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서점에 들렀을 때 프랑스의 '신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책이 깔려 있기에 의외다 싶었다. 더 의외인 건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프로네시스, 2008)란 타이틀. 같이 나온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프로네시스, 2008)은 여러 차례 출간됐던 책이므로 '오래된 새책'이고 작년에 썼다는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와는 30년의 터울이 있으니 합해놓으면 '프랑스의 한 좌파 지식인'의 30년 궤적이 되겠다. 레비의 입장에 동의하진 않지만(최근에 읽은 수잔 벅모스나 지젝 같은 좌파에 나는 더 끌린다) 그의 포지션은 한국사회에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단적으로, 그가 '반미주의에 반대하는 좌파'이기 때문이다. 가령 '친미 좌파'는 한국에서라면 좌우 모두가 불편해하는 포지션이다. 그런 '불편함'이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사르코지의 친구이면서도 루아얄(사회당)에 투표했다는 레비의 의의가 아닐까 싶다(한국에서는 그게 가능할까?).

경향신문(08. 08. 02) “반자유주의·반미주의는 좌파가 뿌리쳐야할 ‘유혹’들이다”

저자 얘기부터 해야겠다. 그것이 이 현란하고도 신랄한 책을 읽어내는 출발점이기에. 베르나르 앙리 레비.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서른살이던 1977년 처녀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통해 인간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신철학’을 주창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좌파와 우파, 서구 제국주의와 제3세계 군부독재, 부시와 후세인 등을 싸잡아 공격해온 성역 없는 비판자. 스스로를 반-반미주의자(anti-antiamericanist)라고 부르는 인물. ‘친미 지식인’ 또는 미디어 노출을 즐기는 ‘지식-언론인’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보스니아, 수단 등 세계의 분쟁지역에 직접 뛰어들어 적극적 관심을 호소하는 현실참여 지식인이기도 하다. 지난해 초 출간된, 매혹과 환멸이 뒤섞인 현기증 나는 나라 미국을 탐색한 ‘아메리칸 버티고’를 기억하는 독자들도 있겠다.

그런데 그가 때늦은 ‘이념 고백’을 했다. “나는 거의 유전적으로 좌파이다. 좌파는 내 가족과 같다. 그러므로 자기 가족을 와이셔츠 갈아입듯 바꾸는 법이 아니다”라고. 책의 집필은 2007년 1월23일 시작됐다. 프랑스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던 니콜라 사르코지와 통화를 한 직후다. 저자는 20년 넘게 우정을 쌓아온 사르코지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역시” 좌파 후보(세골렌 루아얄)에게 투표했다. 30년 동안 그와 투쟁을 같이 해온 앙드레 글뤽스만이 우파로 전향하는 등 지식인들의 ‘우파로의 이동’이 이뤄지던 때다.



책은 레비가 왜 좌파를 끝까지 고수했는지에 대한 변론서인 셈이다. 더 나아가 선거에서 패배한 좌파의 몰락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 좌파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좌파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성찰했다. 원제를 직역하면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 사르트르가 1960년 알제리 전쟁이 끝난 후 암울했던 시기 좌파를 표현한 말이다.

저자는 우선 자신을 비롯한 프랑스 좌파의 정체성을 관통하는 네 가지 정신적 유산을 거론한다. 드레퓌스 사건, 비시 정부, 알제리 전쟁, 68혁명. “좌파에 속한다”는 것은 이 각각의 사건에서 드러난 인권수호,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권위주의·반전체주의라는 ‘반사작용’을 이용하는 방법을 되찾고 그것들을 ‘함께’ 작동시킬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인권문제를 등한시하는 반식민주의나 반파시즘 정신이 결여된 68혁명 정신 등 균형을 잃은 반사작용이다.

책은 이어 오늘날 좌파가 뿌리쳐야 할 ‘유혹’들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저자가 보기에 20세기 좌파의 몰락은 전체주의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 결과 붉은색의 전체주의인 공산주의와 갈색의 전체주의인 나치즘의 결합이 목도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전체주의적 유혹의 붕괴 이후 그것을 대신하는 두 번째 유혹이 횡행하고 있다. 이 두 번째 유혹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그 유혹이 좌파가 아닌 우파적 영감에서 얻어졌다는 것. 저자가 “우파적 좌파” “현기증을 일으키는 좌파”라고 비판하는 지점이다.

저자는 좌파가 뿌리쳐야 할 유혹들로 반자유주의, 반미주의, 반유대주의, 파쇼이슬람주의, 보편성의 위기 등을 꼽는다. 우선 반자유주의. 혹 그것은 자유주의를 지구상 모든 악의 원천으로 돌림으로써 지역 국가들을 독차지하고 국민들을 약탈하는 엘리트들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는 것 아닌가. 그리고 ‘반자유주의적 수사’에 담긴 파시스트적이거나 나치적 수사학을 간과하지는 않는가. 저자는 이 부분에서 최근 조르주 아감벤이나 슬라보예 지젝 등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반자유주의가 결국 나치즘으로 향했던 독일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가 재발견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다음은 반미주의. 할 말이 없을 때마다 “그것은 미국의 잘못”이라면서 미국을 인류의 모든 죄악과 과실의 동의어로 만드는 것은 좌파들을 같은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것 아닐까. 저자는 “반미주의는 바보들의 진보주의”라고까지 말한다. 게다가 반미주의에는 반유대주의가 숨어있다. 저자는 반미·반제국주의가 ‘제국 대 반제국의 대립’ 구도 이외 모든 문제들의 발언권을 박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계 각지의 억압받고 핍박받는 자들의 고통을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좌파가 반미·반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파쇼이슬람세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비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흩어지고 나뉘어진 인류라는 가정 위에 세워진 ‘차별주의’라는 낡은 독트린이 대거 회귀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인권·사람에 대한 존중 등 보편주의를 통해 차별주의의 유혹을 추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카뮈, 사르트르 등을 거론하면서 ‘감상적 좌파’에 맞서는 ‘우울한 좌파’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회의적이었지만 투쟁하고 염세적이었지만 검소하고 실천적이었으며 권력을 무거운 부담으로 여겼던 이들 말이다.

프랑스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어 따라잡기 쉽지 않은 책이다. 게다가 옮긴이의 말처럼 “거의 폭력에 가까운 다양하고도 많은 정보”가 수많은 인용과 비유, 화려하면서도 호흡이 긴 문체에 녹아들어 있다. 옮긴이가 세세하게 달아놓은 수많은 주석과 함께 읽어내는 끈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저자가 프랑스 좌파의 과제들로 제시한 화두들은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에 다름 아니다. 특히 프랑스와 우리나라, 둘다 실용주의와 경제 우선 정책을 내세운 우파 후보가 나란히 승리한 공통점을 지녔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도 적지 않다. 저자가 사르코지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몇 가지 이유. “경제적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그의 태도” “사르코지가 표방한 실용주의, 아니 기회주의” “어떤 사유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기 때문”. 30년 전 출간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도 새롭게 번역돼 나왔다.(김진우기자)

08. 08.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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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8-02 01:28   좋아요 0 | URL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귀환'에는 저 또한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측면이 있지만, 그의 '위치' 자체가ㅡ오히려 현재에 더ㅡ'문제적'이라는 점은 저 역시 공감하게 됩니다.

로쟈 2008-08-02 18:02   좋아요 0 | URL
친미 보수주의자들이 이 정도 포지션으로만 이동해도 '대화'가 좀 되지 않을까 라는 게 제 '망상'입니다...

람혼 2008-08-03 03:44   좋아요 0 | URL
120% 동감합니다.

드팀전 2008-08-02 15:44   좋아요 0 | URL
반미주의는 바보들의 진보주의다..라는 말이 재미있군요.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아무곳에나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붙이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요. 그렇게 말해버리면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걸로 놓치는 것들이 또 얼마나 많을지..

로쟈 2008-08-02 18:01   좋아요 0 | URL
'반미=좌파'라는 프레임을 깨는 것이 좌파의 확장이 될는지, 투항이 될는지는 어조 잘 모르겠습니다. 한데, 사실 촘스키나 하워드 진을 '반미 좌파'라고 분류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구요(미국 정부를 비판하지만 그들은 미국을 사랑하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2 16:24   좋아요 0 | URL
이 양반이 1990년대 초에 쓴 <자유의 모험>을 봤는데 어째 좀 삐딱하고 냉소적인 거 같아요.재주는 많은데 경박한 것 같기도 하고...<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은 주로 진보파들을 때렸기 때문인지 당시 황혼기의 사르트르가 격하게 욕했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8-08-02 17:59   좋아요 0 | URL
외모도 출중한 테레비-지식인이죠. 다만 '친미 좌파'라는 포지션이 우리에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2 20:51   좋아요 0 | URL
이제 세월의 심술이 그의 외모에 나타나더군요.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 우리나라에 막 주간 조선에 번역되던 때의 사진은 배우 같더군요.그때가 1978년인데...물론 저는 그 당시의 주간 조선을 10여년 전 헌책방에서 1년치를 구했어요.혹 제 나이에 대해 오해하실까봐 알려드려요.

로쟈 2008-08-02 23:46   좋아요 0 | URL
그래도 미니멈 40대 중반이십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1   좋아요 0 | URL
40대라뇨! 제 몸매와 목소리가 20대인데...얼굴은 10대! 보약을 잘 못 먹은 10대처럼 생겼지만요.어우...사진을 공개하든지 해야지 안되겠어요.

로쟈 2008-08-03 20:29   좋아요 0 | URL
'미니멈'인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40   좋아요 0 | URL
헤헤헤...그냥 화끈하게 직설적으로 20대라고 해주시면 안되나요?미니멈하면서 애매하게 하는 것보단요.

로쟈 2008-08-03 22:47   좋아요 0 | URL
화끈하게는 50대 후반이신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3:21   좋아요 0 | URL
으....

2008-08-03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4 22:53   좋아요 0 | URL
헤헤헤...
 

교수신문에서 좀 지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중국 칭화대에서 공자철학을 강의하는 서양인 교수에 관한 것이다. '화제'거리여서 옮겨놓는 건 아니고(하지만 한국대학에서 퇴계철학을 강의하는 벽안의 교수를 상상해보는 것도 흥미롭긴 하다), 기사 중에 한국 기독교인을 가리켜 '유교적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는 대목이 눈에 띄어서이다(사실 한국 기독교인들도 제사를 거부하는 것 말고는 유교적 인간 아닌가?). 참고할 만한 관련서들을 잠시 생각해본다(찾아보니 '윤동주 시에 나타난 유교적 기독교'를 다룬 논문도 눈에 띈다).  

교수신문(08. 07. 07) 碧眼의 이방인은 ‘유교’를 어떻게 가르칠까

중국대학에서 서양인이 공자철학을 중국인에게 가르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다니엘 벨 (Daniel A. Bell) 중국 칭화대학 교수가 종종 듣는 말이다. 유교의 종주국에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유교를 강의한다는 것은 마치 뭍에 사는 토끼가 물에 사는 고기에게 어떻게 헤엄치는가를 가르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벌써 4년째 하고 있다.

 

캐나다인으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하던 벨 교수는 운명을 바꾸는 만남에 마주쳤다. 바로 중국인 부인을 만난 것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중국에 ‘올인’했다. 그 운명적인 만남을 순순히 받아들인 벨 교수는 그 후로 중국에 와서 중국인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살고 있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살려는 것이다. 그랬더니 정말 복도 굴러왔다. 그는 방문교수 신분으로 왔지만, 현재 중국 명문 칭화대학 정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교수직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박사학생 지도교수’ 자리에까지 빠르게 승진했다.

벨 교수는 칭화대학이 문화혁명(1966~1976)이후 처음으로 인문학부에 채용된 외국인 교수다. 그는 또한 중국지도층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교수이기도 하다. 공산당간부 양성의 산실인 공산당중앙학교에서 열린 비공개회의에 초대받기도 했다.

영국 가디언紙 블로그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그는 중국에 온 이후 발견한 서양인의 중국에 대한 ‘오해’를 지적한다. 예를 들면 “중국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전제주의 국가가 아니다. 대부분 서양국가의 중국에 대한 생각과 정책은 중국에 대한 편견에 기인하고 있다. 싱가포르에 비하면 중국은 학문자유의 천국이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이런 ‘중국옹호’의 발언과 그가 중국인 부인을 둔 사실, 그리고 중국에서 받는 특별한 대접 때문에 많은 서양 사람들은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공산당에게 세뇌당한 줄 알아요,” 그가 칭화대 부근 한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말했다.

사실 그는 중국에 대해 좋은 점만을 말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중국에 대한 직언도 서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중국정부가 1989년 ‘천안문사태’의 희생자들에게 사과를 표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대부분의 중국인은 그 때 중국정부가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그처럼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현재 공산당이 이끄는 중국정부가 좀 더 ‘안정적이고 합법적이게’(stable and legitimate) 되면 언젠가는 사과를 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하버드대 유교학자 뚜웨이밍(杜維明) 교수는 한 강의 시간에서 유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동양의 중국, 한국, 일본 중 한국의 유교전통이 종주국 중국보다 현재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유교학자로서 다니엘 벨 교수 역시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개화기때 한반도에서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다름 아닌 유교학자들이었다. 서양학자들은 이들을 ‘유교적 기독교인’(Confucian Christian)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머리에 갓을 쓰고 않아 성경책을 읽었고, 교회에 가서는 남녀가 따로 앉아서 찬송가를 불렀다. 기독교인인지만 생활방식은 여전히 유교적인 모습을 유지한 것이다. 벨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유교적 기독교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유교사상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역할도 했다고 분석했다. “유교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대학교수의 사회적 권위가 큽니다. 그들의 말은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독재 시절에 이에 반대하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성명은 당시 정부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문화혁명뒤 유교가 많이 천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르크스 사상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와 지식인들도 새로운 눈으로 유교를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벨 교수가 말했다.(써니 리 / 중국통신원·베이징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08. 08. 01.

P.S. 나는 한국인을 이해하는 키워드, 혹은 '문화적 DNA'가 '유교' '기독교' '한국전쟁'이 아닐까 싶었는데(10가지 코드는 강준만의 <한국인 코드> 참조), '유교적 기독교인'이란 개념 덕분에, 둘로 줄일 수 있게 됐다. 그런 관심 때문에 언제부턴가 읽어보려고 하는 책은 '벽안'의 도이힐러 교수가 쓴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아카넷, 2003)과 정수복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생각의나무, 2007)이다. 리뷰들이야 여럿 읽어뒀지만 아무래도 직접 통독해봐야 생각할 거리들을 더 얻을 수 있을 듯하다...

P.S.2. 말이 나온 김에 도이힐러 교수의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한국학 전공자인지라 방한이 이례적인 건 아니고 작년 가을에도 한국을 찾았었다('한국사회의 기독교적 변환'이란 책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곧 이명박 장로님이 대한민국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할 텐데 말이다).

경향신문(07. 10. 11) 도히힐러 교수 “한국인들 한국학을 몰라”…‘지원 인색’ 꼬집어

“한국에서는 아직 ‘한국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영국 런던대 명예교수(72)는 11일 서울대 규장각에서 열린 ‘도이힐러 교수와 함께 한국학 40년을 회고한다’ 토론회에서 한국학의 국제화 수준을 이렇게 비판했다. 그는 “한국학이 개설된 외국 대학에도 담당교수 1명이 어학, 역사, 문학, 경제를 한꺼번에 가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한국학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고 질타했다.

도이힐러 교수는 특히 국내 한국 관련 학문 연구자의 의사소통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한국 학계에는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연구자가 거의 없어 외국연구자와 토론하는 데 애를 먹는 일이 많다”고 지적하고 “한국사를 연구하더라도 국제화를 추구한다면 의사소통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위스 출신인 도이힐러 교수는 40년 전인 하버드대 유학시절 한국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1967년 한국 관련 자료를 얻기 위해 서울대 규장각을 찾아왔다. 도이힐러 교수는 “하버드대에서 구한말 외교사를 공부하던 중 서울대에 개항과 관련된 사료가 풍부하게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67년에 무작정 한국을 찾아왔다”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한국학의 매력에 푹 빠져든 도이힐러 교수는 73년에 다시 한번 한국을 찾았고, 75년에 스위스 취리히대 한국학 교수로 임용됐다. 88년 한국학 연구센터가 있던 런던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한국학의 불모지인 유럽에 한국학의 뿌리를 내렸다.

그는 92년 자신의 한국학 연구를 결산한 ‘한국의 유교적 변환: 사회와 이데올로기연구(하버드대 출판부)’를 발간, 한국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런던대 퇴임 후에도 취리히로 돌아가 한국학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내 젊음을 바친 한국학을 더 파고들겠다”면서 “조선시대 사회사를 대한 논문도 곧 집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강병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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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02 16:25   좋아요 0 | URL
도이힐러 여사는 2003년 경에도 우리나라에 왔죠.한국남자와 결혼했는데 사별했고 한국에 올땐 시댁을 방문한다고 합니다.그런데 인터뷰 기사를 보면 조선유교에 대해 너무 호의적인 해석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마치 계몽사상 이전 유럽 지식인들이 중국의 관료정치인들을 칭찬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 같았어요.예전에 김용옥 씨가 "서양인이 어떻게 한문문헌을 잘 해독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지 말라.우리나라 학자보다 한문해석 실력이 더 뛰어난 이도 많다."고 했죠.그리고 도서관에 가시면 이번에 개정판 나온 이인화<머나먼 제국>뒤에 서평으로 나온 도날드 베이커(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 교수)의 글을 읽어보세요.그는 천주교를 수용한 조선 후기 유학자를 연구한 학자입니다.티비에서 보기도 했는데 정말 한국어를 잘 합니다.

로쟈 2008-08-02 20:15   좋아요 0 | URL
한국인이 서양학문을 하는 것보다 두 배는 어려울 텐데(적어도 우리는 무얼 읽어야 하는지는 알고 시작하지요), 여하튼 배울 점이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2 20:53   좋아요 0 | URL
미국인 중 한국학하는 이들 중에선 평화봉사단 출신이 많더군요.
 

부고기사를 옮기는 일이 드물지 않아졌다. 다 아는 소식이지만 오늘 새벽에 소설가 이청준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뉴스는 이미 접했기 때문에 의외의 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데뷔작 제목처럼 가뿐하게 '퇴원'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고인과 인연이 있는 후배 소설가는 문상을 다녀왔다고 문자를 보내왔는데, 나는 개인적인 인연을 따로 갖고 있지는 않아서 다만 한 세대 한국문학을 대표했던 작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빌 따름이다. 지금쯤 태평양 항로 어디메쯤 가고 계실까?.. 고인과 막역했던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의 추모의 글도 같이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07. 31) '한국 현대소설’ 개척한 4·19세대 대표작가

작가 이청준은 삶을 캄캄한 밤에 산길을 더듬어가는 것에 비유하곤 했다. 그런 도정에서 문학은 ‘방금 누가 지나갔으니 빨리 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는 거짓말이란다. 그가 평생을 바친 ‘소설이란 거짓말’은 그 말의 가치를 믿음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안고 남은 삶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위무, 인생의 부끄러운 상처와 아픔을 풀어내는 씻김질이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지적인 작가, 서구 장르인 소설을 한국화시킨 작가 이청준의 타계 소식은 문단과 독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요즘 기준으로는 다소 이른 나이인 데다 투병 중에도 쓰던 소설을 마무리한 그의 창작혼이 더욱 애틋함을 자아냈다. 지난해 폐암 말기 소식이 전해진 뒤 1년여 투병해오던 그는 항암치료를 중단한 뒤 급속히 병세가 악화됐다.

최인훈, 김승옥과 더불어 4·19세대 작가로 출발한 이청준은 군사독재와 산업화의 억압된 시대를 살아오면서 비인간적인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한국적 모더니즘의 언어로 수행했다. 100쇄를 돌파해 현대문학의 금자탑을 쌓은 ‘당신들의 천국’을 비롯해 ‘낮은 데로 임하소서’ ‘매잡이’ ‘이어도’ ‘소문의 벽’ ‘비화밀교’ ‘서편제’ 등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현실비판은 대상과 동일한 차원에 서는 법 없이 그 이면을 살펴봄으로써 삶의 원형질에 대한 탐구로 승화됐다. 그런 관심은 만년에 신화의 세계로 확대됐다. 그는 등단 초기 서너 군데 잡지에 관여하고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잠시 적을 둔 것을 제외하고는 글쓰기에만 골몰했다.

2003년 장편소설 12권, 중·단편 10권 등 25권짜리 전집(열림원)이 나온 뒤로도 장편 ‘신화를 삼킨 섬’, 소설집 ‘꽃 지고 강물 흘러’ 등 여러 권의 책을 발표했다. “벼랑에 서있다는 각오로 쓴다. 그렇기 때문에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장인정신이 빚어낸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집이다.

그의 대표작은 역시 ‘당신들의 천국’이다. 1976년 발표돼 2003년 100쇄를 돌파한 이 책은 소록도 나환자촌을 배경으로 권력의 문제를 추적한다. 주인공 조백헌 원장은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해 매립공사를 강행하지만 환자들의 불신과 그로 인한 내적 방황을 겪는다. 권력은 그것을 쥔 자를 끝없이 시험한다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 작품이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염두에 두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그의 소설은 현실을 곧바로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다. 영화 ‘서편제’로 유명해진 ‘선학동 나그네’, 역시 영화 ‘밀양’의 원작인 ‘벌레 이야기’에서 아무리 억압해도 무너지지 않는 존엄성, 가해자가 용서를 이야기하는 상황을 그린 데는 제5공화국과 광주항쟁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담겨있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는 “현실에 패배한 사람들이 억압하는 현실과 상처받는 개인이라는 이항대립을 초월해 새로운 억압으로 추락하지 않는 이념의 질서를 창조하는 모색 과정”을 이청준 소설의 특징으로 든다. 실패하고 갈구하는 개인, 탐색과 추리 기법, 액자구조, 다원적 시점, 열린 결말 등은 그런 문학적 목표에 도달하는 문학적 장치다. 권오룡 한국교원대 교수 역시 “인정이냐, 부정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현실에 저항하는 이청준 문학의 애매성은 손쉬운 선택을 거부하고 모순의 긴장을 끝까지 견뎌내는 힘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세계에 대한 비극적 상황인식, 실패자에 대한 공감은 그의 가족사와 분리되지 않는다. 좌익활동을 했던 아버지는 작가가 여덟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장남이던 형님도 일찍 유명을 달리했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그는 자연스레 어머니와 가족, 일가친척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그것이 부담스러워 오히려 모두가 바라던 법대가 아닌 문리대를 택하고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 그의 삶의 원형이자 스스로 가장 특별하게 여긴 작품이 단편 ‘눈길’이다.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고향집에서 대처로 공부하러 간 아들을 기다리다가 마지막 잠을 재우고 다음날 새벽, 떠나보낸 뒤 눈위에 찍힌 자식의 발자국을 되밟아 돌아가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 세상 정처없는 것들의 가엾음을 드러낸다. 광주 서중에 입학하면서 외사촌 누이집에 더부살이하게 됐을 때 어머니가 손수 갯벌에서 잡아온 게를 망태기에 넣어 들려보냈는데 그것이 썩어 아무렇게나 버려질 때의 심정 역시 작가가 즐겨 들려주던 유년기의 한 자락이다.

남도의 정서는 이청준의 삶과 문학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남도 판소리와 문인화의 현묘한 경지는 ‘이어도’나 ‘서편제’의 신비로우면서 승화된 한의 정서로 고즈넉하게 되살아났다. 음악과 회화에 조예가 깊었던 작가는 임권택 감독, 김선두 화백 등 여러 예술가들과 친분을 나누면서 삶의 호사와 여유를 누렸다.

이청준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겸손함과 자상한 배려를 잊지 못한다. 책이 나오면 막내 편집자까지 꼭 밥상에 초대했고 자신의 문학작품을 좋아하는 독자 앞에서 늘 겸손했다. 그의 손에는 담배가 꼭 들려있었고 여행을 떠날 때면 배낭에 술병을 반드시 챙겼다. 철저하면서 조용하고 익살스러웠으며, 평생 동지로 지낸 문학과지성사 동인들을 만날 때 빼고는 문단 나들이가 잦지 않았다. 자신의 병을 알았을 때 “석양녘 장 보따리 싸는 심정”이라고 했던 그가 먼 길을 떠났다. 이청준 없는 한국문학, 예정된 일이었지만 슬프다.(한윤정기자)

경향신문(08. 07. 31) 그대, 이제 그대의 천국으로 가시는가

쉬엄쉬엄 왔는데도 숨차고 다리 후들거려 ㅅ의료원 영안실 빈 의자에 잠시 앉아있자니 뒤에서 들리는 소리.

-김 선생님, 여기 웬일이세요.

돌아보니 그대가 아니겠는가.

-웬일이라니, 그대 장례식에 오지 않았겠소. 그런데 그대야말로 웬일이오? 이렇게 나와도 괜찮겠소?

-잠시 나왔을 뿐이외다. 뭐 별일 있겠어요?



그렇다. 무슨 별일이 따로 있겠는가. 우리는 평소처럼 낮은 소리로 또 눈짓으로 이런저런 말을 나눴소. 요즘 날씨란 장마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둥, 황소도 병에 걸려 자빠지기 일쑤라는 둥, 그야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는 둥, 기름 값이 천정부지라는 둥, 이승엽이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는 둥.

이 평소처럼 낮은 소리, 낯익은 눈짓 속에 있자니 어느새 숨결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후들거리던 다리도 거짓말처럼 멀쩡해지지 않겠는가. 대체 이 편안함이란 무엇인가. 이젠 일어설 수조차 있었소. 뿐이랴. 능히 걸을 수조차 있었소.

그대의 손에 이끌려 영안실 안으로 들어서자 놀라워라. 그대는 어느덧, 거짓말처럼 순백의 꽃밭 속 검은 사진 속으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소. 또 놀라워라. 내가 향을 피워도 아무 말 없었소. 다시 또 놀라워라. 절을 두 번씩이나 해도 모른 척 하지 않겠는가. 그대 이래도 되는 일인가.

하릴 없이 쫓기듯 물러날 수밖에.

밖에는 그대를 보내는 친지들 꿀벌처럼 모여 웅웅거리고 있었소. 생수에, 깡통 맥주에 취해 무성히 그대 흉보기에 정신들이 없어 보였소. 옆에서 누가 듣는 줄도 모를 만큼 신바람이 났소.

이 무구한 자기기만, 이 천진한 인간다움.

나도 신바람이 날 수밖에.

대서양 해안까지 흘러간 제주도 문주란 씨앗을 소재로 소설 한 편 쓰기 위해 멕시코까지 찾아간 이 잘난 소설쟁이가 귀국할 때의 일. 금연의 비행기 속에서 위스키 한 병을 몽땅 비웠다 하오. 이 굉장한 애연가에겐 그 길이 상책이었으니까. 인천공항에 내려도 끄떡없었다고 그는 큰소리쳤다 라고. 주석에서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 얘기를 신바람 나게 했소.

그러자 누군가 대번에 항의했소. 왈, 반만 맞고 반은 틀렸소 라고. 이 목격자의 증언은 이러했소. 인천공항에 내린 이 잘난 소설쟁이는 가방 찾을 생각도 까맣게 잊고 호기롭게 리무진에 올랐다 라고.

나도 어찌 쉽사리 질까 보냐. 재빨리 이렇게 대들었소. 그래도 그는 귀국 직후 ‘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2005)를 썼다 라고. 또 덧붙였소. 이 소설쟁이는 소주에 취하기만 하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저기 엉터리 평론가가 있다!”라고 외치기 일쑤였다고.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그는, 키 큰 평론가 김현의 표현으로 하면 제 어미를 팔아 ‘눈길’(1977)을 썼고, ‘자생적 운명’을 다룬 천금 무게의 ‘당신들의 천국’(1976)을 썼소. 조국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다시 그곳을 잊어야 했다’(2007)를 그만이 쓸 수 있었소.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4·3 사건의 합동위령제를 다룬 대작 ‘신화를 삼킨 섬’(2003)을 썼소. 그것은 다름 아닌 이상욱(‘당신들의 천국’)이 정요섭으로 변장하여 제주도로 간 얘기에 다름 아닌 것.

민족적 악업에 대한 자기 정화력이란 무엇이며 치유의 가능성은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 묻고, 있다 라고 스스로 우기는 이 야생 당나귀 모양 고집스러운 키 큰 소설쟁이 이청준이여, 우리의 국민작가 이청준 사백이여.(김윤식 |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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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8-01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김윤식 선생다운 글쓰기에 그만 슬며시 얼굴 위로 미소가 찾아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장례식장에서 있을 법한, 그런 미소였습니다.

로쟈 2008-08-01 12:20   좋아요 0 | URL
이청준의 '축제'도 떠올리게 하구요...
 

이번주 한겨레21의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되는 '세계철학대회'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인데, 당초엔 그리스철학 연구자인 F. M. 콘퍼드의 <쓰여지지 않은 철학>(라티오, 2008)을 고려했다가 <서기 천년의 영웅들>(아테네, 2008)에서 우연히 읽게 된 중세철학자 이븐시나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한겨레21(08. 07. 30) 이븐시나만으로도 얼마나 광활한가

‘철학자들의 올림픽’이라는 세계철학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된다. 1900년 제1회 파리 대회 이후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인문학 행사라고 한다.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비유럽 철학’과의 교류에 있으며, 그런 취지에 맞게 영미나 유럽 이외 지역의 철학자들이 다수 참여한다고. 이 ‘비유럽 철학’에 대한 관심이 대회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을까? 장피에르 랑젤리에의 <서기 천년의 영웅들>(아테네 펴냄)에서 중세 페르시아의 철학자 이븐시나(980~1037)에 관한 장을 읽으며 그런 의문이 들었다.

책은 지난 2000년 여름 <르몽드>에 3개월간 연재됐다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인데, 서기 천년을 전후한 시기를 산 12명의 인물들에 대한 초상을 그리고 있다. 정치가에서 수도사, 여류문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인물들이 고르게 배정된 가운데, 서구에는 ‘아비센나’란 이름으로 알려진 이븐시나가 서기 천년의 대표 학자로 소개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등장한 최고의 철학자’라고 일컬어짐에도 ‘철학자’라고 한정되지 않은 것은 그가 남긴 업적이 방대하면서도 넓은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주저인 <의학정전> 때문에 사전류에는 ‘의사’나 ‘의학자’로 기재되어 있을 정도다.

랑젤리에가 그려낸 이븐시나의 초상을 잠시 따라가보면, 일단 그는 조숙한 천재였다. 990년, 그의 나이 10살에 코란 전체를 다 암송할 줄 알았다. 게다가 이 특별한 아이는 당시의 문학·수학 지식에도 이미 통달해 있었고 그를 가르치려던 많은 스승들을 곧 앞지르게 됐다. 이후에 그는 스스로 학문을 터득해나가는데,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라고 판단한 의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오히려 숙련된 임상의들을 가르치기까지 한 것이 16살 때다. 밤낮이 따로 없이 독서하고 이해하는 일에만 매달린 그는 곧 지식의 대가가 됐다. 그런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도전해 마흔 번이나 읽은 것은 전설적인 일화다. 아마도 유일하게 애를 먹은 책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가였던 알 파라비의 책을 읽고서 비로소 <형이상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한다.

996년, 이븐시나는 그의 명성을 들은 사만 왕자의 병을 치유해준 덕분에 왕궁의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게 된다. 이 도서관의 장서가 4만5천 권이었다고 하니까 ‘지식의 탐구자’ 이븐시나에게는 경이로움 자체였을 법하다. 나중에 그는 왕궁으로 들어와서 살라는 제안을 받지만 거절하는데, 이유인즉 자신의 장서를 옮기려면 400마리의 낙타가 필요해서였다고 한다. 이븐시나는 18살에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독서를 통해서 지식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후 40년 동안은 지식을 확장시키는 대신에 글쓰기를 통해서 심화시켜나간다.

그가 21살 때 쓴 첫 저서 <편집>은 운율법에 관한 것이고, 법학자를 위해서는 <합과 실질> <양서들과 악> 두 권의 책을 쓴다. 그의 걸작인 <의학정전>(전 5권)은 7년에 걸쳐 쓴 것으로 무려 100만 단어가 들어가는 기념비적인 분량이다. 당대의 의학 지식을 집대성하고 있는 이 책은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된 뒤에 16세기까지 유럽의 의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븐시나는 평생 242권의 책을 남겼는데, <학문의 서> <치유의 서> <공정의 서> 등이 대표작이다. 특히 <치유의 서>는 5천 쪽이 넘는 분량으로 부피나 완성도에서 전대미문의 책으로 평가된다. 이성과 신앙, 그리스 철학과 코란을 조화시키려 했던 그의 철학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중세 후기 스콜라철학의 기원이 됐다. 비록 너무도 방대하고 정교한 그의 철학을 요약하는 일은 아직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븐시나의 생애와 저작을 잠시 들여다본 것은 우리에게 덜 알려진 ‘비유럽 철학’의 지평 또한 얼마나 광활한가를 확인해두기 위해서다. 어쩌면 매혹적일 수도 있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끼자 이븐시나는 자신의 철학에 따라 자기 몸을 돌보는 것을 중단했다. <치유의 서>에 그는 이렇게 써놓았다. “육체는 여행의 목적이 달성됐을 때 떠나보내야 하는 짐승이다.” 아직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의 철학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고 싶어지지 않는지?

08. 07. 31.


 

 

 

P.S. 코르방의 <이슬람철학사>(서광사, 1997)와 몇몇 중세철학사/사상사 책에서 이븐시나에 관한 장을 읽어볼 수 있다. 정수일 선생의 <실크로드 문명기행>(한겨레출판, 2006)에도 이븐시나의 학문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븐시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40번' 읽었다는 에피소드는 일부 책에 '4번' 읽은 걸로도 나오는데, '40번'이 맞는 듯싶다(적어도 그게 다수설이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와 구내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더니, 여러 인종의 철학자들 다수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더 비싼 식당도 있지만 내가 들른 곳은 3000원짜리 메뉴를 판매하는 곳이었다.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러 온 '철학자'들의 식단으로는 너무 '착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란에서 온 철학자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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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02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비에트 과학 아카데미 철학 연구소에서 나온 세계 철학사(중원출판사 번역본)에는 이븐 시나가 딱 한 줄 나와서 감질 났는데 자세한 정보를 얻게 되었군요.예전에 이븐 할둔도 페르샤 사람인 줄 알았어요.나중에야 페르샤인은 아랍인과 민족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죠.그런데 이븐 시나의 연구열은 대단하군요.

로쟈 2008-08-02 20:14   좋아요 0 | URL
압축된 전기여서 대략적인 생애만을 알 수 있지만 대단한 석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18세에 완성된 지식을 얻는다는 건 요즘 상상할 수 없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초중고 내내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만 권하는 사회에선 더 어렵죠.
 

국방부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인문교양서와 소설 등을 '불온서적'으로 분류해서 차단 대책을 강구하도록 전군에 지시했다고 한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불온서적'이란 말을 들어본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대체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기나 하는 것인지?(아, 거꾸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이번에 제시된 목록은 '북한 찬양'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 세 범주로 분류돼 있고,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촘스키의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등이 포함돼 있다(요컨대, 나쁜 놈들의 정복은 계속될 모양이다!). 후대에 사료로서의 가치도 가질 수 있겠기에 목록을 옮겨놓는다. 입대 대기자들은 미리 읽어볼 책의 목록이기도 하겠다. 2년간 못 읽는다니까(<벗>, <대학시절>,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세 권은 찾지 못했다). 보충기사를 보니 군은 작년에도 문화관광부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한 <국가의 역할>, <한국사회의 성찰>, <민주화, 세계화 '이후' 한국> 등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해서 거둬들인 바 있다고 한다. 한심한 일이지만 어쩌겠나, 민주화 이후에도 군의 역할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기사가 국방부 문건을 인용해서인지 도서명도 부정확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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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8-07-31 16:22   좋아요 0 | URL
전 불온한 인간인가 제가 감명깊게 읽은 책들이 목록에 아주 많이 올라가 있네요 ^^
양서 목록 아닙니까? ㅋㅎㅎ
근데 우리들의하느님과 대한민국사는 왜 불온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요..

로쟈 2008-07-31 23:56   좋아요 0 | URL
저도 <우리들의 하느님>은 의외였습니다. 그렇담 <강아지똥>도 불온하지 않을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7-31 16:25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군대는 이런 행동이 잘 어울려요.주한미군 사령관을 충실히 모시는 한국군 수뇌부들.당연히 미국대외정책을 비판하는 촘스키는 그들 기준으로는 불온서적 쓰는 빨갱이죠.군대에 올 봄에 시장경제 지향적인 경제 교과서를 무료배포했다니 전경련,대한상의와 군대가 우호적인 제휴를 한 거죠.그러니 삼성 비판하는 책은 시장경제를 어지럽히는 불온서적이구요.이제 김대중 노무현에 호의적인 책들도 불온서적이 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군요.

로쟈 2008-07-31 23:55   좋아요 0 | URL
제정 러시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드팀전 2008-07-31 16:32   좋아요 0 | URL
다행이지요...군대를 다시 가지 않아도 되니까..예비군도 끝났고.


로쟈 2008-07-31 23:5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민방윕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31 16:39   좋아요 0 | URL
군대에서 오염된 머리가 평생가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그게 문제죠.

로쟈 2008-07-31 23:54   좋아요 0 | URL
군복을 평생 못 벗는 사람들이죠...

열매 2008-07-31 16:57   좋아요 0 | URL
제가 육군생활할 때 소대장이 ㄱ산대 철학과를 나온 사람이었는데, 제가 읽던 러셀의 <서양철학사>2권에 '마르크스'에 대한 챕터가 있다고 가져가 외박시 반출한다는 단서를 달고 간신히 돌려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촛불이 아무리 일어난다고 해도, 교육감선거에서 볼 수 있듯 대한민국이 강남의 귀족들에 의해(을 위해) 돌아간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았듯이, 대한민국이 아무리 사상의 자유를 누린다 하더라도 모병제가 없어지지 않는한 군대는 변하지 않을 듯 하네요.

아마 저 책들을 선정한 정훈장교같은 사람들도 제목이나 저자등의 선입견에 기인한 선정일 뿐 직접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로쟈 2008-07-31 23:53   좋아요 0 | URL
'변증법'이 제목에 들어간 책을 갖고 있으면 법대생이냐고 묻던 시절도 있었는데, 사정은 별반 안 나아진 듯하네요...

2008-07-31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31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8-07-31 23:31   좋아요 0 | URL
옛날에는 이런 불온서적 목록이 나오면 오히려 베스트셀러가 됐는데요. 뭐 비밀리에긴 했지만... 요즘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8-07-31 23:52   좋아요 0 | URL
유감스럽지만, 한국군대의 지능은 진화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람혼 2008-08-01 03:40   좋아요 0 | URL
'막스' 베버의 책을 '맑스'의 책으로 '오인사격'하여 불온서적으로 압수해가던 그 옛날과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에 참으로 '뭥미'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갑자기 육군사관학교에 강의를 뛰고 싶다는 적극적이고 저돌적이며 무모하기까지 한 욕망에 휩싸입니다.

로쟈 2008-08-01 12:22   좋아요 0 | URL
육사에서 강의하면 '육사화'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