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영화는 지금…’ 6세대 감독들의 고민



세계의 명소를 축소해 베이징에 지은 세계공원에서 각국 민속의상 쇼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인물들은 실제와 가상 사이의 혼돈 속에서 힘겹지만 씩씩하게 살아간다.


중국 톈안먼 사태를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성과 사랑을 그린 러우예 감독의 ‘여름궁전’. 영화 속 젊은이들은 급변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들 사이에서 고단해 한다.
온 세상이 경제대국 중국을 대비해야 한다면서 중국의 급성장을 두려움과 부러움 섞인 눈으로 쳐다보는 지금, 중국 영화인들은 자국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해외에 소개된 최근 중국영화들 속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급격히 파고드는 자본주의 앞에 황망하고 고단할 수밖에 없는 서민들을 걱정하는 6세대 감독들의 작품들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에둘러 비춰주면서 타산지석을 발견케 한다.

올해 칸영화제부산영화제에 소개된 러우예 감독의 문제작 ‘여름궁전’(2006)은 중국의 1987년부터 2001년까지를 거치며 젊은이들의 욕망과 방황을 매우 앞서나간 방식으로 담아낸다. 밀려드는 외국 문명과 자유에 대한 갈망 속에서 젊은이들은 억눌려 있다. 미국 팝송과 한국 트로트를 뒤섞어 듣는 젊은이들은 줄곧 어둠 속에서 섹스를 나눈다.

부산영화제를 찾은 러우예 감독이 “실제로 그렇다”고도 말했지만 중국 젊은이들의 성의식은 여느 나라 못지 않게 개방돼 있다. 그러나 이들을 둘러싼 제도와 구조는 옛것이다. 중국인들의 해소되지 못한 욕구는 이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찬란했던 대학시절을 톈안먼(天安門) 사태와 함께 지나보내는 인물들은 마치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의 ‘몽상가들’의 청춘들처럼 충동적으로 자유를 외치면서 이상과 규범, 혹은 도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한다. 답을 찾지 못하는 이들의 빛과 어둠은 그대로 중국인들의 현실에 비쳐진다. 자신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는데 좀체 변할 줄 모르는 중국 상부구조의 억압이 발랄한 대학생들을 짓누르는 풍경은 한국인들도 어디선가 종종 봐왔던 것들이다.

20일 개봉하는 자장커 감독의 ‘세계’는 한층 직접적으로 현실을 풍자한다. 베이징에 건립된 ‘세계공원’은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 피라미드 등 지구 곳곳의 명소와 유명 건축물을 미니어처로 만들어놓은 세계의 축소판. 주인공들은 이곳에 근무하는 무희와 경비원들이다. 가짜 에펠탑 앞에는 넝마주이가 고된 걸음을 옮기고, 피사의 사탑 모형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은 기우는 탑을 자신이 받치고 있는 것처럼 포즈를 취한 채 가짜 현실을 만든다.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와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사고사를 당하는 친구, 도시 빈민촌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젊은 남녀, 서울에서 직장을 얻은 친구의 경비원 제복마저 부럽기만한 시골친구…. 한국인들이 이같은 중국영화의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의 과거를 보는 동시에 중국의 불안한 미래를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정재형 교수는 “밀려오는 물질문명과 권위주의, 중국 공산당관료주의가 6세대 감독들의 비판을 이어지게 하고 있다”며 “한 사회가 조화를 잃고 양극단으로 치닫는 현상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평했다. 정교수는 “최근 중국의 역사왜곡과 소수민족 탄압 등 중화주의 역시 맥락을 같이하는 문제”라며 “중국 정부의 권위주의적이고 인민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인간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가에 대해 중국영화 속 고민을 관심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지석 부산영화제 아시아영화부문 프로그래머는 “중국 영화당국이 개방정책을 펴고 6세대 감독 영화들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으나 각종 간섭 때문에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기 힘들어한다”며 “이런 까닭에 역설적으로 개방정책 이후 지하 영화들이 더 늘어나고, 영화를 하려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현재 중국의 상황에 대해 더 갑갑함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조사에 따르면 중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중국영화계는 260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종합 흥행수입 48억위안(약 5억9천5백만달러)을 기록해 전년보다 3배 이상 늘었다. 수치만 보면 영화도 경제만큼 급성장 가도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260편 중 극장에 걸린 작품은 전체의 15% 정도. 중국내 블록버스터와 저예산영화의 간극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송형국기자 hanky@kyunghyang.com〉

-6세대 감독이란?-

중국 감독의 세대 구분은 ‘베이징전영학원 78학번’으로 일컬어지는 ‘5세대 감독’들로부터 본격적으로 나뉘게 됐다. 1980년대부터 장이머우, 첸카이거 등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중국영화를 부흥시킨 감독들이 5세대라면 50~60년대 활발히 활동하면서 중국 문화혁명기를 거친 5세대의 스승 세대를 3세대로 칭한다. 2세대와 4세대는 세대 구분이 모호하지만 3세대와 5세대 사이인 70년대 전후에 위치한 감독들을 4세대로 구분하며 중국영화가 탄생한 1905년부터 2차대전 전후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감독들을 1, 2세대로 나눈다. 6세대는 90년대 후반부터 5세대 선배 감독들의 현실타협을 비판하며 더욱 강도높은 사회 비판의 목소리를 내온 왕샤오솨이, 러우 예, 자장커 등이 대표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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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10-20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중국 대륙 영화사 분류
2. 중국 영화 기관의 조직
3. 타이완 영화
4. 홍콩 영화
5. 중국 합작 영화(작품성과 자본의 만남)

1. 중국대륙영화사분류
◈초기의 중국영화(1910년대 전후)
-대부분 외국인들에 의해 제작, 상영
-단편영화, 기록영화, 뉴스영화 주류
-최초의 중국영화: 1905년 <당준산>
-극영화 형식을 제대로 갖춘 첫 영화: 1916년 <고통받는 연인>
◈30,40년대(영화의 황금시대)
-사회주의 국가 이념으로 예술, 창작의 자유 명시
-관객층의 제한: 상하이에 거주하는 서구화된 사람
-1937년 중반부터 민족적 항일 영화 속출
-제 1세대 감독: 쑨유, 우영깡, 페이무, 차이주성
실험정신과 탐구정신이 돋보임
사실주의의 특성이 짙음
-제 2세대 감독: 징쥔리, 션푸, 주시링
우국 우민의식이 강하고, 급진적임
◈50년대
-사회주의 국가 이념으로 예술, 창작의 자유 명시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장
-스튜디오 건설
-제 3세대 감독: 시에진, 잉와, 수이화
민간이야기를 많이 다루었음
회화적이며 서적정서가 두드러짐
◈1966-1976(문화 혁명기)
-모든 예술 분야의 침체기
-1966년 영화 제작 중단
-1967-1969년 사이 연간 제작 편수 無
◈80년대
-혁명 후의 사회 현실을 적시하고 과거를 반성
-전통적인 스타일을 거부하고 사실적인 묘사
-광선과 색채의 독특한 도입
-제 4세대 감독: 60년대 영화 교육 수료 후 해방운동 참여로 활동하지 못 했다가 79년부터 창작활동 재기
멜로드라마로서의 연극적 효과를 중시하는 결함
장누안신, 시에티안, 왕양, 시에페이, 텡웬지
-제 5세대 감독: 영화사에 혁명적인 업적을 남긴 세대
1982년이후 베이징 영화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4세대 영화와 과거 중국영화를 부정
장예모, 황지엔신, 첸카이커, 장쥔자오
<특징>1. 인민에 대한 관심과 애정
2. 리얼리티보다는 민족문화에 더 관심
3. 사회비판, 정치문제 언급은 가급적 피함
4. 시청각 요소의 표현 영역에 치중
◈90년대 영화
-제 6세대감독: 6.4천안문 사건으로 지하활동
사회적 금기의 범위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전위적, 언더그라운드적인
성격을 띰
우웬광, 장의엔, 왕샤오시아, 허이
◈지금의 중국영화
-TV 보급 후 저급한 선전오락 영화 제작 증가
-사실적이면서 관념적인 영화
-독립영화

☞제 5세대와 제 6세대에 관해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제5세대
제 5세대란 용어는 1985년 홍콩 영화제에서 첸 카이거의<황토지 Yellow Earth>(1984)가 상영되었을 때부터 사용되어졌다. 이 그룹에 포함되는 감독들은 문화혁명 이후인 1978년 재개교한 베이징 영화아카데미의 동기들이다. 제 5제대 감독들은 그들이 작품을 통하여 중국영화 자체를 국제 무대에 널리 알리며, 중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적으로 보급했다. 이중 가장 잘 알려진 장 이모와 첸 카이거, 티안 주앙주앙의 작품을에서 비평가들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즉, 이들의 작품들이 중국의 변방만을 무대로 삼으며, 또 과거에만 집착하며 문화혁명의 기간들을 우회하고 있다는 것, 이러한 주제로 인하여 현대 중국의 일상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평이 그것이다.
제 5세대 영화들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첫째, 국가보다 인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더 크다.
둘째, 현재 생활의 리얼리티보다 민족문화에 더 관심이 많다.
셋째, 사회비판이나 정치문제 등 민감한 부분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피하고 운명, 종교 등의 삶의 진실에 치중한다.
넷째, 시창각 요소의 표현영역에 관심을 가진다.
천안문 사태에 대한 이들 5세대의 외면은 그들이 지닌 한계를 보여준다.

제6세대
포스트 천안문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매너리즘과 결부된 제5세대보다 서구의 새로운 관심을 더 끌었다.
그들의 작품은 제 5세대의 작품만큼이나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그들의 작품이 상업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다지 뛰어나지 못함을 으미함과 도시에 체제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989년 천안문 대학살이후 2년 안에, 정부 내부의 개인적 변화들은 보수당의 승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따. 결과가 거의 없었을지라도, '반 부르죠아지 자유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이런 시기동안 스튜디오들은 상업적 생산물들을 무자비하게 대량생산해오고 있었다. 이는 스튜디오들이 맣은 문제들과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은 연간 영화 관객수의 감소, 제작비의 증가, 비디오 시장에서의 서구와 홍콩 영화들과의 경쟁, 그리고 홈 뮤지컬 엔터테인먼트와 가라오케의 인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결과, 중국영화국은 대량의 제작비를 투자한 서사극들을 몇 몊 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들은 불과 소수였고, 스튜디오들은 폭력과 노출성 위에서 판매될 수 있는 저렴한 오락 영화들에 자본 투자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0년대에 형식적이고 스타일적인 실험을 해왔던 감독들(제4세대 및 제5세대)은 1990년대에 들어 좀더 접근 용이한 영화를 만들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처럼 영화산업의 침체와 기타 국가들의 영화와의 경쟁은 점점 더 중국 영화의 상업화를 촉발시켰고, 실험적 영화의 생산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0년대 초의 다큐멘터리 운동은 베이징 방송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서 꽤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 6세대가 출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시발점이다. 베이징 영화아카데미의 1989년 졸업생들은 독립 프로덕션의 어려운 책무를 시작했다. 상업광고와 뮤직 비디오를 제작함으로써, 젊은 영화감독들은 작품 제작을 시작하기에 충분한 자금을 모았다. 이들이 저 예산으로 만들었던 작품들은 스튜디오 쿼터가 없었기에 공식적 채널을 통해 배급될 수 없는 '언더그라운드' 영화들로 남았다.
제6세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포스트 천안문 세대' 혹은 '언더그라운드', '인디펜던트'감독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작품의 특징들은 '장면과 태도에서 뻣뻣하고 도시적이며, 내러티브 전략에서 삐딱하고 시적이며, 친숙한 개인적 관심사에 엄격하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제6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들은 제 5세대의 영화들처럼 하나의 범주에 묶기는 힘들다. 이들의 작품은 "때로는 지나치게 사실적인가 하면 때로는 매우 관념적인 경향을 지니기도 한다.

☞중국 대륙 영화 중에 3작품을 골랐습니다.

《붉은 수수밭》

1988년 장 이머우 감독 작품입니다. 매우 볼 만한 중국 영화입니다. 중국 제목으로는 紅高梁이라고 합니다. 고량(高梁)은 수수를 말합니다. 우리가 많이 마시는 고량주가 바로 고량으로 만든 술입니다.
1985년 천 카이거의 <황토지>가 신중국영화의 탄생을 처음으로 외부세계에 알린 이후 장이머우의 1988년작 <붉은수수밭>은전세계가 신중국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기폭제가 됐다. 서구의 관객들은 이국적이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이야기 구성에 매료됐다. 장이머우는 상업 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고, <붉은수수밭>은 그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 한 셈이었다.
<붉은수수밭>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손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20세기초에서 일본의 침략기에이르기까지 중국의 한 벽지마을에 살던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입부분에서부터 이작품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다. 쉰살이 넘은 양조장집 주인문둥이에게팔려가는주얼(공리)의붉은가마와웃옷을벗어 제친건장한가마꾼들의춤과노래는시청각적으로이국적인느낌을전달함과동시에가련한여인의운명, 건장한남성에대한주얼의은근한눈길, 중국의봉건적폐습등앞으로전개될이야기의프롤로그로확실한인상을남긴다.
중국적이면서동시에세계적인것, 장이머우영화의성공의핵심이다. 이를테면술은흔히중국인들에게시적이며낭만적인이미지로비친다. 이작품에서도고량주는조부의낭만적이고남성적인성격을드러내는모티브로작용하며, 병균을물리치는약의역할과일본군에맞서는폭탄의역할까지도한다. 즉, 고량주는정열과낭만, 생산, 활력, 단결, 의리의상징이다. 서구인들은여기서니체의디오니소스적인간정신의재현이나, 바흐친의 '카니발'을떠올렸을것이다. 특히사흘간이나술독에빠져노래를부르던조부의모습에서낭만과관습적이고억압적인도덕적굴레로부터의탈출을보았을것이다.
<붉은수수밭>은분명정치적영화는아니다. 그러나일면 30년대중국의좌파영화와유사한모습을보인다는점은유의할필요가있다. 30년대중국의좌파영화가주로그랬듯이이작품은일본제국주의에대한저항, 가부장제로부터의여성해방, 육체의해방을이야기한다. 반일항쟁의이야기는다소도식적으로보이기도하지 만주얼의 여성으로서의정체성과연관지어보면달리읽을수도있다. 주얼은전래의전통적여인상에서벗어나있다. 그는양조장주인이살해된뒤양조장운영을책임지는반(半)모계사회의가장이되며, 일본군에게무참히살해당한 라오 한의복수를이끄는지도자이기도하다. 장이머우는이런개척적이고능동적인여인상과함께건장하며낭만적인 남성상을제시한다. 대부분웃옷을벗고등장하는조부와양조장일꾼들의모습은도덕적틀에얽매이지않으면서자연스럽게하늘과땅의도리를알고, 또자유롭다. 이들의모습은일본군의제복과뚜렷한대비를이룬다. 이들의건장한신체는오늘날은밀해지고심리적문제로치부되는 '육체'를과거의자유로운집단의영역으로끌어내는의미를지닌다.
이처럼내레이터조부모의개인적경험은곧집단의경험이되고, 동시에중국역사의알레고리가된다. 그래서이영화는비정치적이면서도역사의흔적이배어있고, 전통적이면서도동시에비전통적이다. 그것은전적으로 장이머우의연출능력과의도덕분이다. 전통과새로움의조화는결코쉬운일이아니기에 <붉은수수밭>은더욱돋보인다.

《패왕별희》

화려하다, 아름답다등의 이영화에 대한 수식어들은 처음 본 이에겐 그다지 인식되지 못한다. 이들의 스토리는 급변하는 중국의 역사속에 휩쓸리고 또 그 험난한 인생에 이들은 너무나도 많은 고난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지켜본 이라면 보는이로 하여금 얼마나 가슴 조리게 하는지 알 것이다. 마지막 부분, 1977년 데이가 다시 샬로와의 마지막 공연무대에 서서 진검으로 자결하는 장면이 적막과함께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이영화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낼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허무와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샬로가 "도즈야"라고 그의 어릴적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는 영화의 전체를 돌아보게 되고 도즈는 마치 다시 되살아난 것처럼 우리는 영화에 대해 슬프다, 불쌍하다등의 연민의 표현보다 아름답다, 화려하다, 동화같다 등의 표현을 서슴치 않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운 비극을 다룬 영화는 필자로선 접하기 힘들었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땐 데이에 대한 동정심에 "왜 데이를 죽였어?"라고 첸카이거에게 묻고 싶었다. 또한 데이가 죽고나서 왜 샬로가 웃음을 지었는지 , 그게 웃음이었는지 조차 믿고 싶지 않았다. 얼마뒤 영화를 다시 접했을 때 나는 그제서야 첸카이거가 비극으로 영화를 끝마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했다. 데이의 죽음만은 간절히 막기를 내심 바라던 나는 그때 그 샬로의 옅은 미소를 띈 모습처럼 데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데이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우희로서의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운명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이 그가 우희로 남을수 있는 가장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샬로는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고, 그러했기 때문에 샬로는 데이가 그렇게 자결한 것을 안타까움과 동시에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음을 추측해본다. 그동안 파란만장한 그들의 일생을 지켜보느라 바빴던 나는 두 번째 본 패왕별희 에서야 그의 죽음을 그렇게 지켜볼 수 있는 여유와 너그러움이 존재할 수 있었다.

패왕별희는 5세대 대표주자 첸카이거의 작품인 만큼 그시대를 경험하며 자란 그의 회상과 기억이 묻어있는 영화다. 그는 이 아픔과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상처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경험으로 하여금 패왕별희는 그 시대를 암울하게 그렸다. 군벌시대, 일본치하, 국민당 정부,공산화, 문화혁명의 과정을 거쳐 영화는 전개 되는데 이는 첸카이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며 또한 감독은 중국의 근대사와 중국인민의 관계를 유방과 항우의 관계와 동일시 하고 있다. 이는 영화[패왕별희]가 경극[패왕별희]를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이런 교묘한 관계를 통해 첸카이거는 역사에 대한 반감을 항변하며 그 역사에 휩쓸려 동요되고 결국에 농락당하게 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이것이 첸카이거가 진정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던바가 아닌가 싶다. 데이와 샬로, 쥬산, 서 이들은 모두 이 역사에 휘말리게 되며 피해자또는 가해자로 남는다. 이것은 이들이 좋고 나쁜 인간임을 떠나 이들이 급변하는 중국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있고 또 한 그게 올바른 길이었는지 중국이란 나라로 하여금 반문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영화의 주된 장르를 말해보라 하면 로맨스, 드라마, 역사극 등을 말하겠다. 어느 하나 정확한 것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그나마 가장 확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 영화인만큼 어느 하나 단정짓기 힘들다. 가장 정확한건 첸카이거만이 알것이다. 대충 짐작해보자면 그의 예전작들을 미루어 봤을 때 또, 그가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영화의 배경을 동일시 한 것을 (원작은 릴리안리가 쓰긴 했지만)보면 "역사"란 부분을 강조한 듯싶다. 다른쪽으로 생각해보자. 패왕별희 원작소설을 집어들었을 때 가장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 문구가 있다면 그건"패왕별희는 사랑이다"라는 문장이었다. 이영화는 단지" 사랑"에 관한 러브스토리다 라고 누군가가 말한 것이다. 그것의 출처는 정확히 모르겠다. 첸카이거일수도 있고 릴리안리일수도 있고 제3자의 유구무언 일수도 있지만 확실한건 그것이 결코 틀린말은 아니란 것이다. 제아무리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그 고통을 다룬 것이라 해도 이영화의 주된 모티브는 바로 영화속의 주인공, 즉 그들의 인간관계 바로 청데이의 사랑 그리고 단샬로와 쥬산, 그들의 갈등이란 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랑 때문에 갈등을 겪고 역사로 인해 배신하며 배신당하는 장본인이 된다. 이것은 속일수 없는 현실이며 역사속에서 이들의 지금을 있게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바로 "사랑"역시 영화에서 대두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역사와 사랑속에서 갈등하는 세사람 또는 네사람의 비극적 운명이야 말로 [패왕별희]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영화의 메인인물은 청데이, 단샬로, 쥬산이다. 여기에 한명을 보태자면 어린시절 데이가 주워온 아이 "서"를 들 수 있다. 나름대로 성격이 뚜렷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첸카이거의 말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인물은 청데이라고 한다. 영화는 비록 패왕과 우희 , 두사람의 입장에서 그려졌지만 대부분의 사건의 발단과 원인은 "청데이"라는 인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눈여겨 보는 이도 아마 청데이 일 것이다.

◈청데이- 그는 현실속에서도 우희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에겐 냉혹한 현실이 있을 뿐이고 샬로도 더 이상 그의 소유물이 아니다.그는 오래전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주소없는 편지를 쓰고 태우고 하는 일을 반복한다. 이는 그가 어머니의 사랑을 얼마나 그리워 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마지막엔 샬로마저 그를 배신하자 그는 쥬산을 동정하고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리고 최후엔 우희로서의 자신의 생을 완성하기 위해 자결한다.

◈단샬로- 그에겐 어릴적만큼의 경극에 대한 열정이 없다. 그에게 "패왕"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는 쥬산과 결혼하지만 암담한 역사속 현실과 부딪혀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고 그는 데이도, 쥬산도 배신한다. 하지만 그를 비난하거나 질책할 수 없는건 그에게도 한땐 데이와 쥬산에 대한 사랑이 분명 존재했었고 그가 우희의 "패왕"임이 분명하기 때문일것이다.

◈쥬산- 샬로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밥줄인 홍등가도 뿌리치고 나온 여자다. 그녀는 샬로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원했지만 그를 사랑하고 있는 데이와 갈등을 일으킨다. 서로를 시기하긴 하지만 나중엔 그들은 서로 "같다"라는 입장에서 보여진다. 그녀와 데이는 영화속에서의 가장 큰 희생자이며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서- 데이가 주어온 아이었지만 그는 은혜도 모르고 데이와 샬로를 타도하는데 앞장선다. 일본이 중국에게 항복하자 서는 공산당이 되어 자신을 심부름꾼처럼 여겼던 데이를 탄압한다. 그리고 그에게서 우희역을 빼앗음으로써 데이는 치욕적인 과거를 남긴다.

◈원세경- 역사가 그를 어떻게 인정하든 그역시 데이를 사랑했던 또하나의 희생자가 아닌가 싶다. 그는 데이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으며, 재판대위에 섰을 때도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결국 처단된다.

◈관사부-그는 경극이 인생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가 얼마나 경극을 소중하게 여기냐에 대해선 이 대사를 보면 알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극을 봐야한고 경극을 모른다면 사람이 아니다."

《햇빛 쏟아지던 날들》
 우리는 흔히 중국영화 하면 두가지를 떠올린다. 제 5세대와 문화 혁명이다. 제 5세대로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던 첸 카이거나 장 예모의 영화가 우리가 기억하는 중국영화의 대부분이고 또한 그들영화의 주된 이야기 거리가 문화 혁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난 개인적이지만 문화 혁명을 그렇게 꺼리거나 거부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권력 스르로 권력을 부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1970년대 마오가 얼마 않있으면 죽을 것이고 문화 혁명이 끝나갈 중국 거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이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이라면 어른들이 거의 나오지를 않는 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어디론가 떠나기 바쁘고 아이들은 집과 거리를 지배한다. 거리에서 여자를 꼬기기도 하고, 담벼락 위에서 노래도 부르고 담배도 피우고, 동네 양아치들끼리 패싸움도 벌인다. 그들은 명실 상부하게 도시의 지배자들 처럼 보이고 누구도 그들을 통제 하려고 들지 않는다. 아버지를 군인으로 둔 소년은 남의 집을 드나들수 있는 만능열쇠를 가지고 남의집에들어가 철저하게 쉬고 나오는 것을 취미로 가지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집에서 한 소녀의 사진을 보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소년은 침대 밑에서 그녀의 다리는 기억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를 따라 거리로 나와 그녀일 거라고 생각하는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사실 뭐 흔히 있는 성장영화에 나올법한 이야기이다. 소년이 그보다 나이가 몇살 정도 많은 소녀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의 아픔으로 성장을 하게 된다는 그런 내용 말이다. 물론 이 영화의 거의 말미 까지는 그런 것 처럼 보인다. 소년은 좀 애절해 보이기도 한다. 또래들 사이에선 영웅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필름이 꺼꾸로 들고 그의 기억이 실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나레이션이 나오고 그가 지나치게 미화 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한다. 그는 영웅도 아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따돌림 당하고 그녀는 그에게 전혀 관심도 없다. 그리고 북경의 거리가 나오고 흰색 리무진이 거리를 달리며 그때의 친구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 그 차에 타고 있다. 그리고 크레딧이 오른다.
그해 여름 아버지가 집을 비운 그해 여름, 햇볕은 강하게 내리쬐고 햇살 사이에서 헛것을 보듯 그는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되었는 지도 모르고, 그의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지 못하고 뭉개져 버렸는 지도 모른다.
문화 혁명으로 아버지들이 떠나 버리고 그들만이 거리에 남게 되었을 때, 그들은 패거리를 이루고 문화 혁명으로 만들어진 세상의 질서와는 다르게 그들만의 질서를 이루어 간다. 이것은 분명 아이러니 이다. 문화 혁명의 막바지에 중국사회의 견고함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강문 감독은 영화 배우라고 알려져 있다. 주로 5세대 감독들의 영화에 출연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70년대에 5세대 감독이 바라보았던 문화 혁명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그는 문화 혁명의 굴레를 벗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 중국 영화 기관의 조직

★중국영화국 각 스튜디오의 제작편수와 제작방향 등의 계획 수립
(메이저스튜디오22개, 기타 스튜디오)
-검열
-영화발전의 장기계획수립
-해외와의 교류
-산하기관 : 현상소, 영화기자재공사
★중국영화공사-배급과 흥행 담당
완성된 작품에 대한 영화국의 상영허가
->영화 제작 스튜디오와 계약
->전국에 배급․상영
-산하부서 -재정부 : 재정관리
-선전부 : 각종 홍보계획을 수립․시행
-흥행부 : 극장운영을 관장
-수출입부 : 영화의 수출입과 영화제 참가
'중국영화'중문과 영문판으로 제작
-제작부 : 스튜디오나 독립프로덕션의 영화 제작후원
★중국영화예술연구센터-필름보관, 연구 목적으로 설립
-1954년에 설립된 중국영화자료관을 1984년에 흡수․통합
-4개의 연구실-이론과 미학연구실
-중국현대영화사연구실
-중국영화사연구실
-외국영화사연구실
-베이징영화학교 학생들의 영화이론,
영화사석사 과정을 개설
★교육기관-베이징영화학교

3. 타이완영화
1895년 타이완이 일본에게 할양된 이후 식민통치자들은 타이완을 외부나 다른 산업화의 영향으로부터 차단시켰기 때문에 타이완의 영화산업은 오로지 일본의 전쟁 선전 정책에 좌우되었다. 이러한 영화들은 제작자와 감독이 모두 일본인이었고 내용도 일본 중심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타이완 출신의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도 식민 통치자의 감시 아래 제작된 작품이기 때문에 예술적 가치가 떨어질 뿐 아니라 타이완의 영화사에 포함될 수 없다.
타이완 영화의 역사는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한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타이완에서는 정치 색채가 가미된 전통 무협영화나 멜로드라마 풍의 애정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무협영화는 공산당의 상징인 '악'이 제시되고 그것을 해결하는 영웅 이야기를 통해 타이완 정권의 중국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합법화시키려고 했다. 이런 영화들은 국민의식을 고취시키고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갖게 하는 데에도 일조 했다. 또한 멜로 장르의 영화들은 애정과 사회생활의 성공을 다루고 있는데 국가 관리들은 이런 내용을 통해서 국민들이 국가 건설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영화들은 관객동원에는 실패했다. 실제로 이런 영화들은 당시 본토에서 제작된 공산주의 건설에 관한 혁명영화에 맞대응 한다는 의미밖에는 없었다.
1960년대에 타이완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이와 함께 영화 산업도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영화들은 대부분 경제적․이데올로기적 요구에 순응하였기 때문에 도덕적 선악구도를 주장하는 국가 정책을 정치적으로 지원해주는 상업 오락영화와 교훈영화가 주로 발전했다.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현실이 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매료되었다. 경제적으로 부흥한 타이완은 상업영화와 정치적․도덕적 교훈영화를 제작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여기에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여가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는 것과 타이완 영화의 단순한 줄거리와 표현형태가 동남아시아인의 정서와 잘 맞았다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런 중에서도 일부 고품격 영화들은 상당한 영상 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후진취안감독의 <용문의 결투>(1966)이나 1953년 상하이에서 영화화되었던 월극 ( 劇) <량산보와 주잉타이>를 리한샹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1963)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영화들을 통해 예술영화의 발전에 대한 희망도 생겼다. 그러나 정권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 당시 상황에서 예술성과 주제 설정에 대한 제약으로 대부분의 영화들이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할리우드 영화나 홍콩영화에 밀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서도 영화에서는 여전히 비판적 과거극복이 금기 시 되었다. 따라서 멜로드라마와 전쟁영화들만이 계속 성행했기 때문에 대만의 영화 산업은 국제 수준에서 크게 뒤떨어졌다. 정부의 검열은 타이완영화가 오로지 상업적 한탕주의만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1970년 대 중반까지 관객들은 상투적인 주제의 타이완영화에 등을 돌렸다. 그 대신 할리우드 오락영화가 대도시의 극장에서는 큰 인기를 끌었다.
1980년 대 들어서면서 마침내 타이완에서는 예술정책의 변화와 영화정책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980년대의 정치 변화는 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 자유화의 물결을 확산시켰다. 1982년 처음 등장한 예술영화의 대표자들은 타이완 사회의 역사와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타이완 영화의 토대를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동은 중국 본토에서 진행된 예술영화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데, 그것은 본토의 새로운 영화 미학적 모델이 타이완 감독들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독창적이고 대단히 감동적인 작품들을 만든 타이완의 독립영화예술은 미학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세계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비록 타이완의 예술영화는 수적으로는 많은 관객을 동원하진 못했지만 오늘날까지 국제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타이완의 뉴 웨이브 영화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미 장제스 하에서 선전되었던 전통적 가치, 곧 유교의 세계관을 답습했다. 사라져 버린 과거의 위대함에 대한 비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대립,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 같은 주제로부터 예술가들은 눈을 돌렸다. 그 대신 영화를 비롯한 각종 예술 장르를 통해 이제야 비로소 정의 내릴 수 있는 타이완의 고유 문화와 현실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독자적 국가 형태로 변모한 타이완 사회의 현실에 대한 논쟁이 전면에 등장했다. 경제 발전과 현대화의 원동력인 동시에 기형화된 사회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도시는 1980년대 타이완 영화가 선호하던 주제였다. 도시영화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이율배반의 반대 급부로서 다시 강조된 중국 고유의 전통은 발전 과정에서 붕괴되어 가는 도시사회의 안식처로 간주되었다.
몇 십 년 동안 선전영화와 저질 상업영화를 양산하던 타이완에서 새롭게 등장한 뉴웨이브 영화는 타이완의 영화산업 전체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타이완 영화사는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했고 정치와 예술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허우샤오셴: 예술지향적인 젊은 영화감독들 가운데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감독은 중국 광둥성 태생의 허우샤오셴(1947~)이다. 허우샤오셴은 동시대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향마을이 현대 산업사회로 급속하게 변해 가는 과정을 지켜 본 증인이자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그의 영화는 내용 면에서 독창성은 별로 없지만 우상과 악마라는 이분법적 인물구도를 통해 문화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데 기여했다.
리안(李安/1954~): 리안 감독은 오락적이면서 사회 비판적인 영화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영화는 유머가 풍부하며 중국의 문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해준다. 특히, 타이베이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영향을 삭막한 도시 생활과 약간 낭만적으로 변형시킨 시골의 전원생활을 대비시켜 비판했으며 전통의 단면을 부각시키는 감상적 멜로드라마 형식으로 고유한 전통과 역사적, 민족적 정체성의 회복을 주장했다.

☞이안 감독과 그의 작품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만의 감독으로는 이안 감독이 있다. 대만 영화를 이안 감독의 작품을 중심으로 알아보겠다.
이안감독은 대만에서 태어났지만, 완전히 대만 감독이라 말할 수는 없다. 일찍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 대학에서 연극을, 그 후 뉴욕 대학에서 영화제작을 공부했으며 대만의 영화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어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안은 과거와 현재, 전통과 변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 특히 미국사회 속의 화교의 정체성이나 세대간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 놀랄 만한 화해를 이끌어내는 섬세한 연출력과 더불어 해피 엔딩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방해하지 않는, 드물게 훌륭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90년대 대만영화의 새로운 감독이며, 95년 이후 헐리우드와 유럽의 지원 아래 국제적 입지 를 넓힌 헐리우드의 대표적인 '아시아 감독'이 되었다.
그를 전세계에 알린 작품은 <결혼 피로연>(1993)이다. 게이인 아들과 그의 남자 연인,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화해로 이끌어내는 이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대만에서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가 되었다. 영화의 특징은 세대간의 의식차와 동양과 서양문화의 이질감, 동성애, 그린카드 문제 등을 극명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드는 코믹한 이야기 전개이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중국고유의 성적(性的)인 피로연이 신기하게 보였을런지도 모르지만 같은 동양권문화인 한국과는 유사한 문화적 풍토를 느낄 수 있다.
이안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음식남녀>는 94년 칸느 영화제 필름 페스티발에서 감독주간의 오프닝 작품으로 선정되며 세계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음식남녀>라는 특이한 제목의 이 영화는 한 가족 안에서 빚어지는 남녀의 갈등과 신구 세대 사이의 갈등을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이안 감독 특유의 풍자적이고 은유적인 시각으로 처리한 영화이다. 제목이 "음식남녀"인 만큼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백여 종이 넘는 산해진미는 중국요리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음식들은 가족간의 의사소통과 사랑의 확인이라는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며 인간사의 희노애락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이 영화는 식욕과 성욕이 음식과 결혼/가족("음식남녀")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추적해 나간다. 가족은 하나의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저녁만찬"으로 이루어졌던 "가족"이라는 틀에서 해체되어 간다. 하지만 "성욕도 식욕과 같았다. 음식남녀인 것이다." 그들의 세대/가족 갈등은 "저녁만찬"으로 다시 해소되어 가고 그들은 하나의 보다 큰 가족, 보다 넓은 틀로서 다시 구성된다.
<센스 & 센서빌리티>(1995)는 대만 감독이 18세기의 영국소설을 영화화하는 것 자체로 상당한 관심을 모았었다. 아시아의 감독이 외국의 고전을 외국자본과 배우를 동원해 성공적으로 연출한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여자들이나 대만의 여자들 모두 인생에서 가장 바라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결혼, 이에 대해 작가와 감독이 미묘한 매력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영화 한 편이 탄생하기에는 충분했다. 이안의 말이다. "가족과 남녀간의 따뜻한 사랑, 갈등, 풍자와 유머가 얽힌 제인 오스틴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 바로 나의 것이었다. 19세기 영국이라는 배경만 제외한다면 내가 시도하려고 했던 것들에 그녀가 바로 해답이었다. 그녀가 바로 내 최후의 대상이었다." 18세기 영국 귀족가문의 세 자매의 사랑과 결혼관을 멜로드라마로 그려나간 이 작품으로 베를린 영화제 사상 최초로 이안은 황금곰상을 두 번 제패한 감독이 된다.
전세계적인 흥행성공과 비평적인 찬사를 받았던 <와호장룡> 왕두루의 소설을 각색한 <와호장룡>은 스토리라인만 보면 전형적인 무협물이다. 강호를 떠도는 네 인물 리무바이, 수련, 용, 호. 그들 사이엔 로맨스도 있고 정의도 있다. 그러나 <와호장룡>은 전형적인 중국 무협영화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차라리 왕가위의 <동사서독>에 가깝다고 할까. 물론 <동사서독>만큼 황량하지는 않지만 등장인물이 무협영화가 묘사하는 전형적인 영웅이 아니라 좀더 깊은 여백을 지녔다는 점에서 <동사서독>과 닮아 있다. 영웅 이야기이되 인물들은 허황되지 않고 좀더 인간적인 욕망으로 번뇌한다. 수련이나 호보다 좀더 영웅다운 리무바이와 용은 결국 죽음을 맞지만, 그들의 죽음은 패배도 역사의 비극도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해탈이고, 어지러운 강호가 아닌 다른 세계로의 접안이다. 그래서 <와호장룡>의 결말은 열려 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어 전설로 남는다.
<와호장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액션이다. 물론 용과 호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지만 전반적으로 캐릭터들은 리무바이와 수련의 사랑처럼 절제돼 있는데, 여기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액션 장면이다. 홍콩에서 이름을 떨치다 할리우드로 건너가 <매트릭스>의 신화를 만들어낸 무술감독 원화평의 존재가 <와호장룡>의 발레 같은 무술을 낳았다. 청명검을 들고 달아난 용이 주점에서 한무리의 무사들을 만나 펼치는 액션이나, 용이 리무바이를 두둔하는 수련과 대련하는 장면, 지붕을 타넘으며 벌이는 수련 용 라무바이의 추격전, 나뭇가지를 타고 한판 대결을 벌이는 리무바이와 용의 싸움은 홍콩 무협영화에서 보았던 경쾌함이 있고 몇몇 장면에서는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안 감독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여기에도 자신의 색깔을 입힌다. 용을 해칠 생각이 없는 리무바이는 한쪽 팔을 뒤로 한 채 용과 맞선다. 동적이되 그 중심에는 정적인 절제미가 흐른다. 단순히 액션에만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캐릭터의 성격을 녹여냄으로써 자칫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 액션과 드라마를 조화시킨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이안이 만들면 무협영화도 다르다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드라마와 액션의 절묘한 조화라는 것 외에도 <와호장룡>의 특징은 또 있다. 중국 대륙의 광활함을 배경으로 잘 살려냈다는 점이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용, 먼 계곡을 바라보는 호. 롱 쇼트로 잡은 이 장면들은 정말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라는 철학적인 깨달음과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정작 홍콩에선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처음 작품을 개봉했을 때도 <와호장룡>은 홍콩 달러로 천5백만불(미화 약 192만불)을 벌어들이는 데 그쳤으며, 1월의 재개봉때는 11주간 홍콩달러 백만불을 겨우 넘겼다. 이는 오우삼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 2>가 작년 여름 3천4백만불을 벌어들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에 대해 중국 영화 전문 평론가 폴 포노로프는 "<와호장룡>의 무협 액션은 미국에선 신선할지 몰라도 홍콩에선 매우 익숙한 것"을 흥행부진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와호장룡>의 무술감독 원화평은 <매트릭스> <미녀 삼총사>로 할리우드를 매혹시키기 전인 70년대부터 이미 성룡의 <취권>등 많은 홍콩 영화의 액션을 연출해왔다. 그런 그의 액션 스타일이 해외에선 별미일지 몰라도 본토에선 식상하다는 것이다.
이안 감독은 대만 중산층의 삶을 소재로 삼은 경쾌한 드라마를 만들다가 드라마적 재능이 눈에 띄어 헐리웃으로 진출했다. 대만 내에서 이안의 존재는 미묘했다고 할 수 있다. 이안의 영화 이전 대만영화는 중산층 관객을 붙잡아 둘 만한 소재를 개발하지 못했다. 이안은 중산층 사람을 소재로 해체되는 전통적 가족구조를 다루되, 경쾌한 희극풍으로 묘사했다. 편집양식이나 이야기 구조가 헐리웃 스타일에 가깝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가 대만 뉴웨이브의 전통에 흠집을 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대중적으로 이안은 인기가 있는 것이다.

4. 홍콩영화
영국 식민지 홍콩에서 확인된 영화제작의 역사는 1909년(베이징에서 <딩쥔산>이 촬영된 지 4년 뒤) 아시아영화사의 단편영화 두 편으로 시작되었다. 단순한 방식으로 제작된 익살 극 <옹기의 하소연>, <베이징 오리구이 도난사건> 등 두 편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두 영화모두 상영시간은 몇 분에 불과 했다.
1940년대 후반까지 홍콩의 영화는 경제적으로 아시아 영화산업의 최대 중심지였던 상하이의 상업영화 제작자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홍콩 경제가 안정된 1950년대부터 영화산업 발전의 초석을 다져 나갔다. 홍콩은 중국본토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고 좌익 정치가들에 대한 탄압이 노골화된 이후 홍콩은 날로 정치, 예술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본토에서 망명한 영화제작자들이 만든 사회주의적 반일영화, 즉 망명영화들은 대부분 상하이 좌익 영화의 전통을 잇고 있었다. 대체로 애국주의적 성향의 이런 영화들은 일본 검열당국의 분노를 샀으며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한 직후 종말을 맞았다. 이로써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화제작자들의 마지막 해방구는 사라졌지만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곧 많은 영화사가 활동을 재개했으며 광둥어 상업영화를 수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전쟁 후 4년 동안 홍콩은 또다시 한번 중국의 좌익 영화제작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1949년 이후 발전하는 홍콩 영화산업은 이렇다 할 예술적, 정치적 가치를 논할 수 없는 오락영화가 주도했다. 홍콩 정부는 영화를 이용하여 인민 공화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했다, 실제로 설립된 수많은 홍콩 영화사들은 점점 더 상업적 성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1950~1961년대 홍콩에서 4,500여 편의 극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실로 엄청난 양이다. 전통 무대극 영화와 정치영화 대신 멜로드라마와 코미디 영화가 극장을 점령했다. 그래서 홍콩 영화는 동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광범위한 유교문화권을 뛰어넘어 전 세계로 배급되었다.1951년대 동남아시아 영화시장을 장악한 홍콩 영화사들 가운데 일부는 그 매출액이 이미 할리우드 영화사와 맞먹었다.
홍콩 영화의 내용과 예술성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구전된 영웅이야기와 무협소설 전통의 맥을 잇는 무협영화가 1970년대 초반 유럽과 미국에서 흥행성을 증명하면서부터이다. 서양 관객들은 무협영화의 이국적 분위기, 속도감, 영화 속에서 연출되는 拳法(권법)에 매료되었다. 특히 리샤오룽 (李小竜/Bruce Lee,1940~1973)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모험 삼아 무협영화로 장르를 전환했는데 홍콩에서 엄청난 흥행수익을 올렸다. 리샤오룽이 무협영화 장르에서 국제적 명성을 얻은 뒤 1973년 네 번째 영화 <사망유희(死亡遊戯)>도중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협영화의 위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목요연한 선악 이분법, 꼭 필요한 부분만 삽입된 줄거리, 선한 주인공의 승리 그리고 감정 이입을 자극하는 코믹한 연출 등은 미국과 유럽의 영화 시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1979년부터 홍콩에서는 일련의 젊은 감독들이 혁신적인 영상기법과 사외 비판적 테마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젊은 감독들은 점차 개성과 미학적인 면에 역점을 둔 고품격의 영화를 발표했다. 이를 통해 홍콩은 저질영화 양산국이란 이미지를 개선했고 일부 사회 비판적 영화들은 국제 영화제에서 입상하며 전 세계 적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감독들 가운데 그 누구도 개혁 정신이 드높은 본토나 타이완의 감독들처럼 수준있 는 작품을 제작하는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타이완이나 본토와는 달리 현대화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는 홍콩 감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홍콩 감독들은 범죄, 매춘, 마약밀매, 가치부재, 인간성 상실 등 현대 도시사회의 기형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쉬안화: 여성감독 쉬안화 (許鞍 /1947~)는 전통과 현대, 홍콩인의 미래에 대한 불안, 부유성 (浮游性)등을 가장 설득력 있게 형상화했다.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구심력이 강한 홍콩의 특유의 상황에서 그녀는 문제들을 타이완이나 본토의 감독들과는 달리 전원생활이라는 유토피아로의 회귀로써 해결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객이 스스로 결론에 이르도록 했다. 스스로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홍콩의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도록 설정했다.
팡위핑: 팡위핑(/1947~)의 데뷔작 <부자정(父子情)>은 전통과 현대를 테마로 삼은 영화 가운데 가장 설득력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왕자웨이: 도시영화 장르에서 왕자웨이(王家衛/1958~) 감독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열혈남아(1988)> <아비정전(阿飛正伝/1994)> <중경삼림(重慶森林/1994)> <동사서독(東邪西毒/1994)> <타락천사(堕落天使/1995)> 등이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홍콩의 가장 긴박한 사회적 테마는 홍콩의 중국반환의 문제였다. 홍콩 반환은 현대화의 지속과 서양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부 감독들에게 하나의 모티프를 제공하였다.

☞홍콩의 유명한 감독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왕가위
1958년 7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태어났다. 1963년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호텔 지배인으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홍콩으로 이주했다. 영화광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많은 영화를 보았으며, 아버지가 사들인 중국문학책들을 읽거나, 상해에 남아 있던 형과 누나가 편지에 적어보내곤 했던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고전 문학들을 읽으며 자랐다. 이공대학에서 그래픽 아트를 공부하면서 방송국에서 실시하는 연수과정에 참가했다. 대학 시절은 그가 이탈리아 영화들과 고다르, 브레송 등의 유럽영화와 일본 거장들의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프리랜서로 스승인 왕핑양과 함께 50여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그중에서 영화화된 10편정도의 작품 중에서 왕가위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담가명 감독의 <최후의 승리>이다. 담가명은 후에 <아비정전>과 <동사서독>의 편집을 도와주었다. 촬영장을 오가면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그는 60년대의 인기 배우이자 제작자인 등광영으로부터 기회를 제공받아 88년에 데뷔작을 만들게 된다. 처음에는 담가명의 <최후의 승리>를 세 번째 작품으로 하는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열혈남아>에서의 로버트 드니로의 캐릭터를 반영하였다. 이 데뷔작은 흥행에 실패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호의적인 평을 받았고 금상장 9개 부문에 올랐다.
1960년에서61년까지의 홍콩을 배경으로 한 <아비정전>은 정지한 1분의 시간 속에서 세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그리고 또 한 명의 남자가 교류하는 엇갈린 사랑을 그리고 있다. 스토리를 짜는 데만도 2년이 걸린 <아비정전>은 빠른 몽타쥬 기법과 클로즈업, 많은 음악을 사용했던 <열혈남아>와는 달리 왕가위의 '60년대 생각과 일치하는 '색감과 느린 템포를 가진 영화이다. 왕가위는 'B급 영화에서 가져온 기술적으로 복잡한 카메라 움직임을 롱 테이크 촬영과 결합하여' 사용했으며, '스토리 구성면에서는 마르께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열혈남아>에서 촬영을 맡았던 유위강은 이 작품에서는 제2촬영팀과 함께 했고 (그는<동사서독>에서도 제2촬영팀을 맡았으며, <중경삼림>의 조명작업을 했다). 크리스토퍼 도일은 처음으로 왕가위와 호흡을 맞추며 메인 촬영을 맡았다. 최고의 스타들을 기용한 이 영화는 액션영화를 기다렸던 관객들이 기대를 저버리는 바람에 흥행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1년간 완전히 침묵한 이후 왕가위는 세 번째 영화<동사서독>을 홍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국 중부 사막에서 작업하였다. 김용의 『사조영웅문』을 토대로 한 이 작품에서 왕가위는 주인공들의 나이를 60댈로 설정하고 그들의 과거에 얽힌 기억으로서의 영화를 만들었다. 왕가위의 표현에 의하면 '어쩔 수 없는 숙명'에 관한 영화이기도 한 <동사서독>은 중국 본토에서, 전반적으로 망원렌즈로 촬영하였고, 특히 무협이 인물들의 정서를 더욱 잘 설명해내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 각 인물마다 다른 원칙에 따라 무협장면들을 연출하였다. 무술 감독으로는 홍금보가 참여했다. 이 영화는 <아비정전>이 공개된 시점으로부터 3년이 지나서 완성되었다. 늘어나는 제작비와 일정 때문에 배우들의 스케쥴이 뒤엉켜버려서 배역 중의 일부가 교체되는 바람에 영화의 상당부분을 제촬영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촬영 기간 중에 녹음 장비의 문제로 두달의 시간이 비게 되었을 때 왕가위는 그 틈을 이용해 작은 예산과 적은 스텝들로 마치 게릴라전을 치르듯이 홍콩의 한복판에서 <중경삼림>을 촬영했다.
<중경삼림>의 두 에피소드를 각각 이끌고 있는 두 남자 주인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존재이며, 그들을 포함해 이 영화의 주요캐릭터들은 의안화된 홍콩이자 현대의 홍콩이라는 도시에 대해 왕가위가 갖는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기도 하다.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밝고 경쾌해진 이 영화는 홍콩에서도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동사서독>이 베니스영화제에서 기술공헌상을 수상한데 이어 <중경삼림>이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공개되어 왕가위는 세계적인 주목을 모으게 된다. <동사서독>때부터 자신이 공동 대표인 택동영화사에서 영화를 만들어 온 왕가위는 첫 영화부터 함께 한 미술감독 장숙평과 두 번째 영화부터 합류한 크리스토퍼 도일을 포함한 자신의 시스템을 갖추고 보다 안정된 여건에서 다섯 번째 영화<타락천사>를 작업했다. 이 영화는 <중경삼림>의 세 번째 에피소드이자 <중경삼림>과 반대편에서 짝을 이루는 영화이다. 주인공들은 성별이 바뀐채, 혹은 조금씩 변형되어 대입되었고, 멀리 있던 카메라는 바짝 다가갔다. 영화 전체를 초광각 렌즈를 사용한 와이드 앵글로 밤 시간만으로 채운 이 영화는 왕가위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영화'이다.
포스트 MTV 시대의 시네아스트 왕가위는 끊임없이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영화의 시간과 속도에 대해 사유하며, 사랑의 가능과 불가능성을 반복해서 물으면서, 중국 본토를 떠나 온 마음으로, 그리고 홍콩을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으로 상실과 그리움을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홍콩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간 왕가위는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먼곳에서 홍콩을 그리워하는' 영화 <해피투게더>로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진가신
금지옥엽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진가신 감독. 그의 제작팀은 홍콩에서의 80년대의 촬영을 마치고 황혼녁에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8월말의 뜨거운 뉴욕에서 90년대의 촬영분을 완성했다. 그는 자신의 80년대와, 한때 영화흥행 실패로 참담한 심정으로 보냈던 90년대 뉴욕의 추억을 화면 가득히 담아내며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사랑 에 관해 이야기 한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의 운명과 경험이 녹아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줄곧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다. <마마범범>의 촬영당시 <첨밀밀>에 대한 구상을 했던 진가신 감독은 처음 영화의 제목을 <도시 속의 작은 사랑>으로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화속의 두 주인공이 등려군을 연결고리로 해서 인연을 맺는다는 점에서 착안, 그녀가 부른 "첨밀밀"이란 노래의 제목을 그대로 영화제목으로 굳혔다.


서극
서극 감독은 최고의 환호를 받는 세계적인 액션 영화감독이다. [영웅본색], [천녀유혼], [ 첩혈쌍웅], [동방불패]등 전설적인 작품들을 제작하였고, [촉산], [상하이 블루스], [황비 홍] 그리고 헐리웃에서 제작한 [더블팀],[넉오프]을 직접 연출하였다. 그는 50여편의 작품들을 제작하거나 직접 연출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모험적인 시도로 언제나 화제를 몰고다녔다. 1950년에 베트남에서 출생한 서극은 13세부터 8미리 영화를 찍기 시작한 영화광이었다. 오스틴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그가 처음 입사한 곳은 방송국인 TVB. 이곳에서 서극은 허안화, 임영동, 관금붕 등 이후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어가는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허안화와 함께 놀라운 뉴웨이브의 시작을 알렸던 서극은 무협영화의 전통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 가는데, 그 중 [촉산]은 그가 시도한 최초의 무협영화로 조지루카스의 ILM에 게 특수 효과를 전담시킨 작품이다. 또한 중국 고대괴담을 소재로 독특한 홍콩공포 영화 스타일을 만들어낸 [천녀유혼]에서는 사운드, 조명, 편집 등의 정통적인 영화언어로 무협영화 의 장면들을 재현해 내기도 하였다.
서극 감독의 영화적 특징을 살펴보면 크게 두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 그의 도전 정신으로 항상 새로운 장르로 관객들을 맞이한다. 서극이 만들면 홍콩 영화계가 복제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서극은 문화를 리드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두 번째 그는 스타 제조기 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그의 영화를 통해 발굴된 스타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작품 이 대체적으로 신인급 배우들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으로 [천녀유혼]의 왕조현, [동방불패] 의 임청하, [황비홍]의 이연걸 등이 서극 감독의 영화를 통해 전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음 했다.

오우삼
오우삼 감독은 도시를 배경으로 암흑가에 시대를 상실한 듯한 고전적인 영웅들이 등장해 그들 사이의 의리와 총격전을 아름답게 연출해낸 <영웅본색(英雄本色)>(1986)으로 홍콩 느와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낸 인물이다. 홍콩 갱영화 장르의 역사를 다시 쓴 오우삼은 액션영화감독 'Johm Woo'로 헐리우드에 입성해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헐리우드 진출의 가장 큰 이유는 홍콩의 중국반환으로 인해 영화를 만드는데 많은 제약이 따르고 이전의 홍콩영화 스타일을 계속 구축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헐리우드에서 오우삼 감독의 상업적인 성공 가능성을 일찌기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선과 악의 구조와는 완전히 생각을 달랐다. 그는 진정한 선를 추구하였고 명예와 의리를 중요시 여겼다. 그 때문에 그의 영화 대부분이 선과 악의 대립구조였고 권선징악의 내용이 그의 작품의 주류를 이룬다. 특히 소외된 계층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폭력액션을 예술로 승화 시켰다.
우리가 느와르 영화를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ꡐ홍콩 느와르ꡑ의 등장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홍콩 느와르의 시작은 바로 오우삼 감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홍콩 느와르란 무엇일까? 홍콩 누아르라는 말은 <영웅본색>으로부터 그 ꡐ본색ꡑ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종의 홍콩판 액션, 스릴러, 현대물을 일컫는 것으로 한국의 영화 저널리스트들이 처음 쓰기 시작한 말이다. 이 말의 아버지격인 표현이ꡐ필름 느와르ꡑ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당시까지만 해도 천대받던 B급 할리우드영화의 한 장르를 가리키기 위해 이말을 만들어냈다. 주로 2차대전을 전후한 10여년 동안 할리우드 메이저와 독립 프로덕션에 의하여 만들어졌던 필름 느와르 영화들은 애초에는 추리소설이나 싸구려 애정소설 독자들을 겨냥한 기획의 소산이었다.
필름 느와르 스타일의 B급추리물은 주로 어두움과 그림자가 지배하는 음울한 흑백화면 이었는데 이를 당시의 평론가들은 웨스턴과 뮤지컬의 화려함에 대항하는 우상파괴의 영화언어로 독해했다. 참고로 느와르는 검은, 어두운, 우울한, 비관적이란 뜻을 가진 불어이다.
반면 홍콩 느와르는 염세적이며 비관적인 세계관, 어두운 화면이라는 필름 느와르적 특징에 휘황찬란한 총격전, 화려한 영화적 기교와는 또 다른 스타일을 결합한 홍콩영화를 가리킨다. 동양적인 정서와 서구적인 감수성이 혼재된 유교적 세계관과 냉혹한 자분의 논리가 공존하는 공간, 세기말의 도시에 잘못 들어온 지나간 시대의 ꡐ영웅ꡑ들의 이야기로 구성된 홍콩 느와르 영화의 특징은 이런 것들이다. 오우삼 감독은 필름 느와르의 형식을 많이 취하고는 있지만 전적으로 답습하지는 않았다.
오우삼의 느와르 작품에는 동양인들의 감수성과 유교적인 세계관들이 어우러져 나름대로의 독특한 형식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또 오우삼 감독의 작품에는 암울한 곳의 배경이 영화에 많이 나온다. 여기서 오우삼의 홍콩 느와르만이 가진 일련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인공은 3사람 정도로 구성된 갱이며 그들은 소위 말하는 영웅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둘째, 홍콩 느와르는 남자들간의 우정과 의리를 그리고 있다.
셋째, 홍콩 느와르에서는 펨 페이틀[주10]은 찾아 볼 수 없거니와 여성의 역할이 극도로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넷째, 영화의 주인공은 죽거나 산다해도 허무한 분위기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우삼 감독의 작품은 홍콩 느와르 형식으로 아시아를 평정하였고 주윤발이라는 걸출한 배우를 탄생시켰다. 결정적인 순간에 느린 동작으로 변하는 고속촬영기법은 선배인 페킨파에게서 배운 것이지만 숨막힐 듯이 안무된 총격전과 정교한 스타카토 리듬의 편집은 오우삼의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증거하며 세계 곳곳에서 추종자들을 낳았다. 헐리우드 진출후에도 그의 영화는 여전히 느와르 형식을 취하고 있고 쿠엔티 타란티노등 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중국 합작 영화 (작품성과 자본의 만남)
중국영화의 고립으로부터 개방으로 나오는 과정은 서방세계와 만남이면서 동시에 경제적 만남이기도 했다. 중국영화는 자신들의 미래가 바로 거기에 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중국영화가 처음 서방세계와 접촉하게 된 것은 85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였다. 첸 카이거의 <황토지>가 출품되었고, 그 해 은표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수상은 실제로 많은 관심을 끌어 모았다. 왜냐하면 그동안 중국영화란 그저 선전영화가 아니면 아주 도식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토지(1984)>에는 물론 그 어떤 반성적 인식이나 철학적 깊이에 관한 논쟁을 제안하고 잇지는 않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중국이라는 바탕 위에서 마주치는 모순에 관한 심각한 오류와 그것을 담아낼 새로운 그릇에 관해서 진지하게 모색하는 미학적 전망이 있었다. 이것은 서방세계의 영화제로부터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중국영화에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 영화 배급업자들은 잘 알려진 것처럼 유럽영화 배급망에 제 3세계 영화를 공급하여 성공하였다. 중국에서 온 새로운 영화감독들은 침체에 빠져있던 서방 세계의 예술 영화 전용 영화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리 만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아냈다. 그러나 이들의 영화는 중국의 영화비평가들로 부터는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76년 모택동 사후 등소평의 개방정책에 따라서 북경 영화아카데미는 그 이전과는 달리 서방세계의 영화에 대해서도 상영을 허가하였다. 여기서 제 5세대들을 열광시킨 것은 자국 영화들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과 일본 영화들 이였다. 서방세계의 영화에 대한 영향이 지나쳐서 제 5세대 영화 속에서 서구 지향적인 태도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점차 중국영화가 관객들로부터 떨어져 나아가서 서구 영화제 지향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른바 '탈 중국' 지향의 제 5세대들은 현실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만들고, 게다가 변방에서 활동하면서 당대의 문제에 애써 눈을 감는 것은 그들이 예술영화를 만들기 위해 현실 도피주의자들이 되어가기 때문이라고 비판받게 되었다. 실제로 중국 제 5세대의 영화들은 관객들로부터 대부분 외면당했고, 종종 문화혁명이나 교육제도, 사회제도 속의 모순등을 건드리면서 정부와도 마찰했다.
장예모의 <붉은 수수밭>은 88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그 해 아카데미 외국어작품상 후보로까지 올랐다. 이 영화의 더 큰 의미는 중국 제 5세대 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흥행에서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영화의 명쾌한 스토리와 흥미진진한 사건의 연속에도 그 이유가 잇겠지만 무엇보다도 스타 시스템의 도입이 정확하게 관객들의 욕구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공리는 단숨에 스타가 되었고, 그녀는 장 예모 영화의 마돈나가 되었다. 공공연하게 중국 문화성이 <붉은 수수밭> 이야말로 최초의 제 5세대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영화는 중국 정부와 아무런 말썽도 불러 일으키지 않았고, 흥행에서도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해외 영화제에서도 호평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합작영화가 주는 교훈은 이제 영화는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넘어서 작품성과 자본이 만나 하나로 뒤얽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자신의 토대를 포기하고 자본의 순환고리를 남에게 넘겨줄 때, 그래서 더 이상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이미 남의 나라 영화처럼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아치와 씨팍]

엽기적이고 경쾌 발랄한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변'이 인류 최대의 에너지원이 되고 배변의 양이 훌륭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중독성 강한 '하드'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미래 인간들, 하얀 보자기를 뒤집어 쓰고 '하드(내 생각엔 캔디바를 모델로 한 것 같다. 캔디바 맞다.)'를 차지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돌연변이 '보자기'족. 정말 '변'이 다시 우리들을 먹여살리는 에너지가 되는 날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ㅋㅋ 사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짓는 데 동물의 변을 푹~ 삭힌 거름이 필수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아이디어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나 더, 류승범, 임창정, 신해철, 노홍철... 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혀 모르겠던데 역시 현영의 목소리는 모를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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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니]

인도 영화의 40% 이상이 멋진 남자 주인공, 예쁜 여자 주인공이 출연해서 춤추고 노래하고 지난한 어려움 속에서도 두 사람은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는 류의 영화라고 한다. 그런 영화만이 흥행에 성공하고 남녀 배우는 반드시 스타가 등장해야 한다나. 그러나 이 영화는 카스트를 초월한 악동들 사이의 우정과 그러한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겨 끊임없이 '함께 놀지' 못하게 하려는 '인자한' 어른들의 위선을 다루고 있다. 감독에게 묻고 싶은 것은.. 계급을 초월한 아이들의 우정이 그들이 자라면서도 계속 될 거라 생각하는지. 실제로 인도에서는 카스트가 얼마나 극복되고 있는지. 그러나 묻지 못했다.

[여름궁전]

그들의 솔직한 사랑과 방황. 유홍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싶다. 자신의 내면을 그렇게 정확하게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중국어로 표현되는 유홍의 말들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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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교사로서 돈을 훔쳐 학교에서 쫓겨나고, 집을 나와 몸을  팔고, 가족에서 연을 끊기고, 동거하던 남자가 자살하고, 그의 친구와 다시 동거하고, 다시 버림받고, 맛사지샵에서 몸을 팔고, 기둥서방에게 그동안 벌었던 돈을 떼먹자 그를 죽이고, 감옥에 가고, 포르노 배우인 친구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야쿠자와 동거하고, 그 때문에 자신을 진정 위해주는 친구도 버리고, 결국 감옥에 간 야쿠자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다시 버림받고, 스스로를 포기하고, 정신병자가 되고, 쉰살이 넘어 하이틴 스타에게 반하고, 그에게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답장을 기다리고, 환상 속에게 동생과 화해하고, 다시 삶의 의미를 찾고, 늦은 시간까지 귀가하지 않는 중딩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그 아이들의 야구방망이에 맞아죽은 마츠코는 전혀 혐오스럽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과 억압들이 혐오스러웠다. 영화는 정말 좋았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기대한 대로 역시 켄로치다운 영화. 가슴이 갑갑해지고 혼란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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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a

1981년 작품
감독 : 장 자크 베넥스

 

예쁘고 가벼운 느낌의 영화 <디바>는 아기자가힌 소품 같다. 사람들은 이 영화의 프랑스적인 요소에 매료된다. 예전에 미국과 프랑스의 팝 문화가 가졌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할 때 최근 프랑스 영화의 미진함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과 프랑스는 모두 탐정물과 프랑스의 누벨바그, 로큰롤과 1968년의 정신에 대해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70년대에 이르러 문화적인 결별이 생긴 것이다.

누벨바그는 개성 없는(트뤼포) 것이 되거나 무미 건조함(고다르) 것이 되어갔고, 프랑스인의 사상은 구조주의와 왜곡된 마르크스주의의 혼돈으로 보였으며, 수출된 영화는 간통을 소재로 한 저질 코미디들에 그쳤다.

그러다 <디바>가 매혹적인 므랭그(달걀 흰자위와 설탕을 섞어 구운 프랑스식 과자)의 형태를 띤 채 화평을 위한 선물로 다가왔다. <디바>는 프랑스와 미국의 환상, 미신, 문화, 농담과 같은 것들이 뒤섞인 소용돌이이며 이런 것들에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디바>는 현란한 색상과 패션 잡지에나 나오는 것 같은 자세로 관객들을 유혹하고 현기증 날 것 같은 즐거움으로 안내한다.

누벨바그의 최고봉인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59)와 마찬가지로 <디바>는 프랑스 남자와 미국 여자의 불행한 사랑을 다룬 영화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프랑스와 미국의 감성이 한데 어울려 추는 파드되(발레에서 두 사람이 추눈 춤)에 대한 은유가 된다. 그러나 <네 멋대로 해라>가 화려한 장식 매듭 속에서 스스로를 살펴보고 찔러보고 묶기도 하는데 비해, <디바>는 그저 즐겁게 춤출 뿐이다. 그 어떤 것도 어설픈 충고나 비유를 하지 않는다.

서른다섯 살의 장 자크 베넥스(제리 루이스의 조감독을 지낸)가 만든 최초의 영화인 <디바>는 아방가르드에서 빌료온 독특한 테크닉과 시각적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다. <디바>는 스릴러와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반반씩 섞인, 영화 만들기에 대한 매력적인 농담인 것이다.

이 영화는 영화를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플롯을 담았고, 장난 그 자체는 지루하기 때문에 서스펜스를 추구한다. 베넥스는 이전 영화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표현해내고자 하여 <디바>의 이미지는 인용 투성이에다 암시적이 되었다.

중심이 되는 사랑 이야기는 플라토닉하고 꿈결 같으며 섬세한 아치와 같다. 그 아치 아래로 살인자들, 뚜쟁이들, 해적 레코드업자들의 갈팡질팡한 추격전이 <밴드 웨건>에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시드 샤리시가 연기했던 갱 영화의 춤 동작처럼 양식화된 채 익살맞게 펼쳐진다.

열여덟 살 난 남주인공(프레데릭 안드레이)은 바짝 마르고 수줍음을 잘 타는 파리의 우편 배달부이며, 그가 사모하는 디바는 미국의 위엄 있는 흑인 소프라노 신시아 호킨스(필라델피어 태생의 소프라노 윌헬메니어 위긴스 페르난데스가 연기했다)이다. 낡디 낡은 파리의 극장에서 청중들 사이에 앉아 있던 쥘은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신시아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된다. 그녀는 한쪽 어깨가 드러난 진주 장식의 회색 비단 가운에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 귀고리를 하고 보석처럼 빛나는 치아를 드러낸다. 그녀는 눈을 뗄 수 없는 환상 그 자체이다. 신시아는 귀족처럼 고개를 까닥이면서 인사하고 까딸라니의 <왈리>에 나오는 아리아를 부린다. 도톰한 입술이 노래 가사들을 맛깔스런 음식이라도 되는 양 감미롭게 전해줄 때 목소리는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 아름답다.

쥘은 기쁨에 도취되어 울기 시작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무릎에 놓인 녹음기로 향한다. 콘서트가 끝난 뒤 쥘은 신시아의 탈의실로 갔다가 충동적으로 그녀의 진주 장식 가운을 훔치고 이 일은 신시아를 화나게 만든다.

신시아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성악가나 연주자는 청중과 직접 교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진 순수주의자인 것이다. 물론 쥘은 순전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녹음하였다. 신시아의 가운을 몸에 걸치고 동굴 같은 자신의 집에 앉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꿈을 꾼다.

그러나 두 명의 대만 해적 레코드없자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 테이프를 입수해 녹음에 응해주도록 신시아를 협학하고지 한다. 한편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테이프가 쥘의 우편 바구니에 우연히 놓여진다. 이것은 한 매춘부가 매춘, 마약 조직의 우두머리를 폭로하는 테이프여서 쥘은 경찰과 두 명의 살인 청부업자에게도 쫓기게 된다.

해적 레코드업자들과 경찰들, 살인 청부업자들은 모두 두 명씩 등장하는데 그들은 영화의 진행에 따라 차례로 나타난다. 반짝이난 선글라스 아래로 얼굴을 감추는 대만의 업자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푸 만추(Sax Rohmer의 소설에 나오는, 양끝이 턱 쪽으로 늘어진 긴 콧수염을 한 중국인 악당의 전형)의 재현인데, 그들은 힘과 인내심에 대한 점괘 과자 같은 이야기들을 중얼거린다. 반면에 호색한인 남자와 반항적인 여자로 설정된 두 경찰관은 수십 년간 미국의 영화와 텔레비전을 지배해왔던, 지루하게 수다만 늘어놓는 경찰관 유형을 패러디한 것인데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정신병자 같은 두 명의 잔인한 살인 청부업자들은 미국의 B급 영화에 나타나는 외국인 악당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두 명 중에서 머리가 약간 더 좋은 스픽은 항상 껌을 씹고, 록 그룹 샤나나의 바우저처럼 머리를 매끄럽게 뒤로 빗어넘겼다. 그리고 다른 악당 꾸레는 선글라스를 끼고 입을 삐죽 내미는데, 스킨헤드를 하고 있다. 한 명은 50년대에서 온 사나이 같고, 다른 한 명은 펑크 이후의 뉴웨이브 음악을 연주하는 록 밴드 멤버 같으며 둘의 대화는 투덜대는 록 음악 같다. 스픽은 차고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 반면, 꾸레는 차고, 자동차, 엘리베이터, 베토벤 등 싫어하는 것들에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는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이 살인 청부업자들은 얼음 송곳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어처구니없는 인물로 그려지는 동시에 무시무시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다. 베넥스는 자신의 소용돌이 같은 영화를 계속 소용돌이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디바>는 실제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처음에 쥘은 자신을 둘러싼 음모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던 알바(투이 안 루. 영화를 찍을 때 열네 살이었다)라는 이름의 베트남 소녀를 만나는데 그녀는 집까지 그를 따라온다. 쥘의 다락방은 부서진 차들과 비싼 오디오 설비, 팝 아트풍으로 그린 자동차 벽화들로 가득찬, 팝 문화 고물 수집장 같다(자동차 대신 비행기를 그린 것을 제외하면 쥘의 친구 린드버그의 방도 이와 비슷하다). 알바는 이런 쥘의 집 장식을 사랑한다.

속이 내비치는 플라스틱 레인코트 아래서 그녀가 입은 미니드레스는 핑크빛인데 이 스타일은 그녀의 세계를 상징한다. 즉 빛나는 표면 아래로 좀더 빛나는 표면이 있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알바는 빠른 말투와 섹시한 얼굴 표정에 야성미까지 지녔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 사실은 결코 위협적이거나 유혹적이지 않다. 그녀는 허구가 중첩된 이 영화의 가슴이고 영혼이다. 알바는 누군가를 매혹시킬 수도 있지만 스스로는 일종의 장난감이라 생각한다. 인형처럼 순수하고 섹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영화에서 초영웅으로 나타나는 고로디슈(리샤르 보랭제)와 함께 산다. 그는 1인용 욕조와 역동적인 조각만 두드러질 뿐 거의 빈 공간이나 다름없는 집에서 살면서 선(禪)을 신봉하는 괴짜이다. 고로디슈는 영화 속에서 외로운 방랑자이자 냉정한 왕과 같은 존재로 표현된다. 그는 별다른 노력 없이 사건을 해결하고 악당들을 속여넘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은유의 세계에서 산다. 집에 있는 것은 네온 장식부터 파도치는 조각, 그림 맞추기 퍼즐까지 모두 푸른색이고, 심지어 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옷 색깔까지도 푸르다. 등장 인물로서의 고로디슈는 비중이 크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다. 흰옷을 입은 해결사이고, 미쳐 돌아가는 사건들을 제자리에 놓는 인물인 것이다. 그가 승리했을 때 영화는 중심으로 되돌아간다.

<디바>는 아방가르드 작품이 아니라 아방가르드 스타일을 도입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고다르의 점프 컷과 포스트 아트 칼라, <셀린과 쥘리 보트 타다>, <파리는 우리의 것>에서 리베트가 선보였던 멋진 펄프 플로팅을 빌어오는데, 이런 이미지들은 누벨바그 영화에서 발견되는 달콤한 색생들과 탈중심적인 구조를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도 완벽하거나 주제가 되지는 못한다. 이들은 모두 잠깐 동안 보이는 섬광인 것이다.

<디바>는 경박함을 일종의 쾌락주의로 찬양하면서 영화 언어의 극단적인 현학을 과시하고, 형식을 살리는 동시에 형식을 비웃는, 유쾌한 딜레탕트(아마추어 예술) 영화다.

베넥스는 그럴듯하고 감칠맛 나는 인물들을 만들어냈지만, 이들은 '호감이 가는 요소의 집합'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 그들의 행동이 나쁘게 여겨질 수 없기 때문에 행하는 모든 일들이 정당하게 여겨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현실 속의 인물이 아니기에 주어진 캐릭터 바깥으로 나와 행동할 수 없다. 이 영화의 플롯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또 영화 자체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어떠한 급변하는 사건도 비현실적이라 느끼지 못하게 한다.

<7년만의 외출>이나 <심판> 같은 영화는 아예 비웃는 대사로 언급된다. 어린 소녀가 밝은 노란색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장면은 고다르가 <중극 여인> 같은 영화에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감추기 위해 사용할 법한 장면이다. 그러나 카메라를 향해 돌아서서 모택동적인 웅변을 하는 대신, 그 소녀는 전화기에 대고 플롯에 대해 상세히 수다를 떨며 이야기한다. 이것은 고다르적인 색깔로 칠해진 B 급 영화의 한 장면이다. 심지어 추격 장면에서 쥘은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가는데 경찰은 뛰어서 쫓아간다. 경찰이 어떻게 쥘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오토바이가 계단을 내려가고 꼬불꼬불한 복도를 누비는 스릴에 압도되는 것이다. 연료가 떨어지자 쥘은 오토바이를 버린다. 물론 경찰이 그를 놓치는 순간 생기는 일이다. 그러면 그때 그들이 도달한 곳은? 당연하겠지만 오페라 극장이다.

혼란스런 상황과 자유롭게 조합된 플로(베넥스와 장 방 암은 들리코르타의 스릴러 소설을 각색했다)을 통해서 베넥스는 프랑스적인 구조주의의 묘미를 전해준다. <디바>는 구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요소들을 거꾸로 구성한, 전능한 구조주의자들의 신화와 같다. 구조주의자들이 남미 원주민들의 전설 속에서 발견한, 숨겨진 운율과 대구처럼, 불명확한 운율과 대구법이 빛나는 금 세공술처럼 영화 속을 흘러다닌다.

<디바>는 인용과 조합들이 완전히 어우러질 때까지 구조 위에 구조를, 운율 위에 운율을 중첩시킨다. 영화가 끝날 무렵의 맨발 장면은 서두의 장면과 수미쌍관을 이룬다. 또 깔끔하게 연출된 레코드 상점 장면과 수색당한 뒤의 쥘의 아파트 장면은 멋진 핀볼 상가를 누비는 추격전으로 매듭지어진다. 선글라스와 우아한 흰색의 무개차의 크롬 도금에는 곡면의 영상이 비쳐지고, 선글라스의 이미지는 하나씩 튀어올라 장님을 비꼬는 농담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영화 속의 집들은 다른 집들을 모사하고 고풍스러운 흰색 승용차들은 서로를 비추어낸다. 일반적인 스토리 속에서라면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혼동되기 쉬운 두 개의 테이프도 이 영화 속에서는 구조주의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함께 공존한다. 그리고 베넥스는 화려한 인용 속에 자신의 소용돌이를 두면서 재미를 넘어 장엄함으로 이끈다. 여기에는 관객을 사로잡는 장면도 많지만 충만한 구조의 맛과 의미 있는 스릴이 있다. 이는 마치 알바가 입고 있는 비닐 코스와 같아서 표면 아래에 더 깊은 표면이 있고, 그 아래에는 좀더 깊은 표면이 있는 것이다.

그 각각의 표면들은 놀랍다.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은 베넥스와 촬영 감독인 필립 루슬로가 달콤하고 밝은 빛으로 모두를 목욕시키기 때문이다(심지어 경찰서에 있는 사람들도 밝게 보인다). 오버헤드로 찍은 사랑스러운 장면과 새벽녘의 어른거림도 있다.

베넥스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 않아 관객을 감질나게 만든다. 단편적으로만 비쳐지는 쥘의 방을 관객은 결코 이어 맞출 수 없는 것이다. 효과는 소설과 같고 문학적이다. 스크린에서 세련된 팝의 세계를 보기도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처럼 상상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것은 베넥스가 주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그의 이미지들은 영화가 잘 사용하지 않는 문을 통해 우리의 의식 속으로 살며시 들어온다.

그리고 낭만적인 화면이 펼쳐지는 동안 베넥스는 점차 철학적인 경지에까지 이른다. <왈리>의 아리아가 흐를 때마다 카메라는 미끄러지듯이 춤추고 환상은 커져만 간다. 조용하지만 사랑이 깃든 눈을 가진 쥘과 위엄 있는 차림새와 사려 깊은 매력을 지닌 신시아는 미국화한 프랑스 스타일로 바뀌면서 친구가 되고 지기가 된다. 커다란 흰색 양산을 들고, 공쿠르 광장을 산책할 때 그들은 순수하고 고귀한 사이로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쥘이 그녀의 목소리를 녹음했다고 고백하고 테이프를 틀어주자 신시아는 그 소리에 압도당하고 매혹되며 그로 인해 새로워진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반 사람은 물론이고 <디바>의 숭배자 중에도 이 영화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또는 이 영화가 의미를 흉내내지만 결국은 아마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위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프랑스 소년과 유럽적인 예술 스타일을 익힌 미국 여자를 담은 장면에서 사람들은 올리브 나뭇가지에 살짝 부는 바람을 잡아낸다. 미제 자동차와 로큰롤 갱들과 핀볼 기계의 행렬 속에서 <디바>는 수십 년 전에 <네 멋대로 해라>가 했듯이 미국에 대한 뉴스를 전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스티븐 쉬프(<세계 영화 평론 101>, 창작 시대사)



허무개그를 보는 듯한 악당들의 죽음. ㅋㅋㅋ 웃음이 절로 나왔다. 노래가 매혹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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