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 종교, 믿음을 팔고 권력을 사다
김상구 지음 / 해피스토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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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의 이유에 대해서 

  종교라는 대상을 말하고 언급하고 있지만 주요 타겟은 역시 개신교입니다. 개신교의 목회자 예비생으로서 몇몇 분들은 왜 종교 비판책을 읽는가라고 묻기도 합니다. 한결같은 제 대답은 외부의 도전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양한 발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이 느껴지지만 그것은 책이 나쁘다기 보다는 책이 지적하는 부분이 교계가 민감하게 다루는 내용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목회학 관련 수업을 들을때 강조되는 분야 가운데 하나는 바로 경제입니다. 특별히 돈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경계의 대상입니다.(그러나 돈을 무조건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돈은 결국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세속주의의 상징인 돈에 관련된 종교계의 이야기는 우호적인 것보다는 비판적인 내용이 더 많습니다. 역사는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물질과 성, 권력에 의해 타락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현실은 불편한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 또한 예외일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 시켜줍니다.


<부제목과 목차에 나타나듯 본문은 한국종교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가 담겨있다>

건설적 비판과 파괴적 비판에 대하여 

  본문의 내용은 크게 종교계의 믿음, 돈, 권력이라는 세 구도의 유착관계를 파헤치고 비판적 거리두기에 대한 방법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방이후 한국 종교계가 누려온 혜택이 한국 종교의 뒤틀린 모습을 낳았고 이를 바로잡아 종교의 본연의 모습을 위해서는 종교 법인법이라는 법적 제재 수단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책의  전체적인 중심 내용입니다. 책에서 주장하는 종교 법인법에 대한 화두는 종교의 자유를 침탈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질문과도 연결되지만 실제로는 종교 단체와 법인의 성격을 두고 대립할때 그 문제가 더욱 뚜렷해집니다.(이에 대한 논의는 책과 미디어를 활용하는게 좋을듯 싶습니다.)
  저자는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시행한다면 종교계가 받는 혜택의 전면 폐지가 아닌 더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본연의 역할에 대한 기준과 그 역할에 대한 평가를 법제화시켜 미흡할 경우 제재가 이뤄져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되어 결국 종교의 법체제아래의 귀속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자정능력이 약화되어버린 종교계의 흐름에 비판이라는 메스를 들고 개혁이라는 수술을 집도할때 우리의 목적은 대상을 살리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병약한 몸에 무리한 수술을 가할경우 환자가 죽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손에든 메스가 건설적 비판의 메스인지 파괴적인 비판의 메스인지를 구분하고 수술에 임하여야할 것입니다. 종교의 개혁은 사회개혁과는 성질을 달리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법 또한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의 자정노력은 외부의 관점에서 미흡하고 답답한 모습으로 보이거나 빈사의 상태에서 행해지는 임시처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종교의 회복은 믿음이 대상에게 있어서 부끄럽거나 죄를 짓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비판적 거리두기의 필요성 

  역사적으로 돈, 권력, 성의 문제가 종교와 일치될때 종교는 부패와 타락이라는 길을 걷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회적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종교계 내에서 일어나는 개혁의 불꽃이 합쳐지는 순간은 인류 역사가운데 몇차례 되지 않지만 그 힘은 한순간에 모든것을 변화시킬 정도로 강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개혁의 불꽃은 많은 것들을 파괴하고 무엇보다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를 양산해내기도 하기에 우리는 개혁을 일상가운데 염두해두고 언제나 날마다 새로운 종교의 자세가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저자의 글은 우리에게 코스모폴리탄 종교 공화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비판이 무조건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이 아닌 건설적 비판의 내용을 함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책을 불편해하기보다는 허와실을 구분하여 수용하는 건전한 자세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종교계는 세속화에 대하여 비판적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비판적 거리두기를 통한 무조건적인 결별이 아닌 상대적 수용을 함께 생각하여 사회와의 관계성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눈을 막고 그들의 입을 막는다면 자정능력이 손상된 종교계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보다는 도탄에 빠지게 하는 원흉으로 믿음의 대상앞에서 부끄러운 모습과 죄를 짓는 모습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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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예수
칼릴 지브란 지음 / 프리윌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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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지만 얼마나 정확하게 아는지를 살펴본다면 오해와 왜곡에 의해서 이해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기독교인을 비롯하여 일반 기독교 신자들과 지도자들 조차도 심지어는 교회공동체내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양한 해석과 이해가 함께 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성히 더해주며 논란 가운데서 발전을 이뤄나가는 힘이 되어줍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근의 한국교회 기독교인들을 바라볼때 그들의 이해가 지나치게 사변화되거나 경직된 느낌이 듭니다. 특별히 신의 아들, 인류의 메시아, 다시오실 심판의 주에 대한 강조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강조하는 가운데 지나친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나친 선입견이 때로는 사회의 반발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는 하나의 측면만을 향해 눈을 돌리고 그 가르침을 신앙의 기초로 삼는 과오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과오들이 우리 안에서 반성되어지고 균형잡힌 온전한 이해로 돌아선다면 복음의 메시지는 어떻게 바뀌게 될가요?

예수를 혐오하는 사람 케사레아의 예프타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해 진절머리가 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호칭은 물론이고 그가 태어난 고장 이름만 들어도 화가 납니다." 나는 이제 예수의 예자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는 그가 부활하고 승천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것인가에 대한 말을 하는 이들에게 믿음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결국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과정의 연속은 반복되어지는 것이겠지요. 오라토리아 작품 '예프타'의 짜증섞인 불만과 불신의 말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반복되는 말입니다. 
  복음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향한 짜증 섞인 그들의 반응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의 원인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의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림자 같은 존재에 불과한 그를 대단한 구세주로, 예언자로 만들어가는 이들에 대한 조소와 힐난을 보며 그는 누구를 조롱하고 힐난 하는지를 책을 통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누구도 그를 인간으로부터 떼어내서는 안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동시에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셨지만 동시에 요셉의 아들로서 목수일을 하고 마리아의 아들로서 어머니와 형제를 부양한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신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인간이기도 하였던 그의 삶은 공생애 기간동안 사역 가운데 가르쳐 지는 많은 가르침의 인과관계를 생각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그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대단한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그가 먹고 마시고 살아온 30년의 삶은 송두리째 신비만이 남아있는 허구의 삶이 될 가능성 조차도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역사적인 인물 즉 살아있는 인물이자 생생한 실존의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기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자 칼릴 지브란의 상상력과 믿음의 진수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진술되어지는 예수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으로서의 면이 없어져버린 가운데 우리의 신앙의 지표는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재점검해야 할 타이밍은 지금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아들이자 목수였던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나님과 아들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그를 인간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 '신의 아들 예수'로만 기억하고 진술하고 있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예프타'와 같은 이들의 힐난과 조소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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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의 힘
강준민 지음 / 두란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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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이 깃든 조그마한 씨앗이 생명을 말하다. 

  화단에 핀 꽃을 바라보며 꽃이 어릴적 모습 단단하면서도 여린 씨앗을 상상해본적이 있으신가요? 
  생명이 깃들어 있는 조그마한 씨앗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자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씨앗 하나가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은 어떨가요? 생명의 근원이자 특징은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의 모습.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그 내면에 숨겨진 생명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작은 것의 의미를 다시 깨닫다. 

  조급증에 빠져 살고 있는 우리는 천년의 낙수가 바위를 뚫는다는 개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당장 눈앞에 성과를 내야 하고 뚜렷한 흔적을 남기기 위한 우리의 몸부림은 무한 경쟁, 무한 혁신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를 넘어 둘을 만나고 둘을 넘어 셋과 넷을 만나는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쉴새 없이 돌아가는 쳇바퀴 같습니다. 삶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관점은 다양한 부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특별히 종교생활에 더욱 큰 영향이 미쳐지는듯 싶습니다. 복음 전파는 어느덧 전도를 통한 교인의 숫자 불리기를 통해 성과주의화 되어가고 뚜렷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 사역하는 이들과 섬기는 이들은 자신만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조바심을 냅니다.
  진정한 말씀의 가르침에는 작은일에 충성하고 힘써 노력하라는 것이지만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들의 신앙의 삶이 너무나도 세속화된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속의 몇 안되는 법칙에는 에너지= 질량X속도의 제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과를 위해서는 크게 그리고 더욱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는 성과주의 계산 법칙과도 비교되는 이 법칙이 지배하는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작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가요? 작은것의 힘 그것을 우리는 진정 올바르게 깨닫고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으로 바라본 작은것의 의미

  <작은 것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한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는 작은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개신교 교단이 하나의 통일된 이해를 담아내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해의 차이와 관점과 해석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진리는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진리의 힘은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보편성을 가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완벽한 진리일 수록 보편성의 특징은 더욱 뚜렷해집니다. '성경'에는 작은 것에 대한 비유와 해석 그리고 다양한 가르침이 담겨 있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세속적인 관점과 이해를 잠시 뒤로 미루고 말씀의 배경과 상황 그리고 신앙과 믿음 가운데서 바라볼때 온전한 이해가 더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라봄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바로 책에 쓰여진 내용들입니다 .작은 것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과 힘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결말들은 진정 말씀이 의미하는 바에 담겨진 속뜻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작은것이 큰 승리를 만들어 내고 큰 문제를 해결하며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세속적인 이해 관점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분이며 세속에 물든 신앙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것입니다.
  작은 것에 담겨진 세속적인 이해와 의미 발견이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신앙을 흔들리게 만듭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세속적인 부족함과 작다는 개념에서 자신을 정당화 시키고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 안에서 부족한 나를 발견하고 내 안의 가치를 새롭게 새겨보며 놀라운 은혜와 기쁨을 위를 향해 돌려 드리는 삶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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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동물상징사전
피지올로구스 / 지와사랑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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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대해 박식한 자 '피지올로구스'

  <기독교 동물상징사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동물이 가지고 있는 창조주의 비밀스러운 의지와 숨겨진 뜻을 찾아 드러낸 책입니다. 저자는 피지올로구스로 되어있지만 이는 '자연에 대해 박식한 자라는의미가 담겨진 의미를 가지고 있을뿐 특정한 개인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의 성서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동물들에는 나름대로의 상징성과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때로는 동물의 형태와 특징에 관련하여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지만 사건의 전개에 따라 전혀 반대되게 묘사되기도 합니다. 예컨데 고대 근동에서는 구전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들을 문서화 시켜 전승시키며 살이 더해지고 새로운 것들이 더해지는 과정을 반복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피지올로구스'는 고대 기독교로부터 중세와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 가운데 교회 건축과 성경의 해석등에 영향을 미쳤으며 상징적 조형물의 의미전달이라는 중요한 메시지 체계를 구축하는데 기여를 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레고리적 해석과 과학적 해석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을 바라볼때 과학적 해석과 알레고리적 해석가운데 어느쪽이 더 비중이 높냐라는 질문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언급할 내용은 이 책은 자연에 관련된 사전이라기보다는 창조주의 의지와 숨겨진 뜻을 끄집어내어 독자와 청중들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염두해두신다면 좋을 듯 싶습니다. 즉 과학적 사실에 기인한 오늘날의 백과사전적 의미보다는 이는 각각의 동물들과 함께 전해지는 구전전승의 종합 기록물이라고 볼 때 더 이해하기 쉬울듯 싶습니다.
  물론 동물들의 습성과 성질이 묘사된 영역을 바라보면 과학적이고 관찰적인 요소들이 반영된것이 맞습니다만 이 또한 오늘의 과학상식과 밝혀진 기록에 견주어 볼때 허술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소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포함한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을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이고 인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러한 책의 성향을 고려하여 다뤄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훈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풍성한 은혜를 체험케 도와준다.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에 기록된 동물들의 부연 설명에는 여러 성구가 인용됩니다. 때로는 동물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되기도 하지만 용이하지 않을 경우 의미의 유사성에서 인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곁에 없는 동물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 성서와도 상관없고 자연세계에서도 상관없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가요?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은 의미를 생각하는데 있어 해석의 도구로 사용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해석을 위한 추가적인 소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각수에 대한 피지올로구스의 설명은 상상 속 동물에 대한 묘사이지만 일각 수가 표현하는 행동 그 뿔을 앞으로 숙여 십자가 모양으로 성호를 그어 물 속의 독기운을 사라지게 하여 다른 동물들이 목을 축이는 것은 알레고리적 해석과 더불어 새로운 것들을 생각하게 도와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고대와 중세에 인용되고 사용되어진 다양한 상징적 해석과 표현을 위한 원형의 시발점을 생각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이는 즉 기독교라고 불리우는 종교의 원시 신앙의 형태가운데 일부이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다양한 문화와 문학적 소재들과의 연관성 또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창조주에 대해 생각하며 피조물 가운데서 은혜와 섭리를 발견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묵도하며 흥미롭고 재미있는 알레고리 여행을 떠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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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 :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시리즈 1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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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유에 감춰진 진리의 말씀

  약 2천년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가운데 선포되어지고 전해진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비유 설교는 당대의 많은 청중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깨달음을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있어 비유는 하나의 단편적 이야기이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이며 심지어는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본래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가 부각되거나 왜곡되어져 이해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이러한 잘못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주석서와 강해서가 존재하지만 사실 2천년전 이스라엘에 거하던 청중들에게는 주석과 강해서가 없더라도 예수님의 본래적 의도가 전달되는데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지식과 지혜가 과거와는 달리 비약적으로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이해 차이가 생겨나는 것일까요? 저자는 문제의 해답을 우리가 예수님의 활동하신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청중들 사이에 형성되어져있던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공감대가 오늘날에는 기본적으로 전제되지 못하였기에 당시의 비유의 말씀들이 쉽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사용된 비유가 오늘날 진리를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에는 당시의 삶의 정황에 대한 이해부족이 자리한다고 본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다시 비유를 살펴봄으로서 재미있고 즐거운 비유설교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이미 <열린다 성경>(전7권)으로 사랑받는 작가 류모세의 신작 <열린다 비유>시리즈의 첫 시작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로 출발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등장

  <열린다 비유 시리즈> 1권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최근 시중에서 유명한 책 제목에도 사마리아인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사마리아인'에 대한관심이 많이 높아지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열린다 비유 시리즈>의 책 구성은 프롤로그를 통해 비유란 무엇인가? 왜 비유로 설교하셨는가? 비유의 해석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비유의 장단점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사실 비유의 비슷한 유형의 글을 어릴때 부터 보고 자랐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우솝 동화>를 생각해볼 수 있으며 불교문화권을 생각하여 볼때 스님들의 선문답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을 사람들이 알기 쉽게 풀어서 음미하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비유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가까이 머물고 있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의 대표적인 예로 이야기 하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비유를 우리가 가까이서 접해왔다면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가까이 보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멀리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일생을 거쳐서도 만나지 못할 존재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등장은 매우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로 감춰지게 됩니다. 선문답과 우화가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을 이용하여 전해진다면 분명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등장하는 인물과 문화와 역사는 우리에게 낯설고 어려운 것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열린다 비유>의 작가 류모세는 이러한 낯설음을 해결하기 위해 비유설교를 이해하기 앞서 비유설교가 주어진 청중과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먼저 이해하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과 문화를 배우고 등장인물들과 청중들을 이해하여 독자로 하여금 당시의 말씀이 주어지는 환경을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비유를 바라보고자 말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알게 되었을때.......

  사마리아인? 유대인? 랍비? 레위인? 율법사? 왜 강도인가? 구전 율법이란? 이상의 질문들은 독자가 비유적 해석을 하기 앞서 그리고 비유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앞서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이상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먼 나라이고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우리가 이해하여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관심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하지만 성경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비유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앞선 물음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해가 자리 잡을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청중들이 되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수가 있습니다. 
  중국의 문화와 풍습을 모르는 상태에서 제사와 관련한 비유를 남미에서 이해하기 어렵듯이 비유의 말씀들은 당시의 청중들에게 주어진 말씀임을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것을 모르고 문제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두꺼운 주석집과 강해집을 들고 고민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이 사변적으로 치우쳐지는 것은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은채로 이뤄질때 나타납니다. 쉽고 재미있는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가르침은 이후에 등장하게될 또 다른 비유의 말씀을 이해할대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응용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기본적인 것들이 필요합니다. 비유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내딛기 위한 가르침에 대한 저자의 지적은 독자로서 그리고 성경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알고 비유를 들을때 깨달음과 진리의 보화를 발견할 수 있음을 상기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책은 여러분의 마음의 눈과 생각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는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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