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어 사전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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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낯선 용어들이 종횡무진 달리는 대자보를 통해서 익숙하지 않은 개념들을 머릿속에 저장하곤 했으리라. 

인문학, 철학, 사회과학 등에서 쓰이는 용어들을 사전처럼 풀어쓴 책인데, 여느 백과사전과 확연히 다른 점은, 작가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개입시켰다는 것이다. 

사전이란 것이 물론 작가의 편찬 의도에 따라, 그리고 철학에 따라 전혀 다른 기술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남경태의 서술 의도를 살펴본다면, 자본주의 국가에 살면서 현대인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전 식으로 써보겠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컴퓨터 모형화와 모의실험을 통해 사용자로 하여금 인공적인 3차원 시각적 및 그 밖의 감각적 환경과 상호반응하게 하는 기술(브리태니커의 가상현실) 

가상현실(假想現實)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가공의 상황이나 환경을 사람의 감각기관을 통해 느끼게 하여 사용자가 몰입감을 느끼고 상호작용하게 하는 기술을 말한다.(위키백과) 

보통 백과사전이라 하면, 이렇게 뻣뻣한 용어로 무미무취한 건조체로 기술해서 읽을 맛을 똑, 떨어뜨리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의 가상현실을 보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야반도주했다. 한국전쟁... 이승만은... 도망쳤다. ...걸프전쟁은 현대전의 양상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가상전쟁이었다. 불과 42일만에 15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이 가상이라면 의아스럽겠지만 전쟁의 성격은 그러하다... 

이 정도만 살펴도,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를 알겠다. 
개념 잡기에는 너무 어려운... 허섭한 번역본들로 머리통을 굵혀온 저자로서는, 이런 책 하나쯤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겠지.
그런 의미에서 18세기 세계를 휩쌌던 지식의 폭발에 연유해 나왔던 백과사전의 기술을 받아들인 자들이 '실학자'였다면, 21세기 유목의 시대로 변화해가는 시대에 진정 '개념있는 인간'은 남경태도 들어가겠다.

이 책을 읽고 큰 도움을 얻을 만한 사람은... 글쎄다. ^^
대학생 1,2학년 정도라면, 많은 서적을 접하고 나서 한번쯤 만나도 좋을 법 한데...
내가 이 책을 반긴 이유는... 고딩들에게 '언어영역' 셤문제 내기 좋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객관성과, 적당한 자기 생각과, 적당한 길이와 쉬운 내용이 고딩들에게도 읽힐 법하기 때문이다. 

사전을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일은 거의 없겠지만... 나도 이 책을 다 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문제 만들 때, 수시로 뒤적거려 볼 것 같은 예감이 마구 밀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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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 조선 후기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화 변동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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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의 '고전 산문 산책'이란 책을 얼마 전에 읽었는데... 많은 부분 겹친다. 그의 '프로페셔널'과도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정민 선생의 글은 워낙 여럿 읽은 터라, 읽은 내용들이 많다. 그의 '미쳐야 미친다'와 함께 나눈 부분도 많다.

이 책은, 정민 선생이 쓴 논문들을 열두 편 뽑아 모은 책이다.
18세기... 서양은 산업 혁명의 시대가 개막된 시대고, 중세가 문을 닫으면서 땅따먹기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대다.
그 서세동점의 시기에... 중국은 개벽을 한다.
주자학, 곧 성리학이 본좌를 이탈하고, 서학이 자리를 튼다.
조선의 지식인들도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으면서, '도'의 진리를 찾지 않고, '실사'에서 '옳음'을 발견하려 한다. 우주의 본성에 대한 이치의 탐구로서의 성,리,학이 붕괴되는 시대.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거대한 모순의 용틀임>의 시대라고 한단다.(52)

그 시대를 두 글자로 줄이면, 통변, 이겠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원리다. 궁하니 변해야 했고, 그래서 통하려 했으나...
정조는 문체 반정으로 잃어버린 수십 년을 돌이키려 한다.
바가지로 벼락 막는 셈이다. 

세상의 도를 탐착하기보다는 '벽'과 '치'에 몰두한 사람들.
꽃이나 차, 책이나 여행, 그림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
그리고,  <과거>라는 허상을 좇고, 입신양명의 꿈을 평생 꾸던 구차한 삶에서 눈을 획, 하고 돌려, <거짓 나를 쫓느라 잃어버린 참 나를 되찾는 일>에 착수한 사람들...(31)

 18세기 지식인들의 의식 전환을 저자가 몇 가지로 정리한 것은 적어둘 만 하다.
1. 정보가치의 우선순위를 바꿔 지식 경영의 중요성을 강화했다.
2. 외국 문화를 개방된 자세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3. 실천적 지식을 쌓았다.
4.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여 주체적 문화 역량을 강화하였다.(82) 

요즘 세상을 보면 참 우습다.
컴퓨터와 영어같은 '도구'가 '콘텐츠'를 역전하여 '실용'이란 우스갯소리와 함께 쓰이고,
오바마는 안한다는 협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 애쓰는 딴나라당의 노력이 참 가관이다.  

어느날 술에 취해 아침에 일어난 송욱은 방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제자리에 있는데, 정작 이불 속에 있어야 할 자신이 사라진 것을 깨닫는다. "내가 없어졌다!" 박지원, <염재기> 

마치 카프카의 변신과도 같은 이야기들은 당시 지식인들의 의식 세계에서 일어났던 공황상태와도 같은 혁명적 변신을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박지원은 다시 이야기하지 않는가.
눈을 뜨고 보니 세상을 도대체 찾아다닐 수가 없다고. 그래서 눈을 감고 가려는가 하고... <재맹아>
새로움의 시대에 경악하지 말고 열심히 배우고 받아들여야 하거는...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가자고 난리부르스를 떨어서 어쩌자는 건지...

정체성 상실의 비극적 결과는,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뉴타운이란 설탕 공약에 꼬여버린 돈의 노예들... 

정민 선생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이가 연암 박지원이다.
그의 법고이지변 창신이능전... 옛것을 본받으나 변화를 알고, 새것을 만들어도 고전을 본다.
변화에 옛날에, 혁신에 올인하다가 결국 아무 것도 남은 것 없이 쪽박차는 자들은 연암을 보아야 할 지니... 

정민 선생이 이 책을 엮으면서 붙였을 법한 제목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내용이 분별될 만큼, 정성들여 소제목들을 붙였다. 아래 세목까지 적어 둔다. 

서설
18세기의 미친 바보들
정보 검색의 대가들-새로운 경의 탄생/ 좋아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편집광들, 세계의 질서를 편집하다/ 나는 나다/ 꽃에 미쳐 정원을 꾸미다/ 지식 시장의 확대와 도서 유통/ 나는 존재한다, 고로 기록한다/ 다시 18세기를 위하여

1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과 세계 인식
1. 18세기의 문화 개방과 조선 지식인의 세계화 대응 
문화 콘텐츠의 변화와 실학 코드/ 편집되는 정보들 그리고 집체 작업/ 세계화의 경쟁력, 우리 것에서 찾는다/ 대변혁의 시대, 변해야 남는다

2.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벽'과 '치' 추구 경향
자의식과 집단 의식/ 벽과 치 추구 양상 

3.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 변모와 그 방향성
분열하는 '나'/ '가짜 나'와 '참나'/ 나만의 '나' 

4. 18,19세기 문인 지식인층의 통변 인식과 그 경로
의고와 창신의 길항/ 재맹아 설화와 주체의 문제/ 구진론과 조선풍

2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지적 경향
1. 18세기 산수유기의 새로운 경향/ 소품적 특징
2. 18,19세기 문인 지식인층의 원예 취미/ 정원 경영
3. 18세기 지식인의 완물 취미와 지적 경향/ 호기심과 정리벽, 발합격과 녹앵무경
4. 18세기 원예 문화와 유박의 <화암수록>
5. 이덕리가 지은 <동다기>의 차 문화사적 자료 가치

3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과 내면 행간
1. <동사여담>에 실린 이언진의 필담 자료와 그 의미
2. 18세기 시단과 일상성의 시세계
3. 18세기 우정론의 맥락에서 본 이용휴의 생지명고 

오자 발견, 
52쪽의 '거대한 모순의 용트림'은... '용틀임'으로 바꿔야 한다. 
참고로 사전에서 용트림과 용틀임을 찾아 본다. 

용트림 [龍트림] [명사] 거드름을 피우며 일부러 크게 힘을 들여 하는 트림.  

용-틀임  -틀임  1 [민속]용의 모양을 틀어 새긴 장식. 2 이리저리 비틀거나 꼬면서 움직임 

그리고 지은이가 <체재>라는 말을 즐겨 써서 그 뜻을 '체제'와 견주어 본다. 

체재3    생기거나 이루어진 . 또는 그런 됨됨이. ‘형식’으로 순화.
비슷한 말 : 체제2()
예 : 작품의 구성과 체재, 체재를 개편하다, 체재를 갖추다, 체재에 구애되지 않다

체제 2 [體制]
1 같은 말: 체재(體裁).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3 일정한 정치 원리에 바탕을 둔 국가 질서의 전체적 경향. 
 
체재를 형식으로 순화한 걸로 봐서, 일본어에서 온 표현인 모양이다. 체제로 씀이 옳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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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8-12-26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민 선생의 글은 꼭 읽고 싶어요~~
용틀임과 용트림이 그런 뜻이 있었군요.

http://blog.aladdin.co.kr/trackback/borim/2478991
책 골라주세용~~

글샘 2008-12-27 20:11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사서 읽어 보셈.
요즘은 교육청에 계셔서 시간이 없으시겠군요. ^^
즐건 연말 보내세요.
 
루시퍼 이펙트 -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필립 짐바르도 지음, 이충호.임지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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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밀어내고 있다...
고등학교들이 교칙을 위반하는 녀석들을 학교 평판을 명목으로 내쫓는다는 이야기다.
학교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는, 썩은 사과들을 내쫓는데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전혀 준비되지 않은 학교에 썩은 사과를 마구 반입시킨 1996년 교육 개혁을 욕하기도 한다. 착실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만도 벅찬 교사들에게 썩은 사과 한 알은 엄청난 에너지 낭비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썩은 사과가 학교를 어지럽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썩은 사과의 '본성'보다는 썩은 상자, 또는 썩은 상자 제조 과정의 '시스템'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하는...

루시퍼 이펙트...는 심리학 이야기다.
얼마전 읽은 필립 짐바르도의 '타임 패러독스'가 지루한 이야기의 연속이라면, 이 책은 별 다섯이 부족하고 어떤 추리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읽는 데는 며칠이 필요했지만, 술을 마시고 와서도 보고 싶고, 아이들 입시 상담으로 머리가 띵할 정도로 눈알을 굴리고 와서도 새벽 3시가 넘도록 보고 싶은 책이었다.

아부그라이브라는 이라크의 한 교도소에서 평범한 미국 병사들이 싸이코 짓을 했다.
포로들을 발가벗기고 온갖 추잡한 사진을 남긴 것이다. 시신 옆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난징에서 대학살을 저지른 일본군들이 대가리를 조르르 세워놓고 그 옆에서 웃으며 찍은 사진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미국은 썩은 사과를 문제삼았으나... 필립 짐바르도는 썩은 사과보다는 '썩은 상자'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평범한 사람도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악한이 될 수 있다.
어떤 교사라도 학생부 교사의 악역을 맡게 되면 입에서 험한 소리가 툭툭 튀어나오게 되어있고,
예비군복 입혀 놓으면 아무데서나 오줌누고, 동작이 굼떠지며, 8자 걸음을 걷게 된다.
사람보다 조건과 상황이 문제를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사람들은 결국 그들이 연기하는 역할 그 자체가 된다.(251)

이 책이 재미난 것은,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421)이나, 간호사의 복종 모의 실험(430), 나치만들기 등의 실험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겠죠.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거야.
하지만 그때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는 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433)

아부그라이브 교도소뿐만 아니라, 나치의 살해와 삼청교육대의 살인처럼 상황이 인간을 복종시킨 역사의 사례는 끝도 없이 많다. 그런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도 정상인 아이히만이 수백만 유대인의 학살을 직접 주도하게 된 사실을 밝힌다. 대부분의 사람은 특별한 상황에 처하면 극단적인 폭력을 휘두르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여기서도 확인된다.

  • 제 잘못입니다
  • 각별히 유의하겠습니다
  • 제 책임입니다
  • 나에게는 나만의 정체성이 있다
  • 정당한 권위에는 복종을 부당한 권위에는 반항을
  • 집단에 속하길 원하되 나의 독립성을 소중하게 여긴다
  • 틀에 대해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 균형적인 시간관을 갖는다
  • 안보라는 환상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지 않는다
  • 나는 부당한 시스템에 반대할 수 있다

    이런 것들로 루시퍼 이펙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제시하지만, 부당한 시스템은 언제나 개인의 존재를 묵살하고도 남는 힘을 갖고 있기에, 문제의식을 갖게는 하겠지만, 정말 벗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천사 루시퍼가 사탄으로 변하기까지의 '신곡'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무서운 이야기를 졸깃하게 들려준다. 무서우면서도 재미있는 이 책은 너무 무거워서 두 권으로 분책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사진을 곁들여 재미를 더해준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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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루시퍼 이펙트 책을 받고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12-29 10:47 
      * 책을 읽은 후의 감상문을 독후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책을 받은 후, 책을 읽기 전의 감상문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어제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을 받았습니다. 처음 책을 소개 받은 것은 ‘로쟈’님의 서재에서 보았는데, 구입하고 싶은 책이지만 조금 가격이 나가는 지라 할인 폭을 확대되면 구입하려했습니다. 그러던 중 ‘글샘’님의 서평을 읽고 나서 참지 못하고 구입했습니다.  책의 내용을 미디어에서 소개받은 후 오랜 논쟁의 주
     
     
    마립간 2008-12-26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의 서평을 읽고 <루시퍼 이펙트>를 구입했습니다. (원래는 기다렸다가 할인 폭이 조금 커지면 구입하려 했습니다.^^) 혹시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진단명 사이코패스>를 읽으셨는지요?

    글샘 2008-12-27 20:07   좋아요 0 | URL
    ^^ 낚시에 걸리셨군요.
    거짓의 사람들은 봤습니다. 사이코패스는 못봤구요.
    악인이란 무엇인지, 스캇 펙이 늘 관심을 갖는군요.
    이 책은 상황에 따라 인간은 악해질 수 있단 얘깁니다. 즐독하셈~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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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학자들, 또는 한문학자들, 또는 역사학자들의 글들을 읽노라면, 지들은 뭘 아는데 독자인 우린 도통 모르는 것처럼 자격지심을 느끼게 하는 글투가 은연중에 읽히곤 하는데, 강명관이란 이 사람의 글은 때론 통쾌하고, 때론 정겹다.

    일본 천리대학에서 만난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로 시작해서 끝나는 이 책을 쓴 강명관은 '조선의 뒷골목 풍경'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내가 알 정도면 유명하지 않을까? ^^)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래, 그래 하면서 혼자 공감이 되어 방방 뛰었다.
    구텐베르크 금속 활자의 가치는, 그 활자로 민중을 위한 성경을 찍었고 그것이 종교 개혁이란 역사적 사건으로 발전된 데 있다.
    고려의 1234년 고금상정예문(도대체 그 책이 뭐하는 건지 누가 아냐? 쳇)과 1377년 직지심체요절(잘도 외운다. ㅎㅎ 이게 역사 교육의 필요성이냐? 쳇!)을 찍은 금속활자는 조선조에 와서도 왕조의 변명에만 쓰일 뿐, 역사적으로 불필요한 도구였으므로 전혀 자랑스러워할 것이 없다는 그의 논조에 나는 새벽 세 시를 넘겨 가면서 혼자서 감격하였다. 뭐, 초저녁에 낮잠을 잤으니 밤늦은 독서라도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의 글을 읽는 맛은 잠들지 못하는 데 비하면 신선하고 즐거운 것이었다.

    홍대용 : 중국에도 주자와 철판이 있는지요?
    중국인 : 모두 목판을 쓰고, 철판과 주자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중국에는 금속활자 인쇄가 없다는 것 아닌가.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민족의 문화를 말하는 사람이면 언필칭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떠들지만, 그 활자로 찍은 책이 과연 유리창과 융복사에서처럼 쌓여 팔렸던가, 아니, 책시장이란 것이 있기는 했던가.(
    221)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산의 저작은 당대에는 결코 잉크 맛을 보지 못했다. 다산은 자신이 당면한 사회현실을 절절히 발언했으되, 그 발언은 저작의 형태로 유포될 수 없었던 것. 다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박제가의 북학의가 그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 역시 그러했다. 이른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이 저 귀중한 저작들에 왜 그리 인색했던가. 한심한 일이다.(300)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의 글에서 가장 멋진 구절은 이황, 훌륭할 것도 별로 없다! 이런 구절(은 그가 쓰지 않았지만 ㅋ) 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퇴계보다는 그를 화폐에 안치한 국가주의가 싫다. 그 국가주의를 걷어낸다 해도 퇴계는 여전히 별로다. 퇴계가 생각했던 이상적 인간과 사회가 나의 세계관과 어긋나기 때문이다...(86) 히야... 한문학과 교수가 이런 말도 할 수 있구나... 새로운 경험이다.

    내가 읽은 조선문학사상사...들에는 대학원까지 나온 나도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는 성,리,기 등의 용어를 그럴싸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그것이 중세의 논리일 뿐, 별것 아니라는 말을 듣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 당시에 주자학을 집대성한 이황의 업적은 놀라운 것이지만, 마치 퇴계의 사상이 한국 선비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처럼 떠벌이는 것에 주눅들어 버리는 나같은 무식한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말이다.

    사,대부라는 말을 그저 배우고 외웠는데, 독서하면 선비 士고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 大夫라는 말을 보고 재밌는 걸 배웠단 생각을 했다. 벼슬하는 게 생의 목표고, 안되면 안빈낙도라는 웃기는 말을 하던 자들이 그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하지만... 지금 학교에도 승진하지 못한 50대를 무정란이란 말로 희화화하기도 하는 걸 보면... 아직도 이 땅엔 출세지상주의 유령이 살아있는 모양이다.

    간서치전에 나오는 구절... 그가 지내는 방은 아주 좁았다. 하지만 동쪽 남쪽 서쪽에 모두 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가 옯겨가면 햇볕이 드는 밝은 창 쪽으로 가서 책을 보았다.(233) 역시 이덕무다.

    박세당, 허균, 정약용, 박지원 외에도 많은 이들의 독서 편력이 등장하지만, 역시 조선조란 왕조에 불과했던 나라였다. 정조의 개혁 정치에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고 있던 나에게 그런 꿈을 접으란 소리를 하는 강명관의 책은 섬뜩한 면도 있다. 그래. 왕조에서 무슨 희망을 바라겠나. 그렇지만, 정조가 서울을 버렸더라면... 하는 생각은 노건평을 자꾸 건드리는 지금 정권과 노론이 오버랩되면서 이 나라의 비극을 자꾸 되씹게 만든다. 그렇지만... 정조의 문체반정은 그가 가진 한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발견한 오자만 해도 예닐곱 개가 된다.
    그렇지만 처음 한두 개는 그냥 무심코 지나쳤기에... 나중에 표시해 둔 몇 개만 올려 둔다.
    혹시 이 책이 재판 삼판 나온다면... 그럴 확률은 그닥 높지 않아 보이지만... ㅠㅜ 참고가 되도록.

    14. 3문단. 철학이 두 번 들어갔다.

    314. 아래서 셋째줄. 신서'과'/ 와로 수정

    370. 3행의 칼라일의 '의'...

    이 멋진 책에 몇 글자의 오탈자로 인하여 책의 등급이 한단계 다운된다면 아쉽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책에는 끝에 꼭 이런 맞춤법 교정기가 붙는다. ㅠ.ㅜ 강명관 선생님, 담에 책 내시면, 제가 교정 봐 드릴게요. ㅎㅎㅎ 소주나 한잔 사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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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의 절망을 치료하는 사람들 - 국경없는 의사회 이야기
    댄 보르토로티 지음, 고은영 그림 / 한스컨텐츠(Hantz)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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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SF... 불어로 국경없는 의사회를 이렇게 부른다.

    지구의 절망을 보듬는 여러 NGO 중에 가장 유명한 기구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사실은 위험한 국경들을 넘어가는 의사회다. 그 국경선 안에서는 온갖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어서 언제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밀지 모르는 그런 곳에 간다.

    물론 그 폭력들은 서로 욕하면서 일어나는 것이고, 또 그 폭력에 따라 쌍방이 모두 다치기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종교나 인종 분쟁에 끼어들어 폭력배를 치료해주는 일도 생길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처럼 큰 나라들의 지원금, 결국 국고의 지원을 제한한다.
    월드 비전처럼 유엔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림들만 그리는 단체와는 그래서 차원이 다르다.
    유엔은 미국처럼 전쟁 주도국의 기구이기때문에 전쟁 주도국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그런 것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이 기구의 활동을 그만큼 힘들게 하기도 한다.

    결국 의사들이 약자 편에 서는 일인데, 그 의사들은 사실 의료 행위란 것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기 쉽다.
    주사를 맞기엔 너무 혈관이 약해서 30분이 넘도록 정맥주사를 놓지 못하는 아기들부터, 온통 잘린 몸뚱어리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하기도 하고, 의료 행위보다는 행정적 절차를 가르치거나 의료원을 양성하는 일에 넌더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하니 지구상에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얼마나 많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겁하게도 이런 의사들이 찾아올 필요 없는 땅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그래, 뭣때문에 도망쳐 왔어요?" 이것이 지원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란다.
    절간에 수도하러 가는 많은 이들이 다양한 사연들을 안고 오듯이, 이 기구로 오는 이들도 죽음을 맞대면하러 가는 길이 도망의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전쟁 관광을 하며 총알을 모으려는 람보들은 이런 기구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한다.(93)

    "중립성은 공모를 낳았습니다. 개입은 우리의 의무입니다."(48)
    자, 중립을 지키다 보니 힘센 놈 편을 들게 되더란 것이다.
    약자의 편에 개입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말은 이 땅의 민중 운동에도 유효한 것 아닐까 한다.

    1968 혁명에서 얻은 <국경 = 억압>의 등식도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국경(프런티에르)을 뜻하는 F가 기구 이름에 들어갔다.
    애국심을 유발하는 쇼비니즘은 곧 또다른 억압의 등가물 역할을 하는 것을 피부로 느낀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 기구엔 미국인이 아주 적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인 지원자들은 미군이 배치된 곳에 배치하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하긴, 분쟁지역 치고 미군이 개입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미국인이 움직일 공간이 뭐 있을까.

    이 책에 실린 수십 장의 사진에 등장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흑인들이 많다.
    아프리카의 땅에 쏟아지는 폭탄들과 그 땅에 묻힌 지뢰들은,
    아시아에 쏟아졌던 불비가 재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유색인종을 향한 백색인종의 <폭격의 역사>를 뚫고 국경없는 의사회의 전설같은 이야기들은 날마다 개입한다.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열악하고 징글징글한 생활의 연속이지만, 늘 활기차게 산다는 의사회 이야기를 읽는 일은, 매일 징글징글하다고 활력을 잃는 내 어깨를 툭툭 치는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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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돌이 2008-11-17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경없는 의사회의 활동은 항상 존경스러워요. 그들이 어느 나라이건 대부분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이들일텐데 어떤 이유든 그것을 박차고 세상을 위해 나선 사람들이잖아요.

    글샘 2008-11-17 23:59   좋아요 0 | URL
    정말 존경스런 분들이죠. 그 기구의 활동상을 잘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책인 것 같습니다. 근데... 이런 좋은 책들은... 절판이라죠.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