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지식인 하워드 진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 촘스키가 언어학자이면서 정치평론가라면 하워드 진은 역사학자이면서 운동가이다(촘스키의 표현을 빌면 "하워드 진은 한 세대의 양심을 변화시켰다"). 아직 그의 대표작 <미국 민중사>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애독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국내에 소개되는 추이는 유심히 지켜보는 편이다. 이번에 나온 책은 신작 에세이 모음인데,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듯하다(게다가 요즘 우리에게 딱 필요한 제목이다!). 그의 책이 올해만 해도 세 권째 출간됐으니 아마도 가장 지명도 있는 지식인의 한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겸사겸사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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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 2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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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 1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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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08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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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하워드 진.도날도 마세도 지음, 김종승 옮김 / 궁리 / 2008년 10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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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08-19 16:05   좋아요 0 | URL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요즘 통 책하고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어서 엄두가 나지는 않지만요.

그런데 혹시 바사미언 '만의' 텍스트도 읽어보신 적 있으세요? 궁금해서...

로쟈 2008-08-19 16:32   좋아요 0 | URL
아뇨.^^ 단독 저서로 소개된 책은 안 뜨는데요...
 

주말 북리뷰들을 둘러보다가 최근 관심사와 무관하지 않은 책 한권에 눈길이 갔다. 프란시스 무어 라페의 <살아있는 민주주의>(이후, 2008). 원제는 'Getting a Grip: Clarity, Creativity, and Courage in a world gone mad'이니까 '꽉 틀어쥐기'쯤 될까? 직역하면 '미쳐가는 세상에서의 투명성, 창조성, 그리고 용기'가 부제다. '틀어쥐다'의 목적어들인지? 여하튼 원제에 '민주주의'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리뷰를 읽어보니 그와 무관하지도 않은 책이다. '민주주의의 기술'을 설파하는 책이라니까. 대충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하워드 진의 추천사가 발목을 잡는다(그의 추천사는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긴 하지만). "모든 세대에는 사상, 행동, 정신의 측면에서 선구자가 되는, 몇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탐욕과 권력의 낡은 장벽들을 깨고 사람들을 위해 횃불을 높게 비춘다. 프란시스 무어 라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한번쯤 손에 쥐어볼 생각이다(게다가 저자가 공저자로 참여한 <굶주리는 세계>(창비, 2003)나 <희망의 경계>(이후, 2005)가 저자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기도 하고).

한국일보(08. 08. 16) 민주주의도 '기술'이다

한국은 늘어가는 올림픽 메달 수처럼 풍성한 민주주의를 길러 왔다고 믿어도 좋을 만큼 발전을 거듭해 왔을까?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산 쇠고기 파문은 우리가 과연 일상적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자괴감마저 불러 일으킨다. '촛불들'이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너무나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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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봐서, 저 같은 고민은 글로벌하다. 삶의 공공성이 망실돼 가는 지금, 두 괴물 사이에 끼어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세계의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 주범은 선거(민영화)와 시장(상품화)이다. 민간 자본이 선거 시스템에 개입하고 시장과 적극 연루돼 민주주의를 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범지구적으로 위기를 몰고 오는 주체는 정치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 조지 W 부시, 딕 체니 등이거나, 글로벌을 외치는 시장경제주의자들에게 있다. 9ㆍ11 이후 6년 동안 미국의 화학산업계는 안전 척도를 거부했고, 부시의 백악관과 유착해 있던 전 석유 로비스트는 기후 변화를 얕보도록 공식 보고서를 편집하기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민주주의가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최적화'해낼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검토할 때다. 민주주의도 기술(art)이다. 에리히 프롬의 명저 <사랑의 기술>을 떠올리게 하는 책은 민주주의론의 최신 버전이다. <굶주리는 세계> 등의 책으로 국내에서도 낯익은 생태정치학자인 저자는 "어떤 기술도 학습될 수 있듯 민주주의 역시 배움을 통해 끝없이 향상돼 가는 것"이라 말한다. 결국 민주주의란 '고비용 저효율'의 사회 작동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장을 효과적으로 펴 나가기 위해 동원하는 개념적 장치가 '앙상한 민주주의(thin democracy)'다. 합리적 합의와 상호 소통을 불능케 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로, 미국 사회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의 현실적 정치 체제를 겨냥한 말이기도 하다. 그 반대로 책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행동의 통로를 구체적으로 보장하는 정치 체제, 그것들이 시민의 힘에 의해 자율적으로 형성돼 가는 창조의 과정 등을 요체로 하는 민주주의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타인의 발언에 귀 기울이는 기술, 협상과 조정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기술, 경험을 성찰하고 학습하는 기술들을 전제하는 민주주의다.

1999년 미국 캔사스의 한 고교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절반이 중퇴하는 상황이 벌어진 사례는 민주주의를 몸으로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교육 붕괴의 원인이, 지역 주민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고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여기는 삶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들은 신뢰 회복을 위한 모임에서 서로 만나기 시작했고 학교 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민주주의의 생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8년 만에 고교의 졸업생 비율은 80%까지 상승했다.

책은 인간들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보편적 속성을 두고 '마음속의 리얼리즘'이라 표현한다. 부시 행정부가 2002년 이라크 침공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내놓았던 가짜 증거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해 일어설 수 있는 자신감과도 같은 것이다. 또 야만적 행위가 유발하는 공포감은 오히려 바람직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사용할 자원으로 쓰여질 수도 있다.

책은 희망적이다. 관계망을 추구하는 인간 고유의 속성, 개인적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공공성 등 의미 있는 행위와 삶을 향한 근원적인 욕구 때문에 인간은 속성상 공적인 존재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책을 옮긴 뉴사우스웨일즈대 사회학과 국제연구스쿨 대학원생 우석영씨는 "한국도 국민들의 정치 혐오증을 딛고 시민을 중심으로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구축해 갈 때"라고 밝혔다. '살아 있는 민주주의 체크 리스트' 등 작은 읽을거리가 자칫 이론적일 수도 있는 논의에 흥미를 보탠다.(장병욱기자)

08. 08. 16.

P.S. 기자는 "'촛불들'이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너무나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적었는데, 반대로 '촛불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이 봇물이다(곧 나올 계간지들의 화두도 아마 '촛불'일 성싶다). 몇 권의 이미지를 뽑아본다.

낮에 동네 시립도서관에서 잠시 들춰본 <인물과 사상> 7,8월호도 '촛불' 관련 글들을 싣고 있다. 강준만 교수의 ''스펙터클'로서의 촛불시위'(8월호)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가 보기에 촛불시위는 스펙터클주의자(청계천) 이명박이 예기치 못했던 '스펙터클에 대항하는 스펙터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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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7 0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7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본문학 번역 60년>(소명출판, 2008)이란 책이 지난달에 나온 걸로 아는데, 한국일보의 리뷰기사는 오늘 떴다. 광복절이란 시의성을 고려한 게 아닌가 싶다. 비교적 자세한 소개를 담고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08. 15) 하루키·바나나는 한국문학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윤상인(53) 한양대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가 최근 출간한 <일본문학 번역 60년 : 현황과 분석>(김근성 강우원용 이한정 공저ㆍ소명출판 발행)은 1945~2005년 국내 출판된 일본문학 번역서 전체의 서지목록을 작성하고 그에 대한 분석을 담은 국내 첫 연구서다. 학술적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목록 자료만큼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자료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에서의 일본문학 수용 양상. 윤 교수를 만나 '일본문학 번역 60년사' 이야기를 들었다.

■ 현재 일본문학 붐은 60년대 붐의 재판
현재 한국 출판계의 일본문학 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부상한 1990년대 초반부터 이어지고 있는 '장기 호황'이다. 하지만 이 호황은 해방 이래 일본문학 수용 역사에서 별쭝난 현상이 아니다. 60년대에 이미 '1차 부흥기'라고 부를 만한 일본문학 붐이 일어났고, 이후 90년대 '2차 부흥기'를 맞을 때까지 일본문학 번역 건수는 꾸준히 늘었다.(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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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본문학 붐의 기점은 4ㆍ19혁명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배일 정책으로 50년대 소설 7편 번역이 전부였던 것이 급반전했다. 그 해 청운사의 <일본문학선집>(전7권) 등 4개 출판사에서 일본 주요 작가 중단편 선집이 나오고, 고미카와 준페이,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시하라 신타로, 하라다 야스코 등의 소설 단행본 13권이 출간되는 등 60년대에 걸쳐 641편(중복 번역 포함)의 작품이 번역됐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15개 출판사에서 중복 출간됐고,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68년에는 6권짜리 전집(실제는 선집)이 신속히 간행됐다. 그 번역자에는 한무숙 전광용 정한모 천상병 이호철 최인훈 등 작가들이 다수 포함됐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이른바 '중간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시자카 요지로의 장편은 63년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 4, 6위를 차지했고, 65년 첫 출간된 미우라 아야코의 장편 <빙점>은 66~67년 내내 베스트셀러 1위를 점했다. 윤 교수는 그 요인으로 대일 문화정책 변화, 일본문학에 대한 호기심 증폭,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은 '4ㆍ19세대'의 출현 등을 꼽았다.

■ '독자 친화'적인 일본문학
윤 교수는 일본문학이 한국문학보다 앞서 변화하는 독자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고 분석한다. 국내 문학의 기반 자체가 빈약했던 60년대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쓰메 소세키 등의 작품은 읽을거리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70, 80년대엔 추리소설 기업소설 애정소설 역사소설 등 오락성 짙은 대중소설이 쏟아져 들어왔다.


90년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등 새로운 감성의 문학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적 욕구를 만족시켰다. 윤 교수는 "88올림픽 이후 국내 독서대중은 10대 후반~20대 위주로 재편됐는데 이들은 사회역사적 책임감보다는 개인주의와 소비 욕구에 충실한 세대"라며 "여전히 거대담론을 중시하는 한국문학에 거리감을 느끼던 신세대 독자들에게 하루키의 쿨한 감각, 류의 도저한 상상력, 바나나의 만화 풍 소설이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고 말했다. 2000년대에는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 등이 산뜻한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중간소설 영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일본소설일까. 윤 교수는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러시아문학이 근래 들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데 비해 일본은 폭넓은 독서 욕구를 가진 독자들이 뒷받침하는 탄탄한 소설 시장이 있어서 작가들이 창작에 전념하며 더 나은 작품을 써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과 일본의 지리적 근접성, 사회문화적 동질성 등도 요인으로 꼽았다.



■ 상업주의에 매몰된 일본문학 시장
윤 교수는 여타 외국문학과 달리 일본문학은 시종 출판사가 주도하는 상업출판의 형태로 국내에 소개돼 왔다고 지적한다. 그러다보니 번역작품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일본 내에서 문학상을 받거나 많이 팔린 작품을 실시간으로 들여오는 경우가 많다. 아쿠타가와 상의 경우 그 수상작은 60년대부터 거의 빠짐없이 국내 소개되고 있다.

윤 교수는 "이는 상업적으로는 안전할지 몰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국내 출판계가 일본의 문화 유통구조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일본문학 전공자나 전문 번역자가 스스로 좋은 작품을 골라 독자에게 소개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번역 품질의 검증도 시급하다. 70, 80년대 횡행하던 날림번역은 90년대 들어 전문 번역가 군의 형성으로 많이 개선됐지만, 10명 남짓한 유명 번역가들에게 의뢰가 몰리다보니 질이 떨어지는 현상이 감지된다는 것. 윤 교수는 "60년대 번역 수준이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라며 "일본 문학 및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이들이 번역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이훈성기자)

08.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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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16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특히 60-70년대 대하역사물 번역목록을 봐야겠어요.
마지막 구절, 일어 번역의 질에 관해선 60년대에 김소운 씨가 했던 말과 똑같네요.로쟈 님은 일본 소설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로쟈 2008-08-17 00:37   좋아요 0 | URL
많이 읽지 않아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가는 다자이 오사무 정도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 좋아하는 한국인이 굉장히 많군요.저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역사소설 <풍도>와 <누란>입니다.둘 다 약소국의 비애를 그린 작품입니다.전자는 장편으로 고려말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절 이야기입니다.후자는 중편인데 누란의 위기라는 표현에 나오는 그 나라 누란의 비극적인 망국사입니다.한족과 흉노 사이에 끼인 나라의 운명.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참한 나라.우리나라는 거기에 비하면 강대국 사이에서 나름대로 운신의 폭이 넓은 나라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로쟈 2008-08-17 17:47   좋아요 0 | URL
이노우에는 처음 듣는 작가인데요.^^; 일본과 중국 소설들을 상대적으로 읽지 않은 편이어서 따로 견적을 내보고 있습니다...

2008-08-17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8-18 00:18   좋아요 0 | URL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종전이 선언되긴 했지만 베이징 올림픽 개막과 함께 터진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으로 신냉전 시대로 돌입하는 게 아닌가란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미국의 차기 행정부 색깔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겠다). 사실 분단국가로서 우리는 냉전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찾아보니 관련서가 생각보다 적다. 냉전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 역량을 갖고 있는지, 이 방면의 중요한 저서들이 소개돼 있는지 의문이다(아시는 분은 귀뜀해주시길). 관심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관련서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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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란 무엇인가- 극단의 시대 1945~1991
베른트 슈퇴버 지음, 최승완 옮김 / 역사비평사 / 2008년 1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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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박건영 옮김 / 사회평론 / 2002년 3월
18,500원 → 18,500원(0%할인) / 마일리지 370원(2%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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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체제와 생산의 정치
조순경 외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1995년 8월
10,000원 → 9,500원(5%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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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의 국가 형성과 민주주의- 냉전 자유주의와 보수적 민주주의의 기원
박찬표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4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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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16 16:00   좋아요 0 | URL
70-80년대에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왔는데 전부 절판되고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죠.덕분에 저는 싸게 구했습니다만.70년대 초 한림출판사에서 냉전 주역들의 회고록이 많이 나왔죠.트루만,아데나워,아이젠하워,이든,후르시초프 등.그리고 놀라운 건 그 유명한 아이작 도이처의 스탈린 전기가 이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사실.그런데 역자 해설에는 도이처의 공산당 경력이 소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좀 특이한 걸로 조셉 굴든<한국전쟁>김쾌상 역(일월서각 1982)은 굉장히 두툼한데 전형적인 미국 반공주의 논픽션 작가입니다.맥아더에 대한 분량이 굉장히 많은데 거의 묵사발을 만들었더군요.우상의 추락이랄까요.반공물인데도 맥아더를 이렇게...역시 사상이란 유연하게 접근해야겠더라구요.그리고 제가 미군들이 쓴 책도 꽤 보는 편인데(물론 번역본) 해병대나 해군들이 맥아더 엄청나게 싫어합니다.그 사연 대충 알지만요.근데 우리나라는 맥아더 동상을 지키자고 해병전우회 할아버지들이 나왔던데...헤헤헤...거 참...

로쟈 2008-08-17 00:39   좋아요 0 | URL
총체적인 시각의 냉전사나 새로운 시각의 이론서 등을 찾는데, 잘 눈에 띄지 않네요...

루쉰P 2008-08-16 23:3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냉전에는 사실 관심이 별로 없어서 글을 보니 도움이 되네요. 전 요즘 백수 3개월 동안 집에 있는 150권의 책을 고물상에 만원에 팔아 담배를 사피고, 핸드폰이 끊겨 사회와의 소통이 끊긴채 집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중 헌책방에 취직을 했어요.^^
헌책방에 좋은 책들이 많다고 하니 제가 일하는 곳에서 저도 눈을 부라리며 책을 찾아봐야 겠네요. 노이에자이트님도 더운 여름 잘 보내세요~~

노이에자이트 2008-08-16 23:41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서 일하는 동안 좋은 책을 읽으시길 바랍니다.요즘 어디 가나 책방들이 문을 닫는 추세라서 안타깝습니다.건강하십시오.

노이에자이트 2008-08-17 15:18   좋아요 0 | URL
하버드 대학 외교사 교수 이리예 아키라의 논문 <얄타체제의 붕괴와 냉전의 출현>은 루스벨트임기 말년과 투루만 행정부 초기의 대소 외교전을 중국 내전의 막바지와 해방 직후의 한국,일본을 중심으로 살폈는데 정말 좋습니다.유럽 쪽 정세도 언급하면서요.냉전이 남한 국내정치에 직접 소용돌이를 일으킨 첫 사건인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이호재<민족통일을 위한 내적 노력과 좌절 과정>이 좋습니다.두 논문 다 <분단전후의 현대사>(일월서각)에 있습니다.
냉전의 역사로는 리처드 바네트<개입과 혁명>홍성후 역 (형성사 1983)가 좋습니다.1부는 냉전 총론,2부는 사례연구인데 트루먼 독트린과 그리스 내전,레바논과 아이젠하워 독트린,도미니카 공화국과 존슨 독트린,베트남에서의 미국,그밖의 개입사례.3부는 개입의 이데올로기를 다룹니다.
저는 이 분야는 학술서적보다는 정치인들 회고록이나 저널리즘 류를 더 많이 봅니다.은근히 재밌거든요.

로쟈 2008-08-17 17:48   좋아요 0 | URL
네, 체크해놓겠습니다.^^
 

광복절이라고 해서 따로 개인적인 행사를 치를 일은 없고, 그냥 읽어놓은 관련기사나 스크랩해놓는다('건국절'은 저들이 알아서 챙기거나 말거나). 하나는 ‘광복 63주년 기념 8·15 민족통일대회’를 준비한 백낙청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인터뷰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 63년'의 삶을 살아온 한 한국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본 기획기사이다.   

한겨레(08. 08. 15) “광복 의미 무시…분단정부 자괴감이 없다”

“근본적으로 너무나 천박한 역사인식이기 때문에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백낙청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는 ‘광복 63주년 기념 8·15 민족통일대회’를 앞두고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 정부의 건국 60년 행사와 관련해 “1948년 정부수립을 주도한 세력조차 분단 단독정부 수립이란 자괴감과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최근 건국 60년 담론에는 이런 현실 인식이 아예 없어진 게 문제”라고 강조했다. 민족통일대회는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6·15와 8·15를 남북이 공동 기념하자는 취지로 기획된 행사다. 8·15 민족통일대회의 경우 2001년과 2003년엔 평양, 2002년과 2005년엔 서울에서 공동행사로 치러졌다. 그러나 2004년과 2006~08년엔 정세 악화, 수해 등 여러 이유로 8·15 공동행사가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이번 8·15 민족통일대회가 15일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남쪽만의 행사로 치러지는 것에 대해 “금강산 6·15 공동행사로 (남북 공동행사의) 명맥은 이어놨고, (8·15 행사 분리 개최는) 6·15 행사 때 합의사항”이라며 “아쉽지만 좌절감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백 상임대표는 최근 남북관계 악화와 관련해선 “6·15 및 10·4 선언 계승 입장의 공표가 남북관계를 푸는 열쇠”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해 “내심 유신시대로까지 역주행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며 “경륜과 역사인식이 없으니 갈팡질팡하며 자기들도 고생하고 국민들도 고생하는 결과가 될 것 같다”고 걱정했다. 인터뷰는 13일 낮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이뤄졌다.

-8·15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정부가 ‘건국 60년’에 초점을 맞춰 논란이 일고 있다.

1948년 8월15일 당시 표현은 정부수립이었다. 당시 전국 현상공모에 당선된 표어가 ‘오늘은 정부수립, 내일은 남북통일’이었다. ‘건국’ 주도세력 스스로가 ‘정부수립은 기쁜 일이지만 단독 정부수립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이 있었고, ‘남북이 통일된 온전한 건국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정부가 수립돼 60년이 됐으니 꺾어지는 해를 기념하는 것 자체가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광복의 의미가 사라지거나 폄하되고, 분단 정부 수립이란 자괴감, 문제의식이 없어지는 일이다.”

-뉴라이트가 굳이 광복 대신 건국을 고집하는 이유는 뭐라 보나.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은 굉장한 역사적 사건인데 뉴라이트에게는 그런 인식이 없다. 광복을 단독 정부 수립에 필요한 수순 정도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근본적으로 너무 천박한 역사인식이다. 우파정권이 들어섰다고 해도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는 데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법석을 떨다가 정체를 드러내고 끝날 일이 아닌가 싶다.”

-남북관계가 삐걱거린다. 왜 이렇게 됐다고 보나.

한편으론 이 정부의 체질과 관련 있고 다른 한편으론 무능과 무식의 소치다. 미국에만 잘 보이면 잘 풀릴 것이란 망상이 있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못사는 사람을 깔보는 성향이 있다. 이런 자세는 안 통한다. 실용을 표방하면 대북관계가 잘 되는 게 유리할 텐데, 그것을 할 실력이 없는 것 같다. 남북관계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다. ”

-이명박 정부가 6·15 및 10·4 선언에 대한 이행 의지를 밝히는 데 소극적인데.

“10·4 선언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정서는 이해간다. 노무현 정권이 임기 말기에 후임자가 해야 할 많은 일을 합의해버려 기분 나쁠 것이다. 그렇지만 10·4 선언을 존중한다는 전제 위에 이행의 완급을 협의하는 게 필요하다. 같은 정상간의 선언이지만 6·15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10·4 선언은 6·15 선언의 실천강령으로 나온 것이지 동일한 차원의 새로운 선언으로 되어있진 않다. 6·15 선언은 이 정부가 부담을 느낄 게 없다. 통일방안과 관련해 ‘낮은 단계의 연방’이란 표현이 들어있지만, 내용은 북쪽이 고려연방제를 철회한 것이다. 이제 국정을 책임졌으니 선거 때 구호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6·15와 10·4 계승 입장의 공표가 남북관계를 푸는 열쇠라고 본다. 특히 6·15 선언을 인정하면 일이 뜻밖에 잘 풀릴 것으로 본다.”

-금강산 관광객 사망 사건이 해법을 못찾고 한 달을 넘겼다.

전문성의 부족이 남북관계를 꼬이게 한 좋은 예라고 본다. 남북 양쪽에 모두 문제가 있다. 비무장 50대 주부가 사망했고 유가족과 국민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북은 이를 위로할 수 있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했다. 최근 통일부에서 진상 규명 방법에 대해 남북이 만나서 협의하자고 밝힌 것은 통일부의 전문 식견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지금 같은 남북관계에서 대통령이 나서 ‘남쪽 당국이 참여하는 공동 현장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 운신의 폭이 없어진다. 어느 나라든 자기 주권 관할구역, 그것도 군사구역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 적대적 국가와 공동조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북쪽이 남쪽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성의있는 해명과 남녘 동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진솔한 유감 표명을 하고, 남쪽은 좀 더 성숙한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폭주, 역주행이 뚜렷한데.

정부 내 역주행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내심은 5·6공 정도가 아니라 유신체제까지 역주행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접촉사고와 인사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경륜이나 역사인식이 없으니 갈팡질팡하면서 자기들도 고생하고 국민들도 고생하는 결과가 될 것 같다. 정부는 역주행이 안 된다는 것을 하루빨리 깨달아 자세를 바꿔야 한다.”

-앞으로 통일운동은 어떻게 해야 할까.

“똘똘 뭉쳐서 투쟁하는 양식은 6·15 이전 방식이다. 6·15 이후엔 달라졌다. 투사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참여할 길이 열렸고, 다양성과 시민들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6·15 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 들어 역주행이 보이니까, 통일운동도 과거식의 강력한 투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기류가 있다. 싸울 일은 싸워야 하나 크게 봐서 역주행은 저쪽의 일방적인 소망사항일 뿐이다. 촛불 정국이 보여주었듯이 우리 사회는 시민 역량의 엄청난 축적이 이뤄져 있다. 이런 시민들과 소통하는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이 돼야 한다. 6·15 남측위는 ‘연대와 합의’ 정신으로 운영한다는 규약대로 느슨한 결합체로 가야한다. 단단한 단일조직으로 비끄러매려고 하면 시민들한테서 외면당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촛불시위가 100일이 지났는데 촛불이 다 꺼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70년대부터 민주화 현장을 지켜온 원로로서 소회가 궁금하다.

“저를 포함한 각계인사 32인이 지난달 1일 성명을 내어, 촛불축제는 위대한 국민 승리를 성취했기에 7월5일 모여 승리를 대대적으로 확인하자는 제안을 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가 이 제안을 상당부분 받아들여 국민승리선언대회가 성공적으로 열렸다. 국민승리 개념은 승리의 기준을 정부가 87년 6·29 선언 같은 것을 내놓고 쇠고기 재협상하겠다고 항복하느냐 마느냐에 둔 것이 아니다. 우리 역사상, 아니 세계 민주주의 역사상 유례가 드문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낸 것 자체가 승리라는 것이다. 이런 국민승리를 정부가 인정해 6·29처럼 항복선언을 하면 정부가 지면서도 이기는 길이고, 폭력 집회를 유도하고 탄압하면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길이다. 정부가 그 시점에서 폭력 진압하며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나왔는데, 이에 말려들지 말고 우리 할 일을 하자는 취지였다. 지금은 정부가 촛불이 꺼졌다고 기고만장하는 것 같은데 그런 정권의 앞날은 암담하다.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계속 시위할 사람은 시위하고,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도 하고, 언론분야에서 싸울 건 싸우면서 또 한번의 도약을 준비하면 된다.

한겨레(08. 08. 15) “나는 일본군이었고 인민군이었고 국군이었다”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의 향리에서 은퇴 생활을 하는 이재섭(83)씨는 1945년 8월1일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된 새색시를 남겨두고 평양에서 입대했다. 전쟁 막바지라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북만주 하이라르의 20495 무라카미 대대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나니 병영 앞에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련군의 진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일본군 생활은 보충소까지 포함하더라도 2주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이 재앙의 씨가 돼 일제의 항복 때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는커녕 48년 12월 말까지 소련에서 억류 생활을 하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억류 기간 중 숨진 동포 가운데 이귀남이란 이름을 잊지 못한다. 황해도 해주 사람인데 결핵에 걸려 작업도 못 나가고 결국 다리수술까지 받았다. 혈액형이 같아 수혈을 해주고 나서 자신도 많이 앓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나온 시베리아 억류자 사명자 명부에 이귀남은 도고 기난이란 일본 이름으로 올라 있다. 사망일 48년 4월12일, 매장지 제4지부 부로샤트카역 부근 등이 기재돼 있다.

동토의 땅에 묻히지 않고 돌아온 생존자들에게도 고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귀국 경로와 일시는 일정하지 않다. 일본인들에 섞여서 일본 마이즈루로 간 사람도 있고 선박편으로 청진, 웅기로 오거나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온 사례도 있다. 이재섭씨는 가장 많은 귀환자가 돌아온 48년 12월 소련 화물선편으로 흥남부두에 도착한 약 2천3백여명에 끼였다. 흥남인민위원회에서 환영행사를 벌이고 임시 숙박처를 마련해주었다. 적응교육을 거쳐 집이 만주인 사람 약 1천명, 북한인 사람 8백명이 먼저 가족을 찾아 떠났다.

북한 당국은 49년 2, 3월에 남쪽이 고향인 사람을 수십명씩 쪼개 내려보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원산에서 기차편으로 철원이나 연천까지 와 한탄강이나 산악지대를 넘은 것으로 보인다. 꿈에도 잊지 못했던 가족과의 재회를 그리며 38선을 넘다가 총격을 당해 숨진 사람들을 보았다거나 나중에 얘기를 들었다는 증언이 생존자들 사이에 끊임없이 돌고 있다. 접경지역에서 남북 교역을 한다며 이중스파이나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의 농간에 곤욕을 치렀다는 사례도 들린다. 아무리 남북에 정부가 따로 수립됐다고 해도 이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한 최소한의 접촉조차 없었다.

귀환자들은 고양이나 파주경찰서를 거쳐 인천 만석동에 있던 수용소로 옮겨졌다. 정보·사찰 기관 요원들이 합동으로 소련과 북한에서 한 행적과 언동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맥아더 사령부 정보요원들에게 넘겨져 신문을 받은 사람도 있다. 한 달 정도의 조사과정에서 특이한 용의점이 발견되지 않으면 가족들의 품에 인계됐다. 그래도 적성국가 소련에서 돌아왔다는 요시찰 딱지가 따라다녀 생활이 안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생존자 가운데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을 거치고 소련과 남한에서 포로수용소 생활을 한 사람도 있다. 평남 순천 출신의 ㅂ아무개(84)씨는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집살이를 하느라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44년 8월 징병 1기생으로 끌려가 홋카이도 북쪽 시코탄섬(현재 러시아령 쿠릴열도의 하나로 일본은 자국령이라고 주장)에서 해병대 격인 선박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소련군 포로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가혹하기 그지없었던 수용소 생활이 견딜 만했다고 그는 담담히 말했다.

48년 12월 북한에 돌아와 한동안 소련에서 왔다는 이유로 대접을 받고 탄광에서 일자리를 얻었지만 평온한 삶도 잠시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해 수색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야간에 도보로 이동해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지의 하나였던 다부동 지역에 배치됐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대공세에 밀려 인민군의 패주가 시작되자 낙오했다가 50년 9월 미군의 포로가 됐다.

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 때 거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가 오갈 데가 없어 문을 두드린 곳은 군대였다. 바로 신병훈련을 받고 화천 지역에서 2년간 사병으로 근무하다 제대를 했다. 일본군, 인민군, 국군에서 그는 줄곧 말단 사병이었다. 한국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갈 때 그는 며칠간 분대장을 맡았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북한에 사는 친지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삶에 아직도 분단과 냉전의 유령이 가시지 않고 있다.(김효순 기자)

08. 08. 15.

P.S. 한국일보는 한홍구 교수와 이영훈 교수, 두 사람의 대담을 특집으로 싣고 있다. 8.15의 의미에 대해서 이젠 '기억의 전쟁' 모드로 들어간 듯싶다.

광복절인가, 건국절인가. 대한민국 60주년이 8ㆍ15의 성격에 대한 보수, 진보세력의 기억투쟁의 장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를 건국사로 해석하는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분단의 역사로 보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의 난상토론의 자리를 마련했다. 8ㆍ15와 건국주체세력의 성격, 이승만ㆍ박정희 시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두 사람의 시각 차는 확연했다.

▲ 이영훈=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사건은 '건국'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새로운 이념에 의해 인간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하나의 질서이자 하나의 문명으로서 새로운 국가가 태어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건국(1392년) 이후 556년 만의 사건이다. 불교사회에서 유교사회로 문명 전환을 꾀한 조선 건국처럼 대한민국의 건국도 자유, 인권, 재산권, 개인주의 등 새로운 이념들이 들어와 새로운 문명을 건설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 한홍구= 왜 광복과 건국이 대립해야 하는가, 가슴 아픈 생각이 든다. 독립운동세력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와 새로운 국가, 정치체제를 만든다는 과제를 함께 추구했다. 의아한 것은 친일행위를 문명의 기원으로 보는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건국절을 기념하자고 나선 점이다. 광복이나 해방의 의미가 지워진다는 느낌 때문에 사람들이 당혹해하는 것이다. 건국이라는 개념이 약했던 이유는 우리 헌법에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다는 대목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처음에는 임정 연호를 썼고 제헌의회에서도 임정을 계승했다는 의식이 있었다.

▲이= 대한민국이 임정의 도덕적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의 국민국가라는 실체가 1948년 8월 15일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한 국가가 생겨나는 데 있어 필요한 여건을 법적으로나 실체적으로 갖춘 것은 이 날이다.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건국을 이야기할 때 1948년 8월 15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사적 의미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는 있을 수 없다.

▲한= 1948년 8월 15일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건국주체와 국가 정체성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국가 정체성의 근거가 되는 것은 제헌헌법과 실체적 독립운동집단인 임정의 구상이다. 임정에 참가했던 세력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정체로는 민주공화국이고 경제 정책에 토지 국유화, 중요사업 국유화, 무상교육과 무상치료가 포함돼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제헌헌법에 계승됐다. 또한 대한민국은 건국주체로 우파들만 들어간 반쪽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한다는 약속을 했다.

▲이= 대한민국 건국세력이 잘못했다는 뜻인가.

▲한= 국민적 기억을 만드는데 핵심 되는 내용인 제헌헌법과 임시정부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청산하겠다고 했지만 건국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남로당 프락치사건, 반민특위 습격해산, 백범 암살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반드시 숙청됐어야 할 반민족행위자들의 쿠데타였다고 생각한다. 왜 제대로 국가를 세우지 못했는가, 왜 방향이 틀어졌느냐라는 점에서 1949년 5, 6월에 있어던 친일파 쿠데타에 의한 대한민국 정통성의 훼손 부분을 지적해야 한다.

▲이= 대한민국이 친일파 세력에 의해 세워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방 직후 농촌사회에서는 면장이나 면서기 중심으로 친일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이 있었다. 그리고 일제 때 드러내놓고 친일했던 사람들, 즉 영혼까지 팔아 친일했던 이들이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참여하거나 주요 요직에 참여한 사례는 없다. 설령 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해도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친일세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다.

▲한= 친일 문제는 입장이 좁혀지지 않는다. 자유 인권의 가치가 건국을 통해 국가의 기본 원리가 됐다고 하는데, 그것이 살아있는 가치가 된 것은 뉴라이트가 건국주체로 부르는 당시 국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세력에 대한 민중들이나 시민들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 덕택이다. 소위 건국세력들은 헌법에 좋은 내용을 담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실현할 의지와 능력이 있었는가. 이승만 시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어떠했느냐를 보면 쉽게 평가할 수 있다.

▲이= 건국이 요구하는 다양한 과제들 가운데 적어도 정치, 안보, 군사 등 기본적인 틀은 이승만 시대에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그가 있어서 오늘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적 기틀이 만들어졌다. 공산진영의 공세를 방어했고 세계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과 동맹을 이끌어냄으로써 건국과정의 큰 기틀을 잡았다. 지금 단계에서 그런 정도의 공로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한= 이승만이 그 이후 어느 대통령도 보여주지 못한 안목과 결단력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미국이 어떻게 나올까에 대해 그 이후 어떤 대통령보다 정확하게 판단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꼭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그는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장기적으로 이른바 '통미봉남'이 나오게 된 구조적인 원인이 됐다. 이승만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실했다고 했는데 그 표현을 받아들인다면, 이승만은 자기 신념을 배반한 사람이다. 국회에서 부결된 개헌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뒤집는다든지,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크레인으로 끌고간다든지, 정치적인 라이벌을 국가보안법으로 사형시킨 일 등을 볼 때 그 민주주의라는게 도대체 어떤 민주주의였는지 묻고 싶다.

▲이= 야당 자체가 개헌을 하고 미국을 통해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음모를 했다는 연구도 있다. 이승만은 가만히 있으면 쫓겨나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이승만은 전쟁 중에도 헌법에서 규정한 선거를 다 치렀다. 또 무엇보다 교육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국민적 가치로 정착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라는, 이승만이 포기할 수 없는 제도적 가치와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의 모순 때문에 발생한 것이 독재다.

▲한= 실제 민주주의를 지키고 실현한 공을 이승만에게 돌릴 것인가, 아니면 한국전쟁 후 새로운 교육을 받으면서 태어난 세대들에게 돌릴 것인가를 묻고 싶다. 새로운 세대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 이승만의 선택과 결단을 강조하는 것은 영웅사관이다.

▲이= 박정희 시대는 권위주의적 정치에 따른 희생이 컸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양쪽을 다 봐야 한다고 본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독재자, 권위주의자라고 비판하기 전에 그들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대해 자발적인 동의가 안 나올 때, 그 상황에서 박정희라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강인하게 실행했다. 민주주의를 지체시켜 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산업화의 결과로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토대인 중산층을 만들어놨다.

▲한= 대한민국이 도저히 다시는 용납할 수 없는, 가져서는 안 된다고 보는 지도자가 이승만이고 박정희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산물이라면서 모든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고 보는 주장은 박정희가 명확히 책임져야 할 역사적 책임 문제에 대한 물타기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산업화와 민주화는 동시에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것을 대립되는 가치로 주장하며 자신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억눌렀다. 역사적인 책임은 엄정하게 내려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 1960~70년대에 정치적 억압이 있었지만, 그 시대는 많은 한국사람들이 대단히 활기차게 세계로 뻗어나갔고 개인적인 성취를 이룬 시대이기도 하다. 정치적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건국과정이 한번에 자기완결적으로 가져진 것이 아니고 굉장히 폭력적인 선택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전반적으로 우리가 성취해온 역사였다는 것이다. 20~30년간 성취해온 것은 길게 보면 거의 동시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게 보면 우리 건국사를 좀더 밝고 긍정적으로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 = 친일이나 학살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도 충격이고, 박정희 시대의 정치적 억압을 과장이라고 하는 해석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국 보수층에 대해 아쉬움이 많다. 박정희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말을 하려면 그 시대에 벌어졌던 인권침해에 대해 보수층이 좀더 적극적으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노력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진보측과 합리적인 대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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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15 15:33   좋아요 0 | URL
조선시대 양반 연구나 일제시대 경제사 연구를 보면 이영훈 씨가 참 열심히 연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하지만 해방 후의 역사 평가나 특히 박정희,이승만 평가는 수긍하기 어려운 데가 많죠.안타깝습니다.이대근 씨와 함께 낙성대 연구소를 세우면서 보수화되었던 것 같아요.
한영우 씨는 태종 때의 억압적인 독재때문에 세종의 번영이 가능했다면서 박정희더러 독재라고 하는데 그가 과감한 산업화를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민주화도 가능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데 요즘 이런 주장이 유행이더군요.

로쟈 2008-08-15 20:57   좋아요 0 | URL
하용출 교수의 <후발 산업화와 국가의 동학>(2006)이란 책을 한번 읽어보시길. 관심사에 맞으실 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6 15:43   좋아요 0 | URL
오! 고맙습니다.조선일보에 쓴 하 교수 칼럼으로 보아 대충 성격은 짐작이 갑니다만...

로쟈 2008-08-17 00:39   좋아요 0 | URL
칼럼은 경향에도 쓰는 분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8-17 15:28   좋아요 0 | URL
반미를 하지 말고 미국을 활용하는 용미를 하자는 주장으로 유명하죠.

로쟈 2008-08-17 17:49   좋아요 0 | URL
그런 얘기는 오프 더 레코드로 해야 할 듯싶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17 18:42   좋아요 0 | URL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죠.친미주의라는 말은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그런 단어를 쓰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