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시간 전만해도 딸아이방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책상 위아래로 가득한 잡다한 물건하며 정리하지 않은 책더미하며, 제발 청소 좀 하라고 성화를 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가보다. 그간 모은 인형이랑 장난감을 놓을 자리가 없어 고민하더니 드디어 제 방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거다. 인형과 장난감이라니...스무 살이 넘었는데 새롭게 인형과 장난감에 눈을 뜨다니...이것도 '때'가 있는데 이제야 도래했나? 하여튼 청소에 돌입하니 반가운 마음에 함께 책을 정리했다. 오렌지색 재활용바구니에 담긴 책은 학교벼룩시장에 기증할 책이고 나머지 묶음은 학급문고함에 넣을 책들이다.

 

그간 많은 책을 구입하고, 정리했다. 책장도 여러 번 비워냈다. 딸아이에게 무엇을 먹일까 보다는 무엇을 읽힐까를 더 자주 더 많이 고민했었다. 필요한 책은 무조건 구해주거나 사주었다. 진학정보에는 둔한 엄마지만 책정보에는 밝으려고 애썼다.

 

이제는 해방이다. 딸이 무엇을 읽건, 책장에 무엇을 꽂건 이제부터는 제 몫이고 제 인생이다.

 

저 책들을 학급문고에 넣을 일만 남았는데...학급문고는 참 초라하다. 말이 학급문고지 책도 몇 권 안된다. 물론 요즘엔 학교도서관이 훌륭해서 책을 읽고자 한다면 적어도 '책이 없어서 못 읽는다'란 말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내 자식을 위해선 아낌없이 책을 구입했지만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무언가를 아낌없이 바쳤는가를.....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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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데도 가지 않는 추석을 보내고 있다. 진심이 실리지 않는 관습을 저버렸을 때는 약간의 슬픔과 외로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꼭 결혼해서 직장 다니고, 애 낳고, 학부모가 되어 애면글면하고...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일단 세계여행부터 떠나보는 용감한 젊은 부부가 한없이 부러워지는 건, 나는 은퇴하면 세계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에고, 벌써부터 관절 여기저기가 삐그덕거린다.

 

20대 철없는(?) 부부의 자전거여행기를 읽다보면 그들의 무모한 용기에 감탄과 부러움에 대리만족까지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이 든다. 아픔을 동반한. 은퇴를 꿈꾸면서도 은퇴하지 못하는 자의 부러움이며, 일찍이 그런 삶을 꿈꾸어보지 못한 자의 한탄이며, 근본적으로는 자전거라는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문명의 이기를 한번도 제대로 이용해보지 못한 자의 비겁함이 가슴을 치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는 페이퍼를 쓰는 날이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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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6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6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6-09-1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늦게 겨우 자전거 배웠는데, 이제는 그나마 안 탄지 오래되서 아마 다시 배워야할거예요. 자동차도, 자전거도, 저는 바퀴달려 굴러가는 것들은 다 무서워요 ㅠㅠ 제 두다리가 제일 믿을만한데 체력이 계속 받춰줄지 모르겠고요.
은퇴하면 세계여행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군요.

nama 2016-09-16 18:29   좋아요 0 | URL
저도 굴러가는 동그란 것들을 무서워해요. 바퀴달린 자동차, 자전거는 말할 것도 없고 배구공이나 축구공 같은 공들도 무서워해요. 굴러가는 것들은 도발적으로 보여요.
은퇴하면 맨먼저 머리를 삭발해보고 싶고, 그다음 한 일 년 천천히 세상구경을 하고 싶어요. 무엇가를 원할 때 입버릇처럼 노래하다보면 성큼 그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어 기회만 되면 입밖으로 뱉어내요. 꿈은 노래로, 노래는 현실이 되지요.^^
 

 

 

 

 

 

 

 

 

 

 

 

 

 

 

아침에 출근하려면 버스를 두 번 타야한다. 직장까지는 걸어서 1시간 30분 거리니까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다만 한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좀 불편할 뿐이다.

 

그렇게 6개월쯤 보냈을까. 드디어 한번에 가는 버스를 발견했다. 303-1번 버스로 종점이 인천공항인데 그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인천공항으로 간다는 것만 알았지 그 반대방향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금도 일반시내버스보다 비싸다.

 

그러다가 7월30일을 기점으로 인천시내버스 노선이 전면 개편되어 버스노선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303-1번이 직장 근처를 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간 나와는 무관했던 이 버스가 드디어 눈에 들어오더니 차창 밑에 적어놓은 버스요금도 눈에 들어왔다. 1650원. 일반버스보다 400원이 비싸다.

 

좌석버스와 일반버스를 타면 11개의 정류장을 거치는데 이 공항버스는 3번 째 정류장에서 내리면 되는, 말 그대로 직선거리를 총알택시처럼 한달음에 달린다. 좌석버스는 승객이 많아서 입석으로 가는 사람도 많은데 이 공항버스는 마치 나를 위한 전세버스같다.

 

좌석버스엔 출근하는 사람들의 긴장감과 피곤함이 차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데 반해, 공항버스는 밤새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씻지 못한 부스스한 얼굴이 여행의 여독을 잔뜩 품고 있다. 그들 옆에는 막 여행을 끝낸 캐리어 따위가 덜컹거리고 있다.

 

40~45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이 공항버스를 만나기는 사실 쉽지 않다. 대강 시간을 파악하고 시간에 맞게 나가 있어도 만날 확률이 높지 않다. 10여분 후에 오는 공항버스를 타겠다고 당장 코앞에 온 좌석버스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좌석버스는 중간에 다른 버스를 갈아타야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데에 반해, 공항버스는 빠르게 도착하지만 10분을 걸어가야 한다. 아침마다 시간과 비용을 비교하며 버스를 타야하는 건 고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잔머리를 굴려가며 순간의 선택을 하지만 직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별 차이가 없다.

 

그래도 선택을 해야한다면, 공항버스를 택하고 싶다. 이유는 단 하나,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온몸에 남아있는, 미쳐 떨쳐내지 못한 먼 이국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게, 목수정의 이 책은 너무나 잔인하게 다가온다. 반쯤 읽다가 책을 덮었다. 글솜씨도 좋고 읽는 맛도 참 좋은데...마음이 아파서 못 읽겠다. 파리에 가게 된다면 그때 읽어주리라. 기다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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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으면 바로바로 정리해야지 나중에 하게되면 눅눅해진 김처럼 생기를 잃고만다. 

 

이 책을 읽고났을 땐 마치 내가 막 여행에서 돌아온 기분이 들었었다. 뭔가 할 말도 많았고 마음도 설레었는데...며칠 지난 지금, 오래된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낡은 기분이 들지만, 어쨌건 여행 기분보다는 밥벌이가 먼저니까.

 

인상적인 부분을 옮겨놓는다.

 

...시크교는 남자는 싱Singh, 여자는 카우어Kaur, 성은 두 가지뿐이다. 성으로 들통 나는 신분의 높낮이가 없다. 남녀차별도 철저히 없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아무리 높은 지위의 사람도 무릎 꿇고 바닥에서 함께 식사한다. 배고픈 이, 가난한 자는 시크교에서 가장 마음 쓰는 대상이다. 그래서 황금사원뿐만 아니라 모든 시크교사원에는 무료 급식소가 있다. 언제든지 와서 배를 채울 수 있다. 종교는 상관없다. 배고픈 자는 환영이다. 타 종교를 존중하며, 귀를 기울이고, 장점을 찾는다. 궁극의 신은 하나라고 믿는다. 자신들이 옳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옳은 것이다.

 22년 전 처음 인도에 갔을 때, 시크사원에서 얻어먹은 한끼 식사를 잊을 수가 없다. 여행자들을 한 줄로 앉혀놓고 식판을 하나씩 돌리더니 그 위에 짜파티와 달을 나눠주었다. 물컵도 하나씩 돌렸지만 아무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나눠준 짜파티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고마워하는 마음도 없었다. 약간 잘사는 나라에서 온 배부른 여행자들은 부끄러움도 몰랐다.

 

 

여행자가 즐거운 건 얄팍해서다. 속속들이 안다면, 해맑을 수 없다. 인사동에서 흥분한 여행자들이, PC방의 실직한 50대 사연을 알 필요가 없다. 1백 장의 이력서를 돌리고도, 2백 장, 3백 장 이력서를 더 써야 하는 젊은이들을 딱해할 필요도 없다. 여행자는 씨앗 호떡과 계란빵을 먹으며, 셀카를 찍으면 된다. 다만 며칠을 머물고, 그곳을 '안다'고 착각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여행자는 철저히 겉만 핥는 존재이며, 겉을 핥고, 돈을 쓰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밥벌이에 큰 기여를 하는 존재고, 없었던 활력과 새로움을 보충해주는 존재다.

'관광'과 '여행'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늘 '여행'에 방점을 찍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관광'이나 '여행'이나 그게 그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관광객이건 여행자건 '겉만 핥는 존재이며, 돈을 쓰는 사람이다'. 여행이 깊어야 얼마나 깊으랴. 관광이라고해서 느낌이 없고 생각이 없는 게 아니다. 거기서 거기다. 얄퍅해야 여행이 된다.

 

 

세계 3대 장수마을 중 하나인 훈자는 이제 일흔이 넘으면 죽는다. 설탕과 튀김에 맛들린 훈자 사람은 병을 끼고 산다. 예전에 없었던 비만과 충치로 고생한다. 빌린 돈으로 호텔을 짓고, 식당을 열지만, 여행자들은 훈자에 오지 않는다. 호텔 주인과 식당 주인은 차례로 문을 닫고, 대도시로 떠난다. 훈자는 그렇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자들 때문에 세상의 좋은 곳들이 하나둘씩 망가져간다. 나도 일조하고 있는거구나.

 

 

 

이 책이 중고매장에 널리 깔리지 않기를. 읽고 싶은 사람은 새 책을 구입해서 읽기를. 가난한 여행자가 혼신의 노력으로 써내려간 여행기가 널리 가볍게 의미있게 소비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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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6-09-12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읽고 정리할 책이 산더미인데,
게다가 엉.뚱.하여 여행이라면 질색인데 꾸역꾸역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싶게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__)

nama 2016-09-12 20:26   좋아요 0 | URL
제 책은 아니지만, 고맙습니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은 책임질 수 없지만요.
 

EBS <세계테마기행>에는 내노라하는 여행가들이나 지역전문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저 사람들

은 좋겠다. 여행도 하고 돈도 벌고 TV에도 나오고...' 늘 부러운 시선으로 이 프로그램을 보는데 이들 출연자들의 압권은 단연 한국방송통신대의 중국어과 김성곤교수이다. 특히 이 분의 중국한시낭송은 늘 감탄을 자아낸다. 자유자재로 흘러나오는 저 낭랑한 한시에 한량같은 특유의 호탕한 기운까지 더해지면 그저 넋 놓고 바라볼 뿐이다.

 

이 분의 강의를 드디어 들어볼 기회가 왔다. 인천지역 방송통신대 중국어과 3학년 출석수업에 이 분의 강의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저녁밥을 김밥으로 대강 때우고 수업을 들으러 갔다. 길쭉한 강의실에는 대략 60~70여 명의 학생들이 들어차 있었다. '학생'이라지만 대부분이 늙수그레한 분들이었다. 평균나이 55세 정도? 남자들은 60대 이상되는 분들이 많았고 여자들은 20대도 더러 있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기도 하고.

 

덕분에 소동파의 전적벽부 원문을 읽었다.

 

壬戌之秋七月旣望, 蘇子與客泛舟游於赤壁之下   

임술년 가을 7월 16일에 나는 객과 더불어 배를 띄워 적벽 아래에서 노닐게 되었다.

淸風徐來  水波不興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 오고 물결은 일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되는 적벽부는 후반부에 이르러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 흘러가는 것은 강물과 같이 쉬지 않고 흐르지만, 그 흐름은 다하는 일 없이 여전히 흐른다.

차고 기울어지는 것은 저 달과 같지만, 끝내 아주 없어지지도 더 늘어나지도 않는다.

변한다는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천지간에 한순간이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만물과 나는 모두 무궁한 것이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겠소?

천지 사이의 모든 사물은 각기 그 주인이 있어서

만약 나의 것이 아니면 털끝만한 것이라도 취할 수 없지만,

오직 강 위에 부는 밝은 바람과 산 사이에 뜨는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아름다운 소리가 되고, 눈에 담겨지면 아름다운 경치가 된다.

이를 취하여도 막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조물주가 주신 무진장한 보배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기고 있는 것이라오."

 

 

한문을 옮기기가 너무나 번거로워 해석만을 옮겨보자니 예전 우리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떤 것을 설명하실 때는 늘 한자를 써서 한 글자 한 글자 뜻풀이를 해주시곤 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체를 하며 한자를 써볼 요량이면 '그것도 글씨냐'며 한말씀 하시곤 했다. 그러다가 시대가 변해 이제 내 자식이 영어를 쓰게 되면 '그것도 영어발음이냐'며 내가 타박을 놓는다. 아마 위의 시도 영어로 되어 있다면 기꺼이 원문을 베꼈을 지도 모른다.

 

강의실에 꽉 들어찬 늙은 학생들을 보며, 이제는 확실히 중국어가 대세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머잖아 중국어가 필수과목이 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어도 시원찮고 한문 실력도 없는 우리 아이들은 또 어찌해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성곤교수의 유쾌한 수업 이야기에서 결국은 아이들 걱정으로 글을 맺는다. 세상엔 공부할 게 너무나 많다.

 

 

( 원문의 한문을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복사했더니 줄 간격이 내 맘대로 안 되어 윗글과 아랫글이 간격이 다르다. 요만큼 쓰는데도 지친다,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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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9-0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읽어보는 적벽부입니다
임술지추칠월기망에 소자여객....어쩌고....청풍은서래하고 수파는불흥이라...저쩌고
아둔한 머리로 외워보려고 낑낑대던 시절이 생각나는군요 ~~

nama 2016-09-02 07:27   좋아요 0 | URL
저는 소동파보다는 셰익스피어랑 친해서인지 한문이 영 외워지지 않습니다. 영시도 물론 외우지못하지만요. ㅠ 한문을 독학하려면 독기가 필요할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