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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들 ㅣ 창비세계문학 2
리처드 라이트 지음, 김영희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미국의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책.
이 책을 읽으면서 연도를 찾아 보니 1940년 출간이고,
까뮈의 '이방인'이 1942년이다.
범죄와 우리의 이성이 갖는 부조리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같다.
아니, 오히려 까뮈의 소설이 일반적인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것이라면,
이 책의 주제는 '흑인의 인권'에 대한 것이어서 더욱 통렬하다.
주인공의 이름은 '비거 Bigger'다.
소설의 원제는 Native son이다.
정관사나 부정관사가 붙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
'토박이'로 태어난 아이... 지만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흑인'의 슬픈 역사를 상징하는 제목이리라.
같은 네이티브 선이라 해도 '백인'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을,
흑인이라는 이유로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
이름만 '더 큰' 아이지만, 그는 자라면서 점점 작아진다.
실존 자체가 제 앞에 놓인 인생에 비감한 감정으로 휩싸일 수밖에 없는 삶이 과연 삶일까?
이야기는 무척이나 박진감 넘친다.
범죄 소설이나 추리소설이 아니다.
평범하게 좀 불량한 흑인 소년이 유독 인자한 백인 가정에 운전수로 취직한다.
그리고 그날 당장 살인을 저지르고 엽기적인 사체 유기, 그리고 협박과 연쇄 살인에 휘말린다.
여느 소설의 범죄자들은 나쁜 넘들이어서,
그 악마들을 잡으러 가는 형사나 경찰의 편에서 악을 처단할 때까지 조마조마한 맘으로 읽게 된다면,
이 소설은 너무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연속에 당황스러워할 뿐이다.
비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운명에 황망해 하지만, 상식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리처드 라이트는 이런 흑인들의 운명을 향해 횃불을 들어 비쳐준다.
너희는 범죄를 쉬이 저지르고, 저질스럽게 살아가며,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그러나, 너희의 그런 부족함들은 제도의 부조리에서 온 것이지 온전히 너희의 책임인 것은 아니라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인간이 아니고 그 '창조'의 그림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죽여버렸다.
살기 위해 그는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냈으며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398)
까뮈의 '이방인'처럼 여기서도 목사님이 그를 전도하려 한다.
아... 밀양의 교회 집사들 처럼... 왜 그악스런 종교인들은
약자들 옆에 똥파리들처럼 득시글거리는 것인지...
어떤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나?
모릅니다. 이런 건 아니겠죠.
자신이 바라는 게 뭔지 대강은 알 것 아닌가.
글쎄요, 만일 행복하다면, 안 될 줄 뻔히 아는 일을 하고 싶어 맨날 안달하진 않겠지요.
왜 맨날 그랬나.
어쩔 수 없었어요. 만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면, 그런대로 잘 살았을지도 모르죠.(497)
난쏘공의 70년대를 읽는 듯도 하고,
21세기의 천명관의 글들을 읽는 듯도 하다.
행복을 꿈꿀 수 없다면, 안될 줄 뻔히 아는 일들에 엮이며 살 수밖에 없게 되는 이야기는 흔하고 흔하다.
몸을 파는 수만의 여성들에게 묻는다면, 같은 답을 하지 않을까?
몸을 파는 수천의 조폭들에게 묻는다면, 역시 그렇지 않을까?
아니, 우리반에서 자퇴를 고민하는 아이에게 묻는다면...
단지 일이십 명의 흑인이 노예가 되었다면
불의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흑인 노예는 전국적으로 수십만에 달했습니다.
만일 이런 사태가 이삼년 계속되었다면 부당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백년이 넘게 계속되었습니다.
긴 세월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가해진 불의한
더이상 불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에 하나의 기정사실이 되어버립니다.(549)
아, 난쏘공에서 아버지의 노비 문서가 떠오른다.
이름조차... 김불이... 무언가를 강하게 부정하는 '아니 불'
그렇지만 난쟁이로 살다 굴뚝에서 쏘아올린 작은 공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역사.
이 땅에서 '토박이'로 태어났건만,
흙수저 네이티브 선은 흑인과 다를 바 없이 살게 된다.
삶에 기정사실이 되어버리는 비참한 삶에 좌절하는 이들 앞에 '윤리'라는 잣대는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모든 희망이 반란 음모이며,
모든 시선이 위협입니다.
피고인의 생존 자체가 반국가 범죄입니다.(562)
작가는 이런 변론을 마련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범죄를 구성한 것이다.
사랑은 안정된 관계, 경험의 공유, 충실, 헌신, 신뢰에서 자라납니다.
비거나 베시한테는 이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564)
천명관의 '칠면조와 육체 노동자'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결혼의 실패, 폭력, 별거, 좌절은,
안정된 사랑의 경험이 전무했던 삶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그런이들 앞에 놓인 '자기 앞의 생'이란...
그리고 그들에게 '윤리'나 '도덕' 같은 '본질적 언설'이란 얼마나 우스운 것이냐.
사랑할 수 없는 '실존' 앞에서 공자왈 맹자왈은 강아지의 왈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비거 토머스가 흑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백인일 수도 있으며
이 세상 어디에나 문자 그대로 수백만의 비거가 있었다.
비거라는 인물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된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대한 진흙탕 같은 삶을 인식하게 되었다.(작가 서문, 617)
비거는 '자기 앞의 생'의 또다른 모모다.
그 이름은 모든 '소수자'의 환유이며, 비록 그 숫자는 다수이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자들의 대표다.
3부에 가서는 너무 작가의 목소리가 강하게 반복되어 지루하기도 하지만,
중심 주장이 워낙 강해서 소설의 힘이 세다.
박진감 넘치고 핍진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개츠비'나 '호밀밭'같은 백인들의 소설이 가진 느슨함이
마치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초기 미국이 만들어낸 '아메리카노'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진짜다.
흑인의 피부색처럼 '진한 에스프레소'다.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않은 사람이 '아메리카노 조아조아조아'하고 외치는 건,
글쎄, 십센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