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의 마지막 대작 ‘풍요의 바다‘의 첫권 <봄눈>을 읽었다. <금각사>와 함께 일본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혔다는 작품(대외적으로도 미시마는 무라카미 하루키 이전 일본문학의 간판이었다. 다니자키와 가와바타보다도 더 많이 번역돼 더 많이 팔렸다). 다이쇼 초기를 시대배경으로 후작 집안의 미남 후계자 기요아키와 백작의 딸 사토코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다(사실 ‘소설‘이라기보다는 ‘로망스‘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니자키의 ‘소설‘ <세설>과의 차이다).

사토코의 구애적 제스처를 무시하던 기요아키가 그녀가 황족과 결혼하기로 결정되자(천황의 칙허까지 떨어진다) 갑자기 ‘급발진‘하는 이야기. 이유는 절대적 불가능성에 매혹돼서다. 성장기를 같이 보낸 사토코가 한순간 금지된 여자가 되자 구애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기요아키는 비로소 사토코를 열렬히 사랑한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요아키는 열세살 때 메이지 천황 행차 행사에서 비전하의 옷자락을 들어주는 시동 역할을 하다가 우아한 아름다움에 매혹됐었다. 절대적인 불가능성의 매혹.

타협적인 세계의 서사로서의 소설은 이러한 매혹을 감당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봄눈>이 소설을 초과하는 이유다. ‘풍요의 바다‘ 4부작(결과적으론 미시마의 긴 유서다)을 완결지으면 미시마 자신이 한갓 소설가를 초과하게 된다. 그 자신이 절대적 불가능에 매혹된 또다른 기요아키, 아니 원본 기요아키였다.

기요아키에게 환희를 안긴 것은 불가능이라는 관념이었다. 절대적인 불가능. 사토코와 자신을 잇는 실이 예리한 날붙이로 끊어 버린 거문고의 줄처럼, 솟구치는 단현의 비명을지르며 칙허라는 빛나는 칼에 베여 버린 것이다. 그가 어린 시절 이후 오래도록 되풀이해 온 우유부단함 속에서 비밀스레 꿈꾸고 남몰래 바라 온 사태는 이런 것이었다. 옷자락을 들며 올려다본 봄의 흰 잔설 같던 비전하의 목덜미, 우뚝 솟은 채 접근을 거부하던 비길 데 없는 그 아름다움은 그가 품은 꿈의 발원지, 그가 지닌 바람의 성취를 똑똑히 예언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불가능성. 이것이야말로 더없이 뒤틀린 자신의 감정에 변함없이 충실해 온 기요아키가 스스로 초래한 사태였다.
그러나 이 환희는 어찌 된 일인가. 그는 음침하고 위험하며 무서운 환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단 하나 진실한 것, 그것은 방향도 귀결도 없는
‘감정‘만을 위해 살아가는 일… 그런 삶의 방식이 마침내 그를 소용돌이치는 환희의 어두운 못 앞에 데려다 놓았다면, 남은 일은 그 못에 몸을 던지는 것뿐일 터였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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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공지다. 대구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서는 봄학기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는다(여름학기에는 <오뒷세이아>를 읽을 예정이다) 강의는 금요일(오후 1시-3시)에 진행하며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로쟈와 함께 읽는 일리아스


1강 3월 13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1)



2강 3월 27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2)



3강 4월 10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3)



4강 4월 24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4)



5강 5월 08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5)



6가 5월 22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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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1차세계대전의 기원

7년 전 책소개다. 개인적으로 강의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는 전쟁이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조국전쟁)과 제1차세계대전이다. 조국전쟁은 러시아사와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그리고 1차세계대전은 19세기와 20세기의 분할선이어서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오늘 강의에서 읽은 <라데츠키 행진곡>만 하더라도 1차대전의 당사국 오스트리아제국의 운명을 다룬 작품이다. 브로흐 소설과 제목이 같은 <몽유병자들>을 구해놓기만 하고 아직 통독하지 못했는데 시간을 좀 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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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광부처럼 노동할 의향이 있는가

7년 전 페이퍼다. 프루스트가 옮긴 러스킨의 독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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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을 강의에서 읽으며 그의 신작들도 언급했는데 <더 리얼 씽>(2024)과 <모더니즘>(2025)이 그에 해당한다. 모두 80대의 비평가가 펴낸 책(이글턴은 1943년생이다). 더불어 <더 리얼 씽>은 번역이 안 좋아서 강의에서 교재로 쓰려다 포기한 기억이 떠올랐다. 단순하게 아래 인용문에서 원문에도 없는 ˝19세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운운은 뭔가 어이없다는 인상을 준다. ‘19세기‘가 번역에만 들어간 말이다.

생년이 비록 19세기(1871년생)라 하더라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의 작가를 발자크(1799-1850)나 에밀 졸라(1840-1902)와 같은 19세기 작가로 분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 페이지에 ˝18세기 영국 작가 클라라 리브˝(이건 원문 대로다)란 말이 나와서 짝을 맞추려 ˝19세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로 옮긴 듯싶지만, 그렇더라면 그런 친절은 ˝20세기 프랑스 작가˝로 표현됐어야 했겠다. 같은 단락을 AI에게 번역하도록 해봤다.

˝그러나 예술은 어떻게 삶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일 수 있는가? 예술이란 형성하고 선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예술을 “삶을 충실하게 재구성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사물들이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에 충실한 채 어떻게 그것들을 다시 구성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들을 재배치함으로써 오히려 그 진실을 더 온전히 불러낼 수 있는 것일까? 어떤 경우이든, 모든 것이 재현될 수는 없다. 양성자는 실재하지만, 그것의 스케치를 휘갈겨 그릴 수는 없다. 척추를 따라 전해지는 찌릿한 감각은 회화보다 인쇄물에서 더 쉽게 재현된다. 기독교인에게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어떤 존경받는 신학자도 당신이 휴대전화를 준비한 채 예수의 무덤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면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실제로 벌어졌지만, 모든 칼부림과 고통의 비명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모든 리얼리즘은 자신이 묘사하는 것의 편집된 버전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론 별차이 없거나 더 이해하기 쉽다(AI의 번역은 1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뜻하는 바는 우리가 철학이나 이론서 번역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 거의 모든 언어의 어지간한 난이도의 책들을 이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번역에 대한 시비나 비평도 이제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긴 한데 아직 비용 고지서가 날아오지 않은 편익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형태와 선택성의 문제인 예술이 어떻게 삶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이 될 수 있는가? 19세기 프랑스 작가인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예술을 ‘삶의 충실한 재구성‘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이는 대로 충실하면서 한편으로 사물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그것들을 재구성함으로써 진실을 더 완전하게 환기할 수 있을까? 어찌 되었거나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양성자는 실제 존재하지만, 그 개요를 단숨에 휘갈겨 쓸 수는 없다. 척추의따끔거림은 그림보다 글에서 더 쉽게 표현된다. 기독교인에게 부활은 실제 사건이었지만,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라 해도 휴대폰을 들고 예수의 무덤 주변에 숨어 있었다면 부활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아우스터리츠전투(1805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동맹군과 치른 전투)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이 전투에서 격돌하는 검들과 고통스러운 비명까지 표현할 방법은 없다. 그러한 모든 사실주의는 사실주의가 묘사하는 것을 편집한 버전이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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