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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평점 :
어느 나라나 꼰대들은 있게 마련이다.
주류는 비주류를 걷어차려 하게 마련이고,
주류가 아닌 사람들도 같은 분야를 캐어들어가다 보면
비주류가 더 인기를 얻게도 되고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만화를 '불량도서'란 이름으로 처리하는 꼰대들도 그렇고,
장르소설은 '불량서적'으로 취급하는 치들도 그러하다.
뭐 영화 같은 분야에 가면 또 도덕군자들이 설친다.
하루키의 소설 역시 호오가 많이 나뉜다.
그렇지만, 하루키를 '단카이 세대'라고 명명할 정도로,
이전의 순문학과는 단절적이고, 그 소설에 대한 인기도 높아 노벨 문학상에 회자되는 걸 보면서,
일본의 꼰대들은 하루키를 미진한 소설가로 치는 모양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도 소설을 한 편 쓰고 싶을 정도로,
하루키가 뭔가 아마추어리즘으로 무장한 사람인 것 같다.
물론 그는 이제 장인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 되었지만,
겸손이라기에는 뭔가 다른 부류의 솔직함과 평이함이 책에서 풍긴다.
아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받침해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40)
6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다.
마치 우리의 80년대가 통과한 터널처럼, 저 앞에서는 광명이 비치는 듯 한 시대였다.
그러나, 터널을 빠져나왔다고 세상이 변한 것은 없다.
메시지나 슬로건만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
오히려 하루키는 세상이 변해가는 시대에 인기를 얻은 사람인 것이다.
나는 더 개인적인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41)
그는 매일 5시간 정도,
원고지 20매 정도를 쓴다고 한다.
장인이다.
좀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안된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150)
꼰대라는 말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과하게 고루한' 이런 의미가 담겨있다.
동양의 어른들은 뭔가 새로운 것에 그렇게 대처하는 일이 많다.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질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세상이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고 비난하는 것은 꼰대 소리를 들을 만 하다.
'기분 좋다는 게 뭐가 나빠'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한다.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부르짖는 바틀비가 느껴지기도 하고,
좀머 씨의 '그냥 날 좀 내버려둬'가 떠오르기도 한다.
제발 '실존'을 인정해 달라는 말이다.
'본질'적으로 이러이러하거나 저러저러 해야 한다는 것을 버리고,
나는 그냥 내 삶을 살겠다는 실존의 주장.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269)
하긴, 그렇다.
남의 말에 귀기울일 것도 없다.
그들 역시 한 개인의 의견일 뿐이니...
유럽의 공산주의 몰락과 혼란스런 교체기에 하루키의 문학이 날개돋친 듯 팔렸는데,
아시아에서는 그런 시점이 없단다.
그런 것을 분석하는 관점도 날카롭다.
일본이나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포스트모던에 앞서서 있었어야 할 '모던'이 정확한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주관세계와 객관세계의 분리가 서구사회만큼 명확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307)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유명한 사람들의 ~~ 써라~!는 책보다,
하루키의 책이 좀 만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매일 써야 한다거나,
체력이 필요하다거나,
퇴고를 즐기라는 이야기는 언제나 공통점이지만,
하루키의 글쓰기가 훨씬 즐거워보이는 것이라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