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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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파노라마 사진이야. 파노라마 사진은 360도의 시각을 한 번에 보여줘. 그 사진을 보면 자신이라는 인간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지.’ (232쪽)

 

 사진은 시간을 저장한다. 사진을 기억을 저장한다. 사진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말한다. 순간을 저장하게 위해 셔터를 누르고 가장 최고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셔터를 누른다. 때문에 누군가는 일기가 아닌 사진으로 생을 기록하기도 한다. 때로 사진은 인간의 눈이 놓친 무언가를 찾아내는 눈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매혹적인 사진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조영주의 『붉은 소파』에서 사진은 과연 무엇일까?

 

 소설은 붉은 소파에서 잉태되었다. 붉은 소파에 앉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셔터를 누르는 한 남자 석주. 그는 유명한 사진작가로 15년 전 딸 은혜를 살해한 범인을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 직접 찾기로 결심한다. 딸은 붉은 소파에서 살해되었기에 범인이라면 붉은 소파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석주도 범인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에게 사진은 예술적 의미가 아닌 범인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런 석주가 제자이자 사위인 재혁은 안타까울 뿐이다. 어떻게든 스승을 돕고 싶은 재혁은 살인 사간의 현장 사진을 부탁한다. 그곳에서 석주는 죽은 은혜를 닮은 형사 나영을 만나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영과 석주는 살인 사건의 단서인 카메라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 진범을 찾아낸다. 그 뒤로 나영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석주를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몇 번 나영을 도와주다 석주는 과거 은혜가 당한 303 연쇄살인사건에 나영도 피해자라는 사실과 사위 재혁은 옛 연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사건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나영과 석주는 점점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고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나영은 죽은 은혜를 향한 석주의 사랑을 자신의 아버지의 그것과 비교한다. 딸의 상처를 단 한 번도 만져주지 않은 아버지.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정치인. 그는 언제나 미래를 살고 있었고 석주는 과거를 살고 있었다. 모두 현재를 외면하고 살고 있다. 그와 석주의 만남은 운명이었을까. 소설의 처음과 끝은 하나였던 것처럼 이야기는 모두 붉은 소파로 통한다. 붉은 소파를 알아보는 사람들, 그 안에 담긴 상처.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사진에 담긴 사연이 퍼즐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독특한 소설이다. 붉은 소파에 대한 궁금증과 과연 범인이 누구일까, 독자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범인을 잡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사진. 사진 본연의 기능을 통해 위안과 치유를 얻는 이야기. 작가가 무척 공을 들였다는 걸 곳곳에서 알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카메라로 찍지만 대부분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카메라와 사진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할까. 한 장의 사진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담았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그 사진이 때로 현재를 살게 하는 강력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음을 잊고 있었다. 추억을 저장하고 간직하여 삶을 보여주는 사진의 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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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06-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너무 섹시해요~

자목련 2016-06-29 17:54   좋아요 0 | URL
매력적인 표지에 반하고 말았지요, ㅎ
 
희지의 세계 민음의 시 214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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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 쉽게 읽히고 공감할 수 있는 시, 이해할 수 없어 다시 읽게 만드는 시. 좋고 나쁨을 구분 짓는 건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시에 끌리는가. 이렇게 물어야 했다. 황인찬의 시집 『희지의 세계』를 읽고 난 느낌이다. 세대가 다르니 공감할 부분을 찾지 못했고 그 점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와 관심을 갖게 만든다.

 

 

 희지의 세계

 

 

 저녁에는 양들을 이끌고 돌아가야 한다

 

 희지는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생활도 오래되었다

 

 무사히 양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희지는 만족스럽다

 

 기도를 올리고

 짧게 사랑을 나눈 뒤

 

 희지는 저녁을 먹는다

 

 초원의 고요가 어둠을 두드릴 때마다

 양들은 아무 일 없어도 메메메 운다

 

 풍경이 흔들리는 밤이 올 때

 목양견 미주는 희지의 하얀 배 위에 머리를 누인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18~19쪽)

 

 

  희지는 특별한 대상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결국엔 저마다의 희지가 아닐까 결론을 맺었다. 낯선 듯하면서도 낯익은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외롭고 고요하면서도 풍요로운 희지의 공간이 문득 부러워지기도 했다. 그곳은 황인찬이 만든 공간이며 황인찬만이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더욱 그러했다. 황인찬의 시는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해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느낌을 준다. 나는 이런 시가 특히 좋았다.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것 같은 저녁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익숙한 풍경을 유일무이한 풍경으로 만드는 능력. 저녁을 말하는 그는 세상의 모든 저녁을 알고 있는 듯, 저녁이 품어낼 수 있는 말들을 들려준다.

 

 

 

 저녁의 게임

 

 

 코트에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저녁이 내린 코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서지는 것은

코트가 아니라 저녁이었고 난반사하는 조명이 저녁을 은폐

하였다

 

 우산을 쓰고 너와 걸었다

 빗속의 코트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을 가로지르며

 

 코트는 눈과 비에 훼손되지 않는 훌륭한 것이지만 흙탕

물이 이리저리 자꾸만 튀는 것이고, 너는 이미 진흙투성이

인 것이 되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곳으로 데려와 미안해

 미안한 얼굴로 네가 말해서 나이야 기쁜걸 내가 답했다

 

 우산을 쓰고 너와 걸었다 빗속의 코트를 가로지르며

 진흙투성이의 어떤 인생을 생각하며

 

 이 저녁에 부서지는 저녁을 보고 있었다

 

 꺼지기 직전의 연약한 빛들이 코트 위에 고인 채 명멸하

는 것이 보였다

 저 멀리 빗속을 달리는 학생들이 보였다

 

 저녁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48~49쪽)

 

 

  은유

 

 

 저녁과 겨울이 서로를 만진다 초등학교 구령대 아래에서

누가 볼까 두려워하며

 

 겨울이 저녁을 움켜쥐고, 저녁이 약간 떨고, 그 장면은

 기억에 있다

 

 어두운 운동장이 보인다 기울어진 시소와 빈 그네도 보

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인다

 

 누가 우릴 본 것 같아, 저녁이 말했고

 겨울이 저녁을 깨물었다 그러자 저녁이 검게 물들고

 

 그 장면은 기억과 다르다

 장면이 모이면 저녁이 되고, 기억이 모이면 겨울이 되는,

 

 그런 세계에서

 

 너무 어린 나는 늙어간다

 늙어 버릴 때까지 늙는다

 

 이 학교는 나의 모교이며, 나는 여기서 따돌려지고 내쫓

겼다 말하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저녁의 기억

 겨울이 저녁을 핥았는데 그것은 기억 속에서의 일이었다

 

 저 멀리서 손전등의 불빛이 다가올 때는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누구의 기억인가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78~79쪽)

 

 

 많은 이들이 이 시집을 언급할 때는 과장된 감탄이라고 단정 지었다. 막상 읽어보니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시인에게 일상은 모두 시가 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확인한다. 황인찬의 시는 한 번 읽었을 때가 아니라 두 번 읽었을 때 더욱 와 닿는 시였다. 젊은 황인찬이 아닌 시인 황인찬이 만들어낼 시의 세계가 궁금하다. 그의 시를 계속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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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고 있다. 당연하다. 젊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해도 선뜻 그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일정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기는 하다. 주름이 깊어지는 얼굴과 짙어지는 기미를 가만히 바라본다. 김중혁의 『바디무빙』때문이다. 김중혁의 산문은 유쾌하고 즐겁다. 그의 산문을 전부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산뜻한 느낌을 받는다. 글에서 그가 글을 쓰는 동안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마감을 맞추느라 힘겹게 썼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몸을 키워드로 쓴 글이라 해서 나는 약간의 의학적 정보나 인체에 대한 기초 상식과 유머러스한 글을 기대했던 것 같다. 우리 몸에 대한 이야기는 맞다, 그러나 결국은 시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수영장에서 마주한 인간의 몸처럼 다양한 기억의 몸에 대한 이야기. 영화, 드라마, 책에서 만나는 몸이라는 언어가 들려주는 속삭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을 지탱하기 위해 애쓰는 저마다의 몸과의 만남은 애틋하다. 영화 <그래비티>속 샌드라 불럭은 사고로 딸을 잃고 살아간다. 김중혁은 그녀의 종아리와 허벅지를 통해 상실과 견딤을 말한다. 멈출 수 없는 삶이기에, 쉬지 않고 걷고 또 뛰어야 했을 몸. 몸을 써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잡념을 버리기 위해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던 우리네 어머니를 생각한다.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춤에 대한 언급은 경이로울 정도다. 콜라텍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 춤을 배우고 이전에 몰랐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두가 행복하다. ‘춤이란 그런 것이다. 춤이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것이다.’ (125쪽) 나는 그 드라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몸과 몸이 만나는 경이로움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인간은 결국 시간 속에서 소멸해가는, 스스로를 상실해가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몸은 소멸의 징후를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전광판인 셈이다. 나이가 들면 뼈는 삐걱거리고, 어디선가 시간의 살덩이가 날아와서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한다. 시간이 갈수록 몸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41쪽)

 

 김중혁의 언어로 들려주는 몸에 대한 이야기. 그냥 스쳐보았던 영화 속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 책의 한 구절이 다시 몸으로 들어온다. 그만의 글과 그림으로 만나는 재치 있는 ‘몸의 일기’도 정말 재미있다. 그의 정의가 아닌 내 맘대로 신체 각 부위를 정의해도 재미있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인식보다 강력하며, 기억한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닐 수 있으며, 안다고 해서 영원히 기억할 수 없으며, 우리가 대체 어떤 존재들인지 영원히 모르고 죽을 확률이 클 것이다.’ (127쪽)

 

 몸이 전하는 말을 제대로 듣는 순간, 우리는 늙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한다. 몸을 원하는 대로 다스릴 수 있다는 착각의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어른들의 말씀처럼 비가 오면 몸이 먼저 소리를 내는 나이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몸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는 나는 아프기 시작하면서 몸을 아끼고 극진하게 보살핀다.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몸이라는 존재를 통해 삶을 보는 것이다. 몸과의 소통에 대해 생각한다. 김경주의 아름다운 언어로 만나는『밀어』를 펼친다. 예전과 다르게 이런 문장에 눈길이 머문다.

 

 무릎이라는 단어를 처음 발음했을 때를 기억할 수 없을지 몰라도 무릎이라는 단어를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발음하는 사람의 편에서 단어의 연골들에 무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사람 하나 찾아오지 않는 저녁에 찾아오는 무릎의 멍을 문득,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불러보고 싶어지는 순간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무릎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해서야 사람들은 무릎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54쪽, 무릎)

 

 늑골은 등의 풍습을 만들어낸다. 늑골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에 따라 등은 지평선이 사라지기도 하고 능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늑골이 입안의 무언가를 뱉어낼 때 그 사람의 악몽이 시작되는 것처럼, 늑골은 육체 속으로 들어와 있으면서도 육체와 함께 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늑골의 가계이다. 마치 우리 자신의 손이 거의 닿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육체라는 듯, 타인만의 귀를 대고 그곳의 누군가의, 늑골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등에 닿을 수 있는 우리의 육체는 없다. 손을 닿을 듯 닿지 못한다. (360~361쪽, 등)

 

 생을 지탱하기 위한 필수조건처럼 여겨지는 몸, 한 번도 어루만져 준 적이 없는 몸의 어느 부위를 생각한다. 내가 볼 수 없는 뒷모습을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등이 그리워진다. 등을 기댈 수 있는 누군가의 등, 등을 긁어줄 수 있는 손. 아, 이제 다양해진 기능의 효자손을 장만해야 할까.

 

 몸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을 읽는다. 한때는 몸에 새기고 싶었던 문장이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어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鋪道)를 걸을 때였디.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힌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風磬)소리를 낸 순간.’ (「어깨뼈」, 전문)

 

 몸은 말한다. 어쩌면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게 궁극적인 생의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이가 타인의 몸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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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06-2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중혁은 역시 산문이 더 나은 듯해요.

자목련 2016-06-24 15:20   좋아요 1 | URL
이상하게도 산문으로 끌려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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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글이 왜 좋은지 알 것다. 담담한 목소리와 거침없는 목소리의 적절한 조화. 중국에 대한 설명서로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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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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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의 방식과 목적은 다양하다. 궁극적으로는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함이다. 소중한 것을 간직하기 위한 기록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누군가는 사진으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글로 기록한다. 남겨진 기록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고 확인하며 상상한다. 그것은 보여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솔직한 삶의 기록일 때 가능하다. 때로 개인의 기록이 역사의 기록이 되기도 하는데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나는 그렇게 분류한다. 소설가 위화가 아니라 격동하는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지켜본 개인 위화가 들려주는 중국 이야기 정도라고 하면 맞을까. 어린 소년부터 청년을 지나 치과의사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가식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중국.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나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무엇이 현재의 중국을 만들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인민, 영수(領水),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10 개의 키워드를 통해 위화가 살아온 시대를 들려준다. 도저히 경험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위화를 통해 중국의 정치를 마주하면서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점(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비판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다니), 현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체제(국가에서 직업을 지정해주었다는 사실)로 사람들을 통제했다는 점에 소름이 돋으면서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중국의 역사와 발전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어느 순간 과연 이 글이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민주화 운동 텐안문 사건를 소재로 한 「인민」은 자연스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린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의 열정, 그들이 바랐던 자유, 수많은 인민의 희생과 거대한 역사의 기둥으로 존재하는 인민의 모습을 말이다. 「영수」는 예상했듯 마오쩌둥에 대한 기억이다. 그를 추억하면서 마오쩌둥 이후 중국 정치를 향한 열망은 다시 그 시대를 언급하게 된다니 뭔가 아이러니하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기에 독자로써 「독서」와「글쓰기」에 대한 부분은 특히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친구들과 한 권의 소설을 필사하며 함께 읽었다는 부분은 과연 그게 가능한가 싶다가도 그 열정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로 결론을 맺었다. 글쓰기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대자보 쓰기부터 작가가 되기까지 수많은 원고를 투고한 이야기. 그 시작이 좋을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소망이 아니라 치과의사(단순 발치사)에서 벗어나 좀 더 편안한 직장생활로 이어지기를 바랐다는 단순한 이유라서 살짝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위화의 글쓰기 철학은 진솔한 여운으로 남는다.

 

 글쓰기는 경험과 같다.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글쓰기」, 137쪽)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 삶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쓰기」, 147쪽)

 

 위화의 말대로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면 타인의 인생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말은 최고의 진리가 아닐까 싶다. 「루쉰」과「혁명」은 앞서 들려준 「인민」과「영수」에서 확장된 듯한 글이다. 그러니 반드시 차례대로 읽지 않다도 괜찮다. 마음에 끌리는 단어를 먼저 읽어도 끊어지지 않고 맥은 이어진다. 나머지 「차이」,「풀뿌리」,「산채」,「홀유」는 현재의 중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중국 경제의 고속성장은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바꾸어버렸다. 우리는 멀리뛰기 경기라도 하듯 물질이 극단적으로 결핍된 시대에서 낭비가 넘치는 시대로, 정치 지상의 시대에서 금전 제일의 시대로, 본능이 억압된 시대에서 욕망이 넘쳐나는 시대로 건너뛰었다. 이 30년이란 세월이 몸을 한 번 웅크렸다가 도약하는 시간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차이」, 194쪽)

 

 우리는 현실과 역사의 거대한 차이 속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커다란 꿈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다. (「차이」, 216쪽)

 

 놀랍도록 빠른 성장의 이면,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 진짜와 똑같이 모방을 하는 능력으로 가짜가 주류가 된 세상,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국 사회의 고발, 그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똑바로 보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위화는 말한다. 분명한 건 이 책은 위화 한 사람, 개인의 목소리로 전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회의 거울이자 자화상이 된다. 그가 쓴 것은 삶이기 때문이다. 위화 개인의 삶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중국의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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