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문학' 강의차 코맥 맥카시를 읽고 읽느라 몇 권의 책을 재주문하고 또 새로 주문했다. <로드>(2005)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6)는 영화로 먼저 접한지라 소설은 이번에 읽었다. <카운슬러>도 영화로만 본 경우. 이 시대 미국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터라 언젠가 강의에서 다루려고 벼르던 터였는데, <로드>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노년작을 먼저 읽게 되었다. 


 

<로드>로 퓰리처상도 수상했지만 1933년생이 작가가 70이 넘은 나이에 발표한 작품이기에 '노익장'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전성기의 대표작들은 따로 있기에 내년쯤에 기회를 보아 그 작품들을 읽어보려고 한다. 가령 <핏빛 자오선>(1985)가 대표적이다. '<타임>이 뽑은 100대 영문소설'에도 들어간 작품이다. 더불어 1965년에 데뷔작을 발표한 매카시의 중기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초기작은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에 강의에서 다룰 수 있는 건 <핏빛 자오선>과 함께 '국경 3부작' 정도다. <모든 예쁜 말들>(1992), <국경을 넘어>(1994), <평원의 도시들>(1998)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국경을 넘어>가 현재 품절된 상태다. 바람직한 건 <평원의 도시들>까지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다시 나오는 것. 그래야 좀 구색이 맞겠다. 그렇게 새로 나오지 않는다면, 아마 강의에서는 <핏빛 자오선>과 <모두 다 이쁜 말들> 두 편만 다루기 쉽겠다. 


 

극 형식의 <선셋 리미티드>나 <카운슬러> 등의 시나리오는 참고 작품일 뿐, 강의 거리는 아니다(<정원사의 아들>이 그의 첫 시나리오였군). 정리하자면, <로드>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외에 매카시의 작품을 더 다룬다면, <핏빛 자오선>과 <모두 다 예쁜 말들>이 일순위라는 것. 그리고 <국경을 넘어>와 <평원의 도시들>이 그 다음 순위의 후보가 되겠다. 그의 책이 더 소개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17.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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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웅진지식하우스, 2017)가 리커버판으로 다시 나왔다. 리커버판이란 표지와 본문 디자인을 바꾸어서 다시 낸 책을 말한다. 물론 내용은 그대로다. 그러니 새책이면서 이미 읽은 책인 셈. 



초판은 2009년 가을에 나왔고, 그해 봄에 나도 첫 책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를 펴낸 터였다. 이제 8년이 지난 셈인데,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이미 절판을 앞두고 있다(장기 품절 상태). 2009년에도 물론 <청춘의 독서>는 베스트셀러였고, 베스트셀러란 어떻게 쓰는 것인가 시범을 보여주는 듯했다. 지금 다시 봐도 젊은 세대에게 그대로 꽂힐 법한 내용과 문체를 갖추고 있다. 다만 '청춘'에 반응할 나이가 아닌 나로선 책에서 다뤄진 러시아문학 작품에만 눈길이 간다. 도스토예프스키(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푸슈킨(푸시킨)의 <대위의 딸>, 그리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등이다. 



'청춘의 독서'는 20대에 읽은 책을 다시 읽어본 독서록이다. 자연스레 번역본이 달라지는데, <죄와 벌>과 <대위의 딸>은 열린책들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민음사판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참고문헌이다. 이 가운데 <죄와 벌>에 대해서 유시민 작가는 '날카로운 첫 키스와 같은 책'이라고 불렀다. 



<청춘의 독서>와 함께 채사장의 <열한 계단>(웨일북, 2016)을 떠올린 건, 채사장판 '청춘의 독서'이면서 똑같이 <죄와 벌> 이야기로 서두를 떼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읽은 독후감을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존재임을,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결연한 의지와 실천이 따라야 함을 깨달았다." 


세대를 달리하지만 똑같이 젊은 세대 독자에게 강력한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두 저자의 독후감을 비교해보는 게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픈 것은 <죄와 벌> 정도 분량의 장편소설은 완독한 효과다. 장편소설을 읽어야 하는 필요와 의의에 대해서 요즘 강의에서 자주 언급하곤 하는데, <청춘의 독서>와 <열한 계단>을 그 실례로 삼아도 좋겠다 싶다. 현재의 중고등학생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당신의 인생을 바꿔주는 건 열 권의 문제집이 아니라 한권의 장편소설이라고(우리말에서 소설이 단편과 장편을 가리지 않고 지시하기에 굳이 '장편소설'이라고 부른다). 그걸 읽어내는 경험이라고.


가령 국어교과서에 <무정>이나 <삼대> 같은 근대 장편들이 (일부)수록되어 있(었)지만 실제 그 작품을 완독한 학생은 거의 없다. 원리대로 말하자면 <청춘의 독서>와 <열한 계단>을 읽은 독자가 이제 읽어야 하는 것은 <죄와 벌>이다. 그 독서의 경험은 대체 불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7월은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기도 하므로, 지금 손에 든다면 책에 빠져 들기에도 좋다.  



채사장이 읽은 <죄와 벌>은 민음사판이고, 내가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19세기>편에서 인용한 것은 을유문화사판이다. 어느 쪽이든 무방하다. '청춘의 독서'를 앞두고 있는 젊은이들이 책의 바다에 입수하도록 해준다면...


'이주의 저자'를 적으려고 서재에 들어왔다가 딴소리만 적었다. 일단은 조금 쉬어야겠다...


17.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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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기행에서 만난 윤동주에 대해서는 짧게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보다는 조금 길게 다시 적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달 '출판문화'(618호)에 실은 '책읽는 세상' 꼭지다. 윤동주의 시가 한국문학사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자세히 다루고 싶다.

 

 

 

출판문화(17년 6월호) 윤동주를 찾아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과 애송시를 꼽으라면 윤동주와 그의 ‘서시’가 단연 유력하다. 그의 이름 ‘동주’를 우리는 마치 그의 호처럼 부른다.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펴낸 적이 없는 시인이 사후에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사랑받으리라고는 동주 자신은 물론 그의 동시대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아니 ‘별 헤는 밤’의 마지막 구절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는 사후의 이런 영예에 대한 예견으로 읽을 수 있을까.


올해는 일제 말기 일본 유학중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해방을 불과 수개월 앞두고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짧은 생애를 마친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2월 30일생이므로 그에 대한 기념은 겨울에 이루어질 테지만 얼마 전 나는 조금 이르게 그의 흔적을 찾아서 ‘100주년 기념판’으로 나온 <윤동주 전집>(문학사상사, 2017)을 끼고 일본 교토에 들렀다. 교토의 도시샤(동지사) 대학은 동주가 일경에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적을 둔 곳으로 교정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1995년 그의 50주기를 맞아 세워진 것으로 육필로 쓰인 대표작 ‘서시’가 거기에 새겨져 있다. 하늘은 맑았고 아직 학기중이었지만 교정은 조용했다. 함께 문학기행에 나선 일행과 ‘서시’를 낭송한 다음에 윤동주의 하숙집터로 걸음을 옮겼다. 현재는 교토예술대학의 기숙사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도로변인 그곳에도 ‘서시’를 새긴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 있다.


1942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동주는 일본 유학길에 나서 당초 도쿄의 릿쿄 대학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만에 그만두고 그해 10월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한다. 교토의 하숙집에서 대학까지는 걸어서 다녔다고 하는데 어림에 30분은 걸렸음 직했다. 이어서 찾은 곳은 1943년 7월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시모가모 경찰서인데, 여전히 경찰서 건물로 쓰이고 있었지만 옛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던 시인이 끝내 그 아침을 보지 못하고 숨진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고 숙연해질 따름이었다.

 


문학기행 둘째 날 아침에 우리가 찾은 곳은 교토 인근의 우지였다(교토부 우지시다). 시인이 1943년 5,6월경에 도시샤대 학우들과 같이 송별회차 나들이를 갔던 곳으로 이들은 현수교 다리 위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다리 난간을 배경으로 한 이 사진이 그가 남긴 마지막 사진이다. 우리 일행도 우지 강을 따라 같은 다리까지 걸어가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우지 강변에 올 10월까지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가 세워진다. 그의 시 ‘새로운 길’이 육필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질 예정이다. 아마도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면 더 많은 한국인들이 우지를 찾게 될 듯싶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로 시작하는 동주의 시 ‘새로운 길’은 한•일간 ‘기억과 화해’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거슬러 올라가면 시인 윤동주의 출발점이었다. 그가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펴내려고 했던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은 ‘서시’를 포함해 19편의 시를 수록할 예정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일찍 쓰인 시가 바로 1938년 5월에 쓴 ‘새로운 길’이다. 애초에 <병원>이라는 제목을 가질 뻔했던 그의 자선 시집은 ‘서시’가 씌어진 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제목이 바뀐다. 창작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새로운 길’에서 ‘별 헤는 밤’에 이르는 여정이다. ‘별 헤는 밤’을 탈고한 뒤 동주는 비로소 ‘서시’를 쓴다. 시집의 서언으로 쓴 시이다. ‘서시’를 쓴 이후 시인은 7편의 시를 더 남겼다. 


윤동주의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전집에 수록된 그의 시는 습작과 유고까지 포함하여 모두 97편이다. 그런데 시인의 의도를 존중하자면 이 가운데 19편이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시다. 그리고 이후에 쓰인 시 7편 가운데 날짜가 적힌 시 6편이 거기에 추가될 수 있겠다. 이 6편 가운데 마지막 시가 ‘쉽게 씌어진 시’로서 주목에 값한다. 도합 25편이다. 넓게 보자면 97편의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윤동주 시’는 이 25편에 의해서 대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기적으로는 1938년 5월부터 1942년 6월까지 4년 남짓의 기간 동안 쓰인 시들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도 핵심은 ‘서시’를 전후로 한 시들이다. ‘서시’에 앞서 ‘또 다른 고향’과 ‘별 헤는 밤’ 등이 있고 그 뒤에 ‘간(肝)’과 ‘참회록’이 놓인다. 이 중 ‘간’은 친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시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윤동주는 자선시집에 실릴 19편 가운데 마지막인 ‘별 헤는 밤’을 1941년 11월 5일에, 그리고 ‘서시’는 11월 20일에 썼다. 그런데 연희전문의 스승으로서 그의 시고를 받아본 이양하 선생은 몇 편의 시가 검열에 통과될 수 없을 뿐더러 신변에 위험이 올 수 있다고 충고하여 동주는 시집출판을 단념한다. 11월 29일에 쓰인 ‘간’은 오래 염원하던 시집 출간 좌절에 대한 울분을 토로한 것이다.

 


이미 ‘별 헤는 밤’에서 시인은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함께 프랜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시인들의 이름을 나란히 호명한 바 있다. 잠이나 릴케 등의 시를 윤동주는 일어로 번역된 시집으로 읽었다.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가 오무라 마스오의 지적대로 윤동주의 시세계 형성에는 한국문학과 함께 “1930년대의 일본문학 및 일본어를 통해 수용된 서구문학”이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확인하게 해주는 시가 ‘간’이기도 하다. 서구문학 가운데 동주는 특히 릴케, 발레리, 지드 등을 탐독했는데, 그의 장서 중에는 지드 전집도 들어 있었다. 아마도 그가 읽은 일어판 지드 전집에는 <잘못 결박된 프로메테우스>(1899)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1960년대에 나온 휘문출판사의 한국어판 앙드레 지드 전집에는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떼>라는 제목으로 수록돼 있다).


우화적인 지드의 소설은 1890년대 파리의 한 다방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제우스가 부유한 은행가로 등장하고, 프로메테우스는 무면허 성냥 제조 혐의로 구속된다. 이야기의 발단은 제우스가 아무런 이유 없이 한 사람(코클레스)의 따귀를 때리고 다른 한 사람(다모클레스)에게는 500프랑의 돈을 익명으로 부친 데서 비롯한다. 여기서 무상의 행위, 즉 아무런 동기나 이유를 갖지 않는 행위가 작품의 모티프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독수리를 데리고 다니는데, 이 독수리는 그의 양심의 상징이다. 감옥에서 밤낮으로 뜯기면서 독수리는 살찌는 대신에 그는 점점 말라간다. 이윽고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 대하여’란 주제로 대중강연을 한다. 저마다 자신의 독수리를 가져야 하며 독수리를 사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강연을 들은 다모클레스는 자신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500프랑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병이 들고 결국엔 죽고 만다. 다모클레스의 장례식에 뚱뚱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나타난 프로메테우스가 다모클레스의 죽음 덕분에 자신의 독수리를 죽였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과 함께 독수리 요리를 맛있게 먹는 걸로 이야기는 마감된다. 


흥미로운 것은 윤동주의 ‘간’에서 제시되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형상이 바로 지드의 프로메테우스와 닮았다는 것이다(“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단, 지드의 프로메테우스가 양심의 투사(投射)였던 독수리를 죽임으로써 일종의 카니발적 결말을 유도하는 것과는 달리, 윤동주의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의 부리처럼 예리한 자아의식과의 긴장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음으로써 내면으로의 끝없는 침잠을 감내한다. 윤동주만의 새로운 프로메테우스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윤동주 읽기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17.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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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1956)를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나 금각사의 존재가 궁금하여 이미지를 찾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더 나아가 실제로 교토에 있는 실물을 한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 마련인데, 일본문학기행 둘째날이었던 어제 기대를 이루었다. 워낙에 유명한 명소이다 보니(어제 오전에 들른 은각사에도 관광객이 적지 않았지만 금각사에 비하면 한적한 편이었다), 사람이 미어터질 정도였지만 홀연한 금각의 광채는 빛이 바라지 않았다. 다만 갑작스런 대면은 뭔가 거리감도 갖게 했다. 실제로 작품에서 주인공에게 금각과의 첫 대면은 싱거운 것이었고 금각의 아름다움은 그 이후에야 그의 기억과 상상 속에서 증폭된다. <금각사>를 다시 읽을 때에도 그런 효과를 기대해봄직하다.

이번에 가방에 챙겨간 것은 한동안 품절되었다가 새 장정으로 다시 나온 <금각사>(웅진지식하우스, 2017)다. 나로선 3종의 번역본을 모두 갖고 있는 셈(영역본까지 포함하면 4종이다). 미시마의 역작인 만큼 작품에 대한 해석은 자세한 검토과정을 필요로 한다. 두어 차례 강의한 작품이지만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탐미파 작가들과 묶어서 언젠가 강의해서 다시 읽어볼까 한다. 금각사 사진을 같이 올려놓는다. 어느 날에도 금각사는 금각사일 테지만 이건 어제 오후의 금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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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바깥의 독자들에게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면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를 빼놓을 수 없지만, 당시 일본의 최고 인기 작가는 시바 료타로였다. 작품세계도 ‘국민작가‘의 타이틀에 더 부합하는 이는 시바 료타로(1923-1996)이다. 둘다 오사카와 연고를 갖고 있어서, 짧은 문학기행의 마지막날 일정은 가와바타의 생가터를 찾고 시바의 기념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생가터에는 ‘가비‘가 세워져있는데 현재 아파트가 건축중이어서 공사장 칸막이 사이에서 생가터임을 알려주는 비석을 찾을 수 있었다. 시바 료타로 기념관은 유명한 건축가 안도 타다오 작품으로도 기억됨직한데 명불허전의 공간감을 보여주었다. 내부촬영이 금지돼 있어서 출입구쪽 사진을 올려놓는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은 대부분 대하역사소설인데 전국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과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주종을 이룬다. 나로선 <언덕 위의 구름> 같은 소설에 관심이 있지만 절판된 지 오래고 다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기념관에서 보니 영어판으로는 네권짜리로 번역돼 있다). 나중에라도 다시 나오면 강의에서도 다뤄보고 싶다. 오후에 오사카성을 둘러보고 일행은 현재 간사이공항으로 이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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