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서평단 알림
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알라딘 서평단 도서입니다)

   이 청소년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작년에 내가 담임을 맡았던 한 아이를 계속 떠올렸다. 입학식 날부터 주먹을 휘둘러서 나를 적잖이 긴장시키더니 일년 내내 그 주먹으로 여러 사건을 만들어내어 담임으로서 선생으로서의 내 무능을 일깨워 주었던 녀석. 그 녀석한테 맞고도 담임인 내게 말을 할 수 없었던 아이들. 보복이 두렵고 담임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이 감도는 학급의 묘한 분위기. 설득도 훈계도 징계마저도 전혀 소용에 닿지 않는 상황.

 

 

그럴 즈음 미국의 교육 전문가 루비 페인 박사의 기사를 읽었다. (2007.6.12 한겨레신문)


대부분 중산층 출신인 교사들은 빈곤층 학생들의 의지부족․능력부족․태도불량 등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속수무책을 하소연한다. 그러나 페인은 이것 역시 ‘계급적 특성’의 일종으로 교사들은 가령 저소득층 학생들이 싸움을 일삼는 것은 싸움이 그들에겐 중요한 생존기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싸움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교사의 역할은 이들에게 ‘빈곤층을 벗어나 중산층이 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화이트칼라 직업을 얻고 싶으면△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언어 습관을 익히고 △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버리는 등의 습관을 익히도록 교육하라는 얘기다.


얘기는 그럴 듯한데 이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싶었다. 아이의 눈빛에서 희망을 읽어 내고 싶은데 소통 두절 상태에 빠진다. 서로 마음을 열지 못한다. 온갖 타이름과 훈화, 조언, 설득은 일방적인 지시 내지는 잔소리의 영역에 머무를 따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 아이들이 과연 ‘빈곤층을 벗어나 중산층이 되고 싶’어할까?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화이트칼라 직업을 얻고 싶’어할까? 학교 시스템에서는 이 아이들을 자극시키거나 성적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지 못한다. 성적에 관심이 있다면 그 정도로 막 나가지는 못한다. 아, 이 무능함과 막막함이라니......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장애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완득이. 새롭고 재미있는 캐릭터인 담임이자 사회 선생인, 똥주. 이들을 둘러싼 우리의 보잘것없고 서러운 이웃들. 우선 재미있고 유쾌하다. 잘 읽힌다.

   그러나 이런 점은 너무 쉽고 안일하게 처리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 몇 군데 있다.

먼저 똥주는 교회에 다닌다. 똥주를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완득이는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교회를 찾았고, 좋아하는 운동을 하기 위해 체육관을 찾았다. 내 몸을 언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내 몸을 잘 움직여줄 수 있는 체육관을 찾았다.’고 말한다. 체육관이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 허나 싫어하는 사람을 죽여 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가는 교회라도 교회에 나갈 정도라면 희망을 품은 아이다. 그러나 현실의 주먹짱은, 내가 알고 있는 주먹짱은 절대 이런 생각하지 않는다.

   똥주 선생. 외국인 근로자의 인간적인 대접을 위해 교회 건물을 사들여 운영하고 생활은 옥탑방에서 한다는 설정. 이게 정말 가능한 이야기인가. 악덕 기업주인 아버지의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나 속죄라고 보기도 그렇고, 희생정신이 투철한 천사표로 단정하기에는 그 인물됨의 깊이가 부족해 보인다. 또 교회건물을 댄스 교습소로 전환한다는 것도 이야기이니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정윤하. 완득이의 여자 친구. 야한 만화 사건으로 범생이였던 남자 친구가 전학 간다는 부분. 정윤하의 부모가 어떻게 작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즈음 이런 일로 전학을 간다는 설정은 정말 설득력이 약하다. 이보다 훨씬 약발이 센 사건에도 아이들은 웬만해서는 그냥 버텨낸다. 아이들이 웃을 일이다.

   그러나 이런 비현실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유쾌하게 통통 튕기는 듯한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밝고 희망적이어서 좋다. 소설 속에서나마 그래도 인간의 착한 구석을 드러내주어 이 팍팍하고 재미없는 세상을 위로해 주어야하지 않을까. 비록 그것이 한낱 이야기일지라도. 비현실적인 설정에 비해 너무 앞서가거나 오버하지 않는 잔잔한 마무리는 작가의 숨고르기와 피로 같은 것이 느껴지고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지만 글쎄 이 주인공들의 삶에 어떤 다른 대안이 있을까 싶다.

   책을 덮으며 풀리지 않는 현실적인 고민을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의 주먹짱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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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나무 2008-04-27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읽고, 주제넘게 몇 자 남깁니다. 역시 현실과 소설에는 괴리가 있지요? 저도 며칠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그래도 이만한 책이 없는 것 같기는 해요. 그래도 현실에 발 디디고 있는 희망이라서 그런지.. 선생님의 주먹짱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네요. 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한다는 의미라서, 힘들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한 것 같아요. 잘 이겨내시기를 기도합니다.
 

 

5. 콜카타와 마지막 춤을

   정확히 오후 8시 실리구리를 출발한 야간 에어컨 디럭스 버스. 로얄이라는 수식어도 붙어 있었지, 아마. 그간 인도에서 타 본 모든 차량을 통틀어 제일 그럴싸해 보이는 버스다. 물론 우리나라의 우등 고속버스나 공항 리무진 버스 보다야 못하고 시외버스 수준에 고급스러운 좌석 시트가 보태진 정도지만 인도에서는 만나기 쉬운 버스가 아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서. 가격도 상당한 편이다. 다즐링의 숙소가 하루에 600Rs였는데 이 버스 요금은 일인당 800Rs나 된다. 물론 얼마간의 여행사 수수료가 포함된 가격이지만. 겨우 몸을 회복한 남편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한번쯤 타보고도 싶었다. 여행 막바지가 가까워오니 움켜잡았던 주머니도 여유가 생긴 탓이다. 그러잖아도 이번 여행은 내게 어떤 의미에서 실험적인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그간 여행 때마다 갖고 다니던 수동 겸용 카메라를 과감하게 버리고 온 것(따라서 사진도 찍지 않았다), 평소 쓰지도 않는 가계부를 여행 때는 꼬박꼬박 기록했는데 그것도 하지 않는 것, 여행의 흔적들인 각종 팸플릿, 영수증 따위를 모으지 않는 것, 아, 이 해방감이라니!

   남편도 기력을 회복하고 딸아이도 옆에서 재잘거리고, 마지막 행선지인 콜카타로 가는 버스는 최고급이고, 세상의 무게를 모두 덜어낸 양, 자못 뿌듯한 기분으로 우쭐거렸지만 그 달콤함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 비싼 에어컨 버스는 그 이름에 걸맞게 밤새 에어컨을 절대로 끄지 않는 것이 아닌가. 좌석마다 있는 두꺼운 담요를 틈새를 보일 새라 여기저기 꼼꼼히 여며가며 뒤집어쓰고 입고 간 고어텍스 쟈켓의 후드까지 끈을 조여 가며 썼는데도 한겨울의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는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4시간을 그렇게 달렸다. 가히 최악의 밤이었다고나 할까.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누구 하나 에어컨을 줄여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말로만 듣던 악명 높은 에어컨 버스가 바로 이것이구먼, 그래 이것도 경험이지. 여긴 인도니까.

   

   콜카타에선 순데르반스 국립공원과 샨티니케탄을 일정에 꼭 넣을 작정이었다.

다른 곳은 별 의미가 없어보여서 고려하지도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곳들에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되었다. 둘레가 450m에 이르고 4,500여 평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단 한 그루의 나무, 반얀트리. 뻗어 내린 줄기가 뿌리가 되어 퍼져 나가서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축소판 인도 같다. 가난한 인도 서민의 삶은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밥을 먹고, 몸을 씻고, 대소변을 보고, 이웃과 만나고, 아이들을 돌보고, 돈을 버는 일 들이 모두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 드넓은 땅덩어리에서 제 몸 하나 편안히 머물 곳 없는 부지기수의 사람들은 제각각 뿌리를 땅에 내리고 줄기로 서기위해 아등바등하는 나무와 같다. 그러나 숲을 이룬 나무는 그늘을 만들며 누군가의 쉼터가 되어 주지만 이 길 위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거대한 그늘에 가려 하루하루 힘겹게 삶을 영위해 갈 뿐이다.

   네타지(Netaji)라는 인도 독립의 영웅 기념관도 갔었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수바스 찬드라 보세(Subhas Chandra Bose). 네타지로 불리는 이 유명한 영웅의 기념관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며, 알았다한들 구태여 찾아 갔으리요. 당일짜리 시티투어에 참가한 덕분에 애국심 고취시키기로 작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우리도 하루짜리 인도 국민이 된 것이었다. 벵골 지방의 독립 운동사를 전시 설명한 시청사 건물에서는 시뮬레이션으로 구성된 시위 대열에도 참여하여 만세를 부르짖기도 했다.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인간 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암베르카드 선생이 나와 같은 무색무취의 호사가들을 보면 어떤 말을 할까?




   암베르카드: 간디 선생님, 저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

   간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암베르카드의 말을 끊는다) 조국이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박사님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애국자이십니다.

   암베르카드: 선생님은 저에게 조국이 있다고 하십니다만,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에게는 조국이 없습니다.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 마실 물도 얻어먹을 수 없는 이 땅을 어떻게 저의 조국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나라의 종교가 어떻게 저의 종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눈꼽만한 자부심이라도 갖고 있는 불가촉천민이라면 결코 이 땅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이 우리에게 가하는 불의와 고통은 너무나 엄청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이 나라에 불충한 생각을 품더라도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이 나라에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베르카드-인도 불가촉천민 해방자․현대 인도불교의 중흥자>by 디완 챤드 아히르 지음, 이명권 옮김. 에피스테메 출판)




   마지막 날 콜카타에서 다시 심한 장염에 걸린 남편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앓고 나서야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14년 전 첫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인도 신화나 역사에 빠져들었고 그 쪽 분야의 책을 읽어 나갔는데, 이번 여행이 첫 인도 여행이었던 남편은 <암베르카드>라는 책을 먼저 손에 집어 들기 시작했다. 다시는 인도에 가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그나저나 나는 다시 가야 되는데, 어쩌나?




“ 이 책을 250Rs에 주신다면 저는 다시 인도에 올게요.”

“ 몇 번이나 인도에 왔었나요?”

“ 이번이 네번 째 인데요.”

“ 좋아요. 가져가요.”

우다이푸르 한 서점에서 <DK Eyewitness Travel Guides- INDIA>라는 중고책을 흥정하면서 늙수레한 서점 주인과 주고받은 약속 아닌 약속이 있는데, 어쩌나?

                                        

                                                        2008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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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즐링에서 보낸 한 철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은 도시, 보드가야. 이 성스러운 곳을 두 번이나 왔으니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으며 나는 분명 복 받은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꾸 14년 전과 비교를 하게 되니 흥이 절감되고 또 다시 아그라처럼 회고적이 되려고 한다. 솔직히 이곳도 남편과 딸아이에게 불교의 최대 성지를 보여주려는 의무감 내지는 사명감으로... 나는 이번 여행의 우리 가족 가이드니까.

   보드가야에서 다즐링으로 가는 길은 한국에서 인도 가는 길 보다 훨씬 길고 어렵고 모험적이다. 보드가야의 우리가 묵은 숙소 옆 투어리스트 콤플렉스에서 기차표를 예매하는데 멀리 떨어진 가야에 있는 기차역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처음엔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그런데, 일이 술술 풀린다 싶었더니 기차표 예매부터 쉽지 않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파트나까지는 기차 편이 들어맞는데 다즐링의 대문 격인 뉴잘패구리까지는 기차가 늘 만원이라며 우리가 원하는 차편의 표를 팔 수 없다고 한다. 책으로 나온 기차시간표를 구입하면 편리하다는 배낭 여행자들의 충고를 대충 흘려듣고 ‘겨우 한 달도 안되는 여행에 무슨 시간표‘ 했더니 살짝 후회가 되기도 하는데, 하여튼 물어물어 기차표를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딱 거기까지였으니.

   가야 1월 29일 13: 50 출발 --- 파트나 같은 날 16:00 도착

   파트나 같은 날 22:55 출발 --- 뉴잘패구리 1월30일 13:10 도착

   뉴잘패구리에서 지프 합승 ---- 다즐링 3~4시간 주행 끝에 도착

29일 오전부터 서둘러 오토 릭샤를 타고 가야역으로 가서 한참을 기다리고, 파트나에서 기차를 갈아탈 때까지 7여 시간을 할 일 없이 기다려야하고, 다음 날 도착한 뉴잘패구리에서 우리만을 기다린 듯한 지프에 합승하고도 한참을 기다리고, 잘 달리다가 점심 먹는다고 중간에 지프를 세운 운전기사 한참 늑장 부리고, 산간 지역이라 길이 외길이고 바로 옆으로는 협궤 열차가 지나가느라고 또 한참 지체하고, 겨우 당도하니 벌써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꼬박 이틀 걸린 셈이다.

   파트나. 7여 시간을 할 일 없이 보내야했던 곳. 이곳의 파트나 박물관은 유명해서 일부러 이곳만 보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곳이라기에 내리자마자 서둘렀다. cloak room에 배낭을 맡기는 데 또 한참이 걸린다. 24시간 업무를 보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교통의 중심지는 중심지인가보다. 멀미를 느낄 정도로 겹겹이 둘러싼 인파를 헤쳐 가며 서로 자기 것을 타라고 에워쌓는 사이클릭샤의 무리를 현명(?)하게 제압하고 박물관에 당도하니 오후5시가 되어간다. 폐관시간은 오후 4시 30분. 정문은 이미 반쯤 닫힌 상태. 최대한의 미소와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정을 해본다. 이곳이 유명하다하여 한국에서 일부러 왔노라고. 내 미소에 화답하듯 최대한의 친절한 표정으로 되돌아 온 답변은, No! 에고, 밤 11시까지 어쩐다?

   파트나 역 집중 탐색에 들어가니 의외로 한가하게 쉴 곳도 있고 그럭저럭 있을 만한데 도대체 할 일이 없다. 역사에 딸린 식당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가며 저녁을 먹어도, 도착과 출발을 안내해주는 전광판에서 우리가 탈 기차를 혹시 놓칠세라 시시각각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딸아이는 지치지도 않는 지 이미 서너 번이나 읽은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또 손에 들고 있고 남편은 새로운 가이드북이라도 쓸 요량인지 가이드북 탐구에 빠져보지만 이 널브러진 시간 앞에서는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일 뿐, 제 풀에 지쳐버린 우리는 이내 오고 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본다. 밤 10시가 되어가도 줄어들지 않는 대단한 인파. 10억이 넘는다는 인도 인구를 새삼 눈으로 확인한 듯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잠시 어리벙벙한 기분이 되어 전자계산기를 두드려본다. 남한의 33배라는 인도의 인구가 10억이라면 인구밀도 면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일까? 4800만명×33=158400. 우엑! 15억이 넘는 곳에서 우리도 아귀같이 살고 있구나! 자국의 국력을 위해서 인구 감소를 염려하고 인구 증가를 꾀하는 정책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나? 인구 문제는 ‘전 지구적 크기의 사고’로 생각해야 할 인류 과제가 아닐까, 하는 감당 못할 걱정까지 한 곳이 바로 이 파트나이다.

   드디어 다즐링. 그동안 인도에 와서 하루도 편하게 발 뻗고 자 본 적이 없었던 우리, 특히 남편이 고심 고심한 끝에 ‘벨레뷰 호텔(Bellevue Hotel)’을 골랐다. 체구가 작다는 것은 여행할 때 만큼은 축복이다. 비행기 이코노미석 자리도 절대로 좁지 않으며 형편없이 좁은 로컬 버스나 지프도 전혀 불편하지 않으며, 아직은 어린 딸아이와 싱글 침대를 함께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축복 때문에 늘 가운데에 껴서 자는 딸아이는 침대 사이 빈 틈에 몸의 일부가 끼기가 다반사고, 두 여자들 먼저 배려해주는 남편은 제일 좋은 이불이나 담요 등을 양보하기가 일쑤이다 보니 늘 새우처럼 움츠리고 잠에 든다. 북인도의 겨울 날씨는 만만한 게 아니어서 밤에 잘 때는 내복이나 침낭이 필요한데 평소 내복의 덕을 보지 않는 남편은 ‘꿈꾸는 나라’에서 거의 매일 밤 추위에 떨면서 잤으니 특히 고도가 높은 다즐링에서 호텔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다 할 수밖에. 

   특히 다즐링에서의 호텔은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한 때 달라이 라마와 함께 일을 했었다는 티베트인 주인장은 지금까지 만난 어떤 호텔 주인보다도 친절하였다. 매일 밤 뜨거운 물을 넣은 핫팩을 방에 넣어주는 배려 덕분에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졌다. 방에는 난로가 있어서 110루피를 내면 10kg의 나무를 사서 불을 지필 수가 있는데 매일 저녁 난로 옆에 앉아서 불을 쬐는 맛은 여행 중 단연 최고의 낭만이었다. 14살 먹은 일하는 남자 아이가 불을 지펴주러 오는데 말끝에 붙이는 ...., Sir. 가 그렇게 예쁘고 살가울 수가 없다. 어느 때는 이 소년이 안쓰러워 그냥 돌려보내놓고 남편이 불을 붙이는 데 생각 만큼 잘 되지 않아서 종이란 종이는 모두 난로 속 불쏘시개로 쓰였는데 쇼핑 봉투, 약봉투, 각종 영수증, 하다못해 여행용 티슈까지 나중에는 떨어져나간 가이드북 겉장까지도 희생양이 되었다. 딸아이의 원망까지 들어가며 히말라야 등산학교, 동물원에서 받아온 팸플릿도 그렇게 제 수명을 다했으니, 낭만이란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법인가.

   이 난로 불붙이기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겪었던 여러 어려움 중의 상징 같은 것이었으니...

-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는 토이 트레인을 타려고 몇 번이나 다즐링 역으로 달려가서 표를 알아보았지만 끝내 타 보지 못했다. 그림의 떡 같은 토이 트레인, 표 구경조차 못하다.

- 이틀 째. 콜카타 행 기차표를 예매하기위해 다즐링역으로 가서 기다란 줄 끝에 섰다.  문도 없는 역사는 산바람이 지나가는 길이라도 되는지 몇 겹을 껴입었는데도 춥다. 정전으로 예매 중단 사태. 두 시간을 추위와 싸워가며 전기가 들어오길 기다린 끝에 직원이 하는 말, “내일 아침에 오세요.”

- 이틀 째 오후. 히말라야 등산학교가 있는 동물원을 허위허위 찾아갔더니 입장불가. 매주 목요일이 쉬는 날인데 이날이 목요일이다.

- 다음 날. 아침 7시. 전날 밤 위스키를 마시고 잔 남편의 상태가 최악이다. 그래도 행동은 함께 하자고 따라나선 남편. 역에 도착하니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8시 업무 시작인데 사람들이 미리들 나와 있다. 드디어 내 차례. 전날 써 놓은 예약 종이를 내미니 대기표도 끊어줄 수가 없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버스 타고 가란다.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이 먼저 들어가 쉬겠다기에 시계를 달라고 했더니 신음처럼 한마디 한다. “손목을 끊어.” 남편은 이날 저물 무렵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 환전하기. 여행지 마다 두 집 건너 하나 있는 게 환전소인데 여기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은행에서 하자. 세 군데의 은행에 가본다. 환율이 좋고 제일 가까운 데 있는 은행엔 세 번이나 가고 은행 매니저까지 만나 문의한다. 나중에 맨 마지막으로 가 본 은행에서야 이유를 알다. 전산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환전이 불가능하단다. 옷가게를 겸한 사설 환전소를 찾아 갔더니 친절하긴 한데 환율 최악에 수수료는 최고다. 울며 겨자 먹기란 이런 거겠지.

- 타이거 힐에서 보는 일출 감상이 최고라는데 연신 안개로 자욱하다. 아침마다 옥상에 올라가서 날씨를 살핀 남편의 의견대로 이곳은 포기. 이곳을 다녀온 벨기에 청년-다즐링 들어올 때 지프를 합승했었다. 인도에 온지 5개월 반이 되었다한다.- 말이 온통 구름이었노라고 한다. 안가길 잘 한 건데 이래저래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렇게 열거하고 보니 다즐링에서 보낸 날들이 참으로 쓸쓸해 보이겠지만 이곳은 절대 오지가 아니고 두메산골이 아니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대형 마트를 만날 수 있어서 정찰 가격으로 쇼핑할 수 있었으며 우리의 CGV같은 영화관도 있어서 영화도 즐길 수 있었다. 다즐링차로 유명한 곳이라 우아한 찻집에서 귀에 익은 음악을 들으며 제대로 된 얼그레이 홍차도 마실 수 있었다. 관광 중심지인 초우라스타 광장 주변에 있는 호텔이나 식당, 상점들은 상당히 서구화 되어있어 인도의 다른 곳 보다 깨끗하고 친절하여 오히려 인도 분위기(?)가 제일 덜한 곳이었다. 그러나 해발 2,200여 미터 위에 자리 잡은 산악 도시인 이곳의 실제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척박하고 다른 인구 많은 도시와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급수차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물 문제나 하수 문제도 쉬운 일이 아니겠고 중심지인 초우라스타 주변을 벗어나 현지인들이 사는 곳을 보면 역시 수많은 인구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다즐링에서 즐겼던 위와 같은 전형적인 도시 문화, 이를테면 쇼핑, 영화 감상, 레스토랑 순례 같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곳은 참으로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탈바꿈된다. 타이거 힐이 생략되었기 때문일까? 호텔에서 심부름 하던 14살짜리 소년의 해맑은 미소 때문일까? 우리 내외는 이 소년을 볼 때 마다 이 소년의 미래를 걱정해주곤 했었다. 그 소년은 혼자서 노래 부르기를 즐겼으며 사람의 심금을 움직이는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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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의 바라나시, 너의 바라나시

   몇 번의 여행에도 도대체 면역체가 생기지 않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라나시의 릭샤왈라들이다. 바라나시 정션역에서 부터 따라붙은 두 명의 릭샤왈라들에게 끌려 다니다시피 몇 개의 호텔과 게스트 하우스를 자의 반 타의 반 둘러보는 일은 악마의 유혹에 끌려 다니는 것이 이럴까 싶게 끔찍하고 치가 떨리는 일이다.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해보고 싶거든, 사는 게 너무 따분하고 시시하게 여겨지거든 한 번 바라나시의 릭샤왈라들과 대결해 보시기를 권한다. 그악하기 그지없는 세계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아귀다툼으로 살아들 가겠지만, 그래서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이성적인 납득이야 가지만, 한 번 부딪혀보시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0여 년을 이어온 고대 도시의 모습을 이번 여행에서야 어느 정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지난 두 번의 방문은 여행사의 단체배낭프로그램에 합류해서 왔었기 때문에 우선 숙소부터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떨어졌었다. 이곳에서 종종 발생하는 불미스런 일 때문에 지금도 긴장을 풀 수 없는 곳이긴 하지만 예전과는 분명 다른 점을 내 경험해보리, 다짐을 하며 갠지스강변에 있는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끈질긴 릭샤왈라들에게 몇 군데 끌려 다닌 후 윽박질러서 겨우 내 뜻으로 찾아간 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구미코하우스’라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곳에는 인도 악기를 배우는 여행자들이 거의 상주하고 있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없는 내가 새삼 무슨 악기를 배우겠는가? 주로 도미토리로 운영되는 이곳에서 하루 이틀 묵으며 음악에 몰입한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저 인도 음악에 젖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개별 배낭 여행자들(특히 일본인)에게 인기 있는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려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달랑 침대 두 개와 바닥에 깔고 자는 매트리스 몇 개가 남았을 뿐이었다. 침구 상태도 엉망이었다. 비좁은 것은 시커멓게 때에 쩐 것에 비하면 흠도 아니었다. 아그라행 야간 침대 버스의 매트리스가 더 좋았다고나할까. 아, 그래도 좋다. 젊은 애들이 넘보기 전에 얼른 ok를 하고는 남편과 딸아이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방을 보여주었더니, 아, 이 원망의 눈초리!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로비로 쓰이는 방 한가운데서는 old lady 어쩌구 하는 그네들의 소리도 들려온다. 나를 두고 한 얘긴가? 포기다.

   강변에 위치한 호텔 중 제일 깨끗해 보이는 호텔(‘시타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가 제일 전망 좋은 방을 얻는다. 양 면에 창문이 달려있어 창을 열면 그대로 갠지스강이고 쪽문을 열고 나가면 그대로 발코니여서 가트(강변을 따라 형성된 계단)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갠지스 일출을 방안에서 볼 수 있다니 이 웬 호사이랴, 후훗. 호텔에 딸린 식당에서의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지나고 보면 귀여운 일이고...첫날 밤 9시 무렵, 술이나 한 잔 할까하고 어렵게 구한 술을 들고 가서 안주삼아 계란 프라이를 시켰더니 늦은 밤인데도 귀찮아하지 않고 one side or two side..하며 열심히 주문을 받기에 좀 미안한 감이 들기도 하여 마음 좋은 남편은 그 중 나이 먹은 직원에게 인심 좋게 술도 권했다. 얼마 후 내 온 계란 프라이. 삶은 달걀을 종으로 반을 잘라 살짝 기름을 두른 희한한 모양새인데 언제 삶아놓은 달걀인지조차 의심스럽고, 헛헛헛, 헛웃음이 나오는 데 이 녀석들 낄낄거리면서 이게 인디안 스타일이라는 거다. 다음 날 주인장한테 있었던 일을 그대로 얘기했더니 미안해하면서 그래도 자기네 식당을 이용해 달라기에, 난 당신네 직원들 싫어서 이용하지 않을 거다, 라고 했더니 남편은 뭐 그런 얘기까지 하느냐고 한다. 마지막 날 체크 아웃할 때, 술을 한 잔 얻어 마셨던 그 직원이 사과를 해온다. 농담이었노라고. ‘너희는 손님한테 농담을 그런 식으로 하냐?’고 싶었지만 “한국에 가면 우리 호텔 홍보 좀 많이 해 주세요” 하며 미안해하고 아쉬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정말 진지하게.




   핵심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내가 생각한 바라나시의 핵심은 화장터도 아니고 힌두교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강물도 아니다. 바로 수백 년 간 이어져온 골목길이다. 예전에 왔었을 때는 한낮에도 혼을 빼놓을 정도로 비좁고 더럽고 으스스하던 미로 같던 골목들, 한 번 미궁에 빠지면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던 그 골목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고 사람도 눈에 들어온다. 난데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 자신감을 바탕삼아 마지막 날 밤에는 전통 공연장을 찾아갔다. ‘International Music Centre Ashram'. 세계적인 여행 안내서인 <Lonely Planet>에는 소개가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여행자들 대부분이 들고 다니는 <인도100배>에는 소개가 되지 않아서인지 수십 명의 관객 중에 한국인이라고는 우리뿐이다. 골목에 있는 작은 악기점에서도 악기를 배우고 있는 한국인들이 종종 눈에 띄건만 이 동네에서는 너무 흔한 공연이어선 지도 모르겠다.

   100줄이 넘는 현으로 이루어진 산뚜르(Santoor), 몸체가 나무로 된 오른쪽 북 다얀(dayan)과 금속으로 된 왼쪽 드럼 바얀(bayan)으로 구성된 타블라. 생소한 산뚜르가 내는 지루하고 졸린 듯한 연주도 타블라 주자의 빠른 손놀림과 왼쪽 드럼에다 손바닥을 북북 문지르는 야릇한 음색이 더해지면 묘한 음악적인 분위기에 빠져든다. 1부가 끝나고 시작된 2부는 카탁(Kathak) 댄스로 주로 북인도의 궁정에서 공연되었다는 전통 춤이다. 춤을 추는 무희는 10대 중반의 소녀로 딸아이 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인다. 어쩌다 한국에서 보았던 연륜 있는 춤꾼에 비해 춤사위가 날렵하고 경쾌하고 분명하다. 타블라 주자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공연이 잠시 펼쳐진다. 예를 들어 타블라 주자가 10박자의 리듬을 연주하면 무희는 그 10박자에 대응하는 춤사위를 발로 두드리는 식이다. 타블라와 겨루는 발 춤사위가 기가 막히게 흥겹고 얼마나 멋진지 딸아이는 넋 놓고 지켜보다가는 몇 번이나 혀를 내두른다. 놀랍다는 표정이다. 2시간 남짓 공연을 보고 나니 밤 10시,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오며 딸아이가 던지는 한마디가 나를 고무시킨다. “나도 타블라 한 번 배우고 싶어.” 7살에 시작한 피아노를 단 2개월 만에 “피아노 계속하면 나,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아.”하면서 손을 놓고 말았었다. 왼손잡이인 딸아이에게는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음악의 아름다움에 젖어 보기도 전에 기능부터 익히도록 하여 음악을 멀리하게 만든 결과가 되어 버렸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바라나시 시장에서 인도 옷 한 벌을 사는 데 한마디의 영어도 필요하지 않았다면 믿어지려나. 호객 행위부터 흥정까지 우리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잘 구사하는 인도인 옷가게에서 옷 한 벌을 사들고 나오면 이상한 성취감에 빠져든다. 미처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우리말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어디가요?” “릭샤 필요해요?” 걸음을 떼놓기가 무섭게 들이대는 “어디가요?”에 질렸는지 한 번은 딸아이가 묻는다. “우리가 어디 가는지 알아서 뭐해요?”를 영어로 어떻게 하냐고. 영어 문장을 알려 주었더니 열심히 외운다. 한 번도 써먹지 못해 다행이긴 했지만. 해외 여행가서도 영어 대신 우리말을 사용한다면 영어 배워 뭣하지? 이곳 북인도만 해도 지천에 널려 있는 게 한국 식당인데-드물긴 하지만 어느 거리 식당에서는 한국어 메뉴판도 있다- 머잖아 이곳처럼 한국어가 많이 쓰인다면? 죽도록 영어 배워 몇 마디 써 보는 것보다 국력을 길러 외국인들로 하여금 우리말을 배우게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해묵은 해법이 머잖아 가능해지지 않을까? 앵무새식 영어 배우기에 심신이 거덜 난 나는 여기 바라나시에서 잠시 행복한 영어를 꿈꿔본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이따금 딸아이와 남편이 한마디씩 거들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남편은 인도의 현실에 자못 비판적이다. 첫날 델리에서 부터 그랬다. 인간 대접도 못 받는 사람들, 돈 앞에서는 비열할 대로 비열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들, 아귀같이 서로 등쳐먹는 사람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불쌍한 거지들을 보고는 경악했고 인도라는 나라에 오게 된 걸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에게는 ‘인권’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예의’ 라는 표현은 너무나 점잖은 표현이었다. 때로 동정이 지나쳐 화를 낼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냐고, 이런 나라가 그렇게도 좋으냐고도 물어온다. 여기 바라나시에서도 그랬다. 골목 탐험을 완성한 나는 바라나시를 정복한 양 들떠 있는데 남편은 강변에서 본 쓰레기 처리 장면을 끝내 이 이야기에 덧붙여 달란다. 양수기로 강물을 퍼 올려 한군데에 쌓아놓은 온갖 쓰레기를 강물로 밀어 넣던 장면을 꼭 넣어 달라고 한다. 그에게는 거의 다 타서 머리와 다리만 삐죽 남아있는 화장터의 시신이나 강물에서 신성한 목욕을 하는 사람들보다, 이 쓰레기 처리 장면이나 강변을 향해 맨 엉덩이를 내밀며 큰일을 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인도의 현실을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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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꿈꾸는 나라

   아그라. 타지마할. 인도인 입장권 10Rs. 외국인 입장권 750Rs. (1Rs는 약 25원). 샤자한. 뭄타즈 마할. 건축 기간 22년.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한 유폐와 아그라성에서 보낸 권력자의 쓸쓸한 말년. 타지마할 주변의 ‘타즈 간즈’라는 여행자 거리를 접수한 부지기수의 인도판 한국 식당들. 투숙객 대부분이 한국인 천지인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서 새벽 서 너 시에 듣게 되는 정겨운 콩글리쉬 발음.

   이것이 그 유명한, 인도를 상징하고 있는 타지마할에 대한 설명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들이라고 우긴다면 절세의 미인 타지마할은 무척이나 섭섭하겠지?  더욱 섭섭한 얘기지만, 나는 타지마할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것도 타지마할을 제외하면 별달리 볼 것 없는 아그라에서.

   14년 전(1994년)의 첫 인도행은 가슴 떨리는 미지의 이상형과의 불꽃 튀는 만남이었다. 인도는 내가 한국인임을 모른다. 한국이 어느 곳에 있는 지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그래도 나는 인도의 모든 것을 숨 막히게 빨아들였다. 맨발의 사원 입장, 흐드러진 부겐빌리아, 깊은 우물 같은 인도인의 커다란 눈. 현란한 색채의 시크교 터번, 셀 수 없는 무수한 힌두교 신들, 석가모니의 발자취, 끝도 없는 지평선, 길지 않은 형광등 두 개로 이루어진 시골길의 쓸쓸하고도 외로운 가로등...허름한 식당의 조악한 냅킨 한 장, 반 쯤 찢어낸 각종 입장권이나 휘갈겨 쓴 영수증 한 장. 모두가 소중한 기념품이 되어 앨범 속에 곱게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었다.

   7년 전(2001년)의 두 번 째 인도행은 첫사랑의 달콤함을 끝내 못 잊어 찾아 나선 여행이었다. 이제는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준다. 잘 사는 나라에서 왔으니 팁이라도 두둑이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시신이 안치된 진짜 석관과 가짜 석관을 두루 보여 주었던 첫사랑은 간 데 없고 비싼 입장권을 통해서 내가 한낱 이방인임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3년 전(2005년)의 남인도.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그래도 첫사랑이잖아. 네가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찾아내서 내 첫사랑을 다시 확인할거야. 역시 네 품은 다양해. 미안해. 역시 너는 품이 넓어. 다시 시작하자. 그런데 내가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그리 관심 없어하면서 우리나라와 인도의 환율을 궁금해 하던 너. 환율 덕분에 인도에 올 수 있는 우리들을 부러워하던 너.

   2008년. 네 번 째 인도. 내 사랑하는 가족이야. 내가 너를 지켜보았듯 이제는 나의 가족을 지켜봐 줘. 오고 가는 정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너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아,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 몇 번씩이나 와서도 별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국인을 만나면 나눠주리라 하던 소주는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고 길을 잃고 헤맬 때는 지나가는 한국인에게 길을 물어보면 되는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며 옛날을 그리워하면 그건 내 욕심이겠지. 

   우다이푸르가 나를 역사적인 진지함과 숙연함으로 힘들게 하더니 아그라는 나를 철학적으로 고문한다. 노른자 빠진 달걀 프라이 같은 아그라. 남편과 딸아이에게 타지마할을 꼭 보여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16시간 동안 추위와 사투를 벌이면서 밤새 버스로 달려온 내게 이 고갱이 빠진 사색은 너무 한 것 아닌가? 아, 이 침대버스란 놈! 낡은 대로 낡고 먼지 풀풀 나고 모래 버석거리는 매트리스가 압권인 이 녀석! 1층은 좌석이고 다락같은 2층이 침대칸인데 처음 딸아이와 나는 2인실에, 남편은 통로를 사이에 둔 맞은 편 1인실에 각각 배정 받았는데 너무 추워서 우리의 2인실에 남편이 합류하여 셋이 꼭 껴안고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창가에 자리 잡은 남편은 하마터면 동사할 뻔했다. 속옷에 부치는 1회용 1,000원짜리 온찜질팩 덕분에 겨우 눈을 부칠 수 있었다는 남편. 남편은 그날 밤 유물론적인 꿈에 시달렸을까 실존론적인 꿈에 시달렸을까? 여행 내내 어지러운 꿈자리를 호소하던 남편은 인도를 ‘꿈꾸는 나라’라고 불렀다.

   그래도 남편과 딸아이는 이 아그라가 좋단다. 타지마할 때문에? No! 바로 ‘Planet Hollywood'라는 거창한 이름의 아주 작은 식당이 있어서다. 가이드북에는 눈 비비고 찾아도 나와 있지 않은 곳으로 우리가 묵은 ’Hotel Raj'라는 게스트 하우스 바로 앞에 있었다. (아마도) 시크교도인 인상 좋고 과묵한 50대 후반의 주인아저씨의 말없는 환대와 가정식 백반 같은 깔끔한 음식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편안하여 아그라에 머무는 동안 단골 식당으로 드나들다 보니 정이 들었나보다. 이곳에서 먹은 버섯 스프로 입맛을 찾은 딸아이는 이제 완전히 몸이 회복되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하루 정도 묵을 뿐인 아그라에서 우리는 이틀을 묵으면서도 떠나기가 아쉬웠다. 하루 이틀 더 묵으면 식당 안쪽으로 보이는 주인아저씨의 살림집도 구경하고 대화도 좀 나눠보련만,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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