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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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 기형도 「안개」 중 -

 

   마치 기형도의 시처럼,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는 모든 것이 낯설고 혼란스럽다. 소설의 서사를 책임지는 '나' 조차도 조심스럽고 확신이 없다. 그렇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은 어떤 행위일까? 손가락. 나를 비껴가는 저 손가락. 누군가를 지목하고, 죽고 죽이는 저 손가락. 

   소설은 1930년대 간도땅에서 벌어지는 민생단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일제 치하.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일본군도 아닌, 마적단도 아닌 같은 동족끼리 총구를 겨누고 서로 '학살'한 사건이다. 그들은 왜 서로를 죽였을까? 왜 서로를 죽일 수 밖에 없었을까? 김연수는 그 당시 '이데올로기'나 '독립 따위'와는 상관없었을 가장 평범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그 비극의 원인을 따라간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해 태어난 '김해연'은 '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용정으로 파견되어 측량기사로 일한다. 그 와중에 간도임시파견대의 '나카지마' 중대장과 친하게 되고 민생단 박길룡의 소개로 이정희와 사귀게 된다. 그러나 행복함도 잠시, 해연은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이정희가 공산당원이었고, 파견대의 정보를 빼내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정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공산당원이었다가 전향해 경찰 보조원으로 일하는 '최도문'에게 듣게 된다. 해연은 정희가 죽은 곳에서 자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충격으로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후 그는 대련에서 한 사진관에서 일을 하고 그곳에서 심부름일을 하는 '여옥'과 사랑에 빠진다. 해연은 여옥과 경성으로 돌아갈 계획을 하고, 사진관 식구들과 여옥의 누이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유정촌에 간다. 결혼식이 벌어지는 날, 토벌대의 습격으로 여옥과 해연을 제외한 유정촌의 모든 사람들이 학살당한다. 여옥은 발을 잃었고, 해연은 '최도문' 덕분에 목숨을 구한다. 이 일로 그는 유격근거지에 남아 혁명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후 해연은 '지옥'을 겪는다. 

   민생단 사건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다. 이전에 학교에서 항일 독립운동사에 대해 가르칠 때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에 대한 독립운동사는 항상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도 지워버린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고 2때 출간되기 시작한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을 통해서였다. 

   이념이라는 것, 나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행동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결국에 남는 것은 광기에 기반한 감정이라는 사실은 차라리 외면하고픈 심정이다. 이성을 포기하고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 지옥같은 상황을 김연수는 때로는 흐릿하게, 때로는 모호하게 흩어놓았다. 누구도 동지의 머리에 총구를 겨냥한 그 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날 확실한 것은 시체들 뿐이었다. 시체들만이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증명할 수 있었다. 죽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밝힐 수 있었던 그 모호함. 그 혼란스러움. 이 모든 것이 단지 나라 없는 '난민민족'의 대가라면, 이 대가는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김연수는 마지막까지 결말에 대해 고심했다고 했다. '그'를 복수할지, 용서할지. 김연수의 선택은 (적어도 내게는) 큰 울림을 가져왔다. 모호안 안개 속 밤은 그날로 족하다. 하지만 대가 없는 독립은 가혹한 법이다. 그날 1941년엔 해연은 '그'를 용서했을지 몰라도, 우리 민족은 아직 서로를 용서하지 못했다. 밤은 아직도 '피의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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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에서 지구를 구하라 - SOS 과학 구조대 어린이 시사 사회.과학 만화 1
이현정 지음, 이대종 그림 / 글뿌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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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학습만화를 읽어 본 것은 초등학교 시절 육영사 학습판 과학학습만화 시리즈와 만화세계위인전집 시리즈뿐이다. (이중 만화세계위인전집 시리즈가 상당히 골때렸는데, 『유관순』편에서 친일파 앞잡이가 일본 형사를 속이고 3.1운동을 지지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 놈 속마음을 대사로 표현했는데 이랬다. "내 비록 친일파로 살아가지만, 한순간도 조국을 잊은 적 없다. 나 역시 조선인이다!" 그때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엄청 실소했던 기억이 있다. 진실은 누구에게도 숨길 수 없는 법이다.) 그당시 이 만화들을 거의 외울정도로 반복해서 읽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 때 무의식적으로 학습했던 사항들이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것을 보면 학습만화의 효과는 생각외로 큰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서 한동안 학습만화는 읽지 못했다. 아마도 이원복 교수의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학습'만화라기 보다는 '이상'을 설파하는 교조적인 만화라서 별로 감흥이 없었던 탓도 있겠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학습만화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부터 흐름은 있어왔겠지만, 『마법 천자문』시리즈와 『Why』시리즈가 학습만화와는 상관없는 독자층에게도 친숙할 정도이니, 그 흐름이 범람을 했다고 생각한다. 

   말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이번에 글뿌리에서 나온 어린이 시사과학만화『SOS 과학 구조대 1: 지구 온난화에서 지구를 구하라』에 대한 서평을 쓰기 위해 이정도 '고백'은 필요하다. 어린이 관련 도서, 특히 학습 만화에 대한 서평은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40자 평으로 대신할까 싶었지만, 책을 공짜로 받은 마당에 달랑 40자 내외로 서평을 쓰는 것은 비양심적인 것 같다.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서기 2000년 우주의 마법 종족 수무다 일행이 지구를 차지하기 위해 공격해왔다. 지구인들의 반격으로 수무다는 지구 침략 계획을 잠시 멈춘다. 그리고 지구인들은 SOS(Super heros Of Science)팀을 만들어 스무다의 재침입에 대비한다. 그런와중 미래의 지구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고 UN은 SOS 과학 구조대를 2050년으로 급파한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밀림의 녹지가 사라진 지구. 이렇게 된 이유는 지구 온난화 때문이고, 지구를 차지하려하는 수무다 일행이 지구 온난화를 부추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SOS는 지구를 구할 수 있을까? 

   책은 지구 온난화로 발생되는 수많은 자연현상을 들면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군데 군데 억지스런 설정이 있지만, 책이 전하려는 주제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고 그저 귀여운 수준이다. 그리고 장(章)별로 지구 온난화에 관한 심화학습과 온난화를 예방할 다양한 실천 Activity들이 들어 있다. 지구를 덥게 만드는 것은 우주 악당 수무다가 아니라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다. (수무다는 그저 그런 지구인들을 부추길 뿐이다.) 우리에게 원인이 있으니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 이 책은 (지금 책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작은 실천'으로 막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힘이 있다. 

   글뿌리에서는 매달 1권씩 총 20권을 낼 계획이 있다고 한다. 1권을 읽어보니 학습내용은 물론이고 재미 또한 쏠쏠하다. SOS 과학 구조대의 또 다른 활약을 기대해본다. 

  

 

* 덧붙임 

그런데 왜 수무다는 지구를 차지한다고 하면서 지구를 파괴할까요? 하긴, 이 문제는 수무다뿐 아니라 지구를 차지하려는 모든 침략 대상에게 질문해야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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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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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 작가의 『빛의 제국』이라는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에서 차용했다. 이것은 뭐 굉장한 비밀이 아니다. 책 표지에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실려 있으니까. 그리고 소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 윗부분은 환한 낮인데 아래 부분은 어두운 밤이다. 그가 그린 세계는 밤과 낮이 공존하는 기이한 세계다. 하지만 언뜻보면 그 차이를 구별하기 힘들정도로 잘 어울려 있다. 김영하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준다. 『빛의 제국』은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기이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형식적인 면에서 『빛의 제국』은 굉장히 발랄하다. 목차를 훓어보면 작가가 어떤 형식을 취했는지 감이 딱 온다. 오전 7시에 시작해서 그다음날 오전 7시에 끝난다는 설정은 리얼타임 드라마를 표방하는 『24』에서 차용했(을 것 같)다. 얼핏 지루할 수 있을법한 내용을 한시간대로 끊어 놓아 독자들의 긴장을 쉽게 풀 수 없게 만들었다. (실제로 24장으로 나뉘지는 않았다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오전7시 사이는 오전 3시와 5시로만 나뉘었다. 특정 시간대가 비는 것에 실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형식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은 작가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소설이지 드라마가 아니니까.) 그리고 커다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각 등장인물들의 과거사가 나와서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방식은 역시『Lost』에서 차용한 게 아닌가 싶다.(물론 이런 플래시백은 예전부터 소설에 있어왔지만, 『24』때문인지 자꾸 각 장별로 이야기를 끊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Lost』를 언급해봤다.) 김영하는 정말 그의 말대로 모든 매체와 겨루는 소설을 쓴 것이다. 

   소설은 팔리지 않는 영화를 수입하는 '남파간첩' 기영, 그의 아내 마리, 그들의 딸 현미 그리고 기영을 쫓는 박철수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기영은 남파간첩이었으나 북에서 그의 존재를 잊어버려 근 10여년간 아무 일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21년간 북에서 지내왔고 21년간 남에서 살아온 기영은 당의 명령을 따라야할지 자수를 해야할지 고민한다. 그를 감시하고 있던 박철수는 기영과 그의 아내 마리를 감시한다. 마리는 젊은 애인 성욱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성욱의 친구인 '판다'와 셋이서 모텔에 들어가 난교를 벌인다. 딸 혜미는 평소 맘에 들어했던 친구 진국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진국의 집에 간다. 폭풍같은 하루가 마무리되는 밤, 기영과 마리는 서로 그들만의 비밀을 폭로하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헤어진다. 그리고... 

   소설의 큰 축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남파간첩인 김기영이지만, 작가는 마리, 현미, 박철수에게도 거의 동일하게 이야기를 배분했다. 북의 체제에 생애 절반을 살아왔고, 남의 체제에 생애 절반을 살아온 기영. 그는 그의 비밀을 숨기고 살아왔다. 열심히 살아가고 배가 나온 중년이자 평범한 아버지. 하지만 그 자신은 분열증적인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것은 기영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내 마리 역시 분열증적인 삶을 살아왔다. 정숙한 엄마이자 커리어 우먼인 그녀는 불륜인 그녀의 애인 상욱과 그의 친구와 함께 난교를 벌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지금껏 결정한 선택들이 지금 자신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 기영의 고백으로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얻는다.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이 오늘 겪은 일을 얘기하고 남편을 버린다. 그것 또한 그녀의 선택이고 그 선택이 내일의 그녀를 만들어 갈 것이다. 

   현미 역시 자신이 은근 좋아하는 진국의 집에 가기 위해 그녀의 단짝 친구 아영을 이용하고 거짓말을 한다. 현미는 그런 짓이 딱히 죄는 아니지만, 왠지 모를 꺼림찍함을 느낀다. 상대방을 상처주지 않지만, 남모르는 비밀을 숨기고 사는 것. 그리고 그 비밀이 까발려졌을 때, 내심 모른척하며 서둘러 봉합한 채 살아가는 것. 그게 어른들의 세계다. 현미의 부모인 기영과 마리가 살아가는 세계다. 그리고 현미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다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돌아가서. 낮과 밤이 공존하는 기이한 세계. 위 하늘은 자연광이 비치지만, 아래 집에는 인공빛으로 밝히고 있다. 밤을 낮으로 만들려는 인간들의 노력은 얼마나 가상한가. 하지만 그 만들어진 빛은 자연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가. 인공의 빛으로 어둠을 밝힐 수 있을까. 왜 하늘의 빛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까지는 들어오지 못하는 걸까. 인간은 온전한 빛으로 살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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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과 세상 - 김훈의 詩이야기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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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책을 펼치면 에피그마 같은 이 문구에 멈춰버리고 만다. 이 단한마디의 '촌철'로 김훈은 독자들을 '살인'한다. 이 한마디 말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고 난감하다. 긍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딱히 반론을 내세우기도 힘들다. 김훈의 저 말은 중년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지만, 중년을 향해가는 이 챗바퀴같은 일상을 경험하는 사람들 또한 아마도 중년의 삶은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내 곧 수긍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김훈은 경험하지 않고서는 '감히' 말 할 수 없지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 뜻을 이해하고 수긍하는 '글'을 쓴다.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은 김훈의 글이 처음으로 '묶인' 책이다. 본인 스스로도 인정하듯 기자 시절 '밥을 벌기 위해' 쓴 글이다. 본인 스스로 자부하는 글도 있지만, 기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본인 말에 의하면 '이 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짜내듯 쓴 글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 책은 개정판인데 원책에 있던 '시'에 관한 글만 모아서 다시 엮은 책이라 한다. 물론 지금은 아쉽게도 절판되어 있다. 출판사에서 다시 찍어낼지, 그대로 절판할지는 모르겠으나, '김훈'이라는 네임밸류를 쉽게 포기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대개가 신문 '기사'로 쓰여졌기 때문에,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 여행』과 같이 하나의 대상을 끝까지 파고드는 '사유의 집요함'은 없다. 대신 '친절하게' 그가 읽은 시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는다. 글의 리듬도 느릿하지 않고 적당하게 흘러간다. 다른 책들에 비해선 좀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시를 읽을 때 지역과 대상을 구분하고 그에 맞는 시를 소개하는 것은 참신했다. 해당 지역을 취재하고 그곳을 노래한 시를 소개하는 방식은 후에 그가 기행산문집을 써내려간 방식과 흡사하다. 무등산을 바라보며 광주와 무등산을 노래한 시를 소개하고, 그 시에서 역사와 고통을 이야기 하는 모습은 문학과 인간, 삶과 역사를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로도 보인다. 전에 리뷰에서 『풍경과 상처』야 말로 김훈 글쓰기의 시원(始原)이라 했었는데, 그 말을 취소해야겠다. 이 책이야말로 김훈 글쓰기의 시원이다. 

   이전까지 '시'라는 것에 관심이 없던 사람을 시집을 펼치게 할 정도로 독서의 적극성을 실천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김훈의 이 책은 엄청난 가치가 있다. 하루빨리 이 책의 개정판, 아니 완전판이 나오길 기대한다. 

 

 

*덧붙임 

개정판은 원래의 책에서 '시'에 관한 부분만 추려냈다고 합니다. 옆동네 책읽는 낭만푸우님의 블로그에 보니 초판에는 시뿐 아니라 소설에 관한 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 본인은 숨기고 버리고 싶은 글일지도 모르겠으나, 독자는 그가 메모장에 써갈긴 글자 하나라도 읽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완전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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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30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맛있는 불량식품. 그 끊을 수 없는 유혹
창천항로 무삭제 완역판 1
이학인 글, 왕흔태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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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만큼 수많은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수많은 작가들이 각색한 작품은 없다고 본다. 독자들이 『삼국지』를 읽는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작가들이 『삼국지』를 각색하는 이유는 아마도 단 한가지인 듯 싶다. 

   흔히 말하기를 『삼국지』는 세푼의 허구와 일곱푼의 진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저 '세푼의 허구'가 작가들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 것 아니었을까. 20세기 말에 삼국지 붐을 일으킨 『이문열 삼국지』를 잠깐 살펴보자.  

 

   
 

   이로써 공명의 남만정벌은 끝났다. 하지만 정사(正史)에 비추어 보면 가장 허황되고, 연의(演義)를 지은 이의 작가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데 가장 빛나는 부분이 이 남만정벌이 아닌가 한다. 

   진수(陳壽)의 정사는 <장무 3년 봄 제갈령은 무리를 이끌고 남쪽을 정벌해 가을해 그 땅을 평정하다(章武三年春 亮率衆南征 基秋悉平)>란 한 귀절뿐이고 주에서도 서너 줄로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민간의 설화도 참고는 되었겠지만, 맹획을 상대로 제갈량이 펼친 그 현란한 계책들과 갖가지 준비, 그리고 맹획을 도우러 나온 설화적 남만왕들은 거의가 연의를 지은 이의 상상력에서 나온 셈이다. 지나치게 공명을 추켜세우다가 공명을 한 술사(術士)나 이인(異人)처럼 보이게 해 오히려 현실감이 없도록 만들었다는 비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재능이다. 삼국지연의를 기서(奇書)라 일컫는 것도 실로 그런 지은이의 재능을 높여 한 말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이문열 삼국지』 9권 「孟獲은 드디어 꺽이고 孔明은 成都로」중에서 - 

 
   

 

   저 한 구절로 서술한 역사에서 나관중은 엄청난 소설적 역량을 펼쳐놓았고, 후대의 작가들은 이런 '넘사벽'을 보며 질투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문열은 그런 나관중에 버금갈만한 자신만의 삼국지를 쓴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문열 역시, 정사를 추축으로 『삼국지』에는 서술되지 않은 각 주요 인물들의 어린시절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신만의 삼국지를 착실히 건실했다.  

   소설에선 좀 특이한 경우지만, 다른 매체, 특히 만화에서는 이런 재구성/재해석이 빈번해졌다. 특히나 7~80년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고우영 삼국지』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고우영은 정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삼국지』에서 단 한구절로 처리한 서술을 굉장히 흥미롭게 확장시키곤 했다.  

 

   
 

   평소에 이각은 해괴하고 요사스런 술법을 좋아했는데, 진중에 항상 무녀를 불러들여 북을 울리며 내림굿을 한다고 야단법석을 피우곤 했다. 모사 가후가 여러 차례 중지할 것을 간했으나 이각은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다.  

- 『황석영 삼국지』 2권 「이각과 곽사의 난」중에서 -    

 

  

-『고우영 삼국지』 2권에서 -

『삼국지』에서 단 한구절로 처리한 사건을 고우영은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서 약 10여회의 사건으로 구성한다. 그 안에 생생한 '무녀-엑소시스트'의 캐릭터를 집어넣고, 독자들이 성인만화에서 기대할만한 장면들을 넣었다.

 
   

 

   『창천항로』이야기를 하려다 너무 길게 돌았다. 『창천항로』는 『삼국지』이나 『삼국지』가 아니다. 이 만화에서 정본으로 쓴 것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이다. 이 만화의 스토리 작가 이학인(李學仁)은 정사의 행간 사이를 무한정 확장해서 자신만의 새로운 『삼국지』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정사를 바탕으로 썼는데도 그 '구라'의 정도가 『삼국지』를 뺨 칠 정도로 넓고 방대하다. 

   『창천항로』는 조조의 일대기이다. 조조는 어떤 인물인가? 삼국시대를 통틀어, 정치, 무예, 문예, 예술, 건축 등 거의 전방면에 두각을 나타낸,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이 배출된 인물들 중에 가장 파격적인 인물이다. 이런 거의 절대자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인물의 일대기라니, 좀 김이 빠지는 느낌도 들지만, 역사의 행간을 통해서 조조라는 인물이 어떻게 한(漢)을 바라보고, 극복하고, 자신만의 국가를 세우는지에 대한 재미는 꽤나 솔찬하다. 특히나 1권과 2권에 걸친 조조의 첫사랑 이야기는 정사에 기록된 단 한줄의 기록으로 펼쳐놓은 '구라'의 결정체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어느날 조조가 중상시 장양의 침실에 침입해 마구 검을 휘둘렀으나 그 무예가 '절인'의 경지에 이르러 어떠한 사람도 그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창천항로』 2권 14장 「장양의 상처」중에서 - 

 
   

 

   이학인은 이 한 줄의 역사를 가지고, 조조의 첫사랑 '수정'을 탄생시키고, 조조가 어린 시절 거리에서 맴돈 왈패들을 엮는다. 수정은 '서쪽 오랑캐' 처녀로 그녀는 서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삼국지에서 알렉산더, 클레오파트라, 연기의 마인(魔人)- 아라비안 나이트까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아찔한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리고 십상시 장양은 '성도착자'로 나온다. 조조가 장양의 침실에서 칼을 휘두른 것은 자신의 첫사랑 수정이 장양에게 팔려가자 그녀를 되찾기 위한 것이다. 단 한줄의 기록에서 믿지못할 이야기가 뽑아져 나왔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참 구슬프다.

   물론 『창천항로』의 공은 스토리를 구성한 이학인에게 있지만, 작화를 맡은 왕흔태(KING☆GONTA)의 공을 뺄 수 없다. 왕흔태는 이 감당할 수 없는 '구라'에 실체를 입혀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감당할 수 없는 구라를 더욱 규모가 크게 그림으로 묘사해 독자들이 아예 그 세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만일 이학인의 글이 '소설'로 나왔다면, '펄프픽션'류의 소설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왕흔태의 그림이다. 

   『삼국지』보다 더 삼국지스러운 『창천항로』는 조조의 성장담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매우 흥미진진하다. 정본을 읽은 사람들은 더 많이 즐길 수 있을 것이고, 『삼국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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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트 2009-12-22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천항로, 어릴때 재밌게 읽었습니다! 무자비한 영웅주의가 좀 거시기하긴 했지만... <창천항로>의 세계관은 만화 <묵공>(영화로도 나왔지요...)과 대비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미리 성탄인사 드립니다. 서재 문패로 걸어놓은 Tomek님 질문에 기상청은 일단 yes라네요^^

Tomek 2009-12-23 09:15   좋아요 0 | URL
이거 읽은지 벌써 10년이 되가네요. 그때는 성인만화면서 삭제판으로 나오더니, 몇 년전에 무삭제판으로 다시 나오더군요. 그김에 다시 사긴했는데, 중고장터에 구판을 올렸는데 팔리지는 않고... 자리만 차지하는것 같아 고민입니다.

성탄인사 고맙습니다. ^.^

아포지 2009-12-25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루시드 폴은 저도 예전에 참 좋아했는데, 최근 음반들은 들어 보지 못했네요. 아 그나저나 창천항로는... 조조팬으로서 매우 호쾌했던 만화입니다. 촉한정통주의 때문에 유비파가 전적인 지지를 흔히 가져가는 데다가, 조조는 간웅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고우영 만화만 봐도 좀 너무 안좋게 그려지지 않았던 거 합니다. 하지만 정말 르네상스보다 앞선 르네상스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Tomek 2009-12-28 14:22   좋아요 0 | URL
파격적인 인물이었죠. 서양사에서 비교인물을 꼽아보자면 람세스급? ㅋㅋ 만화에선 너무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놓아서 그런지 긴장감은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좀 아쉬운 점이죠.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