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종말'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읽은 가장 유익한 책은 러셀 자코비의 <이데올로기의 종말: 무관심 시대의 정치와 문화>(모색, 2000)이다. 저자는 미국 UCLA의 역사학 교수인데, 주로 지성사 분야의 책을 내고 있으며 국내에는 <이데올로기의 종말> 외에 <사회적 건망증>(원탑문화사, 1992)이 소개돼 있다(저자가 '럿셀 제이코비'로 표기돼 있다. 'Russell Jacoby'이므로 본토에서는 '제이코비'라고 부를 듯도 하지만 일단 처음 소개된 대로 여기서는 '자코비'라고 부르겠다).

 

 

 

 

'자코비'는 최근에 들춰본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탑, 1996) 4장에서도 미국 지성사를 다룬 <마지막 지식인들(The Last Intellectuals)>이 자세하고 언급되고 있어서 다시금 상기하게 된 이름이다(국역본은 <최후의 지성인들>이라고 옮겼다). 알라딘에서는 검색도 되지 않는 책 <나르시시즘의 문화>(문학과지성사, 1989)의 저자 크리스토퍼 래쉬(라쉬)(1932-1994)가 왠지 자코비와 나란히 연상되었는데, 찾아보니 서로 긴밀한 교류를 나눈 사이이기도 하다(래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코비가 추모기사를 쓰기도 했다). 래쉬의 저작으론 <엘리트의 반란과 민주주의의 배반>(중앙M&B, 1999), <여성과 일상생활>(문학과지성사, 2004)이 더 번역돼 있다. 하지만 대표작인 <나르시시즘의 문화>가 절판된 건 유감스럽다. 1970년대 미국문화를 분석하고 있는 책이지만 요즘 우리의 모습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자코비로 돌아오면, 그의 최신작은 <미완성 그림: 반-유토피아 시대를 위한 유토피아 사상>(2005/2007)이며 며칠전에 <마지막 지식인들>과 같이 입수했다. 두 권의 책표지는 이렇다.  

 

모두가 번역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좀 성의껏 소개되었으면 싶다는 것. <유토피아의 종말>의 경우에도 유명한 전문번역가가 나섰지만 어떤 사정에서인지 결과는 상당히 실망스럽다. 처음 읽을 때는 따로 원서를 구할 수가 없어서 대조해보지 못하다가, 최근에 도서관에서 원서를 대출해 묵은 궁금증을 풀어본 결과이다(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정운영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기증도서다. 장서가로 알려진 그의 책들이 도서관에 기증된 덕분에 접해보게 된 책이 개인적으로는 벌써 여러 권 된다. 감사한 일이다). 일단 색인도 빠졌거니와 40쪽에 이르는 미주들을 모두 날려버린 것은 역자나 출판사나 독자에게 별로 배려할 의사가 없음을 말해준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을 독자 말이다. 책의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1955년 1월, 레이몽 아롱과 아더 슐레진저를 비롯해서 수백 명의 저술가와 학자가 밀라노의 국립 과학기술 박물관에 모여들었다. '자유의 미래'라는 주제를 토론하기 위한 국제학술대회였다."(11쪽) 원문은 "In September 1955, several hundred writers and scholars from Raymond Aron to Arthur Schlesinger, Jr., assembled in Milan's National Meseum of Science and Technology to discuss 'the future of freedom.'"

오역의 여지가 별로 없는 서두이지만 번역문은 'September'를 '1월'로 잘못 옮겼다. 물론 실수인데, 첫문장에서의 이런 실수가 암시해주는 것은 번역문이 제대로 교정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암시는 암시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걸 자세하게 말하는 것은 상당한 분량을 요하는 일이기에 이 페이퍼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제목대로 여기서는 '레이몽 아롱'을 떠올리게 된 계기만을 늘어놓을 참이다. 그렇다고 그 계기란 게 거창하게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인용한 문장이니까. 참고로, 아롱과 같이 언급된 '아서 슐레진저 2세'의 책으론 <미국 역사의 순환>(을유문화사, 1993)이 번역돼 있다(분량이 578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이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슐레진저는 "냉전시대 미국의 자유주의 철학을 정립한 역사학자"로 평가되는 사람이다.  

사회학자 아롱이나 역사학자 슐레진저나 거물급 학자들이면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반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이 1955년 밀라노에 모였을 때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이어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데탕트를 선언한 이후였다. 미국과 서유럽은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스탈린식 사회주의와 마르크시즘은 퇴조하고 있었다. 때문에 학술회의장은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장' 같았다고 하며, 한 참석자는 "공산주의가 서구와의 이념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확신에 들뜬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이것이 말하자면 첫번째 '이데올로기의 종말'의 풍경이었다(1장의 제목은 '이데올로기의 종말의 종말의 종말'이며 아직 두번의 반전을 더 남겨놓게 된다).    

 

동갑내기이자 고등사범학교의 동창으로서 사르트르와 함께 전후 프랑스 지성계를 양분했던, 그리고 프랑스 지식인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우파였던 레이몽 아롱(1905-1983)의 화제작 <지식인의 아편>이 발표되는 것이 바로 1955년이다(영역본은 1957년에 나왔다). 내가 갑자기 궁금해진 것은 그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서가 왜 시중에서 눈에 띄지 않을까, 라는 점(뉴라이트들도 아롱까지는 못 챙기는 것일까?). 찾아보니 국내에는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왔었다. <지식인의 아편>(중앙문화사, 1961; 삼육출판사, 1986)은 안병욱 번역이고,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지식인의 아편>(미문출판사, 1983)이라고 만하임의 책과 같이 묶인 건 정하룡 번역이다. 나는 뒤늦은 관심 때문에 여기저기 검색해보다가 <지식인의 아편>을 교보에서 주문했다(삼육출판사본이 아직 남아 있는 걸로 떠 있어서). 지금은 모두 품절이지만 사실 아롱의 책은 <사회사상의 흐름>을 비롯해서 여러 권이 소개된 바 있다. 그 몇 권의 표지 이미지들을 나열하면 이렇다.   

다시 <지식인의 아편>에 대한 자코비의 설명: "마르크시즘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레이몽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은 미국 의회의 무기가 되었다. 밀라노 회의를 주도한 사람으로서, 아롱은 그 책에서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을 선언했다. 이데올로기는 혁명과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혁명과 유토피아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또한 선진 자본주의를 대체할 다른 방안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더 이상 나올 수 없었다."(13쪽) 이 인용문의 첫문장은 역자의 '작문'인데, 원문은 이렇다. "Raymond Aron's The Opium of the Intellectuals, his criticism of Marxism, appeared just before the Party Congress."

<지식인의 아편>이란 책이 '전당대회(Party Congress)' 직전에 나왔다는 말이 어떻게 '미국 의회의 무기가 되었다'는 뜻이 되는지? 게다가 그 '전당대회'는 1956년 2월 소련의 제20차 전당대회를 가리키는 것인데 말이다. 스탈린을 비판하는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이 행해진 바로 그 전당대회다. 아무튼 <지식인의 아편>은 그러한 맥락에 놓여 있는 책이며 나는 지성사와 '유토피아의 종말'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조만간 읽어볼 참이다.

참고로, 같이 읽을 만한 책은, 자코비도 이어서 다루고 있는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1960)이다. 재작년에 <탈산업사회의 도래>(1973)가 뒤늦게 번역되어 화제가 되었지만 국내에도 3-4종의 번역이 나올 만큼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이었다. 물론 이제는 모두 '역사'가 되었다...  

08. 08. 21.

P.S. 자세히 적을 여유가 없어서 간단히 언급하면, 자코비의 한 가지 지적은 1989년 동구권 공산주의 붕괴 이후의 정세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의 정세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때 똑같이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이 대두하는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주장은 (본인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애쓰지만) 다니엘 벨의 주장과 "한치의 차이도 없는 결론"에 이른다. 벨은 1960년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단언했지만 그가 예기치 않게도 1960년대의 시대정신은 곧 급진주의쪽으로 흘러가며 신좌파(뉴레프트)가 장악하게 된다(그것이 1968년 혁명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의 종말의 종말'이다. '역사의 종말'을 구가하던 1990년대가 지나고 우리가 2001년 9.11과 함께 봉착하게 된 것은 '역사의 종말의 종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유토피아의 종말의 종말'이다. 여기에 어떤 '순환'이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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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8-2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전에 봤던 이효인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문화사>에서 한국 영화에 반영되는 쾌락과 나르시시즘에 대한 평가가 래쉬의 저 책에서 나온거였다는 기억이 납니다...기억이라서..^^

로쟈 2008-08-22 10:30   좋아요 0 | URL
저자가 '이효인'입니다.^^

드팀전 2008-08-22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맞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3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사상의 흐름>에 파레토도 나오는군요.경제원론에 나오는 학자는 사회사상이나 정치사상에 잘 안 나오는데 이 양반은 아니더군요.그렇다면 사회사상의 흐름을 사야겠군요.헌책방에 있는 걸 봤거든요.

로쟈 2008-08-23 20:56   좋아요 0 | URL
파레토는 코저의 <사회사상사>에도 나오지 않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3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더 슐레진저 2세의 책 중에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게 케네디 정부 때 보좌관 시절을 회고한 <1000일>.우리나라에선 한림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원본 일부를 뺐다는 데도 엄청나게 두툼해서 읽을 맛이 나죠.드골을 굉장히 비난했던 내용이 기억납니다.그때 독자노선 걸으면서 미국 속을 확 뒤집어 놓던 때라서요.

로쟈 2008-08-23 21:01   좋아요 0 | URL
원서 이미지를 봤는데, 국역됐군요. 대학 도서관들에는 없는 책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3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경제원론에도 나오고 정치,사회사상사에도 나오는 유일한 사상가라는 의미로 쓴 거예요.저는 휴즈<의식과 사회>에서 파레토를 읽었을 때 이 사람이 파레토 최적이론을 만든 그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그 사람 같아서 아...그렇구나...했죠.이데올로기 론에도 나오구요.
코저 책에도 나오는군요.경제사상사에는 파레토가 안 나오는 책이 없는데 사회사상사에는 안 나오는 책이 있어요.역시 경제학 쪽에서 더 많이 취급하는 인물인 듯 합니다.
 

'오역의 현실과 번역의 길'(http://blog.aladin.co.kr/mramor/2246155)에 덧붙였던 글인데, 분량이 길어져서 따로 제목을 붙인다. <권력과 지성인>(창, 1996)과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의 몇몇 오역에 대한 코멘트이다.



먼저, <권력과 지성인>의 오역 한 대목만 지적한다(제목의 '지성인'도 '지식인'이라고 옮겨져야 한다). 영국 BBC의 리스(Reith) 강좌(1993년)를 책으로 묶은 것인데, 내가 관심을 갖는 대목은 4장 '전문직업인과 아마추어'이다('전문가와 아마추어'라고 옮기고 싶다). 책에 대한 요약은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 2003)의 1부 3장을 참조.

 

 

 

 

사이드는 서두에서 국내에도 많이 소개돼 있는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 레지(스) 드브레(번역본은 '레기 드브레이 Regis Debray'라고 옮겼다)의 <교사, 작가, 명사: 프랑스의 지식인들>(1979)의 내용을 따라가는데, 드브레에 따르면 20세기 프랑스 지성사는 지식인들의 주 활동무대를 기준으로 몇 단계로 나뉜다. 1880-1930년까지는 소르본느대학이 활동거점이었고 대부분의 지식인이 대학교수였다. 그리고 1930년 이후 대략 1960년까지는 '신프랑스평론' 같은 출판사/잡지가 활동의 주무대가 된다. 이에 대한 서술이다.



"대락 1960년까지 사르트르, 드 보바르, 까뮈, 모리악, 지드, 말로와 같은 저술가들은 제한 없는 영역에 걸치는 저술활동, 자유에 대한 신조, 그리고 1960년대 이전에 있었던 성직자적 엄숙성이라는 것과, 그러한 것과 대조적인 1960년대 이후에 등장한 요란스러운 광고의 중간쯤 성격을 지닌 그들의 담론으로 인해 사실상 교수직을 박탈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118-9쪽)

사르트르 등의 저술가들이 "사실상 교수직을 박탈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원문은 이렇다: "Until roughly 1960, such writers as Sartre, de Beauvoir  ... were in effect the intelligentsia who had superseded the professorate because of ..." 즉 대학 바깥의 지식인이었던 이들이 1930년까지 대세를 이루던 교수들, 곧 강단 지식인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걸 번역본처럼 엉뚱하게 옮겨놓으면 "잘못된 번역서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 엉터리로 아느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번역서'란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특히나 저작료까지 지불한 번역서일 경우엔 오히려 수용에 '걸림돌'이 된다(오늘도 조금 보다가 한숨을 내쉰 지젝의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같은 경우가 유감스럽게도 드물지 않다). 사이드의 지식인론을 집약하고 있는, 때문에 분량에 비해서 상당히 유익한 <지식인의 표상>이 제대로 다시 번역되기를 바란다...



말이 나온 김에, 사이드가 생각하는 인문학과 인문주의에 대한 성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에서도 몇몇 오역들은 교정되면 좋겠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본문 첫 페이지의 이런 대목: "세 번째로는, 비서구 문화권에서 성장한 경계인이자, 사이문화인bicultural인 제가 보통의 토박이 미국인이나 '서구인'으로 불리는 이들에 비해 관점이나 전통 같은 것에 특히 민감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17쪽) 원문은 "Thirdly, I grew up in a non-Western culture, and, as someone who is amphibious or bicultural, I am especially aware, I think, of perspectives and traditions other than those commonly thought of as uniquely American or 'Western'."

이 책 역시 미국의 문화와 인문주의 등을 주제로 한 2000년과 2003년의 연중 강연들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인문주의의 영역'을 테마로 한 첫 강연문에서 사이드는 자신이 '미국의 인문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를 몇 가지 든다. 인용문은 그 세번째 이유인데, '에드워드 사이드'란 특이한 이름이 암시해주듯이('에드워드'는 영국의 황태자 '에드워드'를 딴 것이고 그의 아랍인 성이 '사이드'이다) 그가 영국 지배하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아랍인(팔레스타인인)이면서 예루살렘과 카이로(이집트)의 영어 학교를 다니고 미국대학에서 영문학 교수가 된 자신의 성장배경이 그것이다. 자신이 '경계인'이고 '바이컬추럴'('2개 국어 사용자'를 뜻하는 '바이링구얼'을 떠올려보라)이기 때문에 미국이나 서구 외에 다른 전통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

번역문은 "'those commonly thought of as uniquely American or 'Western'" 다음에 'perspectives and traditions'가 생략돼 있다는 걸 놓침으로써 '독특하게 미국적이거나 서구적이라고 간주되는 관점이나 전통"을 "보통의 토박이 미국인이나 '서구인'으로 불리는 이들에 비해"라고 오역했다. 사이드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관점이나 전통 이외의(other than) 관점이나 전통에 대해서도 자신이 특별히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예컨대, 그는 '아랍문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미국인'이다!). 때문에 그의 관심은 "미국 인문주의의 유럽적 선조들 그리고 서구의 시야 '바깥'으로 여겨지는 것이나 그 바깥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오역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이 신뢰를 잠식한다(사실 사이드를 번역하는 일은 어렵다. 그의 문장들은 나도 별로 즐기는 편이 못된다). 또 다른 사례로 동료교수이자 비평가 라이오넬 트릴링(1905-1975)에 대한 언급('리오넬 트릴링 Lionel Trilling'이라고 옮긴 것에서 역자가 '초면'이란 걸 알 수 있다). 저명한 문학비평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트릴링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거의 없다. 찾아보니 아주 옛날에 <문학과 사회>(을유문화사, 1960)가 번역된 정도('라이오넬 트리링'으로 표기됐고, 역자는 양병탁). <자유로운 상상력(The Liberal Imagination)>의 번역이다(두산백과사전을 따른 제목인데, '진보적 상상력'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제 말년의 동료인 리오넬 트릴링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컬럼비아의 인문학 수업은 학생들에게 독해의 상식적 기초를 제공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으며, 후에 학생들이 읽은 책들을 잊어버린다 하더라도(많은 학생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적어도 같은 책을 잊어버리는 셈 아니겠냐고 말입니다."(20쪽)

여기서 "제 말년의 동료 리오넬 트릴링"은 "my late colleague Lionel Trilling"을 옮긴 것인데, 'late'는 '고(故)'란 뜻이다. 나라면, "제 동료였던 고(故) 트릴링 선생님"이라고 옮기고 싶다. 그리고 '상식적 기초'라고 옮긴 건 '공통의 기초(common basis)'를 잘못 옮긴 것이다. 트릴링이 말하기를, 대학의 인문학 강좌가 학생들에게 공통의 독서목록을 제시하므로 나중에 학생들이 읽은 책을 다 잊어먹더라도 '똑같은 책'을 잊어먹은 것이 아니겠는가?(이게 교양교육의 의의다!).

"이 말이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사회과학이나 과학 분야의 기술적인 글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읽지 말자는 주장에 반하는 말이었으므로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었습니다."(20쪽) 원문은 "This did not strike me as an overpowering argument, but, as opposed to not reading anything except technical literature in the social sciences and sciences, it was compelling nevertheless."(4쪽)

이 대목에서 'overpowering'을 그냥 '인상적' 정도로 옮긴 것은 인상적이지 않다. '반대주장을 압도할 만한'이란 뜻이다. 어떤 반대주장인가? 인문학 무용론 내지는 교양교육 무용론이겠다. 중간의 삽입구를 제거하면, 이 문장은 This did not strike me as an overpowering argument, but it was compelling nevertheless."로 요약된다. 트릴링의 주장은 overpowering 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compelling 하기는 했다는 것. 번역문에는 이런 대구가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다시 옮기면, "그것은 제가 보기에 인문학을 옹호하는 압도할 만한 주장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전문서만 읽으면 된다는 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런 주장을 내세웠던 트릴링은 어떤 인문주의를 실천했나? "그들 가운데 몇몇 -특히 트릴링- 은 자주 자유주의적 인문주의에 비판적이었으며, 때로는 불온하게, 물론 세간의 이목이나 그들의 학계 동료와 학생들의 의견이 그랬었다는 것이지만, 전문용어나 과도한 전문가주의 없이 인문주의적 삶이 닿을 수 있는 가장 풍요롭고 가장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21쪽) 원문은 "Some of them -Trilling in particular- frequently spoke critically about liberal humanism, sometimes even disquietingly, although in the public eye and in the opinion of their academic colleagues and students, they represented the humanistic life, without jargon or undue professionalism, at its richest and most intense."

컬럼비아대학출판부 주최의 강좌였던 만큼 컬럼비아대학의 인문학 전통에 대한 '자화자찬'이 좀 들어간 대목인데, 트릴링을 필두로 컬럼비아'학파'의 경향을 지목하고 있다. 말의 좋은 의미에서 '보수적'이고 '고지식했다'고 이해된다. '자유주의적 인문주의(liberal humanism)'는 자유분방하면서 관용적인 인문주의겠다. 가령 청바지를 입고 인문학을 강의한다든가, 교양 독서목록에 최신 문학작품을 집어넣는다든가 하는. 트릴링 등은 그런 태도에 대해서 자주 비판적이었다는 것. 그런 보수적 태도와 '불온하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disquietingly'는 내가 읽기엔 '걱정스러울 정도로'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disquietingly'는 앞에 나오는 'spoke'에 걸린다(로카드님이 지적해주셨다). 

다시 옮기면, "특히 트릴링 선생님을 비롯하여 몇 분은 자주, 심지어 걱정스러울 정도로 자유주의적 인문주의에 대해 비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또 대학 동료나 학생들이 생각하기에는 전문용어 들먹이기나 같잖은 전문가주의와는 거리가 먼, 가장 풍요로우면서도 가장 강렬한 인문주의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흠, 이젠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인문주의적 삶'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드문 것 아닌가 싶다(전문용어나 들먹이면서 같잖은 전문가 행세를 하는 이들은 드물지 않지만)... 

08. 0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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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8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8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ose가 perspectives and traditions를 받는 대명사고 그 뒤의 thought는 분사인가요?

로쟈 2008-08-18 23:23   좋아요 0 | URL
네, 명사라면 복수형이 와야겠죠...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써야 할 글도 많은데 아직도 컨디션은 찌푸린 날씨를 닮았다. 게다가 책들은 또 왜 이리 더디 읽히는지. 투정삼아 어젯밤에 잠시 읽다 만 한 대목을 다시 들춰본다. 리처드 파이프스의 <소유와 자유>(나남, 2008)를 원서와 함께 읽는데, 서문의 끄트머리에서 파이프스는 야콥(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세계 역사의 관찰>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자신이 러시아사 전공자이고 근대유럽사에 관한 교재도 집필한 적이 있지만 이 책은 훨씬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기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런저런 사실이나 해석에 대해 비난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다(물론 홉스봄처럼 '세계사'를 다루는 역사가들도 있긴 하다!). 그런 비난에 대한 자기변호로 파이프스는 역시나 '아마추어 역사가'란 혹평을 듣기도 했던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인데, '딜레탕티슴'에 대해서 '자콥 부르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취미로 하는 그림은 예술계에서 크게 무시당하고 있다. 예술은 완벽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평생을 바치는 대가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학문의 경우 한정된 분야만을 숙달하더라도 이른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 개요를 정리하고 이를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을 없애고 싶지 않다면 가능한 한 많은 분야를 어쨌든 개인적으로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전문지식을 강화하고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익힐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전공 이외의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 될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대체적으로 야만인에 불과하다.(<소유와 자유>, 14쪽)

 

 

 

 

'딜레탕티슴'이란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취미 삼아 하는 태도나 경향"을 가리킨다. 그런 딜레탕티슴이 예술분야에서는 보통 무시당하는 편이지만 적어도 역사학에서만큼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자신의 전문지식을 강화하고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프스는 이 대목을 부르크하르트의 독일어 원서에서 직접 번역하여 옮겨놓고 있는데, 그의 번역은 이렇다.

[Dilettantism] owes its bad reputation to the arts, where, of course, one is either nothing or a master who devotes his entire life to them, because the arts demand perfection. In learning, by contrast, one can attain mastery only of a limited field, namely as a specialist, and this mastery one should attain. But if one does not wish to forfeit the ability to form a general overview - indeed, to have respect for such an overview - then one should be a dilettante in as many fields as possible - at any rate, privately - in order to enhance one's own knowledge and enrichment of diverse historical viewpoints. Otherwise one remains an ignoramus in all that lies beyond one's specialty, and, under the circumstances, on the whole, a barbarous fellow.

<소유와 자유>에서는 'Dilettantism'을 역자가 '취미로 하는 그림'이라고 제한적 의미만 번역하는 바람에, 그리고 내가 강조한 대목에서는 '딜레탕트'란 말을 따로 옮기지 않는 바람에 '전문가'와 '딜레탕트'간의 대조가 희석됐다. 그래서 더 낫게 번역돼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부르크하르트의 책을 찾았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지난달에 나온 <세계 역사의 관찰>(휴머니스트, 2008)과 예전에 나온 <세계사적 성찰>(신서원, 2001), 그리고 같은 책의 영역본 <역사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history)>(1943/1979)이다. 인용문과 같은 대목을 두 국역본과 영역본은 각각 이렇게 옮겨놓았다.

딜레탕티슴이란 말은 예술 분야에서 평판이 나빠진 말이다. 예술분야에서는 대가(大家)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고, 당연히 한 분야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학문에서는 제한된 분야의 대가가 될 수도 있다. 곧 전문가가 되는 것인데, 그것도 어느 영역이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면, 수많은 다른 자리에서는 딜레탕트가 되고 만다. 자신의 인식을 늘리고 관점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어쨌든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전문영역을 넘어서 있는 다른 모든 것에는 무지한 사람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조잡한 견습공 신세가 되고 만다."(<세계 역사의 관찰>, 51쪽)

'아마추어'란 말은 사람들이 대가(大家)나 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되어야만 하는, 또는 자신의 생을 온통 바쳐야만 하는 예술 때문에 평판이 나빠졌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학문에 있어서는 그와 반대로 한 개인은 어떤 한 제한된 영역에서만 대가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전문가로서 말이다. 그는 어디에서인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일반적인 개관을 할 능력을, 혹은 이러한 개관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면, 그는 가능한 많은 다른 점에서 적어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식과 관심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마추어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 이외에 있는 모든 것에 있어서는 하나의 무식꾼으로 남게 될 것이며 아마도 야민인과 같은 사람으로 남게 될 것이다.(<세계사적 성찰>, 35-36쪽)

The word "amateur" owes its evil reputation to the arts. An artist must be a master ot nothing, and must dedicate his life to his art, for the arts, of their very naturem demand perfection. In learnng, on the other hand, a man can only be a master in one particular field, namely, as a specialist, and in some field he should be a specialist. But if he is not to foefeit his capacity for taking a genaral view, or even his respect for general views, he should be an amateur at as many points as possible, privately at any rate, for the increase of his owm knowledge and the enrichment of his possible standpoints. Ohterwise he will reman ignorant in any field lying outside his owm specialty and perhaps, as a man, a barbarian.(53-54쪽)

부르크하르트의 요지는 딜레탕트가 별로 좋은 평을 얻지 못하는 예술분야와는 달리 학문, 특히 역사학에서는 딜레탕티슴이 불가피하며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학문에서는 먼저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요즘 '박사'는 말로만 '박사'다). 또 그렇다고 해서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용인되어서도 곤란하다. 적어도 일반적인 관점, 전체적인 조망능력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   

다른 대목들은 차치하고, 이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도 두 국역본의 번역은 과녁에서 동떨어져 있다. 먼저, <세계 역사의 관찰>에서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면, 수많은 다른 자리에서는 딜레탕트가 되고 만다"는 딜레탕트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부여함으로써 부르크하르트의 취지에서 멀찍이 벗어난다(아예 정반대로 옮긴 것이 된다). 우리가 딜레탕트가 되어야 하는 것은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다.

"적어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식과 관심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마추어가 되어야만 한다"고 해서 절반은 맞게 옮겼지만 <세계사적 성찰>의 경우도 "만일 그가 일반적인 개관을 할 능력을, 혹은 이러한 개관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면"이라고 전제하여 나머지 절반은 잘못 옮겼다(앞부분에서 예술에서의 딜레탕티슴이 갖는 평판에 관한 부분도 상당히 어색한 번역이다). 독일어 구문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모르겠지만 전문번역자와 역사철학 전공자가 똑같이 실수를 범한 것은 의외다.

<소유와 자유>의 역자는 '경제/금융 전문기자'로 소개돼 있다. 다시 말해 역사쪽으로는 '딜레탕트'다. 그리고 그가 옮긴 것도 영역된 부르크하르트의 문장이므로 '중역'이다. 그런데, 적어도 이 인용문단의 경우에는 독어 원전을 번역한 두 '전문가'의 번역보다 원뜻에 그나마 가장 가깝다. 이건 좀 아이러니한 일 아닐까? 딜레탕트(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라 하더라도 주의하지 않는다면 '조잡한 견습공'과 '야만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08.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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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G의 생각
    from vizualizer's me2DAY 2008-07-19 12:42 
    도스토예프스키 비판에 관하여 - 로쟈의 저공비행
  2. 딜레탕티즘
    from Surplus Text : Front Edge 2008-07-20 00:32 
    딜레탕티즘 :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취미 삼아 하는 태도나 경향 - 집에 있는 책들을 얼마 전에 죄다 정리했다. 정리하는 데 꽤 힘이 들었는데, 가지고 있는 책들을 주제별로 분류하기에는 책꽂이의 칸 구분이 모자란 반면 책꽂이의 칸 넓이는 항상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이것 저것 잡스럽게 책을 읽지만, 막상 그 잡스러운 것을 탄탄하게 읽지는 않았다. 나름 대학에 들어와서 전공을 정한 지도 벌써 두 해가 다 되어 가는데, 전공에..
  3. 인문교양과 딜레탕트적 독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6 00:20 
    주간한국의 '당신은 딜레탕트입니까'란 커버기사에서 독서문학 꼭지를 옮겨놓는다. 인문교양서 독자층의 관심을 엿보게 한다('로쟈'와 '비평고원' 같은 이름도 거명되고 있다). 리처드 세넷이 말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의 양상을 딜레탕트적 독서와 연관하여 다뤄보려고 했으나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서 일단은 기사만 스크랩해놓는다. 참고할 만한 내용은 먼댓글로 걸어둔다.     주간한국(09. 03. 11) [딜레탕트] 독서·문
  4. 역사는 국가, 종교, 문화의 상호작용이다.
    from 창조를 위한 검은 잉크의 망치 2010-11-30 21:10 
    헤겔은 역사 자체를 사유하면서 인류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의 법칙과 원리를 내세웠다. 즉 인간의 이성이 자기실현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며 이 법칙이 지향하는 바는 절대정신이 현실적으로 외화된 ‘자유(국가)’였다. 이러한 헤겔의 이론에 따르면 세계역사도 당연히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헤겔의 논리는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며 과거를 줄 세워 현재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를 관통하는
 
 
노이에자이트 2008-07-1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사철하는 이들도 경제학을 알아야 하고 경제학하는 이들도 문사철을 알아야 하는데 칸막이 현상이 이 두 분야는 심각하죠?

로쟈 2008-07-20 12:01   좋아요 0 | URL
경제사 같은 것도 있으니까 서로 무관할 수는 없지요. 칸막이야 전공분야 안에서도 다 쳐져 있는 걸요 뭐...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시고 난 다음에 서평 좀 올려주세요.

로쟈 2008-07-21 10:22   좋아요 0 | URL
현재로선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습니다.^^;

개츠비 2008-07-2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어설픈 딜레탕티즘에게 위로를 해주는 글이군요.

로쟈 2008-07-21 10:22   좋아요 0 | URL
딜레탕티슴은 필요하기도 하고 불가피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전문가주의가 요즘 같아선 '지배 이데올로기'죠...

jotiple 2008-08-0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의아한 일이네요. 독일어 원문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아니고, 부르크하르트의 논지도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데 말입니다. 인용하신 부분을 제가 가진 독어판에서 번역해보겠습니다.

"딜레탕티즘이라는 말은 예술분야로부터 악명을 얻게 되었다. 물론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예술분야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대가이거나 둘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뿐이고, 삶을 통째로 작품에 쏟아 부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이제 학문분야에서 우리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대가가, 다시 말해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학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조망을 할 줄 아는 능력과 이러한 조망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영역이라 하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영역에서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지식을 늘려가고, 풍부한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문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무식한 자로, 때로는 아주 조야한 인간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딜레탕티즘 자체를 옹호하는 말은 아닙니다. 딜레탕티즘의 불가피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딜레탕트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으므로, 살아가면서 여러 분야에 실로 깊이 파고드는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부르크하르트는 딜레탕트를 단죄하는 것도, 딜레탕트와 전문가의 경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요. 인간의 지식과 사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학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갖고 깊이 파고들되, 다른 분야에서도 전문가 수준은 못되더라도 폭넓은 지식과 식견을 쌓아가야 한다는,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평범한 진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위의 인용문에서는 이런 딜레탕트 수준의 식견으로는 책을 쓴다거나 전문가행세를 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일정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번역이 저렇게 되었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네요.

로쟈 2008-08-08 16:41   좋아요 0 | URL
네, 덕분에 쉽게 이해됩니다. 제가 여기저기 검색하다 보니까 부르크하르트에 대해 '아마추어적'이라는 비판도 있더라구요. 전문영역을 넘어서 너무 광범위하게 다룬다는 비판 같은데, '딜레탕트'와 '전문가'의 구별기준이 무엇인지는 계속 의문으로 남습니다(최근에도 '광우병 전문가' 논란이 있었지요). 학문이란 게 점점 전문화돼 가니까요...

jotiple 2008-08-08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부르크하르트는 그런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정확한 사료연구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강조한 랑케의 역사학을 거부하고 직관과 영감을 강조하면서, 랑케쪽의 입장에서 보면 다분히 주관적인 역사서술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양쪽 다 문제가 있었다고 해야 하겠지요.

딜레탕트라는 주제는 18세기 이래 숱하게 거론되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어원상 '즐거움' 때문에 어떤 활동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재미가 아니라 밥벌이를 위해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딜레탕트의 반대말은 '직업인' 정도가 되겠지요. 예술이든 학문이든 그것을 밥벌이로 하는 사람은 딜레탕트가 아니라 직업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구별하기는 쉬운데 반대말을 '전문가'로 놓고 보면 문제가 좀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딜레탕트, 그러니까 '재미'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얼마든지 전문적인 수준의 식견에 도달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때에는 딜레탕트의 뜻도 달라지는데,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되면서 폄하하는 말로 쓰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딜레탕트들이 많은 사회는 '무식한 사람'이 많은 사회보다는 훨씬 낫다고 해야 하겠지요. 각 분야에 딜레탕트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일반적인 교양수준이 높다는 이야기일테니까요. 또 딜레탕트의 존재는 전문가의 활동의 근거와 토양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전문가와 딜레탕트를 대립시키는 이런 구도에서는 과연 양자의 차이가 뭐냐, 하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일반적으로는 양자의 구별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상에 대한 세밀하고 정확한 분석과 논지를 펼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분간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문가행세를 하면서도 전문적 식견을 갖추지 못한 사람, 딜레탕트를 자처하면서도 전문적 식견을 갖춘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인정해야 하겠지요.
정말 광우병과 관련하여 '전문가'니 '과학'이니 하는 말들이 심하게 오용되고 악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문가라면 반드시 인정해야 할 논의의 전제들을 인정하지 않는 '전문가'들, '과학'의 기준이 과학자들이 아니라 특정 기관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한심스럽더군요.

그나저나 우리 번역본들이 많이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로자님의 지적대로 아직 문제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어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되도록 번역본을 피하고, 번역본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원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번역본의 문제점을 파고드는 '직업인'이란 전혀 없고, 번역의 질에 대한 일종의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고… 이런 상황이니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로자님 같은 분들이 거의 유일한 희망이네요...

반딧불이 2010-11-3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의 내용을 참고삼아 읽었습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대중유토피아의 꿈'(http://blog.aladin.co.kr/mramor/2160004)에 이어지는 페이퍼로서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학교출판부, 2008)의 한 문단을 읽는 것이 목적이다. 따로 자리를 마련한 것은 국역본의 번역이 어이없어서이다(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인문 번역서는 그토록 드문 것인지?). 최근의 '촛불문화제'와도 관련되는 내용이어서 교정해놓는다. 번역본의 22쪽, 원서로는 6-7쪽이다.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폭력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폭력성이 아니라 정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거부한다면,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 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민주적인 주권은 인민에 대해 정당한 구체화로 독점하는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 그것은 인민의 비정체성을 사실상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의 개념에 대한 의지로 민중 주권과 국가 폭력 사이의 모순을 풀기 위한 시도는 불합리한 순환논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효과는 전적으로 합법적/비합법적 구별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알아먹기 힘들다(특히 강조 표시한 대목). 자신이 이해한 것을 번역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단어들만을 (그것도 문법에 맞지 않게 엉터리로) 직역해놓을 경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잘게 쪼개서 원문과 대조해가며 읽어보기로 한다.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폭력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폭력성이 아니라 정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The class nature of the state may explain its violence, but not its legitimacy; the democratic nature of the state may explain its legitimacy but not its violence.)

오역할 만한 대목이 없는 문장인데, 대구법으로 이루어진 원문을 번역본은 굳이 비틀었다. 다시 옮기면,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국가의 폭력성을 설명해주지만 그 정통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 반면에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국가의 정통성은 설명해주지만 그 폭력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정통성'이라고 옮긴 'legitimacy'는 보통 '정통성' '합법성' '정당성' 등의 뜻을 갖는다.) 

이어서 두번째 문장: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거부한다면,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 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If one rejects the Marxist critique and attempts to redeem the viloent state through liberal-democratic theory, appealing to the legality of popular sovereignty, one faces the problem that, in the case of the use of violence by popular sovereignty against a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 it becomes questionable whether the law that the sovereign is upholding is itself legitimate.)

일단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거부한다면"에서 '시도'는 "If one rejects the Marxist critique and attempts to redeem the viloent state..."에서의 동사 'attempts'를 명사로 잘못 읽은 것이고, '거부한다면'이란 동사가 받는 건 '맑스주의적 비판'(the Marxist critique)까지만이다. 다시 옮기면, "만약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거부하고 국민지배의 합법성에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국가 폭력을 구제(해명)하고자 시도한다면"쯤이 된다.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란 국가를 계급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이 경우 '국민의 지배'는 '부르주아의 지배'에 대한 허울이 된다). 그럴 경우 지배계급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가의 폭력은 자연스레 이해된다. 이미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국가의 폭력성을 설명해주지만 그 정통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해놓지 않았나. 문제는 그 국가의 폭력성을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해명하고자 하는 경우이다. 자유-민주주의 이론이란 국가를 국민지배의 구현체로 보는 관점이다('국민지배'란 '국민의, 국민에 의한 지배'를 가리킨다).   

그럴 경우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가?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people'은 '민중' '인민'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국민'이라고 옮기겠다(국역본에서는 '민중'과 '인민'이 두서없이 혼용되고 있다). '국민'이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보통은 기피되지만, 일상적인 용어로 가장 친숙하기 때문이다.  

역자는 "one faces the problem that, in the case of the use of violence by popular sovereignty against a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에서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을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라고 옮겼는데, 'demonstration'을 '민주주의'로 옮기는 것은 '시위성' 번역이다. 이 대목만 다시 옮기면, "국민주권에 의한 국가폭력을 국민의지의 대중적 표현(시위)에 대항하여 사용할 경우에" 정도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it becomes questionable whether the law that the sovereign is upholding is itself legitimate", 곧 "그 주권이 지탱하고 있는 법 자체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시된다."

전체를 다시 옮기면, "만약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거부하고 국민 지배의 합법성에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국가 폭력을 구제(해명)하고자 시도한다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국민주권에 의한 국가 폭력을 국민의지의 대중적 표현(시위)에 대항하여 사용할 경우에 그 주권이 지탱하고 있는 법의 정당성 자체가 의문시된다는 점이다." 요컨대, '국민주권'(국가폭력)을 '국민의 의지'에 대항하여 사용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헌법에 명기된 대로, 국민주권이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말이다.

가령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다수 국민의 뜻이었다(실제적으로는 1/3의 대표성만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런 의미에서 현 정부는 '국민주권'의 대행자이다.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 등 현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다수 국민의 의사 역시 '국민의지'이며 촛불시위는 그 '대중적 표현'이다. 때문에 경찰(국민주권)이 시위대(국민의지)를 향해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로 진압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이론에 따를 때 '국민주권'과 '국민의지'가 충돌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민주적인 주권은 인민에 대해 정당한 구체화로 독점하는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 그것은 인민의 비정체성을 사실상 증명하는 것이다."(When democratic sovereignty confronts the people with all the violence that it monopolizes as the legitimate embodiment of  the people, it is in fact attesting to its nonidentity with the people.) 

내가 제일 어이없다고 생각한 대목이다(결국 이런 페이퍼까지 쓰게 만든!). 역자는 "When democratic sovereignty confronts the people with all the violence"를 "민주적인 주권은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라는 식으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 with가 이끄는 전치사구는 people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인 confronts에 걸리는 것이다(confront A with B). 즉, '모든 폭력'은 인민/국민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그들이 '폭도'란 말인가?) '민주적인 주권'을 자임하는 국가가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수단들인가? 가령 극우논객 조갑제가 '청와대에 숨어 있는' 이명박에게 충고한 바에 따르면, "법, 경찰, 검찰, 국정원, 기무사, 국군 등 대통령이 가진 법질서 수호 수단은 엄청나다." 'all the violence'란 시민들이 들고 있는 피켓과 물병이 아니라 경찰이 갖고 있는 방패와 물대포이며 주권의 대행자로서 대통령이 갖고 있는 '법질서 수호 수단'들이다.  

그리고 'of  the people'은 '인민에 대해'란 뜻이 아니라  'the legitimate embodiment of the people' 전체에 걸리는 것이다. '국민의, 국민에 위한, 국민을 위한'이라고 할 때의 그 '국민의'이다. '국민의사의 합법적 구현' 정도로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에 'nonidentity with the people'를 '인민의 비정체성'으로 옮긴 것도 나는 '국민과의 비동일성'이란 뜻이라고 본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민주적 주권이 국민의사의 합법적 구현으로서 독점하고 있는 모든 폭력을 동원하여 국민과 맞선다면, 그것은 사실상 주권과 국민과의 '비동일성'을 증명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마지막 두 문장이다. "그래서 법의 개념에 대한 의지로 민중 주권과 국가 폭력 사이의 모순을 풀기 위한 시도는 불합리한 순환논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효과는 전적으로 합법적/비합법적 구별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Thus the attempt to resolve the contradiction of the popular sovereignty and state violence by recourse to the conception of the law becomes caught in a vicious circle. And the effect of this circularity is to undermine the very possibility of the legal/illegal distinction.)

'불합리한 순환논법'이라고 옮긴 'vicious circle'은 그냥 '악순환'이라고 옮기는 것으로 충분해보인다. 다시 옮기면, "그래서 법 개념에 의지하여 국민주권과 국가폭력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악순환은 결과적으로 합법과 불법 사이의 구별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undermine'은 '침식하다'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의문을 제기한다' 정도로 의역한다.) 말하자면, 공권력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고 있지 않다면 그 정당성/합법성 자체를 의문시하게 된다는 것.

이 대목의 미주에서 수잔 벅 모스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여기서의 논의는 1988-1989년 파리에서 자크 데리다가 주최한 세미나에 빚을 지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이번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비록 발터 벤야민과 칼 슈미트의 텍스트에 대한 그의 독해가 나의 견해와 달랐지만, 나는 그의 의견에 도움을 받았다."(324-5쪽) 벤야민과 슈미트에 대한 데리다의 의견은 그의 책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덧붙여 ''벤야민의 이름'을 읽기 위하여'(http://blog.aladin.co.kr/mramor/810363) 등의 페이퍼를 참조할 수 있다...

08. 06. 28.

P.S. 유감스럽게도 29일 새벽 촛불문화제가 열린 이후 경찰의 최대 ‘강경진압’이 펼쳐졌다 한다.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현 정부와 국민의지 사이의 모순과 비동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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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008-06-29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ith 하나로 시민과 폭도가 한 순간 갈리는군요. 살짝 무서워지려고 합니다. ^^;

로쟈 2008-06-29 10:30   좋아요 0 | URL
네, 무섭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합니다.--;

누런마음황구 2008-06-29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

로쟈 2008-06-29 10:36   좋아요 0 | URL
서재에도 촛불 하나 켜놓았을 뿐입니다.^^;

김상호 2008-06-29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는 로쟈님의 오역 비판이군요!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 왔읍니다!

로쟈 2008-06-29 22:25   좋아요 0 | URL
'벌이'도 아닌데다가 별로 '좋은 일'도 아니어서 자주 다루지는 못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2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법성과 정당성은 다른 개념인데요...합법성은 legality이고 정당성은 legitimacy입니다.예를 들어서 악법을 만들어 인민을 법테두리 안에서 억압하면 합법성은 있지만 정당성은 없게 되지요.이런 짓은 법을 자기 뜻대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 부당한 목적을 달성할 때 쓰는 수법입니다.
identity를 동일성이라고 옮기신 것은 정확합니다.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라는 개념이 있으니까요.합법성,정당성,동일성은 독일어로도 거의 똑같은 철자네요.
로자 님 덕분에 칼 슈미트에 대한 책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로쟈 2008-07-02 00:49   좋아요 0 | URL
그게 엄밀하게 구별해서 쓸 수는 있지만, 사전적 정의상으로는 legitimacy도 '합법성' '적법성'이란 뜻을 갖습니다. 법률용어로는 구분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노이에자이트 2008-07-02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여기선 정치학이나 법학용어로 해석해야겠습니다.칼 슈미트에겐 <합법성과 정당성>이라는 저서가 있습니다.수잔 벅모스도 슈미트를 언급했고 기타 주요용어들로 보았을 때 여기선 그 둘을 구분하는 게 좋겠습니다.

로쟈 2008-07-02 01:25   좋아요 0 | URL
본문 중에 the legitimate 같은 경우는 '합법적'이라고 옮겼는데, '정당한'으로 옮겨야 한다고 보시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래야겠습니다.로자 님이 언급한 페이퍼를 보니 의회주의를 비판한 벤야민에게 슈미트가 공감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로 슈미트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의회의 다수결 원리에 의한 합법성은 동일성이 결여된 것이다.결코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물론 슈미트의 이 논리는 바이마르 의회주의로는 안되니 인민주권의 구현인 지도자(히틀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되지요.

로쟈 2008-07-02 23:26   좋아요 0 | URL
그런데, 해당 문장에서는 주어가 '민주적 주권'이고 이걸 합법적 선거의 의해서 획득된 주권으로 볼 경우에, '국민의사의 정당한 구현'이라고 옮기는 건 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명박 정부가 합법적인 '민주적 주권'이지만, 최근에 사태에서 정당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것처럼요. 제가 이해하는 합법성/정당성은 법/정의와 비슷한데, 좀 다른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법성,정당성의 구분에 대한 이해는 저와 로자 님이 같습니다.사실은 그 문장은 문맥으로 볼때 <합법적인>이라고 해석하는 게 더 낫습니다.물론 저자의 입장을 존중한다면 정당한...으로 해석해야겠지만 저자가 legal로 썼다면 깨끗이 해결되었을텐데...하는 생각도 듭니다.저자가 단어선택에 실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그 위 문장의 leitimate는 논란의 여지없이 <정당한>인데 말이죠.

로쟈 2008-07-03 23:23   좋아요 0 | URL
저는 단어 자체로 엄밀하게 구분된다기보다는 문맥에 따르는 듯싶습니다. droit가 권리와 법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6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117762)에서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출판부, 2008)을 언급한 바 있다. 독서 계획을 계속 미뤄둘 수만은 없어서 손에 들었는데, 책은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물론 책에 실린 이미지들만 훑어보아도 공부가 되긴 한다). 찾아보니 부산일보에만 리뷰기사가 실린 듯하데, 참고삼아 미리 읽어보는 게 좋겠다(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517/060020080517.1016090128.html).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국역본의 표지는 제목과 달리 너무 밋밋하다.

부산일보(08. 05. 17)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책 머리에 쥘 미슐레의 금언이 새겨져 있다. "모든 시대는 다음 시대를 꿈꾼다." 책을 다 훑고 나면 이 금언이 다시 떠오른다. 꿈은 으레 희망의 다른 표현일테다. '꿈의 세계와 파국'(수잔 벅-모스/윤일성·김주영 옮김/경성대출판부/3만원)은 냉전 이후를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한 대중 통찰서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의 승리'로 쉽게 단정짓고 싶어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한다. "20세기에 대한 평가는 승자의 손에 남겨져서는 안된다는 경고에 주목하라.(16쪽 '서문' 중에서)"

그 이유가 이렇다. "대중을 회유하는 '꿈의 세계'에 의해 초래된 위험들이 아니라, 지구적 권력의 현재 시스템에서 대중을 회유할 필요가 있다는 이념조차 유행에 뒤쳐진 것으로 던져버리는 사실에 의해 야기되는 '새로운' 위험들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320쪽 '삶의 시간, 역사적 시간' 중에서)"



책은 제목처럼 꿈을 다룬다. 하지만 일상의 꿈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집단이 환각적으로 빠져든 공상에 대한 논의다. 물론 대중은 정치적 성향이 결여된 과거의 군중(mob)과 구분된다. 새로운 세상을 거침없이 지향하는 '강력한(?)' 집단이다. 그리고 그 대중의 꿈과 함께 20세기가 시작됐다고 책은 전제한다. 그 꿈의 실현이 대중 유토피아다.

하지만 정치 지형에 따라 선택된 도구는 달랐다. 대중 유토피아의 실천 도구로써 동구는 사회주의를, 서구는 자본주의를 채택했다. 100년의 실험(냉전)이 이뤄졌고, 그 실험이 끝날 무렵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실패,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성급히 결정했다.



그렇다면 '승자'로 분류된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 유토피아를 실현시켰을까. 책은 이에대해 자본주의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몇 개의 단어를 불쑥 들이댄다. '세계 전쟁… 대량 테러… 노동 착취…등…'. 누가 이런 단어에서 유토피아를 떠올릴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도 결국 예정된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반증일테다.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제2세계(사회주의)에서 실패한 것으로 선언됐고, 제1세계(자본주의)에서도 의도적으로 포기됐다.(321쪽)"

책은 이 같은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굳어진 모스크바와 뉴욕을 부지런히 오가며 교차 분석한다. 그런 분석 틀의 상당수가 이미지다. 저자는 "그림과 사진, 영화 포스트 등이 20세기를 통찰하는 도구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사물이 실제로 어떠했는가보다 그 사물들이 과거와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이 같은 이미지 분석을 통해 소비에트 모더니즘이 서구 모더니즘과 꾸준히 연결돼 있었다는 '예견된' 사실을 증명한다. 소련 중앙노동연구소의 핵심 연구 주제가 자본주의 상징이자 노동을 철저히 기계화한 미국 테일러 작업방식이었다(138쪽)는 것. 할리우드의 상징인 '영화 킹콩' 포스트와 거대한 레닌 동상이 올려진 모스크바 소비에트 궁전 설계안이 경악스러울만큼 닮았다(213쪽)는 것.

이쯤되면 그의 주장을 거부할 명분 찾기가 꽤 힘들어 진다. 저자는 결국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는 자본주의를 너무 충실히 모방했기 때문(16쪽 '서문' 중에서)"이라고 결론내린다. 사회주의를 망친 것은 사회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한 주체들의 자본주의화된 계산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책은 사회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을, 자본주의에 대한 '최대한의' 경계를 전제로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하나! 우리의 미래는? 20세기 내내 견지해온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이제 포기해야 하나? "우리는 기존의 집단 정체성 대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322쪽)" 꿈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저자는 20세기 유럽 지성을 대표하는 발터 벤야민(마르크스 문학평론가 겸 철학자) 연구자로 최근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여성학자다. 지난 2004년에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2004년/문학동네)가 국내 소개된 바 있다.(백현충 기자)

08. 06. 28.

P.S. 책이 더디게 읽히는 건 부자연스러운데다가 약간씩 핀트가 안 맞는 번역 때문이다. 가령 1장의 첫문장은 이렇다. "20세기 말이라는 전망에서 제기되는 하나의 역설은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대중의 이름으로 통치하기를 요구하는 - 즉, 급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 정치체제는 대중의 통치를 넘어서는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지대를 합법적으로 구성하는데, 그곳에서 공중의 응시와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20쪽)

이것은 다음 문장을 옮긴 것이다.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paradox seems irrefutable that political regimes claiming to rule in the name of the masses - claiming, that is, to be radically democratic - construct, legimately,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veiled from public scrutiny, arbitrary and absolute."(2쪽)

요점을 간추리면, 대중에 의한 지배를 명분으로 내건 급진 민주주의적 정치제체가 정작 대중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낳았다는 것이고, 돌이켜보건대 이 점이 20세기의 역설이라는 것이다. 한데,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veiled from public scrutiny, arbitrary and absolute."라는 문장 뒷부분에서 국역본은 'arbitrary and absolute'라는 보어가 모두 'veiled from'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보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공중의 응시와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는 어색한 번역이 나오게 된 것('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원문에서 찾을 수 없다). 'veiled from public scrutiny'는 삽입구이므로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arbitrary and absolute." 라고 보는 게 편하겠다. 무소불위의 권력지대에서의 권력 행사는 대중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의적이고 절대적이었다는 것. 이 '권럭지대'를 저자는 'wild zone of power'라고 부른다(국역본은 '권력의 야만지역'이라고 옮겼다). 

저자는 그러한 경향이 자유민주주의에서건 사회주의에서건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최고 주권의 권력 체제로서 그것들은 반드시 민주주의보다 벌써 훨씬 더 -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당히 나쁘게 된다." 이 또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원문은 "Either way, as regimes of supreme, sovereign power, they are always, already more than a democracy - and consequently a good deal less."(3쪽)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어느 쪽이건 간에, 최고 주권의 권력체제로서 두 체제는 모두 이미, 언제나 민주주의를 뛰어넘었고, 결과적으론 민주주의에 훨씬 못 미쳤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둘다 민주주의 그 이상이었고 동시에 그 이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과 소련의 '대중유토피아'를 비교해서 다루고 있는 만큼 러시아의 철학자들의 이름도 책에도 곧잘 등장하여 반갑다. '마마르다쉬빌리'(국역본은 '마마다쉬빌리'라고 표기했다)나 '발레리 포도로가' 같은 이름들이 그렇다. 그리스계 프랑스철학자 '카스토리아디스'의 이름도 오랜만에 볼 수 있는데, 책에는 '카스토리아스(Castoriades)'라고 오기돼 있다(23쪽). 찾아보니 벅 모스의 원서 자체에 그렇게 잘못 표기돼 있다. 카스토리아디스의 주저인 <사회의 상상적 제도1>(문예출판사, 1994)는 국내에 일부만 번역된 적이 있는데, 마저 다 번역될 수는 없는 것일까, 문득 유감스럽다. 아래는 러시아어본이다.

Корнелиус Касториадис Воображаемое установление общества L'institution imaginaire de la soci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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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0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bitrary snd absolute가 문법책에 나오는 유사보어(다른 용어도 있는 것 같은데)여서 권력행사에 연결되고 veiled from public scrutiny는 분사구문 삽입으로 보면 되겠죠?

로쟈 2008-07-02 00:11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영어공부를 옹골차게 하게 됩니다.

로쟈 2008-07-02 23:27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