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쪽) '여행을 시작한 초기에 나는 세상의 뛰어난 경관을 보고 감탄하기 위해 길을 떠났었다. 그런데 막상 막이 오르자 인류의 절반이 다른 절반으로부터 보편적으로 억압받는 장면이 펼쳐졌다.'
(100쪽) '내가 지금까지 여행했던 세상의 모든 지방 가운데 견디기 가장 힘들었던 지역이 수컷에게 후광을 입히고 그를 숭배하는 지방이었다.'
이렇게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한 사람은 실뱅 테송. 입에 잘 붙지 않는 이름이지만 꼭 기억해야겠다. '작가이자 여행가. 일찍부터 극한 조건의 여행과 탐험을 일삼았고 두 발로 세상을 살며 다수의 책을 출간'한 사람. 휴머니즘을 포기한 '반더러'(유랑자). '인간 수컷의 패권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휴머니스트로 돌아가겠다'는 사람. 그가 들은 해괴한 속담을 옮겨보면,
(98쪽)
딸이 태어날 때면 벽도 따라 운다(루마니아).
딸 하나가 1000마리 짐승 떼만큼이나 걱정거리를 가져온다(티베트).
여자를 가르치는 것은 원숭이 손에 칼을 쥐여주는 꼴이다(인도).
여자는 지옥의 정문이다(인도).
신이 여자에게 주는 최대의 행복은 남편보다 먼저 죽는 것이다(아랍계).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유대계).
그는 '인류가 왜 스스로 영원히 '여성 살해 gynocide'죄를 저지르려는지, 또한 그런 인류를 왜 사랑해야 하는지, 아니, 왜 존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해' 휴머니즘을 버렸다고 말한다. 잭 런던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특히 자신의 암컷을 학대하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분된다. 그런 짓은 늑대도, 비겁한 코요테도, 길들어 퇴화한 개도 저지르지 않는 악행이다." 라고.
차례로 딸, 아들, 아들이 태어나고 네 번째인 내가 태어났을 때 "재수없게 딸"이냐고 했다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얼굴을 돌리며 부정(혹은 회피)했지만 엄마가 전해 준 말이 거짓일 리는 없다. 이 한마디를 평생 기억하는 건 씁쓸하다. 잊어도 좋으련만 위와 같은 글을 만나면 어김없이 떠오르니, 세상의 아버지들은 입을 함부로 놀려서는 안된다.
나는 실뱅 테송을 감히 '제대로 된' 작가라고 부르고 싶다. 이 책을 읽고서 든 생각이다.
세계를 누빈 여행가답게 이 단편소설집엔 조지아, 네팔 , 텍사스, 이란, 인도, 시베리아....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짜릿한 반전은 단편소설의 정수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중 가장 놀라운 작품은 <버그>라는 단편.
네팔의 구룽족 마을 지라온, 8시.....
여자들은 아침 식사 전에 모래톱에서 빨래하고, 빤 옷가지들을 바위 위에 넌다. 그러고 남편에게 아침밥을 차려준다. 결혼 10년 차의 아룬과 아내 칼리. 어느 날 칼리는 아침밥을 남편 대신 돼지들에게 줘버린다.
생 로랑 복음 공동체, 텍사스, 10시.....
세 살, 네 살, 여섯 살, 아홉 살, 그리고 18개월 된 아기를 둔 부부, 야콥과 앨리슨. 더 이상 임신을 원치 않는 앨리슨은 램프로 남편의 머리통을 내리친다.
케르만, 이란 남쪽 케르만 정부청사, 11시....
아들이 없는 걸 한탄하는 남편은 평소 바닥에서 밥을 먹는 네 딸과 아내가 식탁에서 밥을 먹는 걸 보고 충격을 받는다.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인도, 구자라트주의 브란드라나푸르 마을, 12시....
지참금 없는 아내를 불태워 죽이려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 시부모의 계략에 되려 아들이 죽는 상황.
디종, 프랑스, 13시....
코르부시온, 멕시코, 14시....
비슈케크, 키르기스스탄, 15시.....
지구 곳곳에서 '여성의 반란'이 일어난다.
실뱅 테송을 읽는 맛이 쏠쏠한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