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영화 개봉과 맞물려 뒤늦게 화제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3931.html). 하지만 개인적으로 12월 화제의 작가로 꼽고 싶은 이는 존 치버다. 별다른 입소문도 없이 한꺼번에 6권이나 최근에 출간됐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카버와 함께 미국 단편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이 작가도 진작에 소개된 바 있지만(내가 기억하는 건 90년대 초반이다) 이토록 출판계의 환대를 받는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작년에 예고탄으로 <블릿파크>가 출간되긴 했다). 아무튼 '교외(郊外)의 체호프’라고도 불리는 그의 단편들을 누구 말대로 '월동(越冬) 식량'으로 마련해둠 직하다(12월엔 월동용 책들이 나오나 보다!). 물론 카버도 아직 안 읽으신 분이라면 카버 먼저, 아니 체호프 먼저 읽으시고. 순서가 그렇게 된다...    

한국일보(08. 12. 13) 속이고 감추고 비밀로 얼룩진 삶

"아이린은 다이얼을 계속 돌려 서너 집의 아침식사 테이블을 침범했다. 그리고 소화불량과 육체적 사랑, 병적인 허영, 신앙심, 그리고 절망이 표현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녀는 가정부가 들어올 때까지 계속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재빨리 라디오를 껐다."



미국 작가 존 치버(1912~1982)의 단편 '기괴한 라디오'. 결혼생활 10년차에 접어든 부부인 짐과 아이린은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에 산다. 1년에 10번 이상 연극 혹은 영화를 보러다니고, 두 자녀를 둔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 부부. 슈베르트와 모차르트를 즐겨듣지만 고장이 잦은 라디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아이린을 위해 짐은 새 라디오를 선물한다. 새로 산 라디오에서 우연히 이상한 잡음을 듣게 되는 아이린은 그것이 옆집 이웃들의 소리임을 알게되자 심란한 심정이 되는데.

겉으로 보기에 평화롭고 안정적인 이웃들이었지만 그들은 퇴근 후 피아노 연습을 하는 문제로, 혹은 은행에서 초과인출한 금액 문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고, 아내를 구타하거나, 건물의 잡역부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이린은 "다른 사람들 모두가 하루종일 싸우고 있어요. 모두들 싸우고 있었어요"라고 울부짖으며 중산층의 일상에 숨겨진 황폐한 내면세계를 고통스럽게 들여다보게 된다.



'교외(郊外)의 작가'로 불리는 존 치버의 작품이 최근 잇달아 국내 번역되고 있다. 그는 평생 150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발표, 너대니얼 호손-오 헨리-스콧 피츠제럴드 등으로 이어져온 미국의 단편소설 전통을 계승한 작가로 꼽힌다. 그의 문학세계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기괴한 라디오>와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등 단편 61편을 실은 선집 4권(문학동네 발행)이 얼마 전 번역돼 나왔고, 1950년대 후반 장편작가로 변신한 그의 무르익은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왑샷 가문 연대기>와 <왑샷 가문 몰락기>(민음사 발행)도 번역됐다. 모두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그의 작품들이다.

치버 작품의 주된 시대적 배경은 1950~60년대의 미국이다. 2차대전 승전에 따른 경제적 번영으로 두텁게 형성된 중산층이 대도시 교외의 주택단지로 몰려가 드라이브와 영화관으로 상징되는 소비문화를 만끽하고 있었던 시대다. 그러나 존 치버는, 라디오를 엿듣는 아이린처럼, 물질주의의 세례를 받지만 내면적으로 무력감과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중산층의 분열적 행태에 바짝 귀를 대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에 서식하는 인물들은 서로에 대한 진짜 감정은 감추거나 억누르지만 내심 신경을 곤두세우고 강박적 행동을 일삼는 이들이다. 꽉 끼는 옷을 입고 파티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 몇 년 만에 만난 동생이 염세적 태도를 보이자 살의를 표출하는 형('참담한 작별'), 아내가 알코올중독에 빠졌다는 이유로 혹은 중년에 이르러 자신이 가족 밖의 존재로 전락하자 젊은 여인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거나 그들이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지는 남편('교외의 남편' '망상') 같은 이들이다.

치버는 왑샷 가문 연작 장편을 통해서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세인트 보톨프스'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가문의 흥망성쇠사(史)를 통해 미국의 물질주의적 성공 신화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다. 그것은 현대인들의 정신적 공허감의 실체는 어디에 기인하는가를 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치버는 <왑샷 가문 연대기>로 전미도서상(1958), <왑샷 가문 몰락기>(1965)로 미국 예술원이 수여하는 하우얼스 메달을 받았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치버는 때로는 조금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물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대리석을 정교하게 조탁하여 조각품으로 만들 듯 어휘 하나하나에 신경을 쓴다"며 "이를 통해 겉으로 화려한 미국적 생활의 가려진 어두운 면을 잘 포착하고 있는 작가"라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시사IN(08. 12. 09) '카버’를 다 읽으셨습니까 그럼 ‘치버’를 보십시오

무슨 횡재한 기분이라고 할까. 레이먼드 카버와 나란히 거론되곤 하는 현대 미국 단편소설의 거장 존 치버(1912∼1982)의 단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는 레이먼드 카버와는 달리 장편도 여러 권 썼고 그 중 <팔코너(Falconer)>(1977) 같은 책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뉴스위크>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으니 그를 단편 작가라고 부르는 건 부당한 일이겠지만, ‘교외(郊外)의 체호프’라는 별칭 그대로 그의 매력은 단편에서 또렷하다.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책도 그가 말년에 엮은 단편 선집 <The Stories of John Chee ver>(1978)였다. 이번에 나온 국역본은 이 책을 완역하고 네 권으로 분권한 것이다.



단편 선집으로 퓰리처상 받아

자신이 존 치버와 궁합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우선 국역본 선집 제1권 <기괴한 라디오>의 첫 작품 ‘참담한 이별(원제: 굿바이, 나의 형제여)’을 읽어보면 된다. 초기작이지만 대표작 중 하나이니까. 떨어져 살던 형제들이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기 위해 어느 바닷가 절벽 위의 집에 모인다. 그 중 막내인 로런스는 모든 게 못마땅하다. 그는 이를테면 ‘아, 행복해’라고 말하기보다는 ‘왜 사람들은 행복한 척하는 것일까’를 묻는 시니컬한 인물이다. 로런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가족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마침내 파국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메시지 따위에는 시큰둥해 보이던 작가가 날린 결정적인 한 방.  

“아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눈길이 사람들 속에서 여드름 난 뺨과 허약한 팔을 찾지 않도록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에게 인류의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함, 삶의 거친 외면적 아름다움에 반응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손가락이 엄연한 진실, 그 앞에서는 두려움과 공포가 힘을 잃는 진실을 가리키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가끔 한국의 소설가들이 단편을 너무 ‘열심히’ 쓴다는 생각을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뛰어난 단편은 어쩐지 아주 경쾌하게 ‘대충’ 쓴 듯한 인상을 줄 때가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네 단편소설이 더 사소하고 더 건조하고 더 사악해졌으면 좋겠다. 좀 거창하고 좀 눅눅하고 좀 착하다는 얘기다. 모름지기 단편이라면, 크고 둔한 톱으로 슬근슬근 톱질할 것이 아니라 잘 갈아진 작은 칼로 날카롭게 한 번 긋고 가야 한다. 치버를 읽으면서 한 생각들이다.

이미 레이먼드 카버 전집을 다 읽어버려 속이 허한 분에게 월동(越冬) 식량으로 권한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8.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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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2-1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사인의 신형철의 글을 읽으면 책에 관심이 간다니까요.

로쟈 2008-12-14 09:43   좋아요 0 | URL
그가 '사랑받는' 이유입니다.^^
 

예전에 학원에서 논술강의를 하던 시절 내가 참고 교재로 애용하던 책은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2000)였다. 주제에 관련한 대목을 복사해서 나눠주고 나대로의 설명을 보탰다(일단 꼭지별 분량이 적당했다). 그리고 가끔씩 유익하게 자료로 쓴 책은 도쿄대 신입생을 위한 교양강의 시리즈인 <지의 기법>, <지의 논리>, <지의 윤리>였다. 도쿄대 교수들이 직접 집필한 덕분인지 나름 수준이 높고 참신한 아이템이 많았다. 하지만 '일본책'이라서 그랬는지 이 책의 유익함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그냥 '몰래 보는 책'이었다. 어제 우연히 이 책들을 거명한 기사를 읽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공범'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랄까? 여하튼 곧 대학문을 두드리게 될 학생들이 미리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이 시리즈에 흥미를 느낄 만한 학생이라면 도쿄대 신입생 수준은 된다고 봐도 좋겠다).

교수신문(08. 12. 11) 10년 전 도쿄대의 교양강좌 부교재를 다시 읽으며

책에 대해서 조금 진지한 사람, 책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게 되는 순간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가장 잊지 못할 시간 중 하나는 오래된 좋은 책이지만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다.



『지의 윤리』는 내게 그런 책 중의 하나다.  『지의 윤리』(고바야시 야스오·후나비키 다케오 엮음, 도서출판 경당, 1997)는 1994~1996년까지 3년간 일본 도쿄대 교수들이 문과 신입생 필수강좌의 부교재로 개발한 책으로서, 1권 『지의 기법』, 2권 『지의 논리』에 이어지는 세 번째 책이다. 국내에서는 1997년 세 권이 동시에 번역 소개됐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특별히 주목받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주목할 내용이 없다면야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 문제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절대 그렇지 않으니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볼 만한 꺼리가 된다.

책의 기획 의도는 명료하다. 대학의 신입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에 대한 관점 교정이라는 것이다. 고등학교까지 지식을 교과서에 정리돼 ‘누워’있는 어떤 것으로 배웠다면, 대학에서는 그러한 지식을 생산하고 개선해가는 활동의 관점 즉 ‘행위로서의 지식’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유념해야할 것은 그런 것으로서의 지식이란 윤리의 차원과 절대 무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왜냐. 만약 지식을 완성돼 있는 정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행위로 받아들인다면, 그때의 지식은 필연적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엇,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아직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이른바 ‘他者’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자세, 그것이야말로 윤리적인 문제의 전형이며, 따라서 행위로서의 지식에 대한 해설은 『지의 기법』, 『지의 논리』에서 멈추지 못하고 『지의 윤리』에 이르게 된다. 『지의 윤리』에서 윤리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자 ‘각성’의 문제가 된다. 지식이란 간단히 말해서 ‘보편성의 언어게임’이다. 대상들, 사물들의 개별성이 사상되며 대신 보편적 속성들로 재해석되고, 그들 간의 관계가 법칙으로 정립되는 특별한 언어게임이다. 보편성의 언어게임을 구축함으로써 지식은 특정한 시공간, 개별자에 국한되지 않는 유용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게임이 그 게임 밖의 ‘특수한’ 존재에 대해 위압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지식의 관점에서 지식의 언어게임 밖에 있는 존재는 말하자면 언어가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어가 없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 항변할 수가 없다. 이를 선명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의학 분야다. 많은 환자들이 의사를 두려워하고 경외하지만, 그리해 의사에게 자신의 진짜 소망을 말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 억압된 존재들에게 언어를 빌려주는 것,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지의 윤리』가 강조하는 윤리적 자세다.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먼저 놀라야 한다. 놀라고 주목해야 한다.

각성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보편성의 게임 가장자리에 서있는 희미한 개별자들을 세심히 주목하지 않고서는, 지식의 보편적 주장이 그들에게 갑작스런 고통일수도 있다는 놀라운 체험 없이는 윤리를 향해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윤리학보다 지식사회학이 더욱 효과적인 윤리적 수단이다. 지식의 어떤 보편성이 사실상 어떤 지적 편협성의 위장일 수 있음을 밝혀주는 것이 지식사회학이기 때문이다. 돌발적인 미적 충격 또한 윤리적 의미를 갖게 된다. 모든 이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대상으로부터 추함을 감지하는 것, 모두들 참혹하다고 말하는 장면 앞에서 갑자기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종의 ‘아둔함’ 역시 윤리적 각성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시점, 대학교육개혁은 우리나라의 국가적 과제다.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추진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강의실 고급화하기, 국제학술지에 논문 싣기, 저명 외국학자 초청하기, 교수 상대평가하기, 학생들 외국 보내기, 학생들에게 영어 가르치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필요한데, 그 와중에 정작 근본적인 물음들은 더욱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이런 것들을 일사분란하게 추진해야만 하는 그 대학이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지금 시점, 우리대학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대학다운 것, 지적인 것, 그리고 윤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탐색하는, 도쿄대의 10년 전 교양강좌 부교재를 다시 보면서 우리가 이런 주제들을 이 정도의 깊이로 다뤘던 적이 있는지 생각해본다.(이봉재 서평위원/서울산업대·과학철학)

08. 12. 12.

P.S. 오늘 서점에서 발견한 또다른 도쿄대 강의록은 <문학, 어떻게 읽을까>(민음사, 2008)이다. 원제는 '문학의 방법'이며, 도쿄대 교수 16명이 참여하여 말 그대로 문학작품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을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강의'이다(책은 1996년에 나왔으며 그때 나이로 치면 40대 젊은 교수들이 주로 집필한 책이다). 우리의 경우 <문학이란 무엇인가> 류의 책은 더러 나왔고 또 읽혔지만 이처럼 '실전적인' 문학교재가 있었던가 싶다. 그래서 좀 부럽다. 아무리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라고 다치바나 다카시가 질타하더라도 그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너무 멀쩡해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라 마사하루라는 러시아문학 전공의 교수는 파질 이스칸데르(1929- )라는 현대 러시아 작가의 단편 <바라사르의 주연>을 직접 다룬다(러시아어 원문도 직접 제시된다). '이스깐제르' '이스깐데르' 등으로도 표기된 이스칸데르는 국내에도 <체겜의 산드로>(중앙일보사, 1990)를 비롯해 몇몇 작품집이 소개된 작가이다.  

나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는데, 대표작인 <체겜의 산드로 아저씨>(일어본의 표기)는 러시아어판으로 3권, 1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한다. 한데 장편소설은 아니고 30편 정도의 노벨라(중편)를 묶은 작품집 형태. <발타자르의 주연>은 그 중 한 작품의 제목이다. 우라 교수는 이 작품을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의 장에서 다루며 말미에는 세 권의 책을 추천도서로 올려놓았다. 이스칸데르의 작품을 제외한 두 권이 흥미로운데, 하나는 트로츠키의 <문학과 혁명>(1923)이고, 다른 하나는 쿤데라의 에세이집 <배반당한 유언>(1992).

언젠가 언급한 듯싶은데, 트로츠키의 책은 국내에 두 종의 번역본이 있으며(모두 절판됐지만) 그 중 하나는 소설가 공지영 씨가 공역자로 참여한 <문학과 혁명>(한겨레, 1989)이다. 그리고 쿤데라의 <배반당한 유언>은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청년사, 1994)이라는 '배반당한'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원래의 제목을 찾아서 다시 나오면 좋겠다.

이 두 책에 대한 평: "20세기의 정치와 예술, 혹은 정치와 문학을 이야기할 때 트로츠키의 저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일 겁니다. 혁명이라는 역사의 전환기 속에서 문학의 이상적인 모습을 생각한 진지한 사고가 과격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언어를 푹 뒤집어쓴 다음에는 쿤데라의 에세이로 때를 씻어 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본론에서도 언급했지만, 쿤데라의 문장은 '서정화의 함정'으로부터 독자를 구원해줍니다. 그에게는 또한 <소설의 기술>도 있습니다."(332쪽) 아마 최근에 씌어졌다면 쿤데라의 신작 에세이 <커튼>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그 정도 읽어주면 도쿄대생들과 얼추 수준을 맞출 수 있겠다. 문제는 나를 포함해 이런 레벨의 강의는 해줘야 할 강사/교수들의 수준이겠다. 

내 '수준'에 맞는 지적을 마저 덧붙이자면, 깔끔한 러시아어 문장들을 일반 교양서에서 읽을 수 있어 반가웠지만 고유명사 표기에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역시나 일어로 옮겨진 인명을 우리말로 다시 옮겨오는 과정에서 빚어진 착오일 듯싶다. (316쪽) 트루게네프 -> 투르게네프, (320쪽) 베로프와 라스프친 -> 벨로프와 라스푸친, (321쪽) 블라디미르 파페르누이 -> 블라디미르 파페르니, (328쪽) 카리닌 -> 칼리닌, (329쪽) 로자린드 마슈 -> 로잘린드 마슈 (330쪽) '산드로 아저씨와 그의 동료'에 병기된 러시아어 오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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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tzky 2008-12-13 01:44   좋아요 0 | URL
트로츠키의 문학과 혁명... 대학에 입학하던 시기에 우연히 서점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당시에는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 한이네요... 당시 제 관심은 역사였기에...;;;

로쟈 2008-12-13 07:52   좋아요 0 | URL
아, 트로츠키님!^^

무해한모리군 2008-12-13 12:26   좋아요 0 | URL
밀란쿤데라의 커튼이라는 에세이가 있군요. 늘 로쟈님 서재에서 새로운 흥미거리들을 발견하곤합니다. 생투드리고 싶은데, 주말이고 바로읽고 싶어서 서점에 가서 사야겠네요 ^^

로쟈 2008-12-14 09:44   좋아요 0 | URL
나온 지 좀 됐는데요.^^;

릴케 현상 2008-12-14 11:52   좋아요 0 | URL
트로츠키의 문학과 혁명... 며칠전에 헌책방에서 봤는데 왜 샀는지 몰라요^^

로쟈 2008-12-14 12:03   좋아요 0 | URL
인터넷엔 영역본도 떠 있을 거예요...
 

두 주 전인가부터 '비바 악티바'라는 개념사 시리즈가 서점에 깔리기 시작했는데, 마땅한 리뷰가 올라오지 않아서 좀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관련기사가 눈에 띄기에 바로 옮겨놓는다. 비록 아직 한권도 손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 분권형 '개념어 사전'이 사유와 행동을 위한 '도구상자'로서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개념 없는 이들은 필히 챙겨둘 일이고... 

한겨레(08. 12. 13) 인권·시민·계급 ‘개념의 족보’ 한눈에 본다

인문사회과학 시리즈 ‘우리시대’로 한국 출판계에 ‘문고판 르네상스’를 열어젖힌 책세상 출판사가 ‘비타 악티바’(Vita Activa·행동하는 삶)란 이름의 개념사 시리즈를 펴냈다.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어를 뽑아낸 뒤 그 개념이 생성되고 변화해온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실천적 의미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풀어내려는 시도다. 개념에 대한 계보학적·지식사회학적 탐색인 셈이다.

‘개념사’라는 방식이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것은 아니다. 2002년 시작된 도서출판 이후의 ‘비투비21’은 현재 2차분까지 출간된 상태다. 하지만 영국 오픈유니버시티 출판부의 ‘기본개념 시리즈’를 발췌·번역한 것이란 점에서 국내 학자들이 집필하는 비타 악티바 시리즈와는 차이가 있다.

이번에 나온 1차분은 <인권>(최현), <아나키즘>(하승우), <시민>(신진욱), <계급>(이재유), <아방가르드>(노명우) 5권이다. 필자 대부분 진보 성향의 30~40대 소장학자들이다. 개념의 역사를 통해 실천적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시리즈의 문제의식은 신진욱 중앙대 교수가 쓴 <시민>에 명료하게 정리돼 있다.

글쓴이에 따르면 개념은 “만들어진 역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일부”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고대 아테네와 로마에서 탄생한 시민이란 개념이 중세와 근대를 거쳐 어떻게 오늘날의 핵심가치로 부상하게 됐는지를 다양한 지성사의 흐름과 정치·사회적 사건을 통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정치적 주권자이며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시민의 이념이 보편화되기까지는 구세력에 맞선 근대 시민계급의 선도적 투쟁과 그 이념의 경계를 사회·경제적 평등의 영역으로 확대하려는 노동계급의 지난한 노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글쓴이는 하나의 윤리적 요청을 도출해낸다. 신분·계급·성적 한계를 넘어 확장되어온 시민의 이념은 “여전히 시민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또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누군가와도 평화롭고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세계 시민사회에 대한 모색”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가 쓴 <아방가르드>는 형식에서 ‘개념사’보다는 ‘예술의 사회사’에 가깝다. 도전과 성공, 좌절로 이어진 아방가르드 운동의 예술사를, 그것을 둘러싼 정치·경제·사회의 포괄적 맥락 속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방가르드의 출현 배경을 혁명과 제국주의 전쟁으로 초래된 정치·사회적 동요와 신기술의 출현이 가져온 예술적 재현의 위기에서 찾는다. 아방가르드는 19세기에 확립된 근대예술의 미학적 이상을 거부하고 저항과 실험을 통해 제도 예술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급진주의자들의 시도였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기 취리히에서 태동해 베를린과 쾰른, 뉴욕을 거쳐 파리로 이어지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핵심을 글쓴이는 반전통과 국제주의, 변혁에 대한 열망 등으로 요약한다. 일상의 기성품을 통해 신격화된 예술의 허구성을 폭로했던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시각적 충격을 통해 불편한 삶의 진실을 드러내려고 했던 마그리트의 콜라주는 이런 아방가르드의 이상을 구현한 대표적 사례로 인용된다.

하지만 글쓴이의 관심은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성취한 영광보다는 실패에, 도발과 소란을 의도했던 오브제가 ‘거장의 작품’으로 전시되고 판매되는 ‘성공의 역설’에 맞춰져 있다. 그가 볼 때 오늘날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은 ‘시장’이다. ‘새로움’은 한때 아방가르드의 전유물이었지만, ‘유행’이란 이름으로 부단히 신상품을 만들어내는 시장 앞에서 예술의 도발은 과거의 파괴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섣부르게 아방가르드의 종말을 선언하진 않는다. 아방가르드에는 대중문화가 갖지 못한 ‘저항 정신’이란 자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을 글쓴이는 2005년 뉴욕의 미술관을 순회하며 벌인 ‘도둑 전시’ 해프닝을 통해 관객과 예술 시스템을 조롱한 거리 예술가 뱅크시에게서 찾는다. “아방가르드는 죽지 않는다. 뱅크시가 사라지면 또다른 이름의 아방가르드가 나타날 것이다. 누구나 아방가르드가 될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꿈꾸는 자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되풀이되는 신화다.”

시리즈 2차분은 내년 1월에 나온다. 출판사는 내년 말까지 전체 30권을 완간할 계획이다. 남아 있는 시리즈는 <공화주의> <노동가치> <민족주의> <생태주의> <유토피아> <자본주의> <자유> 등이다.(이세영 기자)

08. 12. 12.

P.S. 내친 김에 개념사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도 챙겨놓는다. '개념사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기사다.

대학신문(08. 11. 15) "내 말은 그 말이 아니잖아” - 개념사를 아십니까?

도시 지역 및 국가 구성원으로서 정치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 주체. 위키백과사전에 나온 ‘시민’에 대한 정의다. 오늘날 시민은 국민국가의 구성원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산업혁명 당시에는 유산계급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됐다. 인문·사회과학의 개념은 역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사회제도에 따라 달리 정의된다. 한림대 한림과학원 김용구 원장은 “개념은 장소(토포스)와 시간(템포)에 따라 그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개념사 연구는 개념의 역사를 추적해 기원을 살펴보고, 개념을 매개로 정치·사회의 전개과정을 분석한다. 개념은 정치사회의 구체적 변화를 반영하는 치열한 사고과정의 산물이고 개념사는 실증적 정치사회 분석과 사상사적 분석의 매개체다.

◇‘근대’에서 벌이는 ‘개념의 싸움’=한림과학원은 지난 2005년부터 ‘한국 개념사 사전’을 편찬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오수창 교수(한림대·사학과), 송호근 교수(사회학과)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참여해 총 50개 항목으로 집필할 계획이며 2015년에 완료할 예정이다. 지난 9월에는 ‘한국 개념사 총서’의 1권으로 김용구 원장의 『만국공법』이 출간된 바 있다. 이 용어는 일본 학계의 용어 ‘국제법’에 밀려 지금은 쓰이지 않고 있다.

현재 7차례 진행된 워크숍에서는 시장, 민족, 국가, 주권, 시민, 헌법 등의 용어가 선정됐다. 이들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갈 때 생성된 개념으로서 근대를 규정짓는 핵심 용어다. 박명규 교수(사회학과)는 “개념사 연구는 근대를 거쳐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게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등 근대의 문화적 성격을 밝히려는 성격을 띠고 있다”며 “개념사의 문제의식은 ‘근대를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와 관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19세기 말은 고유한 언어, 사상이 서구문물과 만나면서 ‘개념의 싸움’을 벌이던 시기다. 전근대와 근대가 만나면서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지던 19세기 말은 개념사의 관건이 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한국 개념사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유럽에서의 개념사 연구는 통시적, 공시적 관점에서 ‘개념의 전이’를 주로 다루지만 한국에서는 ‘개념의 충돌’도 주 연구대상이다. ‘시민’ 역시 한국에서는 한자문명권, 한국의 특수성 등의 맥락에서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된다. 박명규 교수는 「한국 개념사 연구의 논리와 방법」에서 우리만의 맥락으로 시민의 개념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시대 ‘시민’은 ‘시(市, 시장을 뜻하는 한자)’와 ‘민(民)’의 합성어로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시민’은 자유로운 도시주민을 의미했는데, 도시행정의 개편과 더불어 ‘시의 주민’이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헤겔 철학 및 마르크스주의가 소개되면서 ‘시민’은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입되던 서구사상이 서구에서 한국으로 직접 들어오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실제로 1990년대 초에 언급된 ‘시민’은 일본의 시민론을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박명규 교수는 “한국의 개념사를 연구할 때는 서구 개념이 동아시아에 전파된 과정, 한자문명권 내에서 일어나는 개념의 충돌, 일본의 식민 과정에서 나타난 서구사상의 굴절, 서구사상의 직수입 등의 과정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보편과 특수, 두 마리 토끼 잡기= “피레네 산맥 이편에서는 진리, 저편에서는 오류.”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대다수 서양에서 탄생, 정리된 개념이다. 서양의 개념은 비서양에 수용되면서 기존의 개념과 충돌해 서로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같은 용어라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용어를 사용할 때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개념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개념사 연구는 비교문화적 관점을 통해 학문이나 사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강상규 교수(한국방송통신대·일본학과)는 “세계사적 개념과 동아시아적 특수성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며 “보편과 특수의 접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칫 맥락을 놓치면 용어가 보편적 개념으로만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과 특수의 경계에 위치한 개념사 연구는 동양의 학문을 오리엔탈리즘으로 격하하는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고, 한국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강 교수는 “개념사를 통해 구체적 맥락을 파악할 때 이 땅의 고민이 묻어나는 학문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념사, ‘동아시아’를 외치다=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와 동북아역사재단 등 4개 단체가 공동주최한 제11회 개념사국제학술대회가 지난 9월에 개최됐다. ‘서구 개념의 지구적-역사적 전파와 동북아시아 지역질서의 변환’을 주제로 유럽, 아시아 등의 학자들은 서구 개념이 아시아 지역으로 어떻게 전파됐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의했다.

리디아 류 석좌교수(미국 컬럼비아대·인문대)는 ‘제국주의 전쟁에 있어서 상처에 대한 담론’을 주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개념을 정의해 타국을 침략했는지 분석했고, 사다미 스즈키 박사(일본 국제일본연구센터)는 ‘메이지유신기 자유와 평등의 개념에 대하여’를 주제로 일본에서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한국의 개념사가 동아시아의 개념사, 세계적 개념사와 함께 논의된 것이다.

지난해 인문한국지원사업에서 인문분야 중형 연구소로 선정된 한림과학원은 근대 이후 개념들이 동아시아 각국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소통 가능성을 넓히고자 ‘동아시아 기본개념의 상호소통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한림과학원은 ‘18세기 시(時)와 속(俗) 관련 용어의 변화와 의미’, ‘대립개념과 연관개념을 통해 추적한 문명개념의 변천과정-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등 다양한 주제로 월례발표회의를 열고 있다.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와 현대문제를 연구하는 동아시아학술원도 ‘동아시아 개념사의 가능성 모색’을 주제로 지난달 10일 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민병희 연구원(동아시아학술원)은 ‘동아시아에서의 개념사 연구문제에 대하여’를 주제로 유럽 개념사와 동아시아 개념사를 비교 분석했다.

◇개념사, 아직은 초보운전 중=연구자들은 한국의 개념사 연구가 첫발을 내딛는 단계라고 입을 모은다. 강 교수는 “현재 사회 근간을 이루는 용어를 우선 연구하고 있다”며 “협의를 통해 용어를 확대, 선정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개념사 연구를 위해서는 서양의 정치사상 및 동아시아의 논의와 더불어 한국의 논의를 함께 파악하고 비교 연구해야 하기 때문에 학제 연구가 필수적이다. 최근 여러 학술대회에서 연구자들의 협의가 이뤄지는 점은 기대해볼 만하다.



이제 막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개념사 연구는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박명규 교수는 그중에서도 사전편찬 작업을 첫손으로 꼽았다. 그는 “어휘사전이 주를 이루는 우리나라는 정교하고 체계적인 사전이 부족하다”며 “어휘에 대한 용례 사전이 발전해야 사전적인 정의를 기초로 연구가 진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시점에 서울대 역사연구소 주도로 진행 중인 ‘역사용어사전’ 편찬 작업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최근 연구는 한자개념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자어가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만들어졌고, 번역·수입됐는지 등 어휘의 연속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자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개념사는 학문을 위한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연구라 할 수 있다. 깊이 있는 학문을 하려면 개념 자체가 명확히 정립돼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개념사를 ‘학문의 얼굴’이라고 일컫는 이유다.(류원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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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3 15:55   좋아요 0 | URL
유럽어가 근대일본을 통해 번역되면서 한자문화권에 정착된 역사에 관한 연구는 정말 절실한 과제라고 봅니다.이런 곳에 눈을 돌리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학문도 점점 나아지나 봅니다.

로쟈 2008-12-14 09:46   좋아요 0 | URL
<번역어 성립사정>이란 번역서가 있는데, 후속작을 기대했지만 절판되고 말더군요...
 

필요 때문에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필맥, 2007)를 읽는다. 괴테의 <파우스트> 읽기에 이어진 것인데, 사실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들은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대가인 줄은 알지만 남들이 대신 읽어주었으면 하는 작가 1순위가 나에겐 토마스 만이다(그의 중단편들은 사정이 다르지만). 게다가 분량도 분량인지라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본전도 뽑기 어렵다. <파우스트 박사>와 관련한 논문과 참고자료로 다수 챙겨서 읽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도르노의 자문까지 얻어서 썼다는 음악 이야기들은 다 따라잡기 힘들다. 다만, "러시아 사람은 깊이가 있지만 형식이 없어. 서구 사람들은 형식은 있지만 깊이가 없지. 둘 다 가지고 있는 민족은 우리 독일 민족뿐이야." 같은 대목들이 간혹 눈을 즐겁게 해주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파우스트 박사>를 통해 '시민과 예술가'란 주제 외에 '독일과 독일인'이란 주제가 토마스 만에게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가늠해볼 따름이다. 니체와 토마스 만, 그리고 니체와 카잔차키스를 대비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런 가운데 얻은 소득이자 숙제이다. 기억을 위해서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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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지성과 신비의 아이러니스트
로만 카르스트 지음, 원당희 옮김 / 책세상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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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토니오 크뢰거.마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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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
토마스 만 저자, 홍성광 역자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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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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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2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2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초에 재미있게 읽은 이번주 시사IN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제학자 우석훈의 '사회과학 대망론'이다. 경제위기 때마다 마르크스 경제학이 부활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지만, 그의 주장대로 르네상스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것은 사회과학 독자가 1998년 수준인 20만명이 되는 것이다(고작 인문학 독자 1만명을 꿈꾸는 내가 소심하게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뭔가 새로운 '얘기 만들기'가 진행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당신이 미네르바를 믿는다면 이 참에 우석훈도 믿어보자. 그리고 최소한 한달에 한권, 사회과학서를 돈 주고 사서 읽어보자.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문화가 어떻게 살아나는지 한번 지켜봐 보자. 그런데, 방안을 둘러보니 정말 사회과학서가 드물군. 죄다 문학, 철학, 미학, 역사, 예술서 들이니... 

시사IN(08. 12. 09) 사회과학 르네상스는 오는가

‘부분균형’이라는 분석 틀을 만든 앨프리드 마셜이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라고 했단다. 이후에 마셜의 책을 꽤 많이 읽었는데, 정말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찾지 못했다. 요즘 다시 부활하는 케인스의 적 중에 한 명이, 바로 이 마셜이었다. 어쨌든 이 한 문장은 스무 살 청춘이었던 나의 가슴을 뛰게 했고, 내가 태어난 이유를 비로소 찾은 것 같았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개뿔, 경제학!”이라는 말이 나왔다. 외환위기 시절 한국의 경제학은 모든 것을 은폐하려고만 했고, 과학은 숫자로 가득한 예쁜 도표에서만 존재했다. 이제 마흔이다. 다시 이 문장을 접하고는 “미네르바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점심이나 저녁식사, 그리고 차를 마실 때 미네르바보다 더 끔찍하고 참혹하게 미래를 예상하던 증권사나 연구소의 경제학자들이 다음 날 발표한 문건의 모든 문장은, “나도 월급쟁이야”라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월급이 그렇게 중요하더냐, 전문가라는 사람이!

‘마르크스주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있다. 한때 마르크스 경제학이 화려하게 부활한 적이 있는데, 바로 1974년 1차 석유파동 이후의 한동안이었다. 케인스 경제학이 위기를 맞으며, ‘이것은 석유값 때문이다’ 혹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음모 때문이다’라고 되지도 않는 말을 할 때,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그게 맞든 틀리든 나름의 설명을 했다. 과잉생산 때문이든가, 부문별 조정 실패 때문이든가, 아니면 유통주의적 임금조정의 실패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다리면 좋아진다’는 우파들을 제치고 좌파끼리 논쟁하던 시기가 있었고, 이 시기에 마르크스 경제학은 다시 한 번 꽃을 피웠다. 고 정운영 선생이 평생 풀어보고 싶었던 ‘전형논쟁’이라는 것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파 경제학에는 ‘공황론’이라는 것이 없고, 위기이론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그러니 경제위기가 오면, 당연히 공황이라는 이론 틀에서 출발하는 좌파 경제학이 힘을 쓰게 되어 있다. 지금이 딱 그런 시기이다. 과연 한국에서 사회과학 르네상스가 올 수 있을까?



1만 권 팔면 ‘신의 영역’

자, 한국의 출판시장 규모를 살펴보자. 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로, 2007년 3조1000억원 정도 된다. 그렇다면 시계를 10년 뒤로 돌려서, 외환위기의 여파가 몰려들기 시작한 1998년에는? 3조7000억원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출판시장은 고작 6000억원만 줄어든 선방을 한 셈이다. 물론 이것은 ‘슬픈 선방’이다. 1998년 한국에서는 1억9000만 권이 발행되었는데, 2007년에는 1억3000만 권이다. 확실히 부수는 줄었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가장 많이 줄어들었을까? 2007년 한국에서 사회과학 도서는 총 1532종이 발행됐다. 1999년 1351종보다 약간 늘어난 셈이다. 그렇다면 1998년에는? 두둥! 1만4460종. 1998년에서 1999년으로 넘어오는 1년 사이에 사회과학 도서가 만 종 단위에서 천 종 단위, 즉 10분의 1 가까이로 준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이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됐다. 다시 말해 외환위기를 경계로 한국에서는 사회과학이 죽었고, 이게 출판시장 자체를 위축시킨 1등 요인이 된 셈이다.

아주 과학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2년 전 나는 여러 통계를 종합해서, 한국의 사회과학 독자가 ‘2만명’이라는 가설을 세운 적이 있다. 이 가설은 대체로 여러 정황에 대해 합리적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과학 시장은 50권에서 시작한다. 가족과 지인이 사주는 분량이다. 교수 가 내는 책은 1000권이 넘으면, 우리끼리 베스트셀러라고 부른다. ‘명함 대신 사용하는 책’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2000권을 넘으면, 출판사의 손익분기점을 넘어 최소한 손해는 안 끼치는 책이 된다. 5000권을 넘기면, ‘50명의 글쟁이’ 안에 들어간다. 고종석 같은 저자가 대충 그 선에 서 있는 걸로 안다. 1만 권을 넘기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이런 책을 낸 출판사는 보통 ‘중견 사회과학 출판사’라 분류된다. 이 정도 됐을 때 저자가 받는 인세는 1000만원 안팎이다. 그 이상의 경지는 하늘이 하는 일이다. 장하준은 그래서 ‘신 중의 신’이라 불린다. 국방부 불온문서? 그것도 신의 능력에 포함된다.

최근 일본의 어느 에디터에게 놀랄 만한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의 출판시장은 한국보다 3배 이상 큰데도 이른바 ‘심각한 책’이 연간 1500종 나오는 데 비해, 한국에서 같은 1500종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과학을 우습게 보지만, 어쨌든 그는 이것을 한국의 저력이라 파악하며, 일본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매번 외국 저자들에 비해서, ‘급 떨어지고, 질 떨어지는’ 저자 정도 취급받는 한국 사회과학의 지은이들이, 지난 10년간 일본보다 규모도 작고 구조도 열악한 상황에서, 정말로 이 악물고 사회과학이라는 장르를 지켜온 셈이다. 한국인은 한국 저자를 우습게 보지만, 일본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금방 망할 것 같아 보이는 한국이 아직도 학술문화에서 저력을 가지고 있다고 경계하는 눈치이다.

저자의 고령화가 진짜 위기

한국의 사회과학 시장은, 지난 10년 동안 2만명 정도의 사회과학 독자, 1000명 미만의 저자,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이 악물고 지켜온 시장이라서, 단군 이래 최악의 출판 공황이라는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도 어찌어찌 버티기는 할 것 같다. ‘신의 영역’이라는 1만 권 팔아 1000만원 버는 상황에서도 버텼는데,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 그러나 저자의 나이가 점점 많아지고, 편집자의 나이도 같이 높아지는 것, 이건 위기다. 20대가 에디터로 활동하고, ‘지금 여기’에 대해 얘기를 던지는 20대 저자들이 등장하지 못하는 이 구조적 위기, 이건 정말 위기이다. 일본과 한국 시장의 미래 구조 차이는 바로 이 대목에 있다. 즉, 길게는 못 버틴다.

르네상스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이 위기에서 더 많은 사람이 분석하고, 더 많은 사람이 쓰고, 더 많은 사람이 읽고 떠들면서 소통해야 사회적 대화가 시작되고, 사회 합의든 논의든 다음 단계를 위한 진화가 시작된다. 지금보다 10배 많은 사람이 글을 써서 사회과학 독자가 1998년 수준인 20만명이 되면, 나는 비로소 한국형 경제모델도 시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가장 핵심 쟁점인, 사회과학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 분야의 ‘시대와 호흡하기’ 그리고 ‘얘기 만들기’가 시작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지금, 세상은 위기이다. 많은 사람이 그 위기를 직시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결국 붕괴하게 된다. 한때, 세계의 제국이던 네덜란드가 그렇게 붕괴했다. 위기의 순간 사회과학적 분석과 인문학적 상상이 결국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단지 ‘용기를 내라’는 이명박식 처방으로는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다. 문화경제로의 전환, 그 첫발은 이 위기 국면에서 사회과학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래야 영화도 살고, 만화도 살고, 음악도 살아난다(하나만 부탁하자. 제발 도서관들, 출판사에게 ‘영광으로 알고 책 공짜로 달라’는 거, 그것 좀 하지 마라). 

08.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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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사IN] 사회과학 르네상스는 오는가 / 우석훈
    from 자기치유 2008-12-1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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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인문교양과 딜레탕트적 독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6 00:20 
    주간한국의 '당신은 딜레탕트입니까'란 커버기사에서 독서문학 꼭지를 옮겨놓는다. 인문교양서 독자층의 관심을 엿보게 한다('로쟈'와 '비평고원' 같은 이름도 거명되고 있다). 리처드 세넷이 말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의 양상을 딜레탕트적 독서와 연관하여 다뤄보려고 했으나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서 일단은 기사만 스크랩해놓는다. 참고할 만한 내용은 먼댓글로 걸어둔다.     주간한국(09. 03. 11) [딜레탕트] 독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