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에 읽을 이론서 가운데 하나로 최근 번역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 2007)을 꼽아두고 있고, 현재는 영역본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다(1장까지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복사했다).

 

 

 

 

그러면서 미리 읽어두려고 한 것이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문예출판사, 1994)에서 루만에 관한 장이다. 그것은 열두번째 강의의 '부언설명'으로 붙어 있는데, 제목이 '니클라스 루만: 체계이론에 의한 주체철학적 유산의 전유'이다. 하버마스는 사회학의 계보가 아닌 주체철학의 연장선상에서 루만의 체계이론을 읽겠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독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독어판 <사회쳬계이론>(1984)이다. 그를 조금만 따라가본다(많이 따라갈 수도 없다). 내가 더불어 참조한 건 영역본(1987)과 아래의 러시아어본(2003)이다.

Философский дискурс о модерне

"루만은 일반적 사회이론의 '개요'를 제시하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이론적 기획을 개관할 수 있도록 수십 년 동안 지속되고 점차 확장되는 이론 팽창의 중간결산을 한다."(424쪽) 그러니까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은 그의 이론적 중간결산이며 이로써 독자들은 루만의 전체이론을 개관해볼 수 있다는 것.

"루만의 시도는 콩트로부터 파슨즈에 이르는 사회이론의 학제적 전통과의 연결보다는 오히려 칸트로부터 후설에 이르는 의식철학의 문제사와의 접속을 찾는다.(...) 이 이론은 주체철학의 근본 개념과 문제설정들을 물려받으려고 하며, 동시에 주체철학의 문제해결 능력을 능가하고자 한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결별한 철학의 후계자'로 제시된다고 하는데, '결별한 철학'의 영역은 'abandoned philosophy'이다. 짐작에는 (구조주의 이후) '주체철학의 종언'이 회자되던 시점에서, 체계이론은 말 그대로 이 '버려진 철학'으로부터 용어들과 문제틀을 가져와서 주체철학이 풀고자 했던 문제들을 더 잘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이 과정에서 실행되는 체계이론의 시각전환은 자기자신과 분열관계에 있는 현대성의 자기비판을 대상없이 만든다. 자기자신에 적용된 사회의 체계이론은 현대사회의 복잡성 증가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벌써부터 하버마스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아마도 이 대목이 그 비판의 개요이자 핵심적인 착안으로 보인다. 체계이론은 현대성(modernity)에 대해서 '비판적인 거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 

여기서 '시각전환'은 '주체철학으로의 시각전환'이겠고, '자기자신과 분열관계에 있는 현대성'은 앞 부분의 내용을 참조해야 알 듯싶다. 그런데, 그런 현대성의 자기비판을 체계이론은 무력화한다는 얘기. 왜냐하면, 스스로에게 적용된 사회이론은 현대사회의 복잡성 증가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복잡성의 증가를 어떤 진화의 척도로 간주한다면 자연스레 이러한 결과가 도출될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체철학적 유산을 변형시킴으로써 헤겔의 사망 이래로 현대성의 원리인 주체중심적 이성에 대해 제기된 의심들로 말미암아 노출된 유증자(遺贈者)의 문제들이 과연 체계이론으로 옮겨가는가 하는 물음이 나의 관심이다."(424-5쪽)

물론 원문을 직역한 형태이긴 할 텐데, 이런 번역문은 독자를 기운 빠지게 할 뿐더러 짜증나게 한다(형용사절이 너무 길어서 하버마스의 관심에 이르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이 대목의 영역은 이렇다:

"What interests me is whether, together with this distantiated reinscription of philosophy of the subject, systems theory also ends up with the kinds of problems that beset those who left us this inheritance - problems that, ever since Hegel's death, have given rise to the very doubts concerning subject-centered reason as the priciple of modernity that I have discussed in these lectures."(368쪽) 

독어본이 어떻게 씌어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략 영역본과 맞추어보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체철학적 유산을 변형시킴으로써"는 "distantiated reinscription of philosophy of the subject"에 해당하겠다. '변형' 대신에 영역자가 선택한 단어는 '재기입(reinscription)'이다. 내 식으로 자유롭게 이해하자면 "오래된 주체철학을 새롭게 호명함으로써" 정도라고 본다. 그리고 하버마스의 관심거리는 주체철학의 변형/부활로서의 루만의 체계이론 또한 주체철학이 봉착했던 문제들(혹은 그 한계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노출된 유증자(遺贈者)의 문제들이 과연 체계이론으로 옮겨가는가 하는 물음이 나의 관심이다"에 해당하는 건 "systems theory also ends up with the kinds of problems that beset those who left us this inheritance"이겠다. '유증자의 문제들' 같은 건 너무 불친절한 번역이다. 나대로 자유롭게 옮기면, "체계이론 역시 이러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준 철학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과 함께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게 아닌가" 하는 게 나(하버마스)의 관심사이다.

그럼 어떤 문제들인가? "헤겔의 사망 이래로 현대성의 원리인 주체중심적 이성에 대해 제기된 의심들"이다. "problems that, ever since Hegel's death, have given rise to the very doubts concerning subject-centered reason as the priciple of modernity"가 거기에 해당한다. "헤겔의 죽음 이래로 모더니티의 원리로서의 주체-중심적 이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해왔던 문제들". 간추리면, 주체철학의 유산으로서 '주체-중심적 이성'이 갖는 문제점과 한계를 주체철학의 다른 버전으로서 체계이론 또한 갖게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이다(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이성'을 그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러니까 하버마스의 비판은 삼단논법을 따라 진행된다. (1)루만의 체계이론은 근대 주체철학의 계승이다. (2) 주체철학의 주체-중심적 이성은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3)따라서, 체계이론 역시 똑같은 한계에 봉착하는 것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하버마스 자신이 주석을 통해서 해명하고 있다.

"수난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나는 물론, 이론을 오직 한 측면에서만 멋지게 서술한다면, 우리는 이론이 가지고 있는 풍요로움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맥락에서는 이론의 이 측면만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425쪽)    

이 대목의 번역 역시 좀 서툴다는 인상을 준다. '수난에 익숙한 사람'이라니? 직역이더라도 문맥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영역본은 이렇게 돼 있다. "As one accustomed to the same treatment, I realize of course that one does not do justice to the richness of the theory when one single-mindedly broaches it from just one angle - but in out context, only this aspect is of interest."(421쪽) 

'수난에 익숙한 사람'은 영역본에 따르면 '이런 식의 취급에 익숙한 사람'이다. 하버마스 또한 이론의 일면만을 갖고서 평가/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한 가지 관점에서만 문제를 끄집어내어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뿐더러 이론의 풍요로움을 훼손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스스로도 인정한다는 것('멋지게 서술한다면'은 어디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하지만, '우리의 맥락'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인데, 그 맥락이란 이 책(강의)의 주제대로 '모더니티'에만 초점을 맞추어 현대 사상가들을 평가하려는 것과 관련된다. 이상이 그의 루만론의 전제와 사전 정지작업이다. 나머지 본론은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07. 07. 04.

P.S.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 오늘 날아온 신간 안내 메일에는 우연찮게도 루만 연구서가 한 권 들어 있었다. <니클라스 루만: 영혼에서 체계로(Luhmann Explained: From Souls to Systems)>(2006)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책인데 분량도 두툼한 최근간 연구서이다. <사회체계이론>을 독파한다면 참고해볼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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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0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버마스의 독일어 원서는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로 Suhrkamp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요, 말씀하신 원문의 해당부분을 보면, "Leidgewohnter"가 "수난에 익숙한 사람"으로, "forsch anschneidet"가 "멋지게 서술한다면"으로 번역된 경우입니다(모두 독일어본 p.426). 전자의 경우는 "이러한 대접[혹은 수모]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정도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특정한 하나의 측면만을) 거칠게 재단하자면" 정도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독일어본과 비교했을 때 영역본도 그리 적확한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문맥이 통하게 잘 '의역'했다는 점에는 점수를 줄 수 있겠지만요. 국역본의 번역이 '거칠게 재단'된 것만은 분명하긴 합니다.

로쟈 2007-07-0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어본의 경우도 그런데, 그들대로의 번역 관행이 있는 것이겠죠. 중요한 건 말이 되게 옮기는 것인데, 말이 안되는 번역본을 읽는 거야 말로 (익숙한 일이긴 하나) 분명 '수난'입니다.--;

람혼 2007-07-06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그런 반복되는 '수난' 속에서 이젠 아예 원문을 보지 않고도 대략적이나마 원문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같습니다. 물론 상당히 부정적인, 마치 귀류법과도 같은 방식을 통해서라는 게 더욱 큰 문제겠지만요^^; 그런 점에서 같은 인구어 계열의 번역에 있어서는 좀 더 작업이 수월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배가 아플 때도 '아주 가끔은' 있습니다.--;

로쟈 2007-07-0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그런 반복되는 '수난' 속에서 이젠 아예 원문을 보지 않고도 대략적이나마 원문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같습니다"는 정곡을 찌르신 말씀입니다. 제 경우엔 그런 예상에도 불구하고 원서까지 구해서 보기에 돈이 두 배로 든다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람혼 2007-07-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백배 동감입니다, 특히 그 '비용'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더.^^;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로쟈님이 말씀하신 과정과 정확히 역을 이루는 과정 또한 존재하는데ㅡ아마도 이 역시 로쟈님도 느끼고 계시는 바가 아닐까 생각하지만ㅡ원서를 먼저 구입해 멀쩡하게 독해까지 다 마치고는, 그에 관한 '악명 높은' 번역본이 도대체 어떻게 번역되어 있나 하는, 마찬가지로 '악명 높은' 편집증적 궁금증에서, 그 번역본까지 사게 되는 과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로쟈 2007-07-07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증세가 비슷하시군요.^^;

marr 2007-08-01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엔 독일어건 영어건 경제성이란 측면에서는 한글 번역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외국어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건 모국어를 읽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을 요하는 문제지요. 그런 면에서 번역본을 읽으면서 머리로 재번역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지요.

로쟈 2007-08-01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번역본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불성실하고 부정확한 번역서를 읽는 건 '비교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으니까요...
 

재출간된 스튜어트 휴즈의 서구 지성사 3부작에 관한 리뷰를 어제 옮겨놓았는데('20세기 서구 지성사의 밑그림') 오늘 학교에 나오다가 잠깐 서점에 들러 3권 <지식인들의 망명>(개마고원, 2007)을 손에 들었다. 1, 2권과는 달리 소장하고 있는 책이 아닌데다가(사실 3권은 기억에도 없던 책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올 무렵엔 이미 절판된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3부작 중 개인적으론 가장 흥미를 갖는 시대이기 때문이다(아무래도 가까운 시대에 흥미를 갖게 된다). 게다가 '개역판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번역도 다시 손질했고 책의 만듦새도 좋은 편이다.

 

 

 

 

나귀님의 페이퍼에서 봤을 때는 초판이 <지성의 대이동>이었는데, 역자후기를 보니까 <파시즘과 지식인>으로 돼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두번 책을 낸 것인가 해서 도서관 소장도서를 검색해보니 <지성의 대이동>(한울, 1983)과 <파시즘과 지식인: 지성의 대이동, 1930-1965년의 서구사회사상>(한울, 1992)이라고 뜬다. 그러니까 처음 나온 <지성의 대이동>이 '대단히 신통치 않은' 성적으로 일찍 절판된 이후 거의 10년만에 다시 나오면서 한번 '제목 갈이'를 했던 것. 해서, 출판사를 달리하여 이번에 새로 나온 개정판의 제목 <지식인들의 망명>은 세번째 타이틀이 되겠다.  

어제 읽은 경향신문의 리뷰에서도 최근에 나온 <다른 곳을 사유하자>(푸른숲, 2007)와 같이 읽어볼 것을 권유했는데, <지식인들의 망명>의 목차를 보니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이럴 땐 성찬을 앞에 두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기분이다). 하지만 책을 통독할 여유는 없기에 서문만 읽어보려다가 저자가 감사를 표하는 이름들에서 또 '걸려들었다'. 또 몇 자 수다를 늘어놓게 된 이유이다(나의 타협안은 경쟁후보였던 '파슨스 vs 밀스'란 페이퍼를 다음으로 연기하는 것이다). 휴즈의 서문을 읽다가 얼핏 떠오른 그 동네의 풍경을 잠시 들여다본다.

<지식인들의 망명>은 <의식과 사회>(1958)과 <막다른 길>(1968)의 후속편으로 1977년에 출간됐는데(10년 터울로 한권씩 낸 셈이군), 서문에서 휴즈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몇 사람의 이름을 들고 있다. "나의 집필 마지막 해에는, 만약 그들이 나의 원고를 읽었더라면 상당히 중요한 지적들을 많이 해주었을 세 명의 인물을 죽음이 앗아가버리고 말았다."(6쪽) 음, 그러니까 '도움을 준' 이들이 아니라 '도움을 줄 뻔했던' 이들이 되겠다. 그 이름들은 리히트하임(1912-1973), 뢰벤슈타인(1891-1973), 그리고 잉게 베르너 노이만 마르쿠제(1913-1972)이다.

 

 

 

 

"그 중 리히트하임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나의 지식을 여러 각도에서 풍요롭게 해준 인물이었으며," 게오르그 리히트하임은 루카치 전문가이기도 한데, 그의 책으로 <루카치>(시공사, 2001) 등 여러 권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베버 서클의 마지막 중요인물이었던 뢰벤슈타인은 당시 앰허스트 대학 4학년이던 나를 처음으로 독일 사회사상계로 안내해준 사람이었다." 이 뢰벤슈타인의 책으론 <현대헌법론>(교문사, 1975), <비교헌법론>(교육과학사, 1991)이 번역돼 있다. 법학자 칼 뢰벤슈타인이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또한 이 연구의 중요 등장인물들 중의 한 사람(프란츠 노이만)의 미망인이자 또 다른 한 사람(허버트 마르쿠제)의 부인이기도 한 잉게 베르너 노이만 마르쿠제는 내가 그녀의 신념의 생명력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에 그녀와 나의 우정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1937년에 찍은 한 사진을 보니 세 커플이 등장하는데, 왼쪽부터 프란츠/잉게 노이만, 골드/레오 뢰벤탈(리오 로웬달), 허버트/소피 마르쿠제 부부이다. 잉게 노이만(왼쪽에서 두번째)이 미망인이 되고 나서 허버트 마르쿠제(오른쪽에서 두번째) 재혼했던 모양이다. 

찾아보니, 프란츠 노이만(1900-1954)은 레오 뢰벤탈(1900-1993), 허버트 마르쿠제(1898-1979)와 함께 망명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역시나 파시즘 분석으로 잘 알려진 정치학자인데 1954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단행본 저작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듯하며 <정치이론과 이데올로기 입문>(돌베개, 1984)이 공저로 나와 있다. 그리고 프란츠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던 잉게 노이만은 1956년에 마르쿠제와 재혼했다(그녀 또한 <유럽의 전쟁범죄>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참고로, 뢰벤탈(로웬달)의 책으론 <문학과 인간의 이미지>(종로서적, 1983)과 <문학과 인간상>(이화여대출판부, 1984)이 출간됐었다(같은 책의 두 번역서이다).

 

 

 

 

이어지는 휴즈의 감사. "나의 감사하는 마음은 우선, 계속되는 원고를 세심하면서도 항상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이핑해준 도로시 스킬리 양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두번째로는 박사학위 과정 때 나에게 배운 두 학생 제이와 로빈슨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대목 때문에 페이퍼 아이템을 잡은 것인데, 여기서 두 학생 제이와 로빈슨은 각가가 마틴 제이와 폴 로빈슨을 가리킨다. "나는 그들의 책 <변증법적 상상력>과 <프로이트 좌파>를 4장과 5장의 각주에서 상당히 많이 활용했다."

인문학 서지에 밝은 이라면 이 두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소개되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1950>(돌베개, 1979)로 나온 책이고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제이의 책으론 <아도르노>가 출간돼 있고, <시각의 헤게모니>에도 그의 논문이 실려 있다). 공역자 중 한 사람인 황재우는 시인 황지우의 본명이었다. 그리고 <프로이트 좌파>는 <프로이트 급진주의>(종로서적, 1981)라고 번역된 책으로, 빌헴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에 대한 유익한 입문서이다.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데, 마틴 제이의 '20세기 프랑스 사상에서 시선의 절하'란 부제를 갖고 있는 <내려뜬 눈(Downcast Eyes)>(1993)이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학위논문에 이어서 스승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지성사 탐구의 역작이다. 분량이 만만찮지만 마틴 제이의 책들도 재출간/번역되면 좋겠다...

07. 06. 09.

P.S. <지식인들의 망명> 책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는 '1961년 뉴욕 출생.'으로 시작한다. 바로 옆에는 붉은 글씨로 'H. Stuart Hughes, 1916-1999'라고 써놓고 말이다. 번듯한 표지에 이런 '깔끔한' 오타라니!..

한편, 오늘자 한겨레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와 함께 이 3부작에 대해서도 비중 있는 리뷰가 실렸는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4691.html), 어인 일인지 저자를 '스튜어트 휴스'라고 표기했다. 물론 'Hughes'를 '휴스'라고 읽는 건 자유이지만 모든 번역본과 다른 언론리뷰들에서 '휴즈'라고 읽는 걸 굳이 독불장군처럼 '휴스'라고 읽는 배짱은 무엇인지?(존경해주어야 할까?) '베냐민'의 경우도 그러하고, 이게 한겨레의 고집인지 고기자의 고집인지 모르겠지만(*한겨레 교열부의 고집이라 한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에게 갖다붙인 '삐딱이는 나의 힘!'도 나쁘진 않지만, 보기 흉한 건 어쩔 수 없다(이 리뷰는 '스튜어트 휴즈'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에세이'를 굳이 '에쎄이'라고 적는 창비식 표기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그런 게 '진보'라면 그건 '당신들의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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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당면한 과제 때문에 두통과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자투리 시간에 읽는 책들이다(일종의 '당의정'이다). 엊그제부터 붙들고 있는, '현대 역사학의 거장 9인의 고백과 대화'를 담은 <탐史>(푸른역사, 2007)가 그런 책이다. 이미 책이 출간되었을 때 소개 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지만, 불만스런 제목과 포맷에도 불구하고 책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며 내용 또한 알차다. 나는 이 탐할 만한 책을 도서관에서 몇 주 전에 대출해놓고 바로 며칠 전부터야 한두 페이지씩 읽고 있다.

 

 

 

 

아홉 명의 역사학자들 중 가장 먼저 읽고 있는 건 <치즈와 구더기>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이다. "카를로 긴즈부르그(1939년생)는 현재 활동 중인 역사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그만큼 글을 잘 쓰는 경우를 찾기 힘들며, 게다가 엄청나게 폭넓은 관심사를 따라갈 사람도 거의 없다."(464쪽)는 게 서두이다.

사실 긴즈부르그에 관해서라면, 주경철 교수의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문학과지성사, 1999)에서인가 처음 이름을 접해보고 <치즈와 구더기>(문학과지성사, 2001)도 구입했었지만 아직 읽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명성만을 알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눈길을 잡아끈 건 그가 러시아계라는 사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1939년 토리노에 정착한 러시아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아래 사진의 부부가 그의 부모이다). 

"아버지 레오네 긴즈부르그(1909-1944)는 러시아 문학 교수였는데, 카를로가 다섯 살이었던 1944년 파시스트 치하의 감옥에서 죽었다. 반면 어머니 나탈리아 긴즈부르그(1916-1991)는 20세기의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이탈리아 작가들 중 하나가 되었다." 역사가로서 카를로가 풍부한 문학적/문필가적 재능을 어디에서 물려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그의 아버지는 소설가인 어머니의 편집자이기도 했다). 대담 중에 카를로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아버지 레오네는 고골(리)의 <대장 불(리)바>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했으며, 어머니 나탈리아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권('스완네쪽으로')을 이탈리아어로 옮겼다(대단한 집안 아닌가?!).  

호기심에 나는 그의 가계에 대한 뒷조사(?)를 좀 해봤는데, 이유는 긴즈부르그란 이름에서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러시아의 유명한 문학자 리디야 긴즈부르그(1902-1990)가 카를로의 인척이 되지 않나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리디야의 저작은 내년쯤에 우리말로 출간될 것이다). 리디야는 카를로의 아버지 레오네보다 46년을 더 살았지만 나이는 7살이 더 많다. 두 사람은 모두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오데사 태생이다(20세기초반에 '오데사 마피아'가 유명했다). 정확한 촌수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모두가 '긴즈부르그 패밀리'에 속했을 거라는 건 미루어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 가계에 속하는지라 카를로는 어린시절 문학에 투신하겠다는 생각을 품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역사학이었으며 일찍부터 학계를 놀라게 할 독창적인 업적들을 내놓게 된다. 그가 27세에 펴낸 첫 저작이 바로 <베난단티>(1966)이다. 우리말로는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길, 2004)라고 옮겨진 책인데, '16세기와 17세기의 마법과 농경의식'이 그 부제이다.

나도 아직 구입하지는 않은 책인데(이번 여름방학에 읽어볼 계획이다)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미시사 방법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1966년 작을 한국어로 옮긴 책. 널리 알려진 <치즈와 구더기>보다 10년 앞서 발표된 것으로 긴즈부르그 저술세계의 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책은 1618년에 일어난 마리아 판초니의 재판을 중심으로, 자생적인 민중문화가 기독교로 대표되는 엘리트 문화의 탄압을 받으면서, 어떻게 '이단'으로 규정되고, 마법으로 동화되어 갔는지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단히 논쟁적이면서 혁신적이라는 평을 얻은 이 데뷔작에 이어서 그를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국제적 유명인사로 만든 것은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세계관에 대한 연구인 <치즈와 구더기>였다."(465쪽) 이 작품을 통해서 긴즈부르그는 '미시사'의 선두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며 그뒤 '미시사'란 이름은 곧 유행의 물결을 타게 된다(긴즈부르그 자신은 미시사와 거시사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시사와 거시사, 사건과 구조를 상호 보완하려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그동안 긴즈부르그는 개척자적인 연구의 많은 부분을 책이 아니라 에세이 형태로 간행해왔다. 이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경우가 <징후들>이라는 그야말로 뒤엉킨 실타래 같은 인상의 이름을 가진 글인데, 무려 13개 국어로 번역된 바 있다."(468쪽)

이에 대해 역자인 곽차섭 교수는 "아마 이제는 적어도 14개 국어라고 해야 할 듯싶다. 왜냐하면 2000년에 한국어로도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곽차섭 엮음, <미시사란 무엇인가>(푸른역사, 2000), 제4장('징후들: 실마리 찾기의 푸리')"라고 주석을 붙였는데, 보충하자면 이 에세이가 포함된 책 <신화, 상징, 징후>(1986)가 지난 2004년에 러시아어로도 번역이 됐으므로 '적어도 15개 국어'라고 해야 할 듯싶다(현재로선 유일하게 러시아아어로 번역된 책이며, 오래전에 모스크바 통신에 적어놓은 바 있지만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와 함께 지난 2004년 한 러시아 언론이 뽑은 역사부문 '올해의 책'이었다).

Мифы - эмблемы - приметы. Морфология и история.

1998년 볼로냐에 있는 긴즈부르그의 자택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질문자인 '마리아 루시아 팔라레스-버크'가 처음 던진 질문은 "당신의 생각과 관심사를 이해하는 데 출신과 교육의 어떤 측면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470쪽)였다.

긴즈부르그는 "한 개인이 어린애로부터 어른으로 가는 식으로 역사를 일직선적으로 보는 목적론적 접근방법에는 회의적"이라는 단서를 먼저 단 후에 자신의 성장배경에 대해서 자세하게 답한다. 이미 언급한 부분이지만 "내 외할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버지나 어머니 쪽 모두 유대계입니다. 아버지는 오데사 출신으로 어릴 때 이탈리아로 건너와 토리노에서 성장하여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 시민이 되었어요. 그는 자신이 러시아 출신이라는 것만큼이나 이탈리아인이라는 것에 대단히 집착했습니다." 아버지의 반파시스트 활동은 그러한 정체성과 연관된 것일 텐데, 그 결말은 감옥에서의 이른 죽음이었다.

해서 소설가인 어머니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낸 긴즈부르그의 이런 고백은 자연스럽다. "젊은 시절 나는 어머니처럼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곧 그쪽에 별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어쨌든 나는 지금도 그와 같은 글쓰기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역사 서술을 향한 열정이 소설을 쓰는 데 대한 열정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죠."(472쪽)

유려한 번역서이지만 강조한 대목은 문맥상 맞지 않는데(역자의 방심이겠다), 긴즈부르그가 결국엔 소설가가 아니라 역사가가 됐으므로 '소설을 쓰는 데 대한 열정'이 '역사 서술을 향한 열정'으로 바뀌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원문도 확인해보니 "...as if my passion for writing fiction was diverted to my passion for historical writing."(187쪽)이라고 돼 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댐이나 도랑같은 것이라 할까요. 어딘가를 억지로 막아놓으면 옆으로 더 세게 뿜어져 나오니까요. 어떤 것이든 아무리 길을 막아놓아도 결국에는 새로운 길의 일부가 되는 법이지요." 사실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 아닌가? 그걸 억지로 막아놓으면 '댐'만 터질 뿐이다!

"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또 다시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다른 아파트로 이사할 때 그동안 그린 그림 전부를 남겨둔 채 그냥 떠나버렸어요.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 역시 내 일부로 되었습니다. 마치 잘못된 행마가 결과적으로 오히려 좋은 행마로 바뀌듯이 말이죠. 나는 미술사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도 한 적이 있습니다만, 결국 나중에 조금은 그것을 이룬 셈이 되었지요."(474쪽)

그렇다는 것은 긴즈부르그가 따로 미술사가로서의 훈련을 받지 않았음에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티치아노, 장 푸케 등 미술과 관련한 여러 편의 글을 썼기 때문이다. 긴즈부르그 왈 "전쟁은 너무 중대한 일이라 장군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고 했다는 클레망소의 말을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이는 다른 영역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미술은 너무 중요한 일이라 미술사가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는 거지요."(491쪽)

그의 미술 사랑? "난 단순히 그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림을 사랑하죠. 난 정말로 그림을 사랑합니다. 실제로 나는 도서관에서 요청한 책이 올 동안 역사 잡지가 아니라 미술사 잡지를 읽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예요.(...) 화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나에게 중요한 경험이지요. 꽤 오래 전의 일인데요. 루벤스에 무지한 상태에서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느낀 전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는 새로운 장소, 작은 마을과 교회들을 찾아 이탈리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지요. 그때 난 죽을 때까지도 이탈리아 대부분을 여전히 알지 못할 것이라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 모든 것을 다 보려면 아마 서른 번 정도를 살아야 될 겁니다. 하물며 이탈리아 바깥 세계는 또 어떻겠어요."(491쪽)

해서, 긴즈부르그를 읽는 데만도 수년은 걸릴 것이다. 하물며 다른 저자들은 또 어떻겠는가...

07. 05. 07.

P.S. 본문에서 러시아어로 번역됐다고 한 <신화, 상징, 징후(Miti, emblemi, spie)>('징후'보다는 '실마리'가 더 적합한 번역이겠다)의 영역본은 지난 1992년에 나온 <실마리, 신화, 그리고 역사학의 방법>이다. 서문을 포함하여 248쪽인데, 348쪽 분량인 러시아어본과 대비된다(대조해봐야겠다). 책은 러시아어본이 나왔을 때 이미 10개 국어로 번역된 상태였다. 한국어본은 언제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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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7-05-0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저요!! 추천추천!! 이미 읽으셨을지도 모르지만 고양이 대학살이랑, 마르탱게르의 귀향도 미시사 관련 서적이지요.. 긴즈부르그가 러시아인이라는 건 오늘 처음 알았어요. 막연하게 유럽인이라고 생각했는데..그러고보니 러시아도 유럽이죠.. 아.. 그렇구나..(혼자 무슨 말을 하는거냐!!)

로쟈 2007-05-08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저요!'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네요. 추천은 감사합니다. 별로 반응이 없던 페이퍼였는데.^^;
 

'비극의 탄생을 읽기 위하여'란 페이퍼에 이어지는 또다른 워밍업이다. 지난 주말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던, '헤르메스의 빛으로' 연재 중에서 '니체 vs 빌라모비츠' 편을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어제 <비극의 탄생>과 함께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잠시 뒤적거렸는데, 조만간 몇 마디 쓰게 될 듯하다(도서반납 기한 때문에라도). 분량은 많지 않으므로, 출간 당시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이 문제적 텍스트를 이 참에 한번 읽어보시는 건 어떨지...  

경향신문(07. 04. 14) [헤르메스의 빛으로](14) 니체 vs 빌라모비츠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비극의 탄생’을 출판한 해는 1871~1872년이었다. 이 작품에서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 아니라, 비극의 죽음을 논의한다. 그는 예술은 원래 아폴론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인 요소의 이중적 결합을 통해서 발전한다고 한다. 본래 두 요소는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사이인데, 주기적으로 화해의 기간을 갖는다고 한다. 이 화해의 기간에 탄생한 것이 그리스 비극이라는 것.

따라서 비극은 아폴론적인 힘과 디오니소스적인 힘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혼연일체(渾然一體)인 무엇이다. 이 혼연일체의 무엇에 소크라테스라는 소피스트가 나타나 논리와 이성이라는 칼을 들이대는 바람에,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라는 내부 배신자가 등장해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비극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는 것이 ‘비극의 탄생’의 핵심이다.

그러면 비극의 사망에 대해서 니체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자. “디오니소스는 비극의 무대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다. 다름 아닌 에우리피데스를 통해서 흘러 나오는 신들린 힘(Daimon)에 의해서 말이다. 에우리피데스도 아니다. 그도 실은 가면에 불과하다. 이 신들린 힘, 그것은 아폴론도, 디오니소스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이 탄생한 다이몬이다. 이름하여 소크라테스다. 그리스 비극에 사망에 이르게 한 자가 바로(‘비극의 탄생’ 제12장)” 이 자, 곧 소크라테스가 저 술취한 디오니소스의 광기와 광란의 굿판을 무대에서 추방하고, 이성과 지성을 통해서 펼쳐지는 세계를 무대 위에 올리고자 시도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라는 미친 괴물”이 나타나자, 그리스 비극엔 아폴론적인 힘만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다고 니체는 천명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 바로 그 아폴론적 예술의 전형적인 파편이라 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철학이 신학에게 (시녀로)봉사했듯이, 문학을 변증론에 입각해서 전개되는 철학의 시녀로 만드는 이가 바로 플라톤이었다. 소크라테스라는 다이몬의 압력에 눌려서 말이다.”(‘비극의 탄생’ 제14장)



‘비극의 탄생’이 출간되자 가장 심하게 반발한 사람은 니체와 동학이었고, 실은 4년 후배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1848~1931)라는 고전문헌학자였다. ‘(고전)문헌학의 미래(Zukunft der Philologie)’라는 문건을 통해서 그는 “(그런 의미에서라면)나는 기꺼이 디오니시우스의 제물이 되겠다. ‘소크라테스를 모범으로 삼는 인간’이 욕의 대명사라 한다면, 나는 그 욕을 기꺼이 듣겠다”고 선언한다.

소크라테스를 위해선, 니체가 뭐라 하든 워낙 든든한 후손들을 두었기에, 굳이 빌라모비츠의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졸지에 비극의 살해 하수인으로 몰린 에우리피데스일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사로, 곧 에우리피데스의 구원자로서 빌라모비츠는 자처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세계를 자신이 본 그대로 재현한 작가이다. 거기에는 어떤 수치도(aidos)와 원한(nemesis)도 없다.” 세계 묘사 혹은 세계 재현에 있어서 ‘쿨’한 에우리피데스의 태도야말로 진정으로 “혁명적”이라고 그는 평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우리피데스는 “현대적 사유 방식의 예시자”이며, “구시대적 사고와 전통을 흔들고 일소하는데, 어떤 소피스트도 못해낸 일을 그가 해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실제 작품을 통해서 살펴보자. 메데이아라는 여인은 한 남자의 아내이면서 두 아이의 엄마였다. 어느 날 남편이 새 장가를 가겠다고 한다. 배신이다. 이 여인은 아이들을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기로 한다. 복수의 다른 수단도 있는데, 왜 아이들을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하냐고? 복수의 극대화를 위해서다. 남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가장 큰 복수이므로. 단순 원한 치정극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에우리피데스를 통해 비극으로 탄생한다. 비극인 이유는 다음에 있다. 곧,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저울질 된다면, 그중 어떤 것이 더 힘있고 강한가에 대한 물음이 작품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가의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동가의 규범들이 부딪힐 때, 예컨대 사랑과 의무가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작품은 던지고 있다.



이렇게 누구나 겪을 법한 모순적 상황, 딜레마의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는 보편적 가치와 규범들 간의 충돌이 이야기 전개(플롯)의 중핵이라는 점에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비극임에 틀림없다. 물론 비극의 전경(前景)은 메데이아와 이아손이라는 특정 인물들의 갈등이지만, 배경에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가치와 자식에 대한 사랑의 가치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으므로. 그러니까 이 힘겨루기가 인물 간의 적당한 타협과 화해를 통해서 해결되는 싸움이 아니라, 규범들의 전쟁이고, 이 전쟁의 끝에서 어떤 가치가 어떤 필연적 강제(Ananke)의 힘을 얻어 승리하는지와 이러한 종류의 싸움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를 한 번 살펴 보자는 점에서 비극인 셈이다.

이런 종류의 고급 싸움을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이다. 이 싸움은 때때로 우리의 삶 안에 투영되어 서로 부딪히며,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하니까. 그래서 싸움이 어디까지 가는지, 그 충돌의 끝점을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이다. 다행히 이런 싸움을 직접 겪는 것이 아니므로, 한 걸음 물러나서 관조(theorein)해봄으로써, 사태를 객관적으로 한 번 통찰해 보자는 것이다.

‘쿨’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그대로 재현해 보고, 그 사태의 배경에 작동하고 있는 가치와 규범들의 줄다리기를 ‘쿨’하게 지켜보자는 것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의 핵심이다. 이렇게 에우리피데스는 관객을 혼연일체의 현장에서 보편의 관객으로 끌고 올라간다. 이에 대해서 에우리피데스를 비극의 살해 하수인이라 보는 니체의 견해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7.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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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갔다가 열람실에만 죽치고 있기에는 허전한 듯하여 대출카드를 다시 만들고 몇 권의 책을 대출했다(3권을 2주간 대여해준다). 그 중 하나가 전집판 니체의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책세상, 2005)이다. 번역본을 구입하지 않은 건 이미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국역본과 영역본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도 '새 번역'으로 또 어떨까 싶어서 대출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새 번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역자가 반론을 제기한 바도 있었다. <비극의 탄생>을 다시 읽어보기 전에 그러한 논란부터 먼저 챙겨둔다. 교수신문에 게재된 박찬국 교수의 번역비평은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 재수록돼 있다.

교수신문(06. 01. 02) 고전번역비평-최고번역본을 찾아서(23)니체의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나이 불과 28세에 쓰인 처녀작으로 청년 니체의 열정과 고뇌를 강렬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니체는 이에 대해 스스로 ‘청년의 용기와 우수(憂愁)가 가득한 책’이라고 평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청년다운 대담함과 재기발랄함으로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염세주의로부터의 탈출구를 그리스의 비극정신에서 찾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극의 탄생’은 당시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고전문헌학적 연구를 넘어서 삶과 세계의 본질과 고통 그리고 그것의 극복방안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탐구이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해 니체는 나중에 일정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니체 자신의 사상 전개 뿐 아니라 철학과 미학을 비롯한 인문학과 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니체의 저작들 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못지않게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듯 국내에서 ‘비극의 탄생’ 번역본만 8종이나 나왔다. 이위범 역(양문사 刊, 1960), 김영철 역(휘문 刊, 1969), 이일철 역(정음사 刊, 1976 외), 김병옥 역(대양서적 刊, 1978 외), 박준택 역(박영사 刊, 1976), 곽복록 역(동서문화사 刊, 1978 외), 김대경 역(청하 刊, 1982), 성동호 역(홍신문화사 刊, 1989), 이진우 역(책세상 刊, 2005)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번역본 전부를 살펴볼 순 없다. 번역자들 중 철학전공자로서 니체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박준택과 이진우를 제외하면 나머지 역자들은 주로 독문학(곽복록, 김대경)이나 심지어 영문학(이일철)을 전공했기에 일단 번역자로서 요구되는 전문성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들 번역의 많은 곳에서 어렵잖게 오역과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이 중 김대경 역은 1982년 이래 1997년까지만 해도 16쇄가 나왔을 정도로 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본이라 생각되기에 여기에선 박준택 역, 이진우 역, 김대경 역만을 살펴보겠다.

고전번역의 완전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원전에의 충실성과 가독성이라고 여겨진다. 이 두 기준에 입각해 우선 박준택 역과 이진우 역을 비교하겠지만, 지면관계상 본문의 첫째 문장 번역만 검토할 것이다. 본문의 첫 문장은 보통 번역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기에 이 문장에 비춰 우리는 번역의 전체적인 수준과 성격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전에서 본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Wir werden viel f?r die ?sthetische Wissenschaft gewonnen haben, wenn wir nicht nur zur logischen Einsicht, sondern zur unmittelbaren Sicherheit der Anschauung gekommen sind, daß die Fortentwicklung der Kunst an die Duplizit?t des Appolinischen und des Dionysischen gebunden ist: in ?hnlicher Weise, wie die Generation von der Zweiheit der Geschlechter, bei fortw?hrender Kampfe und nur periodisch eintretender Vers?hnung, abh?ngt.”

이 문장을 이진우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세대(世代)가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성과 여성의 이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직접적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한 큰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이진우, 29쪽)

이 번역은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제 동일한 문장에 대한 박준택 역을 살펴보자. “만일 우리가 다음에 말하는 것을 머리만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구체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 미학(美學)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많으리라고 믿는다. 즉, 예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생식(生殖)이라는 것이 부단한 싸움 속에서도 단지 주기적으로 화해하는 남녀 양성(男女兩性)에 의존되어 있는 것과 흡사하다.”(박준택, 9쪽)

박준택 역은 일본 암파문고판의 번역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이진우 역에 비해 정확할 뿐 아니라 읽기에도 훨씬 자연스럽다. 이진우 역은 ‘세대가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다음에 쉼표를 찍음으로써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주체가 남성과 여성이 아닌 세대인 것으로 잘못 읽도록 오도하고 있다. 아울러 전체적인 문맥상 ‘세대’라는 번역어보다는 박준택이 택한 ‘생식’이라는 번역어가 더 적합하다고 여겨진다. 이진우 역에서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 부분에서도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이 경우도 사람들은 ‘세대’가 주어인 것처럼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직접적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은 지나친 직역으로 매우 부자연스런 번역이다.

니체 텍스트 본문의 첫 문장에 대한 박준택 역은 큰 문제는 없지만 원문을 굳이 의역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 의역을 했다. 가령 ‘머리만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구체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은 원문에 보다 충실하게 ‘논리적으로 통찰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직관한다면’으로 해도 충분히 자연스럽다. ‘머리만으로써’라는 표현도 보통 쓰이지 않는 어색한 표현이다. 이 문장에 대한 번역 외에도 박준택 역에서는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러운 표현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주로 암파문고판에 대한 중역에 가깝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박준택은 일일이 지적할 순 없지만 여러 곳에서 심각한 오역을 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200쪽에서 박준택은 “…비극은 비극적 신화를 통해서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인물의 모습을 빌어서,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의 탐욕적인 충동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옮겼는데,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의 탐욕적인 충동’ 부분은 오역이며 ‘개체적인 삶에 대한 탐욕스런 충동’으로 번역해야 한다. 심지어 박준택은 암파문고판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정작 암파문고판에서는 오역을 하지 않은 곳들에서도 오역을 범하고 있다.

첫째 문장의 김대경의 다음과 같은 번역은 가장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 이는 마치 생식이라는 것이 부단한 싸움 속에서도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 의존되어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 점을 단지 논리적 통찰로서 뿐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실한 직관에 의해 알게 된다면, 이는 미학을 위하여 큰 소득이 될 것이다.”(37쪽)

전체적으로 볼 때도 세 번역본 중 그나마 김대경 역이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면에서 가장 낫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경 역은 여러 곳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오역을 범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그 예를 둘만 들겠다. 김대경 역 48쪽, 49쪽 등에서 보이는 ‘근원적인 한사람’이란 표현의 원문은 ‘der Ureine’로서 원래는 디오니소스적인 세계의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김대경은 ‘근원적인 한사람’이 아니라 ‘근원적 일자’라고 번역했어야만 한다. 또한 120쪽의 ‘그 자체로서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적인 인간들의 사고방식’이라는 번역은 굳이 원문과 대조하지 않아도 오역이라는 게 분명하다. 이 부분은 ‘인간을 그 자체로 부패하고 타락한 것으로 보는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 외에도 김대경 역에선 ‘탐욕적 충동’(130쪽)이나 ‘설득적으로 밀어닥치는’(130쪽) 등과 같이 일본역본을 글자 그대로 중역한 투의 문장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그리고 138쪽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원문의 몇 줄을 번역하지 않고 있는 곳들이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비극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동안 8종의 역본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번역수준은 상당히 실망스럽다.(박찬국/ 서울대·현상학)

교수신문(06. 02. 01) 이진우 교수 번역, "의미파악 어려워"

‘출판저널’에 이번 2월부터 새롭게 연재되는 강대진 건국대 강사(고전그리스문학)의 번역비판 코너 ‘번역의 허와 실’에서 이진우 계명대 교수의 번역을 ‘문제번역’으로 삼고 나서 전공자들의 오역문제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잔혹한 책읽기’(작은이야기 刊, 2004) 등을 통해 국내 고전번역에서 오역의 심각성을 제기해온 강 씨는 연재의 첫 회로 이진우 교수의 ‘니체저집 3: 유고(1870~1873년),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비극적 사유의 탄생 외’(책세상 刊, 2001)을 검토했다.

강 씨가 이 교수 번역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삼는 것은 ‘독일어 직역’이다. 즉,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 가령, ‘소크라테스와 비극’이라는 니체 강연원고에 나오는 문장을 이진우 역은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가 표현한 것처럼, 위대한 마지막 사자(死者)에 대한 동경을 느꼈습니다.”(33쪽)라고 옮겼다. 그런데 이 문장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희랍비극이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 때문에 소멸했다고 주장하는 내용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서 “시인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비평가인 에우리피데스가 소크라테스의 논리 중심주의를 따라 비극을 재조직한 결과, 원래의 비극은 죽어버리고 신희극만이 남겨졌다”라는 논지라고 강 씨는 덧붙인다. 따라서 “위대한 마지막 사자”는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 최근에 죽은 이”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는 게 강 씨의 지적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들>에서 물 치료법으로 비극예술을 쇠진하게 만들고 또 비극예술의 중압감을 약화시켰다는 공로를 자신에게 돌렸는데”(35쪽)라는 번역도 이해하기 어렵다. 강 씨는 이에 대해 “물 치료법으로 쇠진하게”는 “설사제를 먹여 체중을 줄인 것”이라는 뜻이라고 풀어놓는다. 이 외에도 “우리는 왜 그가 생시에 알량하게도 비극적 승리의 영광만을 얻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38쪽)도 고전문학 전공자가 보기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들이 많다는 것. 

사실 번역자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외국에 실력에 준하는 모국어 실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은 흔히 번역평가의 기준으로 ‘자연스러운 한국어 구사’를 문제 삼는다. 물론 직역의 원칙을 따를 경우 ‘번역어의 자연스러움’을 희생해야 할 경우들이 생기지만, 그런 경우라도 모국어로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라면 번역의 의의는 퇴색할 수박에 없다.

이 교수의 번역이 이러한 문제점을 갖게 된 것은 사실 국내 번역자들의 공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강 씨는 “왜 천병희 교수의 좋은 번역들이 나와 있는데 참고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고전전공자의 번역을 현대독일철학 전공자가 참고하지 않는 것은 학자로서 그리 성실한 태도라 볼 수 없으며, 국내 학자의 번역성과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진우 역 중 “에우리피데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의 입을 빌려 아이스킬로스를 비난합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강 씨는 “개구리의 입을 빌려”라는 부분은 틀린 것으로 천 교수 역을 참조했더라면 오류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낸다.

그 외에도 이 교수의 번역에는 중요한 구절이 누락되거나 중요 단어들이 잘못 표기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가령 복수의 여신인 에리뉘에스를 “에리스”(75쪽), “에레니메스”(110쪽)로, 아이스퀼로스도 “아르킬루스”(29쪽)로 잘못 옮겼다는 지적이다. “에폭푸테스”(137쪽)의 경우도 ‘추종자들’로 고치는 것이 낫다는 게 강 씨의 제안이다. 

사실 이진우 교수는 그동안 끊임없이 번역서를 내놓아 부지런함을 보여왔다. 하지만 최근 교수신문 ‘고전번역비평-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23: 니체의 ‘비극의 탄생’’편(제384호, 2005년 12월 26일자)에서 박찬국 서울대 교수(철학)에 의해 번역상의 오역과 부자연스러움 등이 제기되면서 문제가 된 바 있다. 그의 ‘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책세상 刊, 2005)는 총 18종이나 되는 ‘비극의 탄생’ 번역 중 가장 최근 것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전공자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20여년도 더 앞서 번역된 김대경의 ‘비극의 탄생’(청하 刊, 1982) 이 “원문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라는 평가를 두고 학계에서는 “뜻밖이다”라는 반응들을 보였던 것. 박찬국 교수 역시 이진우 역에 대해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는데, 그만큼 한국어 구사에 문제는 이진우 번역의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

이진우 교수는 올해에도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뿐만 아니라 하버마스의 저서 한권도 번역해 내놓을 예정이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교수의 번역에서 이러저러한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 만큼 다른 전공자들의 번역과 더불어 이 교수의 번역도 전면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같은 게 아닐까?).(이은혜 기자)

교수신문(06. 02. 07) 어느 번역비평 기사에 대한 반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잔혹한 평가는 없을 것이다. 글이든 대화이든 무엇을 말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파악의 어려움은 그 주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글을 읽고 듣는 사람이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비평은 그것이 아무리 생산적이고 호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글을 쓰는 사람에겐 정말 감내하기 힘든 혹평임에 틀림없다.

이 말은 종종 비평자의 권력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진리를 논하는 학계에서도 이 말을 얼마나 자주 듣고 말하는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충돌하는 곳에서 어김없이 들리고, 자신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이론과 담론을 들을 때면 서슴없이 사용하는 말, 그것이 바로 이 간단한 한마디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이 말에는 종종, 설령 제압의 심리학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해의 거부’가 묻어 나온다.

최근 내 자신이 이런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 시발점은 <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에 대한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비평이었다. 그는 첫 문장의 번역이 번역문 전체의 수준과 성격을 가늠케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비극의 탄생>의 첫 문장을 박준택 역 그리고 김대경 역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간단히 평가한다. “이 번역은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첫 문장에 대한 나의 번역문이 다른 두 번역보다 명료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번역과정에서 다른 번역본을 참조하였던 내가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 번역할 때마다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의역을 해야 할까. 아니면 원전에 충실하게 직역을 해야 할까. 이 문장은 8행이나 되는 긴 가설법 문장이다.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통찰에... 이른 상태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한 큰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자는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는 직설법의 번역문장을 선호한다. 나는 니체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경우에는 원문에 충실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원전에 충실하고 동시에 자연스럽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비판은 이중적이다. 생산적이고 동시에 파괴적이다. 첫 문장에 대한 박찬국 교수의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부당하게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부분을 전체로 일반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정말 나의 번역 전체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번역문을 원전에 대한 충실설과 가독성의 두 가지 척도로 평가한다. 원전에 충실하다보면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김대경 역이 몇몇 오역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 면에서 가장 낫다”고 판단함으로써 나의 번역이 마치 원전에도 충실하지 않은 것처럼 교묘하게 말하고 있다. 오역과 원전에 충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지적해야 마땅할 것이다.

전체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만든다면, 그것은 왜곡의 폭력이다. 교수신문은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비평문에 “이진우 譯 의미파악 어려워”라는 표제어를 붙였다. 이렇게 뒤틀린 왜곡은 출판저널 2월호에 게재된 번역비평에 관한 기사에서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강대진의 “니체전집 완간의 기쁨과 몇 가지 아쉬움”이라는 글은 번역비평이 어떠해야하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글쓰기이다. 그는 그리스 비극에 관한 니체의 글을 올바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고전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한다. 맞는 말이다. 그는 몇몇 군데 잘못 표기된 인명을 예리하게 집어낼 뿐만 아니라 그가 “더 좋은 번역, 더 나은 책 꾸밈새를 위해” 제안하고 있는 지적들은 실제로 주석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니체가 다루고 인용하는 그리스 고전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의 글과 사상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번역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당시에 고전 문헌학자들을 경악시켰던 그의 글들을 문헌학의 기준에 맞춰 번역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예를 들어 그는 “durch Wasserkur abgemergelt”를 “물 치료법으로 쇠진하게 만들고” 대신에 “설사제를 먹여 체중을 줄이고”로 풀이한다.

이와 관련된 아리스토파네스 <개구리>의 구절은 이렇다. “‘흰 무우’로 그것의 체중부터 줄이고 나서, 책에서 짜낸 잡담의 액즙을 주었지요.” 이 희극의 전체맥락을 알지 못한다면, 이 문장 자체의 뜻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흰 무우”가 당시 설사제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뜻이 명확한 “Wasserkur”를 “흰 무우” 또는 “설사제”로 번역해야 할까. 당시의 문헌학자들이 평한 것처럼 몽상적이고, 과장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한 그의 문체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무튼, 번역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손질할” 수 있도록 지적해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교수신문은 이 비평에 대한 기사에서 비평자의 선의를 악의로 왜곡시킨다. 교수신문은 여기서 비평의 전체적 맥락을 무시한 채 나의 번역을 “문제번역”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매우 선정적인 표제어을 사용한다. “이진우 교수 번역,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분명한 말로 교수신문이 두 번씩이나 한 인격을 짓밟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비평에는 호의적 비평도 있고 악의적 비평도 있다. 이들의 비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직역의 문제점을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번역을 하면 할수록 번역이 어려워진다. 원문이 어려워도 번역은 쉬워야 되는가. 원문이 만연체라도 번역은 간결체여야 하는가. 난해한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쉬운 야스퍼스로 만들고, 하버마스를 호르크하이머로 만들어야 하는가. 니체가 말한 것처럼 번역에는 뜻도 중요하지만 리듬, 호흡, 문체도 중요한 것인가. 간단히 말해, 번역은 반역인가? 교수신문의 기사가 아무리 부당하고 잔혹할지라도 이런 문제점을 일깨워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이진우/ 계명대 철학과)

07. 04. 09.

Рождение трагедии/Die Geburt der Tragodie

P.S. 러시아에서는 최근 들어서 13권짜리 니체 전집이 새로 출간되는 등 '니체붐'이 일고 있다(실제 상황은 모르겠지만 옆에서 보기에 그렇다).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본 니체는 과거에 나온 2권짜리 전집과 함께 <비극의 탄생>(2001) 대역본 등인데, 이 대역본은 (당연한 말이지만) 독어-러시아어 텍스트가 나란히 배열돼 있다. 상세한 주석을 포함하고 있어서 분량이 736쪽이나 된다. 한국어로도 이만한 수준의 책을 읽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 전에 전공자들도 찬탄할 만한 멋진 번역서가 먼저 출간되면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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