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다카시의 미시마 유키오 평전을 읽다가 오류가 눈에 띄어 교정한다. 원문의 오류인지 오역인지는 불확실하다(짐작엔 역자가 잘못 본 듯싶다). 일본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탄생과 관련한 것인데, 사이덴스티커의 회고에 따르면 1950대 후반부터 일본작가가 유력한 수상후보로 부상하고 1960년대 들어서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가외바타 야스나리에 이어서 젊은 작가 미시마도 대열에 가세한다(사이덴스티커가 마음에 정해둔 순서이기도 하다). 결국 수상자는 1968년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연장자이자 유력 후보였던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가 사망한 1965년은 미시마가 최후의 대작 <풍요의 바다> 연재를 시작한 즈음이다. 이미 1963년에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는 미시마는 3년 연속(그러니까 1963, 1964, 1965년에 후보였다는 것이겠다) 그리고 1968년과 1969년에도 후보에 올랐다고 이노우에는 전한다(모두 다섯 차례다). 최종후보에 올랐었다는 1963년이 눈길을 끄는데 (다니자키와 가와바타를 제치고 수상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이 해의 최종후보 6인 가운데 결과적으로는 3인이 노벨상 수상가 된다. 만약 미시마가 수상했다면 38세 수상으로,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됐을 것이다(실제로는 러디어드 키플링이 최연소이고 카뮈가 뒤를 잇는다).

이노우에가 마지막에 덧붙인 ˝실제 최연소 수상자는 그리스 시인 요르고스 세페리스˝가 오류인데 ‘최연소‘가 빠져야 한다. 1963년의 실제 수상자는 그리스 시인 요르고스 세페리스(1900-1971)라는 문장이어야 하기에. 우리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 시인 세페리스는 수상시점에 63세였으므로 최연소라는 수식어는 맞지 않다. 일설에는 노벨상 수상 불발이 미시마의 자살 동기 중 하나라고도 한다. 이 설에 따르면, 문학적 스승 가와바타가 이를 부담스러워 해 1972년 자살한다. 노벨상 유력 후보작가와 실제 수상작가가 연이어 자살한 것이 1960년대말-1970년 일본문학의 특이한 풍경이었다.

4부작 <풍요의 바다>의 제1부가 되는 <봄눈>(<신초), 1965.9.~1967. 1.)을 쓰기 시작한 1965년에 사망한 작가는 에도가와 란포(江戶川)와 다카미 준(南見順) 등 여러 명이다. 미시마가 다카미 준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미시마가 첫 번째에 염두에 둔 것은 7월 30일에 사망한 다니자키 준이치로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니자키는 미시마도 추천서를 쓴 1958년 이후 매년 노벨상 후보에 올랐지만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결국 수상하지 못하고 말았다. 수상을 전제로 한 외국 미디어의 취재가 허사로 끝난 적도 있어서 다니자키는 쇼크를 받았을 것이라고 도널드 킨은 전한다.
그러한 과정을 옆에서 보았던 미시마 자신은 1963년부터 3년 연속 공식 노벨상 후보가 된다(그 후 1968년과 1969년에도). 특히 1963년에는 사뮈엘 베케트(1969년 수상), 파블로 네루다 (1971년 수상) 등과 함께 최종후보 여섯 명에 포함되었다. 이때 미시마 나이 38세, 만약 수상했더라면 2020년 지금까지 최연소 수상자로 남았을 것이다(실제 최연소 수상자는 그리스 시인 요르고스 세페리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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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도 전에 읽은 것 같은 책들이 있는데 렉스 버틀러의 <슬라보예 지젝>이 그렇다(라이브 이론 시리즈의 여러 권이 그렇다). 원서는 2005년에 나왔고 나도 그 즈음에(아마도 도서관 책을 복사했을 것이다) 손을 댔던 책이니 얼만큼은 읽었을 것이다. 최근 몇년 팬데믹과 관련된 지젝의 책들만 읽다가 그의 철학서들을 올해 다시 읽으려는 참이라(오랜만에 들뢰즈와 지젝 읽기 모드다) 점검 차원에서 빼들었다. 다시 시작이다...

이런 모든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지젝이 말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우리는 서양 문명의 기원 이후 오직 드물게 찾아볼 수있었던 어떤 가능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고대 그리스의 영웅 안티고네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녀는 아주 터무니없이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비극적 대의를 위해자신을 희생한다. 즉, 우리는 여기서 라캉의 용어로 하면 ‘두 죽음 사이‘에 있는 존재, 자신의 외면이 껍데기나 잔해로 축소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안티고네처럼 대의가 결핍된 세상에서 어떤 비범한 대의에 사로잡힌 채, 모종의 멈출 수없는 힘으로 충만한 것 같은 사람이다. 지젝은 일종의 죽음충동, 자기소멸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가드러내는 것은 삶 자체가, 즉 심오한 의미에서 삶은 이러한 죽음을 향한 전진 앞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 우리가 그와 같은 삶을 영위할 때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저편 (저승)에서 볼 때만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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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준비차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을 다시 읽었다. 톡쏘는 문체는 4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살아있다(1986년에 한국어판이 나왔으니 40년차다). 다시금 확인하는 건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글턴의 문제의식이다. 실제로 <문학이론입문> 전후의 관련 저작 목록만 보아도 이글턴의 이글턴의 문제의식을 가늠해볼 수 있다(대부분 번역본이 나왔다가 절판된 상태다. <비평과 이데올로기>만 남아있는 듯싶다).

<비평과 이데올로기>(1976)
<마르크스주의와 문학비평>(1976)
<문학이론입문>(1983)
<미학의 이데올로기>(1990)
<이데올로기 입문>(1991)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1996)

문학과 이데올로기(문학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문학)를 탐색하는 것이 이글턴의 정치적 비평(<문학이론입문>의 결론장)이다.

문학을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범주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그저 사람들이 문학이라고 부르기로 제멋대로 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가치판단들은 개인적 변덕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판단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처럼 분명히 흔들리지 않는 더욱 심층적인 신념의 구조들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밝혀낸 것은, 문학은 곤충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존재하는것은 아니라는 사실, 나아가 문학을 구성하는 가치판단들이 역사적으로 가변적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또한 이 가치판단 자체도 사회의 이데올로기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치판단들은 궁극적으로는 단지 개인적인 취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집단들이 다른 사회집단들에 대해 힘을 행사하고 또 그 힘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의거하는 전제들을 가리킨다. 만일 이 말이 지나친 주장이요 저자 개인의 편견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영국에서의 ‘영문학(연구)‘의 발흥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것을 검증해볼 수 있을 것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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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문학 강의와 지성사 강의

10년 전 페이퍼다. 강의경력 30년차가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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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의 <오후의 예항>을 강의에서 읽었다. 주로 주인공 노보루(패거리에서 ‘3호‘로 불리는 13세 소년)와 류지(이등항해사였다가 그만두고 노보루의 새 아버지가 되는 30대 초반 남성)의 관계, 그리고 노보루 패거리의 의미에 대해서 다뤘는데 패거리의 두목(노보루와 같은 또래)에 대해서는 덜 말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저 적는다.

류지는 1만톤급 화물선의 선원으로 노보루의 선망(욕망)의 대상이었지만 노보루의 어머니 후사코(남편과 사별한 지 5년이 된 33세 여성)와 사랑에 빠지면서 선원(바다의 남자)을 그만두고 육지의 남자로 변신하려고 해서 노보루를 실망시킨다. 노보루 패거리의 두목은 그런 류지에 대한 처벌(살인)을 기획하고 노보루를 포함한 패거리와 함께 실행에 옮긴다. 그렇게 보면 <금색>이나 <금각사>와는 다른 인물 구도를 보여준다. 여성(후사코)의 존재감이 약화되는 대신에 두목이라는 제3자의 존재감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다른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시마의 남성 인물들은 미시마의 분신 역을 맡는다. 한편에 노보루-미시마가 있다면, 다른 편에는 류지-미시마가 있다. 둘의 관계가 새로운 부자관계로 갈등과 갈등의 봉합(화해)로 진행되면 전형적인 성장소설이 된다. 문제는 미시마(혹은 미시마의 인물들)가 이를 거부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두목의 존재기 특이한데 그 역시 13세 소년이지만 아버지의-이름(부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두목-미시마도 있는 셈). 아버지를 부정하는 아버지의 형상이란 면에서 여느 아버지와 다르다(안티-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설은 노보루가 류지처럼 되고 싶어하다가 그에게 실망하면서 두목처럼 되는 쪽으로 결말지어진다. 그 과정에서 류지(아버지)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것을 이들은 타락한 류지를 다시 영웅의 자리에 되돌려놓는 일로 간주한다. 이전 소설들에서와 달리 두목과 그 패거리가 등장하여 류지를 처벌하려고 한다는 점은 징후적이며 미시마 문학이 본격적으로 파시즘 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보게 한다(<오후의 예항>은 매우 위험한 소설이다). 미시마가 이미 단편 <우국>(1961)을 쓰고 영화(1966)로 만들던 무렵이니 이상한 건 아니다. 그는 수년 뒤 위험한 작가의 실례(할복 자살)를 선언적으로 보여주게 될 것이다...

(...)
늘 말하는 것처럼 세계는 단순한 기호와 결정으로 구성되어 있어, 류지 본인은 몰랐을 수도 있지만, 그 기호 중 하나였던 거야. 적어도, 3호의 증언에 따르면 그 기호 중 하나였던 것같아.
우리의 의무는 알고 있겠지? 굴러떨어져 나온 톱니바퀴는 다시 원래의 장소에, 억지로라도 끼워 맞추지 않으면 안 돼. 그러치 않으면 세계의 질서가 유지되지 않아. 우리는 세계가 텅비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 텅 빈 질서를어떻게든 유지해가는 수밖에 없어. 우리는 그를 위한 파수꾼이고 그를 위한 집행인이니까."
그는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어쩔 수가 없네. 처형하자. 그것이 결국 그놈을 위한 일이기도 해.......3호. 기억하고 있니? 내가 야마시타 부두에서, 그놈을 다시 영웅으로 만들어줄 방법이 한 가지 남았다. 곧 그것을 말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라고 했던 거."
"기억해."
노보루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허벅지를 누르며 대답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야."
대장을 뺀 다섯 명은 얼굴을 마주 보며 침묵했다. 모두 대장이 말하려고 하는 일의 중대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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