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게 말하자면 돌아왔다. 가장 긴 시간 집을 떠나 있었다. 넓은 공간에 있다가 좁은 공간에 오니 답답하면서도 애틋한 느낌이 든다. 완벽하게 회복된 건 아니어서 일상의 복귀는 아직 힘들다. 적지 않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살짝 우울하다. 건강하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하는 날들이다. 다시 감사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 날들이기도 하다.

 

 가지런하게 쌓인 책들이 웃는 것 같다. 빈 방에서 나를 기다려준 책이라서 읽기도 전에 애정이 자란다. 잊고 있던 책도 있어 반갑다. 김숨의 소설 『바느질하는 여자』는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다.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책정리다. 그만큼 책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 눈이 나빠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대녕의 장편소설 『피에로들의 집』이 나왔으니 조만간 곁에 둘 것 같다. 퇴원 후 특별히 신경썼던 부분이 먹거리였던 터라 예전보다 음식을 다룬 글에 관심이 커졌다.『황석영의 밥도둑』이 개정판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정도니 말이다. 왕성한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침엔 역시나 파프리카와 구운 고구마를 먹었다.돌아오 마자 순대, 떡볶이, 치킨을 먹었는데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다. 맥주를 마시지 못해서 그런 걸까. 앞으로 나는 맥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세라는 말이 나왔으니 허연의 이런 시를 읽고 가야지. 내게는 곧은 자세, 기다릴 줄 아는 자세, 열심을 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세

 

 

 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

가 물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

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

고.​ 그는 한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

며 시간을 잊는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

다 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치리고 몸을 일으켜 먼바다

로 나가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

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이 책이 있다. 정결한 문장으로 웅숭깊은 시간을 선물하는 책. 봄에 만나면 더 좋을 제목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이제서야 읽는다.

 

 창은 눈이다. 내 눈이 보는 것을 믿을 수 없으니 창에 드리워진 얼룩을 탓하는 말은 애초에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차에 기대어 본다. 마음의 창이다. 내 작은 창에 난 얼룩들이 사람을 보는 청안이 되면 좋겠다. 세월 가며 차츰 얼룩으로 흐려질 두 눈에 세상을 보는 혜안이 되면 더 없이 좋겠다.’ (71쪽)

 

 

 ‘우리의 마음도 한순간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즉심이다. 애초에 정처 없는 것들, 바람 끝자락에 매달려 나붓대는 것들에 마음이 붙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창밖에는 밤하늘과 하나된 검은 강이 낮게 엎드려 뒤채고 있다. 풀벌레도 덩달아 잠 못 드는 밤에 또 생각이 잦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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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4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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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인데 어두운 그 방에 잠시 머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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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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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위기에 취하다는 말이 있다. 의도하지 않았던 말과 행동을 쏟아내는 대부분은 계획이 아닌 충동에 의한 것이 많다. 돌이켜보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순간 자신의 감정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한낮인데 어두운 방』속 미야코도 묘한 분위기에 동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이 아닌 지속적인 어떤 감정이라면 그건 다른 것이다.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사는 여자 미야코는 평온하다.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 남편 히로시가 서운하지만 불만을 토할 정도는 아니다. 아이가 없는 결혼생활도 만족스럽고 살림을 하는 생활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떨림은 없다. 그것을 걱정이라 여기지 않고 살아간다. 미야코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으로 자주 인사를 나누는 미국인으로 대학 강의를 하는 존스 씨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미야코 혼자다.

 

 존슨 씨와 가까워진 건 함께 동네를 산책하면서다. 미야코는 이상하게 존스 씨가 편하고 말이 통하는 게 신기했다. 히로시와는 다른 느낌이랄까. 딱히 잘못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히로시에게도 존스 씨와의 산책을 모두 말했으니까. 문제는 존스 씨 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을 남편의 반응이었다. 마치 바람을 피운 것처럼 매도한다. 놀랍게도 남편과 다툰 후 미야코는 존슨 씨를 찾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다.

 

 ‘확실히 나는 존슨 씨와 있으면 평소 못 느끼던 것을 많이 느꼈어. 바람을, 햇살을, 새소리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말았어. 자유를, 키득키득 웃고 싶어질 만한 비밀스러운 떨림을,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마음 든든함을 느끼고 말았어.’ (186쪽)

 

 권태로운 일상에 한 줄기 바람이 분 것이다. 예전에 몰랐던 바람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죄라 부른다. 어떤 떨림과 흥분을 느끼는 게 과연 죄일까.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 「일본에 가 닿기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는 주인공이 등장한다)에서도 죄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런데 나는 궁금하다. 죄라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말이다. 그저 돌이킬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을 뿐이다.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사람, 자신밖에 없다. 그러니 미야코를 지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의 감정이고 선택이니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하는 말이 맞을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도 그 사람이 될 수 없으니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들어주고 내 의견을 듣고자 한다면 솔직한 의견을 들려주면 된다.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마주한 상황이라 나 역시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소설로 돌아오면 그저 그런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야코의 이런 고백(‘나,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어.’)으로 우리는 연애 소설이 아닌 성장소설로 봐야 한다. 안전한 성에서 인형처럼 살았던 미야코가 그 성을 버리고 세상 밖으로 나온 건 다름 아닌 하나의 성장이다. 뻔한 결말이 아니라서 더욱 그렇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벗어나서 내가 그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삶.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이번에도 잔잔하다. 평화롭게 지속되는 일상의 묘사와 한 겹 옷을 입은 듯 절제된 감정의 표현. 오히려 잔잔해서 그 안에서 몰아치는 광풍은 점점 더 커진다. 미야코의 심연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미야코는 한낮인데 어두운 방 분위기에 취한 게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단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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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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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매일 같은 공간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여행이나 출장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니까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의지가 있을 때에만 변화가 가능하다. 두 개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는 매일 어떤 변화를 원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기를 소망한다. 달라졌기를 바란다. 성장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변화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소망은 발효되지는 않고 부풀기만 할 뿐이다. 커다란 사건 사고를 겪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본연의 나를 찾고 새로운 삶을 계획하겠다는 다짐은 흐려진다. 그래서 고전과의 대화를 통해 뭔가 거창한 울림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저자처럼 고전을 인생의 목표나 동지로 여길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나는 그가 들려주는 고전과의 대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많은 부분은 통했지만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게 책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았든, 누구를 사랑했든 현재 필요한 건 나에 대한 회복력이다.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그들이 나, 사랑, 관계, 죽음에 관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는 옳다. 조목조목 정리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어느 시대를 살고 있건 결국 나로 시작해 우리로 확대되어 다시 나(죽음)으로 순환되는 삶이라는 사실이다. 부정하고 싶어도 그렇다. 해서 학창시절 도덕, 윤리, 철학 수업을 듣는 듯 착각에 빠지게 된다. 중요한 건 그 수업을 듣고 이해하는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순수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내 환경에 맞게 취할 수 있는 능력은 지녔다. 저자는 이러한 독자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한 듯하다. 고전을 등에 업고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는 않으니까. 프롤로그의 이런 부분만 봐도 그렇다. 고전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오늘날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한 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의 고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2쪽)  그러니까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삶도 현재를 사는 우리와 같았다고 공감할 수 있도록 이끈다.

 

 놀랍도록 빠르게 시대가 변화하고 과학이 발전하여 상상했던 일들이 실현되는 세상을 살고 있지만 독립적이면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한 사람을 사랑하여 결혼을 했음에도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기도 한다. 그럼에도 쇼펜하우어의 고독을 소개하고 샤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과 평생을 홀로 지낸 칸트의 결혼론을 꺼낸 것은 다양한 삶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SNS를 통해 보이는 나를 내세워 다른 나를 숨기기도 한다. 어느 순간 나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쉽게 지식을 검색하고 그것을 취한다. 귀찮고 바쁘다는 이유나 혹은 나와 상관없다는 핑계로 어렵고 오랜 시간의 사고를 요하는 문제는 회피한다. 어느 순간 정체성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되는 나에게 잊고 있던 데카르트와의 만남은 기쁜 충격이었다. 모든 걸 의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명제‘나는 존재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코기토 에르고 숨’(47쪽)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천둥과 번개였다. 어디 그뿐인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몽테뉴는 빛나는 거울이 된다. 우리 내면 본래적 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무 유용성을 따지지 않고 아무 목적 없이 우리 자신이 되는 길이다.’ (94쪽)

 

 고전을 통한 이러한 순간이 나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나 몽테뉴의《수상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끊임없이 사고하고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숙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예전과 다르게 이방인과 내국인의 구별이 차별로 이어지는 세상에 우리가 수용해야 할 것을 이미 짐멜은 알고 있었다니 감탄하게 된다. 과연 짐멜의 《이방인에 대하여》은 가장 훌륭한 고전이자 인생 지침서였다. 거기다 어떤 일이든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삶의 경우의 수에 대해 언급하는 저자의 말은 영혼의 저장고에 저장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차이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거리 두기를 기억해야 한다.’ (234쪽) 한 발만 떨어져서 바라보아도 다르게 보인다는 사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을 수 없다는 가장 단순한 진리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니까. 그것은 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늙음과 죽음을 통해서도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계획하는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죽음은 영원한 두려움이다. 삶과 죽음이 수많은 철학자의 사유의 대상이며 고전의 주제가 되는 건 당연하다. 개인적으로 1년 간격으로 아버지와 큰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나에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부분은 남다르다. ‘죽음을 향한 존재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앞질러서 달려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실존적 세계에 던져진 존재임을 자각하고, 물리적 시가니 아닌 자신의 고유한 실존적 시간 속에 살아가며, 자신을 ‘염려’하고 결단해 자기 삶을 기획하게 된다. 결국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실존적인 의미의 죽음이다.’ (296~297쪽)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는 건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결국 고전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산다는 것에 대한 문제다. 같은 공간에서 눈을 뜨고 같은 대사을 바라보며 우리 혹은 타인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일. 어제의 나와 같은 내가 아닌 조금은 성숙된 나로 삶을 향해 살아가는 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방대한 고전, 그 오래된 생각의 숲으로 걸어간다. 나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충만한 영혼을 위해 나아가려 한다. 설령 그 숲에서 길을 잃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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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젯밤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꿈을 꾸었다. 할머니는 건강한 모습이었고 깐깐한 잔소리를 생생하게 늘어놓으셨다. 그것은 큰언니 집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내가 이 공간에 대해 고민하고 있기에 그런 꿈을 꾼 것 같다. 예상보다 휠씬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큰언니만 그 자리에 없을 뿐. 작년 여름에 급하게 유품을 정리하지 않았나 싶은 후회가 밀려온다. 온전한 정리를 한 건 아니지만 급한 마음이 있었다. 정리한다는 말이 사라진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존재한다는 걸 느끼는 나는 때때로 서럽다.

 

 우리는 더이상 큰언니의 부재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큰언니를 언급하는 일이 줄어든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나는 큰언니의 손때가 묻은 것들과 함께 한다. 현관문에 달려있는 풍경의 소리는 문을 열 때마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다. 언니의 부탁으로 내가 주문한 빨간 스탠드, 필요한 생필품을 창고나 서랍에서 꺼낼 때마다 반듯하게 정리된 모습에 감탄한다. 버리지 못한 신분증과 여권 속 사진은 언니의 시간을 짐작하게 만든다.

 

 초반에 몰려오는 고통의 예리한 모서리들이 무뎌지면서, 마비되고 분개하던 마음이 천천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옮겨 간다. 슬픔은 더욱 깊어진다. 허전함과 결핍감, 동요의 순간들과 함께. 상냥함이 깃든 슬픔이 퍼지는 것은 더 나중이다. 부드러운 아픔이 떠난 사람의 이미지를 둘러싼다. 죽음이 우리 안에 똬리를 틀었다. 그 흐름에는 지름길이 없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죽음은 삶에 속하며, 삶은 죽음을 껴안는다.’ (『수런거리는 유산들』119~120쪽)

 

 아무리 연습해도 이별은 속수무책이다. 그저 멀고 긴 여행을 떠났다고 여겨도 어려운 일이다. 분명 잘 가라고 인사를 했는데 떠나는 이를 바라보며 서 있다. 뒤를 돌아 내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한 번에 돌아지지 않고 수많은 연습을 필요로 한다.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책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김연수가 언급했다는 이유로 제목만 기억하고 있었지만 읽을 용기를 내지 않았다. 집 안의 모든 사물이 수런거리는 소리를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부모님의 집을 비우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의 연애편지를 읽으면서 그들의 사랑과 삶을 마주하지만 나는 언니가 꼼꼼하게 기록한 메모나 일기를 대면할 수 없다. 일부는 읽다가 덮었거나 일부는 태웠고 일부는 그대로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곳을 정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용기를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옳지 않을 일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용기를 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시간을 요구하는 것들이 있다. 죽음도 그 하나다. 엄마, 할머니, 아버지, 큰언니의 죽음은 저마다 다른 질량의 시간을 요구한다. 마음을 나눠 수많은 비밀의 방을 만들고 살아가는 동안 죽음의 방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 방은 열린 채 쉽게 닫히지 않는다. 그곳을 채울 수 있는 건 통증과 그리움이며 애도다. 누구나 언젠가는 누군가가 만든 그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영원할 수 있다고 믿는 인생은 영원할 수 없다. 어디선가 들은 오늘이 인생이라는 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오늘은 오늘일 때 가장 빛난다. 어제였던 시간은 사라졌고 내일인 시간은 잡히지 않기에. 느닷없는 일들이 인생을 지배한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말에 담긴 절실함을 모르고 산다.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 작별을 준비하면서 살 수는 없지만 오늘이 인생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묘지는 놀이터였다. 놀이터 중에서도 가장 놀랍고 가장 흥미진진한 놀이터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다. 나는 놀이의 비밀을 잃어버렸다. 나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다. 모든 날들이 작별의 나날인 것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95쪽)​

 

 아침에 아주 소중한 사람과 통화를 했다. 목소리로는 자주 만났지만 눈을 바라보며 같은 공간에서 머문 시간을 모두 합해도 하루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 우리는 그렇게 산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집중하며 자신의 삶을 산다. 가까운 듯 멀리서 서로를 응원하며 살아간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으며 산다. 무엇이 인생인지 모르며 그렇게 살아간다. 아무리 연습해도 속수무책인 이별을 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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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20 14: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뎌지지않는 것이 있다면 그게 아마 이별의 상실일텐데 그래서 어쩜 신은 (신이 있다면) 인간성의 최후에 만들어 놓은 것 중 하나가 죽음 아닌가 그럴 적이 있어요.
잘 읽고 갑니다...이런 글에 ㅡ개인의 사유에 (인지)덧글함이 옳은지 한참 망설이다 혼자보다는 누군가 이런 고민을 같이 한다는게 덜 외로우실 듯 하여..

자목련 2016-02-22 10:51   좋아요 1 | URL
[그장소] 님, 고맙습니다. 이별을 인정하고 삶을 직시하고 살아가는 과정에 [그장소] 님의 댓글이 힘이 됩니다.

blanca 2016-02-20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쩔 수 없이 죽음과 만나야 하는 시간들이 앞에 놓여 있는 인생이 참 무섭기도 하지만...태어난 이상 숙명이겠지요? 자목련님처럼 잘 해 나갈 수 있을런지, 자문해 보게 됩니다.

자목련 2016-02-22 10:50   좋아요 2 | URL
멀리 있다고 여겼던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걸 실감하는 날들입니다. 말씀처럼 숙명이니 받아들여야하겠지요.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것을 알아가는 게 삶인 것 같아요.

2016-02-20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2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16-02-20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니를 보내고, 언니가 남긴 일기장을 본 적이 있어요. 가슴이 미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그때 알았어요. 그 일기장을 다시 펼칠 수가 없어 49재 마지막에 옷가지랑 태웠는데 지금도 후회가 되진 않아요. 10년이 지났어도 지금도 펼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이런 얘길할 때는 어둠이 함께 했는데 이젠 햇살 드는 빈 방에 허전히 앉아 있는 느낌이 들어요. 용을 쓰며 견디다 이제 힘이 빠진 탓일까요?

자목련 2016-02-22 10:44   좋아요 2 | URL
이누아 님, 고맙습니다. 같은(결코 같을 수는 없겠지요)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어떤 시간은 흐리지 않는 것 같아요. 어둠이 지나고 햇살로 가득한 방을 저도 만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시한 번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6-02-20 2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영원한 안식으로 이해하면 삶의 완성, 삶의 일부로 긍정할 수 있을텐데요. *^

자목련 2016-02-22 10:43   좋아요 2 | URL
머리로는 인식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지 못하는 게 아닐가 싶어요. 그러니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걸 모른 채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장소] 2016-02-2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위로받으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