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이야기이다.
어느 봄날, 학교에 갔더니, 오늘은 수업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란다. 예고도 없었고 설명도 없이 그냥 집으로 가라니 덜컥 겁부터 났다. 할 수 없이 친구들과 집으로 향하는데 괜히 눈물이 났다. 지금 같으면 수업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라고 하면 얼씨구나 할텐데 그땐 좀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친구들 역시 그랬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부모님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더 이상 묻지도 않았다. 하루종일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튿날 등교해보니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도 전날에 대해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 출신의 젊은 담임 선생님이 장학적금을 장려하면서 코 묻은 돈을 모으게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40여 분, 버스를 타도 40여 분. 당시 산 속에 있던 학교에 가려면 시내버스에서 내린 후 20여 분을 걸어야 했으니 걸어가나 차를 타나 그게 그거였다. 작은 키에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게 안쓰러웠는지 부모님은 매일 왕복 차비를 주셨다. 꼬박꼬박 받은 차비를 착실하게 모아서 장학적금으로 담임 선생님께 드렸다. 60명이 넘는 우리 반에서 금액으로 내가 2등을 했다. 얼마 후 담임 선생님이 서울로 아주 떠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낸 장학적금을 들고. 내가 우리 반 대표로 장학적금의 행방을 묻는 편지를 선생님께 썼다. 답장이 왔다. 학교에서 월급을 받지 못해서 우리가 낸 장학적금으로 하숙비 등을 지불했노라고. 부모님 반응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말씀을 안 드렸거나 이야기를 했어도 '그럴 수도 있다'라고 가볍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귀가가 늦는다고 학교에 전화를 하시던 까칠한 성격의 아버지가 그 일로 학교에 전화를 하지는 않았으니까.
중학교 첫 여름 방학. 방학 중 비상등교를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학교에 큰 일이 발생했다. 재단 이사장이 교실과 나란히 있던 이사장실에서 자살을 했다. 학교를 설립한 지 3년 차 -그러니까 나는 3회 졸업생이다.- 빚에 쪼들려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이사장 부인과 아들이 교내에 있는 사택에 거주하면서 학교 운영을 맡았다. 지금도 얼굴을 기억한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당시엔 몰랐으나 이후 하나하나 꿰게 되면서 전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교사들이 월급을 받지 못해 파업을 했었고, 월급을 받지 못한 담임 선생님은 우리들 장학적금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고, 이 난관을 이겨내지 못한 이사장은 자살을 했던 것이다. 교과서로는 배울 수 없는 세상의 한 단면을 경험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오죽하면 선생님들이 파업을 했을까. 오죽하면 어린 학생들의 코 묻은 돈에 손을 댔을까. 오죽하면 이사장이 자살을 했을까. 불의와 부조리에 맞선 목소리가 무시당하거나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을 때 힘을 합쳐 저항하는 것. 이런 것이 파업이란 것을 조금씩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돈을 떼어본 경험도 의미는 있었다. 투자할 때는 신중을 기할 것. 절대적인 믿음 같은 건 없다는 것. 이사장의 죽음은 좀 어려웠다. 그래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았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학교에서 교사들의 파업은 학생들에게 무엇인가 생각의 자국을 남긴다. 하루치 수업 이상의 교육 효과가 있다.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아이들이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노동자로 살아갈 아이들이다.
9월 4일 전국 교사들의 파업을 응원하며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