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간: 2003. 1. 8 ∼ 1. 20

여행은 갈증이다. 채워질 듯 말 듯, 그러나 결코 채워지지 않는 청량음료 같은 갈증이다. 톡 쏘는 맛은 늘 새롭고, 식도를 넘어가는 순간 코끝까지 전해지는 전율에 한순간 몸서리를 치게 하고, 그 전율에 못 이겨 질끈 감는 눈. 그러나 눈을 뜨면 어느 새 목이 타오른다. 갈증은 청량음료로는 해갈되지 않는 것이다.

또 떠난다. 갈등이 없을 소냐. 왜 떠나는가, 화두처럼 붙들고 늘어진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결론은 이미 내린 상태다. 가보고 싶으니까. 단순하다. 배고프니까 밥 먹는다, 와 다름이 없다. 단순해지지 않고는, 가벼워지지 않고는 떠날 수 없는 게 여행이란 걸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단순하다고, 가볍다고?

세 식구가 함께 하는 여행은 이미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여행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은 단순하고 가볍다고 했지만 그건 내가 나에게 거는 일종의 주문이다. 단순함을 가장한 무거움. 그 무게를 덜기 위한 교묘한 마음 속임이다. 떠나는 것도 공을 들여야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마음의 공을 들여야 한 번 떠날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내게는.
그렇다면 물질적인 노력은?

<방콕>
이번엔 말로만 듣던 방콕엘 간다. 내 여행엔 도무지 두서가 없는 것 같다. 쉽게들 드나드는 방콕은 여행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도록 한번도 갈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교육 탓이다. 나에게 방콕보다 런던이나 로마 혹은 파리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순전히 교육 탓이다. 고등학교 한 시절을 화실에서 보낸 것, 대학에서의 몇 계절을 무수한 영미 작가에게 바친 것, 그리고 직업으로서 아이들에게 영어 몇 마디 건네는 것, 이 모두가 나를 동양보다는 서양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방콕에서의 일정은 이틀이 채 되지 않는다. 밤에 도착, 다음다음 날 새벽 앙코르를 향해 출발이니 주어진 시간은 만 하루. 하루종일 유명 유적지만 본다?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얘기라도 하려면 그래, 한군데 정도는 가 줘야지. 왕궁엘 가본다. 초입에서부터 우루루 단체 관광객들 입장이다. 단체 사진 찍는 그들을 배경으로 한 장 찍는다. 아예 가이드북을 들고 태국이라고 쓰여진 부분을 찍히게 한다. 이번엔 서양 여행객 몇을 전경에 놓고 찍는다. "태국 벌은 참 작네!" 놀라는 남편 말에 자극을 받아 화분 속 연꽃 언저리에서 윙윙대는 작은 벌 두 마리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표준렌즈 밖에 없는 내 카메라로는 찍어봐야 잘 찍히지도 않을텐데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며 찍고 싶은 곳도 특별히 없다.

그런 내 기억 속에 더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화려한 그 왕궁이 아니라 왕궁으로 가는 길에 겪은 작은 해프닝이다. 상상외로 깨끗한 전철에서 내려 배를 타러 갈 때였다. 갑자기 딸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한다. 딸아이의 배변은 늘 갑작스러워서 길을 나서기 전에 한번쯤은 변기에 앉혀야 한다. 하여튼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 거리길 10여분, 시간은 흐르고 영어는 통하지 않고, 화장실이 있을 법한 곳을 가보면 역시 아니다. 그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사원 같은 건물이 있었다. 개인 법당쯤으로 보이는 데 노인 한 분이 마당에 앉아있어 화장실을 묻는데 안쪽에 대고 사람을 부른다. 밝은 미소를 띄며 또 한 노인이 나와서는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얼른 한국인이라 대답하고 화장실을 묻는 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남편이 오줌 누는 몸짓을 보여주자 뒤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와중에 노인이 화장실이란 단어를 태국어로 가르쳐준다. 고마운 마음에 약간의 돈을 시주함에 넣고 나온다. 지금도 그 법당의 노인의 미소를 떠올리면 마음이 밝아지곤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화려한 왕궁보다 이름 모를 사원의 노인의 미소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카오산 거리에 드디어 입성. 얼마나 많이 듣던 거리이름인가. 방콕하면 떠올리게되는 여행자 거리. 내가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은 바로 이런 거리였는데......

노천 카페, 기념품 가게, 게스트 하우스, 티셔츠 가게, 신발 가게,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쏘다니는 거리. 그런데 너무나 낯이 익다. 기지촌을 고향으로 둔 내게 이런 거리는 아늑한 고향으로 다가온다. 카페에 앉아 점심과 함께 맥주를 마신다. 맥주에 쉽게 취하는 나는 기분 좋은 취기를 느낀다. 아, 이대로 여기서 맥주만 마셔도 방콕 접수는 일단 성공이다.
백화점 쇼핑은 내게 피할 수 없는 여행지의 명소 탐방. 이름도 멋진 ZEN 백화점에서 가벼운 기념품을 두 어 개 산 후 밖으로 나오니 달리 가보고 싶은 곳이 없다.
백화점 앞 광장에는 테이블로 가득하다. 맥주 로고가 크게 있는 것으로 보아 노천 호프점인가 보다. 맥주보다는 새끼돼지 바베큐가 군침을 당긴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무대에서 밴드가 시작되고 하반신을 오묘하게 흔드는 여자 가수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방콕의 유쾌한 밤 풍경 속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이 가수를 오래 기억하리라.
방콕에서의 하루가 아쉽듯이 여기서 끝나는 방콕 이야기가 서운해 하나 더.
유럽 배낭 여행이었다면 쓸 수 없는 이야기, 바로 먹는 얘기다. 가격이 저렴해서 잘 먹을 수 있다는 것말고, 열대 과일을 골라서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24시 편의점에서 종류별로 조금씩 사본다. 대여섯 가지를 조금씩 맛볼 만큼만 사니 값도 얼마 되지 않는다. 호텔에 돌아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한 가지 한 가지 정복해 나간다. 우와, 기가 막힌 맛이다. 무척 달콤하다. 방콕에서의 하루가 더불어 달콤해진다.


<앙코르>

세계적인 유적지인 앙코르가 있는 씨엠립. 누군가는 그랬다. 앙코르 여행의 백미는 육로 이동에 있다고. 험하디 험한 비포장 도로를 먼지를 날리며, 혹은 웅덩이에 빠져가며 몇 시간씩 이동하는 데 나중에는 엉덩이가 짓무를 정도라고. 그래 기대가 컸다. 94년 초 인도 여행 때의 육로 이동의 매력이 그리웠던 터라 내심 엉덩이가 짓무를 각오를 하고 무너진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는 스릴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런 탈 없이 예정시간 보다 일찍 도착하는 게 아닌가. 바람맞은 기분이 이럴까.
글로벌 게스트 하우스. 정문이 바로 마주 보이는 2층 한가운데의 방이 우리 방이다. 준비해간 전기 코펠에 누룽지를 끓여 저녁을 해결한다. 지난 가을, 하루에 한 번 레귤러 피자 만한 누룽지를 만드시느라 친정 어머니는 땀 깨나 흘리셨을 것이다. 철없는 딸 내외와 외손녀의 여행을 위해서.
할 일 없이 발코니에 앉아 있자니 깜깜한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일제히 하늘로 올라간다. 하, 이곳은 별들이 하늘로 올라가기도 하는구나. 처음 맛본 열대과일 마냥 신기해했더니 이곳 특유의 불꽃놀이란다. 아마도 어느 사원에서 열리는 기도의식이리라. 앞으로 3일 동안 보게 될 앙코르가 서서히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앙코르 제 2 일.

숙소에서 나오는 바게뜨와 커피, 바나나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 간단한 준비를 하고 간밤에 예약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웬 캄보디아 남자가 자신을 우리 운전기사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이미 예약했다고 하니 잠시 주춤거린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우리 기사가 맞는다하기에 멋쩍게 인사를 나눈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주는 청년이다. 그 인상대로 그는 아주 성실하게 3일 동안 우리를 최고의 손님인양 최대의 예의와 성의로써 우리의 길동무 겸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어딘가 우수 어린 듯한 검은 눈빛은 언제나 우리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순하디 순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사를 포함한 렌터카 비용이 하루에 20불. 2만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온갖 호사를 부리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조금 무겁다.

오후,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저녁도 먹을 겸 올드 마켓에 간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은지 동네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다. 캄보디아에서 치안이 가장 잘 보장된 곳이라고 하니 별 일이야 없겠지. 가이드북에서 본 식당을 찾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길 수 차례, 드디어 가긴 갔는데 책에 소개되어 있는 곳 치고는 좀 그렇다. 아니어도 할 수 없다. 배고 너무 고파 가릴 처지도 못되었으니까. 출입문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광고 전단 마냥 매달아 놓은 맥주병들이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다. 주문한 샌드위치와 볶음밥 1인분이 먼저 나와 딸아이와 남편 앞으로 돌려놓는다. 나머지 1일분이 영 나오지 않는다. 먹어보란 말 한마디 없이 혼자 조용히 먹고 있는 남편이 순간 미워진다. 빈말이라도 좀 해주면 안되나. 딸아이가 먹지 않고 접시 한 쪽으로 골라놓은 샌드위치의 야채를 주어먹고 있자니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참지 못해 한마디 던지니 남편이 먹다말고 밥을 내 앞으로 밀어놓는다. 배고픔에 한 숟가락씩 세면서 먹자니-남편 몫이니까- 이번에는 식당 종업원에게 자꾸 눈이 간다. 아니 우리보다 늦게 온 옆 테이블엔 벌써 음식이 나오고 있잖아. 다시 재촉을 해서야 겨우 밥을 더 먹을 수 있었는데, 이 일 이후로 나는 남편에게 무서운 여자로 다시 한번 각인시키게 되었다.

숙소로 돌아올 때는 재미 삼아 시클로를 탔다. 1달러 부르는 것을 겨우 3000리엘(1달러=4000리엘)로 흥정을 하고 숙소 근처에서 내려 차비를 주려고 하니 돈이 모자란다. 1달러 짜리 주어도 되는데 거스름돈 몇 푼(300원) 아끼겠다고 순간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지갑 한쪽에 남아있던 태국 지폐 100바트(1바트=30원) 짜리 두 장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 다시 태국에 가랴. 어차피 쓰지 못할 남의 나라 돈. 주저 없이 두 장 모두 꺼내 시클로 기사에게 건네며 태국 돈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보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아니 겨우 600원인데 뭘 그리 좋아하나 하며 우리도(남편, 나) 껄껄 웃으며 돌아왔고, 여기에서 생각이 멈추었으면 그것으로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이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돈을 잘못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600원이 아니라 6000원 이었던 것이다. 6000 - 900 = 5100원을 팁으로 주게 된 것이다. 좋은 일 했다고 돌려 생각한다. 한 가정의 가장일 그가 오늘은 기분에 고기라도 한 근 사 가지고 가면 그래 그것으로 족하지. 나도 이런 횡재를 바라노라!

앙코르 제 3 일.

새벽 5시에 일출을 보러 가기 위해 단잠에 빠진 딸아이를 깨운다. 안쓰러운 생각에 "대체 여행이 뭐기에" 잠시 자책에 빠지는 순간 우리의 착실한 기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차 문을 열어준다. 깔끔한 어제와는 달리 낡은 티셔츠 차림으로 보아 정문 옆에 있는 간이 숙소에서 이곳 종업원들 틈에서 잠을 잔 모양이다. 집은 어디일까.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로 보아 벌써 사람들이 많이 와 있는가 보다. 새벽 추위를 피해 딸아이와 나는 택시 안에서 잠시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각 나라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왜 일출과 일몰 장면을 좋아하는 걸까.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안개 속을 오토릭샤로 달리던 일, 네팔 포카라의 히말라야 일출을 보기 위해 보이지도 않는 새벽길을 앞다투어 걷던 일 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장엄한 앙코르와트사원 위로 솟는 태양은 결코 장엄하지도 화려하지도 설레게 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히말라야의 일출은 장엄하고, 바라나시의 일출은 나름대로 새벽 질주의 수고로움에 답하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는데 말이다. 차라리 내가 살고 있는 소래 포구의 해뜨는 광경보다 못하다. 야트막한 산세에 이리저리 가려 시원한 지평선은 아닐지라도 소래 포구의 일출은 주위에 있는 산, 들판, 포구, 도로를 모두 감싸안으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하게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데 말이다. 앙코르와트 때문일까. 태양의 화려함을 압도하는 그 무엇이 앙코르와트 사원에 있는 것일까.

저녁에 압살라 공연을 보러간다. Koulen Ⅱ 레스토랑이라는 곳인데 엄청 사람이 많다. 앞 뒤 옆이 거의 한국사람들이다. 공연은? 소박하다고 할까, 상품화가 덜 되었다고 할까. 네팔에서 본 민속춤도 그렇듯 대부분이 갑돌이, 갑순이 내용이다. 압살라춤은 앙코르 사원에 조각된 압살라의 여러 동작을 재현한 것이라는 데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인도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아무래도 인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이다. 또 대책 없이 인도가 그리워진다. 재미있는 것은 압살라 춤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무희와 기타 다른 무희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인데 복장의 화려함말고 몸의 특정 부분의 과장이 심하다는 점이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슴과 엉덩이를 최대한 앞뒤로 빼는 데 내가 직접 해보니 전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갑돌이, 갑순이가 더 정감이 가고 흥겹다.


앙코르 제4일

마지막 날이니 뭐 특별한 일을 저질러야하는데.
내리 사흘이나 앙코르 유적을 보려니 머리에서 쥐가 나려고 한다. 많이 보고 생각도 많이 키워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좀 벗어나고 싶기도 하다. 질질 끌며 숙제를 못 마친 기분이라고나 할까. 왜 이렇게 볼 게 많은지.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경영한다는 <평양랭면>으로 점심 먹으러 가는 발걸음이 경쾌하고 들뜬다. 함께 온 일행에게서 들은 것도 있겠다, 기대감과 호기심을 채우러 간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북한 아가씨의 서빙을 받으며, 직접 북한에서 공수해와서 만든 냉면을 먹는 맛은 내가 그동안 먹어 본 것 중 으뜸이다. 부모님의 고향인 개풍과 해주를 말하니 고개를 갸우뚱, 바뀐 지명 탓이겠지만 왠지 서운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마음은 설레는 데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어색하고 쑥스럽다. "바늘로 콕 찌르면 하얀 우유가 나오겠습니다." 피부가 하얀 딸아이를 보고 던지는 말이다. 그들 특유의 억양과 예기치 못한 표현에 반쯤 넋이 나갈 정도가 된다. 하하하.

삼일 동안 함께 한 택시 기사에게 북한과의 관계를 대강 설명해주며 냉면을 대접한다. 냉면 한 그릇에 담긴 우리의 흥분과 남북한의 뜨거운 동포애를 그가 알까마는 말없이 맛있게 먹어주는 그가 애처로와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차라리 악착같은 그래서 은근히 수고료를 바라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애처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물 같은 깊은 눈망울에서 대접받는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그간의 경비를 계산하며 이름과 주소를 묻는다. 어색하게 적어주는 그의 이름은 Mr. No. 이제야 이름을 물어 보다니, 우리도 참 무심한 사람들이구나.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늘 그를 찾으면 옆에 있어주었으니까. 주소는 쓰지 못한다. 어쩌면 주소가 없는 집에서 살고 있는 지도 모를 일.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보내주고 싶었는데. 약간의 수고료를 주며 좋은 아내 얻고 부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해준다. 그간 정이 들었나보다. 그를 보내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오늘따라 우리 방 앞 발코니에 있는 테이블이 텅 비어 있다.


<앙코르와 영화>

여행 전에 이곳에 관한 영화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 보았다고 하더라도 정확하게 앙코르를 짚어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한달 남짓 되는 기간 동안 세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비로소 앙코르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세 편의 영화에선 공통적으로 앙코르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그런 만큼 화면에 비치는 앙코르는 대단히 짤막하고 압축적이어서 앙코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알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에선 거의 영화의 마지막 장면쯤에 앙코르가 나오고 자야바르만 7세의 두상도 빠르게 지나간다. 앙코르의 모습도 정글 속에 묻힌 상태여서 복원되기 전의 앙코르가 저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울창하다 못해 공포감마저 어린 앙코르를 배경으로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전쟁과 광기? 전쟁과 공포? 무의미한 전쟁?

「툼 레이더(Tomb Raider)」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답게 우선 재미있다. 마치 끈끈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듯 이곳 저곳 사원을 감싸고 있는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따 프롬>에서 촬영한 부분은 매우 적절하고도 감동적이다. 그곳은 확실히 지상보다는 지하의 세계가 더 그럴 듯해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홍콩 영화「화양연화」가 있다. 주인공들은 각기 바람을 피우고 있는 남편과 아내를 두고 있다. 그들 역시 서로를 위로하며 가까운 사이가 되어간다. 그들에겐 '바람 피운다'는 속된 표현 이상의 진지함과 긴장감이 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놓고 떠나는 이별 연습은 애처로움마저 짙게 배어있어 가슴 아리게 한다. 재회의 가능성은 우연을 허락하지 않고 세월은 어느 덧 3년이 흘러 서로를 그리워만 할 뿐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다. 왜 남자 주인공은 앙코르로 갔을까. 폐허 같은 사원에서 그는 벽돌 틈으로 무엇인가를 찾는 듯 깊이 들여다보다가 무표정한 얼굴이 된다. 실망도 절망도 아닌 체념 같은 것. 과거는 돌아올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것. 돌 벽 위에 피어난 한 송이 야생화 혹은 야생초 같은 것. 그리움과 슬픔 속에서 한 송이 꽃을 피워낸다. 외롭게. 조용하게.

이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채워나가야 할 분야이다. 할리우드가 90년대의 티베트에서 이곳 캄보디아로 관심을 바꾸고 있다 하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영화가 이곳에서 만들어질 지는 모를 일이다. 앙코르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무궁무진할 터이니 말이다.


<프놈펜>

새벽 6시. 프놈펜을 향해 출발. 며칠 동안 먹은 바게뜨와 맛없는 커피도 언젠가는 문득 그리워지겠구먼. 똑 똑 흐르던 화장실 수도꼭지와 내 손만 대었다하면 하루 한차례씩 고장났던 세면대와 열심히 고쳐댔던 솜씨 좋은 남편, 모처럼 맡긴 세탁에 속옷이 벌겋게 물들어 황당했던 일, 숙소 종업원들이 여가에 즐기는 그네들식 제기차기를 일없이 멍청이 바라보던 일, 종업원들에게 군림하는 한국인 주인과 야무진 그의 부인(태국인 인지, 캄보디아인 인지 잘 모르겠다), 혹시나 했던 기대를 무참히도 무너뜨린 된장찌개. 그래도 이곳 글로벌 게스트 하우스를 떠나려니 서운하고 아쉽다.

버스를 타고 얼마나 갔을까. 적당히 흔들리는 비포장도로가 편안해질 무렵 동이 터 오르는 모습이 자못 감동적으로 다가오지만 카메라는 꺼내지 않는다. 누군가 그런다. 연하장에 나오는 그림 같다고. 렌즈 쓸만한 것 하나 장만하지 못해 매 번 벼르기만 하더니. 렌즈 보다 여행비 마련에 늘 급급했으니 어쩔 수 없지. 모두 기억 속에 담아가야지.

배로 갈아탄다. 갑판 위의 벤치에 겨우 자리를 잡고 좋아했더니 아래층 통로 간이의자에 앉아 가는 것만도 못하게 될 줄이야. 서 너 시간 내내 세찬 바람을 막느라 겨울옷과 담요를 모두 꺼내 입고 뒤집어써야했으니. 그래도 우리가 떠있는 똔레삽 호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이국적이어서 그 추위를 보상하고도 남았다. 우기 때를 대비해 긴 막대기들 위에 지은 원두막 같은 집들, 중고등학교 시절 사회과부도에서 보던 그 수상가옥이다. 우리야 한갓 관광객일 수밖에 없음을 그네들의 보금자리를 스치듯 지나면서 깨닫는다. 우리에게야 한 폭의 낭만적인 풍경화지만 저네들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단할까. 그래도 여전히 이국적으로 다가오는 호숫가 집들을 몇 장 카메라에 담으며 어린 시절 동네를 찾은 한 미군병사의 카메라를 떠올린다. 우리의 과거 모습도 그들에겐 이국적이었을까?

드디어 프놈펜. 육로 이동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구먼.
걸리버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점심을 먹는다. 김밥이다. 모처럼 맛있게 먹는 딸아이를 보니 흐뭇하다. 몇 군데 볼만한 곳을 찾아보지만 못 찾아도 그만, 하는 심정으로 시내를 서성거린다. 인솔자의 사전 주의도 있어 될 수 있는 한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밤에 으슥한 곳을 다닌다거나 마약을 팔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을 조심하란다. 치안이 아직 불안하다고는 하지만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저녁을 먹기 위해 유명하다는 식당엘 간다. 낮에 시클로를 타고 돌아다니다 우연히 찾게 된 곳이다. 역시 눈이 보물이라니까. 전망이 좋은 2층은 손님들로 혼잡하고 몹시 시끄럽다. 주로 외국인이다.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네. 사진첩으로 된 메뉴는 영어로도 씌어 있어 보기는 쉬운 데 종류가 100여 종이 넘는다. 코끼리 고기, 비둘기 요리도 있다. 야, 굉장하다. 맛이 어떨까, 궁금해진다. 주문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일단 주문이 끝나면 종업원들이 많아 신속하게 식탁이 차려진다. 음식은, 흠잡을 데가 없다. 캄보디아에서 먹은 음식 중 제일이다. 가격도 적당하다. 맛있는 음식 덕분에 프놈펜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다음 날.
인솔자의 주선으로 버스를 한 대 빌렸다. 일인당 2달러. 다름 아닌 킬링필드의 현장을 답사하러 가는 것이다.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는 역사의 현장. 희생자의 두개골을 모아 탑을 쌓고 수십 명이 죽임을 당한 구덩이들을 보존하고 있다. 당시 감옥과 고문실로 쓰였던 박물관도 갔다. 이젠 아우성도 분노도 절규도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저 마음 속으로 조용히 묵념을 올린다.

뭐라 해도, 누가 뭐래도 구경 중의 구경은 역시 시장이다. 프놈펜에선 어느 곳보다도 중앙시장이 우리 가족의 주무대였다. 유진이의 1달러 짜리 선글라스, 남편과 나의 새 신발(샌달), 4달러 짜리 DVD 대 여섯 장, 티셔츠 두 어 장, 그리고 시장 한구석에서 먹는 현지 음식. 몇 푼 깎기 위한 치열함이 살아 있는 곳. 어느 새 나는 흥정을 즐기고 있었다.

프놈펜의 마지막 밤이다. 먹는 게 남는 것? 불타는 밤? 더도 말고 딱 커피 한 잔만 마셨으면. 자판기 커피라면 더 좋을 텐데. 간절한 커피 생각을 접어두고 저녁을 먹으러간다. 남편은 알고 있으리. 마누라 제 때에 밥 먹지 않으면 사나워진다는 것을. 어제 갔던 그 식당엘 다시 간다. 오늘은 메뉴 선택에 고민이 없다. 이미 랍스터로 결정하고 들어왔으니까. 값은 또 얼마나 저렴한가. 지난 번 한국에서 먹던 10만원 짜리는 맛이 형편없었다. 그것도 벼르고 별러 몇 년 만에 먹었는데. 그런데 이곳은 너무나 저렴한 것이다. 12달러.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런데, 결론은? 너무 맛있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싹 밥을 비벼서 다 먹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한 모양의 랍스터는 아니어서 크기가 작고 모양도 길쭉했지만. 돌아가면 한 번 확인해봐야지.

커피를 드디어 마시긴 마셨다. 숙소 앞 Rose Bar에서. Bar가 본래 의미하는 것을 잠시 망각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옷을 야하게 차려입은 호스티스에게 커피만 주문하다니 왠지 쑥스러워 얼른 커피만 마시고 나와 버렸다.


<호치민(사이공)>

내가 북인도와 네팔을 좋아하는 것은 유채 꽃을 질리게 보면서 길을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스페인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가을 코스모스 마냥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선인장이라는, 우리에겐 화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야생초일 수 도 있다는 색다름 때문이다. 내가 한겨울의 영국을 좋아하는 것은 저 푸른 초원 위에 원 없이 양떼를 보며 양을 셀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기록을 추가한다.

내가 캄보디아를 가슴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무자비한 비포장도로 옆에 피어난 그 수많은 연꽃 때문이리라.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는 꽃, 연꽃. 길가에 잠깐 잠깐 나타나는 작은 연못에는 가녀린 연꽃이 하나 둘 씩 다소곳하게 피어있었다. 내 눈은 언젠가부터 연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꽃, 연꽃. 작은 연못이건, 큰 연못이건 으레 물이 있는 곳에는 연꽃이 피어 있었다. 물 속에서 피어난 꽃. 비포장도로 위,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 바람이 뽀얗게 일어났지만 연꽃은 그 고상한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고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베트남 국경을 겨우 통과하니 베트남 인부 두 명이 우리의 배낭을 하나씩 들고 간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벌써 저 만큼 앞서가고 있다. 뜨거운 뙤약볕에 모처럼 빈 몸으로 걸어가는 남편을 보니 덩달아 내 마음도 가벼워진다. 그런데 이런 일에는 늘 대가가 있는 법, 2달러를 요구한다. 마침 국경 사무실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베트남화폐단위)을 꺼내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었더니 50,000동 짜리를 가리킨다. 2달러면 30,000동(1달러=15,000동)인데, 이 사람들이 우리를 뭘로 보고......어쩐다. 분명 우리가 바가지를 쓰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이 난감한 상황을 피할 도리가 없다. 베트남은 처음이고, 일행들은 저만치 뒤에서 올 생각도 않고 있고, 주위엔 온통 베트남 사람들이고, 할 수 없이 1달러 짜리 두 장을 주고 만다. 그래도 잠시나마 짐에서 벗어나지 않았던가. 나중에 베트남 물가가 엄청 싸다는 것을 알고 분개하긴 했지만.
공항에서 호치민 시내까지의 도로는 잘 닦여져 있었다. 말 그대로 발전도상에 오른 듯한 활기찬 분위기다. 어둑해질 무렵 우리의 목적지이며 여행자거리로 알려진 팜 응우 라오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동안 조용히 있던 딸아이가 반색을 하며 떠들기 시작한다. '실내포장마차'라는 한글 간판을 보고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한글을 더 많이 찾아내나, 게임을 딸아이와 하고 있자니 차창 밖으로 밀려오는 오토바이 물결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 도도한 물결이란 표현이 이런 경우에도 어울릴까? 지금까지는 인도 자이푸르와 바라나시의 오토바이 행렬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기록 갱신이다. 기록 갱신에 더해 그림 한 폭 두뇌에 각인시킨다. 새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밀짚모자에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마스크를 한(매연이 심해서 마스크를 쓰는 사람이 많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베트남 아가씨들이 당당하고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 그네들은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우리가 부럽겠지만 나는 오토바이를 맘껏 탈 수 있는 그네들이 참 부러웠다. 그건 딸아이도 그랬다. 프놈펜에서 오토바이를 딱 한 번 탈 기회가 있었는데 난생 처음 타보는 딸아이가 너무나 좋아하는 거였다. 제 아버지한테 한국에 돌아가면 오토바이 한 대 사서 학교 갈 때 태워달라고 할 정도였다.

사이공(공식명칭은 호치민)에서 삼일을 잤는데 역시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먹는 게 단연 압도적이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잘 먹는 편이어서 어딜 여행해도 음식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에 따른 적응과 호기심 때문이지 그 자체가 늘 즐겁고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 사이공은 그렇지 않다. 먹어 본 모든 음식이 맛있다. 7년 전 유럽 여행 때는 주로 빵 종류로 끼니를 해결했는 데 그중 만만한 것이 바게뜨 인지라 물릴 정도로 많이 먹어서 나중에는 바게뜨의 '바'자만 들어도 인상을 그을 정도로 후유증(?)이 심각했는데 이곳의 바게뜨(베트남어로 반미라고 부른다)가 그 원한을 해독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 음식 중 제일 맛있게 먹은 것은 퍼(Pho)라고 불리는 쌀국수로 특히 함께 넣어 먹는 향미 채소가 좋았다. 인도의 맛살라와도 또 다른 맛이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도 왔다 갔는지 그 사진이 붙어있는 유명한 식당(「Pho 2000」)의 쌀국수는 정말 맛있어서 그릇을 입에 대고 국물까지 후루루 마셨더니 종업원이 숟가락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먹는 것이 식사 예절에 어긋난다는 것을 돌아와서야 알았다. 이런 사소한 깨달음도 여행이 주는 매력이겠지?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맥주에도 얼음을 넣어 마신다는 것이다. 우리 맥주의 톡 쏘는 맛도 없는 밋밋한 맛에 얼음까지 넣다니, 이곳에 일년쯤 살아본다면 이해가 가려나? 하여튼 그런 대로 이곳에서도 맥주는 여행의 멋을 더해주는 본연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방콕 카오산 거리의 오픈 카페에서 한낮에 마시는 맥주는 그 맛보다 한낮에 알콜을 입에 댈 수 있다는 일탈이 해방감을 주는데, 이곳 사이공에서 마시는 맥주의 맛은 그냥 별 의미 없이 한가하게 마실 수 있어서 좋다. 안주를 따로 팔지 않는 맥주는 아무리 마셔도 몇 푼 되지도 않는다(우리나라에 비해).
별 의미 없이 한가하게? 마약을 하는 영화 속의 남자주인공(마이클 케인)이 그렇게 보였다. 영화 The Quiet American에서였다. 사이공에서의 마지막 날, 일찌감치 호텔 체크아웃을 한 우리 가족은 비행기 탑승 시간인 자정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말이 밤 12시지 정말 긴 하루였다. 시장 쇼핑(아오자이를 사달라는 딸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일찌감치 가야했음),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통일궁 관람 등 시내 순례를 마친 우리는 더위를 피해 다이아몬드 백화점으로 갔다. 갑자기 쐬는 에어콘 바람 때문에 화장실을 두 세 번 다녀오니 아이쇼핑할 기운도 없다. 물어물어 영화관을 찾아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프로를 고르다가 보게 된 것이 바로 The Quiet American이였다.

주인공 마이클 케인(Michael Caine, 69세)이 지난 2000년에 영국에서 엘리자베스2세로부터 지사작위를 받은 사실이나 얼마 전 영국에서 The Actor of the Year로 선정된 사실은 여행 후 돌아와서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고, 이 보다 내가 이 영화를 진지하게 보게 된 이유는 이 작품이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의 소설을 영화화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학 시절 영미소설 시간에 읽은 <사건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의 영향력은 큰 것이어서 그 후 종교에 대해서 혹은 자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싹튼 종교에 대한 고민들은 인도 여행을 통해 한층 가열되어 어느 덧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긴 했지만. 그뿐인가. 벽 위로 기어다니는 도롱뇽에 대한 아주 사소한 묘사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여행 중 도롱뇽을 보게 되면 나는 자연스레 그린의 <사건의 핵심>을 떠올리고 주인공 스코비가 되어 그의 고민을 다시 생각해 보곤 한다. 하여튼 20대 초반의 나는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행복할 수 있었고 지금도 추억처럼 그를 떠올리곤 하는 데, 이 영화가 바로 그의 영화라니. 예기치 않은 해후에 가슴 설레며 영화에 빠져드는 데, 옆에 있는 유진이는 팝콘과 음료수를 모두 해치우고는 단잠에 빠져들었고 그 옆에 앉은 남편도 별 기척이 없다.

점심을 먹으러 어제 갔던 식당에 다시 간다. 두 번 째. 익숙하다. 설렘은 줄었지만 여전히 쌀국수는 맛이 좋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그것이 대부분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에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이상하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다시 시간이 흘러 여행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질 무렵, 가장 오랫동안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막힌 풍광, 화려한 유적지, 유쾌하게 보낸 시간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순간들이 아닐까. 딱히 말하기는 힘든 그러나 기억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굳이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언제나 반추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

작년 터키 여행 때, 다른 여행자들은 가이드를 동반하여 바쁘고 알차게 시내 투어를 하는데 우리는 미처 그 방법을 몰라 한나절 동안 배만 왕복으로 타고 있었다. 할 일도 없어 2층 식당에 앉아서 한가하게 물고기를 고르고 있는 그곳 주민들과 그 옆을 얼씬거리고 있는 고양이 몇 마리를 우리 역시 아주 한가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어느 경험보다 선명하게 남아있다. 반면 한때 감탄과 기쁨, 놀람을 자아냈던 것은 사진이나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어느 새 사르르 잊혀져갈 뿐이다.

그래서 나는 길지 않았던 이번 여행을 사진처럼 이렇게 기록을 남기려고 애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록하지 못하는 무위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여행하고 있다.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2003.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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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기

여행기간 : 2002년 1월 7일 ~1월 21일


훌쩍 떠난다고? 배낭 하나 둘러메고 마음가는 대로 가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 그런 여행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듯이 비행기 한 번 타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년 이상 땀을 흘려 악착같이 모아야한다. 여행 경비를, 여행 정보를, 그리고 튼튼한 다리의 힘을.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연이다. 오랜 기다림이다.

터키. 일년 내내 남인도만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에 인도에서 만났던 인도인 친구와 이메일도 꾸준히 주고받으며 마음은 벌써 인도의 남부를 헤매고 있었는데 미국 대참사 사건 여파로 인도도 평화스러운 땅이 이미 아니었다. 그러다 얼떨결에 생각한 곳이 터키였다.
얼떨결? 아니다. 10여 년 전 교무실 내 옆자리에는 박식한 선배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분은 틈만 나면 지리부도를 펴놓고 상상 속으로 세계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 분은 여러 나라 중에 터키를 제 1의 여행지로 꼽았는데 그 이유는 동양과 서양이 그곳에서 만나기 때문이라 했다. 그때만 해도 터키는 저 멀리 관심밖에 있었다.
그러다 7년 전 런던의 어느 대형 서점에서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들어 책을 한 권 산 적이 있다. 구부정한 허리에 우수에 젖은 눈빛을 한 평범한 터키인 사진이었다. 물론 한동안 그 책을 읽지도 못한 채 책장 한구석에 놓고 사진만 이따금씩 감상하곤했는데 바로 그 책이 터키에 관한 책으로는 꽤 유명하다는 것을 실제 이스탄불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터키는 이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 속에도 터키에 대한 설렘과 긴 기다림이 있었다. 내 자신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터키를 향한 마음이 이번에 터키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터키는 우선 어지러움으로 다가왔다. 가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모두 역사의 흔적이라 그 갈피를 헤아리기가 무척이나 힘겹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문명의 살아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 했듯이 이 땅은 메소포타미아와 오리엔트 문명이 잉태된 곳이고,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을 비롯한 수많은 문명들이 거쳐간 곳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숨가쁘다. 난관에 처한 심정이다. 15일의 일정으로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주먹을 불끈 쥔다. “가자! 가자!”

유명한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를 가 보았다. 엄청난 크기에 압도당한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둥근 천장의 아라베스크 무늬는 가히 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어떻게 그렸을까.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엄격한 전통에 따라 꽃과 나무 따위를 그려 넣는데 천장마다 같은 그림이 없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런 위압적인 건축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름답다, 멋지다, 근사하다, 대단하다, 고 놀래줄지언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 마음 속 울림을 자극하지 못한다. 로마 교황청의 그 엄청난 크기에선 신을 빙자한 인간의 헛된 욕망이, 인도 타지마할의 눈부신 하얀 대리석 앞에선 22년 간 그것을 짓기 위해 동원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크기라면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지지 않을 북경의 자금성에선 권력의 무상함이 그저 감지될 뿐이다.
이런 유적지에는 관심이 있을 리 없는 6살짜리 딸아이가 순간 환호성을 지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블루모스크 광장 한 모퉁이에 유치원 같은 건물이 한 채 소박하게 서 있는데 제 딴에는 창문에 그려진 아이들 그림들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아이에게는 블루모스크 보다 유치원이 더 눈길을 끄는 것이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는 말은 여행에서만큼은 진리인 것 같다. 그렇다면 딸아이처럼 내가 환호성을 지른 곳은?
물론 있다. 사프란볼루라는 중세 도시에서였다. 크리스마스 카드에나 나옴직한 눈덮인 고요한 중세 마을에서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있었다. 200년은 족히 된 옛 건물이다.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연못이 앞을 막는다. 성큼 성큼 걸어가며 길이를 재어보니 일곱 이라는 숫자가 재어진다. 정사각형에 깊이는 1m 정도로 맑은 물이 넘치지 않을 정도로 그득하다. 별다른 장식이 없다. 연못을 둘러싼 테이블은 식당치고는 그 수가 참으로 적다. 열 개나 될까.
이슬람식 정원에는 대개 사각형의 연못이 있는 데 그것은 사막에서의 오아시스를 상징한다고 한다. 오아시스란 낙원이다. 따라서 연못을 통해 그들은 낙원을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식당의 실내 연못은?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은 정말 멋진 곳이다. 정원수를 잘 가꾼 정원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정원 중에서 제일 인상깊은 곳인데, 하지만 그곳의 연못은 이 실내 연못만큼 충격적이진 않다. 인도 타지마할의 정원도 잔잔하고 아름답긴 한데 이 실내 연못만큼 몽환적이지 않다. 도대체 이 연못을 만든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이런 연못을 만든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 스타 워즈 에피소드Ⅰ의 촬영지가 있는 카파도키아의 한 동굴 호텔에서였다. 도시 전체가 기괴한 돌로 이루어졌는데 지구를 벗어나서 우주를 헤매다 어느 혹성에 떨어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그 기묘한 도시에는 바위를 파서 호텔을 만든 곳이 있는데 이 호텔에서 하루를 묵는 기분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내가 묵은 호텔의 주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뿐이라 비워두었던 방엔 냉기가 심했는데 방이 가열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를 안채로 부르기에 음식 대접도 받으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헤밍웨이같이 생긴 이 주인은 45살로 부인은 벨기에 사람인데 7살 먹은 아들과 함께 벨기에서 살고 있다한다.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 생각이 났던지 방 한쪽에 장식품으로 올려놓았던 그곳 전통 인형을 하나 집어 선물이라며 선뜻 우리 딸에게 준다. 시장했던지라 저녁을 사먹을 생각으로 식당을 물어보았더니 또 선뜻 물고기 저녁식사로 우리의 허기를 해결해준다. 국물용 멸치 만한 물고기를 간을 해서 조리한 것인데 삶은 것인지 튀긴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지만 담백한 게 맛이 그만이다. 후식으로 나온 작은 사과 알갱이는 보기보다 맛이 훨씬 좋다. 잠시 밖에 나갔다오느라 모포를 뒤집어 쓴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헤밍웨이였다. 객실에 있는 소품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것들이다. 잡지 한 권, 비누 한 조각에도 상당한 안목이 배어있다. 멋진 주인이다. 실내에 연못을 만들어 낙원을 꿈꾸었던 조상의 후예답게 동굴을 파서 만든 호텔을 낙원으로 삼고 있는 그가 순간 부럽다.

Imagine! 성서에도 나오는 에페소스에서였다. 가이드로 나온 Mehmet라는 이름의 터키 청년은 다 허물어져가는 유적지에서 우리를 안내했다. Imagine! 이 단어로 시작하는 그의 설명은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내가 아마 수업 시간에 저렇게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존경받는 교사가 되었으리라. 찌를 듯한 눈빛에 숨도 쉬지 않는 그의 설명도 인상적이지만 상상력을 일깨우려는 Imagine 이라는 단어는 그의 열정적인 설명에 타임머신 같은 날개를 달아 고대의 세계로 훨훨 날아가게 했다.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야외극장은 지금도 공연장으로 쓰이는 데 세계적인 팝 가수인 엘튼 존도 여기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한다. 터키 출신의 유명한 가수인 탈칸도 여기에서 공연한 적이 있냐고 물어보니 그런 적이 없다한다. Big Big Girl이라는 팝송을 흥얼거리기에 함께 흥얼거렸더니 노래를 바꾼다. 터키 노래다. 가사는 모르지만, 그 역시 훌륭한 가수는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부르는 노래는 감동을 준다. 이럴 때 한 곡 정도 화답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내겐 감동을 줄만한 솜씨가 없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에 갔다. 그리스 시대의 가장 큰 신전이며 대리석으로 만든 최초의 신전으로 높이 18미터의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길이 120미터, 폭 60미터의 대형 건축물이다. 지금도 위압감을 주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높이 10미터의 대리석 기둥을 58개 사용했다는 데 18미터의 기둥이 127개라니! 그런데 시야에 보이는 것은 달랑 기둥 하나뿐이다. 그 많은 기둥이 다 어디로 갔을까. 역시 Imagine!

메블라나 춤으로 유명한 콘야에 갔다. 흡사 가수 송창식이 노래 부를 때 두 팔을 옆으로 벌리는 것 같은 모습으로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땅을 향한 채 빙빙 도는 게 전부인데 이게 또 볼만하단다. 무용수들의 의상은 흰색으로 둥근 모자는 비석을, 상의는 무덤을, 치마는 장례식에 사용되는 흰 천을 의미하며 춤이 절정에 올랐을 때 무용수들은 그들의 상의를 벗어 던지는 데 이는 지상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무덤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종의 종교의식인 셈이다.
그런데 공연이 없단다. 다음날이나 단체 여행객들을 위한 공연이 있다하기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니 특별히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 250달러(325,000 원정도)를 내면 우리 세 식구만을 위해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 나는 풀장 같은 실내 연못을 만들거나 동굴 호텔을 운영하며 헤밍웨이 같이 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누구는 오로지 메블라나 춤을 보러 일부러 비행기 타고 온다는데. 바로 다음날 기회가 있는데도 이미 예약해놓은 나머지 일정 때문에 발을 돌려야만 했다. 몇 걸음만 걸어도 뼛속까지 한기가 차 올랐던 이곳 콘야, 아쉬움 때문에 더더욱 춥기만 했다.

그래도 5만원의 택시요금을 물어가며 기분 낸 곳이 있으니, 이스탄불의 피에르 로티 카페였다. 프랑스 해군인 피에르 로티가 유부녀였던 아지야데와 밀회를 즐겼다는 언덕 위 무덤 가에 있는 조그마한 찻집이다. 1876년부터 시작되는 얘기다.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찻집에서 자주 만났다. 어느 날 피에르 로티의 근무가 끝나 프랑스로 돌아가자 아지야데는 죽었다는데 정확한 사인은 모른단다. 그후 로티는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가 되어 돌아오는데 그는 이곳에서 아지야데의 무덤을 찾는 일과 소설을 쓰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한다.
정말 궁금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 여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구상하며 그 책을 썼던 곳이라기에 더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스탄불에서 다른 것은 놓치더라도 이것만은 꼭 봐야겠노라고 가기 전부터 작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갔던 날은, 십 몇 년만에 왔다는 폭설로 인해 사방이 눈이었다. 날도 잔뜩 흐려있었고 카페 옆 무덤 가에선 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언덕 아래로는 멀리 동․서양을 가르고있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더불어 이스탄불 시내가 펼쳐져 있었다.
말 그대로 조그마한 찻집에는 한 떼의 유럽인들로 빈자리가 없어 전망이 전혀 없는 뒷방으로 가서 잠시 몸을 녹이고는 이내 나왔다. 유명하긴 유명한가보군, 하며 자리를 털며 나오는 데 우리를 태우고 왔던 택시 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주차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얼마 후 다 왔다해서 미터기를 보니 22,850,000리라였다. 1천만 리라 두 장과 나머지 돈을 조수석에 앉은 남편에게 분명 주었는데 1천만 리라 짜리 한 장을 덜 받았다며 자꾸 우기는 택시 기사. 미터기 조작에 당하고 바꿔치기 손놀림에 당하고, 그래서 왕복 5만 여 원을 들여가며 그 유명하다는 피에르 로티 카페에 다녀왔다. ( 터키 리라 1,000,000은 우리 돈 약 1,000원에 해당)

여행에서 돌아온 지 20여 일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 초라하다. 난 이런 것을 보았노라, 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그리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7배라는 땅 넓이 때문에 이동시간이 길고, 십 몇 년 만이라는 폭설로 가는 곳마다 눈이었고, 짧은 세계사 상식으로 히타이트 시대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역사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15일 정도의 일정이 빠듯했다.
그러나 나는 친절한 사람들을 오래 기억하리라. 사프란볼루의 작은 박물관에서 만났던 한 무리 청년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들과 단체 촬영, 에페소스에서 길을 어슬렁거리던 우리가 한국인임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승용차가 대우의 세피아인데 아주 좋은 차라고 자랑을 하던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선생은 선생을 알아본다), 콘야에서 길을 가던 아가씨 둘이 우리 딸아이가 신기했던지 사진을 함께 찍어도 되냐고 물어왔던 일, 환전을 하지 못해 토큰을 사지 못하는 우리에게 자신의 정기권을 빌려주려던 청년과 무임 승차를 허락해 주었던 역무원 아저씨, 무엇보다도 이방인 어린이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준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고두고 고맙다. %3(터키인들은 3%를 이렇게 표기한다)은 유럽에, 나머지 %97은 아시아에 적을 두고 있지만 유럽이기를 고집한다는 그들, 그러나 짧은 내 경험으로 본 그들은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더 가깝다. 왜냐,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내려 둘러봤던 암스테르담에선 아무도 정말 아무도 동양인인 우리 딸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기 때문이다.(인도에선 이방인을 향한 관심이 대단하다) 터키인들은 어딘가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 그게 무엇일까. 숙제를 한아름 안고 돌아온 기분 마저 든다. 따라서 이 여행기는 지금 쓰여져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어딘가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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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2023-09-01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딸이 참 귀엽네요

nama 2023-09-01 09:35   좋아요 0 | URL
지금도 귀엽답니다
 

길 찾기 놀이, 마카오

▸여행기간: 2007년 1월 16일-19일(3박 4일)
▸항공사: 마카오항공
▸환율: 1달러 당 약 8 Pataca

2007년 1월 19일. 여행을 마감하는 인천공항. 집으로 향하는 길. 다녀온 나라에 따라 이 인천공항을 빠져나오는 감회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데......
“여행”이라는 단어보다 “출장”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마카오에서 돌아오는 날,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그랬다. 그것은 한편으로 짧은 3박 4일의 마카오 여행이 그래도 출장이 아닌 여행이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이기도 해서 내심 몸과 마음이 느긋하게 풀어지면서 바로 몇 시간 전의 마카오로 다시 돌아가서 길을 헤매고 골목길을 빙빙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에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루 이틀 고민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 상황이 여럿 발생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중도 포기해도 여행만은 중도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이기심이 이번에도 승리를 거두었다.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면 그건 불가항력이다. 집안이 두루 화평하고 평안하고 하는 일이 승승장구하는 태평세월을 기다리다간 평생 한 번도 집을 떠나보지 못하리. 문제는 언제나 있는 법. 내버려두는 수밖에. 이게 나의 이기심이다. 그래서 몇날 며칠 만의 고민과 타협 끝에 어렵게 얻어낸 마카오행이다. 그래봐야 고작 3박 4일이지만.

요즘 여행은 인터넷으로 시작해서 인터넷으로 끝난다. 손목만 좀 고생시키면 온갖 정보들이 넘쳐나지만, 마카오에 대한 정보나 기행문, 가이드북은 그리 많지 않다. 간혹 있다 해도 홍콩 가는 길에 잠시 다녀오는 정도가 대부분이서 가이드북에서도 마카오에 대한 것은 몹시 빈약하고 인색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다. 두세 권 챙겨 다니느라 적잖이 피곤한데 이번 기회에 내가 한 번 가이드북을 써보는 거다. 질펀하게 길 찾기 놀이나 한바탕 해보자. 그러나 <마카오 정부 관광청>에 전화로 요청(두 번 걸었다)해서 얻은 여러 지도와 안내 책자가 여느 가이드북보다 훌륭했다는 사실은 밝혀두자.

새벽 4시 40분 인천공항행 리무진 버스. 출국 수속. 수화물로 보낼 가방 한 개 11kg(세 식구의 가방). 3시간 40여분의 비행시간. 입국 수속. 환전. 버스 타고 물어물어 호텔 찾아가기.(처음에 시내에 들어설 때 택시를 타면 바가지 쓸 확률이 높기도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현지 적응도 빠르다는 생각이다) 호텔 체크인. 그러나 이런 일정 열거에 무슨 의미가 있으리.

풍경 하나- 모든 길은 관문으로 통한다.
우리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현지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 요금이 매우 저렴하다. 기본이 2.5원. (화폐 단위를 부르는 명칭이 제멋대로다. 마카오 화폐 “파타카”, 홍콩 화폐 “달러”, 중국본토의 “원”으로 부르는 데 다 단위가 같다.) 셋이 타도 7.5원. 우리 돈으로 치면 약 900원 정도여서 신나게 버스에 오르는데 때로 이 싼 값이 문제였다. 어림짐작으로 대강 방향을 잡은 뒤 해당 버스에 오르고 보면 어느 새 중국 본토의 주해시로 넘어가는 국경 관문에 도착한 것이다. 처음에는 일부러 목적지로 , 두 번째는 방향을 잘못 잡아서, 세 번째는 똑같은 실수도 모르는 체 셋이 모두 잠이 든 바람에 하루에 세 번 씩이나 관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내려서 버스에 승객이 우리만 남을 즈음 어김없이 도착하는 관문. “그래도 괜찮아, 거리도 짧고 버스요금도 싼데 뭐. 다시 시작하지 뭐.” 참 너그러워지는 남편과 나. 기왕 왔으니 한번쯤 관문을 넘어 주해시로 넘어가보면 좋겠지만 비자가 필요하다. 일방통행으로 되어있는 입구와 출구에서 쏟아져 들어가고 나오는 많은 현지인들 틈에서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는 수밖에. 헌데 주해에는 뭐가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헤매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법. 마카오의 크기에 대해서 어떤 이는 서울의 종로구만하다, 어떤 이는 영종도의 2분의 1이다, 혹은 동서로 2km, 남북으로 4km 정도라고 하지만 그건 수치상의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마카오에서 버스를 타보면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실핏줄 같은 도로에 일방통행이기 일쑤며 차도와 인도가 밀착된 오밀조밀한 골목을 누비는 폼이 우리의 마을버스보다 훨씬 더하고 도로의 변화무쌍함이 성남시의 어느 경사진 골목길을 연상시킨다. 경사가 그리 급한 건 아니지만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다보니 롤러코스터에도 끄떡없는 나도 때로는 속이 울렁거리는 멀미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관광청에서 준<마카오 도보여행>을 따라서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안내서에는 도보 코스가 깔끔하게 나와 있지만 엉뚱한 방향을 잡기 십상이다. 초행자에게는 좀 무리다 싶다.
450년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는 마카오. 모든 길은 관문으로 통하고 있었고 포르투갈의 욕망도 중국 본토로 항상 열려있었을 터이다. 갑자기 포르투갈에 대해서 궁금해진다. 한때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문어발처럼 뻗어갔던 포르투갈. 지금의 포르투갈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풍경 둘-내 머리를 맡기련다.
남편은 여행지에서 머리 손질하는 것을 좋아한다, 보다는 여행 무렵에는 머리를 손질할 때가 되어서 하다보니 여행지에서 이발소에 종종 가게 된다. 여행지에서의 이발은 맛있는 음식이나 멋진 구경거리 못지않게 추억을 불러일으키나보다. 해서 여행 전 이발을 미루고 은근한 기대로 마카오의 이발소를 기웃거리게 되었다는 말씀. 그런데 몇 집 걸러 하나씩 있는 우리와는 달리 이발소가 눈에 띄지 않는다. 관문까지 가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재래시장을 기웃거리다가 길가에 있는 작은 이발소 하나 발견. 중학생만한 여자 아이 하나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아버지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하면서 "No time"이라한다. 간단한 영어나마 통하니 좀 낫다. 그냥 하릴없이 나온다. 여기서 포기하기엔 이르다싶어 다시 골목을 누비는데...... 마트에 가면 딸아이는 제가 사고 싶어 하는 것을 어찌 그리도 용케 찾아내는 지 감탄하게 하는 데 이번엔 남편이 나를 감탄케 한다. 골목 깊숙이 있는 작은 이발소를 드디어 찾아내는데 어느 유적지가 이렇게 반가울까 싶다.(渡船街에 있음)
드라마<전원일기>의 응삼이 박윤배를 닮은 이발사다. 서로 말은 통할 리 없는데 친절하기 이를 데 없는 이발사는 연신 뭐라고 의향을 물어온다. “머리를 어떻게 해 드릴까요?”의 뜻이겠지 아마. 내게도 묻는데 나라고 알아들을 리 있나. 이럴 땐 그냥 우리말로 대답한다. “알아서 해 주세요.” 한 시간 가까이 자르고 다듬고 면도에 머리 감겨주기까지 그 정성이 가히 눈물겨울 정도다. 헌신적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하리. 자르기 전과 자른 후를 비교하기위해, 그냥 앉아있기 무료하여 카메라에 모습을 담는데 처음에는 한사코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던 이발사가 이발이 끝나자 함께 포즈를 잡는다. 뿌듯한 표정이 역력하다. 이번 여행의 사진을 한 장 꼽으라면 나는 이 사진을 꼽고 싶다.
사실 여행지에서 짧은 기간동안 현지인과 어울릴 기회는 거의 없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들끓는 관광지라면 더욱 그렇다. 이럴 때 골목의 허름한 작은 이발소 같은 곳은 여행의 색다른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름 없는 잡초들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 이발사는 마카오를 대표하는 이발사요,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손님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그간의 이발 요금을 공개한다. 2003년 호치민에서는 1달러. 2006년 중국의 운남성 따리에서는 10원이니까 1달러가 조금 넘는 셈. 그러면 마카오는? 면도와 머리감기 포함해서 50원. 이발소 순례는 앞으로도 계속 된다!

풍경 셋-길을 찾는 사나이, 프란시스 자비에르
프란시스 자비에르. 16세기 초 스페인 태생의 Jesuit 파 수행자. 아시아 지역 포교활동을 위해 1542년 인도의 고아에 도착. 10여 년 간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다 1552년 중국의 Sancian에서 사망. 그의 유골이 고아로 옮겨질 것에 대비하여 살을 빨리 썩게 하기위해 석회를 4포대나 뿌렸는데도 살이 썩지 않았다는 것. 2개월 후에 말라카에서도 그대로였고 1554년 고아로 이전되기 위해 무덤에서 나왔을 때도 전혀 썩지 않았다는 것. 1614년 선교의 목적으로 오른팔을 잘라 일본과 로마로 분배되었고 1636년에는 내장의 기관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졌단다. 이런 연유로 생전 보다 생후에 더 주목 받게 된 자비에르. 지금은 유리관에 시신을 보관하여 고아의 한 성당에 안치되어있다. 나는 바로 그 유리관에 안치된 시신을 보았었다. 2005년 1월이었다.
마카오의 남단에 있는 콜로안 섬의 콜로안 마을에서 한가로이 동네를 둘러보다 마주친 예쁜 예배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너무나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고 그곳을 벗어나기도 못내 아쉬웠다. 이 마을은 드라마 <궁>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지만 정작 나는 이 드라마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예쁜 성당이 그 드라마에 나온 지도 몰랐고 알았다 해도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여행 3일째라 긴장이 풀렸던지 그동안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자료들을 호텔에 두고나와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나오는 바람에 그 이름을 보고도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성당이 바로 <프란시스 자비에르 예배당>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둔함이란. 처음엔 동명이인쯤으로 여겼다. 고아의 자비에르가 이곳에서도 이렇게 되살아나고 있음을 한참 추리 끝에 파악하였다. 1928년에 자비에르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이 예배당은 특히 일본의 순례자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하는데 자비에르가 일본에 처음으로 카톨릭을 전파해서일까.
보물찾기 같았던 프란시스 자비에르. 400여 년 전 태어나서 새 길을 개척하고자했던 사나이. 썩지 않는 시체 덕에 지금도 기억되고 추앙 받고 있는 사나이. 포르투갈의 마카오 지배와 세월을 함께 달린 자비에르는 지금도 길을 개척하고 있는지, 죽어서도 잠들지 못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엽기적이기까지 한 일들에 열광적일까?

풍경 넷-내가 원조야, 세나도 광장
마카오를 상징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세나도 광장이다. 흰색과 검은 색의 조약돌로 만든 물결무늬의 광장은 사진으로 보나 실제로 보나 참 예쁘고 편안하다. 거의 모든 버스의 종점이 관문이라면 마카오를 찾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세나도 광장으로 모여든다. 그래서인지 버스에서 졸다보면 또 오게 되는 곳도 이곳이다. 물결무늬의 조약돌 광장, 크림색의 예쁜 성당 등 포르투갈 시대의 건물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풍광이다. 그렇다. 일 년 전에 갔었던 리장의 거리들. 닳고 닳은 까만 조약돌로 이루어진 길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그 모습이 스친다. 거기에 인도 고아에서 수없이 보았던 성당들. 그 두 곳을 합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중국 색채와 포르투갈 색채가 절묘하게 결합된 곳이다. 거기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육포나 생과자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들이 도열되어 있는데 이곳은 대만의 주펀을 연상시킨다. 주펀은 <비정성시>라는 영화(아직까지 보지 못했음)를 찍었던 곳으로 알려진 동네다. 물론 주펀이 훨씬 더 원조 같긴 하지만.
이곳에 유명한 포르투갈 레스토랑이 있다는 데 한 번쯤은 들러주는 센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배는 고픈데 Plato라는 식당 찾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다. 분명 가까운 골목 어딘가에 있는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깃발 부대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조금쯤 부러워질 때가 바로 이때다. 언제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탐했더냐, 하며 포기할 즈음 짜~안 나타나는 Plato. 연어와 해물요리를 주문. 아, 이런 것이 바로 “요리”라는 거구나. 곁들인 포르투갈 맥주도 맛있다. 용인 에버랜드에서 마셨던 밀 맥주 보다 약간 세련된 맛이다. 하여튼 이곳에서 먹은 요리는 우리가 마카오에서 먹은 음식 중 단연 최고였다. 백화점 푸드코트 같은 데서 세 끼를 해결하고 현지 서민 식당에서 한두 끼 해결하면서 먹는 것이 마땅치 않았었다. 중국에서는 여~엉 음식에 적응이 안된다.

풍경 다섯-마카오는 □□□□□(이)다.
1.마카오는 <콩나물시루>다
세나도 광장이 아무리 이국적이고 마카오를 대표한다고 해도 진짜 명물은 따로 있다. 마카오에서 버스를 타보지 않은 자, 길을 잃어보지 않은 자들은 알 수 없는 명물이 있다. 바로 서민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이다. 개그맨 전유성이 <남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럽의 하수구를 집중적으로 사진에 담은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나도 그처럼 이곳에서 한 가지 주제로 사진을 찍는다면 바로 아파트의 발코니를 택하고 싶을 정도이다. 진득하게 일상의 삶이 배어있어 내 이웃을 보는 듯 나를 보는 듯 가슴의 어떤 부분이 지르르 아파오기도 한다.
새로 지은 아파트에는 번듯한 발코니가 더러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낡은 아파트에는 우리 식의 발코니가 없다. 대신 창문에 창살을 덧대어 발코니처럼 사용하는 데 그 크기가 제각각이라 같은 아파트에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창살 발코니를 찾아보기 힘들다. 방범용 창살이라 하기에는 좀 큼직하여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 사람이 다닐까? 또 왜 하나같이 우중충하기 만할까? 사람이 서 있기에는 아슬아슬 위험해 보이는 데 단순 방범용이라면 저렇게 크게 할 필요가 있을까? 녹슬고 낡고 가는 창살들 틈으로 보이는 속옷 나부랭이 빨래들. 말라 비틀어져가는 화분들. 칙칙한 사람들. 보지 말아야 하는 치부처럼 자꾸 아파트 창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일조권 행사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동서남북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들은 일조권은커녕 사생활 보호나 제대로 될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학교에도 우리식의 운동장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일반 시민들은 조깅이나 산책 같은 것을 어디에서 할까나? 실내체육관이 그 모두를 수용할 수 있을까? 관광 유적지로 이름을 올린 몇 개의 정원이나 공원 등은 대외 전시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인구 비례 그 숫자가 미미하다.
마카오는 이렇게 그 모양새가 꼭 콩나물시루 같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이 턱턱 막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공간이 넓은 곳에는 카지노와 테마파크, 각종 경기장(심지어 개 경주장까지)들이 진을 치고 있다.

2.그래도 마카오는 <역사의 중심>이다
세계문화유산 등록명이 “동서양 역사의 중심 마카오”라 한다. 그래서인지 유럽처럼 성당도 많고 갖가지 유적지도 많은데 여기에 한 단어를 삽입하면 더 적확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싶은데. 마카오는 과거의 <역사의 중심>이었다, 라고. 하기야 세계문화유산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 모두 과거의 찬란한 흔적을 보전하기위해 제정된 것이지만. 동서양이 아직도 살아있는 터키와 비교하며 생각해 보면 재밌겠다 싶다.

풍경 여섯- 사랑스런 마카오
마카오는 확실히 독특한 곳이다. 대만이나 작년에 갔었던 운남성과는 확실히 다른 곳이다. 사람들이 우선 친절하다. 동서양이 만나는 곳이라 그런가, 터키처럼. 첫날 호텔을 찾아 어리바리한 얼굴로 버스를 탈 때 버스 안내는 물론 잔돈까지 뒷사람에게서 받아주었던 아주머니는 우리를 호텔 앞까지 데려다주는 바람에 잠시 의심까지 했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만난 사람들도 대체로 친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택시기사. 아무리 조심해도 택시 기사의 횡포에 막무가내 당하길 몇 번, 택시를 탈 때는 자동적으로 긴장을 하는데 여기 마카오에서는 좋은 기억만 남는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서 좀 엉뚱한 곳에서 내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사들이 정직하고 친절하다. 참고로 하나 더. 페리 터미널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타이파섬의 공항까지 택시로 가는 데 우정대교(Friendship Bridge)로 곧바로 가면 요금이 46원정도 나온다. 다음에 다시 마카오에 오게 되면 그땐 택시를 타고 시내에 진입해야겠다. 우정대교로 가달라고 해야지.
작년 운남성에서 사람을 질리게 하던 터무니없는 각종 입장료를 떠올리면 이곳 마카오의 입장료는 요즘 표현대로 “착하다.” 정말 합리적으로 착하다. 그래서 사랑스럽다.

풍경 일곱- 질문 있습니까?
그렇지요. 마카오는 카지노로 유명하지요. 우리가 묵은 호텔도 카지노 호텔이어서 무척이나 좋았답니다. 처음 호텔을 찾아갔을 때 얼마나 화려하고 으리으리하던지 “내가 여행사 하나는 잘 골랐어” 라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카지노 입구더군요. 호텔은 입구가 다른 쪽에 있었지요. 하여튼 카지노 호텔에서 사흘이나 잤는데 카지노는 구경도 안했지요. 사실은 고스톱도 못하거든요.
여행 경비를 말씀드리지요. 3박 4일 마카오 여행상품 가격은 499,000원. 여기에 각종 Tax 가 78,000원. 여기에 인원수 곱하시면 되고요. 그 외의 비용은 쓰기 나름인데 돈 쓸 일이 많지 않더군요. 우리가 너무 얌전하게 다녔나 봐요. ㅋㅋㅋ language=java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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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행 긴 추억, 윈난

· 여행기간: 2006년 1월 13일~1월 24일(10박 12일)
· 일정: 쿤밍(3박) - 따리(3박) - 리지앙(3박) - 이동(야간 침대버스) - 쿤밍(한나절)


1. 이번 여행은 십 년 이상을 기다리고 준비해 온 여행이다. 대한항공 스카이패스 제휴카드를 사용한 이후로 오로지 보너스 항공권을 얻어 무료 비행기를 탈 이 날 만을 기다리며 매진, 오직 한 신용 카드만을 고집하며 사용해왔다. 한 마디로 나는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구차한 이야기는 생략하자. 세 식구 티켓이 나올 것, 가장 멀리 갈 것, 가능한 한 덜 추운 곳으로 갈 것 등을 고려해서 결정한 곳은 중국의 서남부 지역인 운남성. 여기에는 틈틈이 들어가 보곤 했던 <트래블 게릴라 www.travelg.co.kr>의 웹진이 한 몫 했음을 밝혀둔다.


+여행 전 경비 및 기타 +
-유류할증료 및 공항세: 230,800원(3인분)
-비자대금: 한중문화협회에 의뢰, 전화와 팩스로 간단히 처리됨
3인 이상 단체 비자 25,000×3명= 75,000원
-여행자보험: 27,030원(트래블 게릴라에 신청)
-가이드북:<알짜배기 세계여행-윈난/쓰촨/구이저우>


2. 일정이 무지 짧다. 마일리지 공제 규정상 선택의 폭은 매우 제한되어있다. 비수기를 택하다보니 1월 11일 이후가 되고, 쿤밍행 항공 운항 요일을 고려하자니 출발일이 금요일이 되고, 여기다 월말에 낀 구정을 배려하자니 겨우 열흘 남짓. 행선지를 세 지역으로 압축, 쿤밍, 따리, 리지앙으로 결정한다. 한 곳에서 3일 씩 보내기로 한다. 바쁜 일정을 쫓던 여행 패턴에서 진화되었다고나 할까. 좀 귀찮기도 하고. 솔직히.

본격적인 정보 탐색에 들어간다. 숙소를 궁리하던 중 네이버에서 카페를 발견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예약해둔다. 새삼 세계 곳곳에 자리 잡은 한국인들의 부지런함이 감탄스럽다.

-쿤밍 http://cafe.naver.com/yntour

<G.H 76>

공항에서 가깝고 신축 아파트 11층에 위치하고 있어서 중국에 온 실감이 덜 난다. 정문 경비를 서는 경비병과 말이 통하면 좋을 텐데 그냥 우리말로 인사를 건넨다.

 

-따리 http://cafe.naver.com/dalilove.cafe

<코리아나 게스트하우스>와 <No.3 게스트하우스>로 제임스 사장님(이 분과는 특별한 인연이 되는 데 읽다보면 나올 것임)이 확고한 기반을 잡은 곳으로 보인다. “따리는 내가 접수한다”

 

-리지앙

따리의 제임스 사장님 소개로 <낭만일생>이라는 곳으로 찾아든다. (주인이 한국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만고루> 아래에 있어서 전망 하나는 끝내준다. 우리 방 바로 앞에 전망대 겸 정자가 있어서 리지앙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일 뿐 아니가 해 뜨는 광경도 넋 놓고 파자마 바람으로 볼 수 있다. 옆 집 전망대에선 심심찮게 촬영도 나와 예쁜 리포터 구경도 할 수 있다. 구경꾼에게 2원씩을 받고 입장시키기도 한다.

기타, 실제 여행에 도움이 된 사이트 하나 더.

http://cafe.naver.com/chinahappy

 

3. 쿤밍에서는 꽉 찬 3일을 보냈는데, 대도시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준 곳으로 여행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살다 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도시는 늘 그랬던 것 같다. 낯선 곳에서의 막막함에 처음에는 늘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특히 알게 모르게 겪게 되는 바가지요금에는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늘 첫 행선지인 대도시에서는 과다한 수업료를 치르곤 하는데 여기 쿤밍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도시가 갖고 있는 코드를 읽을 줄 알아야한다. 시내버스 노선 파악, 환전할 은행의 위치, 시장 가는 방법, 쇼핑하기 등 여행이라기보다는 그냥 일상생활에 가깝다. 그런데 그게 3일 정도면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능해진다.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무턱대고 택시를 타지도 않게 되고,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도 길을 건널 수 있고, 특히 쇼핑에는 현지인이 무색할 정도가 된다.

다시 여행자 신분으로 돌아와서, 그러면 쿤밍에서 뭘 봐야 되나? 어떤 이는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운남민족촌과 스린을 꼽는다.

우선 운남민족촌. 26개의 소수민족이 몰려 있다는 운남성의 특성을 살피려면 이곳을 보라고하여 마지막 날, 여행도 정리할 겸 이곳을 찾았다. 날씨는 잔뜩 흐렸고 기온도 많이 내려간 덕분에 모처럼 호젓하고 한산하게 둘러 볼 수 있었는데 역시 중국의 관광지는 사람으로 들끓어야 제 격인 듯 영 쓸쓸하기 그지없다. 색채가 다양한 소수민족의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은 추위 때문에 모두가 똑같은 두툼한 점퍼를 걸치고 있어 그마저 눈요기가 되지 아니하고, 반듯하고 큼직하게 지어놓은 소수민족의 전통 가옥도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아니하고, 허구헌날 관광객을 상대로 공연을 해야 하는 젊디젊은 청년들의 하릴없음을 목격하는 것도 즐겁지 아니하고, 티베트족인 장족 코너에서는 눈동자 색깔이 묘한 하얀 피부의 아가씨가 관광객의 요청에 춤사위를 예쁘게 보여주는 데 그 역시 마음이 편치 아니하다. 중국의 티베트 정책이 요런 모양새겠지? 여행 내내 비싼 입장료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지라 이곳도 돈 맛들인 중국인들의 얄팍한 상술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차라리 리지앙의 사방가처럼 노인들이 추는 민속춤이 훨씬 더 흥겹다. 어딘가 둔하지만 인생의 연륜이 배어있어 넉넉하고, 억지웃음이 아닌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에 더불어 유쾌해지는 것이다. 춤을 추는 노인들의 얼굴에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에서 오는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리지앙이 고성으로서의 향기를 더 발휘하는 것도 이 노인들 덕분이 아닐까.

 

스린(石林)은 운남을 소개하는 포스터나 책자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기암괴석 지대이다. 터키의 카파도키아와 비교하면 훨씬 덜 흥미롭지만 나름대로 중국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고 할 수 있다. 역시 비싼 입장료와 공원 내 차량이동시 과다한 요금이 문제인데 그들은 참 배짱도 두둑하다. 여기까지 와서 안볼 수도 없고, 소심하고 심약한 자들은 열심히 의미를 찾아가며 즐거움도 탐해 보지만 입안이 씁쓸하다. 인도의 아그라에선 타지마할 입장료가 터무니없이 올라 관광객이 줄어들자 아그라 상인들이 입장료를 내려달라고 시위를 벌였다는 데 중국에서는 그런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일 것 같다. 이름 하여 대륙적인 기질이라고나 할까, 사회주의적인 체제에서 오는 경직성 때문일까?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건 내 선입견일까 편견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 큰 나라가 하나같이 똑같은 모양으로 움직이는 게 재미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3일을 쿤밍에서 보냈다면 나는 너무나도 슬펐을 것이다.

그래, 대도시에선 대학 구경을 빼면 서운하지. 운 좋게 대학에 딸린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학 주변에서 얼쩡거려보는 것도 기분을 충전시키는 데는 그만이다. 날이 저물 무렵 물어물어 시내버스 타고 찾아간 운남 대학은 이미 날이 어두워서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대학가 주변 골목에서 찾은 한국음식점은 여행 초반의 긴장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국적을 불문한 젊은 커플을 바라보는 것도 여기서는 하나의 구경거리였다.

그리고 쇼핑. 대형 할인점이라면 우리 가족은 한없이 나약해진다. 여행 초반을 쇼핑으로 가방 하나를 채웠으니 말 다했지.....

 

4. 따리 < 리지앙 < 쑤허 < 옥수채

*쑤허: 리지앙에서 가까운 곳으로 옛 마을과 새로 조성된 관광 마을로 이루어져있다.

*옥수채: 리지앙을 둘러싼 옥룡설산(해발 5,596m 로 히말라야 산맥 중 끝에서 두 번 째라함) 가는 길에 있는 나시족 문화의 탄생지.

 

웬 부등식? 여기서 문제 하나 - 이들의 공통점 알아맞히기.

 

힌트1. 어린 시절, 한여름에 비가 오면 허름한 뒤란에 겨우 땅에 붙어 자라고 있는 잡풀 사이로 맑은 빗물이 졸졸졸 흐르곤 하여 이상야릇하고 행복한 꿈에 젖어들곤 했다. 한참 동안을 마냥 넋을 잃곤 바라보곤 했었다.

 

힌트2. 유난히 등하교길이 험난했던 중학교 시절, 두 어 고개 넘으며 밭길 산길로 40여 분을 걸어 다녀야 했는데,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면 산 언덕길이 그대로 물길이 되곤 했었다. 발목 너머까지 자란 잡풀사이로 빗물이 시냇물처럼 흘러 운동화가 그대로 물에 잠겨버리곤 했다. 어쩌다 겪게 되는 그 물난리(?)가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힌트3. 김천의 직지사. 사찰 앞마당에 내 손목만한 너비의 수로가 길게 파여 있어 물이 고이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는데, 15년 전의 이 기억이 맞을까?

 

힌트4. 아산의 외암리 마을, 인위적인 한옥 마을을 조성한다고 하여 구경삼아 갔었다. 어느 집 앞에 수로가 있어 담 옆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물길을 건너야 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이한 구조가 참 인상에 깊게 남아있다.

 

힌트5.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 농가를 개조한 살림집을 찍은 화보를 잡지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글쎄 실내에 작은 수로가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도 사는구나! 놀라움 내지는 부러움.

 

정답은? 물.

 

그러면 부등식은?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생각이니 양해하시길... 따리에서 처음에 인상적인 것은 마을을 따라 이어지는 수로였다. 물이 맑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기자기하게 물길을 내고 있었고 어느 길모퉁이엔 앙증맞은 돌우물도 있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물 속은 제법 깊어 보였다. 그러나 이곳의 매력은 이런 인위적인 수로가 아니라 얼하이 호수인 듯싶다.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톤레삽호수에 그 크기를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크기나 아름다움 면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곳이다. 다만 나의 몸으로 그 세밀한 부분까지 경험을 못했기에 여기서는 그저 이름만을 거론할 수밖에 없다는 게 좀 안타깝다. 내 언젠가 이 호숫가를 미친 듯이 걸어보리.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소. 호수에 외롭게 떠있는 <남조풍정도>라는 섬은 어느 안목이 뛰어난 자의 노력으로 가히 얼하이의 진주로 여행객을 매료시키는 곳이다. 잘 꾸며진 리조트를 연상시킨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사진발로 남 염장지르기에 딱 알맞은 곳이다.

 

리지앙. 이곳은 “동양의 베니스”라는 곳. 따리의 수로보다 훨씬 넓고 깨끗하고 물살도 세고 역시 듣던 대로 물의 도시였다. 참 아기자기하다. 수로에 띄우는 예쁜 꽃모양의 촛불도 하나쯤 사서 띄어보고는 잊어버린 소원도 떠올려본다. 수많은 인파로 반들반들해진 돌바닥을 주인공으로 사진도 몇 장 찍어본다. 골목마다 예쁘게 흘러가는 수로를 따라 마냥 걸어도 절대로 지칠 것 같지 않다. 아무거나 아무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럴 듯하게 찍힐 것 같다. 실제로 돌아와서 인화를 해보니 모두 엽서 같은 사진이 나왔다. 야경 또한 기막힌 풍광을 이룬다. 고성 전체에 불이 붙은 것 같다. 사람 사는 동네가 이렇게 그림 같아도 되는 거야? 그런 거야?

 

쑤허. 리지앙의 그 무지막지한 인파가 지겨워질 무렵 쑤허를 찾아가 본다. 어김없는 입장료가 좀 얄밉다. 신시가지라고 할까. 새로 구성된 동네가 너무 인위적이라서 실망감을 금치 못한다. 좀 더 인내심을 발휘하여 훠이훠이 걷다보면 차마고도 박물관이 나와 과거 한 시절의 번성과 영광의 흔적을 보여주는 데 조금씩 이 쑤허라는 곳에 마음이 모아지기 시작한다.

 

고색이 완연한 한 다리에 이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다. 솜방망이 마이크로 보아 무슨 촬영을 나왔나보다. 동네 한 바퀴 도는 데 10원인 조랑말에 딸아이(초등3)의 시선이 가 있다. 간절한 눈빛이다. 남편은 캠코더를 들고 앞서 뛰어가고 나는 터벅터벅 말 뒤꽁무니를 따라가며 열심히 카메라를 들이댄다. 순간 공주마마를 모신 하인과 하녀가 된다. 자식을 위해 무엇인들 못하리. 그렇게 허겁지겁 뒤따르다보니 어느 순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작고 예쁜 수로였다. 이 수로를 따라 이어진 카페는 채 10곳이 못되지만 하나같이 예쁘고 정겹다. 너무 예뻐서 간지러울 정도다. 흐르는 물은 리지앙 보다 훨씬 맑고 깨끗하다. 창 밑으로 흐르는 수로를 곁에 둔 카페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린다. 내 무엇을 더 바랄까.

 

옥수채(玉水寨). 한국 남학생과 중국 여학생 커플. 우리는 그들을 한중 커플이라 불렀다. 따리의 남조풍정도에서부터 일행이 된 이 한중 커플과 옥룡설산을 함께 돌아보았다. 중국어 한 마디 모르고도 잘 다니는 우리지만 이 중국어가 완벽한 한 쌍을 대동하고 다녀보니 원더풀, 머치 모어 원더풀(much more wonderful)이다. 다만 감기에 걸려 몹시 힘들어하는 이들이 좀 안쓰럽다. 그런데도 하나라도 놓칠세라 정말 열심히 다닌다. 부럽다.

 

그래도 히말라야에 붙은 산이라고 해발 고도가 제법 높다. 까이꺼 스위스의 융프라우도 끄덕 없었는 데 이 정도야, 했더니 남편이 그건 벌써 10년 전이란다. 에고 힘 들어라, 절로 탄식이 새어나온다. 내 심장이 견딜라나 은근히 걱정이 된다. (여행에서 돌아와 병원에 가니 혈압이 좀 떨어졌단다. 즉 몸이 건강해졌단다. 역시 여행이 보약이여)

 

고산증세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확인한 모우평. 즈려밟는 걸음걸음 힘이 빠져 괴로우나 소수민족 흉내 내어 야크 고기 먹어 보고 딸아이에 전통 의상 입혀보니 이곳이 속세인가 내세인가 신선놀음 따로 없네.

 

터키의 파묵칼레를 떠올리는 백수하. 인공감미료에 질리면서도 끊기 어렵듯 이곳도 인위적인 멋이 팍팍 나지만 그런대로 멋지게 꾸미려고 애 쓴 점은 인정하자.

이쯤에서 이 날의 일정이 끝났으면 싶었다. 그만 봐도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몸이 힘들었다. 평소 출퇴근 시 하루에 합쳐서 1 시간 20분 이상 걷곤 하여 내심 걷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이 고산지대에서는 평지의 운동이 별 효과가 없는 듯싶다.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감기와 설사로 괴로워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이 한중커플의 열성 때문에 차마 말은 못하고 꾸역꾸역 따라다닌다. 본전 생각도 나고. 웬 입장료가 비싼지.(성인120원, 학생80원 *리지앙에선 욕실 딸린 2인실이 하루에 60원 하는 데서 잤음.)

 

별 기대감 없이 옥수채란 곳에 들어간다. 에구 또 입장료 타령. 나시족 문화의 탄생지라나 뭐라나. 뭐 민속촌 같은 거겠지. 뭘 그렇게 상징하는 것이 많나. 보아하니 이곳도 인공 감미료로 도배한 곳이군. 그러면 그렇지, 하던 순간 꼭대기에 있는 한 고목에 이른다. 그 밑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이 물은 다시 부챗살 모양의 호수가 되었다가 아래로 긴 물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 이것은 자연산인 것 같은데? 그러면 이 물이 흘러서 내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그 물길의 근원 내지는 시원? 나는 드디어 흐르는 물의 근원과 만난 것이다. 나시족은 바로 이 물의 근원지를 신성시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정도는 아니었지만 참으로 색다른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카메라가 없다니. 아니 건전지가 죽어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 구하기도 어려운 놈, 하필이면 요때....이 정경을 마음속으로 꾹꾹 눌러 담느라고 보고 또 본다. 또 하필이면 이런 때, 저 언덕 위에 있는 저 노란 큰 꽃나무, 흐느적흐느적 바람에 흔들리는 폼이 예사 나무가 아닐 세. 저 나무엔 필시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게 틀림없어. 카메라가 없는 덕분에 나는 더 진하게 눈이 시리도록 마음에 담아올 수 있었다.

 

따리.

리지앙.

쑤허.

그리고 옥수채.

이 아름다운 곳들은 이렇게 내 기억 속에 있는 물에 대한 추억의 갈피갈피 사이를 흐르게 되었다.

 

5. 소수민족으로 유명한 동네에 왔으니 한 번은 경험을 해 봐야지, 실행에 옮긴다.

 

따리 1.중국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시 용감하게 나서는 데, 궁하면 통하는 법,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귀인을 만난다. 조우청이라는 백족 마을에 갈 생각이라는 강선생님. 흔쾌히 합류한다. 이 분은 준비된 분이었다. 지난 번 중국여행 때 언어 때문에 고생을 해서 중국어를 배웠단다. 나도 인도 간다고 힌디어도 건드려 보고, 장기적인 계획의 일환으로 스페인어도 건드려 보았지만 모두 작심삼일이어서 그 이후로는 “영어라도 잘하자”하는 심정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경험이 있기에 이 분의 중국어 한마디 한마디에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중국어가 쉬운가? 여행 오기 전 한달 간 배웠다는 데 한달 배운 솜씨가 아닌 걸. 나는 영어 때문에 평생 고생하며 사는 데...쩝쩝...

 

차에서 내리자 동네 아줌마 둘이 따라 붙는다. 날염으로 유명한 동네이니 만큼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 지 이미 눈치 채인 상태라 그냥 따라가 본다. 동네 어귀로 가는 도중 결혼식 행렬을 목격,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진짜 구경거리 제대로 걸렸네. 잔뜩 치장한 신부의 새촘한 표정으로 보아 뭔가 못마땅한 데 짓궂은 친구들에 둘러싸인 신랑은 연신 싱글벙글하다. 결혼식 전 함 받는 우리네 풍속과 많이 닮아있다. 각종 패물을 접시에 담아 진지하게 받쳐 들고 가는 들러리, 장정 여럿이서 나란히 들고 가는 세 개의 궤와 그 위에 얹힌 화려한 이부자리, 신부의 목에 걸린 분홍색 플라스틱 손거울. 우리는 아쉬움을 남기고 가던 길을 계속 간다. 날염 공장에 도착. 본격적인 흥정에 들어가는데 굉장히 유쾌하다. 깎는 쪽이나 부르는 쪽이나 반 쯤 흥에 겨워있다. 내 이런 흥정은 또 처음일세. 크기별로 날염 천 네 개를 산다.

 

동네를 기웃거리다가 대문이 열려 있는 어떤 집에 조심스레 들어가 구경해도 좋은 지 물어보니 기꺼이 허락한다. 한가운데 마당을 두고 사방에 2층 구조로 된 여러 개의 집이 붙어있다. 우리식으로 하면 다가구 주택 쯤 되나? 양지 바른 곳에서는 모녀가 손톱을 깎고 있는데 경계의 빛이 완연하다. 입성으로 보아 형편이 어려워 보인다. 한편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아낙네가 웃음으로 우리를 환영하며 방 구경을 허락한다. 겉으로 보기보다 내부는 정갈하게 꾸며져 있다. 커다란 결혼식 사진이 벽에 걸려있고 다른 방엔 작은 신전과 소원을 담은 족자들이 벽에 나란히 걸려있다. 그 중의 하나에는 커다란 글씨체로 “財”라고 적혀있다. 좀 징그럽다. 우리 네 명 손에 각각 하나씩 들려있는 카메라도 징그럽긴 매한가지겠지만. 한바탕 사진 찍는다고 법석부리고 주소 적느냐고 법석부리고 있는 데 아까의 그 모녀는 어느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왠지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따리2.

여행 준비 차 여기저기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가 우연히 코리아나 게스트 사장님이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 <따리사랑>의 100번째 가입히트 이벤트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따리에서는 큰 대접을 받게 되었다. 내 생전 그런 행운은 처음인지라 고맙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지만 몹시 어색하기도 했다. 대접 받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기도 했다. 환영의 꽃바구니를 시작으로 잠자리와 먹는 것, 각종 입장료와 차량지원을 받았고 따리의 특산물도 기념 선물로 받았으니 가히 초호화 여행을 한 셈이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틀 째 되는 날 밤에는 현지인인 백족의 저녁식사 초대에 우리를 불러주어 재미있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전속 마부로 일하는 백족 아저씨(38살)가 둘 째 딸의 생일이라고 돼지를 잡았다는 데 마치 동네잔치 같다. 좁은 방안에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부 부부, 마부 남동생, 마부의 큰 딸, 제임스 사장님, 우리 세 식구 이렇게 둘러 앉아 그네들의 전통 음식을 맛보고 전통주도 마셨다. 음식은 한 상 그득했는데 그 중 고수(향채)를 듬뿍 넣은 야채가 특히 내 입에 맞았고 우리의 김치처럼 먹는다는 이름모를 전통 요리도 길들이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53도의 전통 술. 쿤밍에서 첫 날 수면제로 마셨던 양주 한 모금에 무지 고생했던 나는 한 잔으로 만족해야했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도전해보리.

 

갑자기 화장실을 찾는 딸아이를 안내한 곳은 마구간 앞. 말이 지켜보는 가운데 땅바닥에 오줌을 누는 딸아이는 마냥 즐거워한다. 평소 간이 화장실보다 밭두둑에 땅을 파고 일을 보는 걸 더 즐겨하는 아이에게는 또 하나의 추억 거리가 되겠지.

 

그런데 빈손으로 온 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 가방을 열어도 기념품으로 줄 만한 게 없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말을 태우기 위해 우리를 데리러 온 마부의 아내에게 지난여름 공항에서 샀던 썬로션과 담배 두 갑을 건네었다. 우리의 고마움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덕분에 이후 리지앙의 옥룡설산에서 자외선 세례를 맨 얼굴로 받아야 했지만.

 

6. 리지앙을 떠나기 전 날. 그동안 며칠을 함께 했던 한중 커플이 쿤밍으로 돌아간다기에 배웅할 겸 버스표도 미리 예매할 겸 따라 나선다. 그동안 정이 들었나보다. 헤어져 돌아오는 데 마음 한 구석이 짠하다. 중국 여학생에게 한국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보면 볼수록 귀여운 아가씨다. 다시 만나면 무지 반가울 것 같다.

 

이제는 쿤밍으로 돌아가 다시 인천으로 가야한다. 여행의 종반부다. 마지막을 야간 침대 버스로 장식하기 위해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버스에 오른다. 뭐니 뭐니 해도 여행의 백미는 야간이동 특히 버스이동으로, 나는 첫 인도 여행 이후 야간버스이동을 무지 좋아하게 되었다. 비록 담배 연기가 시도 때도 없이 코를 자극하고 과일 껍질과 쓰레기로 바닥이 지저분해도 일단 침대에 누워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면 달콤한 잠에 빠져든다. 그것도 깊은 잠이다.

 

열흘 남짓 여행. 윈난은 완료형의 여행지가 아니라 두고두고 와야 할 곳으로 미련이 남는 곳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나는 서서히 윈난의 또 하나의 소수민족인 여행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2006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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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우한테 미안합니다 높새바람 15
이경화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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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적으로 생각하면 잘 나가는 아이인 장건우나 그 반대의 미진, 소영이를 그들의 환경이나 배경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작가의 말대로 "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뿐인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 여기고,~ 맑은 밤하늘에 빛나는 아름다운 별들" 로 생각해야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껴안아야한다. 그게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세상을 살만 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 그거 다 안다. 

모처럼 재밌고 감동적으로 이 책을 읽었다. 더불어 이 책을 발간한 출판사의 이름을 눈여겨 보았다. 일단 믿음이 갔다. 뒷날개의 도서 목록에도 눈길이 가게 되는 것도 그 감동의 연장이리라.

그런데 이 리뷰를 쓰게 되면서 나는 장건우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엔 장건우 보다 미진, 소영이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장건우에게는 책의 반을 할애하고 나머지를 미진이와 소영이의 얘기를 함께 묶어 넣은 것, 이것이 마음에 안든다. 잘 나가는 장건우에게는  모처럼의 역지사지 경험이 될 법도 한데, 그렇게 억울해할 일도 아닌데(생각에 따라서), 오히려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도 있는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는데 작가는 어디까지나 장건우를 옹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건우가 김진숙선생님을 만나 일이 꼬이게 된 것은 어쩌다 운이 나뿐 것일 뿐, 그의 잘나가는 인생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좋은 세상을 만난 미진이나 소영에게는 어쩌다 운이 좋은 것일 뿐,  그들의 앞날은 그리 밝지 못하다는 것을 과연 우리가 모를까? 어쩌다 모처럼 사람 대접 받는 미진과 소영이, 이 김진숙선생님이 힘이 되어 그들의 어려움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면,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해진다.

이 책이 얘기하고 있는 교과서적인 분위기, 그 삶을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내 나름대로의 "마음의 규칙" 을 세우고 살아가는 나로서는 차라리 세상에서 이름 불려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누군가를 껴안고싶어진다. 비록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관심과 역차별이 되고 어쩌다 만나는 운이 나뿐 경우가 되겠지만, 이름을 한 번 불린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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