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에 가지 않고 군함도를 보았다.

나가사키에 오면 군함도에 쉽게 갈 줄 알았다. 바로 지척에 있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2주 전에 예매하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흥미가 식었다. 군함도의 존재가 일본인에게는 의미있는 유적지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억울하고 비통한 곳. 굳이 애쓰며 가고 싶지 않았다.

하루 일정이 남았으니 섬으로 가는 배나 한번 타보자는 심정으로 나가사키 여객터미널에 갔다. 여객선으로 35분이면 닿는 다카시마행이 적당해 보여 왕복표를 끊었다. 평일이라서 터미널도 여객선도 널널했다. 날씨가 따갑다. 섭씨 30도, 체감온도는 37.8도.

나가사키가 어떤 곳이던가. 자못 감상에 젖기도 전에 도착한 다카시마(高島). 어리버리 둘러보니 낡은 순환버스가 있다. 버스기사에게 섬을 한바퀴 둘러보고 싶다는 의미로 팔로 큰 동그라미를 그렸더니 100엔씩을 내면 된단다. 승객은 우리 부부 포함 4명. 얼마 안 가 한 명이 내리고, 또 얼마 안 가서 버스가 잠시 정차. 왠일일까 싶어 창밖을 보니 멀리 군함도가 눈에 들어온다. 친절한 기사님이 우리를 위해 눈도장 찍을 기회를 주신 것이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버스는 어느새 출발지점으로 돌아왔다. 돌아갈 배는 오후 3시, 두어 시간 남았다. 방향감각이 좋은 남편을 따라가보니 멀리 군함도가 보이는데 버스에서 본 것보다 한층 가깝게 보였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어쨌거나 군함도를 보았다.


**한국에는 없으나 일본에는 있는 것.

평소 잘 신고 다니는 신발이 닳기 시작하면 나는 슬슬 화가 난다. 220cm인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 삼천리를 헤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성인 여자의 신발은 230cm부터 시작된다. 내 발은 다행히(?) 볼이 넓어서 운동화는 대강 맞는데 문제는 여름 샌달이다. 특히 스포츠 샌달. 내 발은 225cm가 적정 사이즈인데 시중에서 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225가 있긴 있다. 바로 아동화. 몇년 전 어쩔 수 없이 한번 신어봤는데 복잡한 심정에 휩싸여서 벗어버렸다. 내가 키가 작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내가 자장 작은 사람은 물론 아니다. 거리를 걷다보면 나보다 작은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왜 다들 조용하지? 그들은 신발을 어디서 구할까? 230부터 시작되는 걸 왜 계속 수용해야 할까? 230은 키 작은 여성들을 침묵시킨다. 알아서 조용히 살아가게 만든다.

나가사키항 근처 쇼핑몰에서 드디어 발견했다. 220~225가 적힌 매대가 있었다. 220짜리 여성을 무시하지 않는 세상이 있구나, 놀라움과 감탄을 당신은 이해하실지...남성용은 24.5부터 시작한다. 남자라고 전부 발이 큰 건 아니잖은가. 물론 일본은 키 작은 사람들이 많아서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길을 걷다보면 우리보다 작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래도 그렇지, 혹시 우리나라 신발 업체들이 일본보다 자존심을 세우려고? 우리는 키가 큰 민족이라고 우기고 싶어서?

키 작은 사람은 소수자인가 아닌가?

나는 지금 225cm 네파 스포츠샌달을 신고 있다. 가평 휴게소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건데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어쩌다가 있는 일이다. 매대에도 진열하지 않는 신발이 있긴 있다. 조용히 물어볼 일이다.

나가사키의 마지막 밤을 230 때문에 흥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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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09-25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가사키하면 저는 카스테라부터 떠오르네요. 그리고 그게 전부이고요 ^^
군함도를 먼 발치에서라도 직접 보셨다니, 저는 책으로 읽고 영화로만 봤어요.

nama 2025-09-26 12:51   좋아요 0 | URL
저도 잘 몰랐는데 대항해 관련 책을 읽다 보니 현장답사까지 하게 되었어요.
한수산의 군함도를 읽어봐야겠어요.
 

오늘은 세 번째 호텔로 이동하는 날. 7박 8일 일정에 호텔을 세 군데 잡았다. 정리하면,

첫 번째는 게스트하우스로 80년대 분위기의 가정집. 어렸을 때 부모, 형제와 함께 살았던 18평 짜리 옛날 우리집과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 창문과 방문을 적당하게 열어 놓으면 바람이 잘 통하도록 설계되었는데 나름 삶의 지혜를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앞집은 연립주택으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여서 밤에는 좀 무섭다. 이 게스트하우스엔 주인이 살지 않고 잠깐씩 필요할 때만 드나들어서 편한 면도 있지만, 비유하자면 절간에 가깝다. 낡음, 사라짐, 폐허 따위를 명상하기에 잘 어울린다. 잊혀져가는 달동네의 삶을 여기에서 체험했다. 주변엔 식당도 편의점도 없다. 저 아랫동네까지 내려가서 장을 보고 비탈길을 십여 분 올라와야 한다. 밤에는 온동네가 적막강산. 집들이 작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형적인 서민 동네여서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다. 어쩌다 이곳을 선택했을까..나에게 묻는다.

두 번째는 어제 썼으므로 생략. 평균 평점이 5점 만점에 4.8인 곳. 외국인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도로도 넓고 전망도 좋은 부유한 동네. 이런 곳에 다시 올 수 있겠니..나에게 묻는다.

세 번째는 비유하자면 역세권 아파트로 돌아온 느낌이다.
프랜차이즈 호텔이라 공간 낭비가 적고 직원들도 매뉴얼대로 친절하다. 몸에 잘 맞는 옷 같다. 나에게 던질 질문이 없으니 아마도 기억에 남지 않을 곳이다.

이렇게 세 동네에서 머물다보니 이제는 내가 현지인이 된 기분이다. 유명한 군함도를 못 가본 게 좀 아쉽지만 이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하나쯤 남겨두면 다시 올 지도 모르고.

나가사키의 호텔 체험은 부수적인 건데 쓰다보니 이런 글이 나왔다. 내 여행은 진행 중..

사진: 파친코. 버스 안, 나가사키항에 입항한 초대형 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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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2018년 현재 나가사키현의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자수는 약 6만 2천 명으로 현 전체 인구의 약 4.4% 정도이다. 일본 전체의 가톨릭교회 신자는 전체 인구 대비 약 0.34%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나가사키현의 가톨릭 신자 수는 다른 현에 비해 월등히 많은 편이다.‘(<한중일의 갈림길, 나가사키> 서현섭)

현재 나가사키현에는 138개의 성당이 있다고 한다. 이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치이다.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을 때까지 일본에는 교회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뭐 그렇게 믿어도 내 인생이 달라질 건 없지만.

기왕 나가사키에 온다면 그 점을 확인하고 싶었다. 교회가 있는지 없는지. 하비에르가 1549년에 여기까지 와서 선교를 했는데 그래도 명맥은 살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비싼 값을 치르고 ‘호텔 인디고 나가사키‘를 선택한 이유가 되겠다.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 그것도 다른 데도 아닌 일본에서, 이것만으로도 이 호텔은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이다. 내 생애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으랴 싶었다. 내가 한때나마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어서 그런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아시아 일대를 여행하다보면 하비에르가 끈질기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저 궁금했다. 그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말이다. 신심은 없지만 호기심은 살아 있는 셈이다.

아래는 오늘 아침밥 먹은 곳. 예전 성당에 다닐 때보다 평온한 마음으로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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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기차를 탈 줄 알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 는 배낭여행족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지는 말이 있다. 표 판매하는 창구까지 다섯 단계, 열차에 오르기까지 또 다섯 단계, 목적지까지 또 다섯 단계, 단계마다 사람들과 엮이게 되니 한 열댓 명 쯤을 상대하게 된다. (특히 북인도가 그렇고 남인도는 북인도에 비하면 순한 맛이다.) 징글징글한데 그게 또 묘해서 다시 인도를 찾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살아있다는 강렬함을 느끼기에 그만한 것이 없다고나 할까. 다만 10년도 더 지난 얘기여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인도에서 기차를 탈 줄 아는 나보다 더 센 인간이 있다면 그건 택시를 안 타는 사람, 바로 남편이다. 웬만하면 걷는다. 오늘도 걸었다. 그동안 세태에 따라서 백팩이 캐리어로 바뀌긴 했지만 세월따라 나이도 먹었으니 캐리어 바퀴가 자율주행이라도 하면 모를까 힘이 안들 수가 없다.

북쪽의 스와 신사에서 남쪽의 글로버가든까지 한 시간 넘게 이동했는데.. 그 험한 인도도 여러 번 다녔는데 이 정도 가지고 이렇게 불평하는 나..는 이제 늙...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의 주제는 숙소.

일주일 여행에 총 숙박비로 100만 원 내외를 예상한다면
1. 일 박에 약14만 원 × 7일: 한 군데 호텔
2. 일 박에 6만 원×3일 + 32만 원×2일 + 14만 원×2일 : 세 군데 호텔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이번엔 2번을 선택했다. 6만 원 짜리 게스트하우스도 좋지만 아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백팩에서 캐리어로 바꾸는 것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오늘은 값 비싼 밤이다. 잠을 자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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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이니셜이 새겨진 대포.
17세기에는 저걸로 세상을 날로 먹으려고 했고.
지금은 트럼프의 입이 대포. 영원한 것은 없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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