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연애
성석제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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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글을 참 좋아했다.

그의 글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아서 좋았다.

세상은 아픈데, 그의 글은 경쾌했고,

사람들이 아프지만, 그래서 어수룩하고, 제구실을 못하더라도, 그 발걸음들이 지나치게 무겁진 않아 좋았다.

마치 위화의 사람들처럼, 모옌의 사람들처럼... 가벼운 속에서 진지함이 모색되는 소설들이라 좋았다.

 

그런데, 그도 꼰대가 되어가는지...

이 소설 역시 경쾌한 이야기들로 진행되는데,

그 매력적인 박민현이란 캐릭터가 뜬금없이 서울대를 들어가고,

온갖 '교과서적 대사'를 읊조려대는 통에,

성석제 소설이 '병맛'이 되어버리는 느낌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병맛'은  '신 같은 맛'의 줄임말로

주로 대상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내포하고,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라고 한다.(위키백과)

 

왜 그의 소설이 쫀득쫀득한 말맛에서 벗어나서 병맛이 되고 말았는지...

성석제가 너무 아는 것이 많아져서,

그것들이 소설 속에 그만 엎질러진 병처럼 흘러내려서 그렇게 된 거나 아닌지...

산악 자전거 하나에서도 그의 잘난 체는 재미를 반감시키고,

어수룩한 주인공 앞에 등장하는 박민현의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한껏 부풀었던 사랑을 한 순간에 오그라들게 만들기 제격인 대사다.

 

생각해보니, 내게 행복은 기억이 아니라 경험이었다...(297)

 

행복했던 기억, 추억은 뇌를 타고 흐르는 전류에 불과할 순 없다.

경험되지 않은 행복은 기억될 수 없는 이유에서다.

사람에게 행복의 추억이란, 경험이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된 것일 게다.

 

나는 멋진 인생을 살았어.

너때문에. 당신 덕분에. 고마워, 고마워요.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297)

 

멋진 인생은 늘 너때문인 것이다.

경험은 나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멋진 당신이 있어서, 내 인생 역시 멋지게 기억되는 것.

이 소설이 개연성을 잃고 있으나,

이런 삶의 깨달음에 이르른 작가의 생각에는 나도 공감이 갔다.

 

삶이란, 행복이란,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지...

 

최대 길이 이십 미터에 무게 팔십 톤에 이르는 참고래가

 왜 그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서 수면 위 허공으로 뛰어오르는지 알 수 없다.

경제성으로 계산이 안 되고 두뇌로는 예측할 수 없다.

그건 내 머리통을 후려갈기는 깨달음의 몽둥이질 같았다.

인생에 특별히 깨달을 건 없다는 깨달음.

중요한 건 살아가는 것이라는.

중요한 건 존재하며 느끼는 것이라는.(288)

 

그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느끼는 것이다.

나를 포근하게 만드는 사람과 있는 오늘이 중요한 것이다.

경제성을 따지고, 계산적인 타산적 하루를 아무리 잘 기획하여 살더라도,

깨달음은 늘 헛되고 늦게 오는 것.

다 지나가고 나서, 즐거움도 고통도 다 지나가고 나서, 헛되이 헛물켜는 것이 삶인 것.

오늘 존재하는 나를, 오늘 절절히 느낄 수 있다면... 잘 산 것.

 

과거에 너무 얽매일 순 없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어릴 때의 가족적 불운,

그게 우리를 모험으로 떠나게 하는 배후의 힘이야.(88)

 

지난 시절, 대부분의 어린 시절들은 지독하게 불운했다.

가난했고, 부모들은 무지했으며, 동물적이었다.

학교란 곳은 군대의 연장이었고,

직장이란 곳 역시, 질서를 제일로 치는 군대였다.

직장을 위해 학교는 억압의 기제를 사회화하는 곳이었고,

그래서 군대를 다녀와야 인간이 된다는 말을 진리인 것처럼 나불대던 것이었다.

폭력은 질서를 잡기 위해서라면 용인되는 시대였다.

 

그 과거를 딛고 선 지성인이라면, 그 시대의 불운을 발판으로 솟구쳐야 한다.

고래가 되어,

특별한 이유를 묻고 답하며 솟구치는 행위 말고,

본능적으로 삶의 온 힘을 다하여 높이 솟구쳐 온몸으로 바닷물을 두드리는 삶의 쾌감.

가난과 억압의 시절을 부정하는 카타르시스의 경험이 바로 '행복'이라는 '경험'을 느끼게 하는 것일게다.

 

폭력은 삶의 일부다.

폭력과 공격성이 우리 일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72)

 

특히나 한국은 '왕조국가의 폭력', '식민지의 폭력', '냉전의 폭력', '스몰 세계대전(한국전쟁)의 폭력', '독재자의 폭력', '군대의 폭력', '학교의 폭력', '사회 구조의 폭력', '남자의 폭력', '경제적 불평등의 폭력'.... 이런 끝도 없는 폭력의 구조가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구조여서, 폭력 자체가 질서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달콤한 연애담도 아니고,

씁쓸한 시대적 뒷담화도 아니고,

고래 잡으러 떠나자는 위안물도 아니고,

재미라는 당의정을 입혀 독자에게 들이미는 훈계조도 아니다.

 

구룡포란 작은 도시에서 강한 캐릭터를 가진 여자와 남자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개성들이 현대인의 고뇌와 갈등 구조에 휘말리기보다는,

지나치게 '우연성'과 '선택받은 자의 성공'구조에 기대는 소설처럼 보여져서,

독자를 '헐~~~' 하고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뜬금없음이

고래 좇던 포장이 고래 꽁무니 쳐다보듯~ 만드는 실망이 있다.

 

성석제의 소설이 좀더 가볍고, 경쾌해졌음 좋겠다.

아는 걸 좀 더 내려놓고, 그의 기발함이 더 발랄한 재기로 자글자글 끓어 넘쳤음 좋겠다.

 

라면은 국물이 철철 넘치면 맛이 없는 법이다.

바특하게 끓는 국물에 졸깃한 면발이 공기와 수포 사이에서 적절한 퍼짐의 경지를

잇몸에 전달할 때, 라면을 씹는 대뇌는 희열을 느끼게 되는 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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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6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봉수 미생 6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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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침에 출근하는데 신호대기 차량의 줄이 확연히 짧다.

생각해 보니, 메이데이다.

노동자라는 말을 쓰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근로자의 날...

그래. 차 몰고 출근하는 사람들은 많이 쉬는구나...

 

윤태호의 미생을 보다가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장그래의 정규직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다.

 

평소대로만 하면,

이대로만 하면 정사원 되는 거죠?(6권, 181)

 

그래서 빨간 눈의 오상식 차장 눈시울을 더 빨갛게 만드는 만화.

페이소스가 작렬이다.

 

보들레르의 시 '취해라'(파리의 우울 중)도 멋있다.

 

취해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하라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 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시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 버리거든,

물어 보아라.

 

바람이든,

물결이든,

별이든,

새든,

시계든,

지나가는 모든 것

슬퍼하는 모든 것

달려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지금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149)

 

오 차장, 김 대리, 장 그래....

모두 환상의 궁합이다.

그들을 일컬어...

 

그에게 있어 한 사람의 벗은 한 쌍의 귀를 의미한다.(100)

 

동료, 벗

한 사람의 벗은 한 쌍의 귀라...

이 한 구절을 찾은 것 만으로도, 미생을 읽은 일은 잘 한 일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을 할 대숲이 이발사에게 필요했듯이,

사람에게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한 쌍의 '귀'가 필요한 법.

고마운 벗.

 

며칠 전, 시험 문제를 낸다고 밤 11시가 넘어 퇴근하는 옆방의 선생님을 보았다.

그날 나는 기숙사 당직이어서 툴툴거리며 기숙사 사감실에서 잘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그 기간제(계약직) 선생님은 이제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원래 선생님이 복직을 하고, 그는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신세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5권)

 

내가 숨쉬기 힘들 정도로 압박을 받고 스트레스 받는 이 직장이,

누군가에겐 꿈꾸며 들어오고 싶어하는 곳임을 잘 알지만,

날마다가 스트레스인 건, 직장인이면 매일반인 것.

 

아직 집이 지어지지 않아서,

아무리 대마처럼 보여도, 삶이 늘 불안한... 未生의 말...

아등바등 애를 써서 하루를 살아 내면,

쓴 소주 한 잔 만큼의 위로만이...

그러나, 노동자여,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래도 바둑, 그래봤자 바둑...

세상과 상관없이 그래도 나에겐 전부인 바둑.

왜 이렇게 처절하게 바둑을 두십니까? 바둑일 뿐인데?

그래도 바둑이니까.

내 바둑이니까...

내 일이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4권)

내게 허락된 세상이 이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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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5-01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하면서 주문해 놓은 책입니다. 직장의 신에서처럼 비정규직에 대해서 황당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펴보면 그저 눈물만 나오지요.

글샘 2013-05-02 10:30   좋아요 0 | URL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ㅋ~
정말 멋진 만화고, 만화가예요.
 
홀림 떨림 울림 - 이영광의 시가 있는 아침 나남시선 83
이영광 엮음 / 나남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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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역순 사전'이란 것이 있다.

한국어는 음절 단위로 표기를 하도록 되어있고,

한자어로 된 말들이 많아서 뒷글자부터 사전을 만들어도 꽤나 유의미할 것인데,

거기서 찾는다면, '-림'의 칸에 홀림, 울림, 떨림... 이런 말들이 등장할 법 하다.

더 생각해 보면, 말림, 갈림, 졸림, 불림... 이렇게 ㄹ-로 끝나는 용언들의 명사형은 제법 엮는 재미도 있겠다.

 

이 책의 표지가 참 이쁘다.

빛깔도 곱고, 크기도 아담해서 손가방에도 쏙 들어갈 사이즈이고,

돋을새김으로 홀림, 떨림, 울림을 표현해 보려한 듯,

동심원과 물결선들이 새겨져 있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왼손으로 표지를 쓰다듬게 된다.

사랑스런 책은 눈으로 읽는 것 외에도 쓰다듬는 용도로도 쓰인다.

 

중앙일보에 '시가 있는 아침'이란 꼭지로 연재했던 글을 모은 것인 모양이다.

사람들에게 시집 좀 사 읽읍시다~ 라고 외치려는 듯,

비교적 낯선 시인들의 낯선 시들이 많다.

그렇지만, 시의 목소리에 대한 그의 언어는 사뭇 따스하고 한켠 웅숭깊으며, 사려깊다.

 

시는 원래 살기 막막한 사람의 말.(서문)

 

시는 소설과 다르다.

소설은 특별한 인물이 어떤 시대적, 공간적 상황(배경)에서 겪게 되는 일(사건)을 통하여,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펼치는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어서,

독자는 소설을 읽고 나면,

마치 소설 속 인물을 잘 아는 듯이 여겨지고, 그 배경을 잘 이해하게 된다.

반면, 시에서는,

뜬금없이, 불현듯, 어떤 처지인지 알기 힘든 화자가, 혼잣말로 몇 마디 내지르고 사라진다.

그래서 시의 독자는 혼자서 끙끙 앓으며,

도대체 이 화자의 처지는 어떠하며, 의도는 무엇인지,

어떤 상항에서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건지... 궁금해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소설 해설서'에 비해 '시 해설서'가 많을 수밖에 없다.

 

시의 언어는 절박함에서 튀어나온 독백이다.

그것을 원래 살기 막막한 사람의 말~ 이라고 했다.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시는 자주 가까이 다가온 먼 것의 목소리(52)

 

시가 압축하여 삶의 비의를 보여주려할 때,

일반적 삶의 언어로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살기 막막함이 극에 달하면,

존재의 기반이 다른 먼 것의 목소리조차 낯설지 않게 공감하며 울릴 수 있을지도...

 

소망스러운 무언가가 지금 여기에 없을 때 시는 태어나는 것 같다.

결핍은 시의 문전옥토다.

당신이 와버리면,

당신이 전부일 나에게 시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173)

 

아, 이 해설은 시보다 아름답다. 청출어람 이청어람...이랄까.

이 해설은 손 세실리아의 문전성시 덧글이다.

 

문전성시

                        손세실리아

 

해안가 마을길에 찻집을 차린 지 달포

발길 뜸하리란 예상 뒤엎고 성업이다

좀먹어 심하게 얽은 싸리나무 탁자

마당 정중앙에 버텨 앉은 맷돌상

바다정원의 화산암 테이블

좀처럼 빌 틈 없다 만석이다

기별 없는 당신을 대신해

떼로 몰려와 종일 죽치다 가는

 

눈먼 보리숭어

귀 밝은 방게

아기 보말

남방노랑나비

 

당신이 없는 그자리

종일 텅 비어 외롭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그 자리...

다른 모든 것 다 있는데, 보리숭어, 방게, 보말(고둥), 노랑나비까지...

삶의 증거로 가득차 있는데,

화자가 그리워 죽겠는 당신은 삶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결핍이 시의 문전옥토라니... 그렇구나...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

좀 들여다봐주었으면 하는

혹은 아무 욕심도 없는 마음

그런 게 시라면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이상국,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부분)

 

시인이라고...

스스로 시어를 갈고 닦는 사람이라고 자부심 가지고 살았건만,

감옥에 있는 사람의 편지,

많이 아픈 사람의 전화,

이런 언어 앞에서 돌아본다.

 

시인이 의지한 윤리 가운데 하나는 그가 누군가를 대신해 말한다는 것 아닐까.

그러다가 어떤 때는 그 누군가가 제 입을 빌려 말한다는 느낌에 닿기도 하는 것 아닐까.

대신이라는 점에서 그는 얼마간 사제를 닮았다.

사제의 길과 시인의 길은 어느 험로에선가 갈라지겠지만,

대신 아프고 대신 슬픈 몸을 지녀야 시인은 아픈이와 갇힌 이의 긴 얘기를 어렵사리 들어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얼음아내...

여보, 건너려고만 하면 녹아 허물어지는

이 얼음다리 위로

나 어떻게 건너가지?(얼음나라 체류기, 유홍준, 부분)

 

지상의 영화를 찬양하는 종교가 없듯이 현세의 복락을 지지하는 시도 근본적으로는,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이 가차없이 무로 바뀌어가는 곳에서,

기막혀 하지도 않고 살고 있다.

요컨대 허망을 산다.(89)

 

시가 그려내려는 것 역시, 허망하고 요망하다.

그걸 이해하기 어려운 독자에게, 시는 근본적으로 그런 걸 그리는 것임을 짚어준다.

 

이 책에서 유심히 몇 번 읽었던 시 한 편.

 

선어대 갈대밭

                      안 상 학

 

갈대가 한사코 동으로 누워 있다

겨우내 서풍이 불었다는 증거다

 

아니다 저건

동으로 가는 바람더러

같이 가자고 같이 가자고

갈대가 머리 풀고 매달린 상처다

 

아니다 저건

바람이 한사코 같이 가자고 손목을 끌어도

갈대가 제 뿌리 놓지 못한 채

뿌리치고 뿌리친 몸부림이다

 

모질게도

입춘 바람 다시 불어

누운 갈대를 더 누이고 있다

 

아니다 저건

갈대의 등을 다독이며 떠나가는 바람이다

아니다 저건

어여 가라고 어여 가라고

갈대가 바람의 등을 떠미는 거다

 

갈대와 바람의 이별은 봉두난발에 몸부림의 시간을 넘어

피어나는 어떤 새로운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평등하게 사랑하는 두 존재의 헤어짐은

어느 결에 슬픔을 훤칠하게 넘어서 있습니다.(60)

 

이영광의 해설 아니라도,

매달리고,

끌고, 뿌리치고,

다독이고,

등 떠미는...

바람과 갈대의 존재 의미에 대하여...

어느 하나로 해석할 수 없는...

그리하여 더욱 아름답고 깊은 시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서정주에 대한 한 마디.

 

시인은 영욕의 세월을 살다 갔으나,

그의 시는 남아서 이렇게 의젓하다.

한 번 더 읽어드리고 싶은 대목.

 

나그네 배때기에

등줄기 뜨시하여

이 시린 물 또 한 번 업어 건넨다

 

좋다. 어디에도 꿰맨 자국이 없는데, 참 좋다. (79)

시인이 시를 읽고 몇 마디 덧붙인다는 것은 쉽잖은 일이다.

몹시도 욕심났을 것이다.

자기보다 더 뛰어난 시재(詩才)를 만나

모차르트를 시기한 살리에리처럼 부르르 떨기도 여러 번 했으리라.

허나,

시어란 팍팍한 우물에서 길어올린 한 바가지 두레박임을 알기 때문에,

참 좋다~

이렇게 덧붙일 수밖에 없는 그의 '떨림'을 조금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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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외면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7
복효근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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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가 하나 곰살맞게 나한테 와서는,

찰싹 달라붙어서,

헤헤거리면서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는 녀석이 있으면,

그 시집 전체가 친숙하지만,

어떨 때는 데면데면해서 낯설어보이기도 한다.

 

시라는 것이 그렇다.

아니, 시집을 읽는 일은 그렇다.

시집 전체가 눈에 쏘옥 들어오긴 힘들고,

어떤 시라도 하나 맘에 쏙 들어오면, 그 시집 전체가 맘에 들곤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 시집에서 내 맘에 쏙 들어온 시는 이 시다.

 

사랑한 적 없다

 

다시 같은 자리에 돋는 새잎이란 없다

이미 새잎이 아니지

낯선 자리 비켜서

옛 흉터를 바라보며 지우며 새잎은 핀다

 

이전의 사라은 상처이거나 흉터다

이후의 사랑도 그러할 것이므로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조금 비켜서

덤덤히 바라볼 수 있는 눈빛으로

나무의 새순은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싹튼다

 

제 형체와 빛깔과 향기를

지우고, 지고 부정하고 배반하고

새잎은 비로소 새잎이다

 

내 너를 사랑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한 적 없다

오늘은 내 어느 부위에 상처를 남겨두랴

 

엄살 피우지 말자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새것이어서

우리 세포는 너무 성하다

흉터 따위를 기억하는 것은 사랑도 아니다

 

지금 네가 마지막 첫사랑이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처럼,

깃발을 흔드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고, 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라는 이야기처럼,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 시에 쓰인 '사랑'은 다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만,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새싹과도 같은 파릇파릇한 삶의 에너지로 넘쳐나는 희망을 가진 존재처럼,

첫사랑으로서 너를 사랑한다는 이야기의 역설이 짜릿하다.

사랑해... 사랑해...를 백만번 겹쳐쓰는 것보다도,

엄살 피우지 말자,

사랑한다.

이런 사랑 고백은 참 후련하다.

 

이 시는 여러 겹으로 겹쳐 읽을 수 있다.

사람마다 떠오르는 삶의 추억이 다를 수 있다.

흉터, 떨어진 잎사귀에 얽매여 '새싹'을 놓치지말자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겠고,

사랑에 너무 얽매이면 진짜 사랑을 놓치고 만다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런 모호한 시가 나는 좋다.

 

살아있는 날까지는

피어라, 꽃,

피지 않아도 좋을 꽃은 없다 ('시인의 말' 중에서)

 

참 좋은 말이다.

피어라, 꽃!

 

그의 이 시도 좋다.

 

 

소쩍새 시 창작 강의

 

달빛 백지장으로 펼쳐놓고

시 창작법 가르치고 있다

 

말은 안 하고

춤으로 춤을 가르치는 춤 선생처럼

시는 안 가르치고

온통 울음만 울어댄다

 

애 주먹만 한 가슴을 공명통 삼아

잘못 산 것을,

잘못 살 것까지를 뉘우쳐 통성기도하듯

 

운다

 

그 울음의 깊이로 말하면

바닥까지 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달빛의 칠흑 우물거울이다

 

2음보 혹은 3음보

수사가 화려하지 않다

울음은 모름지기 그런 것이다

 

이윽고 몇 소절에는 핏자욱이 묻어나기도 해서

다는 아니더라도 사랑이 더러는

죽고 싶을 만큼

죽어도 좋을 만큼 아팠음을

그렇잖으면 시도 울음도 아니라는 듯 운다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그 핏빛

울음뿐이라고

무슨 시 창작 강의가 불은 달빛으로 흥건하다

 

 

나머지 시들은 어떠냐고?

글쎄, 한번 읽어 보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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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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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시의 힘은,

솔직함에서 우러나는 뜨거운 느꺼움에 있다.

그 마음을 불러오는 이의 착한 심성이 시에서 그대로 묻어나,

읽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착하게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것이 그이의 시가 가진 힘이다.

 

지난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 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 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가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 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 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눈물은 왜 짠가)

 

이렇게, '눈물은 왜 짠가'라는 짠한 질문 한 마디로,

삶의 땀방울과, 눈물의 섞여드는 그 지점을 은근히 짚어주는 게 시인의 몫이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긍정적인 밥)

 

사노라면,

참 세상 험하단 걸 날마다 투덜거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착한 사람이 있다니...

박한 돈을 손에 쥐고도... 그 돈의 가치를 곱씹어보는 다사로운 마음이 있다니...

 

그런 데 시를 읽는 맛이 있다.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음을 배우는 데, 시 읽는 멋이 있다.

 

그런데...

이 시집을 읽고서는 좀... 그렇다.

매번,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하는 기원이 먹혀들 순 없는 노릇인지,

이번 시집은 좀 맹숭맹숭한 느낌을 받는다.

 

함민복 시집에서 읽었던 그런 힘보다는,

시인이 의미를 발견하려 눈을 깊이 뜨고 바라보았던 사물들에게서 획득한 언어들,

또 자연 속의 향그러움을 놓치기 싫다는 듯,

그렇지만 피폐해져만 가는 농촌을 사뭇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는 시편들,

그리고... 아름다운 시어들만으로는 도저히 잡아낼 수 없는...

잡것들의 나쁜 짓을 바라보는 시인의 쓰라린 속이 오롯이 드러나고 있다.

 

이 시집으로 시인을 평가하기보다는,

어디론가 머언 길을 건너가고 있는 도중이란 느낌.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 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흔들린다, 부분)

 

도중에 섰으니, 시인은 계속 흔들림을 감지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흔들림을 감지하고 계속 흔들림을 버티는 이유는,

흔들리지 않는 무엇을 어기 위함이란다.

이런 아이러니를 곱씹을 수 있게 해주는 일이 시인의 업이다.

그래.

자신도 흔들리면서,

흔들림의 가치는... 흔들리지 않기 위함이라고,

억지를 부려보는 것이다.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

당신을 읽어나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

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 (양팔저울, 부분)

 

이 시집엔 이런 시들이 많다.

관조...의 눈길.

무언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얻어내는 삶의 비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중심점이 있나보다.

마치 양팔저울이 균형을 맞추고 있듯,

보이지 않을만치 가볍게 흔들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

상대를 읽어나가는 일은,

상대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나를 덜거나 보태어 균형을 이루려 애씀이다.

 

또한 상대의 무게를 통해 내 무게를 읽을 수 있기에,

간당간당 흔들리는 양팔저울은 흔들림이 곧 균형으로 가는 길이리라.

서로 집중하여 얻어내는 평형.

사람과 사람 사이엔,

덜어낼 짐이 없는 것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가 다사로워지면, 아주 가벼이 짐을 덜어내게 되느...

그런 '사이'를 짚어준다.

 

거기

우리

수평의 깊이 (양팔저울, 부분)

 

같은 시에서,

'수평'과 '깊이'란 두 단어를 눈여겨 봤더랬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는,

<거기>에는... <우리> 사이에는,

평평한 균형을 맞추는... 수평처럼 평등한 관계로 보이지만,

그 보이지 않는 균형점에서 느낄 수 있는 <무게>가 지향하는 것은,

<우리>의 <깊이>란 것.

 

이 말을 다른 시에서 다시 만난다.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지하철을 타 보면,

10중89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스마트폰에 열중해 있다.

그걸 '수평의 깊이'란 낱말로 찾아낸다.

물론 커피숍, 버스...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켜고 들고 뭔가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을 지하철처럼 나란히 옆으로 앉히는 공간은 드문 것.

스마트폰을 누르면서 추구하는 것은 도대체 뭘까?

 

누군가와 소통을 이루고 싶다는 외침과도 같을까?

수평,과 깊이, 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거기 다시 '넓히고'라는 말까지 가세한다.

지하철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은 평등해 보인다.

이게 '수평'의 의미라면,

그들이 추구하는 소통을 향한 간절한 바람을 '깊이' 정도로 읽을 수 있을까?

수평의 깊이는 점점 넓어져만 간다.

놀라운 일이다.

 

사람들은 외롭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스마트폰 속으로 침잠하지만,

오히려, 바로 앞에 앉은 사람조차 마주보지 않고, 엉뚱한 데서 '깊이'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집에서 내 눈길을 끈 시들은 '달'과 관련된 시들이다.

나이가 들면 해보다 달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던가...

 

너도 궤도를 벗어나

 

자유롭게 흐르고 싶은 것이냐

 

구름빛 낮달 (낮달, 전문)

 

퇴근하기도 전인데,

하늘에 구름인 듯, 낮달이 비치는 날이 있다.

달이라면 의당 까만 밤하늘에 새초롬하게 떠오르는 것이라고,

또는 둥두렷이 검은 세상을 비춰주는 환한 존재라고 여기기 쉬우나,

가끔은 달조차 궤도를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

아니다, 화자가 딱, 그런 맘이렷다.

 

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

그믐달에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

마음의 숫돌

 

모난 맘

환하고 서럽게 다스려주는

 

 

그림자 내가 만난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 (달, 전문)

 

'서정'은 시에서 이렇게 툭 불거질 어휘가 아닌데.. ^^

그가 62년 호랑이띠라면... 이제 달에 점점 몰입할 나이가 된 건가?

 

사과를 파 먹으면 '파인 애플'이 된다는 농담도 있더라면,

손톱달이 조금씩 차올라 만월이 되고,

만월은 조금씩 덜어내어 다시 그믐이 되는,

그렇게 차고 이지러짐을 바라보노라면, 세월 참 금세다.

 

숫돌은,

모난 것을 더 둥글려주기도 하지만,

둔해진 것을 더 벼려주기도 하는 법.

모난 맘이든, 못난 맘이든,

환한 날은 환한 대로,

서런 날은 서러운 대로,

달에 마음을 실려 보내고 싶은 화자는,

역시,

나이가 들어가나부다.

 

맞다.

달,

너는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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