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매서운 동장군이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입춘절이 되면 이제 곧 봄이 온다는 희망에 부풀게 됩니다

시각에 맞추어 붙이라고  고향의 어르신이 입춘첩을 보내주십니다.   대들보에 붙이는 무자년에는 만사가 뜻같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문이지요

한학에 조예가 깊지는 못하시지만, 어렸을 때  외삼촌한테 배웠다고 하십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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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게 길하다 하니 안붙일 이유도 없건마는   도시의 아이들은  부적 취급을 하는군요

건양다경, 건양은 조선시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첫 연호가 建陽이었다 하니 제국을 축복하기도 하고, 입춘의 따스한 볕이라는 의미도 겸하였으니.....경사로운 일이 많았으면  기원하는 의미니  좀 좋아요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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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을 쓰는 것이 빠지지 않는데, 요즘은 마당을 쓸일도 없고 .... 땅을 쓰니 황금이 나온다. 황금이 금덩어리만 의미하는 것 같지않고,  알곡식도 의미하고, 귀한 인재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대문을 여니 만복이 들어 오도다

 

<자모전성 불한빈>   <군신약재 광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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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모전(새끼치는 돈)을 이루니 빈한의 걱정은 없을 것이고

君臣藥(군약은 主效藥이고 신약은 군약을 補助하여 약효를 강화시킴)이 있으니 어떤 병이 설치겠는가

 

희망에 찬 기원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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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사 2009-02-04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입춘대길 글자들 담아갑니다 ^^
 

 







































 



 

 





 

음지에는 아직 눈이 쌓여있는데 할매들은 벌써 눈 녹은 밭에 엎드려 맨손으로 냉이를 캐고 계십니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입춘입니다.

 








 

 

 

 

 

 



 

 

 

 

 

 

 

 

 

 

 

 

 

 

 

 

 

 

 

 

 

 

 

 

 

 

 

 

 

 

 

 

<함께하는 우리 >

 








아직은 농한기이지만 입춘은 농사의 절기에서 퍽 중요한 때입니다. 겨우내 모아 두었던 거름과 퇴비를

논밭에 내고 비닐을 걷고 밭을 돌보고 농사계획을 세우고 살아 온 경험과 지혜로 한해동안 살아 갈 일을 

계획합니다.

 

항간에서는 일 년의 시작을 동지로 볼 것이냐 입춘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있기도 

하지만  자연의 변화를 잘 들여다보면  답을 얻기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혹, 지난번 동지에 보내드린 지뢰복의 쾌상을 기억하시는지요.  

하나의 양의 기운이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을 (一陽始生)  동지라 하면





 


입춘은 하나의 양이 두개의 음 아래 중첩하여 있는 쾌상입니다.

양들이 모두 음의 기운 아래 눌리어 있는 상이지요.

 



 

그래서 실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우레 소리만 크고 실익이 없다 하기도 하지만 이 시기는 동지와는 달리

천지의 기운이  하나의 양에 합하고 있어 아버지의 근본을 계승하고 어머니의 태속에 자리 잡아 만물을 발생

시키는 조짐의 기초를 세운다고 하였으며 천지로 더불어 덕이 합하고 변화를 따라 변하는 때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기다리는 봄보다  더 아름다운 계절들을 기다림하며 절기표를 올려봅니다.

 



계 절

절 기

특 징
음 력



  입춘(立春)
  우수(雨水)
  봄의 문턱
  봄비가 내림

정월
  경칩(驚蟄)
  춘분(春分)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깸
  낮이 길어지기 시작함

이월
  청명(淸明)
  곡우(穀雨)
  봄 농사의 준비
  농삿비가 내림

삼월

여름

  입하(立夏)
  소만(小滿)
  여름의 문턱
  본격적인 농사의 시작

사월
  망종(芒種)
  하지(夏至)
  씨뿌리기
  낮이 연중 가장 긺

오월
  소서(小署)
  대서(大暑)
  여름 더위 한 차례
  여름 큰 더위

유월

가을

  입추(立秋)
  처서(處暑)
  가을의 문턱
  더위가 가샘

칠월
  백로(白露)
  추분(秋分)
  맑은 이슬이 내림
  밤이 길어지기 시작함

팔월
  한로(寒露)
  상강(霜降)
  찬 이슬이 내리기 시작함
  서리가 내리기 시작함

구월

겨울

  입동(立冬)
  소설(小雪)
  겨울의 문턱
  겨울 강설한 차례

시월
  대설(大雪)
  동지(冬至)
  겨울 큰 눈이 옴
  밤이 연중 가장 긺

동지
  소한(小寒)
  대한(大寒)
  겨울 추위 한 차례
  겨울 큰 추위

섣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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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용옥.임진권]

 

예부터 회록지재(回祿之災)라는 말이 있다. “받은 녹(祿)을 되돌리는 재난”이라는 뜻인데, 재난 중에 최악의 재난이라 하겠다. 천지자연으로부터 받은 녹을 천지자연으로 되돌리는 재난이니 문명을 향유하려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재난일 수밖에 없다. 도둑맞은 물건은 어딘가 뒹굴고 있어 되찾을 수도 있다. 회록지재란 예부터 화재(火災)를 일컫는 아언(雅言)이었다.



 


어젯밤 TV 뉴스 속보를 볼 때만 해도 연기만 뿌옇게 올라온다 했고, 그다지 큰 불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다리차를 탄 소방관들이 물을 뿜어대고 있어 그슬리는 차원에서 끝나버리면 그래도 상량(上樑)의 묵서(墨書)라도 보존되어 복원의 명분이라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국보 1호 숭례문 전소.”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었다.

11일 아침 나는 숭례문으로 달려가 보았다. 너무도 참담한 모습이었다. 불세출의 서성(書聖),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도 과천에서 내왕할 때면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우뚝 선 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현판 글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에겐 그것이 일차적 관심이었다. 현판이라도 우선 떼어냈어야 했거늘… 쳐다보니 현판이 보이지 않아 우선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탐문해 보니 그것조차 떼어내는 과정에서 떨어뜨려 손상이 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개판이다.

국보 1호라는 하중감 때문에 소방관들의 대처가 본격적이지 못했고, 또 문화재청의 안일한 상황 판단이 결국 전소라는 수치스러운 참사를 지어낸 것이다. 국민들이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진화 장비를 완벽하게 갖춘 50여 대의 소방차가 출동해 있으면서도 그냥 훨훨 태워버린 것이다. 오호라!

“기분이 나빠요.” 친구에게 전화 거는 어느 어린 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 기분이 나쁜가?

나를 쳐다보더니 재빨리 휴대전화를 접고 정중하게 답변한다.

“어찌 되었든 국보 1호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꼴로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모습이 뭔가 불길한 국운을 상징한다는 느낌도 들어요. 국민 누구든 가슴이 아플 거예요. 아니, 부끄럽겠죠.” 중앙대학교 약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란다. 이름은 신동호.

―국운? 좀 거창한 얘기지만 일리가 있군.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진 꼴이 노무현 정권의 마지막 모습일까, 이명박 정권의 시작하는 모습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덮어씌우겠죠.”

젊은이들의 지나치는 이 한마디가 오늘날 우리나라 세태의 전부를 말해준다.

“부끄럽다”는 그 한마디에 더 첨삭할 언어가 어디 있겠느뇨?

맹자의 혁명사상을 접한 신진유생 삼봉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고루한 친원파들과 대결, 나주 소재동 등지로 귀양을 다니면서도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와 결탁해 혁명을 모의하고 결국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다. 1392년 7월 17일 신왕조를 개창하고 태조 3년(1394) 10월 25일에는 한양 천도를 감행한다. 개성의 지세가 쇠하였다고는 하나 개성 문벌 귀족의 틈바구니 속에서는 도저히 새로운 국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궁궐을 조성할 때도 하륜(河崙)은 무악을 주산으로 삼자 했고, 무학대사는 인왕을 주산으로 삼자 했지만, 오늘날의 백악현무(白岳玄武), 인왕백호(仁王白虎), 낙산청룡(駱山靑龍)의 모습으로 궁궐과 도성의 모습을 결정한 것은 삼봉 정도전이었다. 삼봉이 꿈꾼 것은 불교라는 고려의 낡은 이데올로기를 불식할 수 있는 새로운 유교이념! 그 유교이념을 형이상학으로서가 아니라 형이하학으로서 도시에 구현하고자 했다.

태조 4년(1395) 삼봉은 새 궁궐의 전각 이름을 지었고, 5년에는 도성 8대문의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과 『서경』에서 그 아름다운 뜻을 취하였다. 특히 4대문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오행(五行)에 배정시켜 그 이름을 결정하였다. 인(仁)은 동방(東方)이므로 동대문에 배속되고, 의(義)는 서방(西方)이므로 서대문에 배속되고, 예(禮)는 남방(南方)이므로 남대문에 배속되고, 지(智)는 북방(北方)이므로 북대문에 배속된다. 이렇게 해서 동대문의 이름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되고,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 되고, 북대문은 소지문(炤智門)이 되었다. 그리고 오행 중 중앙에 해당하는 신(信)은 종로 중앙의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중 유독 동대문만 갈 지(之) 자가 들어갔는데 그것은 그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낮고 지세가 꺼져 있어 땅 기운을 돋우어 주자는 의도로 갈 지를 더하여 넉 자 현액을 걸어주었다 한다. 그런데 숭례문 현액이 특이한 점은 타 현액이 모두 횡으로 쓰여 있는데, 이 숭례문 현액만 위에서 아래로 써 있는 종액(縱額)이라는 것이다. 일설에는 서울 도성의 정문인 남대문은 귀한 백성이 드나들게 되므로 서서 맞이함이 예절에 합당하다 하여 세워 달았다 한다. 타설에는 남방 화(火)에 해당되는 글씨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세워 달았는데, 그것은 한강 건너 남쪽 조산(朝山)인 관악산의 불길을 불로 막아, 그 관악의 화기가 서울 도성을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숭례문은 자신이 불길에 휩싸임이 없이 기적적으로, 600여 년의 성상을 견디었다. 서울에 남아 있는 건물로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화려한 다포(多包)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목조였다. 나머지는 모두 임란 이후에 재건된 것이다.

1962년 남대문을 중수(重修)할 때 3개의 대들보가 발견되어 그 정확한 건축연도를 알 수 있는데, 남대문은 도성의 제2차 공사를 완료한 후 12일 뒤인 태조 5년 10월 6일에 상량하고, 그 2년 후인 1398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남대문 자체가 도성의 연속된 성로(城路) 위에 지은 것인데 이 도성을 짓기 위하여 지반을 돋울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가라앉으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세종조에 영의정 황희(黃喜) 이하 여러 대신이 건의하여 근본적으로 남대문을 신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세종 30년(1448) 3월 17일 상량하였고 5월에 준공하였다. 그 뒤 성종 10년(1478)에 한 번 더 개축한 사실이 대들보로 확인된다.

남대문은 이상하게도 임진왜란 때도, 병자호란 때도 화를 면했다. 경복궁이 임란으로 송두리째 잿더미로 화하여 대원군이 재건하기까지 273년 동안을 인왕산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공궐(空闕)로 남아 있었던 사실에 비한다면 숭례문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흥망성쇠를 기억하고 있는 혼이요 얼굴이었다. 지금 우리는 서울이 다 터져 있어 도성팔문의 의미를 망각했지만, 과거에는 저녁 10시경 인정(人定)에 8문을 다 닫고 새벽 4시경 파루(罷漏)에 일제히 여는 통금 제도가 정확히 유지된 성곽 도시, 한성(漢城)이었기 때문에 남대문의 의미는 막중한 것이었다. 여기를 통과치 않고서는 한성 진입이 불가능했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한 후, 1906년 황태자(훗날 大正天皇)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남대문을 통해 들어올 수 없다고 강짜를 부리며 남대문을 대포로 분쇄해 버리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민중의 여론이 들끓자 그들은 융희 원년(1907) 남대문에 연결된 북쪽 성벽을 헐어 길을 내었고 이듬해에 남쪽으로 연결된 성벽을 헐어 달랑 남대문만 남겨놓았던 것이다.

왜놈들이 헤이그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을 때도 우리 민족은 이 남대문 주변으로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일본군은 남대문 성벽에 대포와 기관총을 설치하고 마구 쏘아댔다. 상인, 노동자, 남녀 학생, 부녀자들까지 용감무쌍하게 항전을 계속했으나 결국 피를 흘리며 압제의 굴레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통에도 광화문은 무참히 파손되었지만 남대문만은 그 원형이 훼손되지 않았다. 억센 운명을 타고난 우리 민족의 600년 유물, 국보 1호, 그 숭례문이 덧없이 하룻밤 사이의 회록지재로 사라진 것이다.

웬 일일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방화를 의심하거나 문화재 관리소홀을 탓하여 부질없는 경비 예산이나 늘리는 호들갑일랑 이제 되풀이하지 말자! 근원적으로 문제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죄악의 반성이요, 우리 사회의 신뢰의 부족이요, 이 민족 혼백의 타락이다.

세종대왕은 이 민족의 구원한 미래를 위해 우리 민족의 독창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2년 후에 남대문을 신축하여 오가는 백성들에게 위용과 믿음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 새 정권은 기껏 생각한다 하는 것이 “영어몰입교육”이요, 회록지재보다 더 무서운 재앙인 대운하 강행에 혈안이 되고 있다. 정부 기구 통폐합 운운도 어떤 합리적 원칙이나 철학이 엿보이지 않는다. 대선 전의 민생 공약은 실종되어만 가고 있다. 과연 남대문의 무너진 흉측한 모습을 과연 우발적 사건으로만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떠나가는 그 젊은이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여보게! 부끄러워 말게. 문화재는 이제 자네 머릿속에서 솟아나와야 할 것이 아닌가? 자네들이 컸을 때 삼봉이 구상한 코스모스보다 더 위대한 작품들로 이 땅을 수놓기 바라네.”

5시간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해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까지 걸린 시간. 불은 10일 오후 8시40~50분쯤 났다. 10일 자정쯤 건물 천장에서 화염이 치솟았고, 11일 오전 1시쯤 2층 누각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불이 난 지 5시간 뒤인 오전 1시50분부터 석반을 제외한 2층 누각 전체와 1층 누각 대부분이 무너졌다.

글=도올 김용옥 기자,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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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2-1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포...는 나무로 된 포가 많아서... 불나면 절단이죠. 이번에도 그곳에 불이 붙은 걸 끄지 못해 난리가 난 거구요.
저걸 국민의 성금을 다시 모아서 새로 만들어 짝퉁으로 세워둘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쩍팔려서...
그래도... 불타고 난 남대문 열심히 지키고 섰네요... 외양간 고치기도 유만부동이지...ㅠㅜ

해콩 2008-02-13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에 발끈.. 저는 성금 안 낼거예요. 흥흥..
평소에 외양간 잘 지키는 일엔 소홀하면서 뭔 문제만 터지만 '성금'운운하니...
 

여성과 빈민은 같은 처지다



시대의 모순에 맞서 싸운 저항시인 허난설헌

▣ 이덕일 역사평론가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은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1931)에서 허난설헌이 ‘소천지(小天地·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세 가지 한으로 여겼다고 적었다. 그러나 허난설헌은 조선의 다른 여성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동인 영수 허엽(許曄)의 딸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주들도 진서(眞書·한문)를 배우지 못하던 시대에 그는 둘째오빠 허봉의 배려로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한시(漢詩)를 배울 수 있었다.



△  허난설헌의 시비와 무덤. 그는 모순된 조선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다.(사진/ 권태균)


8살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을 지을 정도였던 여동생의 영특함을 높이 산 조치였다. 허난설헌은 이달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 모순에 눈뜨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백광홍(白光弘)·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평가될 정도로 당시(唐詩)에 능했던 이달은 서얼이란 이유로 등용되지 못했다. 문(文)의 나라 조선에서 뛰어난 문재(文才)임에도 서얼이란 이유로 천대받는 이달을 보면서 허난설헌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떴다. 허난설헌이 최경창과 백광홍을 예로 들면서 “낮은 벼슬아치 녹 먹기 어렵고/ 변군(邊郡)의 벼슬살이 근심 많아라/ 나이 들어 벼슬길 영락하니/ 시인이 궁핍하다는 말 이제야 알겠네”(‘견흥’(遣興)) 라고 노래했다. 서얼이 아니었던 최경창·백광홍의 궁핍에 대한 노래는 역으로 서얼 출신 이달의 궁핍 정도를 짐작게 한다.

남편 없는 집에서 외로움에 떨다

이달을 통해 사회 모순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허난설헌은 열여섯 무렵 혼인하면서 사회 모순에 직접 발을 디디게 된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과거에 거듭 낙방했다. 허난설헌은 ‘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寄其夫江含讀書)에서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라고 노래하고, ‘연꽃을 따며’(采蓮曲)에서는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 행여 누가 봤을까 반나절 얼굴 붉혔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훗날 이수광(李?光)이 <지봉유설>에서 “이 두 작품은 그 뜻이 음탕한 데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고 평할 정도로 아내의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던 사회였다. 허난설헌은 사부곡까지 음탕으로 몰던 조선 남성들의 처신을 조롱했다.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 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탄 그 꼴/ 아침부터 양양주에 취하고 나선/ 황금 채찍 휘둘러 대제(大堤·중국 호북성 양양(襄陽) 남쪽에 있던 색주가)에 다다랐네./ 아이들은 그 모습에 손뼉 치고 비웃으며/ 다투어 백동제(白銅?·악곡 이름)를 불렀다네.”(‘색주가를 노래함’(大堤曲))
과거에 거듭 낙방하고 난설헌과도 사이가 서먹해진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이 ‘술집의 노래’(靑樓曲)에서 “길가에는 술집 10만이 늘어서 있고/ 집집마다 문밖에는 칠향거(七香車·향목으로 만든 수레)가 멈춰 있네”라고 노래한 것은 색주가나 드나들던 남편 같은 인물들에 대한 풍자였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혼인생활만이 아니었다. 18살 때(1580) 아버지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한데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으며, 게다가 스물한 살 때인 선조 16년(1583)에는 가장 의지하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허봉은 이듬해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한 채 선조 21년(1588) 38살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역시 객사했다.
남편 없는 집에서 허난설헌은 외로움에 떨었다. “시름 많은 여인 홀로 잠 못 이루니/ 먼동 틀 때면 비단 수건에 눈물 자국 많으리”(‘사계를 노래함’(四時詞))라는 노래나 “비단 띠 비단 치마 눈물 흔적 쌓인 것은/ 임 그리며 1년 방초 한탄함이로다(‘규방의 한’(閨怨))”라는 노래는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난설헌은 이 불행이 남성에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한정’(恨情)에서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 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라고 노래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 남성들에 대한 실망은 진정한 남성상에 대한 희구로 나타났다.
“선봉대 나팔 불어 진영문을 나서는데/ 붉은 깃발은 얼어붙어 날리지 않네/ 구름은 캄캄한데 서쪽 신호불이 반짝이고/ 밤 깊은데 기병은 평원을 사냥하네/ …/ 장군은 밤중에 용성(龍城) 북으로 진군하고/ 전사들의 북소리 병영을 울린다/ …/ 금창은 선우(單于·흉노족의 왕) 임금의 피로 씻고/ 백마 타고 천산(天山)의 눈을 밟고 개선하네.”(‘변방을 노래함’(塞下曲))
중국 고대 한(漢)나라 장수의 북방 흉노족 정벌을 그린 노래로서 비록 중국 남성을 빌렸지만 허난설헌이 바라는 남성상이 담겨 있는 노래이다. 색주가의 남성을 조롱하고, 대륙을 달리는 기상을 지닌 그를 조선의 여성인 시어머니가 사랑할 리 없었다. 허균이 ‘훼벽사’(毁璧辭)에서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있었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어머니에게 미움받은 그의 의지처는 두 아이였으나 남매에게도 비극이 잇달았다.


△ 허난설헌이 그린 <양간비금도>. 허난설헌은 둘째오빠 허봉의 배려로 한시를 배울 수 있었다. (사진/ 권태균)




슬픈 세상을 떠나 도교의 세계로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프구나 광릉(廣陵·아이들 묻힌 곳)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네/ 사시나무 가지에 바람 소소히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 속에서 반짝이누나/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불러서/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자식을 애곡함’(哭子))
이런 불행은 그를 도교의 세계로 안내했다. 도교는 현실에 상처받은 그에게 피안의 세계였다. 이덕무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규수 허경번(許景樊·허난설헌)은 뒤에 여도사가 되었는데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白玉樓)의 상량문을 지었다”라고 쓴 것처럼 ‘여도사’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슬픔이 가득 찬 세상을 떠나 ‘흰 봉황새 타고’ 도교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신선이 노니는 노래’(遊仙詞)에서 “피리 부는 소리 잠시 꽃 사이에 끊기는 동안/ 인간 사는 고을에는 일만 년이 흐른다오”라고 노래한 것에선 허무한 인간 세상을 떠나 신선들의 세상으로 가고 싶었던 그의 심정이 드러난다. 허난설헌은 ‘달 속에 있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의 마지막 구절에서 피안의 세계를 구체화한다.
“육지와 바다가 변해도 바람 수레를 타고 오히려 살아서, 은창(銀窓)으로 노을을 눌러, 아래로 구만리 머나먼 세계를 굽어보리. 옥문이 바다에 임하면 웃으며 삼천 년 동안 맑고 얕은 상전(桑田)을 보도록 하시며 손으로 삼소(三?)의 해와 별을 돌리면서 몸은 구천(九天)의 풍로(風露) 속에 머물게 하소서.”
그러나 이런 세계는 마음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허난설헌은 문제의 본질에 접근했다. 불행은 개인적인 성향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산물이란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모순된 사회구조의 정점에 억압이 있었다. 허난설헌은 억압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여성의 시각을 넘어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동질감을 갖게 된 것이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다락에선 풍악 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느낌을 노래함’(感遇))
이처럼 피지배층의 빈곤과 지배층의 부유를 비판하던 허난설헌의 분노는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모든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로 확산되었다.
“수(戍)자리 고생 속에 청춘은 늙어가고/ 장정(長征)의 괴로움에 군마도 여위어가네.”(‘변경을 지키러 나가는 노래’(出塞曲))
“모든 백성들이 달공이 쳐들고/ 땅바닥 다지니 땅 밑까지 쿵쿵거리네/… / 성 위에 또 성을 쌓으니/ 성벽 높아 도적을 막아내겠지/ 다만 무서운 적(恐賊) 수없이 몰려와/ 성 있어도 막지 못하면 어찌 할 거나.”(‘성 쌓는 원한을 노래함’(築城怨))

노동의 소외까지 간파하다

‘가난한 이웃·수자리 군인·축성하는 백성’은 모두 사회구조의 하부에 있는 피지배층들이었다. 축성으로도 막지 못할 ‘무서운 적’은 바로 그 백성들이란 함의가 담겨 있었다. ‘가난한 여인을 읊음’(貧女吟)에서 허난설헌은 ‘여성’과 ‘빈민’이 같은 처지임을 간파한다.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김쌈 솜씨 모두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중매 할미 모두 나를 몰라준다네/ 추워도 주려도 내색을 않고/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오직 아버님만은 불쌍하다 생각하시지만/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 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 삐걱삐걱 베틀 소리 차갑게 울리네/ 베틀에는 한 필 베가 짜였는데/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가난한 여인을 읊음’)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 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소외론이었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을 인류(동료인간)로부터 소외시키는 데 나아간다”라는 마르크스의 말과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라는 난설헌의 시구는 같은 인식의 소산이다.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라는 구절은 가난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되는 여성의 아픔을 절절히 노래한 절창으로서 그 자신이 가난한 여인에게 깊게 동감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시구이다. 이렇게 허난설헌은 한 여성의 시각을 넘어 사회 전체의 모순에 칼을 들이대는 저항시인이 되었다.
허균은 “우리 누님은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다”라면서 “그래서 삼구홍타(三九紅墮)라는 말이 바로 증험되었다”라고 덧붙였다. 삼구홍타는 허난설헌이 23살 때(1585) 지은 ‘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며’(夢遊廣桑山詩)에서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차갑네”(芙蓉三九朶/紅墮月霜寒)라고 노래한 것이 27살 때 죽을 것을 예견했다는 뜻이다. 야사 <패림>(稗林)도 27살 때의 어느 날 목욕 뒤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27)의 수인데,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고 전한다. 허균이 “유언에 따라서 다비(茶毘)에 붙였다”고 증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한 많은 세상에 그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집 간행

허난설헌이 세상을 떴을 때 동생 허균은 만 20살이었다. 그는 누이의 시를 묶어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해 서애 유성룡으로부터,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허씨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라는 발문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도 출간되면서 소천지 조선을 넘어 중국에까지 문명이 알려졌다. 숙종 37년(1711)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으니 조선 여인 최초의 한류였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개인적인 한으로 삭이는 대신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파악하고, 그 부당함을 노래했다. 그는 불행했던 한 여류시인이 아니라 모순된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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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짱꿀라 >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글 - 옛편지 읽기 (3)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글

- 인생에 귀한 것은 마음을 알아주는 일 -

* 마음을 울리게 하는 글입니다.

황상(黃裳)은 나이가 지금 몇이던가? 월출산 아래서 이 같은 문장이 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네. 어진 이의 이로움이 어찌 넓다 하지 않겠는가? 이리로 오려는 마음은 내 마음을 상쾌하게 하네만, 뭍사람은 섬사람과 달라 크게 긴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경솔하게 큰 바다를 건널 수가 없을 걸세. 인생에서 귀하기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니 어찌 꼭 얼굴을 맞대면해야만 하겠는가? 옛 어진이 같은 경우도 어찌 반드시 얼굴을 본 뒤에야 이를 아끼겠는가? 이 말을 전해주어 뜻을 가라앉혀 주었으면 좋겠네.

모름지기 더욱 부지런히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재주를 이루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지금 세상에는 인재가 드물어 이 같은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우니, 결단코 마땅히 천번 만번 아끼고 보살펴 주어야 할 것일세. 애석하게도 그 신분이 미천하니 이름이 난 뒤에 세도 있는 집안에 곤핍 당하는 바가 될까 염려되는군. 사람 됨됨이는 어떤가? 재주가 많은 자는 삼가고 두터움이 없는데, 그의 문사를 살펴보니 경박하고 안일한 태도가 조금도 없어 그 됨됨이를 또한 알 수 있을 것 같네. 부디 스스로를 감추고 무겁게 하여 대인군자가 될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권면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 섬에도 몇 명의 부족한 아이들이 있는데, 간혹 마음과 생각이 조금 지혜로운 자도 있다네. 하지만 눈으로 본 것이라곤 《사략》과 《통감》을 벗어나지 않고, 마음으로 바라는 바는 병교(兵校)나 풍헌(風憲)이 되는 것을 넘지 않는다네. 게다가 사람들이 모두 가난해서 온 섬 가운데 편히 앉아 밥 먹는 사람이 없고 보니 이러고서야 오히려 무엇을 바라겠는가?

편지 보내는 사람과 같이 잠을 자면 내 근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것일세. 잘 대접해 주면 고맙겠네. 물건으로 정을 표해도 좋겠으나 어찌할 수 없을 듯 하이. 노자 외에는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려 들 터이니, 그저 서너 전쯤 쥐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다 적지 못하네. 병인년(1806) 3월 초 10일 둘째 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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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에 유배 가 있던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강진 유배지에 있던 동생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의 내용은 다산의 제자인 황상(黃裳, 1788-1863?)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다산에게서 공부하던 황상은 형제간에 오간 편지와 스승에게서 들은 정약전의 이야기를 듣고, 멀리 흑산도로 정약전을 찾아가 배움을 청할 결심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간 지은 글과 편지를 흑산도로 보내 찾아뵙기를 청했던 듯 하다.

정약전은 황상의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월출산 아래 시골 촌구석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말로 그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뭍사람이 험한 한 바다 길을 건너는 것이 쉽지 않고, 꼭 얼굴을 마주해야만 서로 만나는 것은 아니란 말로, 동생에게 그의 흑산도행을 만류해 줄 것을 당부했다. 다산이 황상을 처음 만난 것은 귀양 온 이듬해인 1802년 10월의 일이었다. 몇 명 아전의 자식들이 강진 읍내 주막집 문간방에 머물던 다산을 찾아와 배우고 있었다. 황상은 그 뒷자리에 끼어 앉아 있었다. 다산은 자신감 없이 구석에 앉아있던 그를 따로 불러 오직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 부지런히 노력할 것을 당부하는 감동적인 글을 써서 그에게 주었다. 황상은 그 글을 받고서 감격했다. 이때 그의 나이 15세였다.

위 정약전의 편지는 그로부터 3년 반 뒤에 쓴 것이다. 쭈볏쭈볏 스승 앞에 나아가 “선생님! 저 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할 수 있나요?”하고 물었던 그 소년이, 불과 3년 반 만에 월출산 아래 이런 문장이 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감탄을 들을 만큼 훌쩍 성장해버린 것이다. 정약전은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이 이렇게 대단할 줄 몰랐다고 편지에서 적었다. 황상이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산방에 틀어박혀 일삼는 바라고는 오직 책을 베껴 쓰고 읽는 일 뿐입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말리면서 비웃습니다. 이들의 비웃음을 그치게 하는 것은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귀양살이 20년 동안 날마다 글 쓰는 것을 일로 삼으셔서 복숭아 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습니다. 내게 ‘삼근(三勤)’의 훈계를 주시며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부지런히 해서 이를 얻었다.” 몸소 가르쳐주시고 입으로 전해주신 가르침이 마치 어제 일처럼 귀에 생생합니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럽고 핍절한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 편지글 한마디로 정약전이 그토록 칭찬한 황상의 사람됨을 볼 수가 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황상은 이미 70이 훨씬 넘은 노인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쉴 새 없이 책을 베껴 쓰고 소리 내어 읽는 그를 보고, 그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사람들이 말리면, 그는 우리 선생님은 복숭아 뼈에 세 번 구멍이 뚫리도록 공부를 하셨다. 그 가르침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죽기 전에야 어찌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정약전의 편지글 위에는 작은 글씨로 쓴 황상의 친필 메모가 보인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이것은 선생님의 둘째 형님께서 나주 흑산도에 귀양 가 계실 적에 쓰신 편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편지의 내용이 온통 네 이야기로 가득하고, 또한 둘째 형님의 친필이니 네 거처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여기에 합첩한다. 다산은 형님의 당부를 전하면서 편지까지 함께 황상에게 주었다. 온통 네 이야기 뿐이니 기념으로 간직하거라. 황상은 이를 소중하게 보관해서 스승이 그에게 준 다른 글과 함께 하나의 첩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 형제간의 아름다운 우애와 사제간의 흐믓한 정을 되새기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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