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바다‘의 셋째 권 <새벽의 사원>의 주인공은 환생자인 태국 공주 잉 찬이 아니라 앞선 두 권의 관찰자이자 조연 혼다 시게유키다.잉 찬은 혼다의 사랑의 대상이자 관음의 대상이다. 그런데 대상으로서 잉 찬은 혼다에게 보여지는 부분과 보여지지 않는 부분, 혼다가 볼 수 없는, 혼다의 시선 바깥의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칸트 철학에서 현상과 물자체에 대응하겠다). 여기에 혼다의 딜레마가 있다(미시마 자신의 딜레마로 봐도 좋겠다).

혼다는 잉 찬에게서 궁극적인 것(비상하는 잉 찬)을 보고자 하나, 그가 볼 수 있는 건 그저 관음적 대상으로 전락한 잉 찬이다(사랑의 불가능성 공식의 미시마 버전이라고 하자). 이런 딜레마와 마주하게 된 혼다에 대해 미시마는 이렇게 적는다. ˝인식자의 자살이라는 의미가 혼다의 마음 속에서 무게를 가진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라 해도 좋았다.˝(403쪽) <새벽의 사원>이 ‘풍요의 바다‘의 변곡점이라는 것은 ‘인식자의 자살‘이라는 화두가 무겁게 제시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젊은 시절부터 혼다의 인식의 사냥개는 극히 기민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한도의, 보는 한도의 잉 찬은 거의 혼다의 인식 능력에 부합한다고 봐도 된다. 그 한도의 잉 찬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혼다가 가진 인식의 힘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잉 찬의 알몸을 보고싶은 혼다의 욕망은 인식과 사랑의 모순에 양다리를 걸친 불가능한 욕망이었다. 왜냐하면 보는 것은 이미 인식의 영역이고, 설령 잉 찬이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그때 책장 안쪽 빛의 구멍으로 엿본 순간부터 이미 잉 찬은 혼다의 인식이 만든 세계의 주민이 됐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보자마자 오염되는 잉찬의 세계에는 혼다가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이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보지 않는다면다시 사랑은 영원히 도달 불가능한 것이었다.
비상하는 잉 찬을 보고 싶으나 혼다가 보는 한도의 잉 찬은 비상하지 않는다. 혼다의 인식 세계의 피조물에 머물러 있는 한 잉 찬이 이 세계의 물리 법칙에 반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꿈속을 제외하고) 잉 찬이 벌거벗고 공작새에 올라타 날아가는 세계는 그러기 일보 직전에 혼다의 인식 자체가 흐림이 되고 티끌이 되어 하나의 미미한 톱니바퀴에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바로 그 원인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고장을 수리하고 톱니바퀴를 교체하면 될까? 그것은 혼다를 잉 찬과 공유하는 세계에서 제거하는 것, 즉 혼다의 죽음을 뜻한다.
이제 분명한 점은 혼다의 욕망이 바라는 궁극적인 것, 그가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그가 없는 세계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을 보려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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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독본>은 미시마의 소설론만을 모아놓은 유익한 선집이다.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건 ‘풍요의 바다‘ 집필 시기에 별도로 연재한 ‘소설이란 무엇인가‘인데, 특히 <새벽의 사원> 탈고 직후에(1970년 초반쯤) 밝힌 소회는 그의 문학관을 잘 엿보게 해준다. 핵심은 문학(작품 내 현실)과 현실(작품 밖 현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소설가의 자유‘라는 것.

이 선택의 보류가 바로 ‘쓰는 일‘(소설쓰기)인데, ‘풍요의 바다‘ 마지막권 <천인오쇠>를 끝낸 날, 마침내 이 보류를 중단한다. 곧 선택의 자유를 행사한다(일본 자위대를 찾아 헌법개정을 위한 결기를 외치고 할복자살). 그런데 그 선택은 문학과 현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문학과 현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작품의 종지부를 찍으며 자신의 생에도 똑같이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미시마의 응답이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명인 기질을 가진 예술가 이미지는 작품 내의 현실에 몰입하느라 작품 밖의 현실을 이탈하는 예술가의 모습이고, 앞에서 언급한 발자크의 일화는 미담이 된다. 그러나 두 가지 현실 중 어디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않고 두 현실의 대립과 긴장에서 창작 충동의 원천을 발견하는 나 같은 작가에게, 쓰는 일은 비현실적인 영감에 계속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매 순간 자신의 자유의 근거를 확인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 자유란 흔히 말하는 작가의 자유가 아니다. 내가 두 종류의 현실 중 어느 하나를 언제 어떠한 시점에서든 결연히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 자유의 감각 없이는 나는 계속 쓸 수가 없다. 선택이란 간단히 말하면 문학을 버리느냐, 현실을 버리느냐이며, 그 아슬아슬한 선택의 보류를 통해서만 나는 계속 쓰고 있는 것이며, 어느 순간 자유류 확인하면 비로소 ‘보류‘가 결정되고, 그 보류는 즉 ‘쓰는 일‘이 되는 것이다. 자유도 없고 선택도 없는 보류라면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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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앞서 나간 자들

6년 전 페이퍼다. 완독은 못한 책인데 어디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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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로쟈와 함께하는 강제독서'는 올해 과학고전(과학 저자) 읽기로 진행한다. 첫번째 저자는 칼 세이건.그의 대표작 <코스모스>를 <창백한 푸른 점>과 같이 오랜만에 재독하려 한다(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찬조출연이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비대면 유료강의이며 단강 신청도 가능하다. 문의 및 신청은 010-9024-5850 김인숙).



로쟈와 함께 읽는 칼 세이건


1강 4월 06일_ 칼 세이건, <코스모스>(1)



2강 4월 20일_ 칼 세이건, <코스모스>(2)



3강 5월 04일_ 칼 세이건, <코스모스>(3)



4강 5월 18일_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1)



5강 6월 01일_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2)



6강 6월 15일_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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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강의에서 읽은 대목이다. 영문학 연구의 발흥 과정을 짚으면서 문학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라는 걸 이글턴은 웅변한다. 사실 따져보면 이글턴의 책이 여느 문학이론입문서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 영문학 연구의 발흥(1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전에 처음 읽을 때는 건너뛰기도 했던 장인데 지금은 가장 재미있게 읽게 되는 장이다.

이글턴은 영국이 산업화된 근대사회로 진입한 이후(19세기 중반 이후), 종교가 사회적 구심점(사회적 접합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문학이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요청받았다고 설명한다. 영국은 병들었고 영문학이 영국을 구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것이 영문학이 떠맡은 이데올로기적 임무다. 근대영국이 근대의 표준이 된 것처럼(프랑스대혁명 이후엔 프랑스와 지분을 나눠갖는다) 영문학은 근대문학의 기준이 된다. 19세기 영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다(그런 생각에서 봄학기부터 1년간 영문학 다시 읽기를 진행한다. 제인 오스틴부터 D.H. 로렌스까지).

문학은 여러 면에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사업에 적합한 후보자였다. 문학은 개방적이고 ‘교화력있는‘ 분야로서 정치적 아집과 이데올로기적 극단주의에 효능있는 해독제를 제공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문학은 내전이나 여성의 억압이나 영국 농민층의 토지로부터의 축출과 같은 자질구레한 역사적 사건들보다는 보편적 인간가치들을 다루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에 대한 더 높은 통제권과 인간다운 삶의 조건에 대한 노동계급의 사소한 요구들을 우주적 원근법 안에 놓는 데 봉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운이 좋으면 노동대중으로 하여금 영원한 진리와 미를 고상하게 명상하는 가운데 그러한 사소한 문제들을 망각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영국 교사들을 위해 만든 빅토리아시대의 한 편람에 쓰인 대로 영문학은 "모든 계급들의 공감과 동포의식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빅토리아기의 어떤 작가는 문학이 "근심과 일과 언쟁으로 찬 인간의 천한 생활에서 대하는 소란과 소동, 소음과 혼란"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만나 공동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청명하고 빛나는 진실의 영역"을 열었다고 말한다. 문학은 하층계급을 하나 이상의 관점 즉 그들의 것 외에 고용주들의 관점을 인정하도록 설득하면서 다원주의적으로 사고하고 느끼는 습관이 그들의 몸에 배도록 할 것이었다. 문학은 그들에게 부르조아문명의 도덕적 부를 전달할 것이며 중산계급이 성취한 업적들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줄 것이었다. 그리고 독서는 본질적으로 고립되고 관조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문학은 하층계급이 지닌 집단적 정치행동에로 이르는 불온한 경향을 억제할 것이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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