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분리수거장 앞에 엔틱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앉아보니...세상에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쿠션만 새것으로 갈아주면 환골탈태하여 여생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자를 버린 분이 누군지는 몰라도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얼마 후 인터넷으로 찾아서 쇼파 천갈이 하는 곳에 갔더니 구하기 힘든 의자라나 뭐라나. 좌석과 등판을 가죽으로 교체하는데 시간이 걸린단다. 며칠 후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 수선비 20만 원을 흔쾌히 지불하고 의자를 모셔왔다. 그런데...구관이 명관이라 해야 할까. 법고창신을 기대한 게 무리였다는 것을 앉아보고서야 깨달았다. 좌석 쿠션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새 가죽으로 덧댓으니 좌석이 두꺼워져서 본래의 착착 붙는 듯한 물아일체 같은 착석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 20만 원이면 새 의자를 사고도 남는다는 것을.
밥상에서 밥을 먹던 좌식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을 무렵 이사를 했다. 식탁이 필요했다. 딸이 사용하던 책상의 상판에 다리를 붙여 식탁으로 만들었다. 훌륭했다. 의자가 필요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된 걸 사고 싶어서 이케아로 향했다. 착석감이 우선, 최선에 가까운 의자를 골랐지만 재고가 없었다. 일단 철수.
일삼아 당근에 들어가 샅샅이 뒤졌더니 엔틱을 표방한 짝퉁 의자가 두 개 나왔다. 제대로 된 물건을 사야한다는 다짐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그럭저럭 쓸 만했다. 식탁은 해결했으나 이번엔 컴퓨터 의자가 남았다. 그동안 사용했던 의자들은 낡기도 했지만 새로 이사한 집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멀쩡한 가구를 버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내가 이해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낯선 경험이다.
열심히 당근을 들락거린 보람이 있었는지 이번엔 제대로 된 엔틱 의자가 떴다. '가격 제안 불가'에도 불구하고 20% 할인을 제안했더니 응답이 왔다. 엉? 좀 더 기다릴 걸 그랬나. 순간 망설였으나 내 입으로 제안했고 어쨌거나 사진상으로는 탐나는 물건이었다. 우아하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명품으로 보였다. 설렌 마음으로 집에 모셔와서 앉아보는데...빛 좋은 개살구는 분명 아닌데 착석감이 떨어진다. 게다가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이 편하지 않음은 무엇인고? 남편이 의자의 네 발 길이를 내 앉은 키에 맞게 만들어 주었다. 1~2cm 를 잘라냈다. 비로소 발이 바닥에 착지하는데 이번엔 쿠션이 없는 좌석과 등판이 배긴다. 겉모습에 홀린 대가려니...
침대는 과학이라더니 의자야 말로 과학이구나, 새삼 깨달았다. 몸에 맞는 의자 찾기가 배우자 찾기 만큼이나 어렵다. 사람이 진화하지 않듯(혹은 느리게 진화?) 의자 역시 진화하는지, 진화가 가능한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한가지 의문은 남는다. 진짜 값비싼 물건은 어떨까?
답답한 마음에 찾아 본 책.
'350가지 의자의 역사와 디자인'을 실었다고 한다. 가히 의자의 역사서로 손색이 없는데 찾는 사람이 없는지 '특별 할인가'로 판매중이다. 이만하면 당근 가격이다.
책에서...
현존하는 의자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4600년 전에 만들어진 헤테프헤레스의 의자라고 한다. 현대의 의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걸보면 의자의 진화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사람이나 현대 인간이나 다를 바 없듯 의자 또한 그런 것 같다. 설명을 읽어보면, ' 현재 카이로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의자는 오늘날에 사용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사각형 좌석에 등받이가 있고, 팔걸이의 틀도 사각형이다.전체적으로 직선 라인이 눈에 띄는데, 팔걸이 안쪽은 파피루스 줄기를 끈으로 만들어 묶은 듯한 부드러운 느낌으로 디자인되어 있다."(p. 11~12)
미국의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얘기도 나온다. 건축 작품마다 의자를 디자인했다고 하는데 디자인을 우선했기 때문에 실용성 면에서 문제가 남을 만한 것도 있다고. '사생활 면에서는 아내 캐서린과의 사이에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고객의 아내인 체니 부인과의 불륜, 유럽으로 사랑의 도피 행각, 그에 따른 업무의 격감, 하인이 체니 부인과 아이를 살해, 평생 4번의 결혼을 하는 등 상당히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다.'(p.155)
의자가 아니었으면, 당근 거래가 아니었으면 만나기 힘들었을 의자에 관한 책이다. 쓸모는 없지만 소장할 만한 책이다. 세상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우치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