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나침반 1
숭산스님 지음,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 열림원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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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the compass of Zen.이었다. 禪의 나침반이다. 우리가 길을 찾고 싶을 때 사용하는 도구가 많다. 이정표, 나침반, 지도, 등대... 등등. 가장 좋은 방법은 안내인을 데리고 다니는 길이지만, 모든 길에 안내인이 따라 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임에랴.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될 존재인지... 오직 모를 뿐.을 깨닫는 여정은 지도처럼 오른쪽 왼쪽, 동서남북으로 구체적으로 길을 가르칠 수도 없고, 이정표처럼 앞으로 삼십리 남았다고 알려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등대처럼 먼저 간 이가 있어 나를 보고 그대로 찾아오면 된다고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등대는 항구에 아주 가까이 가서야 만날 수 있는 존재이지, 아직도 망망대해 한 복판에 서 있는 나로서는 등대같은 스승들이 보일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조사들의 선문답은 등대 정도일텐데, 내게는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물음과 답들이다.

오로지 나침반에 의지하여 길을 나서야 하리라.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오직 모를 뿐. 가을 하늘과 시냇물처럼 오직 투명한 정신을 유지하여 나를 찾아 나서야 할 가을이다. 여름방학부터 조금조금씩 교과서 읽듯이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 무엇 하나 남은 것이 없다.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 선불교의 차이가 설명된 것도 같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고, 오직 텅빈 마음 뿐이다. 어찌 보면 空한 것을 잡았으니 잘 된 것이리라.

그러고도 이 리뷰를 쓰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하니, 색을 찾으려 함인가. 이 책의 가르침과 길들을 나침반 삼아, 나를 궁구해야 할 것이다. 숭산 스님의 설법들을 현각스님이 잘 정리해 놓았다. 숭산 스님은 현각이라는 길동무를 만나 이렇게 좋은 책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그 곳에 있었던 분이었음에랴. 세상 종교가 절값 올리려 싸우고, 총무원장 자리 놓고 피를 뿌릴 때, 수십일 단식한 몸으로 산맥을 토막내지 말라고, 그것이 스스로 그러한 원리의 답이라고 자기 몸을 던지시던 분도 계셨음을 기억할 일이다.

본래 무일물인데, 인간은 세계를 끝없이 도륙하려 하는구나. 이번 태풍 '매미'의 충격으로 가로등이 휘어지고, 수십년 묵은 나무들이 쓰러지면서 인간에게 경고하거늘, 인간의 오만함은 갯벌을 막고 산을 토막내면서 자연에 바벨탑으로 도전하고 있으니...

조금은 전문적인 불교 입문서라고 보면 되겠다. 서양의 불교 신자들에게 한국 불교를 가르치려는 의도로 쓰여진 책이라니, 우리가 읽기에도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결코 쉽지는 않다. 불교 경전도 어려운데, 제행무상, 색즉시공, 게다가 선의 경지가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묵묵히 읽고 씹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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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님은 알지요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김향이 글, 권문희 그림 / 비룡소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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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리뷰를 읽어 보니 이 책의 내용이 지나치게 촌스럽고 옛스러움을 비평한 것이 있었다. 확실히 이 책의 소재와 이야기는 옛날 사람들의 그것이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의 가슴에 와 닿기는 좀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공간이 시골인 것은 좋다. 그리고 우리 민속을 조금씩 가미하는 것도 좋고. 그런데 등장인물들의 사건들이 좀 낯설다. 전쟁에 자식을 잃었다 다시 찾은 할머니, 그리고 집 나간 아버지가 성공해서 돌아오는 이야기는 왠지 칠십년대 신파조 생각이 난다.

이 이야기를 어린이들이 읽는다면, 어떤 부분이 가장 인상적일까. 형제가 없는 요즘 아이들은 애완견을 참 좋아한다. 맞벌이하는 부모가 비운 썰렁한 공간에 체온 가진 무언가가 있다는 건 의지가 되는 일일게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은 갈라진 가정에서 자라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이 글에서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싫어 집을 나간 영분이 엄마와, 송화의 아버지가 나오지만, 요즘 들어 정식으로 이혼하고 사는 부모의 이야기가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좋은 소재가 아닐까.

이혼하고 사는 부모 밑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이젠 부모가 돌아올 것이란 헛된 희망은 그닥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차라리 부모님의 이혼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같이 살진 않지만 혈육간의 정을 나눌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제시하든지, 형제도 없고, 부모의 정도 부족한 현실에서 어린이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줘야 하지 않을까.

물론 가장 행복한 것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라는 거겠지만, 시대적 변화를 거스를 순 없는 것이다. 장편소설 혼불에도 숱한 민속이 등장하지만, 형상화에 실패하고 있어서 겉도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에서도 왠지 작가의 아는 것을 과도하게 쏟아부으려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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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되고 싶은 화가 장승업 - 한국편 3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한국편 3
조정육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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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머리를 내젓는 말, 화려한 장닭의 모습,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매, 천연덕스럽게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 경치좋고 인습 좋은 산과 마을, 흰 도포를 느긋이 두르고 우리를 마주 보고 있는 신선... 이런 그림들이 때로는 여유롭게, 때로는 다정다감하게, 그리고 주로 곧은 선비 정신으로 다가오는 장승업의 그림들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조선의 화인을 셋 꼽으라면, 단원, 혜원, 오원을 3원이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 그 중,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뛰어난 화풍과 차이점에 대해서는 누차 들어왔지만, 조선 후기 신선같은 술꾼 오원 장승업의 이야기는 최근 취화선이란 영화로 세인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단원만 화인이냐? 나도 원이다.(吾園)는 씁쓸한 자부심을 가졌던 사내 장승업.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중국풍의 얼굴을 하고 있다. 퉁퉁하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느끼한 탕수육같은 얼굴.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바로 '매'다. 김수영이 선비정신을 '폭포'이 곧은 소리에 비유했듯이, 장승업은 썩어 문드러진 세상을 살아갈 마음의 먹줄로 매를 그린다. 날카로운 터치와 먹의 농담만으로 그려낸 무채의 세계는 너무 난잡해서 인생의 진실되고 질박함을 잃고 사는 우리의 퇴폐한 영혼에게 일체의 나타와 답보를 차버리라는 무언의 '할'을 내지르는 듯 하다. 매의 눈은 달마대사처럼 아래로 쳐졌지만, 긴장을 잃지 않는 발목의 팽팽함과 깃털의 정갈한 표현은 '명마를 기르는 행복'의 말주인이 짓는듯한 흐밋한 눈빛으로 살아가는 내 정수리를 친다.

책읽은 즐거움과 그림보는 여유와 옛사람을 만나 이야기 듣는 시공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자,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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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 블루스 1
정철연 지음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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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할인매장의 밤 늦은 시각은 도시 생활의 또 하나의 재미다. 조용한 시골의 한적함을 즐기지 못할 바에는 이런 공간의 틈새를 이용할 법도 하다. 아들 녀석과 주온2 영화를 보고 나니 열한시가 넘었다. 둘이서 사람이 거의 없는 할인매장에 가서 한 시간 너무 책을 읽는다. 낮이면 시끌벅적하던 아이들의 공간에 높이가 낮아 마음 편한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읽기엔 역시 만화가 최고다. 동화를 읽든지...

요즘들어 포엠툰, 스노우캣, 파페포포 같은 만화류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각기 다른 강점들을 갖고 있다. 마린 블루스 2권은 아직 할인 매장에 없다. 1권을 읽은 소감은 '아직'이다. 역시 인터넷에 오른 그림 답게, 재치있기는 하지만, 뭔지 허전함을 지울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허공을 짚은 것일까?

空 그 자체인 생각을 인식하려 하는 나의 '오온'이 어리석은 탓일까...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그려내긴 했지만, 성게군, 불가사리, 선인장 양 등의 형상화는 그다지 탐탁하지 못하다. 그 성격에 딱 어울리는 소재라야 하는데.. 그중 선인장 양은 조금 맘에 든다. 성게군은 남들 곁에 가기 힘들다는 건지.. 좀 어색하기도 하고...

그러나 시작만 보고 장래를 점치기 어려운 법, 마린 블루스의 2권을 보고 싶다. 작가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것이다. 젊은이의 힘을 보고 싶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시대가 힘들어 그렇지, 다들 깊은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진다. 청춘이 아니면 누리지 못할 정열과 열정과 이상의 세계를 구체화시켜 주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한 켠으로 접으면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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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여행자
류시화 지음 / 김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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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라는 땅은 지구의 블랙홀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류시화의 시선을 좇아 움직여 본 인도 사람들의 삶은 행복을 위한 여행, 그 자체이다. 늘상 '아 유 해피?'라고 인사하고, 인도 말을 하나 가르쳐 달라는 시화의 말에 처음으로 '아즈 함 바후트 쿠스헤!(오늘 난 무척 행복하다)고 가르쳐 줄 수 있는 행복의 달인들. 누가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삶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인도의 스승들은 '그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매 순간 기억하라'고 알려 준다. 신은 언제나 어디에나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달으면 불행할 일이 없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투스도 '삶에서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우리는 잃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난 이러이러한 것을 잃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말하면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늘 행복하고, 불행할 수 없으므로, 늘 '노 프라블럼'을 외치는 짧은 식민지 영어로 사는 사람들. 가장 가난하고, 가장 더럽지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신과 가까이 사는 사람들. 그 속에서 사기꾼같은 스승들도 만나고, 반딧불이로 홈시크를 고쳐준 소마의 따스한 사람의 마음. 주그누, 순다르 주그누(반딧불이, 아름다운 반딧불이)를 잊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우리는 불평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배우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인데, 우리는 얼마나 나의 신세에 대해 쉽게 불평하며 사는가. 내 자신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원숭이가 골프 경기를 방해할 때마다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신의 뜻임을 이해하는 지혜를 가지고, 우리가 창조한 어제와 내일에 마음 태우지 말고, 신이 창조하신 '오늘'을 심호흡하며 살기를 간절히 바라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고 마음 속 울림이 너무 컸던 기억이 난다. 한 5년 전이던가. 이제 다시 류시화를 만나 보니, 지구별을 여행하는 그같은 사람이 있어, 이 좁은 서재에서도 네모난 산들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감싸안고도 더럽지 않은 어머니 강, 갠지스가 내려다 보이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몇 년 마다 한 번 씩 그와 함께 인도를 거닐고, 멍하니 대지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일은 축복받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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