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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짱꿀라 > 詩쓰기 관련자료 - 다산 정약용

[1] 시의 두 가지 어려움

 

시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글자를 조탁하고 구절을 단련하는 것을 정밀하고 익숙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물을 체득하고 정감을 그려내는 미묘함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자연스러운 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고, 해맑으면서 여운이 있는 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다.  -〈범재집서(泛齋集序)〉 6-61

 

詩有二難. 非琢字鍊句之精熟之難, 非體物寫情之微妙之難. 唯自然一難也, 瀏然其有餘韻二難也.

 

좋은 시는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야무지고 찰진 것도 좋고,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지점을 붙들어 눈앞에 펼쳐내는 재주도 좋지만, 이것이 시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시 창작에서 정말 어려운 지점은 그저 무덤덤한 듯 평범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마음의 결을 따라 나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읽는 이의 마음을 환하게 하면서도 읽고 나면 길게 뒷맛이 남도록 쓰기가 가장 어렵다. 읽을 땐 그러려니 하다가 문득 가슴에 와닿는 순간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드는 것이 좋은 시다. 좋은 시는 작위하지 않는다. 누에가 뽕잎 먹고 실을 토해 고치를 만들 듯, 자연스레 뱉어내는 언어가 영롱한 보석으로 가서 박힌다. 그래서 부드러운 한 마디 말이 촌철살인의 비수가 된다.  

 

[2] 시의 마음

 

음악을 연주하는 자는 금속악기로 시작해서, 마칠 때는 소리를 올려 떨친다. 순수하게 나가다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마침내 화합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악장이 이루어진다. 하늘은 1년을 한 악장으로 삼는다. 처음에는 싹트고 번성하며 곱고도 어여뻐 온갖 꽃이 향기롭다. 마칠 때가 되면 곱게 물들이고 단장한 듯 색칠하여 붉은 색과 노란 색, 자줏빛과 초록빛을 띤다. 너울너울 어지러운 빛이 사람의 눈에 환하게 비친다. 그리고 나서는 거둬들여 이를 간직한다. 그 능함을 드러내고 그 묘함을 빛내려는 까닭이다. 만약 가을바람이 한 차례 불어오자 쓸쓸해져서 다시 떨쳐 펴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텅 비어 떨어진다면, 그래도 이것을 악장을 이루었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산에 산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매번 단풍철을 만나면 문득 술을 갖추고 시를 지으며 하루를 즐겼다. 진실로 또한 한 곡이 끝나는 연주에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올 가을은 농사가 큰 흉년이라 놀러갈 마음이 없었다. 다만 다산의 주인과 함께 백련사에 가는 것으로 예전의 예를 보존하였다. 두 집안의 자질들이 따라왔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각각 시를 한편씩 짓고 두루마리에다 썼다. 이때는 가경 14년(1809) 기사년 상강(霜降) 후 3일이다. -〈백련사에 노닐면서 단풍잎을 구경하고 지은 시의 서[游蓮社觀紅葉詩序]〉 6-95 

 

奏樂者始作金聲之, 及終上振之, 純如繹如翕如也. 於是乎章成. 天以一歲爲一章. 其始也, 妍豔, 百華芬郁. 及其終也, 染糚塗, 爲之朱黃紫綠, 洋洋之亂, 照耀人目而後, 收而藏之. 所以顯其能而光其妙也. 若使商一動, 蕭蕭然不復振發. 一朝廓然隕落, 其尙曰成章云乎哉. 余山居數年, 每遇紅樹之時, 輒具酒爲詩, 以歡一日. 誠亦有感於曲終之奏也. 今年秋, 農事大無, 無意游衍, 唯與茶山主人, 相携至白蓮之社, 以存舊例. 兩家子姪從焉, 酒旣行, 各爲詩一篇, 書諸卷. 時嘉慶十四年己巳霜降後三日.

 

한곡의 음악에도 시작이 있고, 절정이 있고, 대단원이 있다. 처음엔 느직이 해맑은 가락으로 시작해서, 중간에 호흡이 거칠어졌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여러 악기가 일제히 제 소리를 내며 밀고 당기는 드잡이질을 한다. 마침내 최고조에 달하여 듣는 숨이 가빠질 때면 슬며시 여운을 남기며 소리를 거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도 조물주가 내려준 4악장의 교향악이다. 꽁꽁 언 대지를 녹이며 꽃들이 피어난다. 세상은 경이로 가득차서 믿지 못할 눈앞의 기적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꽃 진 자리에 새잎이 나고, 연두색이 짙은 초록으로 변해가면서 사물이 자란다. 그 따가운 볕에 열매는 익어 고개를 숙인다. 단풍은 대지 위에 온통 알록달록한 비단을 펼쳐 놓았다. 어느 틈에 나무들은 두 팔을 높이 쳐들고 빈손으로 예배를 올린다. 다시 찬바람이 낙엽을 쓸어 간다. 정결한 대지 위엔 흰 눈이 덮여 편안한 안식의 자리를 마련한다. 시의 눈, 문학의 마음은 이런 대지의 노래, 조물주가 들려주는 악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감사와 찬미의 눈길로 고마움에 화답하고 그것을 노래하여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3] 시를 잘 쓰려면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본시 낮고 더럽고 보면 비록 억지로 맑고 높은 말을 하더라도 알맹이가 없게 된다. 뜻이 좁고 비루하면 비록 툭 터진 말을 한다고 해도 사정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시를 배우면서 그 뜻을 온축하지 않는 것은 거름흙에서 맑은 샘물을 긷고 고약한 가죽나무에서 기이한 향기를 구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죽을 때까지 하더라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하늘과 사람, 본성과 천명의 이치를 알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나뉨을 살펴 티끌과 찌꺼기를 깨끗이 닦아 그 맑고 참됨을 발현시키면 가능하다. -〈초의승 의순을 위해 준 말[爲草衣僧意洵贈言]〉 7-304

 

詩者言志也. 志本卑汚, 雖作淸高之言, 不成理致. 志本寡陋, 雖作曠達之言, 不切事情. 學詩而不稽其志, 猶瀝淸泉於糞壤, 求奇芬於臭樗, 畢世而不可得也. 然則奈何? 識天人性命之理,  察人心道心之分, 淨其塵滓, 發其淸眞, 斯可矣.

 

시론 책을 되풀이해 읽는다고 좋은 시를 쓸 수는 없다. 훌륭한 시를 줄줄 외워도 소용없다. 시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냥 가만 있으면 저절로 되는가? 턱도 없는 소리다. 뜻이 높아야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뜻이 넓어야 맞는 말을 할 수 있다. 뜻이 없으면 시도 없다. 시를 잘 쓰려면 뜻을 길러야 한다. 똥물을 걸러 샘물로 만들 수는 없다. 시가 안 써지거든 삶의 자리를 돌아보라. 마음에 덕지덕지 묻은 찌꺼기를 닦아내고 맑고 참된 지혜의 등불을 높이 내걸어라. 시는 그 다음의 일이다.    

 

 

- 다산 약용 어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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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짱꿀라 > 시를 어떻게 쓸까?

시를 어떻게 쓸까? 

- 이규보의 〈論詩中微旨略言〉

 

#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있는 정민교수의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올립니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의 깊은 뜻을 간추려 논함(論詩中微旨略言)〉은 시창작의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한 글이다. 800년 전 시인이 말한 시창작상의 여러 문제를 오늘에 비추어 읽어보면 어떻게 읽힐까? 따라 읽기 방식으로 이규보의 글을 음미해보기로 하자. 
 
[1] 대저 시는 뜻이 중심이 된다. 뜻을 펼치는 것이 더 어렵고, 말을 엮는 것은 그 다음이다. 뜻은 또 기(氣)가 중심이 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시가 깊어지기도 하고 얕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는 하늘에서 나온 것이어서 배워서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기가 저열한 자는 글을 꾸미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알고, 뜻을 앞세우는 법이 없다. 대개 그 글을 아로새기고, 그 구절을 꾸미면 어여쁘기는 하겠지만, 그 속에 함축하여 깊고 두터운 뜻이 없고 보면 처음엔 볼만해도 두 번만 읽으면 맛이 다하고 만다.
 
시의 출발은 뜻[意]에 있다. 어떻게 쓸까 보다 무엇을 쓸까가 먼저다. 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글이 다 그렇다. 생각이 정해지면 표현은 저절로 따라온다. 추상적인 생각의 덩어리가 작품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기(氣)다. 기는 마음 속에 쌓인 기운, 즉 생각을 펼쳐가는 힘이다. 무엇을 쓰겠다는 구상만으로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운을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했다. 좋은 시는 이런 기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머리 속의 생각만으로는 힘이 생기지 않는다. 생각을 끌고 나가는 힘은 기에서 나온다. 많은 독서와 여행의 체험이 이 기운을 길러 준다. 그런데 그 기는 인위적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일정 부분 타고난다.
 
기가 타고나는 것이라면 노력할 필요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기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노력 없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옛 시인들은 양기(養氣) 공부, 즉 기를 기르는 공부를 중시했다. 기는 어떻게 해야 길러지는가? 뜻이 충실하면 된다. 그래서 양기 공부를 위해 구방심(求放心)과 무자기(毋自欺)의 수양에 힘을 쏟았다. 마음이 제 멋대로 놀러 나가지 않도록 방심을 막고, 자기가 자기를 속이지 않는 공부를 계속하면 마음 속에 호연한 기상이 차곡차곡 쌓인다고 믿었다. 
 
시론 책을 열심히 읽고, 시창작 교실을 열심히 다닌다고 좋은 시인이 되는 법은 없다. 이론을 몰라도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가 부족한 사람은 기교로 제 부족한 부분을 덮어 가리려 한다. 뜻이 서지 않은 채 기교를 앞세우면, 처음엔 사람의 눈을 놀래키지만 금세 싫증이 난다. 한 두 번은 몰라도 두 번째 세 번째부터는 천박한 바탕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쥐어짜듯 쓰는 시는 시가 아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가 있고, 처음엔 그럴 듯 하다가 두 번만 읽으면 혐오감이 느껴지는 시가 있다.   
 
[2] 비록 그러나 스스로 먼저 운자를 정하되, 뜻에 방해가 될 것 같으면 고쳐도 상관없다.

다만 남의 시에 화답할 때는 만약 험한 운자가 있으면 먼저 운이 맞는 가를 따진 뒤에 뜻을 얹는다. 이때는 차라리 그 뜻을 뒤로 돌리더라도 운은 알맞게 놓지 않을 수 없다. 대구를 맞추기 어려운 구절은 한동안 생각해 보아 쉬 얻을 수 없을 것 같으면 즉시 떼어버려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옳다. 왜 그럴까? 그 시간이면 전편을 얻기에도 충분할 터이니, 어찌 한 구절 때문에 한편을 지체시키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한시의 창작은 운자를 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운자는 한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이다. 하지만 이 규칙도 펼치려는 뜻에 방해가 된다면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운자를 화답할 경우에는 운의 조화가 중요하므로, 뜻에 대한 배려를 조금 뒤로 할 수도 있다. 지훈이 〈완화삼〉에서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라고 하자, 목월이 〈나그네〉에서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로 받은 것이 그것이다.
 
한시는 구절과 구절 사이의 호응을 중시한다. 대개 먼저 떠오른 한 구절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1구부터 차례로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3,4구나 5,6구를 먼저 지은 후 앞뒤로 채워 나갈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한 구절에 집착하여 전편을 놓치는 것은 어리석다. 이점은 현대시도 마찬가지다. 문득 떠오른 한 구절은 시 창작의 계기를 마련해주지만, 그 첫 번째 느낌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좋지 않다.
 
[3] 시간에 맞추어 서두르면 시가 군색해진다.

처음 구상할 때 너무 깊이 들어가 헤어나지 못하면 빠지게 되고, 빠지면 얽매이게 되며, 얽매이면 헤매게 된다. 헤매다 보면 집착하게 되어 통하지 않게 된다. 다만 출입하고 왕래할 때 왼편으로 가고 오른편으로 가며, 앞을 보면서도 뒤를 돌아보아 변화가 자재로운 뒤에야 막히는 바 없이 원숙하게 된다. 혹 뒷 구절을 가지고 앞 구절의 잘못된 부분을 구하기도 하고, 한 글자로 한 구절의 타당함을 돕기도 하는 것이니, 이점을 생각지 않으면 안 된다.
 
서둘러 지은 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오래 붙들고 있는다고 좋아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너무 지나친 생각은 시를 엉겨붙게 만든다. 이것을 제재로, 혹은 이런 주제로 시를 지어야지 하고 작정하면 그 생각에 빠져 얽매이고, 탈출구를 찾아 헤매이다 보면, 이것이 집착이 되어 생각이 꽉 막힌다. 시는 쥐어짜는 것이 아니다. 설계 도면에 따라 제작할 수도 없다.
 
구절마다 모두 좋으려 들것도 없다. 어느 한 부분이 특출나게 뛰어나면 다른 부분이 혹 부족하더라도 괜찮다. 시에도 치고 빠지는 리듬이 있다. 강약중강약의 호흡이 있다. 뻣뻣하기만 하면 부러지고, 부드럽기만 하면 물러터진다. 어깨에 힘을 빼고 전후좌우 경쾌한 행보를 유지해야 한다. 시에서 진선진미(盡善盡美)는 전체의 조합에서 나오는 것이지 부분의 완결성에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4] 오로지 청고(淸苦)하려고만 하는 것은 산에 사는 중의 격식이다.

곱고 어여쁜 것으로만 꾸미는 것은 궁녀들의 격조다. 능히 청경(淸警)·웅호(雄豪)하면서도 연려(姸麗)·평담(平淡)할 수 있어야만 갖추어진 것이니, 이렇게 되면 남들이 한 체재로 이름지을 수가 없다.
 
고기를 먹지 않는 중처럼 맑은 소리만 한다고 좋은 시가 아니다. 궁녀의 하소연처럼 분단장 냄새가 나는 곱고 여린 것만으로도 안된다. 때로는 호방하고, 어떤 때는 섬세하고, 간혹 덤덤하게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다양해야 한다. 한 색으로 갇히면 그 시는 끝난다. 등단해서부터 늙어서까지 똑같은 목소리만 내고 있다면 그 시는 죽은 시다.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데 시만 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젊은 날의 명성을 뒤로 한 채 시 같지도 않은 시를 시라고 발표하는 시인은 보기에 차마 민망하다. 차라리 붓을 꺾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 소리가 그 소리인 끊임없는 자기 복제는 답보의 표징일 뿐이다. 

 시는 부단히 변하면서 늘 변치 않아야 한다. 나만의 색깔을 지니되, 그 색깔이 한결 같아서는 안된다. 늘 같으면서도 언제나 다른 그런 시, 남들이 뭐라고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시가 살아 있는 시다.
 
[5] 시에는 아홉가지 마땅치 않은 체(體)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얻은 것이다. 한 편 안에 옛 사람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은 `수레 가득 귀신을 실은 체`다. 옛 사람의 뜻을 취해오는 것은 도둑질을 잘해도 하기 힘든데, 도둑질 마저 시원찮을 때 이를 `못난 도둑이 쉽게 붙잡히는 체`라 한다. 어려운 운자를 쓰면서 근거가 없는 것, 이것은 `쇠뇌를 당기나 힘을 이기지 못하는 체`이다. 그 재능을 헤아리지 않고 운자를 씀이 지나치게 되면 이는 `주량보다 넘치게 술을 마신 체`이다. 험벽한 글자 쓰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쉬 현혹시키는 것, 이것은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체`이다. 말이 순하지 않은데도 굳이 인용하는 것은 `남더러 억지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체`다. 일상어를 많이 쓰는 것은 `시골 사람이 모여 얘기하는 체`이고, 꺼리는 말을 잘 범하는 것은 `높고 귀한 분을 능욕하는 체`이다. 말이 황당한데도 깎아내지 않으면 `잡초가 밭에 가득한 체`이다. 이런 마땅치 않은 체를 면한 뒤라야 더불어 시를 말할 수가 있다.  
 
앞선 시인의 구절을 슬쩍 끌어다 쓰거나, 감당치도 못하면서 근거없는 큰 소리를 쳐대는 것, 그럴듯한 표현으로 남의 이목을 현혹하고, 아닌 말로 억지를 부리는 것, 되는대로 떠들고 황당한 말을 해대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시의 적이다. 한유는 사필기출(詞必己出)이라고 했다. 반드시 자기의 목소리를 내라는 뜻이다. 또 진언지무거(陳言之務去)를 강조했다. 남이 이미 많이 써서 진부해진 말을 제거하기에 힘쓰란 것이다. 두보는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 즉 말이 사람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만 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말마다 신기한 말을 쓰고 작품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내용을 담으란 말은 아니다.
 
대개 시의 병통은 알맹이 없이 폼만으로 어찌 해 보려 할 때 생겨난다. 이들은 암호문과 상징 은유를 구분하지 못하며, 설교와 주제의식을 혼동한다. 누구도 모를 소리를 하면서 독자의 낮은 수준을 개탄한다. 답답한 나머지 자기 시를 자기가 해설한다. 안쓰러운 풍경이다. 구덩이를 파놓고 어리숙한 독자를 인도하는 시, 알량한 권위를 내세워 억지로 남을 따르게 하는 시, 감당도 못하면서 주제만 고상한 시, 슬쩍슬쩍 베껴와 짜깁기한 시는 지금도 너무 많다. 그 중에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인간과 시가 따로 노는 시다.  
 
[6] 남이 내 시의 병통을 말하면 기뻐할 만한 점이 있다.

말한 것이 옳으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내 뜻을 따를 뿐이다. 어찌 반드시 듣기 싫어하기를 마치 임금이 간언을 거부하여 끝내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겠는가? 무릇 시가 완성되면 되풀이 해서 살피기를, 대략 자기가 짓지 않은 것처럼 살펴 보고, 마치 다른 사람이나 평소에 몹시 싫어하는 자의 시를 보듯하여 그 흠집을 즐겨 찾되, 오히려 흠을 알지 못하게 된 뒤에야 발표할 일이다. 대저 논한 바는 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문장 또한 비슷하다. 하물며 고시는 문구가 아름답고 압운이 끊긴 것 같은 것을 좋게 여긴다. 뜻이 아름답고 여유롭고 말 또한 자재로워야 얽매이지 않게 되니, 그렇다면 시나 문장은 또한 한 가지 법도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내 시를 두고 나쁘게 말하면 발끈한다. 칭찬하면 실상보다 지나쳐도 흐믓하기만 하다. 남의 지적을 들으면 우선 기뻐할 일이다. 그 말을 들어 옳게 여겨지면 따르면 그뿐이다. 수긍할 수 없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하면 된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들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선에 빠지고 만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되면 작심하고 흠집을 찾아내서 과감히 고칠 줄도 알아야 한다. 꼴보기 싫은 사람의 시를 흠잡는 기분으로 자기 시를 냉정하게 비판하라. 그 다음에야 비로소 발표한다. 이것은 비단 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산문도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사람 사는 일도 한 가지다. 남의 허물은 잘도 잡으면서, 자기의 허물은 슬쩍 눈감아 버린다. 남의 칭찬에는 그리도 인색하면서, 누가 제 칭찬이라도 하면 금방 입이 벌어진다.
 
정지용은 〈시와 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꾀꼬리 종달새는 노상 우는 것이 아니고 우는 나달보다 울지 않는 달 수가 더 길다." 또 이렇게 말했다. "시가 시로서 온전히 제자리가 돌아빠지는 것은 차라리 꽃이 봉오리를 머금듯 꾀꼬리 목청이 제철에 트이듯 아기가 열 달을 차서 태반을 돌아 탄생하듯 하는 것이다." 되는대로 떠드는 것은 시가 아니다. 읽어 모를 시는 시가 아니다. 풍경이 떠오르지 않고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잠자던 정신이 화들짝 돌아오고, 늘상 보던 사물인데 처음 보는 듯하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나 말고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시가 시다. 살아있는 진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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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6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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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도(流民圖)와 다산의 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는 마음이 없이 쓰는 시는 시가 아니다”(不傷時憤俗非詩也)라고 했던 다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없이 지은 시는 시가 아니다”(不愛君憂國非詩也)라고 했던 다산, 그래서 ‘음풍영월(吟風詠月)’이나 ‘담기설주(譚棋說酒)’하는, 즉 바람이나 달을 읊고 장기나 바둑을 두며 술이나 마시는 이야기를 시로 읊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던 것이 다산의 시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젊은 시절 다산은 경기도 몇 개 고을을 염찰(廉察)하는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참담한 농민들의 실태를 읊은 눈물겨운 시를 지은 바 있습니다. 「적성촌 마을에서 읊은 노래」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 “멀리 정협(鄭俠)의 유민도(流民圖)를 본받아다가, 새로 시 한 편 지어 임금께 바쳐볼까”(遠摹鄭俠流民圖 聊寫新詩歸紫
)라고 하여, ‘유민도’를 거론했던 적이 있습니다.

유민도란 송(宋)나라 때의 훌륭한 벼슬아치인 정협이 백성들의 고달파하는 참상을 보다 못 견디고, 그들의 떠도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임금께 바치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큰 가뭄까지 겹쳐 비참한 농민들이 유리걸식하던 때에 백성들의 소원이 풀리 듯 가뭄에 단비가 내렸고, 임금도 백성들의 참상을 실감하여 신법을 폐지하여 백성들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뒤 다산은 ‘굶주리는 백성의 노래’라는 ‘기민시(飢民詩)’를 지어 시를 읽은 사람이라면 백성들의 굶주리는 모습에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여는데, 그 시를 읽는 평자(評者)가 “이 시야말로 바로 유민도로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산은 언제나 시를 지으면서 마음속에 ‘유민도’를 상상하며 지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참담한 백성들의 실상을 그림으로 그리듯 핍진하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적 수법을 시를 짓는데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요즘 반FTA를 위한 농민들의 투쟁을 TV에서 보며 ‘저게 바로 유민도로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다산이 살아계시면 어떤 시를 지었을까도 생각해보고, 요즘 시인들은 왜 유민도 같은 시를 짓지 않는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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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호 (2006.10.18)


판타지를 즐긴 실학자

 

심 경 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연암 박지원은 시를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영대정잡영(映帶亭雜詠)」에 「수산해도가(搜山海圖歌)」라는 기이한 제목의 장편시를 남겼다. 박지원은 언젠가 큰 형 박희원(朴喜源, 1722-1787), 종제 박수원(朴綏源, 1738-1811) 및 이덕무와 현원(玄園)이란 동산에 노닐면서 거대한 크기의 <수산해도(樹山海圖)>를 펼쳐 놓고 감상하였다고 한다. 시의 서문은 이렇다.

“여름날 형님을 모시고 종제 이중(履仲, 綏源)과 함께 덕보 무관(이덕무)과 약속하고는 현원에 노닐었는데, 각각 명품[翫]을 하나씩 내놓고 비교하기로 하였다. 이 그림 축의 길이는 거의 화살의 비거리 만하였다. 동산에 펼쳐두고는 여러 사람들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구경하였다(夏日奉伯氏及從弟履仲, 約德保懋官, 遊玄園, 各出一翫, 以較之. 此軸延 , 幾竟一帿地. 張之園中, 群行而翫之).” 원문에 완(翫)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곧 오늘날로 말하면 명품이다. 다만 오늘날 말하는 허세 부리기 위한 사치품이 아니라 고동서화(古董書畵)였을 듯하다.

연암 무관 등, 모여서 명품을 감상하다

박지원이 감상한 <수산해도>는 이랑신(二郞神)의 요괴퇴치 전설을 모태로 설화 및 소설의 세계를 끌어들여 갖가지 형상을 그리는 <수산도(搜山圖)> 계보의 그림이던 것 같다.

이랑신은 관구이랑(灌口二郞)이라고도 하며 중국 민간에 전하는 치수의 신이다. 그 출신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진(秦)나라 촉군태수 이빙(李氷)의 둘째아들로 부친의 치수사업을 도와서 성도 남쪽에 흐르는 민강(岷江)의 교룡을 참하였다고도 하고, 수(隋)나라 가
주태수 조욱(趙昱)이 교룡을 참하여 우환을 제거한 뒤 신령이 된 것이고도 한다. 『서유기』와 『봉신연의』에는 옥황상제의 여동생이 하계에 내려가 양씨 성을 가진 남자에게 시집가서 낳은 아들이 여섯 괴물을 죽이고 도산(桃山)을 쪼개는 신통력을 지녀 그를 관구이랑이라 하였다고 한다. 혹은 불교에서는 사대천왕 가운데 하나인 북방의 다문천왕에게 속해 있던 비사문의 아들 독건(獨健)을 가리키며, 천병을 이끌고 당나라 명황을 구해준 공이 있다고 한다.

박지원이 본 그림은 <수산도> 계보를 이은 것에 틀림없지만 <수산해도>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회화는 아직 본 일이 없다. 박지원은 그 그림을 왕적(王迪)이란 사람이 그렸다고 하였다. 그림의 일부는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한 아내는 화살에 뻗은 두 팔이 꿰여 있고,                    一妻箭中兩臂伸
  한 아내는 매가 채 가는데 오른쪽 눈썹이 기울어 있다.    一妻鷹攫右眉
  한 아내는 아이를 안고 트레머리를 붙잡고 도망가는데,   一妻抱兒奉
  아이가 여전히 젖을 빨고 있자 아이를 꾸짖는다.            兒猶 乳嗔其兒

박지원과 이덕무가 길게 뻗은 그림을 이러 저리 다니면서 감상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들은 일상을 벗어난 신비의 세계로 몰입하여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 여름 더위라도 식힐 겸해서 판타지나 에스에프 영화를 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박지원은 이렇게 판타지를 즐길 줄 알았기 때문에 열하에서 환희(幻戱)를 감상하고 또 『열하일기』에 환희의 공연목록을 적어둘 수 있었던 것이다.

진실한 ‘탐구의 학’, 정신적 여유 있어야 가능

실학이라고 하면 어린 학생들도 금방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를 손꼽는다. 이런 개념들이 정착되기까지 여러 선배 학자들이 정말 많은 연구를 해오셨다. 최근 실학의 기원에 관해 그 근대주의론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으나, 실학의 근본 개념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실학에 대해 지나치게 경직된 ‘방어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학자들이 직접,
간접으로 현실에 참여할 것을 표방하고 실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목석같이 고정관념으로 사회참여를 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실학자들은 권력화된 학문과 일체의 거짓 학문에 대해 비판하면서 진실한 ‘탐구의 학’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탐구의 학은 정신의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정신적 여유가 판타지의 감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은가?

박지원은 그림을 본 뒤로 잔상이 사라지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나도 집에 돌아왔으나 눈앞에 삼삼하여, 밤에도 잠 못 이루고 생각이 그것에 머물렀다(我亦歸家眼森森, 宵不成寐念在玆).” 아니, 이쯤이면 실학의 대가 박지원을 ‘폐인’클럽에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한얼미디어, 2006
          『한시의 세계』, 문학동네, 2006 등 다수
· 역서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태학사, 2001

           『중국 고전시, 계보의 시학』, 이회문화사, 2005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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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12-27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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