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발견'으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세르주 라투슈의 <탈성장사회>(오래된생각, 2014)를 고른다. 생소한 저자이지만 얼마 전 <낭비사회를 넘어서>(민음사, 2014)가 출간된 데 이어서 <탈성장사회>도 연거푸 출간돼 일약 주목할 만한 저자가 됐다(<탈성장사회>는 영어로도 번역돼 있다. 아니, 확인해보니 <평화로운 탈성장 소론>의 번역이다. 여하튼 같은 문제의식을 담은 책이긴 하다).

 

 

 

<낭비사회를 넘어서>의 부제는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이다. 내용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데, 소개는 이렇다.

세르주 라투슈는 자본주의 소비 사회를 이끄는 필수 요소로 광고, 신용 카드, 계획적 진부화를 제시한다. 이 중 계획적 진부화, 즉 상품의 정해진 수명이야말로 성장 사회를 이끌어 가는 절대적 무기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면서도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계획적 진부화라는 개념을 통해 상품들에 포위된 우리의 일상이 식민화되고, 공간과 시간이 변형 왜곡되고, 급기야 인간성마저 진부한 것이 되어 버리는 과정을 추적한다.

한편 <탈성장사회>의 문제의식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부제는 '소비사회로부터의 탈출'로 돼 있다. 그게 프랑스어 원제라고. 어떤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가.

 

소비사회가 추구하는 만인의 행복이라는 목표는 지속적인 성장사회를 담보로 하는 것이다. 그 실현이 무산된 지금 그 가능성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지은이는 경제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성장사회만큼 최악의 것은 없다고 말한다. 실업, 빈부 격차의 증대, 극빈곤층의 구매력 저하,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하는 사회·보건의료·교육·문화 영역에 이르는 복지정책의 포기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전히 '성장'이 정치의 우선적 주제이고 선거의 미끼이며 불평등의 정당화인 사회에서 '탈성장사회'라는 화두는 좀 널리 공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주 단순하다. 표지에 인용된 라투슈의 말은 이렇다. "내가 성장에 반대하는 이유는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사람들은 행복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어젠다로 삼아볼 만하다...

 

14.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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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으로 이본 셰라트의 <히틀러의 철학자들>(여름언덕, 2014)을 고른다.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돌베개, 2014)에 이어서 히틀러 관련서가 또 나온 셈인데, 한두 권 더 나온다면 '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저자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 학자로 보이는데, <히틀러의 철학자들> 외에 <아도르노의 긍정 변증법>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인종주의, 국수주의, 대량학살에 대한 무관심. 이런 태도는 세상이 철학자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철학자들이 수준 높은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고 살아가길 바란다. 그러나 히틀러와 동시대를 살았던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슈미트 같은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이 노골적으로 나치를 옹호했을 뿐 아니라 반대자 탄압, 유대인 대학살,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온갖 구실을 제공했다는 사실에 그런 환상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만다. 나아가 칸트, 쇼펜하우어, 헤겔, 포이어바흐, 니체 같은 그 이전 세대의 걸출한 철학자들이 개인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곡해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발언으로 히틀러와 나치의 인종 청소 정책에 중요한 사상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오용과 남용의 책임까지 철학자들에게 물릴 수 있느냐는 반론이 가능한데(발언의 거두절미한 인용이 대표적이다), 정통적인 철학서를 저술한 경력의 저자이기에 입바른 소리 이상의 근거를 갖고 있으리라 믿어본다.

 

 

'히틀러와 철학자들'이란 문제는 기본적으로 '하이데거나 나치즘'이란 문제의 재탕이자 확장으로 보인다. 업그레이드된 내용이 있을지 궁금하다...

 

14.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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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난해 일본 신서대상(新書大賞) 1위작이라는 오구마 에이지의 <사회를 바꾸려면>(동아시아, 2014)이 묻고 답한다. 물론 일본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는다(오구마 에이지의 책으론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이 나와 있다).

 

현재의 사회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리고 정치가에게 맡기면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치에 관여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데모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어쩌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략 이런 분위기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회는 과연 바뀌는 것일까?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 책에서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공유가능한 문제의식이라 여겨진다(그런 처지에서 보자면 일본이라는 나라나 우리나 별반 차이가 없다). 책소개를 보니 저자가 제시하는 대답은 대략 이런 것이다.

저자는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직접행동과 참여를 강조한다.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저자는 “데모를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한다. 대화를 해서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하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회, 대화가 가능한 관계를 만들 수 있고, 참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하면 참가할 수 있는 사회, 참가할 수 있는 자신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책은 단순히 데모를 비롯한 사회운동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태동부터 그것이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로 발전된 역사적 흐름을 짚으며 사회운동의 가능성과 행동을 모색한다. 근대과학·철학·정치·경제 등 다양한 방면의 사상의 출현과 발전,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찾으며, 인문학적으로 깊은 성찰을 제시한다. 

 

저자의 문제의식과 맥락을 같이하는 책들을 더 참고할 수 있을 터인데, 무엇보다도 '직접행동'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책들을 꼽아볼 수 있겠다. 직접행동의 경우에는 에이프릴 카터의 <직접행동>(교양인, 2007)이 압도적인 저작.

 

 

민주주의 관련서로는 '개념사' 시리즈 가운데, 이승원의 <민주주의>(책세상, 2014)로 개념을 잡고서 시야를 확장해봐도 좋겠다. 하승우의 <풀뿌리 민주주의와 아나키즘>(이매진, 2014)은 한국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모색하는 책. 바바라 크룩생크의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갈무리, 2014)는 '민주주의와 통치성'이 부제. 이론적인 저작이긴 하지만, 문제의식은 <사회를 바꾸려면>과 통할 수 있을 듯싶다. 소개는 이렇다.  

 

권력 이론과 주체성 생산이론을 바탕으로, 크룩생크는 민주적인 개인은 스스로 통치하는 시민으로 창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시민의 발명은 자발적 결사, 개혁 운동, 사회복지 프로그램 같은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실천에서 비롯한다. 그녀가 주장하듯이, 우리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는 권력에 대한 우리의 자율성이 아니라, 오히려 예속성의 지표이다.(...) 사회 정책과 실천에 관한 구체적 지식을 포스트구조주의와 페미니즘 이론과 결합함으로써,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는 민주적인 시민과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재창출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원저의 부제는 '민주시민과 기타 주체들'이다. 지방선거를 얼마 남겨놓지 않았는데, 학습 삼아 몇 권 읽어봄직하다. 독서는 사회를 바꾸기 위한 최소 실천 가운데 하나다...

 

14.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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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마셜 살린스의 이름을 알게 된 건 가라타니 고진 덕분인 듯한데(그래서 대표작 <석기시대 경제학>까지 구입해놓은 기억이 있다), 그의 책이 처음 번역되었다. <역사의 섬들>(뿌리와이파리, 2014). 처음 소개되는 만큼 '이주의 발견'에 값하지 않을 수 없다. 궁금하기도 하고(내친 김에 <석기시대 경제학>도 번역되길 바란다). 어떤 책인가.

 

지은이는 "가난은 재화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하며 수렵채집사회를 '최초의 풍요로운 사회'로 그린 <석기시대 경제학>으로 널리 알려진 인류학계의 거장이다. 1985년 저작인 이 책 <역사의 섬들>의 서장에서 그는, 자신의 과제가 역사학과 인류학의 고전적 경계를 허물고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경험으로써 역사 개념을 깨뜨리는" 데에 있다고 밝힌다. 역사적 사건이란 무엇인가? 역사와 구조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상징적 행위는 의미의 문화적 도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다섯 개의 강연, 그리고 책 전체의 문제의식과 논지를 정리한 서장은 이와 같은 질문들을 중심축으로 회전한다.

역사학에 대한 인류학자의 도전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구도로 흥미롭게 읽어볼 수 있겠다.

 

 

아예 역사학과 인류학이란 주제를 다룬 <투키디데스에 대한 변명>이란 책도 있다(제목의 apologies는 정확하게 사과인지 변명인지, 아니면 해명인지 모르겠다). 투키디데스(투퀴디데스)야 물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투키디데스다. 인류학자의 시각이 역사학자의 관점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저작으로 보인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새삼 질문하는 책으론 앤 커소이스와 존 도커의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작가정신, 2013)와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싶다. <역사는 허구인가?>가 원제인 책이다...

14. 0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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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으로 테드 W. 제닝스의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그린비, 2014)를 고른다. '이주의 발견'은 두 권까지 책이 나온 저자들 가운데 고르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제닝스의 경우엔 <예수가 사랑한 남자>(동연, 2011)가 먼저 소개된 바 있다(저자명이 '테오도르 W. 제닝스'로 표기됐다).

 

 

신학자인 저자는 성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퀴어신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다는데, <예수가 사랑한 남자>가 그와 관련된 책이다.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는 철학계에서 바울의 사상이 중요한 주제로 부상할 때(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보라), 같이 거명되곤 했던 책이다.  

스무 세기에 가까운 시간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성을 띤 사유의 마주침을 보여 주는 사상가로서 데리다와 바울을 ‘새롭게’ 소개한다. 데리다와 바울의 마주침을 주선하기 위해, 저자는 이들의 사유로부터 ‘(율)법’과 ‘정의’라는 주제를 소환해 내며, 이들을 (율)법 ‘너머’의 정의를 사유한 사상가로서 그려 낸다.

그래서 부제가 '정의에 대하여'다. 면밀하게 읽어내려면 한달은 족히 걸릴 만한 책이지만, 여하튼 데리다의 독자나, 신약성서의 독자들에게 지적 자극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줄 듯싶다.

 

 

말이 나온 김에 '두 권의 저자'로는 푸코 연구자 프레데리크 그로도 꼽을 수 있다.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편집자로도 유명한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책세상, 2014)이 최근에 나왔는데, 공저이긴 하지만 <미셸 푸코 진실이 용기>(길, 2006)가 먼저 나온 바 있다(하지만 절판된 모양이다).

프랑스 파리12대학 철학 교수이자 미셸 푸코 연구자로 잘 알려진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라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보여준다. 그는 걷기를 철학적 행위이자 정신적 경험이라고 보고, 걷기가 우리 몸과 마음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우리 삶에 얼마나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걸으려면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을 취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고찰해나간다.

 

한편, 일본의 푸코 연구자 사토 요시유키의 책도 <권력과 저항>(난장, 2012)에 이어서 이번에 한권 더 나왔다(저자는 푸코의 <말과 글> 일어판 공역자로 참여했고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을 일어로 옮겼다 한다). <신자유주의와 권력>(후마니타스, 2014).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가 부제다. 어떤 책인가.

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로 환원하고, 치열한 경쟁이 모든 사회적 관계 곳곳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논리. 모든 안정적인 것을 불안정하게 흔들어 놓으며, 모든 견고한 것들을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는 정치. 개개인이 놓여 있는 ‘사회적 환경’ 또는 그 삶의 규칙에 작동을 가함으로써, 그를 둘러싼 환경을 생존 경쟁의 시장으로 만드는 권력. 이 책은 그것을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라 부른다. 노동시장 정책에서, 형벌 정책, 마약 관리에 이르기까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속에서 사회는 어떤 논리에 따라 변화해 나가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지, 우리는 이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지가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

<권력과 저항>의 부제가 '푸코,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였는데, <신자유주의와 권력>에서도 알튀세르와 버틀러의 복종화/주체화를 보론에서 더 다루고 있기도 하다. 저자의 관심과 사유 범위를 짐작하게 한다...

 

14. 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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