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근무조로 출근했을 때. 교무실내의 싱크대에는 설거지를 기다리는 5~6개의 컵이 놓여 있었다. 그날이 월요일이었으니까 그 전주의 금요일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학기중이라면 십중팔구 학생들을 시켜 설거지를 시킨다. 봉사활동이라는 미명하에 말이다. 그런데 방학이다보니 만만한 학생은 없고, 그럼 누가 하지?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교무보조원이 하게 되나?

 

두 아이의 엄마인 교무보조원에게 이런 일까지 부탁하는 것은 아니다싶어, '그래, 매일 하는 일, 내가 하지 뭐.'하고 후딱 설거지를 하는데...화가 치솟았다. (나는 화를 잘낸다. 원래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옆에 있던 30대 남교사 들으라고 큰소리로 내 심사를 알렸다.

 

"먹는 사람 따로 있고, 설거지 하는 사람 따로 있나. 이거 이래도 돼?"

 

누가 이 컵을 사용했는가를 속으로 따져보았다. 교장, 교감, 근무조 교사들일까? 아니면 방과후하는 교사들?

 

몇년 전 우리반이 4명의 교사가 근무하는 작은 교무실 청소를 담당하고 있었을 때, 한 여학생이 교무실 청소를 그만두겠다고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선생님들이 사용한 컵을 씻는 게 역겨워서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집에서조차 하지 않는 설거지를 학교에서 하는 게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 학기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라 조금만 더 참으면 봉사활동 10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도저히 더 이상 못참겠다는 것이다. 울며불며 하소연하는데 참 난감했다. 부모님과도 전화통화를 하고 다시 아이도 설득했지만 한번 바뀐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내가 사용한 컵을 아이들한테 맡기지 않게 된 것은 아마도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사용한 컵을 내가 닦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다.

 

며칠 전. 연수 받느라고 피곤해진 몸으로 집에 돌아왔더니 개수대에 라면봉지며 닦지 않은 냄비가 그대로 있었다. 일주일간 방학을 맞은 고3 딸아이가 라면을 끓여 먹은 흔적이었다. 모처럼 집에서 쉬는데 엄마인 나는 연수랍시고 자식 점심도 차려주지 못하는 게 좀 마음이 아프긴 했으나 이 아픔보다 설거지 안 해 놓은 게 더 심금을 때렸다고나 할까. 버럭 화가 났다.

 

공부하러간 딸아이에게 당장 문자를 넣었다. "설거지 안 해 놓으면 밥 안줌."이라고. 오후 7시가 지났기에 저녁밥 준비를 해야 했으나 딸아이가 올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얼마 후 돌아온 딸아이, 30여분을 걸어오느라고 얼굴이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순간 마음이 아팠다. 나도 참 모질기도 하지, 까짓 설거지 얼른하고 밥하면 될 것을 꼭 딸에게 설거지를 시켜야하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딸아이는 하루종일 집에서 쉬고 있었고 나는 판교에서 강남으로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피곤한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채 땀도 닦지 못하고 설거지 먼저 하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긴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딸아이는 설거지를 꼭 해놓는다. 그것도 밥을 전혀 먹지 않은 것처럼.

 

자기가 사용한 그릇 정도는 스스로 닦는 사위를 봐야 할 텐데....벌써부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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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ina 2014-08-1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딸도 그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한 학기인가 교무실청소 담당이었죠.)
왜 선생님들은 자신이 사용한 컵을 씼지 않고 모아두었다 학생들을 시키는지 모르겠다고. 남이 사용한 루즈 묻은 컵 씼는 역겨움을 모르시는것 같다고.
(내~참, 사실 우리 학창시절엔 그런 내적갈등 없이 했던 것 같은데 ...)
그래서 제가 그랬던 것 같네요.
그것이 세상이다.
그 보다 더 싫은 일도 해야 할 때가 많은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다.
그걸 견뎌야 할 상황이라면 견디는 인내를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또 너는 남에게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를 배우라고.


nama 2014-08-16 14:04   좋아요 0 | URL
우리 때는 겨울방학 숙제로 솔방울을 한 자루씩 가져가는 게 있었는데, 그걸 교무실 난로의 땔감으로 사용하면서도 막상 우리가 공부하는 교실에는 난로조차 없었지요. 그래도 감히 그 부당함에 대해서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지요. 그 시절엔 선생은 당당했고 학생은 어리석었지요.

sabina 2014-08-15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참 착한 딸을 뒀네요. ^^

nama 2014-08-16 13:59   좋아요 0 | URL
착하긴해요. 엄마의 말을 거스를 생각을 안하거든요. 라면으로 끼니 때우는 것 빼고요.
 

예전보다 짧아진 방학, 연수 받느라고 바쁘기만 하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내 스스로 내 목을 죄고 있다. 여행 못가는 상황과 심정을 애써 연수로 달래는 중이다. 뭐라든 해야 고3 학부모의 굴레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고3 학부모, 참 재미없고 고통스럽고 화가 나는 경험이다. 

 

온라인으로 15시간짜리 강신주의 철학강의를 들었다. 벌써부터 가물거리지만 그래도 몇몇 철학자들 이름이 여운을 남긴다. 왕충, 이탁오. 비트겐슈타인, 들뢰즈.

 

KOIKA 연수는 내일이면 끝난다. 성남까지는 멀다. 갈 때는 남편이 데려다주고( 남편은 또 무슨 죄!) 올 때는 판교에서 전철로 강남역까지, 다시 강남역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허위허위 돌아온다. 국제개발협력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공부하고 있다. 해외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도 큰 도움이 된다.

 

다음 주엔 도자기 연수가 잡혀있다. 그런데 손가락, 팔목이 아프다. 어제까지는 오른쪽 어깨죽지가 아프더니 오늘은 갑자기 왼쪽 손목이 아파온다. 통증이 온몸을 순회중이다.

 

아직 밝히기는 그렇지만 지금 나는 내 몸 가지고 건강실헝을 하고 있다. 책도 읽고 의사도 만나고 약도 복용중이고, 한마디로 바쁘다는 얘기.

 

내 삶의 현장을 이곳이 아닌 그곳, 저 여행지에 갖다 놓고 실컷 걸으며 촛점없는 눈빛을 한없이 발산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실험과 시행착오와 탐구는 깨끗이 내려놓을 수 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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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미덕은?

- 단순성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악덕은?

- 노예근성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 책에 몰입하기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

-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 모든 것은 의심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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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15주년, 당신은 몇 페이지의 책을 만났습니까?'...이건 알라딘 열성분자(?)분들만 해당되는 얘기인 줄 알았다. 오늘 아침에야 내 기록도 있다는 것을 발견. '흠, 별 일이네,' 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흠, 그런데 내가 처음 만난 책들이 반가우면서도 무척 낯설다. 내가 이렇게 자식 교육에 애를 썼다니, 내심 놀랍기도 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집중적으로 어린이책들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허둥지둥 책사재기라도 했던 것처럼 산만한 경향도 두드러진다. 도대체 뭘 추구하며 살았는지 어수선하기 이를데없다.

 

책값이 아깝다. 책만 사는 바보.

 

http://www.aladin.co.kr/events/eventbook.aspx?pn=140701_15th_records&CustNo=787270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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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거론한 책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화가 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p. 173...한국의 경쟁적인 의료기술 이용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정보의 비대칭 즉, 의학적 지식이 환자보다 의사에게 전적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환자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진료행위가 병원의 수익을 위해 쓰이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임산부를 위한 초음파 검사가 있다. 2008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임산부들은 병원의 권유로 태아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해 평균 10회의 초음파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초음파 검사가 유산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고지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부는 산모들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지만 의사가 권하는 모든 검사를 받다 보면 보조금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르웨이나 스웨덴의 경우 젊은 나이의 건강한 산모에게 초음파 검사는 권하지 않고 기형아나 유산의 위험이 높은 산모들에 한해 1회 시행한다. 만약 초음파 검사가 비급여 대상이 아니었다면, 또 병원 간의 경쟁적인 상황이 없다면 산모에게 위험성도 고지하지 않은 채 평균 10회에 이르는 초음파 검사를 권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30대 중후반에 임신했던 나 역시 10번 정도 의사가 시키는대로 꼬박꼬박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단 한번도 검사받는 날을 미루거나 거르지 않았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자연분만이 가능했던 내 건강상태를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제왕절개분만을 유도했던 의사를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이라고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다. 내가 좀 더 현명해졌다고 볼 수도 없다. 작년 12월 지간신경종이라는 간단한 수술을 받을 때도 MRI검사까지 받아가며 130여만 원이라는 비용을 아무런 저항없이 감당했기 때문이다.

 

'사악하다'라는 단어가 계속 입안에서 맴돈다. 전문적인 의료집단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나 같은 성실한 환자는 결국 이런 시스템의 봉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데 화가 나는 것이다. 노르웨이같은 양식이 통하는 나라를 계속 부러워해야 하는 건지, 다음과 같은 책을 읽고 정신무장을 해야 하는 건지...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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