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
위화 지음, 이욱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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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거대한 모순 속에서 '허삼관 매혈기'와 '형제'를 쓴 작가 위화,

그의 산문집이다.

 

그는 '치료법을 찾는 환자'같은 심정으로 소설을 쓴다고 했다지만,

산문집은 아무래도 산문집이다.

가볍게 읽을 수도 있지만, 가벼운 게 싫을 수도 있다.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 끝에 떨어져 있어도 가깝다.(104)

 

중국과 알바니아의 사이를 비유한 말인데,

사람도 그렇다.

가장 견디기 힘든 사람은 곁에 있는 동료 직원일 수 있고,

소설 속에서든 마음으로 진심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멀다 해도 멀지 않다.

 

스트린드베리의 '빨간 방'을 읽으면서 든 생각.

 

달콤하고도 우울했다.

지나간 삶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지만

지나간 독서는 세월이 지나면 더욱 새롭다.(112)

 

작가론에서

작가는 다른 작가의 영향을 받지만, 또한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말도 멋진 비유를 들어 표현했다.

 

한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주는 것은

식물이 태양의 빛을 받아들여 성장할 때 결코 태양의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식물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118)

 

삶은 언제나 다른 삶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으나,

자신의 삶이 아닌 것을 살 수는 없는 것.

 

힘든 시절의 작가가 밀고 온 삶의 이야기는,

그 작가가 성공하여 부유한 삶을 누릴 때 조차도 작가의 이름에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위화가 형상화한 척박한 인생들과 전혀 다른

월드컵 경기나 미국 농구를 구경다니는 일기들을 보면 생뚱맞게 여겨지기도 한다.

 

마이매미의 바닷물은 햇볕 아래서 그 단계가 분명하다.

먼 곳은 신비한 검은 색이고 가까운 곳은 친근한 녹색이며

모래사장에 부딪치는 것은 흰색 파도다.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우리는 붉은색을 열정적인 색이라 생각하고,

겨울의 쌓인 눈 때문에 흰색을 냉정한 색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열정으로 솟구치는 파도를 보면

이것은 바다의 영원히 쉬지 않는 맥박이고,

흰색도 마찬가지로 열정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내가 해안에서 본 것은 솟구치는 흰색 불꽃이었다.(199)

 

이 책의 제목이 그러하듯,

중국은 과거의 중국과 많이 다르고,

같은 시대의 중국이라 해도, 지역마다 사람마다 차이가 크다.

농담삼아 하듯, 역시 '차이 나는 차이나'다.

 

사람에게 자기 고유의 것이란 없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202)

 

인간은 자기 기억이 옳다고 믿으며 사는 개체다.

옳다고 믿는 것 외에, 자기 고유의 것을 찾는 일처럼 허망한 일도 없을 것이다.

'중국 고유의 것'의 냄새가 이 책에서 많이 가신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싶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생의 한 단락이 이제 끝났다.

완전히 다른 단락의 생이 이제 시작될 것이다.

기나긴 인생을 사람들은 왜 짧다고 느끼는 것일까?

아름다운 생은 하나하나 작은 단락일 뿐이기 때문이다.(204)

 

야구의 시즌이 끝나거나, 학교의 한 학기가 마칠 때,

졸업식장이나 연극이 끝난 무대에서, 단락은 나뉜다.

생은 짧은 단락의 적분체다.

 

국가의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이제 잡초처럼 가볍게 이야기한다.

 

미국인은 반부패를 위해 노력하지만

미국의 부패는 잡초처럼 무성하다.

중국에서 반부패는 검찰의 특권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중국의 작은 부패는 들꽃처럼 만발하고,

큰 부패는 수풀 속에서 웃는다.(206)

 

웃을 일이 아니다.

내가 사는 땅의 부패 역시 들꽃으로 지천이다.

 

이 책은 홍운탁월의 기법 중에서 '구름'의 이야기들이다.

烘雲托月이란 구름을 물들여 달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를 가지고 서사 언어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다.

달을 그릴 때는 구름만을 채색하고 달은 그리지 않지만,

사람들이 보는 것은 달 뿐이고 구름은 없다.(228)

 

나는 소설가가 쓰는 산문집 같은 것에 점수를 낮게 주는 편인데,

달을 보고 싶어하는 조급함때문인 듯 싶다.

달을 보고 싶어하는데,

거기 달은 안 보이고 구름들을 그리는 이야기만 가득하니 조급증이 난다.

 

위화의 달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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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하는 작별 - 가족, 일상, 인생, 그리고 떠나보냄
룽잉타이 지음, 도희진 옮김 / 양철북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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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잉타이의 첫 책이 아들과 나눈 편지글들이었고, 이번 책은 삶의 주변을 돌아보는 수필들이다.

가장 많은 내용은 나이들어가고,

머릿속에 지우개가 늘어 딸도 못알아보게 되는 부모님들과의 이야기들인데,

애써 가볍게 즐겁게 적고 있지만, 쓸쓸하고 안쓰런 맘이 곳곳에 가득 스며 있다.

 

'눈으로 하는 작별'을 '目送'이라 적었는데,

 부모자식 간이란 원래 서로 멀어지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 바라보고 섰는 일이란 뜻이 담겼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해해가고 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

부머와 자식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점차 멀어지는 서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별하는 사이가 아닐까.

우리는 골목길 이쪽 끝에 서서

골목길 저쪽 끝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 뒷모습이 당신에게 속삭인다.

이제 따라올 필요 없다고.(19)

 

안드레아에게 대충 음식을 해주니, 아들이 제대로 만들어 준다.

이제 잘 배웠으니 다음에 만들어 준다 하니 아들이 하는 말이 멋지다.

 

저에게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에요.

모르시겠어요?

나중에 혼자서도 이렇게 만들어 드시라고 가르쳐드린 거예요.(90)

 

치매가 걸린 엄마의 '집'에 대한 생각들...

 

엄마의 집은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 있다.

그 시간 속에서는 어린아이가 숨바꼭질하며 웃고,

부엌에서는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남편이 등뒤에서 두 눈을 가리며 누군지 맞혀보라고 농을 건다.

엄마는 타임머신을 타고 이곳에 왔다가 돌아가는 차를 놓친 시간 여행자다.(99)

 

친구따라 라틴 댄스장에 간 작가.

 

댄스홀이 나에게는 '끝없이 지는 나뭇잎은 쓸쓸히 떨어지고'라는 두보의 시구를 연상시켰다고...(169)

 

좀 멋대가리 없는 삶이기도 하지 않은가?

타이완과 중국 사이에 '진먼 섬'이란 곳이 있단다.

그곳의 삶은 참 고통스러웠을 듯...

 

진먼 사람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이 섬의 아이들은 공놀이를 하지 못하고 자랐다.

행여 농구공 몇 개를 묶어 바다에 띄우고 공산당 편으로 넘어가기라도 할까봐.

공은 금지 품목이었다.

어두워지면 폭격의 목표가 될까 두려워 집집마다 두꺼운 담요로 창문을 가리고 목소리를 낮추었다.(183)

 

타이완 사람들의 삶도 참 신산한 것이었겠구나 싶다.

 

체제와 상관없이 지도자가 사람들을 움직이기란 너무나 쉽다.

밖에서 적들이 위협한다고 말하고 나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비애국자로 몰거나 조국을 위기에 빠뜨린다고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다.(228)

 

아, 왜 이 정부가 밀어붙인 통진당 사태가 떠오르는 것일까.

그 애비에 그 딸이 한 짓은 모두 나치의 전범 '괴링'의 선동에서 배운 것인가?

 

어느 시간 어느 장소든 몸을 편히 두고 할 일을 하다 보면

결국은 바로 그것이 좋은 시절이고 멋진 낙원인 것이다.

이러든 저러든 시간은 흘러가게 마련이다.(261)

 

무엇인가 안 되어 가슴 졸이는 사람들에게 안심을 주는 반야심경을 그도 읊조린다.

조급해할 일 없다고 다독거리는 글, 반야심경.

그래, 시간은 흘러간다.

속 끓이지 말자.

 

오십 줄에 들어서 자식들이 장성해서 품을 떠나려 하고,

부모들도 연로하여 뒤돌아 보며 이별의 골목길을 나서려 하는 나이의 사람들이 읽어볼 만한

아련한 수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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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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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에 읽었던 소설이었는데,

다시 읽어 보니 참 맛깔나는 작품들이 많다는 느낌이 되살아 난다.

 

미국으로 이민간 인도인들의 삶을,

그들의 세계에 어울리지 못하는 이물감과 함께,

고유의 문화와 새문화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하고 서로 보듬기도 하는 소설들이 따스하다.

 

그가 그 부부를 내다보고 있는 순간,

방 안의 불이 꺼졌고,

그는 몸을 돌렸다. 쇼바가 전원을 끈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이 알게 된 것들에 대해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잠시 동안의 일, 50)

 

5일동안으로 예정된 정전이 예정보다 일찍 마치던 날,

그들은 스스로 전원을 끈다.

그리고 이해의 눈물을 흘린다.

그저 눈물을 흘렸다고 서술했으나, 그 이해의 눈물은 잠시 동안의 일이지만

그들의 남은 인생을 뒤바꾸었을 것이다.

몇 문장으로 소설의 맛을 바꾸는 능력은 오 헨리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섹시'라는 소설에서 그 의미가 새롭다.

 

그건 당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101)

 

단어의 의미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기 힘든 사람들.

그것은 단어는 하나의 사물이나 상황에 붙는 것이 아닌,

문화에 묻어있는 향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생큐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 말이 자신의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덧붙였다.(피르자다 씨가 저녁 식사에 왔을 때, 222)

 

이방에서 너무도 외로운 센 아주머니의 집은 참 쓸쓸하다.

서른 살쯤 된 센 아주머니는 운전도 서툴고, 매사에 미국 생활이 익숙치 않다.

 

내가 지금 이 순간 힘껏 고함을 지른다면,

누군가 달려와 줄까?

집에서는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 슬픔이나 기쁨을 표시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그 소식을 함께 나누었어.

또 필요하면 도와 주기도 하고.(235)

 

그러나 그녀는 혼자서 운전대를 잡기도 해야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들... 자신들의 세상에서 너무 바빠."(244)

 

1866년생 103세 할머니 크로프트 부인의 이야기는

경박한 요나손의 '100세 노인'에 비하면 몹시 우아했고 다정했다.

요나손의 노인은 과잉행동 장애로 보일 정도로 정신없는 사람인 반면,

크로프트 부인은 관계의 향기를 추억하게 해주는 풍경이 된다.

찰싹 피아노 의자를 치는 자세 그대로 앉아...

 

 그의 소설들을 다 읽어 보았지만, 단편이 더 쌉쌀한 삶의 맛을 잘 표현하는 듯 싶다.

그의 문장들을 곱씹으며 잠자리에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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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 정여울과 함께 읽는 생텍쥐페리의 아포리즘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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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건 별이건 사막이건,

그것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야.

 

사람들이 모두 생 텍쥐페리만 같다면, 세상은 얼마나 평온할까.

이 책은 정여울이 읽은 그의 책들에서

멋진 구절을 적고 생각들을 적고 있는 책인데,

워낙 원작이 멋진 책들이어서 시시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어린 왕자만 해도 수도 없이 읽었을 터인데,

그 아름다운 이야기들에 다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세상의 이야기는

5.18 추모곡을 합창합네 제창합네 하는 저질들부터,

강남 역의 살인 사건 같은 미친 인종들로 해서,

<소년이 온다>의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시끌거리는데,

오늘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눈을 감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오늘을 하루 겨우겨우 간신히 살아내고 잠시 휴식을 할 것이다.

 

마음의 친구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열지 않을 문을 당신에게 여는 사람으로,

그의 일부는 당신에게 속해있다.

그런 참된 친구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한다.

그 사람 마음의 일부가 당신을 싫어한다 해도

여전히 그는 당신을 사랑한다.(성채 중, 27)

 

아, 말해 뭐해...다.

 

나무는 씨앗으로 자라나 가는 줄기로 자라고,
그런 뒤에 튼튼한 몸통으로 자라나 마지막에는 죽은 목재로 변해버리는 존재.

그 이상의 것이다.

나무는 하늘을 이기기 위해 뻗어가는 느리고 영원한 힘이다.

 

그의 '성채 The wisdom of the sands'에 나오는 대목이라는데, 이 책도 읽어보고 싶다.

 

나는 때로 세상의 비바람에 휘어지고 관계의 가뭄에 목이 마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로 하늘로 조금씩 끝내 뻗어가는 나무이고 싶다.(39)

 

정여울의 설명은 반복 같지만 공감이 가는 말들이 많다.

 

정말 제 아이가 '너무도 빛을 사랑한 나머지,

하늘 높이 올라가버린' 거라면, 별들의 순례자여.

하늘의 순례자여, 제 아이가 혹시 거기로 갔는지요.(어머니의 편지, 82)

 

편지쓰기를 정말 좋아했던 작가와 그의 아내, 어머니의 글들은 슬프면서도 진실하다.

 

목마름과 피로에 지쳐 잠들었으면서도

잠든 그 아이를 미소짓게 만드는 그 무엇까지도

그는 지켜주고 싶다.

우리 곁에도 이렇게 수많은 어린 왕자가 보석보다 더 빛나는 미소를 흘리며 잠들어 있다.

우리는 그 여린 존재들의 꿈과 미소와 희망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잊는 순간 지상의 어린 왕자들은

갈 길을 잃고 미아가 되어버릴 것이다.(123)

 

어린 왕자의 이야기에는

죽음마저 추하거나 두렵지 않다.

삶도 반짝이며 빛나고,

죽음도 아련하지만 당연하게 스러짐으로 이어진다.

 

삶을 어린왕자의 그것처럼 유지하는 것,

보이지 않는 곳의 빛남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을 얻는 것,

이런 것을 위해 살아야 할 일이다.

 

안데스 산맥에 조난당한 조종사,

그는 '누군가 나를 구하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반드시 살아 돌아가서 내 아내를,

나를 기다리다가 초주검이 된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137, 인간의 대지 중)

 

실종이 되면 4개월간 보험을 못 받으니,

잘 보이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그 마음...

인간의 속에 숨어있는 빛나는 보석을 얻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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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들 창비세계문학 2
리처드 라이트 지음, 김영희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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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책.

이 책을 읽으면서 연도를 찾아 보니 1940년 출간이고,

까뮈의 '이방인'이 1942년이다.

 

범죄와 우리의 이성이 갖는 부조리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같다.

아니, 오히려 까뮈의 소설이 일반적인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것이라면,

이 책의 주제는 '흑인의 인권'에 대한 것이어서 더욱 통렬하다.

 

주인공의 이름은 '비거 Bigger'다.

소설의 원제는 Native son이다.

정관사나 부정관사가 붙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

'토박이'로 태어난 아이... 지만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흑인'의 슬픈 역사를 상징하는 제목이리라.

같은 네이티브 선이라 해도 '백인'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을,

흑인이라는 이유로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

 

이름만 '더 큰' 아이지만, 그는 자라면서 점점 작아진다.

실존 자체가 제 앞에 놓인 인생에 비감한 감정으로 휩싸일 수밖에 없는 삶이 과연 삶일까?

 

이야기는 무척이나 박진감 넘친다.

범죄 소설이나 추리소설이 아니다.

평범하게 좀 불량한 흑인 소년이 유독 인자한 백인 가정에 운전수로 취직한다.

그리고 그날 당장 살인을 저지르고 엽기적인 사체 유기, 그리고 협박과 연쇄 살인에 휘말린다.

 

여느 소설의 범죄자들은 나쁜 넘들이어서,

그 악마들을 잡으러 가는 형사나 경찰의 편에서 악을 처단할 때까지 조마조마한 맘으로 읽게 된다면,

이 소설은 너무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연속에 당황스러워할 뿐이다.

 

비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운명에 황망해 하지만, 상식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리처드 라이트는 이런 흑인들의 운명을 향해 횃불을 들어 비쳐준다.

너희는 범죄를 쉬이 저지르고, 저질스럽게 살아가며,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그러나, 너희의 그런 부족함들은 제도의 부조리에서 온 것이지 온전히 너희의 책임인 것은 아니라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인간이 아니고 그 '창조'의 그림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죽여버렸다.

살기 위해 그는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냈으며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398)

 

까뮈의 '이방인'처럼 여기서도 목사님이 그를 전도하려 한다.

아... 밀양의 교회 집사들 처럼... 왜 그악스런 종교인들은

약자들 옆에 똥파리들처럼 득시글거리는 것인지...

 

어떤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나?

모릅니다. 이런 건 아니겠죠.

자신이 바라는 게 뭔지 대강은 알 것 아닌가.

글쎄요, 만일 행복하다면, 안 될 줄 뻔히 아는 일을 하고 싶어 맨날 안달하진 않겠지요.

왜 맨날 그랬나.

어쩔 수 없었어요. 만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면, 그런대로 잘 살았을지도 모르죠.(497)

 

난쏘공의 70년대를 읽는 듯도 하고,

21세기의 천명관의 글들을 읽는 듯도 하다.

행복을 꿈꿀 수 없다면, 안될 줄 뻔히 아는 일들에 엮이며 살 수밖에 없게 되는 이야기는 흔하고 흔하다.

몸을 파는 수만의 여성들에게 묻는다면, 같은 답을 하지 않을까?

몸을 파는 수천의 조폭들에게 묻는다면, 역시 그렇지 않을까?

아니, 우리반에서 자퇴를 고민하는 아이에게 묻는다면...

 

단지 일이십 명의 흑인이 노예가 되었다면

불의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흑인 노예는 전국적으로 수십만에 달했습니다.

만일 이런 사태가 이삼년 계속되었다면 부당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백년이 넘게 계속되었습니다.

긴 세월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가해진 불의한

더이상 불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에 하나의 기정사실이 되어버립니다.(549)

 

아, 난쏘공에서 아버지의 노비 문서가 떠오른다.

이름조차... 김불이... 무언가를 강하게 부정하는 '아니 불'

그렇지만 난쟁이로 살다 굴뚝에서 쏘아올린 작은 공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역사.

이 땅에서 '토박이'로 태어났건만,

흙수저 네이티브 선은 흑인과 다를 바 없이 살게 된다.

삶에 기정사실이 되어버리는 비참한 삶에 좌절하는 이들 앞에 '윤리'라는 잣대는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모든 희망이 반란 음모이며,

모든 시선이 위협입니다.

피고인의 생존 자체가 반국가 범죄입니다.(562)

 

작가는 이런 변론을 마련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범죄를 구성한 것이다.

 

사랑은 안정된 관계, 경험의 공유, 충실, 헌신, 신뢰에서 자라납니다.

비거나 베시한테는 이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564)

 

천명관의 '칠면조와 육체 노동자'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결혼의 실패, 폭력, 별거, 좌절은,

안정된 사랑의 경험이 전무했던 삶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그런이들 앞에 놓인 '자기 앞의 생'이란...

그리고 그들에게 '윤리'나 '도덕' 같은 '본질적 언설'이란 얼마나 우스운 것이냐.

사랑할 수 없는 '실존' 앞에서 공자왈 맹자왈은 강아지의 왈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비거 토머스가 흑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백인일 수도 있으며

이 세상 어디에나 문자 그대로 수백만의 비거가 있었다.

비거라는 인물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된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대한 진흙탕 같은 삶을 인식하게 되었다.(작가 서문, 617)

 

비거는 '자기 앞의 생'의 또다른 모모다.

그 이름은 모든 '소수자'의 환유이며, 비록 그 숫자는 다수이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자들의 대표다.

 

3부에 가서는 너무 작가의 목소리가 강하게 반복되어 지루하기도 하지만,

중심 주장이 워낙 강해서 소설의 힘이 세다.

 

박진감 넘치고 핍진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개츠비'나 '호밀밭'같은 백인들의 소설이 가진 느슨함이

마치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초기 미국이 만들어낸 '아메리카노'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진짜다.

흑인의 피부색처럼 '진한 에스프레소'다.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않은 사람이 '아메리카노 조아조아조아'하고 외치는 건,

글쎄, 십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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