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10월13일 제6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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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포기할 수 있을까

유럽 언어들에서 보기 드문 언어의 압축력을 만들어내는 ‘지혜의 건전지’… 언어는 ‘섞임’의 토양서 자라는 것, 순 우리말 고집은 ‘대인기피증’ 같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몇 년 전,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관련의 한 학회에서 한자를 “서양인 등 한자문화권 외부인들의 한국어 학습의 장벽 중 하나”로 꼽은 한 국내 학자의 발표를 들은 일이 있었다. 이 의견이 국내 학계에서 거의 통설인 듯한데, 내 경험으로 봐서는 그렇게만 보기 힘들다. 이것이 외국어 학습의 변증법이라 할까?


△ 한글날을 맞아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외국인 한글 백일장에 참가한 이들이 글쓰기에 한창이다.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한자는 최대의 걸림돌이자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사진/ 연합)

최악의 걸림돌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좋은 학습 방법을 쓰면 바로 최고의 디딤돌이 된다는 법. 한국어를 전공하지 않는 학습자들에게 한자 학습이 추가 부담이 될지도 모르지만, 한자를 배울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진 전공자 같으면, 초기의 진입장벽, 즉 어려운 습자 과정이라는 산맥만 넘으면 그야말로 시원한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다.

‘표적수사’를 러시아어로 바꾸면?

많은 한자어들이 유럽 언어들에서 보기 드문 의미의 압축성을 과시한다. 예컨대 ‘일조권’(日照權)과 같은 의미의 표현을 영어로 지어보시라. 직역하자면 ‘햇빛을 누릴 권리’ 같은 설명식의 표현이 되는데, 한국어 능통자가 긴 설명 없이 이 의미를 석 자의 한자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누가 봐도 부러운 일이 아닌가? 내 모국어인 러시아어 같으면, ‘일조권’을 의역하는 데 적어도 4~5개의 단어가 필요하다. ‘일조권’과 같은 의미의 표현은 유럽 언어들에서도 하나의 관용구가 될 수 있지만, ‘표적 수사’나 ‘친인척 비리’ 정도면 아예 따로 문장을 지어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표적 수사’의 러어 의역을 한국어로 다시 직역해보면 ‘수사의 주체 내지 감독자가 특별히 경계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자가 표적이 되어 불공평하게 진행되는 수사’쯤 될 것인가? 어쨌든 학생 때 나는 이런 압축적 표현력을 가진 한겵?일의 언어가 끝없이 부럽기만 했다. 약 7년 전 국내의 한 전문 번역자 양성기관에 출강했을 때 ‘지식기반 사회’의 러어 번역어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영어 같으면 준비된 번역어가 있지만, 이 간단한 여섯 글자의 한자 표현을 러어로 좀 어색하고 장황한 문어로 의역해야 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한자어들을 익히면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정리할 수도 있구나!” 하고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학생으로서 나의 진정한 사랑은 고사성어였다. 나에게 넉 자짜리의 고사성어는 거의 한 권의 책과 맞바꿀 수 있는 지혜의 무게를 지니는 것 같았다. 예컨대 지금도 동아시아 종교사 수업 때면 불교의 방편론을 설명하려고 늘 칠판에 쓰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을 들어보자. 이 간단한 표현 하나를 머리에 떠올려 계속 반추하고 명상을 해보면, 상황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면서도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는 처세법을 다 터득할 수 있는 것 같다. 처세서를 사느라 돈 쓸 일도 없이. 나는 이 표현을 접하면 꼭 남의 말에 잘 응대해 이 고사의 유래가 된 제나라 재상 안평중(晏平仲)에게서 개인적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고마운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일일삼성(一日三省),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재점검하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대로 하루에 몇 번씩 각종 고사성어를 떠올리면서 내가 이 부류에 해당되지 않는지 생각해본다. 눈이 높아봤자 재주가 따르지 않아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안고수비(眼高手卑) 아닌가, 자신의 밭에 물을 대듯이 이미 내린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논증 과정을 편의적으로 하는 아전인수 (我田引水) 격이 아닌가? 러어에도 어떤 유럽 언어에도 없는 이 ‘지혜의 건전지’ 없이 내가 과연 살 수 있었을까 가끔 궁금하기도 하고. 물론 고사성어를 모르고 사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럭저럭 살아갔겠지만, ‘임기응변’의 의미를 한 번도 고심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왠지 아쉬움이 생기기도 한다.

한글 통해 한자·한문·일본어까지 익혀

하이퍼텍스트인 인터넷에서는 한 사이트의 가치가 다른 사이트와 링크가 얼마나 잘되는지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언어 공부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습 대상으로서 특정 언어의 가치는, 그 언어가 다른 언어의 연속 학습의 디딤돌이 어느 정도 돼줄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돼 있다. 나에게 한글의 가치는 한글 공부 그 자체에도 있었지만, 한글을 통해 한자, 한문 그리고- ‘한자 코드’를 통해- 초급 일본어까지 익힐 수 있는 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한자 문화권 바깥에서 이 한자 문화권 안으로 틈입한 자인 나로서는 배우기 쉬운 과학적·체계적기호 체계로서의 한글이란 바로 난삽한 한문·일본식 국한문 혼용 표기 세계로 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 “한자는 ‘남의 글’일 뿐일까?” 지난 8월 충북 충주 탄금호에서 열린 호수축제 기간 동안 도내 대표 서예가 125명이 천자문 합작 휘호를 하고 있다.(사진/ 연합 박일 기자)

나는 지금도 중국의 고전 한시까지 습관적으로 한글로 표기해 한국식 발음으로 읊고, 현재 체류하고 있는 후쿠오카의 간판이나 식당 메뉴판들까지도 한국어 한자어 지식을 총동원해 어렵게 판독하다시피 한다. 나는 한국어 속의 한자어를 익혔기에 일본어를 따로 배울 일도 없이 “요야쿠가 무료데스”를 들으면 예약이 무료인 줄로 당장 눈치챌 수 있다. 과연 ‘토종 한국인’들도 한자를 ‘국어 속의 이질적인 요소’ ‘남의 글’로 배척하기만 해야 하는가? 대중적인 글에서 한자를 남용할 일은 없지만, 국내 인구보다 30배나 많은 이웃 나라들의 인구에게 통하는 ‘코드’가 이미 우리 언어 속에 내재돼 있다는 것을 굳이 나쁘게만 볼 일인가?

메이지 시대 초기의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처럼 한자를 아예 폐기처분해 ‘언문일치’의 완전을 기하자는 일본의 근대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나, 그들 후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판단되는 한국의 외솔 최현배 선생 등 언어 국수주의자들이 한자를 ‘남의 글’로 규정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경우 아마도 이미 고조선 시기에 이용됐을 법한 한자를 ‘남의 글’로 본다는 것은, 불교를 ‘외래 종교’라 규정해 1868~72년 불교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를 강제 환속시켰던 메이지 시대 초기의 신도(神道) 국수주의자들의 사유 방법이나, 기독교를 “독일 민족에 이질적인 유대인들의 종교”로 생각했던 히틀러의 사고방식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이두도 아닌 순수 한문만 쓴데다 그 저술에서 ‘신라’라는 자신의 국가 명칭을 겨우 몇 번만 썼을 뿐 주로 ‘국적이 없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했던 원효를 ‘우리’ 지성사에서 빼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진정한 ‘남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 사용을 굳이 그렇게까지 꺼릴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우리에게는 예컨대 일본어나 영어에서 온 차용어들이 제국주의 침략과 연상돼서 불쾌하게 생각될 수도 있고 ‘언어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데 단어들에 과연 꼭 명확한 ‘국적’이 있는가?

한 유명한 국수주의적 언어학자가 ‘커피’라는 ‘외국말’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하여 ‘미국 차’라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역시 ‘순 우리말’이 아닌- 표현을 써왔다고 하는데, ‘커피’에다 과연 ‘미국’이라는 꼬리표를 꼭 달아야 하는가? 커피 원두의 원산지로 알려진 곳은 에티오피아고, 그 원두가 잘 자라는 한 계곡의 이름이 나중에 아랍어 ‘Qah’wa ’(중독성이 있는 음료)의 유래가 됐다는 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럽 언어의 ‘커피’와 같은 단어는, 터키어를 매개로 하여 그 아랍어 단어를 기반으로 한다. 그 정도의 계보를 가진 단어라면 ‘미제 침략의 언어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공유해도 좋을 세계사의 일부분이 아닌가? ‘남의 말’이 만약 모두 ‘침투’라면 바깥 세계에서도 ‘태권도’와 같은 한국어 차용어를 서둘러 그쪽의 ‘순 우리말’로 ‘순화’해야 하는가?

단어들에 꼭 명확한 국적이 있는가

음과 양의 합침이 우주 만물을 만들고 두 사람의 합침이 가족을 만들고 수많은 방언겙訛?영향들의 합침과 스며듦이 언어를 만들어 발전시킨다. 사람이 외부인들과의 ‘소통’ 속에서 성장하듯 언어도 외부와의 ‘섞임’을 토양 삼아 자란다. 외부와의 접촉을 지나치게 꺼리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흔히 ‘대인기피증’이라고 진단한다. 솔직히 말하면, ‘순 우리말’을 고집하시는 분들을 보면 꼭 떠오르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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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호 (2006.9.27)


성호가 차린 콩 요리 성찬

 

안 대 회(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성호 이익 선생이 언젠가 삼두회(三豆會)를 연다면서 가까운 친척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한 일이 있다. 그런데 내놓은 요리인즉, 모두가 콩을 재료로 한 음식으로 콩을 갈아 쑨 콩죽에 콩으로 담근 두부, 콩에 소금을 절여 만든 된장이었다. 그렇게 남녀노소가 세 가지 콩 요리를 나눠 먹고 밤이 이슥하도록 담소를 즐긴 다음 헤어졌다. 친척들은 그제야 성호가 말한 삼두회가 콩으로 만든 음식을 나눠 먹자는 모임임을 알아차렸다.

삼두회, 콩으로 만든 음식 나눠먹자는 모임

아무도 불만을 토하지 않고 콩으로 만든 음식에 불과하지만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기니 고기나 채소와 다를 게 없다고들 입을 모았다. 성호는 콩 음식이 값도 싸고 만들기 쉬워 삼두회를 열었으니 앞으로는 이러한 모임을 가법(家法)으로 만들어 이어가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이현환(李玄煥)은 모임의 과정과 사연을 ‘삼두회서(三豆會序)’라는 글로 써서 그
날의 훈훈한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어려운 가정형편이라고는 하지만 친척들을 모아서 콩죽에 콩 반찬으로 회식자리를 마련한 것은 옹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성호가 꼭 쌀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성호는 평소 “남들이 즐기는 것처럼 나도 고기맛을 잘 안다만, 음식이란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기면 고기나 채소나 한 가지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래서 쌀반 콩반으로 밥을 지어 먹고는 오히려 그게 맛이 더 좋다고 하며 콩밥 먹는 기쁨을 시로 지었다. 문집에 실린 <밥에는 콩이 반이다(半菽歌)>라는 시가 바로 그 작품이다. “쌀과 함께 고르게 섞어서 / 솥에 넣고 삶아 대니 김이 모락모락. / 사발에 담아 모임을 여니 향기 가득하고 / 수정 화제(火齊, 보석) 이곳저곳 반짝이네.”라며 콩밥을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밥 사이의 콩을 찬란히 반짝이는 보석이라고 표현하였다.

삼두회를 열기 전 해에 지은 이 시에서 성호는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라며 콩으로 밥 해 먹는 수완을 뽐냈다. 그렇게 그 무렵 성호는 열렬한 콩 예찬론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호가 콩 예찬론자가 된 동기가 검소한 성품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평생 밭도 갈지 않고 김도 매지 않으니 / 배를 떵떵 두드리며 먹는 것은 분에 넘치지.”라며 노동하지 않는 자가 이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지닌 그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런 소신을 지녔으니 콩밥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자신에 대해 만족감을 표한 뒤에는 굶주린 이웃 사람들을 떠올렸다. 시에는 이런 내용도 담겨 있다.

“앞마을에는 밥짓는 연기도 일어나지 않으니 / 콩도 내게는 사치가 아닐는지. / 부귀한 자들 호사를 다퉈 / 밥 한 끼에 만전을 뿌려 비린내 진동한다네. / 가슴 채우고 배가 불러도 쉬지를 않고 / 백성들 고혈 빨아 탐욕 채 우네.”라며 굶주리는 백성들을 연민하는 한편, 음식에 사치하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증오하였다. 콩밥을 먹으면서도 따뜻한 양심을 드러내는 선비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조촐한 음식, 그러나 훈훈한 정과 학문 넘치는 성대한 만찬

그렇지만 이 모임이 우리를 감동하게 만드는 장면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예상을 넘어서는 조촐한 음식을 놓고 훈훈한 정을 느끼며 학문에 논하는 그들의 모습이다. 성호는 그 자리에서 공자가 자로(子路)에게 “콩을 마시고 물을 마셔도 그 즐거움을 극진히 하는 것이 효(孝)”라고 한 말을 말해주며 가난하
지만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부모를 잘 모시는 것임을 상기시켰다. 그런 성호의 마음에 그날 모인 친족 모두가 동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현환은 그 날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집에 몇 가마의 쌀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굳이 콩 요리를 내놓고 모이라고 하셨다. 그 자리에 젊은이와 어른이 모두 모이자 해박한 지식과 굉장한 언변으로 옛 일을 말씀하셨다. 자세히 헤아리고 쪼개어 분변하시니 말씀마다 법도에 맞아 구경하고 감화된 자가 많았다. 콩 모임을 연 결과가 어떠한가?”

콩 요리를 먹고 나서 성호를 중심으로 그 집안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서 학문을 강론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콩으로 만든 세 종류의 음식이 실은 너무도 성대한 만찬이었다.


글쓴이 / 정출헌
·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저서 : 『산수간에 집을 짓고』, 돌베개, 2005
            『북학의』, 돌베개, 2003
            『나를 돌려다오』, 태학사,  2003 등 다수


실학축전기간 중 다산연구소 행사 안내


[1] 실학관련서적 전시 및 판매(‘실학 향기 그윽한 가을을 위해’)
실학관련 서적으로 일반인에게 권장할 만한 도서, 전시 및 할인판매
 - 장소: 실학축전 개최장소인 남양주 다산유적지
 - 일시: 실학축전기간인 9월 27일(수) ~ 10월 1일(일)

[2] 실학축전 행사장으로 버스 운행
실학축전이 남양주 다산유적지에서 9월 27일(수)부터 10월 1일(일)까지 열립니다. 주최측에서는 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에서도 토요일인 30일(토)에 버스 편의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다만 연구소 인원이 ‘실학관련도서 전시 및 판매’에 모두 배치되는 관계로, 사전 예약이나 참가자 인원파악 없이 정해진 시간에 버스 1대만 운행하니 이용에 착오 없기 바랍니다. 즉 연구소 측이 제공하는 버스운행계획은 다음과 같으며 축전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셔틀차량을 병행하여 적절히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 다산연구소 제공차량
9월 30일(토) 오전 9시 :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남양주 다산유적지 실학축전 행사장
9월 30일(토) 오후 1시 : 남양주 다산유적지 실학축전 행사장→ 강남고속버스터미널

9월 30일(토) 오후 2시 30분: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남양주 다산유적지 실학축전 행사장
9월 30일(토) 오후 9시 30분: 남양주 다산유적지 실학축전 행사장→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유의사항 - 별도의 사전예약을 받지 않으며, 45인승 버스 1대만 운행됩니다. - 정시에 출발하며, 만차 후에는 이용하실 수 없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주최측 제공차량
덕소역 - 능내역 - 다산유적지 - 행사장 왕복 셔틀버스 운행 (배차 간격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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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09-28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미용실 하셔서 가사에 능한 부반장 성호를 떠올렸습니다^^

해콩 2006-09-28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쁘고 대견하겠어요.. 그 성호.. ^^
 

제16호 (2006.9.20)


茶山의 寓話詩, 그를 통해 배우는 삶의 자세

 

정 출 헌(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예나 지금이나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백성의 최대 관건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이다. 실학파 지식인들이 한결같이 토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런 이유일 터다. 다산 정약용도 그러했다. 잘 알려져 있듯, 다산은 여전제(閭田制)라는 매우 급진적인 방안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여기에서 다산이 제시했던 방안의 실효성을 따지기란 어렵다. 다만 공산주의 사회에서 실험해 본 공동농장을 연상시키는 제안을 읽고 있노라면 인간에 대한 다산의 무한한 신뢰, 그리고 개혁을 향한 다산의 순수한 열정에 가슴 저려온다는 점은 고백해도 좋겠다. 하지만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이상주의적 열정이 깨뜨려지기 쉬운 유리잔처럼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오늘날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현실주의자로 기억된다. 어떻게 그런 평가가 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젊은 이상주의자가 간직하고 있던 ‘뜨거운 열정’이 유배지에서 경험한 ‘팍팍한 현실’과 접속함으로써 그처럼 변화된 평가를 받게 만든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다산이 겪 어야 했던 기나긴 유배지에서의 체험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그 점 수없이 강조된 사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변화의 흔적들을 자잘한 시편(詩篇)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유배 체험과 다산의 우화시 세계

다산은 동물을 소재로 한 우화시를 상당수 남기고 있다. 대부분 장기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를 간 뒤에 창작한 것들이다. 인간 이
외의 삶, 곧 하찮은 미물조차 허투로 보지 않게 된 생활 조건이 제공해 준 뜻밖의 선물이겠다. 그러나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동물을 의인화하여 말하려고 했던 것의 변모이다. 유배 가던 첫 해(1801년), 다산은 <해랑행(海狼行)>이란 시를 짓는다. 자그마한 솔피[小 ]와 큰 고래[巨慝]의 피 터지는 싸움을 소재로 삼은 시다. 솔피와 고래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목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지배계층의 권력 투쟁을 우의(寓意)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중앙 정계의 피비린내 나는 쟁투를 다루는 이런 작품은, 종종 변방으로 쫓겨나게 된 자신의 울울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일련의 시들로 자연스럽게 연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배 직후의 상황을 읊고 있는 <고시 27수>의 제6수도 그러하다. 다산은 그곳에서 연못에서 놀던 ‘물고기’[다산 자신]가 주제넘게 ‘바다’[중앙정계]로 나갔다가 이권을 둘러싸고 암투를 벌이 던 ‘악어·고래’와 같은 무리[노론세력]에게 잡아먹힐 뻔했던 상황을 우의적으로, 그러나 노골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유배지, 이상주의자를 현실주의자로 만들어준 산실

유배 생활이 지속되면서 우화시는 계속 지어졌지만, 다산이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변화한다. 유배생활 10년이 지난 즈음에 지은 <이노행(狸奴行)>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백성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는 쥐, 그를 잡으라고 보냈더니 그와 공모해 더 큰 행패를 부리는 고양이를 다루고 있다. 쥐는 백성을 수탈하는 아전, 고양이는 수령에 각각 비유될 법하다. 쥐를 도둑으로, 고양이를 도둑 잡는 하급 관리로 볼 수도 있지만 어느 것이든 유배 초기에 지은 우화시에서 즐겨 다루던 문제의식과 멀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다산은 더 이상 우화시를 통해 중앙 정치 무대에서 벌어지던 지배층의 암투라든가 그런 와중에 변방으로 귀양 오게 된 자신의 울울한 심경을 담고 있지 않는 것이다. 대신 자신이 체험한 19세기 향촌사회의 심각한 모순들, 특히나 아전 및 수령의 가혹한 수탈과 그로부터 고통 받던 백성의 신산한 삶이 날카롭게 그려지고 있다.

어찌 보면 중앙정계의 추잡한 권력투쟁을 다루든 향촌사회의 가혹한 가렴주구를 다루든 그것 모두 다산 자신이 몸담고 있던 사회현실에 대한 울분과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뜻하지 않게’ 체험하게 된 19세기 향촌사회의 현실이 다산으로 하여금 자기 개인의 울분(鬱憤)을 넘어서서 일반 백성이 겪는 고통을 끌어안는 공분(公憤)으로 확장되도록 만들고 있는 변화의 순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배생활은 한 젊은 이상주의자를 대지에 확고하게 발 딛고 있는 현실주의자로 거듭나게 만든 산실이었던 바, ‘땅’이야말로 지식인 자신에겐 또 다른 생명이었던 것이다.


글쓴이 / 정출헌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이야기로 읽는 삼국유사, 이야기로 읽는 삼국사기』(웅진싱크빅, 2005)
            『고전문학사의 라이벌』(한겨레출판, 2006)
            『심청전: 어두운 눈을 뜨니 온세상이 장관이라』(나라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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賈誼의 사상

가의는 秦이 멸망한 후 漢이 안정기에 들어설 즈음, 文帝에게 유교적인 改制정책을 진언하며 군주는 정확한 현실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鑑古戒今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知時識勢’의 구체적인 실현양상을 의미하며 동시에 漢이 창업기에서 수성기로 들어서는 이념적 작업이다. 治者는 因時制宜와 隨時變易을 정확히 해야 국가를 보전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진나라는 逆取는 했으나 順守에는 실패하였다고 했다.


* 그러므로 군자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상고시대를 관찰하고, 당세에 증험하고, 인사를 참고하며 성쇠의 이치를 살피고 권세의 마땅함을 살핀다. 거취에는 질서가 있고 변화는 때에 따라서 한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을 견디어 사직이 안정된다.

* 천하를 잘 다스리고자 하고 천하를 걱정 없이 편안히 하고자 한다면 제후를 많이 세워 그 힘을 약하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 힘이 약해지면 천자가 情義로서 부리기 쉽고, 제후국의 규모가 적으면 사악한 마음이 없어진다.


董仲舒의 사상

王道사상을 주장하면서 以古非今의 정신으로 『춘추공양전』의 大一統사상을 주장하였고, (진나라의 법치주의가 엄청난 제제력을 가지게 되자 백성들의 불안심리가 비등하는 것을 보고) 황제권력의 정당성을 天人感應說로 합리화하였으며, 삼통설로 왕권의 절대적 권위를 이론화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때부터 유교가 전면에 부상하여 罷黜百家․獨尊儒術하게 된다. 추연의 五德終始說에 근거한 秦의 改制가 기계적으로 결정된 것에 비해 동중서의 改制論은 시대상황에 부응하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三綱 중 군신관계를 강조하여 정치안정을 꾀하면서도 災異說로 무절제한 군주를 견제하였다.


* 春秋에서 일체로 하나를 통일시킨다는 것은 천지의 영원불변한 법칙이고 고금에 두루 통용되는 마땅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가르치는 스승마다 주장하는 도가 다르고, 사람들은 논의하는 내용이 다르며, 여러 학파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지향하는 뜻이 서로 같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위의 통치자인 군왕은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원칙을 가지지 못하여 법제가 자주 바뀌며, 아래의 백성들은 지켜야(따라야) 할 원칙을 알지 못합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육예(시서예악역춘추)의 학문과 공자의 가르침에 뜻을 두지 않은 모든 학설은 모두 그 길을 끊어버려서 (유학과) 함께 나아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거짓되고 편벽한 학설들이 사라진 뒤에야 통치의 기강이 하나로 뭉쳐져서 법도가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이니, 그래야 백성들이 따라야 할 원칙을 알게 될 것입니다.


王充의 사상

漢代 당시의 경직된 사상을 타파하고 언론의 자유를 내세워 魏晋的 思潮를 창출한 인물이다. 비판철학의 새로운 장을 연 혁신적 유학자로 기계론적 자연관에 근거한 無神論者이면서 氣質論의 선구자이다. 유학의 세속화를 반대하여 학문의 진실성과 올바른 학문풍토 정착에 힘썼고, 孟子․荀子․楊雄의 사상을 종합한 性三品說을 주장하였다. 기질론에 근거한 숙명론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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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2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나라 초기 유교가 흥성한 원인
표면적으로는 유교를 내세우면서 법가 음양가 등 타학파의 이론을 수용․절충하여 포용하고, 현실주의(유가와 법가)와 이상주의(유가와 도가)를 병존시켰으며, 경전을 계승하고 유학을 연구하는 등 전통문화를 집대성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실제정치의 준거를 제공하였다. 결국 유교는 황제 지배체제를 이념적으로 보증하였기 때문이다.
 

周代文化의 특징 : 이전까지‘神중심’이던 사회문화가 ‘人間중심’으로 획기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른바 ‘인문주의의 확립’으로, 神(天)에 대한 인간 의존도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文․武․周公에 의해 제도화 되었고, 孔子에 의해 사상적으로 정립되어 禮를 강조한 각종 제도와 이념으로 구체화되었다. 고대의 종교양식을 모두 부정한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며, 이후 각종 문물제도 역시 인문적 방향으로 조정되었다. 신분계급의 질서가 완비된 것도 周代文化의 특징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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