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는 뜻밖에 1미터가 넘는 폭설이 내렸다 한다.
자연은 이렇게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변화를 보이기도 하는데,
인간은 그런 걸 보고 이상기온이라는 둥, 기상이변이라는 둥 난리를 부리지만,
자연 앞에 인간은 좀더 겸허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음 주는 아빠가 1주일간 연수를 가야 해서 집을 비워야겠는데
스스로 할 일을 꾸준히 하기 바란다.
아빠의 문학 수업도 일 주일은 휴식이다.  

오늘은 다사로운 인간성에 대한 시를 몇 편 읽어볼까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떨 때는 한없이 초라하고 잔인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무한하게 넓은 마음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선 복효근의 '석쇠의 비유'를 읽어 보자. 

꽁치를 굽든 돼지갈비를 굽든간에
꽁치보다 돼지갈비보다
석쇠가 먼저 달아야 한다
익어야 하는 것은 갈빗살인데 꽁치인데
석쇠는 억울하지도않게 먼저 달아오른다
너를 사랑하기에 숯불 위에
내가 아프다 너를 죽도록 미워하기에
너를 안고 뒹구는 나는 벌겋게 앓는다
과열된 내 가슴에 너의 살점이 눌러붙어도
끝내 아무와도 아무 것과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고독하게 알고 있다
노릇노릇 구워져 네가 내 곁을 떠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차갑게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나는
너의 흔적조차 남겨서는 아니 되기에
석쇠는 식어서도 아프다
더구나
꽁치도 아닌 갈빗살도 아닌 그대여
어쩌겠는가 사랑은 떠난 뒤에도
나는 석쇠여서 달아올라서
마음은 석쇠여서 마음만 달아올라서
내 늑골은 이렇게 아프다 (복효근,  석쇠의 비유)

제목이 '석쇠의 비유'이니, 석쇠에 고기를 굽는 상황을 보고 뭔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관찰한 후에 깨달음을 얻었느니 <관조>라는 건 이제 알아 듣겠지? 
작가는 '토란 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의 작가란다.

꽁치나 갈비를 굽기 전에 석쇠가 <먼저> 달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다음엔 <억울하지도 않게> 달아오른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사실 좀 억울하다는 이야기다.
굽는 건 꽁치와 갈비인데, 왜 석쇠는 필요도 없이 달아 오르지?
석쇠는 좀 희생정신이 강한 넘인 것 같지?   

농담 하나 할까? 
당구장에서 배울 수 있는 4대 정신이 있대.
다이(당구대)의 넓은 마음,
다마(당구공)의 둥근 마음,
큐대(막대)의 곧은 마음, 그리고
초크(큐대 끝에 미끌림을 방지하기 위해 바르는 것)의 희생 정신. 
뭐, 당구를 쳐본 사람이라면 금세 알아듣겠지만,
당구에는 이렇게 일본어도 많이 있단다.
암튼 희생 정신을 생각해 보자는 거지. 초크처럼 ㅋㅋ  

숯불 위에서 '아픈 나'는 석쇠다.
내가 아프다~고 했으니, 석쇠가 의인화되어 있구나.
너를 죽도록 미워하기에 너를 안고 뒹굴고 나는 벌겋게 앓는다고 했는데,
앞에서는 사랑한댔다가, 이번엔 미워한댔구나.
정말 미운 건 아니겠지?
너(고기)가 제대로 익도록 하기 위해(성숙, 발전하도록 하기 위해)
나(석쇠)는 벌겋게 달아올라 앓아야 하는 희생이 필요하다. 

석쇠가 과열되어 고기가 눌어붙는 일도 있다.
그렇지만, 석쇠는 그저 희생할 뿐, 고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고기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석쇠의 고독이다.  

근데, 여기서 과학적으로 보자면 좀 어색한 게 있다.
프라이팬이라면 이 시의 의도가 제대로 먹힌다.
프라이팬이 고기를 익히는 원리는 과학에서 배운 <열의 전도>니깐.
고체를 통하여 열이 전달되는 원리를 '전도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석쇠 위에서 고기를 익히는 것은,
숯에서 나온 열기가 고기에 바로 전해지는 것이다.
마치 태양열이 인간에게 바로 전해지듯이 말이야.
그런 열을 <복사열>이라고 한다.
전도는 고체라는 매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전도는 매체가 없이도 전해지는 것이니 다른 거지.
그치만, 뭐 여기서 희생정신을 고귀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과학적인 검증은 요정도로 마치자. 

고기가 잘 구워져 식사가 끝나면,
희생한 석쇠는 다시 고기의 흔적을 지우고 식는다.
고기를 사랑하지만 고기의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석쇠의 사랑은 그래서 아프다.
식어서도 아프다. 

이 석쇠와 같이 일방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퍼붓는 사랑이 정말 큰 사랑이지.
이런 사랑은 뭐가 있을까?
부모의 사랑이 그런 거란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잘 되기만 빌어주는 사랑.
선생님의 사랑도 유사한 면이 있지.
매년 제자들이 잘 자라서 둥지에서 날아오르기를 빌어주는 어미새같은 사랑. 

더구나,
그대는 꽁치도 아니고 갈빗살도 아니다.
그대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석쇠처럼 달아올라서
당신의 무엇 하나 소유하지 못하는 존재인데,
이제 당신은 나를 떠난다.
사랑이 떠난 뒤에
혼자 남은 석쇠의 늑골(갈비뼈)는 허전하고 아플 수밖에 없다. 

간혹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는 일이 있다.
그 아비에게 이 시를 보여주면,
석쇠의 늑골을 마음 속 깊이 공감하며 느낄 지 모르겠다.
선생님들도 졸업식장 단상 위에서
졸업생 대표가 읽는 '졸업사'를 들으며 그런 마음을 느낄 수도 있겠고... 

이 시는 이별의 상황에서
당신과의 추억 하나 남지 않는 상황에서,
나 혼자 달아 올랐다가 식게 되어
서글퍼진 화자의 상황을,
고기구울 때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리는 석쇠에 비유한 것이란다. 

주제는 '석쇠에서 떠올린 사랑과 이별의 의미' 정도면 되겠지?
이번엔 임의진의 '마중물'을 읽어 보자. 

우리 어릴 적 펌프질로 물 길어 먹을 때
'마중물'이라고 있었다

한 바가지 먼저 윗구멍에 붓고
부지런히 뿜어 대면 그 물이
땅 속 깊이 마중 나가 큰 물을 데불고 왔다

마중물을 넣고 얼마간 뿜다 보면
낭창하게 손에 느껴지는 물의 무게가 오졌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이
우리들 곁에 있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무저갱으로 제 몸을 던져
모두를 구원한 사람이 있다

그가 먼저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기에
그가 먼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꿋꿋이
견뎠기에 (임의진, 마중물)

지금은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지만 불과 2,30년 전만 해도 집안에서 겨울에 뜨거운 물이 한정없이 나온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외국인들은 한국처럼 성냥곽같은 아파트를 좋아하는 성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수돗물 받으려고 밤새 양동이를 바꿨던 괴로움을 겪었던 사람들,
연탄 가스에 중독되어 학교나 회사를 쉬어야 했던 사람들,
좁은 방에 두꺼운 파카를 입은 채, 얼음어는 방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사람들,
그이들에게 아파트처럼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은 오래 바라던 공간이었을 수도 있다.  

수돗물은 어딘가 수돗물 공장에서 지하 배관을 통하여 각 가정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물'과 '펌프'는 지표 밑을 흐르는 지하수를 찾아서,
거기다 파이프를 묻어 두고 물을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우물에서는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렸고,
펌프는 '펌프질'을 몇 번 해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했다.
그런데 펌프질 하기 전에 펌프통에 물을 한 바가지 미리 부어야 했는데,
그 물을 '마중물'이라고 불렀다. 

뭔가 나오게 하려면 '마중물'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또 뭔가 의미를 발견했겠지.
역시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관조'가 되겠다. 

시어도 '데불고(데리고) 왔다', '오졌다(흡족했다, 만족스러웠다)'는 등의 사투리를 정겹게 쓰고 있다.
마중물은 땅속 깊이 마중 나가 큰 물을 데리고 오는 물이다.
펌프질을 하면 처음엔 그저 슉슉 소리가 나면서 아무 것도 나오지 않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펌프 손잡이가 묵직하게 무게감이 느껴지면서
물이 뿜어져 나오곤 했다.
그 무게가 오졌다는 유쾌한 순간의 표현이 멋지다. 

마중물에게서 배운 인생의 교훈은 <먼저 슬픔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이다.
사람이 동그라미라고 할 때, 제각기 따로 노는 원이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
동그라미들은 서로 겹치고, 그 물결무늬들이 서로 간섭하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외로이 따로 선 동그라미에게 <먼저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은 따스한 인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 마중물이 '슬픔의 마중물', '슬픔의 무저갱'으로 표현되었다.
인생의 슬픔이 극심할 때, 마중물이 되어 슬픔의 지옥에서 구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무저갱(無底坑)은 '바닥이 끝없는 동굴'이란 뜻으로,
악마가 벌을 받아 한번 떨어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한다는, 그 밑 닿는 데가 없이 깊다는 구렁텅이란다.
인생에서 그런 큰 어려움을 겪었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그런 사람을 '마중물'에 비유한 것이다.

슬프고 아픈 현실에서,
그는 먼저 눈물 흘렸고, 현실을 꿋꿋이 견딘 존재였다.
그래서 지금 화자는 슬픔을 이겨낼 힘을
그에게서 얻고 있다.
그의 존재가 마중물이 되어서 말이야. 

세상의 어려움에 모두들 무릎 꿇을 지경으로 힘들다고들 하지만,
세상에는 또 그렇게 소중한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에 아빠가 권해준 '산동네 공부방'이란 책에서도,
어떤 수녀님이 가난한 동네(부산 감천동)의 공부방 도우미가 되어,
그 힘겨운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는 이야기가 있지. 

세상에 비빌 언덕이 하나도 없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아 보이는 부모와 웬수가 되어 사는 아이들도 세상엔 많단다.
소년소녀 가장들처럼 정말 힘들게 사는 아이들도 있고.
그들에게 마중물이 되어주신 수녀님 이야기는 참 감동적이었단다.  

 

<한국의 마추픽츄, 부산 감천동>

만약에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고 했다면,
마중물이란 시와 연관지어 쓰면 멋진 글이 나오지도 않을까 싶다. 

이번엔 좀 마음 쓰라린 시를 한 편 소개할게.
우선 읽어 보렴.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자. 하게.  (어떤 네티즌,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작년에 어떤 용광로 기사가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인터넷 기사 내용은 이렇다.

*새벽에 일을 하다 실족해 용광로 쇳물에 빠져 숨진 29살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한 네티즌의 조시(弔詩)가 심금을 울리고 있다.
충남 당진군 환영철강에서 근무하던 김 모(29)씨는 7일 새벽 2시께 용광로 위에서 작업을 하다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
김 씨는 사고 당시 지름 6m의 전기 용광로턱이 걸쳐 있는 고정 철판에 올라가 고철을 끄집어 내리려다
중심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 씨의 한 동료는 "김 씨가 5m 높이의 용광로 위에서 고철을 넣어 쇳물에 녹이는 작업을 하던 도중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고 말했다.
당시 용광로에는 섭시 1천600도가 넘는 쇳물이 담겨 있어 김 씨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에 망연자실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업체 관계자 등을 상대로
안전관리 소홀 여부 등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김 씨의 안타까운 죽음은 통신사인 연합뉴스가 첫 소식을 전한 뒤, MBC 등 일부 언론이 보도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묻혔다. 그러나 한 네티즌이 트위터에 올린 조시가 인터넷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김 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정웅재 기자
http://www.vop.co.kr/2010/09/09/A00000318761.html 

 

이런 것이 문학의 기능이란다.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니?
하다 못해 다 타버린 잿덩어리라도 보아야 고인이 죽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용광로 속 시뻘건 쇳물은 섭씨 1,600도가 넘는다고 하니, 사람의 살이나 뼈는 금세 타버리고 말 거잖아.
나중에 고인의 뼛조각 몇 개를 찾았다는 뉴스도 났지만, 정말 황당한 죽음이었을 거야. 

이 조시(죽음을 위문하는 시)는
인정이 메마른 현대인들의 가슴에
촉촉한 봄비가 되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였단다. 

알지도 못할 공장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마음 아픔을 공감하는 계기를 준 시.
문학이란 이렇게 신문기사보다 더 큰 공감을 얻기도 하는 것이지. 

아빠의 시 해설을 들으면서 민우도 좀더 마음이 넓은 사람,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길 바란다.
물론 아빠고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게.
내일 저녁에도 여유가 있으면 한 편 쓸게.
혹시 바쁘면, 일 주일간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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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2-17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쇳물은 쓰지 마라..
한 글자 한 글자 녹아서 쇳물이 됩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어머니 아들의 얼굴이 됩니다.
얼굴도 모르는 그 청년의, 그 어머니의 도려낸 심장을 만지는 것 같습니다.
슬프고 슬픈 시요, 달래고 달래도 달랠 길 없는 마음입니다.
어쩌자고.. ㅠㅠ

글샘 2011-02-18 21:52   좋아요 0 | URL
정말 아픈 시죠.
방금 운전하고 오는데... 영도 한진중공업 앞에 천막치고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봤습니다.
오늘은 안추워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경찰들은 기업가 눈치보느라 가득 모여서 망이나 보고...
세상 참 무섭습니다.
 

얼마 전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개지순이가 집들이를 가서는 돈은 안 들이고
시를 읊어준다고 분위기를 잡았던 적이 있었어.
그때 읽었던 시가 이 시란다. 최영미의 선운사에서...
선운사에서... 니까, 선운사엘 갔겠지?
거기서 뭔가를 보고 뭔가를 생각했겠지? 그걸 살펴 보자.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선운사에서>

1연에서 꽃이 피는데 한참 걸리다가 지는 건 순간적이란 이야기를 한다.
4연에서 같은 구절인데, 꽃이 지는 건 쉬운데 잊는 건 한참이란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깐, 꽃의 피고 짐을 인간의 <만남>과 <이별>과 빗대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 
그러니깐, 꽃은 '자연물'이면서 '임'의 상징이 되겠구나. 

잊는 일은 참 힘들잖아. 그런데, 쉽게 안 잊히니깐,
2연에서 쉽게 잊고 싶다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3연에서 그대를 자꾸 부르고,
4연에서 잊는 건... 영영... 한참만에 잊게 된다는 건...
영영... 잊을 수 없다는 말의 반어적 표현이 되겠다.  

마치 김소월이 '먼 훗날'에서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던 표현이,
실제로 잊을 수 있었다는 게 아니라, 영영 잊을 수 없다는 말의 반어적 표현을 통한 강조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지. 
이 시의 주제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되겠지. 

최영미 시인은 1994년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집을 발표해서 갑자기 유명해 졌어.
한 해 동안 50만 부 이상을 판 시집은 거의 없거든.
1980년대까지의 시들은 참 비장하고, 장엄하게 폼잡는 걸 최고로 여겼는데,
1990년대부터는 가볍고 경쾌하게 비트는 시들이 나오기 시작했어.
음악에서도 서태지라든가 랩을 부르는 가수들이 마구 치고 나오던 시기야.
내용보다는 경쾌한 리듬 같은 것 말이지. 은지원 같은 애들이 당시 인기인이었단다.
그런데, 시도 통일을 노래하고, 민중을 노래하던,
그래서 고난을 이겨내고 의지를 가지자던 시들은 신세대의 취향에 맞지 않게 된 건지 몰라. 

세계적으로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해서 특정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이 생겨났지.
최영미 시인은 그렇게 유명해졌던 사람이란다.
고작 서른 살 살았던 주제에, 이 사람이 1961년생이니 1994년이면 33세밖에 안 됐잖아.
그러면 삶에 대한 통찰과 의지를 보여줘야하는 시인이 되기엔 젊은데,
벌써 <잔치는 끝났다>고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외친거지.
구경꾼들은 '이거 뭐야? 도대체 뭐라고 떠드는지 한번 보자.' 이런 호기심도 많았을지 모르겠다. 

암튼 그의 이별 노래를 한 편 봤으니, 대표적인 이별 노래를 한번 읽어 보자.
이형기의 <낙화>도 참 유명한 작품이야.
20년 정도 전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시란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낙화> 

이 시에서도 꽃이 지는 것을 '이별'에 빗대고 있지.
인생과 자연을 이렇게 빗대놓고 보면, 멋진 유사점들이 도출된단다.
이런 것을 관조라고 하고, 비유의 방법을 쓴다고 하지. 

내가 이 시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이란다.
하롱하롱~~을 입 속에 넣고 가만히 읊어보면 참 아름다운 마음이 되는 것 같거든.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도 읽어 보면 운율이 참 잘 멋있어 보이지.  

이 시에서는 <역설법>을 공부해 보자.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이 두 구절을 보자.
이별이 축복이래. 좀 웃기잖아.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지.
만남이 '축복'이고, 이별은 '불행'이고 뭐, 이래야 어울리잖아.
청춘이 '죽는' 것은 불행한 일인데, '꽃답게'란 어휘랑 어울리지 않거든.
나의 청춘이 비참하게 죽어야 또 어울리고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모순되는 시어들의 결합이 더 큰 강조의 효과를 드러낼 수도 있단다.
이 시를 읽어보면, 이별하는 과정에서 <성숙>을 배우게 되고,
그것은 자연에서 <낙화>를 통해 <결실>이 이뤄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관조적으로 바라본 거지. 
이런 것을 '역설'이라고 한다고 여러 번 설명했지만, 다시 저 구절들을 읽어 보렴.

옛날에 노래 가사에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노래가 있었단다.
꼭 고통을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힘든 일을 겪으면서 병이 생기고 만다면 힘든 일을 회피해야 하겠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영혼이 성숙되는 일이라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해>야겠지? 

고려 가요 '가시리'나 김소월의 '진달래 꽃'과 같이 이별의 정조가 강한 노래지만,
그 속에서 성숙하는 영혼을 발견한 통찰력이 이 시를 명작으로 만든 것 같다.
물론, 시라면 읽는 데 매끄러운 발음, 편안한 끊어읽기도 기여하는 바가 크지만 말이야. 

똑같은 역설을 말하는 시가 하나 더 있어서 소개할게.
서정주의 <견우의 노래>란 시야.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연 허어연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서정주, 견우의 노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석날이 있으려면 일단 <이별>이 전제조건이지.
이별하지 않으면 만남이 의미가 없잖아.
1년간 그렇게 간절히 바라만 보다가 1년에 단 한 번 만나게 되는 기막힌 운명.
그들의 이야기를 차용해서 시를 쓰고 있단다. 
1연은 역시 '역설'임을 알 수 있겠지?

'물살, 바람, 은핫물' 같은 것은 사랑의 장애물들이다.
전에 이 전설의 교훈이 <사랑에 빠지더라도 하는 일에 게을러지지 말자> 뭐, 이런 거랬잖아.
그러니깐, 이 시에서도 마지막에
나는 암소를 열심히 먹이고,
그대는 비단을 짜세~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단다. 

맨날 사랑한다고 발렌타인 데인 초콜릿만 사고 있으면,
소는 누가 키울거야, 소는~~~  

이러다가 견우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헤어지게 된 거니깐 말이야. 
'견우와 직녀' 설화를 차용하여 사랑의 참된 의미를 제시하려고 한 시라고 볼 수 있단다.
이별이 곧 슬픔만이 아니다.
이별은 사랑을 이뤄가는 과정이다.
이런 역설적 표현을 통해 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형상화하려고 한 것이지.

세상 만사가 <새옹지마>라는 이야기가 있잖아.
좋은 일에는 반드시 불행도 숨어 따라오게 되어 있고,
슬픈 일이라 해도 또 역시 행운도 붙어 다니게 되어 있는 것.
좋은 일이라고 그저 헤헤거리는 놈도 바보가 되고,
슬픈 일이라고 그저 머리 처박고 울고만 있는 놈도 바보라는 이야기겠다. 

변방의 노인네가 말이 한 필 있었는데, 어느 날 도망을 가버렸어.
그래서 사람들이 'That's too bad.'하고 위안을 했더니, 'Not so bad.' 이랬다는 거잖아.
근데 그 말이 암말을 하나 데리고 와서 엄청 경사가 났다는군.
(유목 민족에게 말이 하나 늘었다는 건, 농경 민족이라면 땅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지.)
또 동네 사람들이 'That's so good.'이렇게 부러워 했더니, 'Not so good.'이런 거지. 

요즘 말로 하면,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이나 까도남(까칠하고 도도한 남자) 정도 되려나? ㅋ
근데 아들이 새로 온 암말을 타다가 다리가 부러졌고, 또 할배는 '뭐, 나쁘기만 하겠냐?' 이랬다지.
지 아들 다리가 병신이 됐는데... 좀 웃긴 남자지.
근데 전쟁이 나서 동네 아들들을 다 나가서 죽었는데 그 아들은 장애인 판정을 받아서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도 되었다는 뭐, 그런 게 <새옹지마>잖아. 

민우가 이적지 해온 고등학교 생활이 무척 훌륭했다면, 그게 꼭 좋은 것만도 아닐 수 있다고 돌아 보고,
거꾸로 불만스러웠다면, 그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긍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그런 이야기겠지. 

그런 <통찰력 insight>을 가지는 일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하단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을 똑똑하다고 하고, <관조>를 잘 얻어내는 사람이기도 할 거야.
민우도 그런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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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2-10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최영미 시인을 별로 안좋아하시는군요.

글샘 2011-02-10 22:44   좋아요 0 | URL
좋다가도요...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 있다면...
이런 표현에 도달하면, 저는 시가 아니란 생각이 확 들거든요.
 

한 20년 전에 '접시꽃 당신'이란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다.
도종환 시인의 아내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게 되는데,
그 애절한 남편의 마음을 시로 쓴 것이 유명해져서 영화화 되었던 거란다.
그 유명한 시 '접시꽃 당신'을 한번 읽어 보렴.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을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접시꽃 당신)

 

접시꽃은 예전에 시골의 마을 입구(동구)나 집앞에 많이 심었던 흔한 꽃이다.
크기가 접시만 하대서 접시꽃인데,
수수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꽃이란다.
아주 화려하거나 아름답기보다는, 함께 어울려서 자기 존재를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모습이 든든한 그런 꽃이지.

죽음은 누구나 받아들이도록 정해진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뜻밖의 죽음을 맞게 되는 일은 참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한용운도 '이별을 슬픔으로만 받아들이면 사랑이 깨진다'고 님의 침묵에서 노래했듯이,
죽음을 아프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반성을 했던 것 같구나.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물론 죽어가는 이에게 장기 기증을 하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인간이 산다는 것은
주는 기쁨, 사랑의 기쁨을 배운다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면,
뿌듯이 주고 가자는 화자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시에서 몇 번이나 '남은 날은 짧지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아쉬운 마음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란다.
우리도 매일매일이 무의미하게 돌아오는 날들 같지만,
사실은 영원히 다시 살 수는 없는 날들임을 생각해 보면,
하루를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이제 아내가 죽어 옥수수밭 옆에 묻고 돌아오면서 쓴 슬픈 시를 한편 읽어 보자. 

견우 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에게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하필이면 아내를 묻던 날이 음력 7월 7일, 칠석날이었는지, 그 무렵이었는지...
아내를 묻고 오는데,
살았을 때 제대로 된 옷 한 벌 멋지게 입혀본 적 없는데,
죽고 나서 '수의(壽衣)'를 해 입힌 게 돌아보니 참 부끄럽단다. 

아내가 손수 만든 옷들일랑은 이웃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묻고 돌아오는 남편이 허한 가슴이란... 
앞부분에서는 그런 허전한 가슴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뒷부분에서는 그런 힘겨운 마음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보이기도 한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지금은 비록 이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흙이 된 당신과, 훗날 바람이 되어 떠도는 나의 넋이
다시 만날 것임을, 윤회의 미래를 믿게 된다는 이야기겠다. 

내 남아 밭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그저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밭갈고 씨 뿌리며 땀흘리는 삶을 살아야,
그렇게 나름대로 노력하며 옳바르게 살아야,
한 해 한 번이라도 당신의 넋과 만나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임을 생각한다. 

아내도 참 검소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아내와 만나게 된다하더라도, 내가 부끄럽게 산다면 얼마나 스스로 바보같겠니.
그래서 재회의 희망과 삶의 의지를 일깨워 보는 것이겠다.
슬픔을 절제하고 담담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어서 더욱 슬픔을 깊게 느낄 수 있다 

 

도종환 시인은 교육 민주화 운동을 위해 헌신한 분으로도 유명하단다.
학교도 원래 아주 권위주의적인 교장을 위시하여,
교사들도 지극히 어깨에 힘주던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던 거지.
그러다가 1987년 사회의 민주화를 거치면서 교육도 많이 민주화된 거라고 볼 수 있다. 

학생들은 물론 공부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런 현실까지 교사들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었던 것 같고,
-그런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일이라서 아직 바꿀 부분이 많다.-
교사와 교사간, 교사와 학생간의 소통이 예전에 비하면 많이 자연스러워 졌을 게다. 

이런 힘든 운동에 참여하면서,
힘을 모으자는 의미로 지은 시가 '담쟁이'가 아닐까 한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

담쟁이 넝쿨(또는 덩굴)은 조그마한 보잘것 없어 보이는 식물이지만,
참 끈질긴 놈이다.
어지간히 가물어도 말라죽지 않고,
겨우내 추운 바람 맞으며 담벼락에 말라죽은 것처럼 붙어있다가도,
봄이 되면 빠알간 새싹을 내밀곤 한다. 

이 시에서 '벽'은 말 그대로 벽이다. 가로막힌 벽. 장애물.
높은 벽을 보면 좌절감, 절망감이 생기겠지?
그렇지만, 담쟁이는 혼자가 아니라서 그걸 넘는 힘이 난대.
그걸 연대의식, 연대감이라고 하지. 

연대하는 방식은, <서두르지 않고, 꼭 여럿이 손을 잡고> 가는 거란다.
혼자서 열심히, 성실히 살려고 해도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진 않는다.
친구와 동지가 옆에 있어야 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지 

담쟁이 잎이 저 절망스런 벽을 넘는 방식.
거기서 화자는 인생의 멋진 면을 발견하고 있구나. 관조.
담쟁이의 생태에서 인생의 묘미를 발견하는 관저적 시선. 

주제는 <연대를 통해 절망을 극복해가는 담쟁이의 놀라운 생명력>이 되겠지.
세상은 혼자서 살 수 없다고 하지.
그건 친구가 있고, 형제가 있어야 한다는 좁은 의미는 아니란다.
넓게 본다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힘을 합치는 것이 삶의 방식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걸로도 볼 수 있겠지.
내일은 졸업날이라 좀 한가하지?
보람찬 하루를 잘 계획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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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2-1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담쟁이 시 참 좋아했습니다.
앞 구절 읽을때 왠지 힘을 줘야겠다는 생각도 하면서요.
이제 수험생 아버지가 되셨네요.
화이팅입니다^*^

글샘 2011-02-10 19:08   좋아요 0 | URL
감동적이지요. ^^
벽을 넘는 담쟁이. 그걸 볼 줄 아는 시인의 눈.
수험생 아버지는 뭘 해야 할까요? ㅋㅋ
 

시 중엔 사랑시도 많고 순간의 예리한 포착이 재미있는 시들도 많다.
그렇지만, 시험에는 되도록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작품들을 제시하도록 구상하다 보니까,
자꾸 비판적 시각이 들어간 시들이나
문제 상황의 부정적 현실이 강조된 시들, 그리고 희망을 노래한 시들을 주로 설명하게 된다.
오늘은 기분 전환 겸, 사랑 노래 몇 편을 소개할까 한다. 

우선 김남주의 <사랑 1>을 읽어 보자.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김남주, 사랑 1>

어떤 면에서는 인간은 지구를 망치는 말종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사랑은 위대하기도 하다.
그래서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도 하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인간미>라는 말은 인간의 아름다운 측면이 진하게 드러났을 때 쓰는 말이다.  

  

단테가 쓴 <신곡>에 보면, 단테는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한다.
<인간미>라는 어휘는 '천국'에 속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연옥'이 천국으로 가기 전의 공간이니 거기 있을 수도 있겠고... 

봄을 기다림... 희망이겠다. 희망은 오로지 사랑에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했고,
희생... 오로지 사랑만이 희생할 수 있다고 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했다.
이 말은 그만큼 '지금 - 여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겠구나.
now-here... 하이픈 하나만 옮기면, no-where가 된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인생과, '어디에도 없는' 삶.
오늘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주희)'가 말했다. 

현실과 오늘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미래를 위하여 사랑의 씨앗을 뿌릴 줄 아는 존재인 것이 인간의 긍정적 면이 되겠다.
마지막 연에서 '가실'은 수확이다.
인간은 공동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존재이므로, 수확의 결실을 '나눌 줄' 안다. 

이 시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은 아니다. '사랑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 사고에 가깝겠다.
평이한 시어를 쓰고는 있지만, 인간이 지닌 사랑의 가치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다음은 엄청 유명한 시를 한 편 보자. 

내 마음은 호수(湖水)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 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명, 내 마음은>


은유 설명할 때 잠시 등장했던 시 되시겠다.
은유는 '유사성'에 기초한다고 몇 번 이야기했지? 유사성을 찾는 것이 잘 읽는 비법이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을 어떤 사물에 비유한다.
그리고 2~4행에서 '그 이유는요~' 이러고 설명하는 것이다. 

1연. 내 마음은? 호수입니다.
그 이유는요~ : 그대가 노저어 오기만 하면 그대 배 앞에서 옥같이 부서지는 호수예요.
                     그러니깐, 내 마음은 당신의 접근을 전혀 꺼리지 않는 존재란 거죠.
2연. 내 마음은? 촛불입니다.
그 이유는요~ :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촛불이에요.
                     그러니깐,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거예요. 
3연. 내 마음은? 나그네입니다. 
그 이유는요~ : 그대 피리소리를 들으며 밤새 귀를 기울이고 싶어서요.
                     그러니깐,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거든요.
4연. 내 마음은? 낙엽입니다.
그 이유는요~ : 잠시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을 뿐이거든요. 
                     그러니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지만요.
                     저를 싫어하신다면, 저는 나그네같이 고요히 사라질 거예요. 

이렇게 오로지 주기만하는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다.
좀 징그러울 정도로 사랑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지.
전에 이 시를 통해 '패러디'하는 시험을 냈더니, 어떤 넘이
'내 마음은 연필이요. 내 안에 흑심 있소.' 이렇게 적었더라.
참 멋진 유사성을 발견했지?
패러디에서는 이렇게 언어유희도 필요하니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투를 '하오체'라고 그래. 조금 높인 말투가 되겠지.
이 시의 주제는 <사랑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덧없음>도 들어 있단다.
사랑은 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기도 하는 것이거든.
인간의 마음은 자주 변하는 것이니 말이야.

다음엔 '그 여자네 집'의 시인 김용택의 '들국'을 읽어 보자.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 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 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여, 뭔 소용이다요. <김용택, 들국> 

'들국'은 들국화를 이르는 말이야.
이 시에서는 '뭐헌다요?'나 '뭔 소용이다요?' 같은 표현이 반복되고 있어.
헤아려 보니 9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그 뜻은 '소용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그런 것이다.
내 마음은 <마른 지푸라기> 같고, <허연 서리>만 끼어 가고, <어둠 천지>이다.
이 가을이 다 지나도록 서리밭에 하얗게 피어있는 <들국>이다. 

앞에서 김동명이 <내 마음은요~>하고 비유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강렬하지 않니?
당신이 없어서 내 마음은 쓸모없는 지푸라기 같고,
덜덜 떨리는 서리 같고, 세상은 온통 어둠 천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리가 내리는데도 아직 지지 않고 피어있는 <들국>처럼 당신을 기다린다.

병신 바보 천치같이 보이지만, 화자의 순정은 얼마나 열렬한 것이냐.
그리움과 푸념으로 가득한 이 시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한없는 기다림'을 강렬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한 화자의 생활이 잘 담긴 좋은 시로 보인다. 

지난 1월 22일 박완서 선생님이 타계하셨다.
국어 교과서에서 '그 여자네 집'으로 친숙한 소설가였는데...
사람은 한 번 오면 한 번 가게 마련이지만, 아쉽다.
선생님 덕분에 익숙한 시, 그 여자네 집을 아련한 마음으로 한번 읽으며 마치자.
설명은 필요 없겠지?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하,면…… <김용택, 그 여자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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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눈감고 살 수도 있지만,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하던 고 전우익 할아버님의 책 제목처럼,
현실의 변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지혜이기도 할 거다.

오늘은 독재 시대의 획일성을 읊은 김명수의 <하급반 교과서>를 한번 읽어 보자.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도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 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김명수, 하급반 교과서)

이 시는 참 쉽죠~~잉~~하던 박지선을 흉내내도 되겠다.
아이들이 글을 읽고 따라 읽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획일성과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다.  

<읽기에도 좋아라>는 반어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화자의 귀에는 <쓸쓸한 책 읽기>로 들리는데 <좋아라>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좋은 시는 쉬운 속에서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엔 '정 양'의 '물 끓이기'를 읽어 보자.
민우도 라면이나 자장면 삶아 먹기를 즐기잖아.
집에서 매일 흔하게 접하는 물 끓이기라는 행동 속에서 화자는 대단한 것을 발견하고 있단다.
우선 읽어 보자.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 수거비 받으러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배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 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정양, 물 끓이기)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
끓어오르는 것은 분노와 울분을 토하는 일이 되겠지.
아빠도 뉴스를 안 본 것이 꽤나 오래 되었다.
뉴스를 볼 때마다 끓어오를 일이 너무 많아서 혈압이 높은지도 모르겠구나. 
소시민은 현실 속에서 화가 나는 일이 너무도 많게 마련인가 보다.
그런데,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화자는 자신보다 냄비 속 맹물이 나아 보이고 있다. ^^
국수 끓이는 맹물 속에서 자아 성찰을 하다니... 대단한 내공이지 않니? 

2연에서 다산 정약용의 <증문(모기를 증오함)>과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인용한다.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 시기의 혼란을 비판한 다산 선생이나,
1960년대 독재 사회의 소시민적 자아를 비판한 김수영의 시를 떠올리면서,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더럽게 끓탕을 치고 있고,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이고,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고 느낀다. 

혈식을 일삼는 모기는 '현실의 작은 불편을 주는 대상'으로서 탐관오리가 될 거고,
호랑이, 구렁이는 부정, 불의의 모순의 원인이 되는 존재로서 거대한 권력의 횡포가 될 거다.
국가의 구조적 모순보다 사소한 수탈이 더 열받게 한다는 이야기다.

다산과 김수영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국가가 썩어 빠져서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지식인은 국가가 망해가는 모습을 바로잡는 요구를 해야 옳지만,
그런 큰 일을 하지는 못하고,
그저 사소한 일에나 화를 내고 있다는 자기 반성인 것이지. 

그래서 3연에서 '사소한 일에 끓어넘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우랴~ 하는 것은,
거대한 부정적 횡포가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심정이다.
국가가 농민의 재산을 착취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비아냥은,
조선 시대에도 '양반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었고,
독재 시대에도 '부자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었다.
이런 권력의 부정에 속 끓이는 일 없이,
그저 사소한 다툼에만 몰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바람은 사실 희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화자의 소망, 바람은 마지막 연에서 집중되고 있다.
배가 고파 제 배나 채우려는 소시민적 나약함은 잊어 버리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것이 화자의 소망이다.
부정한 것과 싸우는 것의 정당함을 잊지 않겠다는 화자의 내면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시는 자기 반성적이기도 하고, 현실 비판적이기도 하다.
물 끓이기를 통하여 <소시민적 행태에 대한 반성과 현실 비판>을 하는 것이 주제가 되겠다. 

한국 사회는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옳은 소리 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회가 되었다.
바른 소리를 하면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감옥엘 보냈다.
부정한 것에 대한 당당한 비판과 분노는 정당한 삶인데도,
부정적 현실은 그런 비판에 익숙하지 않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소시민적 나약함은 사회의 부정에 대해 묵인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는 시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단다.
각종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이 그렇다.

작년에 G 20 (group of 20)이란 자본가들의 행사 포스터에
'쥐 20'(발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이란 풍자를 담은
그래피티를 그린 대학 강사를 구속하였다가 벌금까지 매긴 일이 있었단다.
공공 시설물에 낙서를 하는 것은 벌금을 매길 수 있는 일이지만, 구속까지 하는 것은 좀 웃긴 일이었지.

그러면, 위에서 나온 김에 정약용의 '증문'을 한번 읽어 보자.  

사나운 범 울밑에서 울부짖어도 나는 코골며 잠잘 수 있었고
구렁이 꿈틀대며 처마 끝에 매달려도 드러누워 그 모양 볼 수 있지만
한 마리 모기 소리 귓가에 들릴 때는
간담이 서늘하고 기가 막혀서 오장이 죄어들고 끓어오르네.//
부리박아 피를 빨면 그로 족하지
어이하여 뼛속까지 독기 불어놓는고
베이불 덮어쓰고 이마만 내놓는데
어느새 울퉁불퉁 혹이 돋아서 보골보골 부처님 고수머리 되고 마네.//
내 뺨을 때려 봐도 헛치기 일쑤이고
넓적다리 때려 봐도 모기 이미 달아난 뒤
힘든 싸움 공은 없고 잠만 못 들어
지루한 여름밤이 일 년보다 더 길구나.//
지극히 작은 몸에 그렇게도 천한 것이
어이하여 사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는고
밤에만 다니는 건 도적을 배운 거고
혈식은 한다지만 성현이라 그렇겠나.//
지난 날 대유사서 교서할 적에 푸른 솔 하얀 학이 마당 앞에 벌여 있고
유월에도 파리 얼어 날지 못할 때 대자리 깔고 앉아 매미 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흙바닥에 볏짚 깔고 사는 신세
내가 부른 모기이지 모기 허물 아니로다. (정약용, 증문(憎))

 이 시를 5부분으로 나눠 보았다.
5번째 부분에서 정약용이 <대유사서 교서>란 벼슬을 할 때는 파리 한 마리 얼씬도 못하더니,
지금은 귀양가서 권력을 놓치고 나니 모기(탐관오리)가 덤빈다는 이야기다. 
정약용은 귀양이란 힘든 상황에서도 온갖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특히, 그는 조선 후기 사회의 어지러운 '관리'들에게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니,
그리하여 <목민심서>라는 책도 지었던 것이다. 

다음엔 김수영의 시를 읽어 보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1연)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2연)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3연)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4연)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5연)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6연)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7연)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8연)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1연에 <왕궁>, <왕궁의 음탕>을 욕해야 마땅하다는 인식이 등장한다.
왕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니 바로 <박정희>라는 독재자를 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3연에서 <언론의 자유>나 <월남 파병>처럼 반대해야 할 사안에 정당하게 저항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화자는 그러지 못하고 만만하고 사소한 일에만 화를 낸다.

2연의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은 만만한 대상이고,
3연의 <야경꾼>은 만만한 대상이고,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7연의 <이발쟁이>도 욕을 들어주는 사람일 뿐이다.

4연에서 <나의 옹졸함>은 유구하고(오래되었고) 이제 나에겐 '정서'처럼 익숙해 졌다.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간호사들과 거즈나 개고 있는 화자에게
옹졸하게 남자가 간호사들 옆에서 시시한 일이나 한다고 놀린 적이있는데, 그때부터 난 옹졸했다.

5연에서 자신은 여전히 옹졸하다고 말한다.
아주 자조적(스스로를 비웃음)이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어린애 녀석의 투정에도 진다>
화자는 스스로 너무도 자신감이 없기에 은행잎도 가시밭길처럼 여겨진다.  

6연에서 화자는 <절정>위에 있고 싶지만,
지식인이라면 뜨거운 화제에 대하여 <부글부글 끓고> 싶지만,
화자는 비켜서있고, 비겁하게 살고 있다. 

마지막 8연에서 스스로의 왜소함을, 부끄러운 나약함과 소시민성을 반성하고 있다.
바람보다 먼지보다 풀보다 자신은 작아 보이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을 깨닫는 진지한 자기 반성>이 되겠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발견한 새로운 관점을 자랑하듯 써서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화자는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드러냈다.
자조적인 어조로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이렇게 강렬하게 스스로 반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을 반성한 것도 되지만, 시대와 지식인에게 반성을 촉구한 것도 된다.
주제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을 깨닫는 진지한 자기 반성> 정도가 되겠구나.  

화자는 <절정>위에 서는 삶을 지향하지만,
<절정>위에 선 삶은 언제나 가혹한 시련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오늘 읽은 시들 역시 시대를 아파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 시들이다.
시를 읽고, 해설을 읽으면서,
인간의 언어가 화자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
유사한 경험을 빗대서 <비유법>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그래서 글을 쓸 때,
유사한 것을 찾아 쓰는 <유추>하는 글쓰기가 얼마나 효율적인지도 생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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