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집령에 바로 응답한 책이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과 진태원의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이다(두 책의 바탕이 되는 <신학정치론>과 <에티카> 새번역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일단 두 권을 출발점 삼아 읽는다. 출발점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혹은 근대철학의 두 갈래 길이다...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에서 진정한 원인으로서의 신과 신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 사이에는 초월적인 간격이 존재합니다. 신은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을 계속 움직이는 원인이며, 자연 그 자체는 아무런 내재적 원인으로서의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취른하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연적 실재들에 관한 데카르트의 원리는 전혀 부조리한 건 아닐지 몰라도 아무 쓸모도 없다고 주저 없이 주장했던 것입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물질적 자연 또는 물리적 우주를 표현하는 연장을 신의 본질에 포함시킵니다.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에게 연장은 신 바깥에, 그리고 신보다 존재론적으로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곧 스피노자의 자연은 신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연장, 곧 물리적 우주는 데카르트와 달리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무한하게 생산되는역동적인 자연입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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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1,2부로 구성돼 있는데, 각 부는 성립 시기가 다르다. 1부는 1964년에 발표된 초판을 구성했으며, 1963년 논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들뢰즈의 프루스트 읽기는 1940년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한다). 70년대에, 즉 가타리와의 협업 이후에 추가된 2부는, 프루스트의 통일성을 비틀면서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란 책의 통일성도 무너뜨리고 기형적인 것으로 변형한다(이에 대한 판단과 해석은 별도의 문제다).

아래 인용문은 1부의 결론(‘사유의 이미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프루스트적 기호의 의미를 다시 한번 설명해준다. 한데, ˝명석한 관념들보다 분명한 의미들은 없다˝는 문장은 바로 이어지는 ˝기호들 속에는 내포된 의미들밖에 없다˝는 말과 호응하지 않는 오역이다(영어판으로 확인했는데 불어판이 다를 것 같지 않다). ˝명석한 관념(clear idea)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의미(explicit signification)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호 속에 내포된(implicated) 의미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이다. 그러나 마주친 것, 즉 사유의 재료의 필연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분명히 기호와의 그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사유 활동은 단지 자연스러운 가능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유 활동은 단하나의 진정한 창조이다. 창조란, 사유 그 자체 속에서의 사유 활동의 발생이다. 그런데 이 발생은 사유에 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것, 처음의 혼미한 상태, 즉 단지 추상적일 뿐인 가능성들로부터 사유를 벗어나게 하는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유함이란 언제나 해석함이다. 다시말해 한 기호를 설명하고 전개하고 해독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하고 해독하고 전개시키는 것이 순수한 창조의 형식이다. 명석한 관념들보다 분명한 의미들은 없다. 기호들 속에는 내포된 의미들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사유가 기호를 펼칠 힘, 기호를 하나의 관념 속에서 전개시킬 힘이 있다면 그것은 관념이 감싸여지고 둘둘 말린 상태로 이미 기호 안에 있었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관념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즉 기호]의 숨겨진 어두운 상태 속에 있기 때문이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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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 공저의 책에서 문학비평 파트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공역자로 해설을 쓴 서동욱 교수가 맡았다(주로 프루스트론과 카프카론을 해설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론이 절판된 채 다시 안나오는 것도 미스터리다). 앞서 스피노자에 대한 페이퍼를 적은 김에 보태는 것인데, 인용문은 들뢰즈의 사유 구축의 두 출발점이 프루스트의 징후학과 스피노자의 표현 개념이라는 걸 한번더 확인시켜준다...

들뢰즈의 문학 비평 역시 상식적인 것을 다시 알아보는 일, 즉 재인식을비판하고서 생경한 자연, 그리고 근본적인 본질로 나아간다. 이 자연이란기존의 어떤 개념에도 매개되지 않은 미지의 것, 해독해 내야 하는 기호,
‘징후학‘symptomatologie의 대상이다. 들뢰즈의 이 징후학에 중요한 가르침을 준 이는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1964년 출간 이래 1976년까지 증보)을 통해 자신이 배운 바를 정리한 프루스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프루스트론을 출발점에 두고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프루스트를배경으로 한 징후학 또는 기호 해독이 들뢰즈가 스피노자로부터 발견한, 그리고 들뢰즈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 개념 ‘표현‘expression을 배경으로는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는지 역시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인식의 종류에 관한 스피노자의 분류에서 보듯 기호와 표현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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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치사상사 전공의 김영민 교수가 오랜 기간 준비한 논어 책들을 폭탄을 쏟아붓듯이 토해했다. 보통 두권짜리를 상상하게 되는데, 두 곱이다. 무려 네 권. 저자나 출판사나 이 정도는 '약물'이 의심된다. 어제 실물을 보려고 동네서점에 가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들어와 있지 않았다(안 들여놓을 건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기획회의에 논어번역비평이 연재된 걸 본 기억이 있으므로 내용은 미리 구경해보았다고 해도 무방. 다만 그 일부가 어떻게 거대한 구조물로 완결되었을지 궁금하다. 칼럼집 한권을 더 얹어서 리스트로 만들어놓는다...

[세트] 논어 : 김영민 새 번역 + 논어란 무엇인가 + 배움의 기쁨 + 논어 번역 비평 - 전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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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개정판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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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김영민 새 번역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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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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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기쁨- 김영민 논어 해설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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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말부터 강의차 들뢰즈의 책들을 다시 소집하고 있는데(대략 5년만의 소집 같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이 프루스트 읽기의 좋은 가이드이면서 동시에 들뢰즈 철학 이해에도 유익한 길잡이여서다. 길잡이를 만난 김에 더 욕심을 내보는 것인데, 일단 고른 것이 <스피노자>다. 물론 <차이와 반복>을 염두에 둔 것이다(알려진 대로 <차이와 반복>이 박사논문으로 제출될 때 부논문이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였다).















문제는 <차이와 반복>이라는 암벽등반에 필요한 워밍업. <스피노자의 철학>부터 단계를 밟아야겠다는 생각에 스피노자 책들도 소집령을 발령해놓은 상태다(이 또한 얼마만인지). 그런데 이게 소문이라도 났는지 대뜸 <스피노자 편람>이 번역돼 나왔다. '스피노자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과장이 아닌 대작이다(번역본은 1000쪽이 넘는다). 암벽 등반을 준비한다면서, 더 험난한 암벽을 향하는 것 아닌가란 느낌이 살짝 들기는 하는데, 아무튼 장비 욕심이 있는 편이어서 챙기게 되었다. 















국내 스피노자 전공자들의 책들도 방구석 어딘가에는 있을 터라(이 경우는 소집이 아니라 수배다) 찾아보긴 해야 하는데, 여하튼 이 정도면 스피노자 읽기는 성과만 남겨놓은 거 아닌가 싶다(아직 스피노자 주저들, 특히 <에티카>의 정본 번역본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게 함정인 것만 빼면).















기억을 더듬어 보면 스티븐 내들러의 책들이 나왔을 때, 스피노자 읽기를 잠시 고민했던 듯하다. 그때도 결행하지 못한 건 <에티카> 번역본 고민 때문이었는데, 시간이 흘렀지만 연구자들의 새 번역본이 아직 안 나오고 있다. 


봄학기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강의에서 다시 읽으며, '괴테와 스피노자'에도 관심을 두고자 하기에 스피노자 읽기의 명분은 없지 않다. 더 나아가면, 스피노자를 경유한 들뢰즈로까지 연결할 수 있겠다. 















거기에 다마지오. 느낌에 관한 책을 읽고서 더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 뇌과학자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 <데카르트의 오류>와 <스피노자의 뇌>이다. 이 '데카르트 대 스피노자'의 구도가 '관념론 대 들뢰즈'의 구도이기도 하다(요즘 핫한 인공지능(비유기체적 지능) 대 인간지능(유기체적 지능) 문제로도 이어진다). 이 전체를 총괄적으로 다루는 책이 어딘가에 있을까.






 










정리하면, 프루스트 읽기에서, 들뢰즈 읽기로 넘어가려고 스피노자 읽기를 시작하려는데, 뇌과학 책을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 스피노자 왈, 세계는 하나의 실체라고 했던가(들뢰즈 표현으론 '하나의 삶'). 바깥이 없는 스피노자! 그 스피노자에 대한 거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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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26-01-12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영양학, 면역학 책에서 <데카르트의
오류>라는 단어를 보고, 과학책에서 철학자가 나와서 특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마지오책에 스피노자가
제목인 이유가 있군요. 저는 다마지오의
<느끼고 아는 존재>란 작고 귀여운 책이
있어요 ^^ 평생에 없을거 같았던 스피노자를 찾아볼 계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