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옛날 한나라 때의 일이다.
어느 연못에 예쁜 잉어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디서 들어 왔는지 그 연못에 큰 메기 한 마리가 침입하였고 그 메기는 잉어를 보자마자 잡아 먹으려고 했다.
잉어는 연못의 이곳 저곳으로 메기를 피해 헤엄을 쳤으나 역부족이었고 도망갈 곳이 없어진 잉어는 초어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잉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뭍에 오르게 되고, 지느러미를 다리 삼아 냅다 뛰기 시작했다.
메기가 못 쫓아 오는걸 알게 될 때까지 잉어가 뛰어간 거리는 약 구 리 정도...였을까...아무튼 십 리가 좀 안 되는 거리였다.
그때 잉어가 뛰는 걸 보기 시작한 한 농부가 잉어의 뒤를 따랐고 잉어가 멈추었을 때, 그 농부는 이렇게 외쳤다.
`어주구리(漁走九里)`.

그리고는 힘들어 지친 그 잉어를 잡아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는 얘기이다.
(1) 어주구리(漁走九里)....능력도 안 되는 이가 센척하거나 능력 밖의 일을 하려고 할 때...주위의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2) 이 고사 성어는 말 할 때 약간 비꼬는 듯한 말투로 약간 높여 말하면 아주 효과적이다.

 

 


2. 중국 원나라 때의 일이다.
어떤 마을에 한 어부가 살았는데 그는 너무나도 착하고 어질어서 정말 법 없이도 살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항상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에 새로운 원님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아주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원님은 부임한 뒤 그 마을에 한 착한 어부가 덕망이 높고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저 어부를 제거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원님은 묘안을 하나 짜내게 되었다. 그 어부의 집 앞에 몰래 귀한 물건을 가져다 놓고 그 어부가 그 물건을 가져 가면 누명을 씌워 그 어부를 죽일 계획을 세운 것이다.
첫 번째로 그는 그 어부의 집 앞에 쌀 한 가마니를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그 어부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 쌀 가마니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님은 두 번째로 최고급 비단을 어부의 집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원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커다란 금송아지 한 마리를 집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어부에게는 금송아지 마저 소용이 없었다.
어부가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어부의 행동에 화가 난 원님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탄식을 했다.
`선어부비취`(善漁夫非取)...착한 어부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구나.
그 뒤로 어부에게 감명 받은 원님은 그 어부를 자신의 옆에 등용해 덕으로써 마을을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1) 선어부비취(善漁夫非取)....자신이 뜻한 대로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화가 난 어조로 강하게 발음한다.
(2)이 고사 성어는 그 때 당시 중국 전역에 퍼졌고, 급기야는 실크로드를 타고 서역으로 까지 전해졌으며...오늘날에는 미국,영국 등지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고 한다.

 


3. 고대 중국의 당나라 때 일이다.
한 나그네가 어느 더운 여름 날 길을 가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한 농부가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자꾸만 가혹한 채찍질을 가하는 광경을 본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나그네는 말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농부에게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왜 자꾸만 채찍질을 가하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자고로 말이란 가혹하게 부려야 다른 생각을 먹지 않고 일을 열심히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남의 말을 놓고 가타부타 언급할 수가 없어 이내 자리를 뜬 나그네는 열심히 일하는 말이 불쌍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긴 탄식과 함께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한다.
" 아! 施罰勞馬 (시벌로마) "
훗날 이 말은 후세 사람들에게 이어져 주마가편(走馬加鞭)과 뉘앙스는 약간 다르지만 상당히 유사한 의미로 쓰였다 한다.

* 施罰勞馬 (시벌로마) : 열심히 일하는 부하 직원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직장 상사에게 흔히 하는 말.
* 용법 : 아랫사람이 노는 꼴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일부 몰상식한 상사의 뒤에 서서 들릴락말락 하게 읊어 주면 효과적일 것이다.

 

 


4.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조씨에게는 만삭인 부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부인이 말하길,
"여보! 어제 밤 꿈에 말 한 마리가 온천으로 들어가 목욕을 하는 꿈을 꾸지 않았겠어요. 아마도 우리가 말처럼 활달하고 기운 센 아들을 얻! 게 될 태몽인 것 같아요." 라고 하였다.
조 씨는 심히 기뻐하여 "그것 참 좋은 태몽이구려. 어서 빨리 우리 아들을 보았으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사흘 뒤 조씨 부인은 매우 건강한 사내아이를 순산하였고, 조 씨는 태몽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溫馬(온마)"라 하였다.
세월이 흘러 조 온마가 스무 살이 되었다.
조 온마는 조씨 부부의 기대와는 다르게, 마을의 처녀란 처녀는 죄다 욕보이는 난봉꾼이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은 결국 조 온마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조 온마는 판관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판관이 말하길,
"조 온마는 색기로 인하여 마을을 어지럽혔다(趙溫馬亂色期;조온마난색기). 따라서 거세를 당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결국 조 온마는 거세를 당하였고, 후일 사람들은 경거망동하는 사람에게 조 온마의 일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조온마난색기"라고 충고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조온마난색기(趙溫馬亂色期):경거망동한 사람에게 충고할 때 쓰는 말.
이 고사 성어는 "분수에 지나친 행동을 경계하라"는 깊은 교훈을 담고 있다.

 

 


5. 아주 먼 옛날 중국 진나라 시대 일이다.
어느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의 성씨는 신체의 일부를 따르는 전통이 있었다.
대대로 귀가 큰 집안은 이씨, 화술에 능통한 사람을 많이 배출한 집안은 구씨 하는 식이였다. 그곳에 수(手)씨 집안이 있었는데, 그 집안은 대대로 손재주가 뛰어난 집안이었다.
이 "수"씨 집안에는 매우 뛰어난 말 한 필이 있었는데, 이 역시 수씨 집안의 손재주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었다.
어느날 도적들과의 전쟁에 수씨 집안의 큰아들이 이 말을 타고나가 큰 공을 세워 진시황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이것을 본 앞집의 족(足)씨 집안에서는 "손재주나 우리 집안의 달리기를 잘하는 발재주나 비슷하니 우리도 말을 한 필 길러봄이 어떨까...." 하여 말 한 필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한 달 후, 도적들이 보복을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이를 본 족씨는 아들에게
"어서 빨리 수씨 집안보다 먼저 우리 말을 타고 나가거라." 일렀고, 족씨 집안의 장자는 말을 타고 나가다 대문의 윗부분에 머리를 부딪혀 어이없게도 죽고 말았다.
이를 본 족씨는 통곡하며
"내가 진작 분수에 맞는 행동을 했더라면 오늘의 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을..."
하며 큰 아들의 주검을 붇잡고 통곡하였다.
이때부터 세인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足家之馬(족가지마)"라고 말하곤 한다.

* 足家之馬(족가지마): 자기의 주제도 모르고 남의 일에 참견하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
파생어-
* 足家苦人內(족가고인내): 옛날 족씨 가문의 큰아들이 집안에서 죽음으로 인해서 비롯된 말. (족씨 가문이 집안의 사람으로 인해 괴로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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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1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근데 이거 수업시간에 애들 갤카줘도 되는거여?
 

유교 (儒敎)

요약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설명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인 BC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또한 한자문화권인 한국·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전해져서 큰 영향을 주었다. 유학(儒學)과 유교는 서로 비슷한 말이지만,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학파를 의미하는 유가(儒家)나 학문을 의미하는 유학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교라는 말은 외래의 불교에 대비시켜 300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듯하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주로 유(儒)·불(佛)·도(道) 3교를 병칭할 경우에 사용되었다. 유가·유학에 대해서 유교라는 말은 교화적(敎化的)인 면을 중시하여 어느 정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본래가 사대부(통치자 계급·지식인)의 학(學)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가·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특색
유교는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수기(修己)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윤리의 학이다. 그러나 그 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치인(治人)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의 학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는 법률이나 형벌로 백성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리와 언행을 통해 백성을 선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먼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이 필수가 된 것이다.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는데, 군자는 치자(治者)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 반대는 <소인(小人)>인데, 피치자(被治者)인 소인에게는 스스로 수양하는 능력이 없고, 치자(군자)의 교화를 받아야 비로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지덕을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제왕(帝王)으로서 천하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어 성인이 곧 왕자(王者)라고 하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왕(聖王)>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최고의 성인인 제왕(성왕)을 정점으로, 사대부는 각기 쌓아올린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제왕을 보익(輔翼)하고, 제왕이 도덕정치[德治(덕치)]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의 일체화를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윤리설(倫理說)
근본사상은 <인(仁)>이다. 인은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말하며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사랑에 가깝고 그 실천에는 특히 <충서(忠恕;진심과 배려)>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인은 먼저 부모·형제 등에서부터 점차 다른 사람에게로 미쳐야 하며 <효(孝)>를 다하는 것이 인의 첫째이고, 형제에 대한 <제(悌)>가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인은 이른바 인류애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인이 확대되어 서민대중에게 미치면 그것은 <인정(仁政)>이 되고, 다시 그 인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그 사람은 성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적인 심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이 치정의 원리도 되는 것이다. 인은 원래 사람의 마음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情)으로 흘러서 발로(發露)를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것을 억제하여 적절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의(義)>이다. <인의(仁義)>를 병칭하는 것은 맹자(孟子)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 유교의 덕목(德目)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예(禮)·지(智)를 추가해서 <사덕(四德)>이라 부르며 여기에 신(信)을 추가해서 <오상(五常)>이라고 한다. <예>는 원래 예의범절의 형식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규범·관습이다. 따라서 예의 형식을 배우는 것은 유가에게는 중요한 교과이지만, 내면적으로 예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실행하는 겸허한 심성을 기르는 일이 필요하다. <지>는 일반적으로 <덕>과 대조되는 개념이지만, 유교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지식으로 보지 않고 사물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덕목의 하나로 꼽는다. <신>은 <충신(忠信)>이라고 할 경우 진심을 뜻하는 <충(忠)>이 말로 표현된 것을 뜻하지만, 오상에서 말하는 신은 양자를 합하여 거짓이 없는 마음의 상태와 태도를 말한다. 한편, 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에 서약하는 측면도 있는데, 신과 비슷한 뜻인 <성(誠)>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길이며, 또한 천지간에 가득찬 정기(正氣)로서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원리가 되기도 한다. 유교에는 또한 <오륜(五倫)>이 있다. 오륜은 기본적인 대인관계를 5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변천
유교의 역사는 한나라 무제 때 국교화된 것을 중심으로 그 이전인 원시유교와 그 이후로 크게 나누어지고, 다시 국교화 이후의 유교는 한나라 무제 때부터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 송(宋)나라 초기에서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宋明性理學), 청나라 때(淸朝考證學)로 3분해서 고찰하는 것이 통례이다.

원시유교
춘추시대 말기의 난세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밖으로는 예를 실행하여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안으로는 인으로써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적·미신적인 하늘의 중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폈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공명한 인사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유교교단(儒敎敎團)이 발생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문인(門人)들은 각지로 분산되어 교세를 넓혀 나갔는데, 이에 자극을 받아 묵가(墨家)·도가(道家) 등의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유가는 가장 유력한 학파로서 백가에 대항하면서, 또는 그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동안에 나타난 사람이 맹자와 순자(荀子)이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통하여 공자의 윤리설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여 공자가 말하는 덕치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순자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는 선(善)해질 수 없다고 하여 예(사회적 규범)를 통한 검속(檢束)을 중시했고, 아울러 객관적인 교학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서경(書經)》 《시경(詩經)》을 비롯한 오경(五經)은 순자를 전후한 무렵에 모두 갖추어졌는데, 경서의 학습을 필수로 교학의 지침으로 삼은 것은 순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당훈고학(전통적 유교)
유교의 국교화는 BC 136년 오경박사제도(五經博士制度)가 설치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이미 오경의 학습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 유교는 늘 선왕(先王)의 도(道)를 찬양하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왕(武王)을 성왕으로 앙모하고, 공자의 가르침의 연원(淵源)은 이들 성왕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오경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선왕의 도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보다도 오경을 더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유교는 난해한 오경을 앞세우고 훈고학[註釋學(주석학)], 즉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경학(經學)>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국교화한 당초 전한에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입각하여 경문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 한왕조의 출현을 정당화한, 정치색이 짙은 경학이다. 후한에 들어서자 이것과 병행하여 문자가 가진 의미에 유의하는 <고문경학(古文經學)>이 생겨서 훈고학으로서의 경학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전한·후한 400년간은 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경학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들어서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외래의 불교가 성행하자 유교는 쇠퇴하였고, 경전의 주석에도 노장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당나라에 들어서자 남북조로 양분되어 있던 경학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대비하여 경의(經義)를 국가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경정의》의 출현으로 경학이 고정되어 유교가 활력을 잃었으며 이록(利祿)을 위한 학으로 전락해갔다.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철학이었다.

송명성리학(신유교)
송나라 때에 들어서면서 유교의 현상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혁신적인 기운이 움텄다. 북송에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朱熹;朱子)에 의하여 완성된 송학(宋學;朱子學)이 그것인데, 오경을 대신하여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은 <이(理)>이다. 이는 순수지선(純粹至善)이고, 사람은 본성으로서 그 이를 가지지만(性卽理), 동시에 육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인 기(氣)를 섞게 된다. 사람은 기에 의해서 가지게 되는 자기의 욕망(欲望;人慾)을 억제하고 본성(本性;天理)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방법으로는 거경(居敬;마음을 純粹專一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과 궁리(窮理;사물에 대하여 理를 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讀書問學)의 양면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처음에 이단시되었으나 뒤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어 융성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전통적 유교를 대신하여 국교가 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명나라에 이르자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심학(心學)이 관학화(官學化)하여 주자학보다 활기를 띠었다. 심즉리(心卽理)를 밝혀 이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마음이 이(理)라고 하는 철저한 유심주의론(唯心主義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말류(末流)에는 극단으로 치달아서 독서를 멀리하고 경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청조고증학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는 양명학의 말류를 비판하고 송·명 나라의 신유교를 공소(空疎)하다 하여 배척하고 훈고학으로 복귀하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송학(宋學)은 여전히 관학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학술의 주류는 한학(漢學)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한 때의 고문경학을 기초로 해서 문자학(文字學)·음운학(音韻學)·역사학·지리학 등 여러 학문을 구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통하여 진리를 구하는 것)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학의 관심은 점차 전한 때의 금문경학으로 옮겨갔다. 정치색이 강했던 금문경학은 청나라 말기의 동란기를 맞아 여러 종류의 개혁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캉유웨이[康有爲(강유위)] 등에 의해 제창된 공양학(公羊學)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중국과 유교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출현함으로써 성왕[天子(천자)]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의 정치학은 존재의의를 상실하였고, 그 윤리설 또한 자유평등을 부르짖는 시대사조 앞에서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자측에서는 여전히 유교를 온존(溫存)시키려는 동향이 있었고, 또한 효윤리(孝倫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도덕은 민중들 사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유교비판 풍조는 한층 강해졌다. 특히 문화혁명 이후 전개된 1974년의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가장 격렬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이 이러한 정치운동에 이용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공운동이 지나간 뒤 산둥성[山東省(산동성인민위원회)] 취푸[曲阜(곡부)]에 있는 공자묘(孔子廟)가 수복(修複)되었고 일부에서는 유교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선에서 머무르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서 얼마만큼이라도 현대적 의의를 찾으려 하는가 하는 것은 이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
한국에 유교사상이 전래된 시기는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BC 3세기 무렵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부터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되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체로 고래(古來)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점차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가치관·생활양식·법률제도 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가장 먼저 중국문화와 접촉하여 수용, 발전시켰으며, 백제가 해상을 통해 중국과 교류함으로써 유교 및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래되어 건국 초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었으며, 노장의 자연사상도 역시 혼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었고 후기에는 종교로서의 도교를 수입함으로써 유·불·도교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세워 상류계급의 자제를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교과내용은 오경과 삼사(三史), 《문선(文選)》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국가체제와 문물의 정비, 유학의 정치원리에 입각한 통치, 유교경전 학습을 통한 인재의 배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건국 초부터 역사 기록을 중시하여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을 편찬하였으며, 경전을 통해 왕도정치(王道政治)·덕치주의(德治主義)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이 밖에 예제(禮制)나 생활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숭배에 더욱 집착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예법에 따라 국사(國事)와 종묘를 새로이 세우고 중시하게 되었다. 백제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질서를 수립하고 중국문화 수용도 고구려보다 빨랐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경학·의학 등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앞장서서 일본문화의 개창자적 역할을 하였다. 유교의 법식은 백제인의 의례와 윤리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제사나 묘제 등에도 유교적인 의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신관(神觀)·사생관·윤리의식이 점차 유교화되었다. 한편, 일찍부터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신찬(百濟新撰)》 《서기(書記)》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였으며, 4세기 후반부터는 유학이 본격적으로 성행하여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들 수 있는데, 근초고왕 때 아직기는 일본에 유학을 전하고 일본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의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하고 그곳에서 왕실의 스승이 되었다. 이 밖에 무령왕 때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도 일본에 유학을 전하는 등, 백제는 일본에 학술과 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고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유교의 전래가 가장 늦었다. 그러나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유효 적절하게 토착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지증왕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교의 뜻에 따라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뜻을 취해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상복법을 제정·공포하고 율령의 반포, 공복을 제정하는 일 등은 모두 넓은 뜻에서 유교사상이 국가현실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교사상과 화랑도(花郞道)와의 관계도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화랑도는 본디 사람들을 모아 선비를 선발할 목적 아래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교육하였으니, 이는 치국의 대요(大要)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인용하여 <현좌충신(賢佐忠臣)과 양장용졸(良將勇卒)이 화랑도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임신서기석(壬申書記石)에 화랑들이 《시경》 《상서》 《예기》 등을 배울 것을 하늘에 맹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도 화랑도와 유교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문무왕의 뒤를 이어 위민(爲民)·보민(保民)·안민(安民)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의 유학은 당나라로부터 문화를 도입하여 교육사상을 확립함과 동시에 유학자라고 할 만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 특색이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는데, 그 편제나 교과 내용이 모두 유학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이는 골품제에 대한 비판·견제로 이루어진 개혁으로서, 과거제의 선구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

고려시대
고려 초기에는 태조 왕건(王建)이 불교를 숭상한 영향을 받아 유교적 정치사상과 이념의 현실적용이란 특성 아래 유교적인 교양이 지식인 사이에 일반화된 상태였지만 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치중하였기 때문에 유학사상이 아직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태조 때는 학교를 창설하여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광종 때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관료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정치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여기에는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신(儒臣)의 활약이 컸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사장(詞章)에 치중하던 초기 단계와는 달리 점차 통경명사(通經明史)에 힘써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심화되었다. 또 정치에 실제적인 적용이 증대한 것 이외에도 한당유학(漢唐儒學)의 내용이 다른 학문이나 사회적인 측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문종 때 유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리던 최충(崔沖)은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고 구경(九經)과 삼사로써 후진을 가르쳤는데, 뒷날 이를 본받아 유신들이 다투어 사학을 열어 십이공도(十二公徒)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예종·인종 때 발달한 강경제도(講經制度)는 군주에게는 유학적 교양 배양과 통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문신들에게는 부화(浮華) 방지와 국가경륜 연마 및 군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예종은 문무칠재(文武七齋)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는 등 국자감 부흥에 힘써 유학 기풍이 날로 높아졌다. 이와 함께 고려 초기 수사사업(修史事業)의 흐름 속에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사실 기록을 넘어서는 유학적 역사의식과 역사서술 체계를 갖춘 역사서로 평가된다. 한편 관학이 부흥하고 강경제도가 발달한 반면 예종 때부터 문사(文士) 우대 경향이 극심해져 문벌귀족의 전횡이 노골화되었다. 그리하여 의종 때에는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무단정치를 함으로써 유학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침체된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반성적 기풍이 조성되었고, 중국의 송학, 즉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이 도입되었다. 안향이 원나라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들여옴으로써 전래된 주자학은 백이정·우탁(禹倬)·권부(權溥) 등 신진학자들의 수용단계를 지나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길재(吉再) 등에 이르러 학문적으로 심화, 정착되었다. 주자학자들은 송대 성리학 벽불론(闢佛論)과 도통론(道統論)에 근거,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가정책과 이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 초기 이래 경세론적 특성을 가졌던 유학은 철학적 논리와 체계를 갖춘 성리학 수용으로 학풍이 일변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조선의 유교입국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유교는 조선시대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유교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세종 때 유교문화가 꽃을 피운 이래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문물제도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엽부터 영남의 사림파(士林派)가 정계에 진출한 이래 훈구파와 대립하여 사대사화(四大士禍)가 일어났다. 특히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향촌자치제와 왕도정치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에게 몰려 몰락하였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로는 사림들이 정계 진출을 단념하고 향촌으로 내려가 학문에 주력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학문 경향도 사색과 이론 탐구에 치중하면서 발전하였는데, 서경덕(徐敬德)과 이언적(李彦迪)은 조선 성리학의 선구였다. 그 뒤를 이어 명종·선조 때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성리학은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가 대표적인 학자로, 그 학풍이 후세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이이와 성혼(成渾)간의 사단칠정이기론변(四端七情理氣論辨)을 거쳐 학문적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후 이황 계열의 영남학파에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 계열의 기호학파에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는 등 학파에 따라 학설이 양분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황·이이 등 여러 학자들이 성리학을 연찬한 뒤 유교철학은 고도로 발달하여 국내적으로 전성시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영향을 미친 바가 크다. 특히 이황의 학설은 야마사키 안사이[山崎闇齋(산기암재)]를 비롯한 일본 주자학파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는 국가체제와 사회질서 확립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예학이 성립되어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裂) 등이 17세기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이어 17세기 후반부터는 알맹이 없이 서로 헐뜯는 학설로 전락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론(禮論)의 대립을 지양하고 원시유교의 근본정신에 입각,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利用厚生)·실사구시 등을 부르짖는 실학사상이 대두하여 박제가(朴齋家)·정약용(丁若鏞) 등이 영·정조시대를 전후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해지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 뒤 서학(西學)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운동(守舊運動)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 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維新精神)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국권피탈 이후 일제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 유학자류(儒學者流)를 이용, 성균관을 경학원(經學院)으로 격하시켜 한국 유교의 맥을 단절시키고자 하였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부설하여 황도유교(皇道儒敎)를 선전하는 등 기형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전국 유림(儒林)의 총의로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고 1946년 전국 유림의 결합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함과 동시에 성균관대학교를 창설하여 유학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용어
개물성무 開物成務 인지(人智)를 계발하고 사업을 완성시킨다는 말. 만물과 인사(人事)의 공용(功用)을 이름을 말한다.
거경궁리 居敬窮理 정주학에서의 학문 수양의 두 가지 과제. 거경은 마음을 근신(謹愼)의 상태로 유지하고 기거동작(起居動作)을 성실하게 절제하는 것이며, 궁리는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격물치지 格物致知 《대학》 8조목에 나오는 학문과 수양의 방법론. 사물이나 현상 속에 내재한 이치를 탐구하여 나의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에서 함양(涵養)공부의 요체가되는 핵심문제.
계선성성 繼善成性 음양(陰陽)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실천결과를 나타낸 말. 《주역》 <계사(繫辭) 상>에서 <한 번 양하고 한 번 음하는 것이 도이니, 이를 계승하는 것이 선이고 이를 이루는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계왕개래 繼往開來 선왕의 도를 계승하고 그것을 후세에 전승하는 것. 주희(朱熹)가 공자를 가리켜 한 말이다.
괴력난신 怪力亂神 상도(常道)에서 벗어난 패역(悖逆)한 일과 인간이 이성(理性)으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나 현상들을 일컫는 말.
궁리진성 窮理盡性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다한다는 말. 사물·인사(人事)의 법칙에 대한 탐구와 그것이 인간에게 내재화한 것으로서의 본성을 발휘하는 것의 일관성을 나타낸다.
극기복례 克己復禮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라는 말.
내성외왕 內聖外王 유교에서 추구하는 인격수양의 이상적 상태. 안으로 자신을 수양하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고 밖으로 민중을 선도하여 천하에 태평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동 大同 모든 사람의 신분적 평등과 재화(財貨)의 공평한 분배, 그리고 인륜의 구현으로 특징되는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형태로 상정(想定)하는 사상.
대성지성 大成至聖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완정(完整)된 학문과 성스러운 인격을 기리는 말. <대성>이란 전인(前人)의 주장과 학설을 집대성하여 완정된 이론체계를 이룬 데 대한 칭송의 말이며, <지성>이란 넓은 학식, 고상한 인격, 비범한 지혜를 가진 사람에 대한 경칭이다.
대일통 大一統 중국의 고대사회에 있어 종법(宗法)의 근간이 된 것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의 제도적 통일을 주장하는 사상.
덕본재말 德本財末 정치의 근본이 경제적 충족보다 윤리적 교화에 있다고 하는 유교의 보편적 사고방식.
만물개비어아 萬物皆備於我 만물의 이치가 모두 인간의 마음[心] 속에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말.
명교 名敎 명분(名分)과 명예를 중시하는 가르침. 좁은 뜻으로는 예교(禮敎)와, 넓은 뜻으로는 유교와 같은 말이다.
명덕 明德 인간내면에 있는 본래의 밝은 덕.
무극이태극 無極而太極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거가 되는 근원적 실체의 무형성(無形性)과 실재성(實在性)을 함축한 말.
박문약례 博文約禮 널리 학식을 쌓고 그것을 예(禮)로써 집약하는 일. 학문연구와 도덕적 실천의 방법을 말한다.
반구저기 反求諸己 인식과 수양에 있어 내면적 반성을 강조하는 말.
변화기질 變化氣質 기질의 편탁(偏濁)을 교정하여 본연지성(本然之性)을 회복한다는 성리학의 수양법.
사단칠정 四端七情 인간의 착한 본성의 발로인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마음과, 인간 감정의 총칭으로서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7가지 감정을 이르는 말.
사대 事大 약소국이 강대국에 정치적·외교적으로 복속(服屬)함으로써 자국의 존립과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
사문 斯文 유교에서 자교(自敎)의 학문을 가리켜 이르는 말.
삼강 三綱 동양 고대사회의 기본적 인간관계인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관계를 도덕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유교의 전통적 질서의식.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을 이르는 말이다.
삼불후 三不朽 영원불멸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 3가지 일. 입덕(立德)·입공(立功)·입언(立言)을 말한다.
생생지도 生生之道 역(易)의 순환론적 우주관을 나타내는 말. 우주만물이 끊임없이 생성·순환(循環)하는 천도(天道)의 무궁한 변화상을 가리키는 말로,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처음 보인다.
선험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상정(想定)된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 성리학에서 주요 문제로 다루어진다.
성상근 습상원 性相近習相遠 인간의 선천성은 동일하나 후천적인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질 수 있다는 말.
솔성지위도 率性之謂道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라는 말. 유교에서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제이다.
시중 時中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알맞게 대처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
신독 愼獨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뜻으로, 개인의 내면적 충실을 강조한 덕목.
양지양능 良知良能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인식과 능력.
역자이교지 易子而敎之 자제(子弟)를 직접 가르치지 않고 남과 바꾸어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 방법론.
예약형정 禮藥刑政 유교정치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4가지 통치방법을 가리키는 말. 예는 예법, 악은 음악, 형은 형벌, 정은 정령(政令)을 각각 가리킨다.
오륜 五倫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5가지 관계, 즉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관계를 확정하기 위해 제시된 유교의 기본윤리.
오상 五常 사람이 항상 행해야 하는 5가지 덕목. 인(仁)·의(義)·예(禮)·지(智)·(信)을 가리킨다.
위기지학 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
위정척사 衛正斥邪 정학(正學;儒學)의 도통을 지키고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유교의 벽이단(闢異端) 사상.
모든 사물·현상에 내재한 법칙이나 원리, 혹은 그것들을 성립하는 법칙성.
이단 異端 유교에 있어서 주류를 차지하는 학파가 자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타교(他敎)를 부정하여 가리키는 말.
이용후생 利用厚生 편리한 기구 등을 잘 이용하며 삶에 부족함이 없게 한다는 말.
적연부동 감이수통 寂然不動感而遂通 역(易)은 아무런 작위도 없이 고요하다가 감응(感應)하게 되면 사물의 모든 원리에 통한다는 뜻. 역의 본체와 작용을 통일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존덕성 도문학 尊德性道問學 유교에서 제시하는 도덕수양의 두 가지 방법. 존덕성은 인간에게 부여된 선한 덕성을 수양을 통해 높이고 보존하는 방법이며, 도문학은 학문을 통해 덕성을 배양하는 방법이다.
중도 中道 극단을 배제하는 유교의 윤리사상을 나타내는 말. 중(中)에 처하여 도(道)를 얻는다는 뜻이다.
지행합일 知行合一 인식과 실천의 합일을 주장하는 왕수인(王守仁)의 학설.
진덕수업 進德修業 유덕한 군자가 자기의 덕을 날로 새롭게 진보·향상시키고 그것을 실제의 일에 응용하여 자기의 일을 훌륭하게 처리한다는 뜻.
천인합일 天人合一 하늘과 인간의 선천적 동일성과 그에 따른 인간의 실천적 당위성을 밝히는 유가사상의 핵심적인 이론.
추기급인 推己及人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理解)를 포함한 대타적(對他的) 관계의 전실천과정에 있어 자기의 도덕적 본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
춘추필법 春秋筆法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간결한 문장을 통해 엄격하게 포폄(褒貶)을 한 《춘추》의 독특한 필법을 이르는 말.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성실을 다하는 것.
충서 忠恕 자신의 정성을 다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
치중화 致中和 정(情)의 미발(未發)을 중, 발하여 중절(中節)된 상태를 화라 하여,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의 한 방법.
태극 太極 만유(萬有)의 본원(本源)으로서,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궁극적 실체.
하학상달 下學上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이고 비근한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높은 진리에까지 도달한다는 공자의 학문방법.
혈구지도 자로 물건을 재듯이 내마음을 자로 삼아 남의 마음을 재고, 내 처지를 생각해 남의 처지를 아는 방법.
호연지기 浩然之氣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게 가득찬, 넓고도 큰 원기(元氣). 전(轉)하여, 도의(道義)에 뿌리를 박고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를 이르기도 한다.

연표
BC 1500 은(殷) 은(殷)왕조 성립(~1120)
1120 주(周) 주(周)왕조 성립(~256). 이 무렵 기기가 조선으로 가 백성을 교화함
770 주(周) 주나라 동천(東遷), 춘추시대 시작됨(~226)
551 공자 공자 노(魯)나라에서 태어남(~479)
481 공자 공자, 《춘추》 완성함
479 공자 공자 죽음. 이즈음부터 유가사상이 일어남
372 맹자 맹자, 노나라에서 태어남(~289)
300 한반도 한반도에 한문자 전래
213 진시황제 시서 및 백가서 불태움
212 진시황제 유생을 생매장함
136 한(漢)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오경박사를 두고 유교를 국교로 정함
104 한(漢) 동중서 죽음
BC 91 한(漢) 사마천 《사기》 완성함
AD 29 후한 태학을 세움
83 후한 훈고학자 정중(鄭衆) 죽음
166 후한 훈고학자 마융(馬融) 죽음
200 후한 훈고학자 정현(鄭玄) 죽음(127~)
249 위(魏) 경학자 하안(何晏)죽음
320 진(晉) 청담(淸談)이 유행함
372 고구려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함
405 백제 왕인이 일본에 한문과 유학을 전함
607 수(隋) 구품중정제를 대신하여 과거제도 시작됨
624 당(唐) 균전법 실시
648 당(唐) 공영달(孔穎達) 죽음(574~)
653 당(唐) 오경정의 반포
682 신라 국학을 세움
717 신라 김수충(金守忠)이 당에서 돌아와 공문십철과 72제자의 화상을 대학에 둠
720 신라 백성에게 정전을 나누어 줌
788 신라 독서삼품과 실시
824 당(唐) 고문운동의 선구인 한유 죽음(768~)
841 당(唐) 《복성서(復性書)》를 지은 이고 죽음(772~)
857 신라 최치원 태어남
858 고려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 처음 실시
982 고려 최승로 시무이십팔조의 봉사 올림
992 고려 국자감 설치
1008 북송 공자를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가시(加諡)
1020 고려 최치원을 처음으로 성묘에 배향
1050 고려 이 무렵부터 사학십이도가 생기기 시작
1068 고려 해동공자 최충 죽음(984~ )
1069 북송 왕안석의 신법 실시
1073 북송 송학(宋學)의 비조 주돈이 죽음(1017~)
1076 북송 장재 《정몽(正蒙)》 지음
1085 북송 정호(程顥;明道) 죽음(1032~)
1091 북송 고려사신 이자의(李資義)를 통하여 고려의 서적을 구함
1099 북송 정이 《역전(易傳)》 지음
1101 고려 국자감에 서적포 설치
1107 고려 국자감에 구인재 등 7재 설치. 북송, 정이 죽음(1033~)
1116 고려 궁중에 청연각·보문각 설치
1119 고려 국자감에 양현고 설치
1131 고려 노장의 학문을 금함
1138 남송 호안국(胡安國) 《춘추전》 이룩함
1145 고려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70 고려 무신의 난이 일어나 문교의 암흑기가 시작됨
1175 남송 여조겸(呂祖謙)의 중개로 주희와 육구연(陸九淵) 형제가 만나 학문을 토론함(鵝湖之會)
1177 남송 주희 《논어집주》 《맹자집주》 이룩함
1189 남송 주희 《대학장구》 《중용장구》 이룩함
1192 남송 육구연 죽음(1139~)
1197 남송 <경원(慶元) 이학(異學)의 금(禁)>이 일어나 주자학이 위학(僞學)으로 몰림
1200 남송 주희 죽음(1130~)
1234 고려 이무렵 최윤의(崔允儀) 《고금상정예문》 50권 간행
1241 남송 주돈이·장재·정호·정이·주희를 공자묘에 종사함으로써 도학이 공인화함
1270 남송 여정덕(黎靖德) 편찬 《주자어류》 간행
1271 몽고 국호를 원(元)으로 정하고 허형(許衡)을 국자좨주에 임명함
1275 고려 국자감을 국학으로 개칭
1289 고려 안향 원나라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됨. 이 무렵 원나라에서 주자학 들어옴
1296 고려 경사교수도감 설치
1304 고려 안향의 건의로 국학에 섬학전을 둠. 국학에 대성전 이룩됨
1306 고려 안향 죽음(1243~)
1313 과거가 실시되고 주자학의 주석이 채용됨
1320 고려 공자의 소상 만듦
1325 주자학을 관학으로 공인. 고려, 평양에 기자사(箕子祠) 세움
1348 고려 이색(李穡) 원에서 성리학 연구
1357 고려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행하게 함
1367 고려 이색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성리학을 보급함
1371 고려 정도전 《심문천답》 지음
1375 명(明) 전국에 사학 세움
1389 고려 5부학당과 지방향교에 교수를 둠
1392 고려 정몽주 죽음(1337~). 고려 멸망
1394 조선 정도전 《조선경국전》 《불씨잡변》 편찬
1398 조선 성균관의 문묘와 명륜당을 건립
1405 조선 권근의 《예기천견록》 간행됨
1415 명(明) 호광(胡廣) 등 봉칙찬(奉勅撰)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 이루어짐
1420 조선 궁중에 집현전을 설치
1432 조선 설순 등 《삼강행실도》 편찬
1443 조선 유교(특히 성리학)의 정신과 원리를 바탕으로 훈민정음 창제
1453 조선 문묘의 액(額) 대성전(大聖殿)을 대성전(大成殿)으로 고침
1464 명(明) 설선(薛瑄)의 《독서록》 이루어짐
1493 조선 김시습 죽음(1435~)
1498 조선 무오사화 일어나 김종직의 문도를 비롯한 다수의 사류들이 죽거나 귀양감
1517 조선 조광조 등 성리학의 장려를 청함
1518 명(明) 왕수인(王守仁)의 《전습록》 간행됨
1519 조선 기묘사화 일어남. 조광조 사사됨(1482~). 현량과 폐지
1520 명(明) 왕수인 치양지설(致良知說) 제창
1528 명(明) 나흠순(羅欽順) 《곤지기》 이룩함. 왕수인 죽음(1472~)
1543 조선 주세붕 백운동서원 세움(서원의 시초)
1544 명(明) 왕정상(王廷相) 죽음(1474~)
1546 조선 기불멸론자(氣不滅論者) 서경덕의 죽음(1489~)
1553 조선 영남학파의 선구자 이언적 죽음(1491~)
1559 조선 이황·기대승 간에 사단칠정논쟁 시작됨(~1566)
1564 명(明) 나홍선(羅洪先;念庵) 죽음(1504~)
1568 조선 이황 선조에게 《성학십도》 올림
1570 조선 이황 죽음(1501~)
1572 조선 이이·성혼 간에 사단칠정논쟁 시작됨(~1578)
1574 조선 도산서원 세워짐
1575 조선 이이 선조에게 《성학집요》 올림
1579 명(明)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강학을 금지시킴. 하심은(何心隱) 옥사(1517~)
1582 명(明) 마테오리치[利瑪寶] 마카오에 상륙하여 가톨릭 포교를 개시
1584 명(明) 왕기(王畿;龍溪) 죽음(1498~). 조선, 이이 죽음(1536~)
1588 명(明) 나여방(羅汝芳;近溪) 죽음(1515~)
1590 명(明) 이지(李贄) 《분서(焚書)》 간행
1592 조선 임진왜란 일어남. (~1598). 조선성리학 일본에 전해짐
1602 명(明) 좌파양명학자 이지 <인심·풍속의 혹란과 성인에 대한 모독>의 죄로 투옥, 옥중에서 자살(1527~)
1603 명(明) 마테오리치 《천주실의》 지음
1620 명(明) 초횡 죽음(1540~)
1625 명(明) 동림파 사대부에게 대탄압 가해짐(~1626)
1631 조선 김장생 죽음(1548~)
1636 조선 병자호란 일어남(~1637).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 청에 잡혀가 죽음을 당함
1644 명(明) 명나라 멸망(1368~)
1645 명(明) 명나라 유신 유종주(劉宗周;念臺) 순국(1578~)
1659 조선 김장쟁의 《가례집람》 간행됨
1660 조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 시작됨(~1674)
1663 황종희(黃宗羲) 《명이대방록》 이룩함
1670 고염무 《일지록》 간행됨
1673 조선 유형원 죽음(1622~)
1676 황종희 《명유학안》 이룩함
1683 염약거 《고문상서소증》 제1권 지음
1689 조선 송시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지음
1692 왕부지(王夫之) 죽음(1619~)
1703 조선 대명의리의 본산인 만동묘(萬東廟) 세워짐
1709 조선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시작됨(~1715)
1712 이광지(李光地) 등 봉칙찬(奉勅撰) 《어찬주자전서》 지음
1716 《고문상서원사》 지은 모기령 죽음(1623~)
1717 그리스도교 포교금지
1725 《고금도서집성》 지음
1736 조선 정제두(鄭齊斗) 죽음(1649~)
1758 청조한학의 제창자 혜동(惠棟;松崖) 죽음(1697~)
1763 조선 이익(李瀷) 죽음(1682~)
1777 대진(戴震) 《맹자자의소증》 지음
1782 기윤 등 《사고전서》 지음
1783 조선 홍대용 죽음(1731~)
1784 조선 이승훈 가톨릭 전래
1788 청대 공양학의 비조 장존여(莊存與) 죽음(1719~). 조선, 임성주(責聖周) 죽음(1711~)
1798 완원(阮元) 《경적찬고》 지음
1801 조선 신유사옥 일어남. 청, 장학성 죽음(1738~)
1804 전대흔(錢大昕) 죽음(1728~)
1805 조선 박지원 죽음(1737~)
1824 방동수(方東樹) 《한학상태(漢學商兌)》 지음
1836 조선 정약용 죽음(1762~). 최한기 《기측체의(氣測體義)》 지음
1844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간행
1849 완원 죽음(1764~)
1856 조선 김정희 죽음(1786~)
1862 양무운동 일어남
1866 조선 병인사옥 일어남
1868 조선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 단행(~1871)
1877 조선 최한기 죽음(1803~)
1881 조선 위정척사운동 일어남
1885 캉유웨이[康有爲] 《대동서(大同書)》 지음
1886 조선 이진상(李震相) 죽음(1818~)
1891 캉유웨이 《신학경위고(新學經緯考)》 간행
1894 조선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 폐지
1895 조선 성균관 관제 공포, 경학과 설치
1896 담사동(譚嗣同) 《인학》 지음
1897 캉유웨이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간행
1898 캉유웨이 등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으나 무술정변으로 실패
1902 과거제도 폐지
1906 쑨원[孫文] 일본 도쿄에서 <삼민주의와 중국의 전도(前途)>라는 연설을 함. 조선, 최익현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쓰시마섬에 유폐 도중 단식으로 순국
1910 조선 한일합방으로 멸망
1911 신해혁명 일어남. 한국, 일제에 의해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격하됨
1913 중국 캉유웨이 등 유교의 국교화를 추구하여 존공운동(尊孔運動) 일으킴. 후스[胡適] 유교를 배척함
1919 중국 5·4운동과 함께 유교비판운동 가속화함. 한국, 유림단의 파리장서사건 일어남
1921 중국 중국공산당 결성
1922 한국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 간행됨
1927 중국 캉유웨이 죽음(1858~)
1934 한국 신조선사에서 《여유당전서》 간행됨
1937 중국 국공합작 이루어짐
1939 한국 명륜학원을 명륜전문학원으로 승격
1944 중국 펑여우란[馮友蘭] 《신원도(新原道)》 지음
1945 한국 광복에 따라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하고 유도회 결성
1946 한국 성균관대학 창설
1949 한국 현상윤 《조선유학사》 간행
1965 중국 문화대혁명의 시작으로 전통 사상·문화·풍속·습관 등이 파괴됨
1973 한국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윤리선언문> 발표.
1974 중국 《린뱌오[林彪]와 공맹의 도》 배포를 계기로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 시작됨
1976 중국 마오쩌둥 사망, 장칭[江靑] 등 4인방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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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권정안 / 소장ㆍ공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단발령의 추억


공주 방면에서 봉현리에 있는 우리 연구소를 가 본 사람들은 그 중간에 있는 저수지와 그 저수지를 앞에 두고 있는 모덕사를 알 것입니다. 처음에야 웬 절[寺]이 있는가 하겠지만, 몇 번 드나들다 보면 이 곳은 절이 아니라 구한말 때 의병활동을 하다가 대마도에 끌려가 단식절사(斷食節死)한 면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사당(祠堂)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슨 인연일까? 처음 제가 선생에 대해서 들은 것은 아마 고등학교 국사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략은 서세동점의 도도한 흐름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민족과 국가 생존의 위기 앞에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개화의 요구에 대해 선생은 수구파의 우두머리로 개화정책을 반대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보다 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내용은, 선생이 반대한 가장 중요한 정신이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보다 개화정책의 자잘한(?) 조목 가운데 하나인 단발령을 거부하면서 내세운 주장, 즉 ‘이 목은 벨 수 있어도 이 머리털은 벨 수 없다.(此首可斷 此髮不可斷)’는 말이었습니다. 상투는 당연히 해본 일이 없고 까까머리 학생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살아가던 나에게, 이 말은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코미디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말을 한 선생 자체가 시대착오적 사고와 말로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언 정도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찌 선생과 선생의 이 말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세기 내내 우리의 조상들과 그들의 문화전통을 모두 시대착오적인 코미디 정도로 생각해왔고, 지금도 많은 부분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 목을 벨지언정 머리칼을 자르지는 못하겠다는 이 말은, 생명이 달린 목과 생명이 없어 잘라도 아프지도 않고 그냥 두어도 수시로 빠지는 머리칼 사이의 가치의 차이를 모르는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그런 정신병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우리는 선생과 달리 개화된 문명한 사회에 산다는 자만감을 만끽하면서, 이 말을 시대착오적인 우스개 소리나 미치광이의 말쯤으로 가볍게 치부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물론 조금 식견이 있는 경우에는 선생의 인격과 행적을 고려하여 그 말이 나름의 상징성을 가진 것임을 인정하지만, 그 상징적 의미의 사상적 기반인 유학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나 가치로 치부해왔기에, 이 말은 여전히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적인 유학자의 고집스러운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선생과 선생이 살았던 구한말의 우리 민족과 국가는 서세동점의 국제적인 흐름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참담한 패배자였습니다. 현실적으로 개인이건 집단이건 패배자는 승자에게 경멸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니 경멸 이상의 참혹한 대가를 치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패배자에게 남은 길은 대개 저항과 굴종의 선택뿐입니다. 그리고 굴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이런 굴욕을 합리화할 자기변명의 희생양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평범한 개인의 말이라도 그것이 생명을 걸고 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진지한 이해의 자세나 적어도 경청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담보한 주장은 이미 단순히 일상적인 주장에 대해서와 같은 평범한 반응을 요구하는 것을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생명을 건 그래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알아달라는 요구를 담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면암 선생 정도의 인격과 실천을 보여준 선비들의 주장인 경우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시대의 희생양으로 삼아 우리 책임을 전가한 전력 때문에,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진지하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성찰하기를 회피했고, 그런 우리들에게 있어 이 말을 다시 상기하는 것은 역시 괴로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반성이야말로 지성의 첫째 조건이고 반성 없는 삶과 반성 없는 시대는 희망이 없다고 보기에, 늦었지만 더 늦지 않게 이 말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새겨 보고자 합니다.

저는 그 출발에서 우선 이런 의문 하나를 던져봅니다. 단발령은 국가가 임금의 명을 빌려서 국민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단발령을 주장한 개화파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종하거나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런 국가와 임금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현실적인 정치상황에서 그들은 반역자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당시 정치권력에 대해서 충신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소중한 부모가 주신 것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머리칼을 지키는 것이 효도이기 때문에 국가의 명령이라도 거부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은 그 많은 선비들의 행동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이처럼 효도 지상주의자 같은 그들이, 어떻게 망국의 상황에서는 머리칼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소중한 목숨은 도리어 초개처럼 내던지는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니겠습니까?

 


몸에 상처 한번 나지 않는 삶이 가능한가?


그러면 단발령을 거부한 선비들의 주장은 도대체 어떤 정신에 근거한 것인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 주장의 근거가 된 한문 구절에 매우 익숙할 것입니다. 그것은 효경(孝經)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피부는 모두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헐거나 상처내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이 말은 본래 사서의 하나인 대학의 저자이면서 유명한 효자로 알려진 증자(曾子)에게 공자가 한 말입니다. 증자는 그 아버지인 증점(曾點)도 공자의 제자로, 통칭 삼 천 제자라고 하는 많은 제자 가운데 비교적 어린 제자에 속하였을 뿐 아니라, 공자가 ‘노둔하다’고 평가할 만큼 총명하지도 못한 제자였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나는 백 번 해서 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열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나는 천 번 해서 할 수 있더라도, 그 할 수 있게 되면 같은 것이다.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及其能則一也)’ 할 정도의 노력파였습니다.

재능은 부족하지만 거기에 좌절하지 않는 노력파인 어린 제자에게 가르친 공자의 이 말은 어찌 보면 참으로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 말 뒤에 이어지는 구절은 도리어 통속적이기까지 합니다.


입신출세하여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서 부모를 현창함이 효도의 끝이다.

(立身出世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물론 공자가 여기에서 말한 입신양명이 설마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현실의 모습과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개인의 영달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세속적인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노장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의 가치를 고상하게 갖는 선비들의 입장에서 조차 이 말은 너무 통속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공자가 증자에게 말한 이 구절 가운데, 앞의 내용은 효도의 시작으로서는 너무나 자잘한 것이고, 뒤의 내용은 효도의 최고 경지를 의미하는 끝으로서는 너무나 통속적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공자의 교육 방식이 이른바 ‘그 사람의 수준에 따라 가르친다(因人施敎)’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이 말은 증자를 너무 무시한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쨌건 증자는 이 공자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하였습니다. 뒤의 구절이야 적어도 증자의 입장에서는 증자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여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만(결과적으로 보면 세속적인 입신양명에서는 아니라 해도, 증자만큼 그 본래적 의미의 측면에서 성공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앞의 구절은 그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는 이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물론 글자 그대로라면 첫째 구절의 실천인들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터럭이야 시간이 지나면 빠지기도 하는 것이고, 몸의 상처인들 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불가피하게 상처가 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스스로의 의지로 헐거나 상처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겠지만 증자는 실제로 평생 단 한번도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지 않았습니다. 공자의 이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애쓴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 말 그대로 실천한 것이며, 그것도 평생을 실천한 것입니다. 논어(論語)에 보면 이 증자의 임종 때 일화가 나옵니다. 가족과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은 증자가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바로 앞의 공자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한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증자가 위독하자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 발을 걷어 보고, 내 손을 걷어 보라. 시경에 이르기를, ‘언제나 전전긍긍하여, 마치 깊은 연못가를 지나듯이, 마치 얇은 얼음 위를 걷듯이 하라.’ 하였는데, 내가 이제야 더 이상 내 몸을 훼상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음을 알았노라. 얘들아.” 하였다.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저는 아직도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당혹감을 기억합니다. 마치 지난 호에 고백한 사마광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당혹감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평생 자신의 몸에 단 한번도 상처를 내지 않고 산다는 것이 도무지 가능한 것인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회의는 이어서 그런 삶에 대한 야릇한 선망과 함께, 20대 초반의 저 자신은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상처를 경험한 상황이라서,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는 회한과 자괴감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란 그 자신의 삶의 어떤 모습이건 적어도 스스로에게 그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면서 자신을 납득시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또 누구에게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드높은 자존심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조금이나마 가진 저였기에, 이 증자의 삶에 대한 선망과 이미 불가능이 되어버린 저 자신에 대한 회한을 어떻게든 풀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첫걸음은 증자의 삶에 대한 선망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방법은 증자의 이런 삶의 가치를 깎아내리면 되는 것이었고, 그렇게 깎아내릴 빌미를 찾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증자 스스로도 시경의 글을 인용하여 표현하였듯이 그가 전전긍긍하는 조심스러운 삶을 산 사람임을 인정한다고 해도, 바로 그 말은 그가 평생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더라도 이를 무릅쓰고 용기있고 과감하게 행동을 해 본 일이 없다는 것이며, 결국 그는 한 평생 소심한 겁쟁이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있는 사람만이 무엇인가를 한다.

그 부럽던 증자에게서 용기 없는 겁쟁이의 모습, 스스로의 신체에 상처를 내지 않기가 마치 가장 소중한 삶의 목적인 것처럼 행동하는 좀생이의 모습을 찾아낸 나는 적이 안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증자와 같은 삶이 불가능해진 스스로의 삶에 대한 회한도 풀어버리고, 내 삶이 그 유명한 증자에 비해 적어도 과감하고 용기있는 삶이라는 자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유를 찾은 저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그런 삶을 그의 개성적 가치로 인정해준다 하더라도 나는 나의 개성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지요.

그러나 우리가 살아온 시대가 그런 시대이고 또 제가 처했던 자리가 그런 자리라서, 이런 저의 과감성과 용기는 여러 번 시험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80년대 초반 대학에 온 뒤에는 이런 시험에 수없이 들게 되었고, 그 대부분의 경우에 저는 두려움에 뒷걸음을 치거나 갖가지 회피의 변명을 찾기에 골몰하는 비겁한 스스로와 부딪쳐야 했고, 그때마다 증자에 대한 저의 변명과 자부심은 형편없이 무너져 갔습니다.

이런 자괴감을 통해서 저는 증자의 소심한 겁쟁이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 보았습니다. 저 소심한 겁쟁이인 증자와 그 동안 그런 증자를 조소하면서 과감하고 용기있게 내 몸의 상처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내가, 만약 동시에 부모나 국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내 놓아야 할 상황에 함께 부딪쳤다면, 과연 누가 기꺼이 이를 위해서 생명을 내 놓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열 번을 물어도 저는 아닌 것 같은데, 그 소심한 증자는 기꺼이 생명을 내 놓을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도대체 이 모순의 해답은 무엇일까? 증자는 겨우 별 가치도 없어 보이는 몸에 상처내지 않기를 평생을 두고 실천한 것뿐인데, 그는 도리어 정말로 소중한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받는 것이고, 나는 그런 상처내기쯤은 별 볼일이 없는 사소한 것으로 치면서 굉장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가진 것 같은데, 진정으로 용기를 낼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은 물론 나 자신조차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오랜 자괴의 시간을 거치면서, 저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맹자에게서 찾았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는 일이 없고,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을 바라는 일이 없는 것, 단지 이 두 가지 일뿐이다.(無爲其所不爲 無欲其所不欲 如斯而已矣)


그랬구나, 그랬구나. 나는 그 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바라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을 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바라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구나.

무엇을 하고 무엇을 바라는 것에 대한 관심은, 자연 그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무엇을 바라고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권력에 대한 관심으로 나를 이끌어, 나로 하여금 그 조건과 힘을 얻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갖도록 한 것이구나. 내 나름대로는 내 능력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얻으려 하는 것이고, 이는 부끄러울 것 없는 정당한 욕망이고 행동이라고 자만했지만, 그게 아니었구나.

성현들께서 가르치신 정의로운 삶이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可能之中]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行可當之事]’이라고 학생들에게 그럴듯하게 가르쳤지만, 나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떠벌인 것이구나. 할 수 있는 일인가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판단과 반드시 함께인 것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의 선택은 마땅히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한 선택과 반드시 함께라는 이 당연하고 단순한 이치조차 몰랐구나. 아니 모른 것이 아니라 내 무지와 욕심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했구나.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바랄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라고 부르고, ‘무엇을 하지 않고 무엇을 바라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퇴영적인 자세라고 매도하는 선전에 나도 모르게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이구나. 이 단순한 이치를 모르고 살아온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회한, 그리고 나를 이런 무지 속에 가두어 내 소중한 삶의 가능성을 망쳐온 그 무엇인가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감히 증자를 소심한 겁쟁이라고 치부하다니, 저는 얼마나 파렴치한 자입니까? 저를 이렇게 파렴치하게 만든 저 자신 속의 무지와 탐욕은 또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입니까? 그런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별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여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더러운 현실의 모습은 또 어떠하며, 그 모습을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갖가지로 합리화해 주는 이론들은 또 왜 그리 많은 것입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아직도 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현실 속에 더러운 모습들이나 저를 합리화주는 갖가지 이론들에서 편안함과 위안을 얻는 것을 단호하게 중지할 만한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도 적어도 한 가지, 저 위대한 증자에 대한 터무니없는 경멸을 중지하고, 진정으로 그를 배우고 싶다는 바람만은 잃어버리지 않기를 다짐해봅니다. 그 바람 속에서 그 동안 증자가 속삭여주신 몇 마디의 말씀들은 이런 것입니다.

 

*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소중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소중한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 하지 않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는 사람이 성장하는 인간이다.

* 세상에서 별로 문제 삼지 않는 자잘한 행동까지도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으로 차마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 하지 않아야 할 작은 일을 작게 여겨서 함부로 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함부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커져서 결국은 못할 짓이 없게 되기 쉽다.   

*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기회를 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은 약속을 쉽게 하는 사람이 지킬 의지가 없는 것과 같아서, 대체로 그 기회가 주는 권력에 집착하여 이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 기회가 주어지기 전에도 그리고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뒤에도 그가 있었던 자리와 그가 있는 자리에서 그 능력을 펴는 사람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사회적 지도자를 선택할 때,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따지기 전에 먼저 그가 어떤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인가를 보아야 한다.

  

사족 1 : 위의 *표한 말들은 한번 읽으신 뒤에 모두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의 구절 가운데 하나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죄악에 빠지지 말라’는 것인데, 또 이 교훈을 잊고 사람에 대한 판단을 제멋대로 내린 것 같습니다. 역시 증자의 속삭이심이 아닌 제 미숙한 인격의 울림이었나 봅니다. 타인을 심판하고자 하는 이 끈질긴 시선을 멈추고, 그 방향을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돌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사족 2 : 단발령을 거부한 그 정신을 그 정신을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머리카락을 가볍게 여겨 더 소중한 것들까지 마구 내 던져 온 지난 세기 우리가 어떤 것들을 상실했는가를 생각하면 참혹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사족 3 :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요? 아마 자식을 두어 본 사람, 그 자식의 몸에 난 상처를 바라 본 사람은 모두 알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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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0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남교육연구소 http://www.chungnamedu.or.kr/
 

 

군자(君子) 삼락(三樂)

 

권정안 / 소장ㆍ공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삶과 행복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목적은 제각기 다르고 또 다른 것이 정상이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폭 넓게 정의해본다면 아마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다른 것은 행복 자체가 아니라, 그 행복의 서로 다른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는 나름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조건들을 얻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며, 그런 조건들을 얻지 못하거나 얻을 희망이 없을 때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궁핍과 좌절의 고통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50년을 넘게 살아온 저도 제 삶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단언하기 어렵고, 과연 무엇이 행복했고 무엇이 불행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내 뜻대로 잘되어서 득의양양한 경우도 있고, 아내와 연애할 때 설렘과 생명의 고양을 느껴본 경험도 있고, 타고르의 시처럼 아이들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고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축복을 맛본 경험도 있고, 지난 월드컵 때에 행복했던 몇 주일도 있고, 지난 겨울을 포함한 산중에서 행복했던 공부의 경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제 삶의 행복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그것은 제가 이 여러 가지 행복했던 과거의 경험에 만족하기보다 행복의 조건들을 지금 여기와 미래에서 찾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분명히 저는 만족을 모르는 엄청난 욕심쟁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욕심쟁이 아닌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느냐고 엉뚱한 핑계를 대 보지만, 노자에게 단단히 꾸중을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정말로 욕심은 끝이 없어서, 50쯤 나이를 먹은 지금에 와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예전에 행복했던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와서야 그것이 행복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경우입니다. 훨씬 행복했을 것을 놓쳐버린 이 지난 날의 어리석음과 미숙함에 대해서는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봄을 찾으러 온 들판을 쏘다니다가 돌아와 보니, 봄이 담장 위에서 기다리더라.’는 말은 얼마나 부러운 말인가요? 봄은 이미 가버렸으니.

 이처럼 우리 삶에 주어진 행복도 제대로 찾아 누리지 못한 사람이니, 이런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행복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공부 헛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공부 다시 해야 하겠습니다. 가슴을 저며 오는 무상감을 이겨내면서 말입니다.       

 


행복(幸福)과 열락(悅樂)


 앞에서 주어진 행복과 만들어 가는 행복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사실 행복이라는 한자어는 주로 주어진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행(幸)이란 말은 다행, 즉 ‘행운이 많음’을 의미하는 말로써 때로는 요행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복(福)이라는 한자어도 역시 하늘이나 신이 내려주는 좋은 조건이나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이 성취한 좋은 조건이라는 의미의 덕(德)과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운(運)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크게 규정지어 버리는가를 생각해보면, 이 행운(幸運)과 다복(多福)을 합쳐서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있어서 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실체는 풍요로운 삶의 조건인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옛날 분들은 꿈조차 꾸지 못했던 풍요로운 물질적 조건을 갖추고 더 많은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아직도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상대적인 박탈감에서 현재의 풍요조차 도리어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과연 이 물질적 풍요와 욕망 충족의 쾌락이 행복인가 하는 회의를 느끼고, 이 물질적 조건과 욕망의 충족만이 행복이 아니라 사람마다 행복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다원적 가치의 시대를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물질적 풍요에 대한 추구가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치열한 경쟁에 스스로의 삶을 낭비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행복의 조건에 대한 다른 대안을 찾는 기회를 가져본 사람들에게 이런 흐름이 강한 것 같아 보입니다. 

 모색되는 대안들은 다양해 보입니다. 가장 흔한 것은 자신의 건강을 위한 활동과 취미 생활,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한 형태의 활동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기성세대가 이 흐름 위에 있으면서도 거의 맹목적으로 거기에 집착하는 형태라면, 요즈음의 젊은 세대들은 그들의 행복한 삶의 조건을 어떤 고정된 조건과 관계에서 찾지 않는 이른바 ‘쿨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써 저도 전자에 가깝지만, 이 양자 사이에 공통점은 오히려 행복의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행복의 주체인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가 보여주는 자신의 행복 찾기의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의 외적 조건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에서 행복의 주체로 눈을 돌린 이 흐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이 전환은 적어도 행복의 조건을 주어진 것으로 보는 수동적인 자세는 물론이고, 외적인 조건에서만 행복을 찾는 맹목적 추구의 멈춤과 반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행운과 다복이라는 의미의 행복(幸福)에서 희열과 쾌락이라는 의미의 열락(悅樂)으로 무게의 중심이 옮겨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봅니다.

 열락이라는 말은 만들어지고 쓰인 역사에 비하면 현실에서는 사실 별로 쓰이지 않는 용어입니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지내온 대부분의 역사적 현실이 주어진 행복의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거나, 행복을 말하기에도 너무나 참혹한 아픔과 상처들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이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회원들의 경우에는 스스로가 정당하게 성취한 행복의 조건조차 도리어 죄스럽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건 한자에는 초기에 열락의 열(悅)이라는 한자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라고 희열이 없었겠습니까? 그래서 설(說)이라는 글자를 빌려 희열을 표현하는 문자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 글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태(兌)라는 글자는 주역(周易)의 팔괘(八卦) 가운데 하나인데, 그 태괘의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는 소녀(少女)입니다. 그러니 지금 열(悅)이라는 한자는 ‘마음 속에 젊고 아름다운 소녀 하나를 품고 살아가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요즈음 여성들에게 유행하는 꽃미남에 대한 노골적인 선호의 주역적인 버전이라고나 할까요?

 락(樂)이라는 한자는 본래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 가운데 큰북과 작은북이 나무로 만든 악기 틀에 올려져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음악이 인간의 행복의 중요한 표현 양식이고, 동시에 인간의 행복을 돕는 도구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북은 인간의 심장 박동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갖는 악기여서, 사람의 심장의 움직임을 ‘북 고(鼓)’ 자를 써서 고동(鼓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즐거움은 항상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감동의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미 짐작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희열과 쾌락을 결합한 열락이라는 말은 공자의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것으로, 우리 회지 창간호와 2호에 이 난에서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희열이란 개인의 내면에서 홀로 우러나는 기쁨이라면, 즐거움은 더불어서 함께 나누는 것임을 말씀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자가 말한 열락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관건은 그 열락의 주체인 인간이 군자라는 인간상을 갖추었느냐 아니냐의 여부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공자의 행복론 아니 열락론이 유학이 그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써 제시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도(道)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학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매번 유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지겨운 자기반성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인가를 말씀드렸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실은 지나온 제 삶이 이 경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가에 대한 고백이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공자의 열락론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마 제가 가슴을 스쳐 가는 세월의 무상감에 치를 떨고, 돈과 권력과 명예가 열락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에 이리저리 귀를 쫑긋거리고, 온갖 쾌락의 달콤한 유혹에 수도 없이 스스로를 기꺼이 내던지고, 이기적인 자기 합리화와 우스꽝스러운 자아도취 속에서 나의 안일을 추구하는 피투성이의 삶 속에서도 아직 이 견해를 포기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첫 번째 즐거움


 맹자는 이런 저에게는 너무나 부러운 분입니다. 유명한 맹자의 삼락(三樂)은 사실 군자(君子)라는 전제가 붙어 있는 것이니, 사실 제가 부러운 것은 그 열락이 아니라 그 군자라는 인간이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맹자 진심장 상(盡心章 上)에 나오는 이 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의 왕자가 되는 것은 그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다. (君子有三楽 而王天下 不与存焉)


 이 구절 가운데 ‘왕천하’라는 말은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맹자가 사용한 이 말의 본래 뜻을 생각하면, 그것은 인류적인 지도자가 되어서 전 인류에게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유학의 이상인 동시에 수만은 인류의 지성들이 꿈꾸어 온 이상입니다. 적어도 이런 노력을 해온 진정한 지성들에게 그 이상의 실현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을까요?

 물론 이 말의 세속적인 의미가 절대 권력을 쥐고서 천하를 제 마음대로 요리하는 한 사람만의 절대 자유와 그 행복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맹자의 본의는 이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사실 이 말이 갖는 본래의 의미는 오히려 앞의 논어에서 공자가 추구한 더불어 즐거운 삶의 궁극적인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다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맹자는 이 구절의 바로 다음의 구절에서는 이 내용과 달리 “천하의 중심에 서서 사해의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켜주는 것을 군자는 즐거워한다(中天下而立 定四海之民 君子楽之)”라 하였습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맹자는 바로 이 내용을 삼락을 말한 뒤에 다시 한번 강조하여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의 의미를 ‘한 사람이 진정한 지성이 되어서 인류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기회를 갖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군자에게는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적어도 세 가지는 있다.’ 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부모님들이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들에게 아무런 탈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父母倶存 兄弟無故 一楽也)


 우리가 행복의 조건들을 가치로 보는 것이라면, 이 말은 적어도 군자는 왕천하의 가치보다 부모님들이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들에게 아무런 탈이 없는 것이 더 높은 가치이며, 더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열락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인 가치관을 갖는 사람은 물론 사회적 이상 실현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지성인들 모두에게 이 말은 녹녹하지 않은 도발적인 제안입니다.

 차라리 ‘자식들에게 아무 탈이 없고’ 라는 말이 들어갔다면, 저처럼 자식들을 길러본 사람들에게는 꽤 공감이 가는 말이었을텐데 말입니다. 물론 이 구절의 내용에 대해서, 그 부모와 형제에게 다른 조건이 붙어있지 않다면 상당히 공감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자신의 행복이나 오늘날 가족의 중심이 된 소가족의 행복에 어떤 형태이건 장애가 되는 조건이 달려있는 부모 형제라면 어떨까요? 참혹한 말이지만, 우리의 부모님들이 한창 나이 때에 입버릇처럼 탄식했던 ‘자식이 웬수다.’ 하신 말씀은 거의 전부 말씀일 뿐이었지만, 그 말을 뒤집어서 말이 아니라 현실의 행동으로 부모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너무 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 속에서 형제의 무고함이야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저는 이 말의 가치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이 행복을 잃어버린 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다행하게, 정말로 다행하게 이런 행복을 누리고 있지만, 강의 시간에 이 말을 할 때마다 조심스러운 것은 저보다 훨씬 젊은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이 말이 못을 박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내 일이 아님에도 정말 가슴이 저려옵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행복을 갖고 있다는 것이 절대로 미안할 수 없는 일이면서도, 공연히 미안스러워 말을 주저하게 됩니다.

 맹자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직 명성이 나기 이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오늘날 교육열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이 구절은 적어도 맹자가 아버지를 여읜 뒤에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맹자는 이 말을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기 위해 한 말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행복의 결여에 대한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면 맹자가 말한 ‘부모님께서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들에게 아무 탈이 없는’ 이 행복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사랑 받고 사랑했던, 그것도 무조건적인 사랑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전 삶의 영역에서 두 번 받기가 참으로 어려운 이 사랑의 주인공들이 계신다는 것은, 설혹 우리가 이미 그 사랑을 받음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고 해도 얼마나 우리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이라 합니다. 불쌍하다는 말은 한자로 ‘불상(不祥)’이라고 씁니다. 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왜 복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한창 부모의 사랑으로 자라야 할 나이에 바로 그 사랑을 줄 사람을 잃은 것만큼 복이 없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찍 부모님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작은 사랑 받음의 추억이라도 기억해보라고 권하고, 그 기억마저 없는 아이들에게는 그 사랑을 상상이라도 해 보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는 일은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하지요. 하물며 그 아픔을 스스로 이겨내라고 난 체하는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지금 세상에는 차마 말하기도 겁나는 더 참혹한 경우도 없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마지막으로 이런 행복이, 아니 그것을 갖지 못한 아픔이 하늘이 준 조건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논리일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참으로 아플 때 원망할 것이라도 있으면, 도리어 그것이 의지거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원망을 받아줄 수 있는 하늘을 닮기에는 아직도 너무 멀었습니다. 

 맹자가 말한 첫 번째 즐거움은 사실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이 결정하고 그 결정된 조건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조건이 감당하기 힘들고 참혹할 때, 그래서 하늘이 그 원망을 받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사실 이 경우에도 인간에게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맹자가 말한 ‘부모님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들 아무런 탈이 없는’ 이런 조건이 축복을 받은 모습임에는 틀림없고, 그것을 갖지 못한 경우에 인간이 불행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지만, 의외로 현실의 모습을 보면 훨씬 좋은 조건을 받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주어진 조건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역으로 분명히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나 심지어 객관적으로 보아서 나쁜 조건을 받고서도 그것을 축복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하늘이 주신 조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세에 의해 결정됩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우선 그 조건을 스스로의 현실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며 한 걸음 나아가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자세라고 합니다. 니체는 이것을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했지만, 동양에서는 이것을 ‘낙천지명(樂天知命)’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이 좋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더 좋은 자식을 주시지 않았더라도, 이런 부족한 자식일지라도 축복이라고 여겨서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가 중요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것과 같이 단지 이런 천명에 순종하는 소극적인 숙명론적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자세가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낙천지명’하는 자세야말로 그 주어진 조건을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의 유일한 조건임을 자각하고 인정하여, 바로 그 가운데서 우리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창출해 가는 터전과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되어서 가장 완벽한 자식을 가져야만 부모로써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족한 모습의 자식이라도 바로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주어진 조건 속에서 만들어 갈 수 있는 정의인 것입니다. 바로 이 길 위에만 부족한 자식이라는 주어진 조건을 바꾸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옛날 분들은 이것을 ‘명중현의(命中顯義)’라고 하였습니다. 자식과 부모 이외에 우리가 선택하지 않고 주어져 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대입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즐거움

 

 앞에서 주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인간이 갖는 내외의 조건은 모두 결정되어 주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의외로 인간은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스스로의 내외적인 조건들을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의 영역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그 선택의 출발점에서는 주어진 조건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 미래를 향한 매 선택의 순간에 우리들 앞에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선택의 주체가 비록 과거의 주어진 조건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고 그 조건에 의해서 규정되는 모습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의 순간에 인간 주체는 다양한 선택의 여지들이 주어지고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거의 인생의 매 순간마다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곳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인간의 자리인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말이 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 선택들은 동시에 인간에게 매우 엄중한 선택의 책임을 물어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주어진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결과들에 대해 그 조건들에 핑계를 돌릴 수가 있지만, 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영역에서는 책임을 돌리는 것이 쉽지 않고 그 스스로가 책임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 두려움은 의외로 녹록하지 않아서 인간은 때로 그 자유의지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포기하기도 합니다. 선택 자체가 보이지 않는 미래를 결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다, 그 선택의 결과가 실패로 드러나는 상황이 되풀이될 때, 그리고 그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되었을 때, 인간은 차라리 이 자유의지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자 하는 유혹에 흔들리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두려움과 자포자기가 다른 사람의 삶과 그 삶의 조건들을 자신의 의사대로 휘두르고자 하는 탐욕스러운 지배의지와 함께, 우리들의 삶과 사회와 세계를 왜곡된 형태로 굴절시켜온 두 개의 기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두 가지 내외의 질곡을 모두 거부하는 그 자리에 바로 맹자의 두 번째 즐거움의 출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굽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楽也)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임을 선언함은 그 어떤 다른 것에도 그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음이며, 그것은 당연히 나를 대신하여 나의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미숙하고 너무나 나약한 우리는 이런 것들의 유혹과 위협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알기에, 맹자의 이 말 속에 담긴 자유인의 드높은 기상이 얼마나 부러운 것인가 하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인의 드높은 기상은 사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즐거움의 출발점에 불과할 분입니다. 아니 전에 말씀드린 것으로 말하면 그것은 더불어 함께 하는 즐거움이기보다는 자신만의 희열에 속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진정으로 더불어 함께 하는 즐거움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 자유의 기상과 그것이 주는 자기 희열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맹자의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음’이나 ‘굽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음’은 하늘과 마주 선 나와 다른 사람과 마주 선 ‘나’의 부끄럽지 않음인 것입니다. 그 부끄럽지 않은 나의 출발점은 이미 말씀드린 자유인과 그 자유인의 희열이지만, 이 희열이 우선 다른 사람을 마주해서 더불어 함께 하는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자유인으로 인정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역시 다른 사람을 독립된 자유인이 아닌 나의 소유로 만들어 지배하려고 하는 참으로 끈질기고 무서운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며, 그런 모든 제안과 권유를 담담하게 거절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자(程子)께서 이 글을 공자가 인간다움을 성취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극기복례(克己復禮)’ 가운데 극기(克己)로 표현한 것은 참으로 뛰어난 통찰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소유하려는 우리 스스로의 유혹과 권유와 제안들을 담담하게 거절할 수 있어서 즐거우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어떤 경우에도 자유인으로 인정하고 존중하여 자유인과 자유인의 대등한 어울림을 만들어 갈 수 있어서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는 즐거움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또 그것은 상당한 정도 올바른 해석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다는 실체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현실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정직하게 비춰보는 온전한 양심과 양심의 눈을 갖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제가 몹시 부러워서 배우고자 하는 옛날 분 가운데 사마광(司馬光)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중년이 훨씬 지난 나이에 ‘내가 평생 한 일 가운데 남에게 말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하여 저를 절망시킨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글을 읽었을 때, 저는 겨우 20대 초반으로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두 번째 즐거움 둘째 구절입니다.

 참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야 저는 겨우 이 사마광의 말이 그가 평생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님을 눈치챘습니다. 아니 사실은 이런 의미인지 몰라도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이렇게만 해석한다면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무엇보다도 그 잘못된 지난날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저는 사마광의 이 말을 그는 그가 한 행동에 대해서 어떤 사람을 마주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그가 자신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오만의 표현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을 비록 미숙하거나 부족한 것이라도 용기 있게 드러내고 당당하게 책임지겠다는 자존의 선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결국 이 경우 저와 사마광의 차이는 용기 있고 당당한 자존심을 갖느냐 못 갖느냐의 차이인 것이며,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것이 아닌 내가 살아가는 모든 현재의 결단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옛 분들은 맹자를 완전에 가까운 성현으로 보았고 이는 저도 인정하는 것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저는 맹자의 이 말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자부의 표현이기보다 오히려 부족한 자신이라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당당한 자존의 희열과, 바로 그런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모습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면서도 그를 당당한 자유인으로 보아주고 대접해주며 더불어 함께 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첫 번째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은 더욱 두려운 말입니다. 우선 누가 하늘을 알겠습니까? 물론 저 푸르고 푸른 하늘[蒼蒼者 天]의 색을 모르겠으며, 그 창공이 무한하게 크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제 말은 도리어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끌어다대는 하늘에 대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맹자의 하늘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의 진심을 하늘은 아실 것이다.’ 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 글을 보고 정자께서 그를 준엄하게 질책하시기를, “하늘은 존엄하신 것이니, 하늘을 함부로 끌어다대지 말라.” 하였습니다. 저는 오히려 하늘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늘을 조금이나마 더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공자 같은 성인께서도 50이 되어서야 하늘의 명을 아신다고 하셨겠습니까?

 제 나이 이미 50을 넘겼지만, 저는 아직도 하늘이 무엇인지 또 그 하늘이 나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인지 온전하게는 물론 대충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제자가 주자(朱子)에게 천명(天命)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주자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잘 알아듣지 못하신 것으로 생각한 제자는 좀 더 큰 소리로 다시 물었더니, 이 위대한 인격과 학문의 소유자인 주자가 노여운 목소리로 ‘내가 천명을 모르는데, 어찌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늘을 잘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옛 분들의 글을 보면, 맹자의 이 말 이외에도 여러 곳에 하늘을 말하고 있으니, 사서의 주석을 낸 주자가 하늘이나 그 하늘의 명령을 전혀 몰라서 이런 말을 한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주자의 이 말을 조금 다르게 이해합니다. 그것은 주자가 무엇보다도 하늘을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가두어두거나 제한하려고 하지 않은 자세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그의 미숙함과 온전하지 않음에 대한 자각인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한계에 대한 정직한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같은 사람이 꿈속에서도 도달하기 어려운 학문적 경지와 인격의 깊이를 갖고 있는 주자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어찌 하늘을 가볍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용한 침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가볍게 말하지 않기는 실로 진정으로 하늘을 알고 닮아가기의 첫걸음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미숙함과 부족함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늘을 마주할 때, 우리는 우리의 완전함이 아닌 이 미숙하고 나약한 현존 속에서 언뜻언뜻 그 하늘의 편린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니 우리 자신 속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온갖 사물들과 현상들 전체 어디서나 하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맹자의 말은 그래서 겸허하고 정직한 마음을 담은 외경의 눈길로, 사람만이 아닌 이 수 많은 하늘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만나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것들과 바라시는 것들을 자각하고 실현해 가는 ‘낙천지명(樂天知命)’의 터전 위에서,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함께 하늘이 주시고 바라시는 것을 더불어 완성해 가는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 번째 즐거움


 저는 하늘을 두려워하여 맹자의 두 번째 즐거움을 순서를 뒤집어서 말씀을 드렸지만, 논리적으로 말하면 역시 맹자의 순서가 옳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주어진 조건과 그 조건을 주신 하늘을 말한 뒤에 사람과 사람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 순서에 따라 다음의 세 번째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를 해 볼까요? 두 번째 맹자의 즐거움은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함께 하늘이 주시고 바라시는 것을 더불어 완성해 가는 것의 구체적인 실천의 시작을, 그 모든 것들 가운데 우선 나와 같이 미숙한 존재이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서 맹자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맹자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맹자가 이러한 벗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참담한 모습이었는데도 말이지요. 여기서 앞의 구절을 다시 한번 돌아볼까요? 두 번째 구절에는 오해하기 쉬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사람을 마주하는 맹자의 시각의 차이에 대한 것입니다. 맹자는 하늘에 대해서는 ‘우러러본다’는 의미의 ‘앙(仰)’이란 글자를 쓰고, 사람에 대해서는 ‘굽어본다’는 의미의 부(俯)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이것은 하늘을 보는 맹자의 시각과 사람을 보는 맹자의 시각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그 행동을 하는 마음과 의식 그리고 가치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더욱이 우리는 많은 현실에서 하늘을 우러르는 시선들이 사람을 얕잡아보는 시선들이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맹자의 이 시각의 차이에 대해서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온전하신 하늘과 비교해서 우리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이런 시각을 자초한 측면이 너무나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굽어본다는 표현이 아래를 향한 시각이라는 점에서 오해의 가능성은 더욱 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맹자의 시각을 다른 의미로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보다도 앞에서 말씀드린 맹자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입니다. 적어도 맹자의 두 번째 즐거움이 단순한 자기도취나 자아만족의 즐거움이 아님을 인정한다면, 이 시각의 차이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오해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맹자의 시각의 이동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선 위로 하늘을 우러러보던 시선에서 아래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의 단순한 시각의 이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 가는 곳에 눈길이 가는 것이고, 눈길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는 것이다.’라는 단순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저는 이 시각의 이동은 마음의 이동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굽어본다’는 부라는 글자는 우선 낮은 곳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저의 은사 가운데 한 분이신 안병주 선생님께서는 맹자의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국시대의 참혹한 현실에서 백성을 건져내려는 간절한 마음’이라는 의미의 ‘절어구민(切於救民)’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서 가장 고통받는 낮은 곳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이란 우리 자신이며 동시에 수 없이 많은 낮은 곳에 있는 것들 가운데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맹자의 이 시각의 이동을 단순히 하늘을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림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의 시선을 따라 가깝고 낮은 곳으로 시각을 낮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그곳에 우리들이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할 사람들이 보였던 것이며, 그것이 결국은 하늘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낮은 곳과 가까운 곳의 아픔과 고통을 더불어 함께 함으로써 하늘과 더불어 즐거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군자라면 말입니다.

  이제 맹자의 세 번째 즐거움을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군자는 하늘과 더불어 즐겁기 위해 가까우면서도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즐겁기 위해 하늘의 시선을 따라 내려왔습니다만, 그 즐거운 일을 누구와 더불어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마 하늘의 시선이 가 계신 더 낮은 곳도 있을 것입니다만, 우선 먼저 이 즐거움을 함께 해야 할 것은 바로 사람들이기 때문에 맹자의 시선이 그 사람들에게서 일단 멈춘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하의 꽃다운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得天下之英才 而教 育之 三楽也)

       

 우리 회원 분들은 대부분 교육에 종사하시는 분이고 또 적어도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니, 이 유명한 말에 대해서 나름의 이해와 공감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영재라는 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신 분도 꽤 있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제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그것은 아마 현실에서 이 영재라는 말이 둔재(鈍才)라는 말과 상대적으로 이해되고, 그것이 사람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되는 경험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별을 당한 당사자인 경우는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

 옛날 분들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한문으로 ‘입언지책(立言之責)’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맹자처럼 뛰어난 인물이어서 그 영향력이 큰 사람은 당연히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지셔야 하겠지요. 옳은 말입니다. 그래도 만약 그 말의 본의가 아닌 것으로 오해를 받거나 왜곡을 당한 것이라면, 사실 그 중요한 책임은 오해하거나 왜곡한 사람들이 더 많이 져야 하는 것도 사실이겠지요.

 특히 글을 전체의 문맥에서 읽지 않고 앞뒤를 끊어서 의미를 확대하는 것을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하는데, 그것이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기 합리화를 위한 왜곡인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무서움은 사실 그들이 이런 왜곡을 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왜곡이 본래의 의미를 정당하게 이해하는 것을 심각하게 가로막는다는 점입니다. 맹자께서도 참 난처하고 속이 상하실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맹자를 위한 변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천하의 꽃다운 인재’라는 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하라는 말은 ‘하늘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것은 사실 ‘하늘 아래 그리고 땅의 위’ 즉 ‘천하지상(天下地上)’으로 사람의 세계, 그것도 사람의 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당시 맹자 이전부터 그들이 아는 전체 인류사회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던 용어였습니다.

 그러면 과연 인류 전체를 통 털어서, 그런 큰 사회 단위에서 꽃다운 인재라고 불릴 사람은 누구이고 또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런 사람을 제자로 만나 가르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우리 교육계에 떠도는 말 가운데 좋은 스승이 좋은 제자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자들이 좋은 스승을 키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올 때, 저는 대개의 경우 그것은 비겁함이나 탐욕스러움의 무의식적인 발로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사실 저의 경우도 이런 비겁함과 탐욕스러움에서 전혀 자유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니, 이는 아마도 제가 들어야 할 질책이며 부끄러운 고백일 것입니다. 문제는 맹자의 이 구절을 긍정적으로 보건 부정적으로 이해하건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런 부끄럽고 탐욕스러운 시각으로 맹자의 이 구절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리의 작고 더러운 그릇 속에 가두어 두듯이, 맹자를 우리의 못나고 탐욕스러운 그릇 속에 가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천하의 꽃다운 인재’라는 이 구절을 ‘온 인류가 모두 꽃다운 인재’라고 읽고 싶습니다. 현실의 저처럼 이 구절을 부끄럽고 탐욕스럽게 이해하는, 말만하면 스스로 거룩한 성직에 종사한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우리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히 너무나 미숙하고 너무나 초라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맹자가 따라왔던 참으로 거룩하신 하늘에 시선이 바로 이 미숙하고 초라한 우리 모두에게 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류 하나 하나가 거룩하신 하늘이 소중하게 바라보시는 존재인데, 정말로 하늘에 대한 외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그를 꽃다운 인재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그래서 하늘이 소중하게 보시고 맹자께서 그 시선을 따라 소중하게 보아주신 우리들의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선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있는,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를 탐욕으로 더럽히고 미숙함으로 가려도 변함 없이 여기에 있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공자는 그것을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낳아 주셨다(天生德於予)’ 하셨고, 맹자는 그것을 인간의 본성이라 하면서 그 꽃다움의 실체는 선(善)한 것, 그것도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누군가에서 이 꽃다운 모습을 찾아내서 인정하고 길러줄 수 있다면 참으로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니지요. 그 누군들 이런 꽃다운 모습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완강하게 스스로의 이 꽃다움에서 눈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 꽃다운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거짓된 자유의지의 무서운 함정이지만, 저를 포함해서 이 함정에 의도적으로 심지어는 기꺼이 뛰어든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꽃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각기 다른 것이랍니다. 물론 비슷한 모습도 있지만, 제각각의 그릇에 담겨 있으니, 결국은 제각기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꽃들이 모두 꽃이고, 또 같은 종류의 꽃들이 있어도 결국은 하나 하나가 제각각의 꽃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개성적인 재능이고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를 길러주는 것이 교육자의 참 큰 즐거움이고, 참으로 의미 있는 진정한 교육이기는 하겠지만, 과연 우리는 그런 즐거움과 의미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 꽃다움으로 가득한 그들을 길러주기는커녕, 도리어 우리들의 미숙함과 더러움으로 그 꽃다움을 망치고 더럽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서도 태연하게 ‘내가 누구를 키웠다’고 으스대고, 다른 사람들의 피땀어린 세금을 더 내라고 칭얼대고, 심지어는 아이를 볼모로 삼아 돈을 갈취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에 더 큰 도둑과 강도들이 많아서 우리의 그런 모습이 폭로되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결국은 아무런 부끄러움과 두려움도 느끼지 못한 채, 조금이라도 그렇지 않은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바득바득 헐뜯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맹자의 이 교육이라는 말을 바꾸어 읽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우선 이 꽃다운 모습을 ‘알아주기’ ‘믿어주기’ ‘바라보아 주기’이며, 그것이 참으로 꽃답게 피어날 때까지 ‘참아주기’ ‘기다려주기’ ‘함께 아파 해주기’ ‘함께 울어주기’일 뿐 아니라 ‘끝없이 속아서 바보 되어 주기’ ‘모르는 체 눈감아주기’이며, 때로는 ‘보채기’ ‘닦달하기’ ‘꾸짖어주기’ 심지어는 ‘냉정하게 돌아서기’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 아름다운 모습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써만 말입니다.

 그래도 부족하지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사랑의 마음과 그 사랑에서 나온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나 미숙하고 부족한 사람임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들이 스스로 그 아름다운 모습을 피어낼 힘과 의지가 있음에 대한 믿음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되고, 그들이 장래 우리의 미숙함을 넘어서서 우리를 도와줄 뿐 아니라 바로 지금도 우리의 미숙함을 끊임없이 채워주는 벗들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더불어’라는 말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오직 대등한 벗들에게 있는 것이고, 벗들 속에 함께 있지 않고는 더불어 즐거움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더불어 즐거움이 가능한 우리를 함께 있게 하는 지평은 어디일까요? 하늘의 시선이 머무시는 곳, 맹자의 시선이 따라 내려온 곳, 우리들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그곳을, 주자는 진리의 지평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우선 사람의 지평이라고 해두고 싶어서 이것을 인간의 진리라고 말해보지만, 그것은 역시 출발점이고 그 지평의  더 아래를 생각한다면 주자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루한 글이었습니다. 그래도 논어 첫머리에 대한 글과 함께 읽어주시면, 그 길이 하나임을 아실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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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정안 소장님 추구 강의
연구소 홈페이지를 통해 녹음 강의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www.chungnamedu.or.kr
)

함께 참여하시어 가꾸어 가는 강의가 되기를 바라시는 권정안 소장님의 바람처럼 선생님들 모두 함께하는 자리였으면 좋겠습니다.
궁금하시거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홈페이지 추구란 해당강의 밑에 쪽지글에 남겨 주시면 소장님의 답변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추구 강의 시작에 붙여 소장님께서 홈페이지에 올리신 글의 일부입니다.

“추구는 전통적인 초등 교육의 한 교과로서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교육내용과 방법이 어떤 세계이해와 인간이해 사회이해를 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재입니다. 앞에 말씀 드린대로 원문과 해석 그리고 제 나름의 풀이를 전통적인 성독과 함께 바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추구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교육은 종합적인 학문의 성격이 강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통합교과적인 성격이겠지요. 그러므로 참가하시는 선생님들께서 각 부분에 대해 자신의 전공의 입장에서 좋은 내용을 첨가해주시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추구는 시이니 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관계된 시를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삶의 상처와 아픔

-시경 권이편

권정안 / 소장․공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 시는 삶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다. 사람이 가진 가장 큰 힘은 사랑이고, 이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만들어 간다. 그러나 우리 인간 모두의 현실적 삶의 과정에는 그 삶의 굽이굽이마다 숨어 있다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 상처를 만드는 갖가지 삶의 아픔들이 서려있다.

우리의 삶의 요구와 바램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인가? 우리의 삶의 조건이 너무 부족해서 그런 것인가?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힘인 사랑조차도 오히려 너무 작은 힘이라서 그런 것인가? 평범한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사회와 역사가 할퀸 것이라서 그런 것인가? 모든 인간이 존재적 숙명으로 짊어진 ‘無常의 가을 바람’이 스쳐 지나간 것이라서 그런 것인가?

삶의 상처와 아픔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이런 삶의 상처와 아픔들만큼 우리 인간을 우두커니 멈춰 서서 망연하게 만들고, 견딜 수 없는 조바심에 으르렁대게 만들고, 뼈저린 회한과 절망에 치를 떨게 만들고, 슬픔과 노여움과 원망으로 방황하게 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누가 이 인간이 걸머진 삶의 상처와 아픔이라는 짊과 그 짊을 지우는 갖가지 숙명의 그물에서 초연한 체 할 수 있을까?  


     采采卷耳             도꼬마리를 뜯고 뜯어도

     不盈傾筐             기울어진 광주리도 채우지 못하네

     嗟我懷人             오호라 내 마음 속의 그리운 사람

     寘彼周行             저 큰 길 가에다 광주리를 내던졌다네


     陟彼崔嵬             저 높은 산이라도 오르고 싶으나

     我馬虺隤             내 말이 비루가 먹었네

     我姑酌彼金罍         내 짐짓 저 금 술잔에 부어 마셔서

     維以不永懷           이 사무치는 그리움 잊어보려네


     陟彼高岡             저 높은 산마루라도 오르고 싶으나

     我馬玄黃             내 말이 비루먹어 색이 변했네

     我姑酌彼兕觥         내 짐짓 저 물소 술잔에 부어 마셔서

     維以不永傷           이 사무치는 아픔을 잊어보려네


     陟彼砠矣             저 돌 비탈 산이라도 오르고 싶으나

     我馬瘏矣             내 말이 지쳐 다리를 절고

     我僕痡矣             내 종도 발병이 났으니

     云何吁矣             어쩌면 좋을지 한탄할 뿐이네



離別의 상처와 아픔


우리의 삶에서 겪게되는 상처와 아픔은 갖가지이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가 갖고 누리는 모든 내외의 조건과 나아가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을 우선 멈추고 잊게 만드는 것이다. 그 모든 상처와 아픔 가운데 아마 가장 보편적이고 다양한 폭을 갖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이 시가 보여 주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아닐까?

1장은 그 이별의 아픔을 가진 여인의 노래, 아내의 노래이다. 사랑하는 남편과의 이별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2장 이후로 보면 남편은 아마도 전쟁터에 있는 것 같으니, 國防의 義務를 수행하러 떠난 것 같다. 그러나 남편이 功名을 세우러 자발적으로 나간 것이건, 아내가 출세의 기회라고 권해서 보낸 것이건,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경우이겠지만 사회가 의무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데려간 것이건, 그 모든 원인을 떠나서 지금 이 여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랑하는 남편이 그녀의 곁에 없다는 아픔인 것이다.

또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없다는 것이 어찌 이 한 가지 아픔만의 원인이겠는가? 가족의 생존을 위한 삶의 조건을 만드는 主役이었던 남편의 부재는 그대로 삶의 조건의 궁핍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남편이 하던 모든 역할까지 짊어져야 하는 아내의 고생은 가시밭길이었을 것이고, 홀로 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기르고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는 어느 한 가지인들 절름발이의 삶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삶의 아픔들 그 뿌리에는 사랑하는 남편의 부재와 그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도꼬마리는 큰길가에 흔하게 나는 풀. 어린잎은 나물로 쓰지만 평범한 음식거리이며, 열매는 약재와 기름을 짜는 용도가 있지만 가시가 있어 사람의 옷에 잘 달라붙고 잘 떨어지지 않아서 귀찮은 식물이다.

아내는 그 도꼬마리를 뜯고 또 뜯는다. 핑계는 나물을 뜯으러 나온 것이지만,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있다면 결코 이 평범한 도꼬마리 나물 뜯으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 맛있는 나물뿐이랴? 남편과의 즐거웠던 삶의 기억과 남편이 돌아온다면 함께 할 행복한 삶에 대한 다짐 속에서 아내는 다시 생각한다. 남편이 떠나갈 때, 할 수만 있었으면 이 귀찮은 도꼬마리 열매처럼 꼭 달라붙어 남편을 따라갔으면 좋았겠다고.

이런 갖가지 상념 속에 여전히 도꼬마리 나물을 뜯어보지만, 그리운 남편에게 가 있는 마음 때문에 밑이 얕은 기울어진 광주리도 채우지 못한다. 孔子는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 하였다. 어찌 ‘하루가 석 달 같고, 하루가 삼 년 같을 뿐(王風 采葛)’이겠는가? 진실로 매 순간은 ‘一刻如三秋’이면서, 동시에 시간은 그 헤어짐의 순간부터 멈춰버린 것을.  

상념에서 깨어나 그 아픔이 생생한 현실로 돌아온 아내는 그 광주리 큰 길 가에다 던져버린다. 돌아보면 별로 맛도 없는 흔하디 흔한 도꼬마리 뜯겠다고 큰길가로 나온 것부터 그렇다. 그 큰길은 사랑하는 남편이 떠나간 길이고, 그 그리운 사람이 돌아올 길이고, 그 그리운 사람에게 한 발이라도 가까운 곳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운 남편이 있을 그 큰길의 저쪽을 아내는 우두커니 멈춰 서서 바라본다.

그 아내의 눈길이 닿은 저쪽 끝 하늘 아래, 그 그리운 사람이 똑같이 그리운 사람을 향해 서서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그 시선이 만나는 곳, 아니 그 사랑하는 사람들의 거리를 넘어서서 그들의 사랑과 그들의 상처와 그들의 아픔은 하나이다. 이제부터 이 시가 남편의 그리움과 아픔을 노래한 것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그 아픔이 어찌 남편만의 것이거나 아내만의 것이겠는가? 1장의 아내의 아픔이 곧 남편의 아픔이고 2장 이후의 남편의 아픔이 곧 아내의 아픔이듯이,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갖가지 이별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朱子는 이 시를 ‘文王이 조회와 정벌에 나가 있을 때나 羑里에 구금되어 있을 때, 后妃가 지은 것이 아닐까?’ 하였는데, 과연 이 시가 문왕의 아내인 太姒가 지은 노래인지는 확인할 길 없고 또 내용으로 보아 여인 혼자의 노래는 않은 것 같지만, 이런 점을 제외한다면 주자도 역시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그 이별의 상처와 아픔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 고향을 떠나 낯선 戰場이나 他鄕을 떠돌거나, 심지어는 문왕이 羑里에 구금된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남편의 상처와 아픔이 어찌 아내에 대한 그리움 한 가지 뿐이겠는가? 그 현실의 갖가지 困苦와 挫折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움만 하더라도 어린 자식들이나 다른 가족과 이웃 친구들과 그들과 어울려 살아가던 추억들까지 그 모두가 그리움에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여전히 그 중심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것이다. 이 아내에 대한 남편의 그리움은 아내가 있는 고향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고자 높은 산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한다. 그러나 눈길로라도 아내가 있는 고향을 바라보고 싶은 남편의 현실은 더욱 가혹하다. 작은 틈이라도 내서 가까운 산마루에 오를 수만 있다면, 좀더 고향 쪽 가까운 곳을 볼 수 있을 텐데, 남편에게는 그런 여유마저 주어져 있지 않다.

내 말이 비루먹었다는 한탄은, 고향 쪽으로 가기는커녕 눈길이라도 멀리 보낼 수 있는 산마루에도 오를 여유와 방법이 없는 그 현실의 아픔과 탄식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아내와 만날 방법이 없는 현실의 아픔과, 그래서 아니 그럴수록 더욱 깊어 가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견뎌냄과 아픔의 심화


인간에게 요구가 있고 바램이 있되 그 내외의 조건이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바로 그 자리에 인간의 상처와 아픔이 있다. 中庸에 ‘천지의 큼으로도 오히려 사람은 유감이 있다.(天地之大也 人猶有所感)’ 하였으니, 이 요구와 조건의 괴리와 이로부터 생겨나는 인간의 상처와 아픔은 모든 현실적 실존 자체의 보편적인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괴리에서 오는 상처와 아픔에 해결 방법이 있고 탈출구가 있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 상처와 아픔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진정으로 문제는 바로 그 방법과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 속에도 그 힘이 확인되지 않고 외적인 상황에서도 그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그 한계상황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절망하게 한다.

이 ‘한계상황’과 ‘절름발이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대응은 바로 그 현실의 상처와 아픔이 우리를 힘들고 절망하게 하는 것을 우선 ‘견뎌냄’이다. 이 견뎌냄은 一見하면 너무나 소극적이어서 비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지만, 돌아보면 현실은 물론 인류의 전 역사적 생존을 지켜 온 뿌리의 힘이며 우리 인간 하나 하나의 삶에서도 그 나름의 소중한 가치들을 지켜온 뿌리의 힘이 아닌가?

실로 견뎌냄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살아있음’ 그 자체에 있는 뿌리의 힘이다. 그러므로 이 삶의 상처와 아픔은 우리 생명의 뿌리에 있는 ‘견뎌냄’이란 힘에 대한 도전이요 시험이다. 기독교의 성경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도리어 이런 시험 속에서 폭로되는 우리의 견뎌냄이란 힘과 그 힘의 원천인 우리의 전 생명이 얼마나 軟弱하고 有限한 것인가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며, 그 흔들리는 존재라는 자각 위에서 이어지는 두려움과 회한의 표현이 아닌가?

‘폭풍 속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숲속에서 어미 잃은 아기 새처럼’ 그 삶의 상처와 아픔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겨우겨우 견뎌내는 우리는, 때로 그 현실이 너무나 두렵고 그 견뎌냄이 너무나 힘들어 짐짓 현실에서 눈을 돌려버림과 망각과 도피를 꿈 군다. 술은 그 길을 함께 해준 인류의 오랜 동반자. 남편은 짐짓 한 잔의 술로 그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짐짓 잊은 체 하면서 호기를 부려본다.

사내 대장부가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보일 수 있나? 호기를 부려보지만, 그러면 술은 왜 마시는가? 矛盾이지? 그래 모순이다. 정직하게 말하면 이 한 잔의 술로 아내에 대한 이 처절하고 긴긴 그리움 잠시라도 잊어보려는 것이다. 남편의 독백은 계속되지만, 그러나 더 깊은 남편의 진실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그 그리움을 잊으려 기울이는 술잔보다 더 철철 흘러 넘치는 가슴속의 눈물을 멈출 수 없음이 아니겠는가? ‘사무치는 그리움’ 잊겠다고 말은 해보지만, 그 말은 도리어 절대로 잊지 못하겠다는 생명의 북받치는 울음과 비명 그 자체의 역설적 표현일 뿐이다.

이별의 아픔과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견뎌냄과 흔들림, 그리고 망각과 도피의 허망한 시도와 깊은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과 비명은 3장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아니 그 현실은 더욱 더 어려워지고, 그 방법은 더욱 더 궁색해진다. 언덕은 더욱 높아가고, 비루먹은 말은 털 색까지 변해서 누렇게 되고, 물소의 뿔로 만든 잔으로 술을 들이켜 보지만, 그리움은 점점 傷心으로 깊어간다.

古詩 ‘行行重行行’의 몇 구절은 모두 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다.


   

       行行重行行         가고 가고 또 가고 가니

       與君生離別         그대와 살아서 이별하였네

       相去萬餘里         서로 만여 리나 떨어져

       各在天一涯         제각기 하늘 끝 저쪽에 있네

       道路阻且長         길은 막히고 또 아득한데

       會面安可期         다시 만날 날 기약도 없네

       胡馬依北風         북쪽 오랑캐 말 북풍을 의지하고

       越鳥巢南枝         남쪽 월 나라 새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네

       相去日已遠         서로 헤어진 시간 나날이 길어가

       衣帶日已緩         옷과 허리 띠 나날이 헐렁해가네(후략)



남편이 그리워 큰길로 나온 아내나 아내가 그리워 산봉우리라도 올라 고향을 바라보려는 남편, 북쪽 고향이 그리워 북풍에라도 기대는 胡馬나 남쪽 고향이 그리워 남쪽 가지로만 집을 짓는 越鳥의 마음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 헤어짐의 시간이 길어갈수록 그리움이 상심으로 깊어 가는 남편의 마음은 몸이 점점 수척해져서 옷과 띠가 점점 헐렁해져 가는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怨望과 自責의 끝에서


그리움과 상심의 아픔과 상처를 견뎌내면서 터져 나오는 울음과 비명이 있는 그 누가 원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또 어느 누가 그런 원망에 대해서 섣부른 위로를 할 수 있으며, 하물며 함부로 비난할 수 있는가? 이 아픔과 상처를 공유하지 않은 사람의 비난이란 잔인함과 다른 말이 아니며, 공감 없는 섣부른 위로란 무책임한 자기 기만일 뿐인 것이다.

孔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不怨天 不尤人)’ 하였지만, 누가 이 아픔을 가진 사람이 남을 허물하고 하늘이라도 원망해보는 것을 시비할 수 있겠는가? 또 공자는 ‘슬퍼하되 상심하지 않는다.(哀而不傷)’고 하였지만, 누가 이 상심을 지나치고 잘못된 감정이니 절제하고 평정을 찾으라고 권할 수 있겠는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나서는 것은 대부분 오만한 헛소리일 뿐이다.

남편은 우선 그 원망의 대상을 저[彼] 산에서 찾는다. 저 산은 왜 그리 높은 것인지, 저 산은 왜 오를 수 없는 돌 비탈인지, 모두가 원망스러운 것이다. 그 아픔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누구도 대답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 높은 산’은 그의 아픔의 ‘저 쪽에 있는’ 모든 것의 상징이요, 당연히 원망의 대상이 된다. ‘남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한들’ 누가 그 원망이 대상을 잘못 골랐다고, 원망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가?   

그래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은 단지 스스로의 뼈저린 아픔 속에서 온갖 원망을 하고 또 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또 달래다가 나온 다짐일 뿐이다. 이 아픔과 상처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면 사라질까? 시대의 탓으로 돌리면 사라질까? 하늘에 돌리면 사라질까? 무엇에 원인을 돌려 원망해보아도 사라지지 않는 아픔과 상처를 스스로 보듬을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며 다짐이다. 그러나 ‘하늘도 원망하지 말자’ ‘다른 사람도 허물하지 말자’는 체념과 다짐은 체념과 다짐일 뿐, 이 아픔과 상처에서 솟구치는 원망과 상심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망과 상심이 忿怒로 이어지기 전에 문득 밖에 있는 저 수 많은 산을 향해 보내던 원망의 시선은 스스로에게 돌려진다. ‘왜 나는 이 상처와 아픔을 미리 예견하고 대비하지 못했는가?’ ‘ 내 삶의 어느 모서리에서 이 상처와 아픔의 원인을 내 스스로가 만든 것은 아닐까?’ ‘ 그래. 틀림없이 그 때 그 일 때문에 이런 상처와 아픔을 내가 받게 된 것이니, 누굴 원망할 수가 있나.’ 남편은 온갖 因果를 떠올리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반성하고 자책해본다.

삶의 상처와 아픔을 직면한 인간은 누구나 밖을 향한 원망과 자신을 향한 자책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그 상처와 아픔을 풀어낼 방법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원망할 것을 찾다가  찾다가 분노를 풀 대상을 찾지 못하면 하늘이라도 원망하게 되는 것이고, 자책을 하고 또 하다가 절망으로 자학에 이르기도 한다. 2장과 3장의 앞 두 구절은 이런 밖을 향한 원망과 자신을 향한 자책의 끊임없는 되풀이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지막 4장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저 산은 왜 하필이면 돌 비탈인가? 내 말은 왜 지쳐 다리를 저는가? 그러나 이 원망과 자책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보다 깊은 자책으로 이어진다. 왜 내 종은 하필 발병이 났는가? 그것은 밖에서 원망과 분노의 대상을 찾기 어렵거나 그 대상을 알아도 원망을 풀 길이 없는 상황에 대한 절망의 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후회와 반성과 자책의 심화가 절망과 체념의 끝을 넘어서 새로운 희망과 시작을 만드는 소중한 동력이 되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대부분의 현실은 언제나 자책보다는 밖을 향한 원망과 분노로 그 상처와 아픔을 풀려고 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아니 자책할 것에는 애써 눈을 돌리려고 하고, 원망의 대상을 찾는 것에는 너무나 총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孔子는 ‘자신에 대한 자책은 두텁게 하고, 남에 대한 책망은 조금 하는 것(躬自厚而薄責於人)’이 君子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허물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은 단순한 체념과 다짐만이 아니라, 이런 현실에 대한 통찰을 함께 담은 작은 목소리의 慰勞이자 自覺의 勸告이다.

이제는 더 이상 한 잔의 술이 아픔과 상처를 달래거나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 되지 못함을 직시한다. 잠시 그 순간만을 잊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자각하는 순간, 그 일시적인 방편은 무의미해지고, 눈은 잠시의 瞬間이 아닌 永遠을 겨누게 된다. 그러므로 4장에서는 2장과 3장에서 연이어 나온 한 잔의 술로 그리움과 상심을 잊으려는 가사는 더 이상 없다.  

그래도 이 시는 여전히 자책의 심화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탄식하는 구절로 끝을 맺고 있다. 아니 이 상처와 아픔은 그 자책과 탄식으로 끝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책을 하고 또 하면서 어쩔 줄 몰라 우두커니 서서 아내가 있는 고향을 바라보는 이 남편의 탄식을 누군가는 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답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그 탄식 속에서 분노를 읽고 두려워할 줄 아는 누군가가 그립다.

유학의 이상적 지도자로 불리는 文王은 그런 ‘그리운 지도자’였다. ‘백성을 상처 입은 사람처럼 보고(視民如傷)’ ‘어린 아기를 돌보듯이(如保赤子)’ 하였다. 백성들의 탄식과 분노 이전에 그들이 무엇을 아파하는가를 무엇을 바라는가를 알고, 그 아픔과 바람을 내 아픔과 바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진정한 지도자가 있었고, 그런 지도자가 참으로 그립다.

그러나 틀림없이 대부분의 이른바 지도자들은 단지 지배자였을 뿐이다. 이 남편과 같은 백성들의 아픔과 바람에 무관심하고, 그 탄식과 비명에 고개를 돌렸을 뿐 아니라, 그 상처와 아픔을 더 크게 만들고 그 탄식과 비명을 더욱 처절하게 만들고 그 분노를 노도처럼 키웠다. 그래서 나는 이 어리석고 추악한 지배자들은 물론 지도자도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이 각성은 ‘그리운 지도자에게서 희망을 찾아 새로운 시작을 하기’가 아닌 ‘스스로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시작하기’로 우리를 인도해간다. 그리고 이 轉換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 삶의 모든 상처와 아픔도 그리움과 안타까움도 원망과 자책도 울음과 비명도 좌절과 체념도 절망과 분노도 또 누군가의 비난과 위로도 할큄과 권고도 발뺌과 변명도 모두 그 새로운 희망 찾기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소중한 동력이 된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남편의 시선은 아내에 대한 짙은 사랑과 그리움 속에서 작은 불꽃을 크게 키우고 있다. 아내가 여기에 없어도, 아니 저기에도 없어도, 아내에 대한 사랑이 이 가슴 속에 있는 한 그 삶의 모든 상처와 아픔은 도리어 그 불꽃을 더욱 오래, 더욱 크게 피우는 동력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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