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울력, 2016)을 읽다가 존 듀이의 '창조적 민주주의'란 연설문을 알게 되었다. 그가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행한 연설로 전체 제목은 '창조적 민주주의 - 우리 앞에 놓인 과제'(1939)다. 국내에 번역본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다만 서용선의 <혁신교육 존 듀이에게 묻다>(살림터, 2012)에 이 연설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악의 남용>에서 인용된 부분은 연설의 말미다.

 

"민주주의는, 다른 삶의 방식과 비교해볼 때, 경험의 과정을 목적인 동시에 수단으로서 성심성의껏 믿는(...) 그리고 사람의 감정, 욕구, 소망을 해방시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삶의 방식은, 경험들이 확장되고 풍부해지면서 계속 안정을 이루게 하는, 접촉, 교환, 의사소통, 상호작용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 해방과 풍요로움의 과제는 매일매일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경험이란 것은 그 자체로 종말에 이를 때까지는 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과제는 모두가 공유하고 모두가 이바지하는 보다 자유롭고 보다 인간적인 경험을 창조하는 영원한 과제이다."(45-46쪽)

요컨대 '매일매일의 경험으로서의 민주주의''영원한 과제로서의 민주주의'가 듀이가 생각한 민주주의의 최종적인 모습이다. 물론 우리가 갖고 있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는 좀 다른 의미의 민주주의다. 번스타인의 해설은 이렇다.

"듀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단지 제도나 공식적인 투표 절차 또는 권리에 대한 법률적 보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에 생명과 의미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민주주의적 협동이 실천되는 문화가 요구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도와 절차는 실속 없고 무의미해질 위험에 놓이게 된다. 민주주의는 '삶의 방식'이자, 적극적이고 부단한 관심을 요구하는 윤리적 이상이다. 만일 우리가 민주주의를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민주주의가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45쪽)

<악의 남용>이 듀이의 민주주의론을 핵심으로 다룬 책은 아니다. '9/11 이후의 정치와 종교의 부패'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9/11과 그 이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저자의 관심사다. 이 문제를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멘탈리티의 충돌'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그 멘탈리티의 한쪽에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실용주의적 가류주의'(pragmatic fallibilism)가 있다. 실용주의적 가류주의란 대략 미국의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와 일치하는 철학이자 태도이며, 이를 설명하면서 다른 실용주의 사상가들과 함께 듀이도 검토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 철학자 듀이는 국내에서 주로 교육철학자로서 참조되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는 <민주주의와 교육>이 핵심 저작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읽히는 성싶지 않다. 그런데 듀이는 교육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공공철학자로서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마이클 샌델이 보여주듯이 공공철학이야말로 미국철학다운 특징이며 강점이다. 찾아보면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책세상, 2011), <공공성과 그 문제들>(한국문화사, 2014),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주체 문제>(CIR, 2010) 등 읽을 거리가 없지 않다.

 

듀이의 민주주의론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진작에 '기업 멘탈리티'를 민주주의 가장 큰 적으로 지목한 때문이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에의 최대 위협은 내부적인 것, 즉 공중들이 강력한 특정 이익 단체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경우라고 느꼈다. 그는 '공중의 소멸', 즉 공개적인 의사소통과 토론 및 심의 하에서 정보를 숙지한 공중의 소멸을 염려하였다. 듀이는 우리 시대에 전 세계적 차원에서 채택된 멘탈리티인 '기업 멘탈리티'의 성장과 전파로 인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44쪽)

 

 

이후 듀이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그 여정은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으로의 여정이다(<민주주의의 불만>은 공공철학자 샌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샌델은 20세 후반 미국사를 '절차적 공화정'(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절치적 민주주의' 내지 '형식적 민주주의')에 의해 미국 민주주의가 점차 거세되어온 과정으로 묘사한다. 그 결과 얻게 된 것은 '형식상의 민주정+내용상 과두정'이다. 이건 미국만의 현실이 아니다. 서민 표몰이를 한 뒤에 부자 감세를 하는 게 한국 민주주의의 현단계니까. 그 결과가 미국 중산층의 붕괴이고 유사 이래 가장 크게 벌어진 게 빈부 격차다. 물론 '헬조선'을 만들어낸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현실이 바뀔 수 있을까.

 

 

듀이식 대안을 다시 적자면 관건은 '창조적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제껏 없었다면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국 대선후보 예비선거가 진행되면서 그 과정과 결과가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민주당 후부로 버니 샌더스와 힐러리 클린턴의 승부가 주목거리인데, 듀이가 옹호한 미국 민주주의가 아직 살아있는지 가늠해보는 중요한 지표가 될 듯싶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올봄의 총선과 2017년 대선은 한국 민주주의의 맨얼굴을 확인하게 해줄 중요한 일정이다. 그것이 당장의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하지만 변화를 위한 첫걸음은 내딛게 해줄 것이다. '매일매일의 경험'과 '영원한 과제'를 향한 첫걸음... 

 

16. 02. 09.

 

 

P.S. 실용주의적 가류주의를 설명하면서 저자 리처드 번스타인이 가장 많이 참고하고 있는 책은 루이스 메넌드의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이다. "미국 실용주의의 역사를 탐구하고 미국 역사의 맥락 안에서 이 운동의 위상을 조망"한 책. 메넌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네 명의 실용주의 사상가는 윌리엄 제임스와 찰스 퍼스, 존 듀이 외 연방 대법관을 지닌 올리버 웬델 홈즈 2세다. 프래그머티즘의 3인방으로 널리 알려진 세 명의 철학자와 같이 놓인 홈즈만이 생소한데, 국내엔 <보통법>(알토란, 2012)이 번역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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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제 말고는 위장약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나이 탓인지 스트레스 탓인지 두 주째 약을 먹고 있다. 그 사이에 속이 타들어간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도 알게 됐으니 소득이 없진 않다. 이런 것도 '오후 4시'의 풍경에 속할까. 인생을 하루로 잡았을 때의 오후 4시. 저녁은 아니지만, 햇볕 좋던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린 바로 그맘때. '옥상화가' 김미경의 <서촌 오후 4시>(마음한책, 2015)의 느낌도 그러하다. <언니의 독설>의 저자가 아닌 <브루클린 오후 2시>(마음산책, 2010)의 저자다(공저로는 <왓더북?!>도 있다).

 

 

첫번째 책과 두번째 책 사이에 두 가지 이동이 있었다. 공간적으로는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서울 서촌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오후 2시에서 오후 4시로. 덧붙여 저자의 나이는 쉰 살에서 쉰 다섯으로. 그러한 변화를 저자 자신이 의식하고 있다. 새책의 머리말이 '브루클린 오후 2시, 서촌 오후 4시'란 제목을 갖고 있으니까. 아직 좋았던 시절에 대한 느낌을 <브루클린 오후 2시>에서는 이렇게 적는다.

하루로 친다면 내 인생은 막 오후 2시쯤에 온 게 아닐까 싶다. 하루 중 '가장 뜨겁고 화려한' 오후 2시. 겉으로는 초라하지만 속으로는 가장 뜨겁고 풍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브루클린 오후 2시>다.

그렇게 뜨겁고 화려한 시간이지만, 오후 2시는 이제 해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2년 뒤 저자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시 3년 뒤에는 옥상에서 서촌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5년 전에는 '1억년 후 나는 화가다'라고 호기롭게 예언했지만 턱없이 빗나갔다. 그 사이에 1억년이 흐른 게 아니므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책은 그 일에 대한 기록이고 보고다.

 

이 책은 도대체 그 화학작용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왜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우리 나이로 쉰여섯 살인 내가 왜 회사를 뛰쳐나와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어진 것인지, 길거리에서, 옥상에서 그림 그리며 나는 어떤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 내가 그리는 서촌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어떻게 한 발짝 한 발짝 화가가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변화를 기록하고 있어서인지 서촌의 풍경을 정물화처럼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이내믹하다. 오후 4시의 리듬, 혹은 오후 4시의 율동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으니 1억년 뒤에도 화가가 될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지만, 위장의 오후 4시를 맞이하여,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슬쩍 해본다. 속쓰림을 달래려면 생활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에 따르더라도 이대로는 안 되겠기에. 익숙한 것과의 결별? 하루에 몇 잔씩 마시던 아메리카노와 결별한 지도 이주째로군. 오후 4시는 담담하게 허전하다...

 

15.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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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일제를 하면 이런 느낌일까,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재택근무로 넘어가기 전에 간단한 페이퍼를 하나 적는다. 제목에 적은 대로 글쓰기와 꼬리치기에 대해서. 이런 제목을 떠올리게 해준 몇 권의 책에 대해서.

 

 

글쓰기 책은 꾸준히 출간되고 있고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미디어, 2014) 같은 베스트셀러가 나오기도 한다. 이번주에 나온 책은 '우리말 지킴이'를 자임하는 이수열의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현암사, 2014).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말 바로 쓰기>(현암사, 1999)의 개정판이다. 15년이면 개정판이 나옴직하고, 또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20여 년간 교열 강의를 진행해온 저자의 생각과 '노하우'를 집약하고 있음직하다(이런 문장은 바로 쓴 문장인가?).

<우리말 바로 쓰기> 15년 만의 개정증보판. 국어 교과서에서부터 대한민국 헌법 조항, 매일 뉴스를 전달해주는 TV, 라디오, 신문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용례를 통해 우리말 바로 쓰는 법을 쉽게 실습할 수 있게 돕는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잘못된 발음, 엉뚱한 단어 선택, 어법에 어긋나는 서술, 영어·일어투가 섞인 졸문이었던 말과 글이 어느새 아름다운 우리말·글로 탈바꿈할 것이다.

어지간한 독자라면 다들 알테지만 글쓰기의 지침서로서 이오덕 선생의 책들과 함께 참고할 만하다. 물론 내 입장은 저자보다는 졸문에 관용적이어서, 지침서를 매번 들춰보면서 활용한다기 보다는 한번 읽어보고 문장을 수정하는 데 간간이 참고하는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는 쪽이다. 그런 점에서는 고종석의 글쓰기관에 좀더 가깝다고 할까(언어는 기본적으로 '감염된 언어'라는 보는 언어관).

 

 

안 그래도 고종석의 글쓰기 강의를 묶은 <고종석의 문장2>(알마, 2014)가 나왔다. 봄에 나온 1권에 뒤이은 것으로 이런 페이스라면, 내년 봄에는 3권이 더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문장'이란 원리상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 이수열판 교열과 고종석판 교열, 두 종을 참고하다 보면 각자의 문장이 한결 고급스러워지는 걸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글쓰기는 그렇다 치고 왜 '꼬리치기'인가. 그건 이번주 화제의 도서라고 할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2014) 때문이다. 발군의 평론가가 쓴 영화 칼럼집이어서 손길을 끌지만, 동시에, 그리고 예기치 않게도 저자의 공개적인 '프러포즈'와 '청첩'을 담고 있어서도 눈길을 끈다. 서문의 마지막 대목에서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곧 내 아내가 될 신샛별은 이 책이 다룬 거의 모든 영화를 함께 보았고 최상의 토론 상대자가 되어주었으니 사실상 공동 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하나를 나는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썼다.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

 

 

 

마지막 두 문장은 세 가지 생각의 꼬투리를 마련해주는데, 간단히 적자면, 먼저 언어의 기능에 대해. 프러포즈용 언어라면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말한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 가운데 아마도 '사역적 기능'에 해당할 듯싶다. 수신자에게 뭔가를 지시하거나 행동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으니까. 즉, 구애를 받아달라는. 서로의 관계를 확인하고 계속 유지하려는 목적의 '친교적 기능'이 동물행동학에서 말하는 '몸손질'과 연결된다면, 구애적 성격의 사역적 기능은 '꼬리치기'와 짝지어질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인간은 언어로 몸손질도 하고 꼬리치기도 한다. 이건 뭔가를 지시하는 언어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용도의 언어다.

 

그리고 책의 제목에도 들어간 '정확한 사랑'이란 말 혹은 '정확히 사랑하는 일'. 장승리 시인의 시구절("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에서 가져왔다는 이 말을, 혹은 태도를 저자는 생에도 적용하고자 한다(시적인 삶!).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자에게도 친숙한 라캉주의 정신분석에 따르면 언어는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라지 결코 정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알려진 대로, 라캉에게서 기표는 기의를 계속 미끄러져갈 뿐이다. 둘은 정확하게 만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확한 사랑은 이념이고 지향일까?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주어진?

 

끝으로 피동형 '살아지다'.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란 문장은 한국어 화자에게 이해 불가능한 문장은 아니지만 교열자라면 빨간펜을 들 만한 문장이기도 하다. 국어사전에 '살아지다'란 피동형은 등재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어에서 삶은 사는 것, 혹은 살아가는 것이지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게 정확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시적 자유'를 행사하여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라고 적는다. 

 

살아지는 삶은 내가 능동적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운명에 내맡겨진 삶이다. 그것은 의지의 삶이 아니라 숙명의 삶이다. 필연적이고, 그래서 치명적인 삶. 아마도 흔하게 할 수 있는 말은, 혹은 흔하게 쓰이는 말은 '그녀를 사랑하면서 남은 생을 살아가겠다' 정도이리라. 하지만 거기에 '정확히'가 개입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정확히 사랑하는 일'은 의지의 몫이 아닌 듯하다. 이 문장을 그대로 수용하면, '정확히 사랑하다'는 능동은 '살아질 것이다'는 피동을 필연적으로 부른다. 그것도 단호하게('살아질 것 같다'가 아니라 '살아질 것이다').

 

다시 확인하는 것은 사랑은 의지가 아닌 운명의 몫이라는 것. 사랑에 빠진 사람은 '꺾일 수 있는 의지'보다 '바뀔 수 없는 운명'을 더 선호하는 것일까. 그걸 일반화하자면 꼬리치기 언어는 운명론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나의 운명. 혹은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이성복식 부사를 첨가하자면, 어쩌자고...

 

 

'꼬리치기'란 말이 떠오른 건 스티븐 다얀의 <우리는 꼬리치기 위해 탄생했다>(위즈덤하우스, 2014) 때문. 부제는 '아름다움이 욕망하는 것들'이고 저자는 '시카고 출신의 세계적인 안면 성형외과 전문의'라고 소개된다. 그 정도 정보면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대략 이렇다.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이상적으로 요구하는 미의 요소들을 진화생물학과 신경정신의학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를 통해 남성이 사냥을 하고 여성이 육아를 전담하던 시기에 남녀에게 요구되었던 성 역할이 어떻게 아름다움이라는 요소로 전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의사협회가 공인한 ‘최고의 의사’ 스티븐 다얀 박사는 여성이 안정적으로 자원을 공급받고 남성이 더 많은 자손을 남기기 위해 선택해야 했던 생존 요건들이 미의 기준으로 진화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한다. 책을 통해 인간이 욕망하는 아름다움의 근원에 대해 지적이고도 흥미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미와 짝짓기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란 점에서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의 <연애>(동녘사이언스, 2009)와 같이 읽어볼 만하다. 밀러의 책은 원제가 <메이팅 마인드>이고 그 제목으로 처음 번역됐던 책이다. <메이팅 마인드>(소소, 2004). <메이팅 지능>이란 제목의 책들도 나와 있군. 정리하면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글쓰기(언어)로,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꼬리친다...

 

14.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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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다가 얼마전에 생각나 구입한 책이 기타노 다케시의 <독설의 기술>(씨네21북스, 2010)다.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씨네21북스, 2009),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북스코프, 2009), <죽기 위해 사는 법>(씨네21북스, 2009) 등 2009년에 나온 몇 권의 책과는 안면이 있는데 그 이듬해에 나온 책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작년에는 <다케시의 낙서 입문>(세미콜론, 2012)도 나왔다.

 

 

다케시의 영화는 볼 용의가 있고, 얼마 전에는 근작 <아웃레이지>를 보기도 했기 때문에 선뜻 주문한 책이다(<자토이치>와 <하나비> 등이 인상에 남는 영화다. <아웃레이지>는 야쿠자 영화로 <하나비> 계열에 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독설의 기술>을 내가 <독서의 기술>로 잘못 읽었다는 점. 목차에서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스탕달의 <연애론> 등이 거명되고 있어서 당연히 제목도 <독서의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독설의 기술>이 훨씬 다케시다운 책 제목이지만, 내게 더 유혹적인 건 다케시의 <독서의 기술>이었다. '다케시가 이런 책도!'란 생각으로 주문했으니까.

 

 

결과적으론 책 얘기를 바탕에 깔고 있기에 <독설의 기술>을 <독서의 기술>로 오독한 게 낭패는 아니지 싶다(유사 타이들을 가진 책들 곁에 꽂아두어도 무방하겠다). 설사 <독설의 기술>로 읽었더라도 나는 책을 주문했을 것이다. 또 생각해보면, 부제 '세상에 독하게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곧 '독한 자세'는 '독설'뿐만 아니라 '독서'도 포함하는 것 아닌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다케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진정으로 부유한 나라란 쓰레기 같은 인간들마저 먹여 살리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도움이 안되는 놈들을 얼마나 먹여 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 나라의 실력인 것이다.(42쪽)

이런 게 다케시의 독설이고 실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비트 다케시'의 진면목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다케시가 보여주는 독설의 노하우는 이런 대목에 있다.

인간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벗는 건 아무렇지 않아 해도 입는 건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스트리퍼도 무대에선 절대로 벗은 팬티를 입지 않으니까 말이다. 섹스할 때도, 일을 치르고 나서 팬티를 찾거나 콘돔을 벗기는 게 제일 부끄럽지 않은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먼저 벗길지 말지 망설일 때, 누가 슥 나와서 벗겨준다거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이지 않는 손'이다.(48쪽)

화장실에서 읽으려고 우연히 집어든 다케시의 책에서 한 수 배웠다...

 

 

13.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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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작가이자 에세이스트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이루, 2013)가 출간됐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가 부제. 사실 이런 주제나 제목의 책이 없었던 건 아니고, 어느 정도는 내용을 짐작해볼 수도 있다, 고 나는 생각했다. 추천사를 청탁받고 처음 원고를 읽을 때 일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참신했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적은 추천사가 이렇다.

 

 

걸어 다니는 모든 인류가 책을 읽는 건 아니며 책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지구가 멸망한다면 모든 책과 책에 대한 기억 또한 소멸할 것이다. 책을 읽는 인간에게 ‘왜 책을 읽는가’는 책의 탄생과 소멸 사이를 지탱하는 물음일 따름이다. 샤를 단치는 우리에게 독서의 필요성을 설득하지 않는다. 독서는 다만 ‘죽음과 벌이는 결연한 결투’일 뿐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패배할 테지만, 우리는 결연히 책을 읽어나갈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분류하자면 샤를 단치는 '아주 사적인 독서가'다. 독서를 권유하지도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독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며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할 뿐이다. 물론 독서는 대단히 이기적인 행위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으면서. 그래도 독서를 통해서 우리가 뭔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라고 누군가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쿨하게 이렇게 답할 것이다.

독서를 우리는 거의 변화시키지 못한다. 어쩌면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원래 비열한 인간은 라신을 읽는다 해도 비열한 인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가 교양이 없다면 교양을 두른 비열한 인간으로 바뀔지는 모르겠다. 반대로 선한 사람이 나쁜 책을 읽는다 해서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독서의 나쁜 영향은 그것이 주는 좋은 영향력만큼이나 어리석은 신화에 불과하다.

역설적이지만, <왜 책을 읽는가>는 그래서 읽어볼 만하다. 책을 안 읽던 사람이 이 책을 읽고서 갑작스레 독서가로 변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애서가들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책장을 넘길 것이다. 어떤 애서가인가? 저자가 그랬듯이 어릴 때 "밖에 좀 나가 놀아라!"란 잔소리를 자주 듣던 이들 말이다(방안에서 책만 읽는 아이들이 즐겨 듣는 잔소리). 또 이런 경험은 어떤가.

열두세 살쯤의 일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내게 줄 베른의 책을 선물해준 적이 있다. 그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헤첼 총서 문양이 찍힌 포켓판 책 표지 이미지와 함께 아직도 내 뇌리에 충격으로 박혀 있다. 세상에! 나를 어린애로 여기다니! 아, 어른들이여. 나는 당신들의 음모를 잘 알고 있다! 그건 바로 안전한 독서로 유도하여 우리를 좀 더 유순하게 길들이려는 속셈 아닌가!

거기에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6학년 때 보들레르의 시집을 탐독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학교 선생님께 불려가 일장 설교를 들어야 했다는 얘기다. 나이에 맞지 않는 책을 읽는 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려라고나 할까. 하지만 저자 샤를 단치의 독서 교육론은 이런 것이다. "아이들에게 나이에 맞지 않는 책을 읽히라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독서에 대해 종종 강의하면서 '나이'와 '수준'을 자주 들먹이던 나 자신을 잠시 반성했다. 그래, 진정한 독서는 어쩌면 나이에 맞지 않는 독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에 맞지 않는 독서는 오히려 아이들의 미적 감수성을 일깨울 것"이라니까. 다만 단치가 염두에 두고 있는 책은 무슨 철학 고전류가 아니라 주로 문학작품들이다.

 

여하튼 초등학생이 <안나 카레니나>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는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굳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낼 일은 아닌 것. 나중에 아이가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최소한 자기만의 <왜 책을 읽는가> 한 권쯤은 써제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13. 04. 18.

 

 

 

P.S. 독서 에세이 범주에 속하는 책들은 거의 매주 출간된다. 이번 주에 눈에 띄는 책은 <파이 이야기>의 저자 얀 마텔의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작가정신, 2013). "얀 마텔이 자국 캐나다의 수상 스티븐 하퍼에게 2007년 4월부터 2011년 2월까지 격주로 보낸 편지를 묶은 책이다. 무려 101통이나 되는 이 편지에서 얀 마텔은 일관되게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지도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상기시키면서 때로는 반짝거리는 새 책을, 때로는 누군가의 악필이 남겨진 중고책을 함께 보냈다."

 

국내서로는 시사IN 문정우 기자의 서평집 <나는 읽는다>(시사IN북, 2013)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 윤성근의 <침대 밑의 책>(마카롱, 2013)도 침대 옆에 놓아둘 만하다. 윤성근의 책은 "어쩐지 보고 싶지 않은 것과 마주한 날, 어쩐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 생각난 날, 어쩐지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들려오는 날이면 침대 밑의 책을 펴드는 책 탐닉자의 은밀한 책읽기"를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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