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즐링에서 보낸 한 철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은 도시, 보드가야. 이 성스러운 곳을 두 번이나 왔으니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으며 나는 분명 복 받은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꾸 14년 전과 비교를 하게 되니 흥이 절감되고 또 다시 아그라처럼 회고적이 되려고 한다. 솔직히 이곳도 남편과 딸아이에게 불교의 최대 성지를 보여주려는 의무감 내지는 사명감으로... 나는 이번 여행의 우리 가족 가이드니까.
보드가야에서 다즐링으로 가는 길은 한국에서 인도 가는 길 보다 훨씬 길고 어렵고 모험적이다. 보드가야의 우리가 묵은 숙소 옆 투어리스트 콤플렉스에서 기차표를 예매하는데 멀리 떨어진 가야에 있는 기차역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처음엔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그런데, 일이 술술 풀린다 싶었더니 기차표 예매부터 쉽지 않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파트나까지는 기차 편이 들어맞는데 다즐링의 대문 격인 뉴잘패구리까지는 기차가 늘 만원이라며 우리가 원하는 차편의 표를 팔 수 없다고 한다. 책으로 나온 기차시간표를 구입하면 편리하다는 배낭 여행자들의 충고를 대충 흘려듣고 ‘겨우 한 달도 안되는 여행에 무슨 시간표‘ 했더니 살짝 후회가 되기도 하는데, 하여튼 물어물어 기차표를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딱 거기까지였으니.
가야 1월 29일 13: 50 출발 --- 파트나 같은 날 16:00 도착
파트나 같은 날 22:55 출발 --- 뉴잘패구리 1월30일 13:10 도착
뉴잘패구리에서 지프 합승 ---- 다즐링 3~4시간 주행 끝에 도착
29일 오전부터 서둘러 오토 릭샤를 타고 가야역으로 가서 한참을 기다리고, 파트나에서 기차를 갈아탈 때까지 7여 시간을 할 일 없이 기다려야하고, 다음 날 도착한 뉴잘패구리에서 우리만을 기다린 듯한 지프에 합승하고도 한참을 기다리고, 잘 달리다가 점심 먹는다고 중간에 지프를 세운 운전기사 한참 늑장 부리고, 산간 지역이라 길이 외길이고 바로 옆으로는 협궤 열차가 지나가느라고 또 한참 지체하고, 겨우 당도하니 벌써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꼬박 이틀 걸린 셈이다.
파트나. 7여 시간을 할 일 없이 보내야했던 곳. 이곳의 파트나 박물관은 유명해서 일부러 이곳만 보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곳이라기에 내리자마자 서둘렀다. cloak room에 배낭을 맡기는 데 또 한참이 걸린다. 24시간 업무를 보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교통의 중심지는 중심지인가보다. 멀미를 느낄 정도로 겹겹이 둘러싼 인파를 헤쳐 가며 서로 자기 것을 타라고 에워쌓는 사이클릭샤의 무리를 현명(?)하게 제압하고 박물관에 당도하니 오후5시가 되어간다. 폐관시간은 오후 4시 30분. 정문은 이미 반쯤 닫힌 상태. 최대한의 미소와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정을 해본다. 이곳이 유명하다하여 한국에서 일부러 왔노라고. 내 미소에 화답하듯 최대한의 친절한 표정으로 되돌아 온 답변은, No! 에고, 밤 11시까지 어쩐다?
파트나 역 집중 탐색에 들어가니 의외로 한가하게 쉴 곳도 있고 그럭저럭 있을 만한데 도대체 할 일이 없다. 역사에 딸린 식당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가며 저녁을 먹어도, 도착과 출발을 안내해주는 전광판에서 우리가 탈 기차를 혹시 놓칠세라 시시각각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딸아이는 지치지도 않는 지 이미 서너 번이나 읽은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또 손에 들고 있고 남편은 새로운 가이드북이라도 쓸 요량인지 가이드북 탐구에 빠져보지만 이 널브러진 시간 앞에서는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일 뿐, 제 풀에 지쳐버린 우리는 이내 오고 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본다. 밤 10시가 되어가도 줄어들지 않는 대단한 인파. 10억이 넘는다는 인도 인구를 새삼 눈으로 확인한 듯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잠시 어리벙벙한 기분이 되어 전자계산기를 두드려본다. 남한의 33배라는 인도의 인구가 10억이라면 인구밀도 면에서 우리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일까? 4800만명×33=158400. 우엑! 15억이 넘는 곳에서 우리도 아귀같이 살고 있구나! 자국의 국력을 위해서 인구 감소를 염려하고 인구 증가를 꾀하는 정책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나? 인구 문제는 ‘전 지구적 크기의 사고’로 생각해야 할 인류 과제가 아닐까, 하는 감당 못할 걱정까지 한 곳이 바로 이 파트나이다.
드디어 다즐링. 그동안 인도에 와서 하루도 편하게 발 뻗고 자 본 적이 없었던 우리, 특히 남편이 고심 고심한 끝에 ‘벨레뷰 호텔(Bellevue Hotel)’을 골랐다. 체구가 작다는 것은 여행할 때 만큼은 축복이다. 비행기 이코노미석 자리도 절대로 좁지 않으며 형편없이 좁은 로컬 버스나 지프도 전혀 불편하지 않으며, 아직은 어린 딸아이와 싱글 침대를 함께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축복 때문에 늘 가운데에 껴서 자는 딸아이는 침대 사이 빈 틈에 몸의 일부가 끼기가 다반사고, 두 여자들 먼저 배려해주는 남편은 제일 좋은 이불이나 담요 등을 양보하기가 일쑤이다 보니 늘 새우처럼 움츠리고 잠에 든다. 북인도의 겨울 날씨는 만만한 게 아니어서 밤에 잘 때는 내복이나 침낭이 필요한데 평소 내복의 덕을 보지 않는 남편은 ‘꿈꾸는 나라’에서 거의 매일 밤 추위에 떨면서 잤으니 특히 고도가 높은 다즐링에서 호텔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다 할 수밖에.
특히 다즐링에서의 호텔은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한 때 달라이 라마와 함께 일을 했었다는 티베트인 주인장은 지금까지 만난 어떤 호텔 주인보다도 친절하였다. 매일 밤 뜨거운 물을 넣은 핫팩을 방에 넣어주는 배려 덕분에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졌다. 방에는 난로가 있어서 110루피를 내면 10kg의 나무를 사서 불을 지필 수가 있는데 매일 저녁 난로 옆에 앉아서 불을 쬐는 맛은 여행 중 단연 최고의 낭만이었다. 14살 먹은 일하는 남자 아이가 불을 지펴주러 오는데 말끝에 붙이는 ...., Sir. 가 그렇게 예쁘고 살가울 수가 없다. 어느 때는 이 소년이 안쓰러워 그냥 돌려보내놓고 남편이 불을 붙이는 데 생각 만큼 잘 되지 않아서 종이란 종이는 모두 난로 속 불쏘시개로 쓰였는데 쇼핑 봉투, 약봉투, 각종 영수증, 하다못해 여행용 티슈까지 나중에는 떨어져나간 가이드북 겉장까지도 희생양이 되었다. 딸아이의 원망까지 들어가며 히말라야 등산학교, 동물원에서 받아온 팸플릿도 그렇게 제 수명을 다했으니, 낭만이란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법인가.
이 난로 불붙이기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겪었던 여러 어려움 중의 상징 같은 것이었으니...
-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는 토이 트레인을 타려고 몇 번이나 다즐링 역으로 달려가서 표를 알아보았지만 끝내 타 보지 못했다. 그림의 떡 같은 토이 트레인, 표 구경조차 못하다.
- 이틀 째. 콜카타 행 기차표를 예매하기위해 다즐링역으로 가서 기다란 줄 끝에 섰다. 문도 없는 역사는 산바람이 지나가는 길이라도 되는지 몇 겹을 껴입었는데도 춥다. 정전으로 예매 중단 사태. 두 시간을 추위와 싸워가며 전기가 들어오길 기다린 끝에 직원이 하는 말, “내일 아침에 오세요.”
- 이틀 째 오후. 히말라야 등산학교가 있는 동물원을 허위허위 찾아갔더니 입장불가. 매주 목요일이 쉬는 날인데 이날이 목요일이다.
- 다음 날. 아침 7시. 전날 밤 위스키를 마시고 잔 남편의 상태가 최악이다. 그래도 행동은 함께 하자고 따라나선 남편. 역에 도착하니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8시 업무 시작인데 사람들이 미리들 나와 있다. 드디어 내 차례. 전날 써 놓은 예약 종이를 내미니 대기표도 끊어줄 수가 없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버스 타고 가란다.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이 먼저 들어가 쉬겠다기에 시계를 달라고 했더니 신음처럼 한마디 한다. “손목을 끊어.” 남편은 이날 저물 무렵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 환전하기. 여행지 마다 두 집 건너 하나 있는 게 환전소인데 여기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은행에서 하자. 세 군데의 은행에 가본다. 환율이 좋고 제일 가까운 데 있는 은행엔 세 번이나 가고 은행 매니저까지 만나 문의한다. 나중에 맨 마지막으로 가 본 은행에서야 이유를 알다. 전산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환전이 불가능하단다. 옷가게를 겸한 사설 환전소를 찾아 갔더니 친절하긴 한데 환율 최악에 수수료는 최고다. 울며 겨자 먹기란 이런 거겠지.
- 타이거 힐에서 보는 일출 감상이 최고라는데 연신 안개로 자욱하다. 아침마다 옥상에 올라가서 날씨를 살핀 남편의 의견대로 이곳은 포기. 이곳을 다녀온 벨기에 청년-다즐링 들어올 때 지프를 합승했었다. 인도에 온지 5개월 반이 되었다한다.- 말이 온통 구름이었노라고 한다. 안가길 잘 한 건데 이래저래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렇게 열거하고 보니 다즐링에서 보낸 날들이 참으로 쓸쓸해 보이겠지만 이곳은 절대 오지가 아니고 두메산골이 아니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대형 마트를 만날 수 있어서 정찰 가격으로 쇼핑할 수 있었으며 우리의 CGV같은 영화관도 있어서 영화도 즐길 수 있었다. 다즐링차로 유명한 곳이라 우아한 찻집에서 귀에 익은 음악을 들으며 제대로 된 얼그레이 홍차도 마실 수 있었다. 관광 중심지인 초우라스타 광장 주변에 있는 호텔이나 식당, 상점들은 상당히 서구화 되어있어 인도의 다른 곳 보다 깨끗하고 친절하여 오히려 인도 분위기(?)가 제일 덜한 곳이었다. 그러나 해발 2,200여 미터 위에 자리 잡은 산악 도시인 이곳의 실제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척박하고 다른 인구 많은 도시와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급수차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물 문제나 하수 문제도 쉬운 일이 아니겠고 중심지인 초우라스타 주변을 벗어나 현지인들이 사는 곳을 보면 역시 수많은 인구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다즐링에서 즐겼던 위와 같은 전형적인 도시 문화, 이를테면 쇼핑, 영화 감상, 레스토랑 순례 같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곳은 참으로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탈바꿈된다. 타이거 힐이 생략되었기 때문일까? 호텔에서 심부름 하던 14살짜리 소년의 해맑은 미소 때문일까? 우리 내외는 이 소년을 볼 때 마다 이 소년의 미래를 걱정해주곤 했었다. 그 소년은 혼자서 노래 부르기를 즐겼으며 사람의 심금을 움직이는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