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속의 진주는 복통, 발열, 황달로 이어지는 고통 속에서 자라났다. 쥐어짜는 듯한 복통이 찾아오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다. 최대한 몸을 동그랗게 말거나 따끈한 찜질팩을 껴안고 뒹굴어야 한다. 37.5도를 가뿐히 넘는 체온은 오한을 동반하여 한여름에도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당기게 한다. 이렇게 하루 종일 앓고났더니 다음 날엔 온 몸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무언가에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3개월에 한번씩 뵙는 의사를 찾아갔더니 혀를 끌끌차며 응급실로 가란다. 병원 정문을 나와서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응급실로 혼자서 터덜터덜 걸어가려니 기분이 묘했다. 응급실엔 들것에 실려가야 하는 거 아닌감?

 

몇가지 검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손등으로 굵은 바늘이 들어오고 이내 항생제와 수액이 투여되기 시작했다. 마음의 준비는커녕 아무런 대책없이 입원실로 옮겨졌다. 물론 병원에선 대책과 계획이 있겠거니....일년 전부터 간헐적으로 배를 움켜잡고 고통 속에 몸부림쳤던 이유가 비로소 밝혀졌다. 담석 때문이었다.

 

1차 내시경 시술. 몸을 엎어놓고 두 손은 묶어놓은 채 얼굴은 오른쪽으로 돌리게 하는, 아주 묘한 자세에서 시술을 당하는 것까진 좋은데 왜 잠은 재우다 마는 걸까? 반수면 상태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지 시술을 하는 의사선생님의 씨근덕거리는 소리가 내내 귓가에 들려왔다.의사선생님도 이럴 땐 보통 사람이구나, 를 확인하니 웬지모를 친근감마저 들었다. 그 와중에 말이다.

 

하필이면 다음 날이 토요일. 주말을 꼼짝없이 병실에서 보내고 월요일에 다시 2차 내시경 시술에 들어갔다. 지난 번에 반수면 상태에서 의사선생님의 투덜거림을 다 들었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제대로 잠을 자게 해주었다. 수면내시경시술이라고 했으면 당연한 일. 그런데 담석내시경시술은 보통 반수면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데....뭐가 맞지?

 

 

 

 

 

 

 

 

 

 

 

 

 

 

 

 

 

집에서 읽다가 만 책을 갖다달래서 병실에서 마저 읽으려고 노력에 노력을 했건만.... 결국 퇴원하고도 며칠 후에 마저 읽을 수 있었다. 5박6일의 여행도 뒤끝은 5박6일이 가는데 몸 속의 진주를 제거하는 일은 그런 여행 못지않은 회복기간이 필요했다.

 

1901년에 출간된 이 소설을 박진감 있게 읽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리멸렬하지는 않았다. 나름 흥미진진했다. 티벳 스님과 히말라야 얘기라니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주인공인 혼혈 소년 킴의 인도스러움(?)이 특히 생생했다. 인도스러움을 잘 잡아낸 키플링의 필력에 감탄했다.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대단한 작가였구나, 새삼 깨닫게 되는 기회였다.

 

나이 든 여자는 보통 남자들보다 훨씬 보수적이지만, 몸도 쇠약해지고 더 이상 부릴 욕심도 없어져서인지 어떤 경우엔 베일을 벗어버리기도 했다. 오랫동안 격리되어 살다가 집밖의 이런저런 흥미로운 일들을 겪으면서 그들은 여행 중에 마주치는 소란스러움과 사원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일, 동병상련을 겪고 있는 미망인들과 잡담을 나눌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이런 식으로 말년을 즐기는, 입이 걸고 의지가 굳센 할머니들 대부분은 오랜 기간 집안에 갇혀 지내온 사람들이었다.   -139쪽

 

번역이 매끄럽다. 읽어보지 않았지만 원문을 읽으면 분명 버벅거릴 텐데.

 

 

며칠 동안 병원에 갇혀 있었다고 이렇게 입이 근질근질한데 '오랜 기간 집안에 갇혀 지내 온 사람들'은 어떨까 싶다. 코로나19 는 사람들 입을 얼마나 걸게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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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6-2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깜짝 놀랐습니다. 수술 전에도 많이 아프셨을텐데, 수술까지 반수면상태에서 받으셨다니 세상에나. 내시경시술이 2차에 걸쳐 이루어지는군요. 지금은 완전히 회복되신건가요? 1년 전 부터 생긴 통증이었다니, 진즉 병원에 가보실 걸 그랬어요.
담석은 제거하고도 또 생기는 경우가 많다던데, 조심하시고요.

nama 2020-06-29 13:32   좋아요 0 | URL
2차에 걸쳐 이루어지는 건 아니구요. 저는 1차에 실패헤서 2차까지 간 거예요.
예전부터 위염으로 고생해서 그런 줄 알았지요. 황달까지 오고나서야 놀랐답니다.
앞으로 또 생긴다면 그땐 담낭제거를 해야하지 않을까싶어요.
고맙습니다.^^

파이버 2020-06-29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번이나 수술하시다니 엄청 고생 많으셨겠어요... 다시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빕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추천해주신 책은 번역이 좋다고하시니 끌리네요 보관함에 담아두겠습니다

nama 2020-06-29 14:06   좋아요 1 | URL
수술과 시술은 다르다고 하네요. 수술은 피부나 점막 등의 조직을 절개하거나 절단하여 병을 고치는 거고, 시술은 기구를 이용하되 수술보다는 가벼운 거라고 해요.
저는 시술이었으니, 그것도 수면으로 하는 것이라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위내시경보다는 강도가 훨씬 세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금식 상태를 견디는 게 힘들어요.

서니데이 2020-06-2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담석 많이 아프다고 들었어요.
병원에서 입원해서 치료받으시느라 고생많으셨겠어요.
시술 잘 되셔서 빨리 건강 회복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nama 2020-06-30 12:38   좋아요 1 | URL
네. 지금은 괜찮아요.
담석이 맹장염처럼 흔하다고 하네요.
복통, 발열, 황달. 이 증세를 기억하면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강화도 고려산 근처에 있는 독립서점.

 

우공이산(愚公移山): 우공이 산을 옮기다. 어떠한 어려움도 굳센 의지로 밀고 나가면 극복할 수 있으며, 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처: daum)

 

우공이산에서 따왔을 우공책방. 겉모양은 여느 개인주택과 다름없고, 주차장도 협소해서 주차시 주의를 해야 하는데도 '우공책방'의 '우공'에 이끌려서 찾아가게 되는 곳이다.

 

 

 

 

1층은 서점, 2층은 북스테이하는 공간으로 창밖으로는 고려산이 보인다. 아늑하고 그윽한 분위기의 방이 인상적이다. 어느 시인은 이 공간에서 탈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동네책방이 있어서 더 좋다.'

 

 

 

 

다과 대접을 받고는 당황했다. 마치 지인을 만난 것처럼 스스럼없는 주인 내외분의 환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서가로 꽉 찬 공간.

 

 

 

 

 

 

 

 

 

 

처음엔 존재감을 드러내느라 으르렁거리나 곧 친화력을 발휘하는 둘리.

 

 

 

여주인은 시인이시다. 어쩐지 어떤 기운이 느껴지더라니...

 

 

 

 

공방 작업실에서 나무공예를 하는 남편분이 추천해주신 왼쪽 책, 아내분이 추천해주신 오른쪽 책을 구입했다. 독립서점에선 책을 사주는 게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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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깊숙한 곳에 위치.

 

 

정확히 말하면 도서관 탐방이 되겠지만 글의 성격상 서점탐방이 어울리겠다 싶어 그대로 서점탐방이라는 시점에서 쓴다. 도서관내에 작은 책방도 있으니 아주 벗어난 시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웬 그림책? 어린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책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산림청에서 발간하는 <숲>이라는 잡지에서 이 도서관 건물 사진을 접하고는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특히 남편이 가고 싶어했다. 혼자 힘으로 집을 짓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는 남편이다.

 

가는 길에 잠깐 검색해보니 이곳은 예약을 하고 가야 한단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 에이 모르겠다. 우리의 흰머리가 어떻게든 해결해주겠지.

 

 

 

 

 

초입에 주차하고 천천히 걸어올라가면 보이는 간판.

 

 

 

 

 

남편을 설레게했던 건물 전경.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사로잡는 계단. 산을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산에 오르듯 저 계단을 하나하나 오른다. 쾌적하고 선선한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듯하다.

 

 

 

 

 

계단을 다 오르면 북쪽으로 난 창문이 보이고 그 창문으로 시골 풍경이 보인다.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정겨움.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공간(들을 상징)과 액자에 담긴 듯한 작은 카페.

 

 

 

 

 

계단 밑에 숨어 있는 작은 공간들. 숨어들어 조용히 책에 집중하고 싶은 곳. 숲을 상징하는 곳이다.

 

 

 

 

책을 읽다가 잠들어도 모를 듯.

 

 

 

구석구석에 예쁜 그림들이 많은데 모두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 마침 화장실도 갈겸해서 찰칵.

 

 

다시 바깥. 왼쪽에 보이는 작은 회색문이 출입문이다.

 

 

한 개인의 노력이 깃들인 곳....이라고 덤덤히 말하기에는 정말 대단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신 분이 계셨는데 알고보니 이 도서관을 설립하신 도서관장님이셨다. 어색한 인사 대신 대뜸 그림책 한 권을 읽어주신다. 직접 쓰신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우리 부부에게 읽어주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가 내게 그림책을 읽어준 적이 있었던가? 묘한 감동이 일었다.

 

 

 

 

 

 

 

 

 

 

 

 

 

바느질 수녀님은 새내기 수녀님들이

바느질을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칭찬도 야단도 치지 않아요.

그저 잘못됐을 때는 "다시 하세요."라고 말해요.

 

 

 "다시 하세요."가 주는 조용한 위로가 마음에 쏙 들었다. 좀 틀리거나 잘 못하면 뭐 다시 하면 되지.

 

 

도서관장님의 바람대로 이 도서관이 백 년을 거뜬히 이겨내며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기를 기원하면서 그림책 두 권을 사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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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0-06-09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석구석 신경쓴 게 느껴지는 곳이네요. 좋은 곳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기억해두었다가 한번 가봐야겠어여

nama 2020-06-10 10:08   좋아요 0 | URL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공간이예요. 북스테이(별채)도 가능하다고 하네요.

자성지 2020-06-10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멋진 공간을 소개해주셔서 고마워요. 언젠가는 가보고 싶어집니다.

nama 2020-06-10 10:09   좋아요 0 | URL
공간도 좋지만 관장님이 읽어주시는 동화는 더 환상적이랍니다.
 
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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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40여 년 만에 이 책을 완독했다. 물론 끝까지 글자 하나 놓치지 않고 읽었다는 것이지 그 내용을 전부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차원의 완독이다. 대학 시절 수업시간에 김남조 시인이 읽어주신 한 문장이 가슴에 와닿아 인상 깊었는데 바로 이 문장이다. 책을 펼치면 바로 나오는 헌사.

 

 

앤 드루얀을 위하여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감성에 젖어 읽어주신 이 한 문장 때문에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손에 집어들었으나....두어 쪽 읽고는 어느 후배에게 줘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 지독히도 싫어했던 물리와 지구과학. 문이과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과학과목과 사회과목의 시험을 치러야 했던 시절. 본고사 국영수에 집중하다보니 자신없는 과목은 과감히 손을 놓고 찍기로 작정했는데 그 과목이 물리였다.12~13문제 가량 출제되는 물리는 붙잡고 있어야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으로는 그때 치른 예비고사에서 내가 찍은 답은 정답을 교묘히 피해갔고 문제에 문제가 있어서 모두 정답 처리했던 한 문제만 맞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짱 한번 제대로 부려본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지도 못한 알맹이 없는 시절이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상상의 날개를 펼 기운조차 없던 삭막한 시절이었다.

 

이런 나에 비해 딸아이는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고 한다. 놀라웠다. 대학때도 못 읽었던 책을 고등학생이 읽다니... 그러니 더 이상 미뤄놓아선 안 되겠다 싶었다. 마침 친구가 이 책을 선물로 주었다.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끝까지 왔다. 별 하나를 발견한 심정이 되었다고나 할까.

 

목성, 화성, 금성...이런 걸 내 입으로 말하는 행위는 주제넘는 짓이겠다. 읽기에도 벅찼으니까. 그나마 좀 이해가능하고 관심이 갔던 부분은 뇌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현재 뇌의 구조에서 우리는 진화의 단계들을 미루어 알아볼 수 있다.'(549쪽) 이 책에서 인용한 폴 맥린에 의하면 뇌의 고차원적인 기능들이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진화했다고 한다.(550쪽)

 

1. R - 영역: 인간이 아직 파충류였던 시기에 발달, 인간의 공격적 행위, 정형화된 의식 행위, 자기 세력권의 방어, 계층적 위계 질서의 유지 등을 관장.

2. 변연계: 포유류 시기에 생긴 뇌. 인간의 기분, 감정, 걱정 등의 정서적 반응과 행동 그리고 자녀 보호의 본능을 지시하고 제어.

3. 대뇌 피질: 수백만 년 전 인간이 영장류였던 시기에 형성. 아이디어의 창출과 영감의 발현. 읽기와 쓰기, 수학적 추론과 작곡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의식적 삶을 가능케 하는 부위. 문명은 대뇌 피질의 산물.

 

재밌는 것은, 우리 각자의 두개골 내부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악어의 두뇌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강대국들은 살상용 핵무기를 자체 조달하고 비축하는 데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당화 논리를 구축해 놓고 있으며, 그 논리의 당위성을 만방에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항시 가상 적국의 문화적 하자를 지적하고 그들이 저지를지 모르는 비이성적 행태를 상정하여 사람이 아직 갖고 있는 파충류의 뇌를 자극하는 데 유효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자국민을 파충류적 행동 기제로 몰고 가고는 한다.    -650쪽

 

오로지 점수에만 매달리던 고등학교 시절은 말하자면 '파충류적 행동 기제'인 R - 영역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되는 건가?

 

 

칼 세이건의 사유는 깊고도 넓다. 그중 한 부분.

 

사람은 대지의 자녀인 동시에 하늘의 자녀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살아오는 동안 인류는 못된 진화적 습성을 많이 길러 왔다. 호전성, 그릇된 관습,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이방인에 대한 이유없는 적개심같이 오랫동안 유전돼 온 못된 요소들은 인류의 생존 자체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측은히 여길 줄 아는 좋은 천성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식의 자식도 아낀다.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우려 노력하고 지적인 것을 향한 물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인류에게 영원한 생존과 번성을 확실히 약속할 도구요 방편이 될 것이다. 못된 습성과 좋은 천성 중에서 어느 쪽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지는 확실하지 않다. 특히 미래를 보는 우리의 눈이 지구에 고착돼 있다거나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마음이 지구의 어느 한 지역에만 묶여 있다면 결국 저 못된 습성이 사랑의 마음과 이성의 예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광막한 코스모스의 바다 속에 감춰진 새로운 세상과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외계 문명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다. 우리와 같은 문명의 운명은 결국 화해할 줄 모르는 증오심 때문에 자기 파괴의 몰락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하지만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다. 우주에서 본 지구는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지구는 극단적 형태의 민족 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 등이 발붙일 곳이 결코 아니다. 별들의 요새와 보루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 작은 푸른 반점일 뿐이다. 이렇게 여행은 시야를 활짝 열어 준다.      -632쪽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 위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모습을 우주적인 시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지구상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과학에 무지한 내가 이 책에 대해 뭔가를 쓴다는 건, 결국 인용으로 시작해서 인용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급하게 읽은 거 하나라도 기억에 남기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고. 그중 또 하나.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코스모스가 설명될 수 있는 실체이고 자연에는 수학적인 근본 얼개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과학을 하려는 동기를 크게 불어넣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할 소지의 사실들이 유포되는 것을 억압하고, 과학을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로 제한하고, 실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 주고, 신비주의를 용인하고, 노예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의 위대한 모험심에 큰 좌절감을 안겨 주고, 과학의 발전에도 어쩔 수 없는 퇴보를 불러왔다.    -374쪽

 

여기서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대신에 현대의 학자와 과학자나 정치가들로 바꾸고 과학을 학문이나 정치 따위로 바꾸면 어떨까. 노예 사회는 비정규직 사회 같은 어휘로 바꾸고. 그들을 포함한 우리들 대부분은 비겁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죽기 바로 전에 썼다는 뉴턴의 글이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161쪽

 

너무나 천재적이어서 어려워했던 과학자들의 이런 글을 읽으며 과학을 접했더라면 과학이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았을 터인데...하는 아쉬움.

 

 

완독했으니 책장에 떡하니 꽂아도 되겠다, 이제.

 

* 내가 읽은 책은 2020년 3월 15일에 출간된 특별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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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20-05-3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완독 축하드려요~~

nama 2020-06-01 20: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 읽고 축하받는 것도 즐겁네요.^^

sabina 2020-08-08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최근에서야 코스모스를 읽었답니다.
고등학교 때 나마님 이상 물리를 싫어 했지만, 천문학에 대한 관심은 높아
지능이 따라준다면 천문학자도 좋겠단 생각을 한 적도 있었네요.
물론 따라주지 못하는 건 일찌감치 알았지만 말입니다.
과학시간 차라리 이런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면 어땠을까요?ㅎㅎ

nama 2020-08-13 09:36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때는 입시 때문에 생각하는 행위도 옆으로 밀어두었던 것 같아요.
교과 수업시간에 책을 읽으라고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대들었을지도 몰라요.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시기였어요.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했으니......지금이나마 열심히 읽는 수밖에요.^^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6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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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었던 찰스 부코스키의 글을 보니, 왜 미국의 서점에서 그의 책이 가장 많이 도난당하는지 알 듯하다. 그는 고상한 척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숨어 있는 야성의 목마름을 만천하에 당당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의 저속함과 비열함에 침은커녕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 찰스 부코스키.

트럼프 시대에 딱 어울리는 시 한 수 옮겨보면,

 

 

부패

 

요즘 들어

부쩍 드는 생각,

이놈의 나라가

사오십 년은

퇴보했구나

사회적 진보도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호감도

모두 멀리멀리

쓸려 갔구나

그리고 진부하고

케케묵은

편협함이

자리 잡았구나.

 

우리는

어느 때보다

이기적인 권력욕에,

약하고

늙고

가난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을 향한

멸시에 젖어 있다.

 

우리는

결핍을 전쟁으로

구원을 노예제로

대체하고 있다.

 

우리는

성취한 것을

낭비하고

빠르게

쪼그라들었다.

 

우리는 폭탄을 안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지옥살이

그리고 우리의

수치.

 

이제

우리는

크나큰 슬픔의

손아귀 안에서

숨통이

막혀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다.

 

 

 

 

트럼프도 고상한 척하지 않기로는 한 인물하는 인간인데 왜 그의 목소리엔 울림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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