고 함부로 추측해본다. 

   하지만 유난히 가부장적인 그도 언어에 대해서는 한없이 섬세하다. 조사 '-은/는'과 '-이/가'의 쓰임새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은 이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은 가부장의 모습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세상의 삶을 개념화시키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 개념화된 언어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그는, 그 자신의 밥벌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모순을 끌어안고 삶에 가까운 언어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하고 사유한다. 그렇기때문에 한자, 영어, 독어의 모습에서 문법이 어떻게 적용되고, 그런 모습을 통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사유하고 고민한다. 자신이 생각한 틀에 맞춰 거침없이 발언하는 그가 고작 조사 하나에 저렇게 고민하는 것을 보면, 그는 어쩌면 세심한 마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그다운 모습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써왔던 그의 글들을 정리했다. 돌아보니 강의 하류이고 강의 하류는 바다와 강의 경계가 없는 혼재된 공간이다. 그는 바다로 나아갈까, 아니면 하류를 거슬러 다시 시원(始原)에서 시작할까. 최근작 『공무도하』를 보면 그 답이 보일듯도 하다. 그는 육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강도 육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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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숭고함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設, 첫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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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는 더이상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직접적인 말이다. '고전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그의 문체가 소설이, 역사가 아닌, 이곳 현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의 독자들의 큰 바람이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해 엄정하고 냉엄한 시선으로 가다듬은 문체로 이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고, 비판하고, 방향을 제시해준다면 그의 독자로써 얼마나 복될까? 하지만 그것은 독자들의 이상일 뿐이다. 김훈은 독자들의 이상이 빚은 인물이 아니다. 김훈은 김훈일 뿐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을 숨기지 않고 다 드러낸다.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보일법한 것들도 스스럼없이 다 드러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진보적'인 틀에서 김훈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굳이 편을 가르자면 김훈은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지금의 이 세상을 깨뜨리기 보다는 이 세상에 맞추어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가부장제도를 존중하고 '여자'는 가부장제도하에서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여기 저기서 실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김훈이 오히려 묻는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게 도대체 뭔데?' 

   그는 '세상 잡사를 싫어하면서도 세상 잡사를 말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는 그가 보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번잡스러운 일도 그에게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래서 그는 그 풍경을 보고, 그 너머의 것을 사유하고 글을 쓴다. 단, 이 글들은 애초에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 쓰여진 글들이 아닌, 신문지면, 잡지 칼럼에서 소비되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쓴 글이다. 신문과 잡지의 분량은 정해져 있다. 한정된 분량 덕분에 그는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대신, 빠른 템포로 간결하게 넘어간다.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등의 산문집에서 끝까지 밀고나가는 그의 사유에 진절머리쳤던 독자들이라면, 그보다는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나니, 이상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생각났다. 이스트우드는 김훈과 달리 자신의 정치색을 확실히 드러냈다. 그는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 이고, 총기소지를 지지한다.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로 인터뷰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언론에 이렇게 얘기했었다. "그자식이 날 인터뷰하러 온다면 총으로 쏴버릴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정치색으로 그의 작품을 재단하지 않는다. 그는 세르지오 레오네, 돈 시겔과 함께 한 서부극과 형사물에서 이 세상을 지키는 역을 했었다. 그가 배우가 아닌 감독을 한 영화를 보면, 그 의미가 조금 더 명징해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상을 완성체로 보고 있다. 그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를 보면 나쁜놈들은 그냥 나쁜놈들이다. 그들은 갱생을 할 수 없는 존재고, 이스트우드 또한 그들을 갱생의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몰아내야할 존재들이다. 이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나를 지키고 안전한 이웃을 지키기 위해서.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은 물론이고 때로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는다. 그가 지키는 가족, 그리고 이 사회는 그가 목숨을 걸 정도로 가치있는 것이다. 

   김훈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가부장제도를 존중하고, 이 사회를 지키고 존중한다. 단지 그가 정치성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그 자신도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본인 스스로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런 편가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할런지 모르겠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끼니를 떼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세상 밑바닥에서 담론의 가장 밑바닥인 '밥'과 '끼니'에 대해 쓰는 글이 정치성을 초월하는 거대담론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이 어쩌면 김훈 사유의 힘이 아닐런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김훈의 글을 읽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생각하다가 글이 두서 없이 되어 버렸다. 내가 원래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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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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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과 상처』는 김훈이 처음 출판한 책이다. 그 때는 '기자'라는 밥벌이가 있었던 시절이라, 지금과 같은 생존의 조건을 우선으로 한 글쓰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김훈과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란 '타락'의 반대말이 아닌, 밥벌이라는 노동이 제외된 어떤 '유희'의 의미를 뜻한다. 하지만 김훈이 괜히 김훈인가? 그는 유희보다는 그의 치열한 사유를 펼쳐놓는다. 

   일반적인 독자라면 첫 장부터 그가 풀어놓는 사유의 지난함에 기가 질릴 것이다. 그는 지금껏 그의 몸 속에 담아온 생각들을 끝을 보기라도 할 작정으로 끝까지 나아간다. 그는 그러한 과정을 자신의 내면에 새겨진 '상처'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의 풍경은 단지 경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풍경은 여러 지방의 모습들이기도 하고, 역사이기도 하고, 그가 읽어온 시(詩)이기도 하고, 그의 고향이기도 하고, 그가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즉 그는 세상 모든 것을 마치 풍경을 보듯이 관찰한다.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모질게. 그가 바라본 풍경들은 후에 다시 꺼내는 이야기이거나, 혹은 이번에 이야기 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내용들로 마구 뒤섞여 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품어온 사유를 쏟아내고 싶은 '공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가 써온 '기사'처럼 한정된 공간에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닌, 오래 남을 수 있는 '책'이라는 공간에. 

   올해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 김훈은 '이제 이런 글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그의 글에서 이런 긴 템포의 지난한 사유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독자로서는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바라는 매너리즘에 갇힌 작가에 대한 욕망과, 늘 새로워지고 싶어하는 작가의 욕망은 서로 부딪힐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나아감은 응원하고 격려할 일이기도 하나,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이제야 지난하게 거꾸로 거슬러 올라 겨우 그의 글의 시원에 도착했다. 시원의 김훈은 혼란스럽고 치열했다. 그의 글은 하류로 흘러갈수록 혼란함을 걷고 더욱 치열해졌다. 김훈이라는 거대한 강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그 처음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풍경과 상처』가 그 대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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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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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현실과 환상이다. 그는 늘 세상 한 구석에서 벌어질 법한 일을 쓰지만, 그 현실에 사는 주인공들을 감싸는 분위기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이사」의 내용은 이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본 일들이다. 하지만 김영하는 주인공들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상황으로 밀어넣는다. 영화감독 테일러 헥포드는 만약 악마가 인간 세상에 산다면, 아마 변호사로 살 것이라고 이야기 했었는데(『데블스 애드버킷』), 김영하는 아마 이사짐센터 직원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사 당일 새벽에 도착한 그는 마치 악마와도 같은 존재다. 그는 황사를 몰고 왔고, 엘리베이터를 고장냈으며, 이사짐센터의 전화마저 불통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새끼 악마들을 데리고 주인공 부부를 압도하고 협박하며 이사짐을 나른다. 갑자기 현실감을 잃은 공간. 그 공간안에서 인간인 주인공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비현실성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도 나온다. 조근조근 진행되는 이야기가 갑자기 '자연발화'라는 미스테리에 접근한다.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현실의 이야기는 뭐 현실적인가? 현실적인 이야기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합쳐져서 슬픈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말도 안 돼'의 이야기를 그럴싸한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것은 김영하의 힘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종교적 갱생담이다. 이 이야기는 세 수컷들이 '공유한' 한 여자의 추억을 살인사건과 미스터리 수법으로 풀어낸다. 그들에게 죄의식은 없다. 동물들에게 인간 수준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실례다. 주인공은 옛 여자를 만나고 탄식한다.  '이제 너랑 다시는 잘 수 없겠구나.' 하지만 그녀가 죽고나서 그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쁜 사람이 착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갱생담이 되지만, 짐승이 사람이 되는 것은 종교적인 갱생담이다. 그것도 그들이 죽인 순교자를 통한 이야기라니!! 살인사건이 해결되고 돌아오는 안도감. 하지만 그는 매 해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가 인간이 되게 해준 그 순교자를 향한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때 뿐일 것이다. 

   가장 짧지만 강렬한 「마지막 손님」은 울림이 크다. 2003년 12월 31일. 영화판에서 미술일을 하는 주인공 부부에게 일이 떨어졌다. 영화에 쓰일 여고생 시체를 만드는 것이다. 칼로 난자를 당한 피투성이의 여고생 모형을 거의 만들었을 때 일을 의뢰한 감독이 방문한다. 감독은 더미를 보고 장소가 없으니 여기에 며칠 남겨두자고 한다. 감독이 떠나고 두 부부와 죽은 소녀의 모형은 새해를 맞이한다. 어쩌면 창작자란, 이런 시체 모형을 만드는 일과 같지 않을까? 진짜같은 가짜. 그 가짜를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 하지만, 남겨진 것은 외로움이다.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이상한 것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들의 모습. 김영하는 그 모습을 쓸쓸하게 바라본다. 

   이런 저런 말을 하더라도, 김영하의 소설은 '재미있다' 현실에 기반하면서 환상을 끌어대는 그의 이야기에 유쾌할 따름이다. 

  

 

*덧붙임 

   그 외 「오빠가 돌아왔다」, 「너를 사랑하고도」, 「너의 의미」,「보물선」까지 마저 이야기하려 했으나, 리뷰에서 다 밝혀버리면 안될 것 같아 남겨둡니다. 아마도 '재미'면에서 따지자면, 이 소설들이 정수라 할 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론 「너의 의미」가 최고라 생각합니다. "감독님, 왜 자학하세요?"는 정말 최고의 대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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