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인도 독립이후(중략)...농촌 상황은 더 비참해졌다. 건국 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문은 지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토지 개혁이었다. 그렇지만 기득권층의 반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이마저도 실패했다. 지주 계층은 여전히 기득권을 누렸고,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농민은 근대 주권 국가 아래에서도 과거 봉건 시대나 식민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토지 없는 농민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 정부 주도로 진행된 산업화 과정에서 정부는 산업, 광산 채굴, 댐 건설, 산림 보호 등의 명목으로 농민들에게서 땅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했다. 아직도 인도 인구의 40퍼센트는 자기 땅을 갖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하루 미화 1달러 정도의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극빈층 인구가 전체 인구 11억 명 가운데 3억명에 달한다. 그들 대부분은 농민이다.

 

 

제임스 밀 이후 많은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여러 역사적 사실을 공공연하게 왜곡했다. 많은 유럽의 인도사가들은 무슬림 통치자들이 힌두 문명을 파괴하고, 힌두교를 탄압하면서 강제로 개종을 시켰다고 했다.(중략) 모두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해석이다.

이러한 힌두 악습의 책임을 무슬림에게 전가시키는 일은 암소 숭배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힌두교도에게 암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며 동시에 암소가 오랫동안 힌두교도의 식량이었다는 것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은, 엄연한 별개의 역사적 진실이다. 그럼에도 보통의 인도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것은 무슬림이 이 땅에 들어와 힌두를 핍박했다는 왜곡된 역사를 보통 사람들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암소 숭배와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무슨 힌두교 제1의 정체성인 것마냥 생각하고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한 도전은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어 왔다.(중략)<베다>가 편찬되던 때 쇠고기는 브라만들에게도 좋은 음식이었고 그 쇠고기를 먹는 관습은 18세기까지도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중략) 오랫동안 인도 사람들이 쇠고기를 먹어 왔다는 것이 약사적으로 명백한 사실.... 

 

 

급진파가 민족운동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데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를 거둔 영향도 있었다. 당시 벵갈 사람들은 일본이 영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보다는, '우리'아시아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서구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에 함몰되어 있었던 인도인들은 같은 아시아계인 일본의 승전 소식에 고무되었다. 그 후로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일부 민족 지도자들은 일본에 기대어 영국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다. 따라서 일본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타고르가 식민 지배에 신음하고 있던 조선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우스울 수밖에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은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 오해가 아니라 역사 왜곡이기 때문이다.

 

 

영국 식민주의자는 인도를 쉽게 통치하기 위하여 인도 민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규정하지 않고, 인도 사회는 힌두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종교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공동체가 따로 있어 서로 분리되어 살았다고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리고 그 시발점을 무슬림이 인도를 침략해 약탈했던 시기로 잡았다. 무슬림의 침략은 힌두 사회에 심한 트라우마로 남았고, 이 트라우마가 근대 힌두와 무슬림 사이의 공동체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론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식민주의자가 역사를 재구성하는 바람에 결국 역사가의 의도대로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이전에는 없었던 종교 공동체가 만들어져버렸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공동체를 중심으로 갈수록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 결과 인도-파키스탄 분단이라는 비극이 발생했고, 그 후 두 나라에서는 다수에 의한 소수의 억압과 핍박이 끊이지 않았다. 특힌 인도에서는 1990년대 이후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종교 공동체주의를 적극 이용하여 무슬림을 학살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이에 대해 무슬림은 끊임없이 불특정 힌두교도에 대한 테러를 벌이고 있다. 식민주의자들이 재구성한 가상의 역사가 어느덧 정사로 인정되어 그것이 실제 역사에서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것이다.

 

 

PAKSTAN(당시에는 '파크스탄'이었다). 무슬림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서북부 지역

다섯 주 이름의 머리 철자를 따 만들어 낸 이름이다. P는 뻔잡Punjab, A는 아프간(Afghanis, 나중에 '서북변경주'로 알려진 곳), K는 카시미르Kashmir, S는 신도Sindh, 그리고 발루치스탄Baluchistan에서 따온 '스탄'까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말 '파키스탄'은 우르두어와 페르시아어로 '청정한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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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중에서

 

....그를 치료한 의사 에마 헤이워드는 암에 걸린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다. 하나는 평소에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칭병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절망적인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그 병 때문에 더욱 평소 하는 일에 몰두하는 긍정적인 태도가 그것이다. 칼라니티는 후자의 태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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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베낍니다.

 

   왕조의 안정적 유지는 한국사의 경우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특히 조선 왕조 5백 년, 그 5백 년 동안 인민은 왕의 목을 단 한 번도 치지 못했다.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은 무능한 통치를 하였음에도 왕이 처단당하거나 왕조가 바뀌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나라가 전란에 휩싸이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도 정권의 책임을 물으며 역사의 당위성을 부르짓는 경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그 '조선의 안정'때문이었다.

   이러한 보수적 사회 분위기는 왕조가 망한 후 독립운동기에도 여전히 유효하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겨 울분에 처한 나머지 자결을 한다거나 항일 독립군에 가담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왕조의 복원을 주장했다. 그들이 꿈군 것은 평등 사회 건설이 아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왕조를 유지한 이런 보수 이데올로기는 거의 천명과도 같았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분단과 내전을 거치면서도 바뀔 줄을 몰랐고,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 독재 시기에도 여전했다. 어떻게 그렇게나 많은 국민을 학살하고, 이후 국민의 힘에 의해 정권이 굴복하고 결국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그에 대한 처단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법적으로 실형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온당한  대가가 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진실이 온전히 규명되지 않은데다가, 그 정도의 법적 실형으로 그들이 절절한 역사의 대가를 지불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독재는 세습되어 김정일 독재로 이어지고 있지만 인민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김정일 이후 어떻게 될지 속단하기는 어렵겠으나 그 부자가 저지른 역사적 잘못을 인민들이 처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위정자를 처단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그것이 이재수의 난이든 홍경래의 난이든 심지어는 '혁명'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준 갑오농민전쟁이든 모두 탐관오리 처벌이나 나아가 토지나 신분과 같은 제도를 개혁하기 위하여 싸웠을 뿐 체제를 전복하거나 왕을 처단하고자한 싸움은 아니었다.

   한국사에서 그나마 유일한 처단은 김재규가 저지른 박정희 암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중략)..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은 사회 변혁과는 연계될 수 없는 돌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처럼 근대 시민 세력이 성장을 해서 루이16세를 단두대에서 처단한 방식이든 영국처럼 유혈 사태 없이 타협을 통해 왕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시민 권력을 이루어 낸 방식이든, 새로운 세력이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 내는 그런 역사는 조선에서든 대한민국에서든 북한에서든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노동자, 농민, 빈민이 경제적으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다. 가정 파탄, 가정 폭력, 자살, 기아, 노인 학대 등으로 이어진  사회 문제는 늘 그렇듯 철저히 개인 문제로 치부되고 있다. 그만큼 이 사회는 안정되어 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사회에서 방치되어 있는 계층이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나라는 없다. 총기가 난무하는 5.18 때도 전당포 한 곳 털리지 않았고, 전국에서 백만 명이 모여 촛불을 밝히면서도 사건사고 한 건 터지지 않았다.

   갈등이 사회 변혁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시 안정의 기반이 되는 것은 퇴보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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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여행지에서 진정 만나고 가져와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여행지의 풍광과 맛? 여행지에 대한 지식과 정보? 그 여행에 대한 좋거나 나쁜 추억? 내 생각에는 어떤 여행지에서 우리가 정말 담아 와야 할 것은 그곳만의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다은 곳이 아닌 바로 그 여행지에서만 느끼거나 만날 수 있는 분위기. 그것은 그곳의 날씨나 빛, 자연과 사회 환경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에 덧붙여지는 촉감이자 온도이고 맛이자 향기이며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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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학로에 다녀온 딸아이가 잡지 한 권을 사들고 들어왔다. 빅이슈, 홈리스의 자립을 돕는 잡지이다. '5,000원 가운데 2,500원이 홈리스 판매원에게 돌아'간다며 이 잡지를 파는 아저씨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해서 기꺼이 사왔다며 내 눈치를 살핀다. 나도 환하게 웃으며 "정말 잘했어."했더니 "역시 깨인 엄마야." 책 한 권에 순간 멋진 엄마로 등극한다.

 

 

잡지를 펼치다보니 두 장의 종이가 툭 떨어진다. 손글씨를 복사한 종이다. '파같은 사람', '기분 나쁠 정도로 지나치게 현실적인 명언','나이가 들수록 꼭 필요한 사람' 이런 제목이 쓰워져있다.

그중 몇 개를 옮겨보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너무 늦었다.'-박명수

'만약 지옥을 통과하는 중이라면 멈추지 말고 계속 가라.-처칠

'타인의 눈물은 물과 다름 없다.' -?

 

'파같은 사람'이란 글은 또 뭐지? 하며 읽는데 내용이 좋고 글도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파는 아저씨의 글인가 싶기도 하고...검색해보니 어느 카피라이터의 글이었다. 후우...아쉬움이 남는다.  판매원 아저씨 본인의 글이라면 더 좋았을 텐데.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한 두줄의 글은 나오지 않을까 싶다. 강하면 강한대로, 약하면 약한대로. 평소 자신에게 던지는 말일 수도, 자신을 위로하는 말일 수도, 자책의 말일 수도...이 분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게 어쩐지, 아직은 조심스러워 '일단'은 남의 좋은 말을 베꼈을 것이다. 두 장의 손글씨 글에 마음이 짠해진다.

 

 

손글씨 복사지에는 이런 글도 있다.

'말을 조심하라. 일단 내뱉은 것은 용서될 뿐,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누구의 말일까?

혹시 판매원 아저씨?  그러나 일단 내뱉은 것일지라도 용서되지 않을 때가 있다. 박근혜대통령의 사과 발언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논리가 허술한 이 글은 그렇다면 판매원 아저씨의 글이 맞을까? 상관없지 싶다. 차라리 판매원 아저씨의 글이라면 좋겠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니까. 자신의 생각 없이 남이 써준 대본을 그대로 읽는 지도자를 견뎌야하는 건 끔찍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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