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광화문.

갈 사람은 빨리 가시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학에서 처음으로 주눅들었던 때를 기억한다. 영문학을 공부하려면 두 개의 산맥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스/로마 신화와 성서. 제우스는 그리스어, 로마어로는 쥬피터로 부르듯 그리스어 이름과 로마어가 따로 있다는 것. 이미 이런 상식으로 무장한 과친구들 앞에서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공부했나? 아니다. 그당시 시중에 나왔던 불핀치의 책을 집어들었으나 끝까지 읽지 못했다. 이후로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접하다보니 대충 알게 되기도 했다. 그래도 집중적으로 파고들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늘 있었다. 마치 <성문종합영어>를 마스터하지 않으면 영어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처럼.(뭐, 실제로도 그랬다. 성문종합영어를 수차례 통독하고서야 영문법이 잡혔다.)


그래서 요즘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고 있다.















이 책을 집어든 이유. 중고서적으로 구입할 수 있어서다. 것보다도 이 책의 지은이 한호림은 발로 뛰는 분이시다. 발로 뛰며 쓴 책은 저자의 숨소리 같은 게 느껴져서 좋다. 혼자 흥분해서 열을 올리며 잘난 체하는 것도 좋다. 생기가 있으니까.


무더위와 싸우는 기분으로 두 권을 읽었더니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박홍규의 책.














그리스/로마 신화 디톡제로써 제격이다. 신화를 제대로 읽기 위해선 이런 책도 필수. 괜히 주눅들어 우러러보며 신화를 접해서는 안될 터. 엉성하게 아는 것보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그리스/로마 신화는 평생 읽기 프로젝트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읽을 바에야 제대로 읽어야지 싶다.



이건 다른 얘긴데....<성문종합영어>의 원래 이름은 <정통종합영어>였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이 영어참고서가 제게는 더 신화같다는 말씀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도시와 오지마을을 오가며 살다보니 이런 책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속초 <동아서점>에서 구입했다. 인류의 역사를 '이주'라는 관점에서 한줄로 엮은 솜씨를 읽는 맛이 유쾌하다. 디테일면에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궁금해하던 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교회'의 내력같은 것. 곳곳에 대형교회로 우뚝우뚝 서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보면 궁금증에 사로잡혔는데, 독실한 개신교 신앙인인 내 친구는 간단히 그 교회를 '이단'으로 치부하고 있는데 이유가 궁금했었다. 그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얻었다고나 할까.


책을 끝까지 읽고 써야겠지만 일단 인상적인 한 부분이라도 옮기고 싶다. 길게 쓸 자신도, 기분도, 시간도 없으니.....


p. 108~109


파시족은 약 1천 년 전에 인도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이슬람 교도가 대부분이었던 페르시아에서 온 이주민들이었고, 그후 몇 차례 이주가 더 있었다. 파시족은 특히 인도내에서 현지 사회에 성공적으로 통합되면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한 이주민 집단의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그들이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파시족이 배를 타고 구자라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서로 언어가 달라 그곳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지역의 왕은 자신의 영토에는 이주민을 받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정중하게 표현하기 위해 찰랑찰랑할 정도로 가득 찬 우유 항아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이주민들의 지도자였던 조로아스터교 사제는 그 항아리에 설탕 한 숟가락을 넣었고 우유는 넘쳐흐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달고 맛이 좋아졌다. 그의 지혜 덕분에 파시족은 구자라트에 머물도록 허락을 받았다.


** 오늘날 전 세계의 조로아스터 교도는 20만 명이고, 그중 절반이 인도에 살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파시족Parsi 으로 알려져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1



사진2


사진1은 개울 건너 이장님네 사과나무이고, 사진2는 우리집 사과나무이다. 3년 전 같은 시기에 심었는데 척 보기에도 차이가 난다. 이장님네 사과나무가 연륜이 약간 많아서 사과가 주렁주렁 달리긴했지만 나무 크기만으로 보자면 우리집 사과나무에도 최소 한두 개의 사과가 달려야 하지 않을까만... 한개도 달리지 않았다. 아니 봄철에 사과꽃도 피우지 못했다. 그러니 사과는 언감생심이다.


나무를 대강 심어놓으면 열매가 알아서 맺겠거니 생각했다. 남편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것보다도 우리는 농사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 말하자면 도시촌놈. 아는 것도 없는데 이장님의 조언도 무시하고 우리식(?)대로 했다. 때맞춰 농약도 뿌리지 않고, 순도 자르지 않고(모르니까). 그래도 퇴비도 주고 애지중지 관심을 기울였는데 꽃송이 하나 열리지 않았다. 왜 그럴까...를 우리는 모른다. 그나마 아는 건 농약을 주지 않고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온갖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 파뿌리 하나, 고추 한 개, 사과 한 개...저절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 참고로 개울 건너 이장님은 한때 부모님이 사과밭을 가꾸었다고 한다. 일년 내내 사과를 먹을 줄만 알지 사과 하나 키워내지 못하는 이 무능이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경식의 책을 다시 읽는다. 새롭게 읽히는 걸 보면 건성건성 읽었던 것 같다. 읽었다고 읽은 게 아니었다. 2017년 간행된 책으로 읽었으니 6~7년 전인데 서경식의 한탄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 들어맞는다. 아마도 앞으로 6~7년 후에 읽어도 오늘의 이 느낌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겠지만. 이제야 비로소 이 책의 제목 <내 서재 속 고전>의 '고전'이 갖는 의미를 이해한다. 서경식이 틀려도 좋으니 세상이 좀 좋은 쪽으로 흘러주었으면....


p. 79

사이드는 이 책*에서 오늘날 지식인 본연의 자세를 위협하는 것은 아카데미도 저널리즘도 출판사의 상업주의도 아닌 '전문주의(프로페셔널리즘)'라고 단언한다. "현재의 교육제도로는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은 좁은 지(知)의 영역에 갇혀버린다." 전문분화specialization된 사람은 "그저 순종하는 존재"가 된다. "당신 자신의 감동이나 발견의 감각은 사람이 지식인이 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감각인데 전문 지식인이 되면 모두 압살당하고 만다." 그 결과 '자발적 상실'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사이비 지식인들이 정부나 기업 주변에 모여든다. 그 복합체를 형성하는 무수한 세포와 같은 개개의 사람들은 얼핏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자비하다고 할 정도로 냉혹하게 권력을 행사하거나(종종 전쟁까지도!) 이윤을 추구한다.


*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의 표상>


사이드에 관한 얘기 하나 더.


p.26 

집을 갖지 않겠다는 신조 때문에 사이드는 평생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고 임대주택에서 살았다.



사이드를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