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인연을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자기계발서 혹은 처세학 책들을 어쩌다 읽게 되면 나는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 책들에 의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절대 성공 못할 유형의 인간이고 실패할 확률 99프로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나에게 꼭 가야 할 길은 없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어야 할 일은 없다. 목표를 세우고 자신의 인생을 시분초로 쪼개어 뭔가 생산적인 일에 매진하라는 그 책들의 충고는 나에겐 하나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과잉의욕은 소망한 바를 불가능하게 한다!

웃기게도 나는 20대 초반에 수첩 맨 앞장에 과잉의욕에 대한 경구를 적어가지고 다녔다. 책이나 영화, 맛난 음식 외에는 세상에 아무것도 관심 없었으면서......

얼마 전 읽은 화가 노은님의 <내 짐은 내 날개다>에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어릴 때부터 부끄러움이 많아 남 앞에 나서는 거라면 쥐약인 화가가 어쩌다 교수가 되고보니 세미나 같은 데도 나가 청중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고......요리조리  피해 다니다가 어느 날 꼼짝없이 주최자에게 잡혀 세미나장에 끌려갔는데 청중석을 보니 어떤 할아버지 기자가 수첩을 펴놓은 채 코까지 골며 주무시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니, 나를 바라보고 있기는커녕 저렇게 엎어져 자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쫄 것 없잖아!' 그 깨달음 이후 화가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 앞에 서게 되어도 떨지 않게 되었다고.

깨달음은 천둥번개 소리를 동반하고 요란하게 오는 것이 아니다. 방금 예를 든 화가 노은님의 경우처럼 슬그머니 소리소문도 없이 올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누추한 일상 속에 매복해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짠~하고 나타난다.

--깨달음의 세계는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한 것을 취하는 세계가 아니라, 본래 더럽고 깨끗함이 없는 줄 깨친 까닭에 버릴 것도 취할 것도 없는 세계입니다.(114, 115쪽)

진지한 인간들이 흔히 자부심으로 삼는  분별력이나 노력, 의지도 크게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지은 인연을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는 정토회 설립자인 법륜 스님의 법문집으로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갖가지  질문을 즉석에서 대답하신 것이다. 수행에 관련된 심오한 질문들도 있지만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질문답게 가령  "이 남자랑 헤어질까요, 말까요?"하는 식의 원초적인 인생상담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스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이 얼마나 선선하고 심상한지 귀를 기울이다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문제가 스르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인생이란 그냥 사는 것입니다. 서로 따뜻하게 해주다 보면 정이 들고 고맙고 눈물이 나고 이래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뭐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면 거기서 정이 나고 그러는 것입니다.(25쪽)

마흔여덟 살에 장애가 있고 장가도 안 간 시동생이 자꾸 부아를 돋워서 괴롭다는 어느 여성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화를 내지 말아야겠다고 참아서는 안 됩니다.보살님은 뭐든 참고 억누르고 그러지요? 잘해야겠다고, 참아야겠다고 결심하는데 결심하거나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그에게는 문제가 없어요. 그는 잘못이 없어요. 그는 그렇게 생겼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 뿐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내 이해 관계나 내 편리에 사로잡혀서 상대를 문제 삼는 거란 말이지요. 문제를 삼아 놓고는 참는다고, 빈다고, 운다고, 결심한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47쪽)

정말 명쾌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구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어두워지고 경계에 끄달리는 사람들은 이런 법문집을 머리맡에 두고 가끔 꺼내어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이 책을 선물해주신  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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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6-10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신있게 살기를, 늘 바라는데... 늘 어렵네요.
그 무한한 空의 세계에 들어가야지 하면서도 들어가는게 또 두렵다지요.
이래저래 어려운 수행의 길입니다 ^^

로드무비 2005-06-10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소신이 없으면 또 그대로 살라는 것이 스님의 말씀입니다.
못난 대로 부족한 대로 받아들이고......님도 이미 아시는 이야기잖아요.
아무튼 법문집은 처음 읽었는데 참 좋네요.^^

히피드림~ 2005-06-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로드무비님은 다른 알라디너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요. 하긴 이벤트를 통해 님도 그만큼 다른 분들에게 베푸니까요^^
님의 리뷰보니까 생각나는데요,예전에 성철스님 돌아가셨을때 몸에서 사리가 많이 나왔잖아요. 근데 소소한 차이를 두고 돌아가신 어떤 이름없는 할머니 보살님의 몸 속에서 성철 스님 것 보다 더 많은 사리가 나왔데요. 거의 한가마니가 나왔다는... 그 할머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유명한 분도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성불을 한거죠.

서연사랑 2005-06-1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네요.
까닭없이 세상을 향해 부아가 치밀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혼자서 '내 탓은 아닐까' 걱정하는 저같은 사람.

야클 2005-06-1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에는 가끔 가면서 불경이나 스님들이 쓴 책은 거의 안 읽어본 것 같아요. 기껏해야 법정스님책 정도... 기억해뒀다가 한번 읽어보렵니다. ^^

로드무비 2005-06-1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법문집은 저도 처음인데 옆에 두고 자주 읽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요.^^
서연사랑님, 저같은 이를 위한 거죠.
세상 이치를 짐작할 것 같은데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혼란스러운.
가끔 부아가 치미는 건 저도 같네요.^^
펑크님, 사실 따져보면 책이든 마음이든 주는 만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정한 세상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래서, 사리에 대한 신화는 이미 깨지지 않았나요?^^
새벽별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분인데 낯이 익습니다요?ㅋㅋ^^
 
내 짐은 내 날개다
노은님 지음 / 샨티 / 2004년 5월
절판


물고기, 나비, 사람, 하늘, 새 등의 자연물을 단순하게 그려낸 그림에는 밝은 생명의 기운이 담겨 있으며, 천진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유럽에서는 그를 일컬어 "동양의 명상과 독일의 표현주의가 만나는 다리", "그림의 시인"이라 부른다.

1970년 독일 간호보조원을 자원하여 함부르크로 떠난 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노은님. 그녀의 그림이 있는 에세이집 <내 짐은 내 날개다>.

-2002년 9월 3일, 내 나이 만 쉰여섯, 남편 나이 쉰아홉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나의 남편 게하르트는 나처럼 그림을 그렸고 오랫동안 예술 속에서 지내온 착한 노총각이다. 같은 대학(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미학사를 가르치는 동료교수인데 한 학교에서 일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게 울림을 준 것은 알고 지낸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였다. (그림 123쪽)

내 머리속의 가장 달콤한 만남은 헌책방을 경영하던 신동엽 시인과 손님으로 온 인병선 여사(현 짚풀생활사 박물관 관장)의 만남과 결혼이다.
포천군 면사무소에서 결핵관리요원으로 일하다 간호보조원으로
독일에 가서 취미로 그림을 그려 화가가 되고 또 영혼의 짝을 만난
화가 노은님의 라이프 스토리도 그에 못지 않게 충분히 감동적이다.

이 책에 실린 그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134쪽)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고독이 느껴진다.

--처음엔 남몰래 쓰레기통을 뒤져 그곳에서 나온 재료들을 가지고 그리고 또 그렸다. 쓰레기통에 들어온 것들은 이제 더이상 필요 없고 하찮아진 것 같지만 실은 모두 제 역할을 다하고 들어온 것들이 아닌가. 구멍난 노동자의 손장갑에서도 그 구멍에 무진장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3년 전 친구 김원숙(화가)과 베네수엘라에 여행을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큰바람이 파도를 육지 쪽으로 몰고와 우리를 던져주었고 때마침 지나가던 아이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인생을 공짜로 사는 것 같다. 그날을 생각하면 뭐든 못할 게 없어진다. 그 후로 우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 또는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기로 했다.

쉰여섯에 결혼한 화가는 모차르트가 태어난 해에 지은 작은 로코코 성을 빌려 산다. 숲속에 위치한 이 성은 3층의 작은 건물로 거실에는 열두 개의 창이 나 있어 여우며 새들이며 개울가의 숭어가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데 이 3층짜리 성을 무려 35년간 빌리기로 했다니 부럽기 짝이 없다.

"당신은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입니다."
예술을 하다보면 마티스 같은 고집스런 면이 나오게 마련이다. (...)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 상대방을 감동시키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술로 가는 길이 아닐 것이다.

--평범한 존재들이 보여주는 일상적이고 세세한 사실들이 예술로 이어질 수 있다고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의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여러 가지 금지된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제멋대로이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화가 노은님의 예술론이다. 인정받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조급하면 안된다는 것. 그녀의 그림 몇 점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단순한 선과 요란하지 않은 색채로 인간의 기쁨과 심연을 보여주는 듯한 그림들이 좋다.

--어떤 독일 교수가 내게 물었다. 너의 나라 사람들 얼굴이 얼마나 인상적인데 아직도 석고 데생, 그것도 너의 나라 것도 아닌 그리스의 죽은 사람들 머리를 베끼고 시험을 보느냐고.

참다운 예술은 진정한 순수함을 원한다. 198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전시회를 마치고 배웅하기 위해 백남준을 역에서 만났는데 웬 거지 중의 상거지 하나가 서 있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혼자 보기 아까웠다고.
아마도 진정한 예술가들은 겉을 꾸미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을 쓰지 않을 것이다. 간략한 소개지만 노은님과 백남준, 노은님과 중광 스님의 만남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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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7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5-06-0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석고상.. 재밌군요.
질문 있어요. 현재 보이는 사진은 작은데, 클릭하면 커지는 거 어떻게 하는 건가요? 가르쳐 주세요.

돌바람 2005-06-07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 좋네요. 돈 생기면 꼭 사야쥐. 제가 인사는 제대로 드렸던가요. 좀 있다 찬찬히 들러보고 인사드릴게요. 땡스투우!

stella.K 2005-06-0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쁘네요.^^

로드무비 2005-06-07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화가의 결혼 일화 너무 좋지 않아요?
같은 직장에서 데면데면하게 보고 지내던 사람이 10년 뒤
마음속에 들어오다니!^^
stonywind님, 반갑습니다.
최근에 몇 번 다른 분 방에 댓글 다신 거 눈에 띄었어요.
저도 나중에 님 방에 가봐야겠군요.^^
하루님, 그건 제가 만든 기능이 아니고 본래 그렇게 되어 있답니다.
클릭하면 화면이 커지는 거 너무 신기하죠?ㅎㅎ

날개 2005-06-07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너무너무 마음에 드는 책이네요..^^
예술가는 예술가끼리 통한다는 건가요? 예술가들이 사는 거 보면 범상치가 않아요..

로드무비 2005-06-07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표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나 사랑하고 함께 부부로 사는 것 보면
뭔지 안심이 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부부는 예술로 통했다기보다 지극한 선과 선으로
만난 것 같아요.
호호, 혹시 또 모르지요.^^

2005-06-07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6-07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안 그래도 책이 좀 쌓였는데 한꺼번에 보낼게요. 이 책이랑 함께......
말씀해주신 코스는 그대로 꼭 한번 가보겠습니다.^^

플레져 2005-06-07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숙 화가를 좋아하는데, 그분의 친구군요. 아, 노은님의 친구 김원숙이라고 해야 하나요? ^^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고독의 그림이라니... 너무나 멋진 표현이에욧!!

낯선바람 2005-06-0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책인가 하고 들어와봤더니 이 책이네요. 그림 정말 좋아요^^ 이 책의 출간 배경에 관한 멋진 기사가 생각나서 링크할게요. 읽어보세요.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473923



로드무비 2005-06-08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수자리님, 읽어봤습니다.
개인의 자발적인 후원 참 좋네요. 흐뭇한 소식입니다.^^
플레져님, 그림도 그림이지만 살아온 이야기나 소박한 예술철학도 좋네요.^^

2005-06-08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마천 2005-07-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고상 데생 문제도 틀이 한번 만들어지고 안바뀐다는게 문제죠. 일제시대 교육 받은 세대가 대학을 장악하고는 제자들에게 숭배만 강요하기 때문에 이꼴로 이어져 옵니다.

루니앤 2007-12-2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쿠오레님_
:)
 
사요나라 짜이젠
황춘명 지음, 이호철 옮김 / 창비 / 1983년 7월
평점 :
절판


 

50대의 일본남자들이 떼를 지어 타이완에 엽색관광을 온다. 그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을 거쳐 군대에까지 함께 몰려갔던 친구 사이로 ‘천인참(千人斬) 구락부’의 회원이며 멤버는 그들 7인뿐.


옛 일본의 무사들이 지향한 것이 일생 동안 1천 명 적군의 머리를 베는 것. 그런데 이 구락부의 천인참이란 1천 명의 여성과 동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각자 붉은색 빌로드 소책자를 하나씩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때까지 관계한 여성들의 기록이 음모 한 가닥씩과 함께 투명비닐에 들어 있다.


그들의 여행 첫 목적지가 온천이 있는 자신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장의 전화를 받고 ‘바쇼 씨 일행을 환영합니다!’라고 쓴 종이를 들고 공항으로 나가는 ‘나’는 한마디로 죽을 맛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과거 일본의 침략과 대학살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데 아무리 회사 차원의 접대라지만 가는 곳마다 통역과 동포 여성을 그들의 품에 안겨주고 화대 따위를 중간에서 계산해 주어야 하는 게 그의 역할이니.


‘나’라는 1인칭 시점으로 이 불쾌하고 곤란하기 짝이 없는 경험을 독자에게 전하는 사람은 ‘미스터 황’이다.( 참고로 저자 황춘명은 <사요나라 짜이젠>으로 이 책이 나온 1970년대 초중반 자유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독자들은 미스터 황과 저자를 동일시했음에 틀림없다.) 이따위 뚜쟁이 일도 일이랍시고 강제로 던져주는 회사라니, 더구나 평소 황은 회사에서도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반골기질 강한 사람으로 호가 났다. 당장 사표를 던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만이나 한국이나, 소시민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럴 수도 없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린것들을 생각하면......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 일본인 엽색관광단을 골탕 먹였을까?

온천에서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술을 따르려고 나온 여성들을 주무르는 그들의 행각이야 이미 예고된 것이고. 그로서는 이왕 피할 수 없는 일, 최대한의 돈을 뜯어내어 동포 여성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돌아가게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아가씨들과 일본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장난을 좀 친다. 그의 주 무기인 통역으로. 가령 아가씨가 짓궂게 구는 자기의 짝을 향해 “병신 같은 녀석!”하고 욕을 하면 “당신 색마라는데요?” 하는 식이다.  이 일본인 관광객들은 정력이 딸리는 연령대라 그런지 ‘색마’라는 말을 들으면 칭찬 받은 아이처럼 입이 헤벌레 벌어지는 것이다.


그 징그러운 인간들을 인솔하고 다음 엽색 장소로 이동하던 기차에서  일본 유학을 꿈꾸고 있는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을 우연히 만나는데(중국문학을 공부하는 인간이 일본에 유학을 가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한술 더 뜬다. 중국인 대학생과 일본인 관광객들 간의 통역을 자처, 일본인 관광객들로부터는 과거 일본의 침략과 당시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고백하게 함과 동시에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다. 일본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감을 가지고 접근한 얼빠진 대학생 녀석 또한  혼찌검이 나는 것은 물론이다.  통역으로 장난을 쳐서라도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들어내고 마는 그가 나는 참 유능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자기 자신은 능히 자기가 대표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는 그의 대사를 보라! 아아, 정치든 경제든 독도 문제든 일본과의 협상 테이블에는 모름지기 미스터 황 같은 사람이 하나 꼭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을 나는 1983년 창비판 이호철 선생의 번역으로 먼저 읽고 열광하였다가, 우연히 헌책방에서  ‘기획출판  김데스크’에서 1975년도에 나온 것을 발견하고 구입했다. 육전소설 같은 책 표지가 아주 재미있다. 일본말 안녕(‘사요나라’)과 중국말 안녕(‘짜이젠’)을 갖다붙인 제목도 절묘하고.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뭐요?”하고 누가 물으면 아주 오랫동안 내 입에서는 “사요나라 짜이젠!”이라는 대답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왔다. 신세를 한탄하거나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는 대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매듭짓는 소설로 이만한 작품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이 작품 외에도 어느 바닷가 유곽이 배경인 <항구의 꽃>과, 미국인 차에 치어 다리가 부러진 한 노동자와 그의 가난한 가족이 몇 푼의 보상금과 호텔 같은 병원 시설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종내에는 그 사고를 횡재로 생각하고 병실에서 쌀 네 근 값인 사과를 하나씩 입에 베어 물고 희희낙락하는 이야기 <사과의 맛>, <주머니칼>이라는 작가의 섬세한 초창기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항구의 꽃>의 다음 구절이 뭐가 그리 좋았던지  당시 20대 청춘이던 나는 검은색 볼펜으로 밑줄을 쳐놓았다.  --운명은 거친 것이어서  우리 같은 여자가 어리광 피우기에는 어림도 없다구요.

 

 


1975년 企劃出版 김데스크 刊(권용철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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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6-05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소위 섹스관광이군요. 그런 시절을 겪은 우리가 지금은 동남아로 섹스관광을 나가며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으니, 과거의 경험에서 과연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네요. 일생동안 천명이라..으음.... 일년에 50명씩 해도 20년이 걸리는...아니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로드무비 2005-06-0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일생에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 이상의 축복이 어딨겠습니까!
인간들이 자신의 유능함을 이상한 방식으로 입증할려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 리뷰가 좀 이상한가요?
답글을 다는 님이 없군요.;;;


히피드림~ 2005-06-0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5년 치고는 책디자인이 그럴듯 한데요. 촌스러운 느낌을 거의 주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알라딘에서는 절판이네요.
그래도 도서관에 가면 있겠죠?

로드무비 2005-06-06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님, ㅎㅎ 그렇죠?
촌스럽긴커녕 뭔가 파워풀한 표지입니다.
이 책은 창비에서 나온 것도 절판되었는데 아마 오래 된 도서관에 가면 있을 겁니다.^^

날개 2005-06-0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책이군요. 표지도 특이하고..
주인공이 참 맘에 드네요.. 로드무비님이 좋아하시는 책이라니까 웬지 색달라 보인다는..^^;;

로드무비 2005-06-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오옷, 며칠 동안의 리뷰와 페이퍼를 모두 읽어주시는 세심함과
부지런함이라니!
이 책 리뷰를 제가 잘 못 썼어요. 전달이 잘 안되었습니다.
무척 좋은 책인데......^^

플레져 2005-06-0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멋진 책이 있었다니요!
그래서 제가 요즘...어리광을 피우지 않아요. 아주 근엄해졌다구요 ^^

로드무비 2005-06-08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안 그래도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섭섭하게시리...^^
 
바람아, 사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
사석원 지음 / 푸른숲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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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책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한지 비슷한 고급 종이로 만든 책싸개가 멋스럽다.

저녁 무렵마다 대폿집들을 다니며 나는 그리운 시절을 떠올렸다.
풍경들, 사람들... 풍경도 사람도 변했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두들 보고 싶구나.
가난했지만 낭만이 보석같이 빛나던 세월들이여, 안녕!(본문 중에서.)


화가의 사인본.
선착순 50인에게 사인본을 준대서 부랴부랴 주문한 책이다.
이 땅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대폿집 이야기를 화가의 유머러스한 일러스트와 함께 듣는 재미라니!
책을 펼치면 시금털털한 막걸리 냄새와 함께 파전, 꽁치 굽는 냄새가 확 풍긴다.

--시인 이상을 좋아했던 박인환은 이상의 기일인 3월 17일 오후부터 이상을 추모하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명동의 한 대폿집에서 폭음을 한다. 그렇게 사흘을 내리 술을 마신 박인환은 19567년 3월 20일 밤 9시경, 그의 세종로 집에서 만취 상태로 갑자기 숨지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한 살이었다.(16쪽)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의 유명한 대폿집 '소문난 집'은 와보고 사람들이 세 번 놀란대서 '삼경원(三驚苑)'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저자가 주로 다닌 곳은 옛날 문인들, 가난한 예술가들이 많이 다녔던 곳. 그리운 이름들과 얽힌 소소한 일화들도 맛깔나게 풀어놓고 있다.

--배병우(사진작가) 선생과 임 선생(막걸리공장 사장)은 서로에게 막걸리를 부어주며 어릴 적 친구인 여수 출신 화가 손상기(1949~1988)에 대해 이야기한다.초등학교 때 척추를 다쳐 성장이 멈춰 불구가 된 손 화백은 서른아홉에 요절한 '한국의 로트렉'이다.(...) 이 기진맥진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말집'에 모여들어 또다시 찾아온 고난을 이겨내려 한다.(70, 71쪽)

막걸리 한 병을 800원에 받아 돼지 껍닥을 무한정 구워주며 1500원 받는다는 말집 인심. 그래서인지 노가다하는 사람, 실업자들도 마음 편히 찾는 곳이란다.

여수 오동도 근처의 말집.

--초여름 질긴 해가 떨어지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올 때 나는 광장시장으로 들어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좌판 대폿집이 환히 불밝힌 채 빈대떡이며, 순대, 머릿고기, 국수 등을 차려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서울 광장시장에는 300여 개의 좌판이 몰려 술과 음식을 팔고 있으니 말 그대로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좌판 '대포촌'이다.(84, 85쪽)

이렇게 펼치면 두 페이지에 걸친 대작(?) 일러스트도 심심찮게 나온다.

--법조인과 시민운동가들, 학생과 인쇄공과 사무원들이 섞여 북적거리던 대폿집에 빈자리가 많아졌다. 도로메기집엔 차림표도 냅킨도 없다 그래서 대폿집의 원형 같은 곳이다.
원형은 군더더기 없고 단출한 것이다. 흔한 액자 하나 없지만 숫자만이 덩그렇게 적힌 달력 하나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132, 134쪽)

대구시 남산동 도로메기집 이야기. 원형(따우님!)에 대한 저자의 간략한 정리가 멋지다.

--저 남학생이 오늘밤 어떤 낭만적인 상황을 기대하고 저 여학생과 술자리를 가졌다면 애당초 틀렸다. 저리도 술이 약하니 말이다. 여학생은 검고 긴 머리칼을 가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올리비아 핫세나 <사랑의 스잔나>의 홍콩배우 진추하도 검고 긴 머리칼을 가졌지.

고대 앞의 오래된 대폿집 '고모집'에서 커플로 보이는 남녀의 모습을 보며 상념에 젖는 화가.
불콰한 얼굴로 대폿집을 나섰을 때 마침 하얗게 하얗게 눈이 내렸단다.
오래 전 이대앞 모 주점에서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와 실컷 마시고
떠들다가 나섰을 때 함박눈이 펑펑 내렸던 날이 내게도 있었지.

--제주의 바다에선 소주를 마셔야 한다. 그것이 어울린다. 한라산 소주라면 더욱 좋다. 봄여름엔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어 잔, 가을겨울엔 소라 한 점에 소주 두어 잔, 그게 제격이다.(225, 226, 227쪽)

제주 탑동 잠녀 주막, 컨테이너 박스와 플라스틱 의자 몇 개, 테이블이 전부. 22명의 해녀가 매일 바닷속에 들어가 직접 공수하는 소라니 멍게니 싱싱한 안주라니......바닷바람 냄새가 코끝에 확 끼치는 듯하다.

이벤트 선물로 받은 화가의 본문 일러스트를 이용한 엽서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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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6-0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그림책들은 로드무비님의 포토리뷰로 만족한다니까요. ㅎㅎ

비발~* 2005-06-0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의미에서 감사.(--)(__) 무비님 포토리뷰 아니었으면 나왔는 지도 몰랐을 듯~^^

인터라겐 2005-06-0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겠어요... 일단은 보관함으로...

로드무비 2005-06-0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발~*님, 이 책 강력 추천합니다.
특히 술 좋아하시는 분들.
앞으론 포토리뷰만 올릴까봐요.^^
블루님, 인터라겐님, 그림이 많아서 이 책은 포토리뷰만 가지곤
아쉬운 게 많을 텐데요?^^

로드무비 2005-06-01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빈현님, 주소까지 자세히 나와 있진 않지만 대강 위치를
말해놓아서요.
찾아가는 데 지장이 없을 듯합니다.^^

로드무비 2005-06-01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저자의 따우님 찬양이 이어지죠?(못 읽으셨나?;;)
따우님, 추천해 주시면 가르쳐 드릴게요.^^

로드무비 2005-06-0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집구석 보고...이렇게 좁고 누추한 대폿집이 있을까!
2.술손님 보고 놀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인, 언론인, 교육자,
예술가들의 아지트다!
3. 주모의 인품과 미모에 놀란다!
ㅎㅎ 따우님, 궁금증 풀리셨죠?^^

2005-06-01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리오 2005-06-0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멋져... 게다가 밖에 비까지 주룩주룩 쏟아지고 천둥번개까지 배경이 되어주니.... ^^

실비 2005-06-0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의 책이란 말이죠.. 이거보고 또 끌리네요.ㅎㅎㅎ 퍼갑니다.^^

로드무비 2005-06-0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님, 끌릴 때 사세요.
1천원 할인쿠폰도 준다고요.^^
클리오님, 어젯밤 천둥번개 쳤나요?
모르고 퍼잤어요.
(밤에 서재활동을 해야 찐한 글이 나오는데...쩝)

날개 2005-06-0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의 책이라 그림들이 저리 생생하군요...^^
날씨가 흐릿하니.. 술 한잔 땡기죠? (술도 잘 못먹으면서 왜 이리 폼은 다 잡는지..흐흐~)

로드무비 2005-06-0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안 그래도 어제 한잔했습니다.
동생 부부가 중국요리를 시켜서요.^^
(이 책 마음에 들어요.^^)

2005-06-03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6-03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마음에 드는 것만 눌러주세요.^^

2005-07-05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흉터와 무늬
최영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가 너무 나쁜 것인지 나 스스로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몰라도 어린 시절 일들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린 시절을 소재로 해서 소설은커녕 손바닥만한 에세이 하나 제대로 쓸 수 없는 인간으로서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산 이 작가의 세세한 기억력에 찬탄하며 책을 읽었다.

<흉터와 무늬>에서 최영미는(작가는 후기에서 이 책이 어디까지나 허구라고  밝히고 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작가의 얼굴을 장면장면마다  대입하며  읽었다. 단 둘이는 아니었지만 여럿이 어울려 새벽까지 술을 마셔본 적도 있고, 실제로 그녀가 나보다 먼저 택시에서 내린 것도 이 책의 배경처럼 세검정 모 빌라 골목이었다. )  두세 살 때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셔서 방 안에 사람들이 들끓고 혼자 누운 자신은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고 말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여 내 인생 중의 그런 장면을 생각해 보면 서너 살 때 꾀죄죄한 런닝 바람으로 꽃밭 앞에 서서 오만상을 찡그리고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남아있을 뿐.

--신이여, 이 글을 썼던 손을 용서하소서. 라고 단 한 줄의 의미심장한(그녀답지 않게 너무 호들갑을 떠는 느낌!)  문장이 적힌 페이지를 뒤로 넘기면  ' 1.거울 앞에서'를 시작으로 '137. 다시 거울 앞에서'로 끝나는데, 차례로 번호를 달고 있긴 한데 대부분 심상하고 무심한 제목들이다. 그 내용은 대부분 '지긋지긋한 집구석'(황지우의 시에서)과, '아무도 안 보면 내다버리고 싶은 식구'(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표현)에 관해서이다.  (집과 가족에 관한 이 표현을 꼭 한 번 써먹고 싶었는데 너무 잘 됐다.)

 '14. 아무도 무시 못할 몸' '23. 참기름에 볶은 밥'   같은 제목을 보라. 이런 식이다. "오늘 네 생일인데 뭐가 먹고 싶니?"하고 엄마가 물었는데 "참기름에 밥이나 볶아줘!"하고 대답했더니 엄마의 얼굴이 흐려졌다는 것이다. 평소 감상과 과장이 과도하게 들어간 글은 속이 느글거려서  절대로 못 읽어내는 나로서는 평소 이 작가의 냉소와 위악이 적당히 섞인 글이 기호에 맞았다.  그러니 작가의 자전적인 이 소설도 단숨에 읽힐 수밖에......

태어나면서부터 심각한 선천성 심장병을 가지고 태어나 왈가닥 자매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구석에서 골골거리다 열여섯 살에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위장입양,  수술 후 한 줌 재로 돌아온 언니가 이 장편소설을 쓰게 한 동인이다.  그런 피붙이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무시했다는 죄책감.  설령 작가에게 그런 언니가 실제로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짧은 생애를 두 줄로 정리만 해도 가슴 먹먹해지는 그런 규모와 심도의 상처는 언젠가 제대로 정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손에 의해 서둘러 봉합되었던 무수한 상처들.

--장례식은 산 자를 위한 의식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스스로를 달래는 절차를 우리는 생략했다. 꽃도 촛불도 없었다. 우리는 언니를 매장하지 못했다. 독한 향이라도 피우고 식구끼리 얼싸안고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음을 쏟았다면 지금쯤 언니는 희미해졌을 텐데. 우리는 우리를 치유하지 못했다.(261쪽)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자전적인 성장소설이라면 은희경의 <새의 선물>도 그렇고  몇 편 있지만,  137개의 번호와 제목을 달아 짧은 산문 형식으로 써나간 이런 소설의 형식은 내가 알기로는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더니 중반을 넘다보면 다소 어리둥절해지는 느낌도 있다.(시인은 고육지책으로 이런 소설 형식을 취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슬그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자매들의 캐릭터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처럼 팔을 뻗으면 만져질 것 같은 것도 이 책의 묘미.

아버지의 발길질에 밥상이 날아가던 어린 날을 혹시 슬로비디오로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우리들 지나간 날의 생채기는 흉터가 되었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희미한 무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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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ntomlady 2005-05-3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아무리 아픈 상처라도 희미한 무늬로마나 남은 생채기는 지난 날을 증언하는 거겠죠. 최영미란 작가, 별로 안 좋아했는데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우연히 만났어요. 패셔너블한 다른 주부작가들을 보다 평범하고 소박한 노처녀 작가를 보니 아, 이 여자는 글로 먹고 사는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직업란에 주부라고 되어 있어서 잠깐 즐거웠다는.. ^^

깍두기 2005-05-3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곱살 이전의 기억은 없는 사람인데, 어린 시절 기억 자세하게 하고 있는 사람 보면 신기해요. 난 왜 기억을 못할까?
1. 특별한 일이 없는 평범한 삶이어서
2.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무의식 속으로.....
저는 1번에 비중을 두고 있지요, 당연^^

히피드림~ 2005-05-3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나온 책이네요.
<흉터와 무늬>라는 제목이 맘에 듭니다.
출판사에 근무하신 경력이 있으셔서 그런가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많이 아시는거 같아요.^^

로드무비 2005-05-3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깍두기님, 아마도 님이나 저는 그런가보아요.
전 기억력 안 좋은 거 별로 안 아쉬워요.
기억 못해서 아쉬울 일이 별로 없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인가?^^
스노드롭님, 님도 보면 참 어지간히 돌아댕기셨구랴.
글로 먹고사는 여자, 멋져요.^^

로드무비 2005-05-31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님, 그래봤자 먼 빛으로 한두 번 슬쩍 보는 건데요.
아무튼 직접 얼굴이라도 한 번 본 사람의 자전적인 글은 더 생생하고 재밌어요.^^

날개 2005-05-3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시절 기억은 저도 없어요..ㅡ.ㅡ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사람보면 신기하더라구요..ㅎㅎ 참기름에 볶은 밥 같은 산문 제목은 어째 로드무비님을 연상케 하는걸요? ^^

로드무비 2005-05-3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날개님, 제 허름한 밥상 메뉴 제목 같죠?^^

2005-05-31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5-3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잉? 속삭이신 님,
전 위악이 아니라 위선적인 인간인데요.ㅎㅎ

야클 2005-05-3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잘 읽고갑니다. ^^

로드무비 2005-06-0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멋진 리뷰라니, 고맙습니다.^^

플레져 2005-06-03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매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맛난 소설깜이죠.
님의 리뷰가 더 재미날 것 같다에 한표 ^^

니르바나 2005-06-03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엊그제 저의 동네 교보매장에 가서 열번쯤 들었다 놨다 하다가 놓고 나왔습니다.
박상륭의 소설 한 권 보는 것도 큰 무게로 압박해 오더군요.
로드무비님의 리뷰로 만나려 그리했나 봅니다.

로드무비 2005-06-0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이 책 읽고 싶으시면 나중에 빌려드릴게요.
제 리뷰나 소장함 중에 보고 싶은 책 혹시 있으면 말씀하세요.
기쁜 마음으로......^^
(저는 박상륭 씨 책을 읽을 정신머리가 요즘 아니어서요.;;)
플레져님, 이 리뷰랄 것 없는 리뷰가 재밌다고 말씀해 주시니...^^

니르바나 2005-06-03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소장번호 68(한대수), 72(전제덕)이요.
깨끗이 보고, 듣고 돌려드릴께요.
시간되시는 대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니르바나 2005-06-0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말씀하신대로 택배비 감안해서 두 권도 함께 부탁드릴렵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6-08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기름에 밥이나 볶아줘, 라는 말은 왠지 로드무비님이랑 많이 닮았어요. ^^ 님, 왜 이렇게 생각에도 없던 책들을 읽게 만드는 거예요, 참...

로드무비 2005-06-0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언제 오셨다 가셨어요?
참기름과 계란프라이에 비비는 밥, 우리 전공인데, 그죠?^^
니르바나님, 접수했습니다.
오늘 부쳤어요.^^

마냐 2005-06-12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궁. 이 리뷰는 또 왜 놓쳤답니까....뒤늦게 와서 잘 보고 갑니다. 첨엔...어린시절 기억 없는 동지가 또 있군...뭐, 이런 잡념부터 시작해서 나중엔 참기름 냄새가 나는거 같아요...정말 제가 좀 산만하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